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바라보기 - [오리엔탈리즘]

2007/03/23 23:53

#. 이 글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저 [오리엔탈리즘]를 소개하는 글에 불과합니다. 물론 예전에 쓴 글인데요. 좀 줄이고, 추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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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 1935 ~ 2003.9.24]


자기 바라보기
: [오리엔탈리즘]와 실천적 지식인의 초상


Ⅰ. 서
이 글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상식적인(그러나 그 '상식'은 얼마나 조작된 것인가!)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상식적'이란 의미는 사이드가 주창했던 [세속적 글쓰기]의 차원에서 '상식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되도록 쉽게 쓰려고 한다. 어렵게 쓰려고 해도 그럴 지식이 없기도 하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익숙하고, 어떻게 보면 생소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그리고 좀더 풍부한 배경지식과 함께 파악하는 것은 이 글의 기본적인 목표다.

이 책은 내가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는 한 위대한 인물에 대하여 다른 관점으로 조명한다. 그건 충격적이다. 그 짧은 문장의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물론 동양인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 공화력 18일(The 18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중에서


사이드는 김성곤과의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영국은 인도에 대해 두 가지 의무가 있다. 첫째는 아시아적 사회를 없애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그런 다음, 서구사회의 물질적 기반을 그곳에 세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1)


마르크스마저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함정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과연 ‘오리엔탈리즘’이란 무엇인가?

내가 [오리엔탈리즘]을 처음 접했던 것은 97년 8월이다. 다소 지적 허영에 들떠 있던 시절의 나에게 마르크스와 프랑크푸르트 학파(특히 마르쿠제), 그리고 미셀 푸코와 에드워드 사이드는 철학과 사상사의 광대한 오딧세이를 항해하는 위대한 모험가들로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사이드는 각별했다. 그는 서구 학자가 아닌(물론 당시 그가 몸 담고 있었던 대학은 미국의 콜럼비아 대학이었지만), 제3세계출신 학자로서, 자기 존재의 조건, 그 정체성의 근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거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이제는 어느 정도 그 이데올로기의 배후에 대한 부정적 회의를 내포하는 것이 되었다. 문예잡지나 시사잡지, 혹은 영화잡지에 이르기까지 비평용어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은 이제 그 숨은 함의에 대한 어떤 태도를 지칭하는 말로 쓰여지고 있다. 그래서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 말이 생산, 유통되는 과정과 시스템의 어느 한 쪽에 대한 비판이나 옹호를 의미하게 되었고, 중립적인 태도는 정말 '농담'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공로이다. 이제 누구도 오리엔탈리즘이 그저 단순히 동양을 가리키는 단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가치판단을 그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어떤 판단(그것은 앞서 말했듯 부정적인 회의나 비판이 대부분이다)을 담고 있는 말이 되었다. 이 글은 [오리엔탈리즘]을 통해서 본 오리엔탈리즘의 의의와 그 연원, 그리고 그것이 추구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고찰하고, 더 나아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Ⅱ. 오리엔탈리즘의 의의
1. 오리엔탈리즘의 개념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오리엔탈리즘을 정의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이며,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 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distinction 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동양을 취급하기 위한 "동업조합적 제도"이며,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고 사이드는 말한다. 즉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서 스스로의 힘과 정체성 identity 을 획득한 것이며,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타자’라는 존재를 만들어놓곤 스스로는 ‘자아’를 획득하는 일종의 지배철학이다.

사이드는 역사상의 그 무수한 위인들이 그 당대의 역사적 한계,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자신의 ‘지리적’ 한계, 즉 서구 중심 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로크도 인종차별주의, 노예제도의 옹호, 그리고 제국주의의 비호사상에 물들어 있었으며, 플로벨이나, 존 스튜어트 밀, 매슈 아놀드, 토마스 카알라일, 조지 엘리어트 그리고 심지어는 찰스 디킨스까지도 그런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사이드는 그런 의미에서 '거짓된 영웅 신화'를 거부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아리비아의 우상이었던 T.E. 로렌스일 것이다. 사이드는 그가 백인으로서의 우월 의식이 없었다면 그리고 야만인들을 교화시키고 질서를 부여하겠다는 선교사적 의식이 없었다면 결코 그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로렌스가 결국은 스스로를 아라비아인들의 총지도자 자리에 앉혔음을 지적한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과정'의 메카니즘임을 분명히 한다.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양은 유럽사회라고 하는 '우리들' 세계의 경계선 밖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교정되고 처벌된다. 그리하여 동양은 '동양화'된다"[주3)].

즉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본질이 그것 자체의 고정된 의미,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어떤 형성과 과정의 메카니즘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는 담론체계임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표현을 빌었음이 분명한 '교정과 처벌'을 통한 오리엔탈리즘의 본질로서의 '형성화 과정'의 속성을 지적한다.


2. 연혁

사이드는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시키고, 지배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서양에게 동양을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의 경험과 서양의 의식 속에 투사된 그림자로서만 동양은 존재한다. 그리고 서양은 우선 동양을 신비화시킨다. 꿈과 보석과 환상의 왕국으로 동양을 신비화시킨 서양은, 그런 다음엔 그 환상과 낭만을 수탈하기 위해서 동양을 식민지화시킨다. 그리고는 동양을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하나의 거울로 삼아 서양은 지배자, 교화자, 그리고 우수인종이라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담론의 체계가 생겨나고 발전해온 연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리엔탈리즘의 특징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변화의 시초는 18세기 중엽 이후라고 사이드는 말한다. 그 시기에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규제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계기,

ⅰ) 유럽에서 동양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증대한 점
ⅱ) 유럽이 지배자의 지위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언제가 강력한 힘을 갖는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이 그것이다[주3)].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동양 지배는 19세기초에서 2차 대전까지는 영국과 불란서가, 2차 대전이후로는 미국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3. 방법론으로서의 '담론'이론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서문에서 자신의 방법론에 대한 아이디어를 푸코에게서 빌어오고 있다고 밝힌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담합을 분석하기 위해 그 양자의 미시적 역학을 '담론'이라는 모델을 통해 파헤치고 있다. 사이드는 그 아이디어를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의 태도와 시스템을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활용하고 있다. 즉 사이드는 미셀 푸코의 방법론을 준용하고 있다. 그래서 사이드는 권력과 지식의 담합이라는 이론적 역학의 모델이 어떻게 서양이 동양을 생산해내는 과정을 분석하는데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푸코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 Discipline and Punish』에서 감옥과 병원이라는 합법적인, 그러나 다분히 독재적인 사회기관의 연구를 통해 지식이 어떻게 권력으로 이어지고, 그 둘의 공모는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탐색한다. 사이드는 똑같은 방식으로 오리엔탈리즘의 구조를 해부한다. 그 권력과 지식의 담합이 어떻게 동양을 지배하는, 억압하는 체계를 구성하는지 사이드는 구체적인 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하나의 ‘담론(언설) discours'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그것이 신화나 허구임을 밝혀서 마치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사이드는 거듭 지적한다. 언설로서의 오리엔탈리즘를 검토하지 않는 한 그 거대한 조직적 규율의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 없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4. 자기고백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
사이드는 그 자신 ‘저주받은’ 팔레스타인 출신이다. 비록 미국 일류 사립대학의 명망 있는 교수이지만, 그 자신 한번도 ‘나의 본질은 동양인’이라는 의식을 잊은 적은 없다고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직접적인 집필동기가 ‘서양 속의 동양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임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인 미국에서 팔레스타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사이드의 작업이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뿌리와 자기가 태어난 모국어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자세는 그의 비평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비평이란 오늘날과 같이 추상적이고 형식적이고 귀족적인 것이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세속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하며, 문학과 비평이 만들어지는 토양이자 배경인 역사,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텍스트의 이해나 비평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이른바 [세속적 글쓰기]). 그는 개인적으론 자신의 조국인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의 해결 방법을 자기 나름의 학문 영역에서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 특수성만큼이나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주저인 [오리엔탈리즘]은 그 가장 좋은 본보기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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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현장에서 직접 돌을 던지는 백발의 사이드

Ⅲ.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의식
1. 지구촌이라는 허상

[오리엔탈리즘]은 ‘지구촌’이라는 말의 허구성에 대한 반성적 비판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이미 지루한 질문처럼 느껴진다. 인터넷 혁명이라고 불리는, 그 속도를 느낄 수조차 없을 만큼 빠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정체성’은 지워지고, ‘고유성’은 소멸되고 있다. 나는 한국인이다, 라는 의식도 우리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에 사는 국민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자각케 하지는 못한다. 그 말은 이제는 생소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컴퓨터 모니터이며, 헐리웃 영화가 가득한 극장이며,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 체인점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환상이며, 위장술이다. 그것은 서구와 제3세계의 차이를 지워버린다. 그것은 또한 아직도 이 지구상에 헐벗고 굶주린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감추고, 서양의 지식과 문화를 일방적으로 유포하고 강요하는 기능을 또한 맡고 있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혁명(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정보의 편향과 차별적인 위계질서), 헐리웃으로 상징되는 미국 문화의 전세계적인 지배는 그러나 우리가 고민하고 아파하는 땅이 미국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여기’라는 것을 망각시킨다. 컴퓨터의 작은 모니터가 보여주는 상업광고 같은 세상, 헐리웃 영화의 솜사탕 같은 세상,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깔끔하고 정돈된 세상의 이미지는 우리의 내부에 스며든다. 아직도 점심식사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고, 전쟁이 끝나지 않는 ‘휴전’상태에 있는 땅이라는 사실은 그것들로 인해 감추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소파(SOFA. 한미행정협정)의 불평등 조약으로 우리 아이들을 죽인 미군 범죄가 무죄로 판결되는 땅에 우리는 살고 있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의 그 어처구니 없는 판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 앞에서 우리는 일개 극동의 변두리 나라에 지나지 않는가. 적어도 그들, 미국, 미국이라는 나라를 말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가 아닌 그들의 정책은 그것이 진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 땅에서 벌어진 명백한 범죄에 대해서 우리가 재판할 수 없다는 이 자명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올림픽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당당한 주권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백한 오리엔탈리즘의 현대적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될 수 있다. 소파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민서명운동에 참여하고, 장갑차 사건의 정당한 재판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에 우리의 작은 목소리를 더 하는 것. 그리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다수 숭미언론들의 의식적인 조작에 대해 비판하는 것. 이는 미국-한국이라는 명백한 오리엔탈리즘의  실현태로서의 불공평한 관계를 청산하고 극복하는 작은 출발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진실의 목소리 하나로, 스스로 작으나마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2. 월드컵과 세3세계의 그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적 분석틀로 지난 2002년 6월의 월드컵을 다시 떠올려 보기로 하자. 월드컵은 우리의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였다. 16강의 염원은 4강 신화라는 더 큰 보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고, 질서정연하고 열광적인 우리의 응원문화는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크게 주목되었다. 

피버노바.

월드컵의 열기 한 편으로 나를 잠시나마 각성시킨 것은 신문의 작은 기사였다. '피버노바'라는 월드컵 공식 지정구를 만들고 있는 나라는 이른바, 제3세계,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인도라고 했다. 그 공을 만드는 과정은 기계화가 곤란하여 일일이 손으로 꿰메어야만 하는 공정이 있다고 했다. 그 공을 만드는 건 주로 아이들이었고, 하루 종일 일을 해서 그 아이들이 받는 돈은 고작 1~2달러라고 했다.

그 작은 기사는 그 공, '피버노바'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화학약품들로 인해 암에 걸려 사경을 헤메는 아이를 보여준다. 정확히 암과 그 화학약품들과의 인과관계 판정은 확실하게 드러난 바 없지만, 상당한 개연성이 존재한다고 추정된다고 그 기사는 밝힌다. 그 아이의 다가올 죽음 앞에서 '세계화'는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인류의 축제인 [월드컵]은 또 어떤 의미인가? 우리의 관심이 월드컵의 꿈같은 환상에 젖어있는 동안, 그 환상의 축제 이면에는 암으로 신음하는 제3세계의 작은 소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비극의 드라마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불과 반세기 전 모습이 그와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경제가 서구 뒷치닥거리 산업들을 통해, 이를테면 섬유산업이라는 고밀도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경공업위주의 극심한 노동착취를 거름으로 하여 성장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신음하며 쓰러져 갔다. 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그러한 세대의 상징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은 불과 30여년 전 우리의 모습인 것이며, 그것이 다른 제3세계에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플라터(피파회장)의 오만한 태도들, 그를 등에 엎은 바이롬사의 어처구니 없는 경기장 공석사태, 안정환을 둘러 싼 이탈리아의 야만적인 발언들 역시 우리의 자긍심과는 상관없이 서구가 우리를 바라보는 태도는 여전히 그 오리엔탈리즘의 관성을 잃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것들을 굳이 오리엔탈리즘의 연장선에서 고찰한다는 것이 억지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행태가 오리엔탈리즘의 정서적 잔재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닐까.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아직도 변방의 낮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 불과한 것이며, 그래서 그토록 무례하게 우리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Ⅳ.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우리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이미 포기한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픈 질문이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을 말하자면 우리를 ‘한민족’이라고 부를만한 문화적 연대,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서구중심주의가 내면화되어 있다. 우리는 서양놈들이 아닌데도 말이다.

더 나아갈 것도 없이 우리의 대학 문화를 생각해보자. 80년대 90년대 초의 대학문화가 독재 정권에 저항하면서, 그 독재 정권을 가능하게 했던 미국의 제국주의를 또한 거부하면서 보여주었던 것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패기 어린 고민이었다. 그래서 풍물패 동아리들이 생겨나고, 우리말을 살리려는 소박한 운동이 더불어 진행되었던 것이다. ‘서클’이라는 말이 ‘동아리’라는 말로, ‘엠티’라는 말이 ‘모꼬지’라는 말로 바뀌는 그 작은 차이는 하지만 얼마나 커다란 차이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어떤 움직임도 대학 사회에선 존재하지 않는것 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미 사이드의 냉철한 지적처럼 ‘동양인’으로 규정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언어습관 속에서도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의 잔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문화사대주의와 공동분모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원서.原書'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보통은 영어로 된 교재를 말한다. 본래의 교재는 영어로 된 책, 즉 원서이며, 본래적이지 않은, 부차적인 교재는 우리말로 된 책이란 말인가. 이러한 전도된 언어사용은 습관이라는 견고한 골격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쉽게 허물어뜨리기란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Ⅳ. 결
[오리엔탈리즘]의 궁극적인 전언은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다름이 지배/피지배의 종적 관계가 아니라 조화와 평등의 횡적 관계로 서로를 인정하는 성숙한 세상에의 염원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 문화는 어떤 것이며, 우리의 뿌리는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즉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야 우리와 다른 문화를 인정할 수도, 그들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글쓰기가 그 자체로서 우리 안에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성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찌꺼기들, 그것과 유사한 형태로서 식민사관을 잠시 생각해보자. 일제의 잔재로서의 식민사관은 우리 역사에 대한 교묘하게 조직되고, 설계된 역사관의 흔적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극복되었는가.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 광범한 캠페인을 통해서 비로소 그 견고한 껍질이 깨어지고, 그 알맹이를 드러내며, 우리는 그 알맹이들을 쓰레기 통에 쳐 박을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그 과제가 완벽하게 수행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우리에게 치욕이며, 기만이며, 거절해야할 수치스런 역사의 상처임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선 그것이 앞서도 말했듯, 그 말이 담고 있는 비판적 함의에 대한 충분한 공감이 비평의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확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지만, 일상의 차원에서 그 오리엔탈리즘의 관성과 내면화는 아직도 여전함을 안다.

가령 국악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그네들의 영혼으로, 혹은 그네들의 설움이나 기쁨으로 만들어낸 노래들, 그 가락들이 우리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악’이다. 그것을 우리 문화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가 우리를 ‘한국인’이라고 ‘한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타계한 한국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의 음악은 그런 넓은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국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 역사의 아픔이, 우리가 체험한 고통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로서 되돌아본다면 윤이상과 같은 큰 인물이 정작 자신의 조국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아직도 우리 안에서 내면화된 반공이데올로기 만큼이나 치명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많은 문제의 근원적인 모순들은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것. 그 순응화되고, 무비판적으로 길들여진 그 습관들, 사고의 패턴들에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긍정적으로 해체되어야 하고, 다시 세워져야 한다. 여전히 우리 안에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오리엔탈리즘'이 살아 있다.

[주]
1) 김성곤, '텍스트로서의 세계와 문학비평', <미로 속의 언어; 현대미국작가와의 대화>, 민음사, 1986, pp.99~121.
2)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 p. 120.
3)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 p. 75.


* 확장점
희한한 인용과 주석 (neoscrum)
http://blog.jinbo.net/neoscrum/?pid=485 . 추천.



#. 조언을 구합니다. ㅡㅡ;; 해당업체와 문의했지만, 그다지 만족할만한 해답을 구하지 못했네요. 두 가지 문제입니다.



[상담] 1. 늦게 열리는 페이지와 2. 퍼미션 변경





- 문의

저는 태터툴 블로그를 사용하기 위해 귀사와 계약했는데요.
http://minoci.net 입니다.

1. 페이지가 너무 늦게 열립니다.

보통 2, 3초는 기본이고, 어떤 때는 4, 5초씩 걸립니다.
다른 페이지로 변환되는 속도도, 제 컴퓨터로 여는 다른 웹페이지들보다 현저히 늦습니다. 이벤트 기간 중에 (1년 가격으로 5년 동안) 계약해서 그런것인지.. ㅠ.ㅜ;; 제 웹페이지(블로그) 방문자는 근래 일일 단위로 많으면 5백여명 안팎, 적으면 1, 2백명 안팎인데요. 이 정도의 방문객 숫자 때문에 페이지가 느려지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계속 늦게 페이지가 열리면, 증설 혹은 이전을 고민해야 할 것 같아서요.

- 답변.
안녕하세요 웹호스트 입니다.

1. 확인해보니 늦게 뜨는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db쪽과의 연동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듯 합니다만...
서버쪽 문제는 아닌것으로 보여집니다.
회선 속도등의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 문의
2. 블로그 스킨의 설정을 변경(편집)하려고 하면, '작성권한 없습니다'라는 팝업이 뜹니다. 이는 전화로도 잠깐 문의드린 사안인데요. ftp를 이용해서 분명히 해당 skin 페이지의 작성권한을 '허용'으로 바꿨는데도 불구하고(퍼미션 넘버를 777로), 제 블로그 편집툴에서 작업하고 '저장'을 누르면, 권한이 없습니다. 이렇게 팝업이 계속 뜨네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 답변
2. ftp클라이언트는 기본적으로 파일전송 프로그램입니다. 이는 퍼미션이 쉽게 변경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주 변경 하실 경우라면 putty등의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터미널 서비스를 사용하시고..
자주 변경이 아니신 경우라면 당사에 요청하시면 퍼미션 변경 하여 드리겠습니다.


- 2차 문의
신속한 답변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1. 늦게 열리는 페이지
"이는 아무래도 db쪽과의 연동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듯 합니다만...서버쪽 문제는 아닌것으로 보여집니다. 회선 속도등의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라고 말씀 주셨는데요.

현실적인 해결방법(가급적 간단하게요)을 여쭙고 싶네요.
db 연동 문제라고 추정하셨는데, 만약에 그것이 정말 문제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요?

- 2차 답변
음....
1. 저도 프로그래머가 아니라서 정확한 문제점을 꼬집을 수가 없습니다. db문제인지도 정확하진 않습니다. 프로그램상에서 db와 연동되는 부분에서 자료가 많거나 병목현상에 의하여 느려지는 경우를 추측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 2차 문의
2. 퍼미션 변경

1) putty등의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터미널 서비스를 사용하시고..
2) 자주 변경이 아니신 경우라면 당사에 요청하시면 퍼미션 변경 하여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셨는데요.

1)에 대해 좀더 쉽게 설명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2)에 대해선 우선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제 블로그 스킨의 퍼미션을 조정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게 제대로 요청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제 블로그 스킨은 '레터-태터'입니다.

- 2차 답변.
2.
1) http://www.webzero.co.kr/m_zterm.html 참조하여 주세요.
2) 해당 스킨이 있는 정확한 경로를 알려주세요.


~~~~~


이상이 제 문의 및 업체의 답변이구요.
업체의 답변이 신속하긴 한데, 저로선 해결된 것이 없네요. 2.의 경우엔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참조하라고 알려준 페이지의 활용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 아무래도 2- 2)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퍼미션 변경을 위한 프리웨어의 활용이 아직은 제겐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요.

제 시급한 고민은 1. 입니다.
너무 늦게 열리는 페이지요.
이거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염치불구하고,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_ _)



p.s.
참고로, 일단 너바님의 조언에 따라
1. 사이드바의 링크메뉴를 잠시 사용하지 않고,
2. 첫페이지에 표시되는 글 갯수도 5개에서 3개로 줄인 상태입니다.

그동안 신경써주신 너바나나님께 특히 감사드립니다. ^ ^ 



#. 원래는 손학규옹에 관한 저널들(한겨레와 조선일보)의 태도를 비교하고, 좀 비판적으로 '정치공학적 잔머리' 저널리즘에 대해 포스팅하려고 했는데, 이제서야 '미투 v. 플톡' 논쟁(?)을 접해서요. 관련글 읽느라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버렸는데요. 이걸 포스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다가..
글읽은 시간이 좀 아까워서.. ^ ^; 굳이 포스팅합니다.


참여적 소비자 모델
; 미투데이 vs 플톡 논쟁을 회고하며.



0.
아직 회고할 타이밍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단 저 나름으로 회고하렵니다. ^ ^; 물론 전 웹개발자(기획자)도 아니고, 쥐뿔도 모르지만, '잘 몰라도 한 마디' 정도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한마디 하렵니다. 어떤 블로거께서는 무식하면 입다물라, 이런 어조로 포스팅하셨던데요. 이런 태도는 좀 무섭습니다. ㅠ.ㅜ;


다음과 같은 입장차이가 있다고 봅니다. 참고로 제가 읽은 글은 대충 30개 이상은 되는 것 같습니다. 한 두, 세 시간 동안 이런 저런 글을 읽었습니다.

A. 플레이톡은 미투데이를  "따라했다" 이거 좀 문제있지 않나?

B.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아이디어 아닌가? 시장에서 승리하는 서비스가 장땡이다. 소비자(유저)에게 맡겨라. - 이 입장에 저는 특히 주목합니다. 소비자에게 맡긴다는 의미가 반드시 '시장에서의 승리'라고는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덧] 이 양상은 좀 복잡할 수 있다고 봅니다.

C. (BM) 특허 없으면 논의할 가치 없다. 법률적인 판단을 확정할 수 없는 바에야 논쟁은 (현실적으로) 무의미하다.


1.
일단 저는 Lunar님, 제닉스님, nova님, 써드님 등등의  문제제기가 소모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입장입니다.

위 블로거들께서 문제제기한 궁극적인 이유는 어떤 업체의 도덕성 유무를 '판결'하는 심판관이 되겠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가치중립적으로 보이고, 또 실제로도 그렇게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어떤 상품에 대한 태도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해요. 물론 써드님께서는 다소 강한 어조로, 그리고 단정적인 어조로 '판결'하시는 듯 포스팅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요. ^ ^;; 


그 문제제기가 의미있는 이유는 기업마인드란 어떤 형태로든 '상품'에 구현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혹은 어떤 문제있는 철학을 가진 기업이 시장에서 승리했을 때, 그 부정적인 여파의 가능성이 그 사회의 성원에게 되돌아 오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시장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선'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세련되고, 현명한 태도로, 현실에서는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소비자 주권, 소비자들의 능동적인 참여 가능성을 무시하는 태도로 저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좋은 서비스, 혹은 좀더 응원하고 싶은 기업마인드를 갖는 서비스가 항상 '시장'에서 승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장 지상주의'는 좀더 가치있는 서비스에 대한 '목적론적인 지향, 그런 움직임'을 '시장'이라는 이름으로 미리 차단해버리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2. 
저는 '참여적 소비자 모델'이라고 부르는, 기업이미지에 대한 소비자들의 평가가 시장에 미치는 영향, 기업 마인드가 상품에 투사되는 그 이미지 효과들은 의미있게 논의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가치중립적인 '소비행위'은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어떤 식으로든 '상품'은 소비자들의 의식적인 '선택'이라는 행위를 유도하도록 기획됩니다.
그 유혹의 장치들은 마케팅을 통해, 그리고 그 상품 자체를 통해 현실적으로 표출되죠.

다만 그 '선택'의 표준이, 그 서비스 자체의 질, 유저 개개인의 취향, 마케팅 능력만은 아니고, 좀더 적극적인 변수들- 기업의 마인드, 그 철학-이 거기에 작용할 수 있기를 저는 기대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소비'가 갖는 의미란 그 소비행위 자체에 자신의 세계관과 철학이 그대로 반영되는 일상적인 '실존의 장'이라고 저는 평가합니다(좀 거창한 수사는 양해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Lunar님의 문제제기는 그 의미가 매우 깊은 것으로 평가합니다.


3.
가령 삼성이라는 초우량기업에서 만들어내는 '상품'은 그 질적인 수준이 세계 최정상급입니다. 그런 삼성이라는 기업이 뒤에서는 '편법 증여'하고, '자기 입맛에 맞는 대통령 세우기 프로젝트' 기획합니다. 물론 이런 사건들 흐지부지 끝나 버리죠. 노무현대통령이 인정했듯이 이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제1권력인 정치권력보다 우위에 선 '자본권력'은 이제 사법권력과 언론권력까지를 자신의 수하로 부리는 듯이 보입니다.

삼성이 편법증여 한다고 해서 삼성에서 만드는 핸드폰이, 반도체가 형편없어지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다만 정치권력과 사법권력, 그리고 언론권력 마저도 떡 주무르듯 주무르는 삼성이라는 권력이 그저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당연히 '인정'되어야 하고, 그 시장에서의 힘이 커지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에는 저는 반대합니다.

참여적 소비자들은 그 삼성을 비판하고, 견제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참여의 방식은 '삼성의 상품'을 보이콧 할 수 있는 '정치적 연대'까지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예로 이스라엘의 군부에 정치자금을 대준다는 의혹을 받는 '스타벅스'의 커피맛이 좋다고 해도, 자신의 정치적인 판단에 근거해서 그 스타벅스의 맛나는 커피를 '거절'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런 의식적이고, 목적론적인 '소비행위'는 그 시장에서의 영향력이 아직은 미미하다고 인정하지만요. 

미투데이나 플톡 논쟁도 이런 거시적인 전망 하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이디어 그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고, 또 아이디어 그 자체에 대해선 우리나라의 법원에서도 저작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물론 미투데이나 플톡은 '특허권'이 현실적으로 문제되는 사안이겠지만요. 그래도 그 취지는 비슷할테니까요. ^ ^; ). 저 역시 미투데이나 플톡의 아이디어 그 자체에 대해선 그다지 보호해야 할 '우선 권리'는 없다는 쪽입니다.

다만 어떤 업체가 다른 업체의 컨셉을 적극적으로 훔치고, 그것이 그저 '후발/선발 서비스'의 차원이 아니라, 인간적인 신의나 상도덕에 적극적으로  반하는 것이라면, 그 기업은 '도덕적인 비난가능성'의 차원에서나마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그 '도덕적 비난가능성'이 실제로 높다고 평가한다면, 그 상품을 적극적으로 거절할 수도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게 너무 순진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전 제 철학과 입장에 맞춰서 그렇게 소비하려고, 노력이나마 하고 싶네요.
물론 저도 순간 순간 그저 꼴리는데로 소비하곤 하지만요. ㅡ.ㅡ;

너무 졸려서 좀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은데 안되겠네요.

이상 줄입니다.

: )



p.s.
제가 인상적으로 읽은 글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표준이죠.
써드님의 글도 물론 인상적으로 읽었지만, 다소간 표현이 너무 강하셔서, 의도적으로 누락했습니다.

- Lunar님의 연재글
1. http://lunar.tistory.com/128
2. http://lunar.tistory.com/129
3. http://lunar.tistory.com/130
4. http://lunar.tistory.com/135

- 제닉스님의 글
http://xenix.egloos.com/1530444

- 노바님의 글
http://trivial.tistory.com/55

-antlog님의 글
http://antlog.tistory.com/319

- 조디악님의 글
http://blog.naver.com/zodiac47/80035932064

- 개발로그님의 글
http://taemy.mgom.pe.kr/241

- 미래주의님의 글
http://naum.tistory.com/57

- 수재님의 글
http://inthenet.tistory.com/110




이 글은 올블 [나의 추천 글] 로 올립니다.
졸문이지만, 좀 가끔은 뻔뻔해지고 싶군요. : )




재방송 정치 ; 손학규 탈당에 부쳐

2007/03/19 19:31

0.
'어, 정말 탈당하네?' 속으로 그랬다.
별 감흥 없다.
이거 재방송이거든.
어디서 많이 본거잖아.

이런 비슷한 풍경은 지겹게 봐왔다.
도대체 이건 우리나라에 '정치이념에 따른 노선이나 철학을 가진 정당정치'라는게 있는건지 없는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인기 좀 있고, 그런데 경선에서 일등할 것 같진 않고.. 그러면 탈당이다. 이인제씨의 코미디가 생각난다. 그럼 그 꼴통 보수 정당에 왜 들어간건데? - -;
(명박씨도 근혜씨도 경선에서 지면 탈당하려나? 이건 좀 궁금하다).


1.
탈당의 변은 정말 그럴듯하다.
그건 자기한테만 유리한 덧셈 뺄셈으로 이뤄져 있다.
'수구보수'랑 '무능진보'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단다. 그러셔?

손학규는 진보운동 하다가 옥스포드에서 정치학 박사까지 받고, 개혁 소장학자로 날리다가 수구보수당에 들어갔던 사람이니까(김영삼식으로 호랑이 잡으로 호랑이 굴에 갔단다. 대단하삼!), 이거 역으로 해석하면 '수구 + 무능'일 수도 있다. 물론 손학규 진영에서는 수구보수 = 한나라당이고, 무능진보 = 열우당, 청와대니까, 자긴 이제 양자 모두에 해당사항 없다고 '마술' 같은 덧셈, 뺄셈 하고 있는 것 같다.

노무현 정권에 전반적인 평가를 위주로 한 소위 '진보논쟁'의 서막을 알린 최장집의 인터뷰는 다음과 같이 끝맺고 있다.

정치에 있어서 센세이셔날리즘이 자주 반복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자꾸 더 센 이슈에 대한 욕구가 커지기 때문이다(최장집)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85639.html 중에서

그런데 솔직히 이건 센세이셔날리즘도 뭣도 아니고, 그냥 '재방송'이다.
그건 정말 찹착함을 넘어, 짜증이 솟구친다.
지겹다.


2.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정치적 무관심 정도가 아니라, 정치적 혐오를 '강요'하는 것 같다.
정말 관심 좀 갖고 싶어도, 이런 식으로 '허접하게' 관심 유도하는거다.

드림팀(정운찬 + 진대제 등등)?
이건 뭐, 정치가 아니라, 정말 [출발 드림팀] 시청하는 기분이다.
버라이어티 쇼쇼쇼~~~!!!

범여권은 아주 신났다고 하는데.. - -;
한나라당은 뭐, 내 관심 밖 정당이고, (범)여권... 너도 뭐, 방구나 뽕이나싶다.
지한테 유리하다 싶으니까 '환영'이란다.
도무지 철학이 없다, 철학이.

정말 정치공학적(무슨 공학식이나 그냥 덧셈 뺄셈만 하면 되는거긴 하지만) 계산만이 판치는 정치판이 아니라, 철학과 노선을 견지한 진지한 논쟁이 있는 그런 한국 정치판을 정말 정말 보고 싶다.

그런데 죽기 전에 볼 수 있을랑가 모르겠다.

: (



#. 제가 가장 신뢰하고, 많이 배우는 블로거 중의 한분이신 아거님의 글을 읽고 생각나는데로, 서툴게 제 생각을 첨언합니다. 너무 감동적인( ^ ^ ) 포스트라서, 제 기억을 이렇게나마 견고하게 붙잡고 싶은 욕심도 이 글을 쓰게 한 동기입니다.


이야기를 접어야겠습니다. 어느 잘 알려진 IT기자 블로거의 대문 위에는 “모든 블로거가 유명해지는 그날까지”라는 표어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지만 블로그계는 “블로거 idol”을 꿈꾸는 끼있는 자들의 장기자랑 무대라기보다는 수많은 익명과 필명들이 촘촘하게 얽어놓은 아주 조그만 관계망의 총합으로만 존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외쳐보겠습니다.

“모든 블로거들이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날까지”

- [모든 블로거들이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그날까지] 중에서



0. 두 개의 표어가 있습니다.

"모든 블로거들이 유명해지는 그 날까지"
"모든 블로거들이 관계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 날까지"

전자는 불가능합니다.
그렇지만 후자는 가능합니다.

물론 표어는 그저 표어일 뿐입니다. 논리적인 인과보다는 설득, 호소를 목적으로 하죠. 즉, 전자의 표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 ^; 그렇게 되면 '좋겠다'라는 차원일테니까요.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전자와 후자는 서로 동떨어져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양자는 서로 영향을 미칩니다. 이에 대해선 2.에서 후술합니다.


1. 유명 블로거

일단 이거 도대체 뭡니까? ^ ^;
누가 유명 블로거입니까?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올블의 TOP 100 블로거는 유명 블로거입니까? 아니면 그저 올블 이벤트에서 선출된 '올블 시스템 잘 활용'하는 블로거입니까? (저는 올블을 지지합니다. 이 말은 올블에 대한 조롱이나 폄하의 의도는 없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오해하지는 마시길. ^ ^; )

저는 언젠가 '좋은 블로그/ 인기 블로그'라는 글을 썼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제 주관이 강하게 개입되었음은 물론인데요, 좋은 블로그와 인기 블로그는 '논리적인 인과'가 그다지 뚜렷하지 않습니다. 물론 양자는 서로 비례하는 경향을 갖지만요.

많은 블로거들께서 인정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즉, 각자의 해석의 편차에 따라, 또 취향의 차이에 따라 어떤 인기 블로그는 '후진' 블로그일 수도 있고, 어떤 마이너 블로그는 '빛나는' 블로그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글에서 유명 블로그(거)는 방문자가 많고, 블로고스피어에 메시지 전달력(파급력)이 큰 통상적인 의미의 '인기 (유명) 블로그'를 의미합니다. 그런 블로거를 '알파 블로거'라고도 하더만요. 


2. 영향력 지향과 관계 지향의 함수관계 

블로깅에는 다음의 두 가지 큰 방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A - 관계 지향적 블로깅
B - 영향력 확대를 위한 블로깅

위 A, B 모두 자신의 개인적 실존을 투사하는 글쓰기란 점에서는 C - 자기 성찰적 글쓰기라는 내재된 요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조점을 달리 할 뿐이죠.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양자의 관계는 서로 단절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즐겁게 그 관계 자체에 의미를 두면서 블로깅하는데, 그 블로그의 영향력이 확보된다면 가장 이상적이겠죠. 다만 현실은 그런 이상적 모델이 그대로 적용가능하지 않습니다, 혹은 제가 체험한 바로는 그렇게 블로고스피어가 돌아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쉽게 말하죠. 소위 '유명 블로거'들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해서, 각자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일종의 '카르텔'을 구축한다는 쉬운 의심, 어떤 선입견적인 시각에 쉽게 놓여집니다. 그래서 '나 같은 마이너 블로거가 감히 쉽게 접근할 수 있겠어?' 라거나, 혹은 '말은 걸고 싶은데, 내 의견을 무시하면 어쩌지?'라는 불안을 느끼는 것이죠.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유명 블로거? 에이 밥맛없어' '저 블로거는 너무 명망을 우선하는 속물 블로거잖아' 이런 편견 혹은 선입견에 빠지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런 성향이 내재되어 있지 않나요? 저는 물론 이건 부정적인 선입견들로부터 블로거들이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만은 않죠. ^ ^;
저부터도 그러니까요. 또 '어떤' 블로그를 둘러싼 온갖 얼개들(가령 가입형인가, 독립형인가라는 차이, 검색 시스템, 메타 블로그 등등의 거대 얼개로부터, 그 해당 블로그의 기술적인 툴 - 리퍼러 기능의 유무, 교류에 조력할 수 있는 트랙백 호환 가부 등등)은 그 '관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 '영향력'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죠.

가령, 어떤 '용감한' 블로거께서는 제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필넷블로거들께 그저 필넷이라는 '미디어 블로그'에서 활동한다는 이유만으로, '필넷 블로거들의 글은 올블에서 그만 봤으면 좋겠다'는 '과격한' 발언을 서슴치 않습니다. 거기에 동조하는 댓글도 봤습니다. 정말 한숨 나오더라구요. 현실적으로 그렇게 본질적인 블로깅 외에 그 '형식'을 둘러싼 '편견'과 '선입견'은 강하고, 또 그런 편견과 선입견은 적극적으로 블로깅에 내재되어 작용합니다. 저야 물론, 다음과 같이 소박하게 말씀드릴 수 밖에는 없습니다. 좋은 블로그를 적극적으로 읽고, 논평하고, 링크걸고, 트랙백 보내자구요. 그렇게 '좋은 블로그'들이 자율적 선택의 '합'으로서 '인기 블로그' '유명 블로그'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다만 이것도 솔직히 이상적인 모델이긴 하지만, 이를 조력할 수 있는 거대 시스템의 도움(특히나 메타블로그의 역할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없이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사족]. 이런 의미에서 '블로그의 관계 지향적 스킨쉽을 강화할 것으로 예상하는, 올블에서(또 다른 업체에서도 비슷한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고 아는데요) 런칭예정인 '블로그 까페'에 저는 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보충. 블로그카페는 망했습니다..: )


3. 아거님께선 이렇게 지적합니다.

"관계의 방향의 크기를 먼저 저울질하면 좋은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저 사람이 내게 코멘트를 얼마나 하지?’ 같은 것 말이죠".

- [모든 블로거들이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그날까지] 중에서


저도 이런 생각은 아직도, 내공이 부족해서, ^ ^;; 종종 합니다. 나는 댓글을 이렇게 많이 담았는데, 저 블로거는 왜 내 블로그에 안오는거야? ㅎㅎ 이런 댓글에 대한 '대가적' 기대심리가 아직도 있어요. 물론 댓글이 '뇌물'도 아닌데, 대가를 기대한다는 건 정말 우습죠. 앞으론 좀더 초연하고자 노력할 생각합니다.


덧] 댓글에 대해서 다소 보충합니다.

댓글에 대해 ^ ^


그리고 제 블로그에 남긴 코멘트에 대해선 원칙적으로 모든 글에 다시 제 코멘트를 남깁니다. 그런데 그게 '즐거워서'가 아니라, 종종 '의무감'으로 그럴 때가 있어요. 특히나 제가 지금까지 가장 많은 노력을 투여한 필넷 글방의 경우엔 댓글이 많은 편이었는데요. 익명의 악플도 심심찮게 올라와서 더 그런 억지스런 의무감을 느낄 때가 많았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냐구요?
솔직하게 블로깅하자는 겁니다. : )

억지로, 예의상, 이 사람은 유명블로거니까 친해지면 유리하지 않을까, 라거나, 이 사람은 유명블로거니까 명망만 바라는 속물이야, 밥맛 없어.. 이런 편견과 선입견에서 좀더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그저 자기에게 '좋은' 블로그, 그런 '친해지고 싶은' 블로거들을 찾아서 블로깅하셨으면 좋겠습니다.


4.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죠.
저는 모든 블로거들이 유명해지는 건 표어의 취지에 공감하는 것은 차치하고,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이건 당연하죠. 저는 솔직히 제가 친한(친해지고 싶은) 블로거들이 '유명'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친해지고 싶은 블로거들은 '자신의 주관적인 진실을 그 자체로 드러내는 글'을 쓰고, '깊이 있는 인식 태도'(지식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를 갖고 있으며, 또 '관계'를 중시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블로거들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유명' 블로거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그다지 크지 않지만(물론 이런 속물근성 저에게 전혀 없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좋아하는' 블로거와는 정말 친해지고 싶습니다. 너무 뻔한 소리였나요?

'좋은 블로거가 유명해지는 그 날까지' 열심히 블로깅할 생각입니다.


p.s.
아참, 제가 가장 좋은 블로그로 생각하는 블로그(중 하나)는 [게이터로그] - 6시(현재) / 독백(과거) - 입니다. 제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게이터로그가 좀더 유명한 블로그가 되면 좋겠네요. 물론 지금도 유명하지만요. 많은 분들께서 게이터로그에 있는 많은 보석들을 자신의 것으로 훔쳐오시길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