#. 제로피시님의 글을 제 나름으로 간략히 검토합니다.







블로그는 전통 미디어를 대체할까?
- 제로피시님의 글을 읽고








0. 제로피시, 블로그가 기존 미디어를 대체한다고?
http://www.psnnet.net/blog/entry/blog-cant-beat-old-media



1. 글 요약 (매우 짧은 글이라서, 최대한 길게 인용, 발췌, 요약)

ㄱ. 과연 그럴까?

ㄴ. 블로그는 개인의 관심사가 올라온다. 기존 미디어처럼 편협하기도 하고, 기존 미디어보다 훨씬 카오스틱 하다. 블로그는 무엇보다 '주관적'이다. 필요한 건 '가려읽기'다.

ㄷ. 물론 전문적인 블로그도 많다. 문제는 옥석을 가리는 거다.

ㄹ. 결론. 제대로 된 뉴스를 위해 수많은 블로그를 가려서 구독해야 한다면, RSS 리더에 능숙한 블로거가 아닌 일반인은 '제대로' 구독할 수 있을까? 

ㅁ. 여담. 나도 많은 블로그(분야별 전문블로그)를 구독하지만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문과 잡지를 절독할 수 없다.

(위 문장들은 원문을 최대한 살린 문장들이다)



2. 글을 쓰는 동기

개인적으론 제로피시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굳이 이런 글도 쓰는거고.
그러니 제로시피님이 아닌 (내가 모르는 어떤 낯선) 블로거가 이런 글을 썼다면, 이 글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군, 하면서 넘겼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솔직히 그렇다.

각설하고 이하 제로피시님의 '예언'을 검토한다.



3. 블로그는 전통 미디어를 대체할 것인가?

ㄱ. 대체할까?

그걸 누가 확정적으로 진술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이것 하나는 말할 수 있다.
블로기즘은 저널리즘의 보완재나 대체재의 성격을 모두 갖지만, 결국은, 궁극적으론, 블로기즘은 저널리즘의 영향력을 압도하거나, 혹은 거의 대등한 수준으로 올라설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이건 내 주관적인 추론이고, 낙관적인 희망에 불과하다.
여기에 어떤 현실적인 근거들을 일목요연하게 풀어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내 내면의 목소리는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게 나에게는 진실이다(블로그 시대의 도래와 종이신문의 미래).

ㄴ. 블로그는 기존 미디어처럼 편협하기도 하고, 기존 미디어보다 훨씬 카오스틱 하다. 그리고 '주관적'이다.

이건 좀 알 듯 모를 듯 한 지적이다.
문장이 너무 짧고, 또 함축적인 표현들을 써서 그렇다.

암튼 위 지적에 의한다면
A - 블로그와 기존 미디어(가령 신문)은 편협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갖고,
B - 블로그는 잡다한 관심의 편차를 갖는 포스트들이 올라오기 때문에 카오스틱하다는 점에서는 차별성을 갖는다.

a. 신문의 예를 들자면, 위 '편협하다'가 당파성을 이야기하는 건지 어떤지는 몰라도, 블로그와 기존의 미디어는 모두, 거칠게 말하자면, '주관적'이다. 적어도 우리나라의 언론환경을 판단재료로 삼는다면 그렇다.

우리나라 전통 미디어들이 금과옥조로 너나없이 내세우는 불편부당과 객관성의 신화는 말그대로 신화에 불과하다. 그걸 상징하는 매체는 물론 조선일보지만, 한겨레에도 여기서는 예외가 아니다. 당파성의 차원에서, 그것을 주관성이라는 말과 정확히 등가로 교환할 수는 없겠지만, 블로그나 전통미디어, 가령 종이신문이나 방구나 뽕이다.

b. 블로그는 카오스틱하고, 기존 미디어는 전통적인 카테고리에 의해 정연하게 분류되어 있다는 말인 것 같은데... 뭐, 이건 그냥 넘기자. 뭘 말하고 싶은건지 솔직히, 정확하게 잡히지 않는다.

ㄷ. 물론 전문적인 블로그도 많다. 문제는 옥석을 가리는 거다.

위 명제에서 생략된 문맥은 '기존 미디어는 (최소한 상대적으로) 전문적이다'라는 거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스스로에게 질문하면 내 대답은 회의적이다. 솔직히 기존 미디어의 전문성에 대해서는 '그런가?'라는 의문이 머리를 때리는 거다.

그리고 이 지적(덧. 옥석을 가리는 작업)은 기존 미디어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온갖 온오프의 매체들, 전통적인 인쇄기술의 조력을 받는 매체이든, 아니면 종이신문의 온라인버전이든, 타블로이드 황색 매체든, 포털의 위성언론이든.. 간에... 문제는 옥석을 가리는 거다.

ㄹ. 결론. 제대로 된 뉴스를 위해 수많은 블로그를 가려서 구독해야 한다면, RSS 리더에 능숙한 블로거가 아닌 일반인은 '제대로' 구독할 수 있을까? 

이 지적은 RSS가 무지하게 어려운 기술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과연 그런가?
뭐, 솔직히 아직은 그렇게 느껴질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RSS 기술 설정의 편의도는 나날이 높아질 것으로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감수성도 나날이 높아질 것으로 나는 희망한다.

여기에 올블을 비롯한 메타블로그, 그리고 각종의 새로운 서비스들(가령 미투데이나 플레이톡, 스프링노트까지)은 새로운 웹환경, 그리고 뉴미디어 환경에 대한 감수성을 좀더 친화적인 형태로, 그런 감촉으로 바꿀 것으로 나는 기대한다.

현실적인 문제는 포털이다.
이 문제는 너무 심각하고, 너무 복잡하니까..
그리고 내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판단의 재료도 부실하니까 이쯤하자.

ㅁ. 여담. 나도 많은 블로그(분야별 전문블로그)를 구독하지만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문과 잡지를 절독할 수 없다.

이 지적은 신문과 잡지를 읽으면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논리가 그 안에 내재되어 있다. 정말 그런가? 글쎄... 조선일보랑 월간조선, 새롭게 창간(이거 재창간인가? 암튼)한다는 주간조선 읽으면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아다시피 종이매체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미디어, 조선미디어의 '상품'들이다.

반대 편에서 말해보자.
한겨레신문, 한겨레21, 인터넷한겨레, 씨네21, 이코노미21, 매거진 T.. 이런 한겨레 미디어 '상품'들을 소비하면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아다시피 그래도 가장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한겨레미디어의 언론 상품들이다.

전문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가치중립적인 성격, 뭔가 대단한 고급의 정보가 그 안에 있을 것 같다는 환상은 나는 그다지 인정하기 어렵다. 저널리즘이 민주주의 시민 사회에서 그 사회의 성원들이 가치있게 논의하고, 관심을 갖고, 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아이템들을 '최소한의 객관성과 사실'원칙에 의해 '신속하게' 보도 하는 것을 생명으로 하다는 전제를 인정한다면,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이런 최소한의 사명, '객관성과 사실에 대한 존중' 그리고 '신속성'을 만족하는 매체는, 적어도 내 주관에 의한다면, 없다.

여기에는 조선 미디어는 물론이고(누누이 강조하지만 조선일보의 저널리즘은 반저널리즘이다), 한겨레 미디어에도 실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물론 저널리즘을 표방하는 방송과 종이신문의 영향력은 아직은 압도적이다.
그리고 온라인의 영역에서 그들의 영향력과 거의 대등한 수준에 도달한 포털은 [덧. 메모장에서 옮기는 과정에서 누락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어서 씁니다. ㅡㅡ; ] 미끼질과 연예인 뒷담화에 온통 몰두하고 있다. 물론 그걸 실질적으로 생산하는 것은 포털의 위성언론이긴 하지만. 포털은 그들의 '보스'고 그런 곰팡이 위성언론이 자라나는 숙주다.



4. 결론

반복하지만, 제로피시님의 글에 대해 내가 굳이 반박(검토)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우선은 제로피시님에게 개인적인 호감이 있어서이고(이게 결정적이고),
더불어 이 글이 올블 [나의 추천 글]이기 때문이고,
또 상당한 추천을 받은 글이라서 그렇다.

거기에 떡이떡이의 댓글논평도 이 글을 쓰게 한 이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대체(replacement)는 결코 일어날 수 없죠. 가장 좋은 형태는 '보완(complement)'이죠. 블로그가 대안 저널리즘의 일부를 형성할 순 있지만, 그 자체가 저널리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 떡이떡이, http://www.psnnet.net/blog/450#comment4636

왜 위험한지..
아무리 머리를 갸우뚱 좌우로 흔들어봐도 잘 모르겠다.
떡이님이 기자라서 위험하다고 한걸까? (설마.. ^ ^)

블로그의 미디어적 성격을 강조하고,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물적 매개들이 발전한다면, 저널리즘의 영토를 블로기즘은 잠식할 것으로 나는 예상한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될는지는 물론 알 수 없다. 여기에서 가장 큰 변수는 기존의 종이매체라기 보다는, 포털이다.

매체소비의 상대적 불변이론(참조 포스트 : 블로그 소비의 상대적 불변이론 1.  )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면, 적어도 방송, 특히 종이신문은 심각한 정도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고 나는 예상하는 바다. 블로깅하면서 기존 미디어의 소비(그 시간이나 비용 모두)는 질적으로 그 수준이 높아질 가능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 절대적인 소비량(비용과 시간)은 줄어들 수 밖에는 없을 것으로 추론하기 때문이다.

참조. 아거님은 이에 대해

"기술 통합과 융합에 의해 급변하는 매체 시장에서 이른바 올드 미디어는 뉴미디어에 의해 대체되지 않고 꿋꿋이 버티고 있다는 점에서 일단 매체 소비의 불변 이론은 현실 설명력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일단 전제 자체가 틀렸다. 한 가구의 매체 소비 규모는 일정한 파이라는 전제가 틀린 것 같다."

라고 지적하면서, 상대적 불변 이론 주창자들이 간과하는 '시간' 요소와 산업과 문화적 환경 변화에 따른 '파이의 증가'에 대해 지적한다.

"맥콤스의 상대적 불변 이론 주창자들이 늘 간과하는 것이 바로 매체에 소비되는 "시간"의 비용이다. 개인의 웰빙 지수로 따져보자면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 같은 이 소비적인 그리고 파편화된 정보화 시대에 기형적으로 증가한 각종 매체에 소비하는 시간까지를 함께 고려하면 대중매체와 대중 소비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개인들은 수입 규모에서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매우 불균등한 비율의 "매체 산업 지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즉, 아거님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결국 미디어 소비라는 전체 파이의 크기는 맥콤스가 말한대로 일반 경제의 규모에 따른 균등한 크기를 유지하는 정상적인 혹은 합리적인 파이가 아니다. 과거에 우리가 먹었던게 초코파이라면 지금은 Jay Leno도 독식할 수 없을만큼 커다란 파이가 되어버렸다".

- 아거, 블로그 소비의 상대적 불변이론 2. 중에서  

블로거들은 스스로 쓰기 위해서 많은 자료들을 구해서 읽고, 또 포스팅의 재료로 삼겠지만, 그런 블로거들의 수는 여전히 소수로 존재할 것이고, 그들의 영향력이 증대한다면, 그것은 다수 독자들의 기존매체에 대한 의존도를 상당히 낮추는데 기여할 것이기 때문이다 으로 나는 예상한다. 그들은 블로거 전체로서는 수소일지 몰라도, 기존의 전통 저널리스트의 수보다는 그 부피에서 절대적으로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소수의 블로거(그렇지만 기존의 저널리스트 보다는 훨씬 큰 부피를 갖는)들의 포스팅의 상당부분은 '매체 비평'의 요소를 갖게 될 것으로 나는 생각하는데, 이는 기존 저널리즘의 권위에 심대한 타격이 될 수도 있을 것으로 나는 예상한다.

나는 그런 블로기즘의 정립과 영향력 확대가 지금 대한민국 저널리즘이 보여주는 저열한 상업주의와 편협한 당파성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 자리하기를 기대하며, 또 민주주의 시민사회의 일상적인 의식 시스템의 든든한 하부를 차지하기를 기대한다.



이상이다.




p.s.
너무 날림으로 썼구나. ㅡㅡ;



#. 오늘 아거님의 멋진 블로그 리뷰를 읽고, 보석을 만났습니다. 몇 가지 단상들. 그리고 간단한 [미닉스 블로그] 소개.


Ⅰ. 블로그 리뷰어로서의 아거
아거님은 스스로도
블로기즘과 저널리즘, 그리고 각종의 IT이슈, 미디어 이슈에 대한 최고수준의 포스팅을 하시지만, 블로그 리뷰어로서의 역량도 매우 뛰어나다. 어떻게 저런 보석같은 블로그를 발견했을까 문득 문득 감탄하곤 한다. 솔직히 아거님의 소개가 아니었다면, 내가 오늘 어떻게 미닉스 블로그를 만날 수 있었겠는가?


Ⅱ. [미닉스 블로그]에 들어서다.
블로거 김인성님께서 운영하는 미닉스 블로그에는 많은 글이 수록되어 있지는 않다. 단지 12편의 포스트들이 있을 뿐이다. 
그 이야기들은 자기가 다루고자 하는 글의 대상과 소재에 대한 애정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꽤 긴 글들임에도 불구하고, 그 긴 글들이 그다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건 그 애정이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매혹일테다. 물론 그는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이렇게 능수능란한, 그리고 담담한 듯 깊이 있는 글은 쉽게 만날 수 없다.  매력적인 블로그를 이렇게 하나 둘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블로깅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 오늘은 정말 보석같은 블로그를 만났다.


Ⅲ. 미닉스 블로그의 카테고리와 글들 
미닉스 블로그의 글들이 등록된 시점을 살펴보면 각 카테고리를 하나씩 만들면서 글을 수록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각 글들의 깊이나 그 바탕이 된 물적 자료들을 토대로 추정해본다면, 이건 즉흥적인 포스팅이 아니다. 이미 심사숙고해서 작성한 글들을 블로그에 등록하고 있는 것 같다.


ⅰ. [하늘엔... 우리 집엔...] : 하늘엔 빛난 별, 우리 집엔 평화

0. 하늘엔 빛난 별, 우리 집엔 평화 0/7 [2007/01/23]
http://minix.tistory.com/1

해당 카테고리를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인상적인 문장들.

도구로써의 컴퓨터에 아내와 자식들이 빠져들지 않도록 힘써왔습니다. 그들이 인터넷에 중독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히려 제가 중독자로 살아 왔습니다.

현대에 있어 수 많은 기계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모든 가정에 평화가 있기를, 언제가는 영접해야 할 지름신의 재림을 온몸으로 방어하고 있는 가장들에게 또한 축복이 있기를.

- http://minix.tistory.com/1 중에서


1. [연재1/7] 빼앗긴 자유 [2007/01/23]
http://minix.tistory.com/2


이 글역시 등록시각을 보면, 첫 글 등록시각과의 간격이 2분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 연재는 이미 모두 작성되어 있을 확률도 있는데.. 정말 궁금하다. 제목에서도 보듯 모두 7편으로 연재될 것 같다. 인상적인 문장들.

도스: 한 사람의 배를 불렸으나 모든 사람의 상상력을 제한했던 운영체계

어느 날 스승이 말했다. “도는 모든 소프트웨어에 존재하느니라”
제자가 물었다
“휴대용 계산기에도 존재합니까?” “그렇다”
“비디오 게임에도 있습니까?” “그렇다”
“도스에도 존재합니까?”
스승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다”
(프로그래밍의 도 4.3)

-
http://minix.tistory.com/2 중에서

위 글에서 도스를 설명하는 부분은 예전에 eouia님께서 [블로그의 도]에서 쓰셨던 그 문장의 느낌과 매우 흡사하다. 얼핏 김인성님께서 eouia님은 아닐까 상상하게 되는 문장. 혹은 한 분이 다른 한 분의 글을 패러디?

4.3
사부가 제자에게 도의 본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도는 모든 블로그안에 구현되어 있느니라, 비록 그것이 하찮은 것일지라도." 사부가 말했다.
"도는 Zeroblog에도 들어있나요?" 제자가 물었다.
"그렇다." 대답이 돌아왔다.
"엠파스 블로그에도 도가 있습니까?" 제자가 물었다.
"심지어 엠파스 블로그에도 들어있다." 사부가 말했다.
"그러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도 도가 있습니까?" 제자가 다시 물었다.

사부는 기침을 하더니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수업은 이만."

eouia, 블로그의 도(The Tao of Blog) - 확장수정 [2005년 12월 26일]
http://eouia0.cafe24.com/blog2/archives/002862.html#2862 중에서.

eouia님의 [블로그의 도]를 오랜만에 다시 읽어본다.  역시나 명문이다.  : )

그 옛날 환경은 열악했으나 사람들은 깨어 있었습니다. 컴퓨터에 관심을 가지고 직접 최적화를 해서 사용했지요. 스스로 프로그래밍을 배워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습니다. (... 중략 ...) 혼돈은 있었으나 열정과 호기심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했었던 초기, 어떤 분야든지 막 태동했을 때 이런 희망과 열정이 타오르지요. (... 중략 ...) 아아 그 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한 번 그런 열정을 태울 수 있다면……

그러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갔고 세상은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컴퓨터 그 자체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유저 인터페이스가 화려해질수록 일반인들은 그로부터 소외됩니다. (... 중략 ...) 인터넷 시대를 맞아 협업의 산물인 프로그램은 팔리지도 않는 것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무도 돈 주고 프로그램을 사지 않습니다. 사이트 홍보용 무료 프로그램들 때문에 셰어웨어는 전멸했습니다. 따로 존재하던 기능들을 운영체계가 모두 먹어 치움으로써 따로 유틸리티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유료 프로그램은 대형프로그램만 남았습니다.


개인용 컴퓨터는 인터넷 단말기로서 작동할 뿐입니다. 하드웨어는 업체간 과당 경쟁으로 인해 필요 이상의 고성능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상이 좋아질수록, 사용자들이 편해질수록, 교육시키고 배우기가 간단해질수록, 정보가 넘쳐날수록, 인간은 프로그래밍 자체로부터 소외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너무나 좋아진 하드웨어 성능과 안정성 때문에 다루는 데 있어 전문가와 초보자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초보자는 검색으로 금방 전문가의 지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답변해 주는 자보다 질문하는 자가 더 우위에 서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청바지 장사: 사용자들이 유통 업체로 넘어 갈 때마다 수수료를 벌어들이는 가격 비교 사이트. 광부가 금을 캐든, 갱도에서 갇혀 죽든 그들은 오늘도 청바지를 팔아 돈을 번다(민노씨 주: 가격비교사이트 이미지에 대한 설명).

정확한 가격을 알고 싶으신가요? 아니 가장 싼 제품을 사고 싶거나 가격대 성능비가 좋은 제품을 원하고 계신가요? 그때도 문제 없습니다. 쇼핑몰들 간의 가격을 실시간으로 비교하여 가장 싼 곳을 알려주는 싸이트가 있으니까요. 잔인한 세상입니다. 또 다른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못하는 단순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그냥 죽어나갈 수 밖에 없습니다.


잘못했을 때 순식간에 매장될 가능성은 있지만 소비자를 위해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 때문에 보답 받을 기회는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가격, 가격, 가격뿐입니다. 인터넷 세상에서 특별한 제품을 독점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마진을 포기하는 극단적인 경쟁만이 유일한 생존 법일 뿐입니다.


단순해진 기계, 간편해진 구입 방법, 완전 경쟁을 통한 최저가 실현…… 이렇게 해서 사용자의 권리는 완성되었습니다.

윈도우 비스타: 마이크로소프트 오에스의 완성, 이제 더 이상의 새로운 운영체계는 없다. 앞으로는 비스타를 기반으로 모듈화된 부분 단위로만 업그레이드를 할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세상은 완전한 윈도우 지배하에 들어가는 것일까?

애플의 반격: 애플에서 만든 이 뛰어난 운영체계인 OSX는 인텔 CPU를 사용할 수 있게 됨으로써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과연 애플이 성공할 수 있을까?

리눅스 데스크탑: 서버 시스템을 장악한 리눅스는 그 완전한 자유도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데스크탑으로의 침투를 시도하고 있다. 운영체계의 유저인터페이스가 완성되어 갈수록 운영체계간의 차이가 줄어들게 되면서 리눅스가 채택될 기회는 증가하고 있다. 최근의 발전 추세를 보면 오히려 리눅스 데스크탑이 더 화려하며 최신 기술도 더 빨리 구현되고 있다.

그러나 효율성과 편리함을 위해서 자유를 반납한 후에 컴퓨터 생활은 오히려 더 힘들어졌습니다. 알 수 없는 문제가 생겨도 스스로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문제가 무엇인지 알 방법도 없습니다.

컴퓨터에 관해서 생각할 때 인터넷 검색과 게임 그리고 문서 작성 이상의 뭔가가 있다고 느낍니다. 좀 더 다른 방식으로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법이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하루 종일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낄낄대고 즐거워하지만 물어보면 뭘 했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컴퓨터를 이용해서 스스로 뭔가 만들어내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서 집에서 컴퓨터를 없애버리면 어떨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중독되지 않고 오히려 컴퓨터를 주도적으로 지배하는 방법을 고민합니다.

그런 노력의 과정에 대한 저의 경험을 쓰려고 합니다. 이 기록이 읽고 계신 분들에게 조금은 의미 있는 것이 되고 아주 약간만이라도 세상을 바꿀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빼앗긴 자유 http://minix.tistory.com/2 중에서


이 글을 읽고 생전에 김현의 일기(행복한 책읽기)가 생각났다.  (희미한 기억이지만 떠올리면) 기계와 기술문명의 발전은 놀랍지만, 이제 인간은 스스로 그 기계와 기술들이 어떤 원리로 작동되는지, 그 메카니즘을 전혀 모른 채로, 그 문명의 이기들을 활용한다. 그 이용과 소비는 그 기계를 완전하게 조율하고, 지배할 수 없는 불안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결국은, 궁극적인 관점에서, 그 기계에의 의존과 비례한 그 기계에 대한 이율배반적 소외를 만들어낸다.


ⅱ. 다시 만들고 싶은 영화들
0. 글을 시작하며 (1) [2007/01/27]
http://minix.tistory.com/3

인성님의 꿈 중 하나가 영화를 직접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나와 같은 꿈을 갖고 있다.

1. 자동차 대소동 [2007/01/28]
http://minix.tistory.com/4


ⅲ. 글되

1. UCC의 영혼들 (연재1/3) [2007/02/03]
http://minix.tistory.com/5

이 글은 UCC에 대해 제작자의 입장에서 쓴 글입니다.

근원을 따져보면 여태까지 유씨씨가 아니었던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는 추억이 된 하이텔 시절부터 우리는 유씨씨를 만들고 즐겨 왔습니다. 아니 우리가 살아가는 것 자체가 다 유씨씨인 것을…

이 글은 광풍처럼 몰아치는 유씨씨라는 유행을 쫓는 동안 우리들이 잃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고찰합니다. 사실 누구나 유씨씨에 대해서 떠들고 있지만 서로 다른 어떤 것에 대해 자기 주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글이 이런 현상을 타개하고 유씨씨에 대한 합의점을 도출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로운 세상에서도 자신을 던져 뭔가 즐길 거리를 만들어낼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작가들은 악플러들을 피해 신비함을 유지할 수 있는 오프라인으로 다 도망가 버렸고 기자들은 전문 지식 없는 글쟁이에 불과하다는 것이 드러나서 더 이상 권위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정치가와 원로들은 연일 헛소리만 해댈 뿐 컴맹 상태를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허접한 것들과 섞이기 싫어 절대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위선은 까발려지고 부당한 권위는 조롱을 당합니다. 그 어떤 것도 허세를 부릴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인터넷에는 평등한 사용자, 우리들만 남았습니다. 결국 우리가 글을 쓰고 우리가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질문하고 우리가 답변합니다. 우리가 웃기고 우리가 웃습니다. 유씨씨, 사용자 제작 컨텐츠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
http://minix.tistory.com/5 중에서

이 글은 3회에 걸쳐 나눠 등록되는 글이다. 아직 1회만이 등록되었는데, 그 1회의 이야기들은 주로 '게시판(BBS)'에서의 체험담을 탁월한 이야기꾼의 솜씨로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그 인식도 매우 깊다. 이 글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 전략...)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만들어내는 순간부터 그 곳은 나를 용납할 수도, 내 작품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곳임이 명확해집니다. 그리하여 이런 나의 유씨씨가 허용되는 곳으로 찾아 가야 할 시간이 다가옵니다. 그 때가 언제인가는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유씨씨에 대해서 열광하는 세상 속에서 오히려 홀로 고독해진 영혼은 그리하여 동호회를, 카페를, 자유게시판을 버리고 어느 날 문득 익명의 공간으로 떠나가게 됩니다.
-
http://minix.tistory.com/5 중에서

그 '익명의 공간'이 어떤 공간일지, 좀더 특정하면 블로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공간인지가 나는 정말 몹시 궁금하다.

ⅳ. 내 안의 사람들

이 글은 누구나 얻을 수 있을 정보를 근거로 쓰는 글입니다. 이 글에 언급된 사람들을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개인적인 접촉을 하거나 근거가 불확실한 뒷얘기를 찾아 다니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냥 알게 된 이야기까지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 카테고리를 소개하는 서설 성격의 글 중에서.

특히나 [내 안의 사람들]에 수록된 글들은 글소재가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 '사람'에 대한 태도가 글에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인성님의 글들은 사람과 그를 둘러싼 세상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거기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애정이 담겨 있다. 이 글들의 감동을 직접 느껴보길 권한다. 특히 아거님께서도 강하게 추천한 [뽀빠이, 아아 뽀빠이]는 조선일보류의 거만한 인터뷰 보다 100만배는 더 감동적이고, 또 거기에 진실을 담고 있다고 나는 감히 단언한다.

인성님께서는 [내 안의 사람들]의 서설 격인 글에서 "이 글은 누구나 얻을 수 있을 정보를 근거로 쓰는 글"이라고 밝히고, "고백하건대 그들의 이름을 빌어서 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신데, 이는 두 가지 점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나는 판단한다.


ㄱ. 특수한 정보원을 갖거나, 혹은 직접 그 인터뷰이를 만날 수 있는 일정한 권력(언론사 기자라거나, 혹은 인맥이 풍부한 저명인사라거나.. 등등)을 갖지 않아도 이미 세상에 있는 그 정보들을 취합하고, 객관적, 이성적으로 분석해서 새로운 진실을 '추론'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
ㄴ. 어떤 글도, 그것이 그저 물건에 대한 소개에 불과한 글이라도, 그 글쓴이, 즉 블로거들의 인격과 세상에 대한 태도를 어쩔 수 없이 반영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1. 오빠 만세 - 박성호편 [2007/02/11]
http://minix.tistory.com/6

2. 장하다 수다맨 - 강성범편 [2007/02/11]
http://minix.tistory.com/7

3. 삶은 계속된다 - 구봉숙편 [2007/02/11]
http://minix.tistory.com/8

4. 그를 기다리며 - 이재훈편 [2007/02/11]
http://minix.tistory.com/9

5. 뽀빠이, 아아 뽀빠이 - 이상용편 [2007/02/11]
http://minix.tistory.com/10

6. 도올, 돌아온 탕아 - 김용옥편 [2007/03/28]
http://minix.tistory.com/11

7. 그녀에게 예의를 - 예지원편 [2007/04/17]
http://minix.tistory.com/12


모두 하나 하나가 보석같은 글들이다.


p.s.
미닉스(인성님)의 글을 좀더 널리 알리는 의미에서.. ^ ^;
이 글은 올블 [나의 추천 글]에 올립니다.



예전에 쓴 글이구요(2000년 이전). 한겨레블로그에 보관했었던 글( 2006/01/24 12:52 )입니다. 한겨레블로그의 공식정책에 대한 제 정책은 제한적 포스팅과 콘텐츠 이전입니다. 그래서 옮겨오는 겁니다. 주로 주말을 이용해서 이전 작업을 할까 합니다. 공개하되 발행하지는 않습니다. 추고는 최소한으로 합니다. 이 글을 한겨레블로그에 등록한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한 필진(다운님)께서 제 다른 글(박정희 시대를 말한다)에 쓰인 '타인/타자'에 대해 질문하신 적이 있었는데요. 이에 대한 답변 성격도 있는 글이었습니다. 위 [박정희 시대를 말한다]도 곧 옮겨올까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닫힌 방 (Huis-Clos, 1944)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1905.6.21~1980.4.15


[사르트르] 닫힌 방(Huis-Clos)
- 유사실존과 타자의 문제



1.“타인은 지옥이다”의 의미에 대하여
2.‘거울’의 의미

<닫힌 방 Huis-Clos>에는 지옥에 온, 그러나 왜 자신들이 지옥에 왔는지를 알지 못하는 세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서로에게 지옥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왜 그들은 서로에게 지옥이 되는가? 먼저 생각해봐야 하는 건 그들은 이미 죽은 존재라는 점이다. 그들은 막 죽어서 지옥에 온 인물들이다. 그들은 더 이상 생성할 수 없으며, 자신의 자유를 행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은 존재이니까. 그래서 지옥에 왔으니까.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비춰볼 수 없다. 즉 지옥에는 거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는, 옷차림새를 다듬고, 볼에 묻은 속눈썹을 뗄 수 있는 ‘거울’이라는 물건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타인과 관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상실했다는, 관계의 매개를 상실했다는 상징적인 의미로서에서의 ‘거울의 부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과 ‘관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그리고 그 관계가 의미를 생성할 수 있으려면,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 관계가 어떻게 가능이나 하겠는가. 내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이다. 그것이 이를테면 스스로의 내부에 있는 ‘상징적인 거울’인 것이다. 그 매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이른바 메를로 퐁티가 말하는 '간-주관성').


타인과 관계할 수 있게 하는 내부의 ‘또 다른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옥에는 그것이 없다. 즉 내가 ‘나’라는 ‘달팽이 관’을 벗어나, 나를 ‘볼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있는 것은 타인의 시선이다. 그 시선을 통해서 나는 ‘나’를 본다. 하지만 이미 그때의 나는 스스로의 매개를 잃어버린, ‘상징적인 거울’을 갖고 있지 않은 나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르트르의 용어를 빌어 거칠게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저 대자(對自)의 관성(慣性)으로 움직이는 즉자(卽自)의 존재들이다.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이미 더 이상 의미가 아니다. 그의 본질은 ‘과거’이다. 즉 과거의 재현으로서만 그들은 의미를 지닌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그저 대상이다. ‘실존’이라는 말을 자유와 선택, 그리고 그런 조건들의 조합 하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미래에 대한 흔들리는, 알 수 없는, 비결정적인 생성이라고 생각할 때 그들의 무의미성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욕망하고 있다. 그들을 욕망하게 하는 조건은 그들의 과거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이 과거의 늪 속에서만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모른다. 그들은 아직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은 죽은 존재이다. 그런 그들의 욕망은 서로 어긋난다. 가르생은 이네스를 원하고, 이네스는 에스텔르를 원하고, 에스텔르는 가르생을 원한다. 그들의 욕망은 서로 비껴나가고, 욕망은 물고 물린다. 그래서 그 관계는 정말 ‘본격적인’ 지옥이 된다.

왜냐하면 그 관계-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의 관계는 이미 엄격한 의미에서 관계가 아니다, 그들의 관계는 이런 조어가 가능하다면, ‘유사 관계’이다-는 진정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관계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서로 ‘작용’하는 관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는 욕망-왜냐하면 나의 욕망이 매개를 만나지 않고선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스스로에게도 매개를 갖지 못하니까-만이 있는 관계이다.

타인은 자기를 규정하는 존재인데, 그 타인이 나에게는 욕망의 대상이자, 내가 또 다른 타인에게 욕망의 대상이 되는 관계는 지옥이다.  그 관계의 ‘삼각형’은 서로 끊임없이 어긋나고, 어긋남은 무한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계속 반복해서 말하지만 ‘대타적인 생성’이 불가능한 존재들이다. 그저 끝없는 동어반복의 지루한, 숨막히는 시간과 공간만이 거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무대 위에 있는 그들의 현존을 본다. 그리고 그들의 현존을 통해 자신의 상황을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닫힌 방>이라는 ‘연극’은 관객에게 스스로의 현실에 대한 메타포로서 구실한다. 연극 속의 인물들은 과거의 잔상이자, 과거 그 자체에 불과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지옥이 있음을 부정하는 과거의 기억에 매달림으로써 ‘유사 실존’을 보여주고 있다. 그 ‘유사 실존’을 바라보며, 관객은 자신의 상황을 반추하고, 그것과 비교하게 된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타인은 지옥일 수 밖 없다’는 본원적인 부정과 한계를 그 안에 내포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타인과의 관계에 들어설 수 없고, 의미를 생성할 수 없을 때, 매개 없는 욕망으로 자신을 파괴할 때, 그리고 그 욕망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스스로는 그 욕망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할 때 타인은 지옥이 된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은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거울’로 삼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의지를 오히려 웅변하고 있지는 않을까. 머리는 무거워지고, 마음은 굳어진다. 그렇지만 꿈에서 내가 누군가를 만나고, 그래서 그 누군가와 사랑할 수 있다면 나는 아침이면 따스해질 수 있을 것이다. 지옥은 꿈꿀 수 “없”는 곳이다. 왜냐하면 지옥은 스스로의 매개를 상실한 곳이니까, 아니 그것을 빼앗아 버린 곳이니까.


꿈꿀 수 있는 행복.
그걸 우리는 소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소망은 '관계' 속에서 시작한다.



[댓글 대화 - 플라토닉 러브는 유사실존인가?]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는 "유사실존"이고 "지옥"이 되나요?!
어떤 해석이 가능한지 궁금하네요.

동양의학에서는 삼각관계가 생명의 필연적 실존입니다.
<본초문답>에는 생명이라는 것이 필연적으로 고리 관계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지네-뱀-두꺼비"

두꺼비는 뱀에 먹이가 되고 뱀은 지네의 먹이가 되지만 다시 지네는 두꺼비의 먹이가 되는 고리관계입니다. 이것은 작은 범위의 고리일 뿐, 인간 또한 이러한 고리관계에서 예외일 수 없는 것입니다. 생태계 전체 범위로 보자면 진화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여기기 쉬운 미생물의 먹이감은 바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생태계고리에서 각각의 생명체는 고등성과 원시성을 동시에 갖춘 것이라는 뜻입니다. (땡글아버님)


이하 땡글아빠님의 논평과 질문에 답합니다.

저로선 우선 고대철학, 그리스 철학에 대한 이해가 일천한 관계로 그저 상식적인 의미에서 위 질문을 듣고, 그 질문 아래 아버님께서 남겨주신 사례를 참고하여 제 나름으로 답해드립니다.

1. 저로선 '유사실존'이란 조어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저로선 [완전한 실존 - 실존의 상실 - 그 중간적인 개념]으로서 위 조어를 사용하였습니다.
2. 그렇다면 아빠님께서 '플라토닉 러브'를 사용하신 취지는 [완전한 사랑 - 플라토닉한 사랑 - 에로틱한 사랑]이라는 구도하에서 사용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3. 그렇다면 위 1.과 2.는 그 모델이 같은 논의로 다뤄질 수도 있으나, 서로 다른 논의의 평면을 갖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1.의 논의는 완전함 - 중간형 - 상실.이라면 2.의 논의는 완전함 - 완전함의 일부로서의 플라토닉 - 완전함의 일부로서의 에로틱.이기 때문입니다.
4. 다만 그 유사함은 인정되기 때문에 제 나름으로 성심껏 아빠님의 질문에 답해드린다면, 저로선 에토스(관습, 관성, 지속성)과 파토스(정열, 욕망, 순간성)의 엇갈림이 위 유사실존을 규정한다고 생각합니다. 양자는 서로 모순적인데, 위 희곡의 인물들은 에토스로서 파토스를 실현하려고 합니다. 그건 가짜입니다. 왜냐하면 파토스는 그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지, 관성이나 관습으로서 발현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건 지옥이 됩니다. 에토스와 파토스의 조화는 그 것이 발현되는 상황에 맞춰 생성되어야 하는데, 그 양자가 한 공간과 한 시간 속에서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서로 양립불가능한 불완전함과 모순 속에 인물들은 빠져 있고, 저로선 그 존재는 유사실존의 존재라고 느낍니다. 부족한 설명이지만, 제 나름으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생각할 거리를 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버지니아와 한겨레 - 죽음에 대한 태도

2007/04/18 09:10


난 한겨레 좋아한다.
한겨레가 잘 나가서, 고급지(놀고있네. 이건 선언만 때리고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라서 좋아하는거 아니다.

내게 세상을 처음 알려준 신문이 한겨레라서 좋아한다.
한겨레 광고를 통해서 노동해방문학을 만났다.
노해문을 통해서 박노해의 시와 이정로의 피끓는 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난 그 때부터 세상을 본다는 게 어떤건지 조금은 깨달았다.

고종석의 매혹적인 기사들을 통해 김현과 황지우를 만났다.
김현은 좀더 커다란 지성의 세계을 엿볼 수 있게 해줬다.
그건 그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체험이었다.
그리고 황지우.
그는 내가 가장 닮고 싶은 정신의 전범 같은 존재였다.

세상 모르는 나에게,
한겨레는 세상으로 들어가는,
지성의 모험을 위한 일종의 동반자였고, 안내자였다.

나는 한겨레의 태도를 좋아했다.
한겨레의 태도는 최소한 진지했다고 기억한다.

서설이 길어지는구나.
암튼 그랬다.
조선일보에 난 기대 하지 않는다.
조선일보는 그 존재 자체로 반저널리즘이라고 나는 믿고, 또 그렇게 판단하기 때문이다.
난 편견을 증오하지만, 조선일보에 대해서만은 그 편견을 버리고 싶지 않을 정도다.

다만 한겨레는 조선일보의 반대편 아닌가.
그토록 실망하면서도 지키고 싶은, 희망을 버리기 싫은 무엇인가가 남아있다고 느꼈다.
아니 그렇게 믿었다.

버지니아 사건이 터졌다.
무고한 생명이 그렇게 죽어갔다.
이건 모든 종이신문, 온라인 저널들의 일면일거다.
한겨레도 예외 아니다.

그런데 너무 실망스럽고, 아쉽다.
아직 한겨레를 희망하기에 쓴다.


기사 1.

청천벽력 교민사회 "한국인 피해 입을까 불안"
(큰 제목) - 3면 메인
"한때 중국인으로 전해져 안도했는데" (작은 제목)

"앞으로 멕시칸을 보는 것 이상으로 색안경을 끼고 볼까 봐 두렵다" (현지 교포 인용)
"어렸을 적 미국으로 왔다면 소수자로 크면서 억눌린 것들도 많았을 것" (위와 동)

기사 1.은 민족적인 동질감을 강조하는 것을 넘어서 타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편견을 은연중에 조장하기까지 한다. 중국인이었으면 '다행'인 사건인가? '멕시칸을 보는 것'처럼 미국내 한국인을 보면 어쩌나 하고 걱정해야 하는 사건인가? 물론 나 역시 미국내 우리 교포들 정말 걱정된다.

다만 무고한 목숨이 어처구니 없이 쓰러졌다. 그게 미국이든, 러시아든, 이라크든, 어디든.. 상관없이 그 쓰러져간 목숨에 대해 경건함와 애도를 표하는 것이 순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민족, 우리나라만 걱정하면 그게 배타적 민족주의, 배타적 맹목적 쇼비니즘과 뭐가 다른가?


기사 2.
범인 조승희 누구인가 - 3면 하단 2단 박스
(... 중략 .. ) 총기난사 사건의 '주인공'인 조승희씨는 (... 중략...)

총기난사 사건의 범인으로 거의 확실시 되는 용의자를 '주인공'이란다.
이게 무슨 범죄영환가?
어디서 주인공을 찾나?


기사 3. 
한-미 관계/FTA에 악영향 미칠까
초긴장 - 4면 메인
정부 표정 (작은제목)

관점 불분명한 친여매체로 비판받는 한겨레의 모습을 그대로 증거하고 있다고 나는 판단한다. FTA가 그렇게 걱정인건가? 아주 살짝 협상 타결 직후에 기사 몇번 때리고, 이제는 정부 걱정해주고 있는건가? 다시 강조하지만, 신문은 '이미지 매체'다. 그 제목을 어떻게 뽑고, 거기에 어떤 사진을 배치하는지, 그리고 그 기사와 기사들 사이에 어떤 의미론적 충돌이 있는지에 따라서 수용자들의 의식은 확연히 달리 반응한다.


기사 4.
총격 당한 유학생 부모 인터뷰 - 4면 우측 2단 박스
"해코지 걱정... 아들 당장 왔으면" (기사 가운데 큰 제목)

물론 자식을 버지니아공대로 유학보낸 그 부모 심정 이해한다.
하지만 좀 심하게 우리나라 자식만 챙기는 거 같다.


기사 5.
출입문 걸어잠그고 난사 ... 탄창 갈아끼우며 여유도 (큰제목) - 5면 메인
버지니아 공대 '학살의 재구성' (작은 제목)

'학살의 재구성'이란다(차라리 '범죄의 재구성'이라고 하지?). 물론 뉴스가치 높은 사건이고, 이걸 궁금해하는, 그 사건 현장을 궁금해하는 많은 독자들이 있을테다. 하지만 굳이 제목을 이렇게 자극적으로 뽑아야 하는건지 난 정말 모르겠다. 오히려 조선일보는 같은 아이템에 대해 '미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상황'이라고 조선일보답지 않게 담담한 제목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기사 6.
'탕탕탕...' 난사현장 전세계 알린 UCC - 6면 하단 작은 3단.
팔 유학생 휴대전화 동영상 찍어 (작은 제목)
"(... 중략 ...) 사건이 벌어지자 반사적으로 자신의 매끈한 은빛 노키아 휴대전화를 뽑았다."

개인적으론 가장 실망스러운 기사다.
"매끈한 은빛 노키아" 부분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었다.
노키아 광고하잖건가?
정말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이상한건지, 내 감수성이란게 정말 너무 예민해서, 이렇게 나 역시도 오버하고 있는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혹 한겨레에 너무 기대가 커서 이러는건지...

내가 정말 읽고 싶었던 기사는 없었다.


그나마

기사 7. '총보다 센 로비' 규제 무력화... 끝없는 참극 - 6면 메인

위 기사가 그 관점에서 동의할 수 있는, 그리고 그 표현을 문제삼지 않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사다.
물론 일면과 외신종합(정리)한 기사와 뻔한 사설은 제외다.


죽음은 죽음일 뿐이다.
죽음 그 자체에 대해선 어떤 차별도 없어야 한다.
물론 그 죽음의 무게들은 그 망자에 따라 그리고 그 망자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다를테다.
하지만 그 죽음을 대하는 최소한의 경건함,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나.
그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가치라고 우리는 믿고 있지 않나.

우리는 최소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경건해야 한다.
미국인의 죽음이든, 러시아인의 죽음이든, 혹은 FTA에 항의해서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고 허세욱과 같은 우리 한국인의 죽음이든 말이다.

한겨레가 그 경건함을 그 최소한의 예의를 보여주지 못했다고 나는 느낀다.
정말 몹시 유감이다.




p.s.
언론이든 블로거든 버지니아 사건으로 미끼질은 제발 하지 않기를 바란다.



추.
먼지님께서 댓글로 알려주신건데요.
제가 읽은 한겨레신문은 4월 18일 제6판입니다.
그 이후의 판에서는 기사의 배치와 제목이 약간 바뀐 것들도 있다고 하네요.
댓글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먼지님 소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읽고 있었다.
명성에 비해선, 개인적으론, 별다른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던 터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만났다.


당신은 그에 관해 말하고 그것에 관해 쓰지만, 드물게 완전히 자기 포기할 때를 제외하면 당신은 그것에 대해 안 적이 없을 것이다. 그것 주위에 공간을 만들어내는 중심이 있는 한, 거기엔 사랑도 아름다움도 없다. 아무 중심도 아무 주위도 없을 때 사랑이 있고, 당신이 사랑할 때 당신이 아름다움이다(148).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정현종 역. 중에서


그 문장은 정현종의 시를 불러 왔는데...
그 시는 이렇게 시작하고...

사물을 가장 잘 아는 법이 방법적 사랑이고 사랑의 가장 잘 된 표현이 노래이고 그 노래가 신나게 흘러다닐 수 있는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면, 그렇다면 형은 어떤 사랑을 숨겨 지니고 있읍니까?


다음과 같이 끝난다

[....] 사람은 각자 자기가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 이상의 사랑을 (  )로부터 항상 받아야 하지만 그러나 그가 삶의 현상들을 어떻게 사랑하고 있는지가 두루 궁금할 따름이다, 사랑받아야 한다는 욕망은 사랑 자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사랑받음과도 아무 상관이 없고 항상 그대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으면 된다. 그대는 그대의 모든 詩에서 그대의 이름을 지우고 그 자리에 고통과 자신의 죽음을, 문화를, 방법적 사랑을 놓지 않으려느냐, 슬픔 多謝.
잠이 깨었으나 형의 꿈은 더 깊어갔읍니다.

- 정현종, 사랑사설 하나 ; 자기 자신에게, [고통의 축제] 중에서


그 둘은 서로 몹시 닮아 있다고 나는 느꼈다.
그리고 정현종에게 크리슈나무르티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문득 상상하게 되었다.



p.s.
정현종의 시는 약간 오래된 경우라서 '습니다'가 아니라 '읍니다'로 끝난다.
내가 갖고 있는 판본은 92년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