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필넷의 운영정책에 제 나름으로 '대답'하는 차원에서 좀 제한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포스팅 중단),저는 필넷(한겨레 블로그)에 여전히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일년 반을 그 안에서 활동했으니까요. 그 필넷이 오는 3.31일 개편을 맞는다고 하네요.

조금이나마 이 소식을 알리고, 또 그 내용을, 물론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요, 검토하기 위해 포스팅합니다. 이 글은 필넷 도우미씨 방에도 동시에 등록할 생각입니다.





한겨레블로그 전면 개편 예고(3.31)
; '필진네트워크'에서 '블로그'(?)로.







0. 필넷 메인에서의 공지 내용 ( 여기 )

관심있는 분은 위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 )


1. 태그 지원
저로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데요.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나 올블에서 론칭 예정인 '블카'( http://minoci.net/25 )의 글 수집 표준이 '태그'라서 더 반가운 소식이네요.


2. 인터넷한겨레 UCC 서비스 '필통'과 연계
필통. - -;
뭐 나름 정감어린 이름이네요. ^ ^;;


"블로그 '필통 흔적'에 나의 모든 UCC 가 담"기고, "블로그에서 인터넷한겨레 UCC 서비스(필통)로의 글 동시 등록"하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게 "내가 올린 글과 동영상으로 만드는 나만의 웹진, I-미디어 서비스 신설"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지켜봐야겠네요.


인터넷한겨레와의 연계를 강화하는 방향은 적극 찬성입니다. 그런 기술적인 지원(?)으로서 "내 글에 라이브폴을 붙일 수"도 있다고 하네요. 


3. 기사희망글 관련
1) 기사희망 단추 (필벗들은 기사'허락'단추, 라고도 부릅니다)
필넷의 가장 촌스런(?) 모습 중 하나가 글 옆에 초록색 [기사희망단추]를 붙이고 있는 모습이었데, 이건 해당글방 운영자만이 볼 수 있도록 바꾼다고 합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요.

2) 기사글 추천 기능
구체적으로 얼마나 '반영'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지금까지의 관행을 나름으로 가까이서 지켜본 저로선 전적으로 기대할 수 없겠다 싶지만, 기사글로의 추천 기능이 신설된다는 점은 적극 환영합니다.

좀더 바라자면 구체적인 반영비율이나, 참고의 '수준'까지를 가급적 자세히 개량화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네요. 물론 현재로선 이것만으로도 환영하는 바입니다.


4. 새로운 명칭과 관련해서 ; '블로그'라구요?

'필진네트워크'에서 '블로그'로 바꾼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 좀 저로선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필진네트워크(필넷)이라는 이름에 저로선 좀 정이 들었는데, 그다지 감성적으로 호소할 수 없는 이름이라는 점에는 저 역시 동의하는 바라서 이건 이 쯤으로 하구요.

문제는 새롭게 바뀌는 서비스 명칭이 '블로그'라는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병원을 개업하면서 병원이름을 '병원'으로 짓거나, 언젠가 미래주의님께서 예시하셨듯, 메타블로그를 명칭을 '메타블로그'로 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블로그'라는 명사는 이미 '보통명사'인데, 이걸 어떤 특정 서비스의 '고유명사'로 사용하겠다는 건 좀 노골적으로 말씀 드리면, 벙찌네요. ㅡ.ㅡ;

그냥 인터넷한겨레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한겨레 서비스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면, 단순하게 '하니블로그'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혹은 필진들께 새로운 명칭을 공모하는 것도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deca님의 댓글(필넷 도우미씨 방에서의)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한겨레'라는 수식어는 당연히(^^;)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고지식하고, 성급하게 판단했네요. 전 "필진네트워크가 새로운 이름 '블로그'로 새로워집니다" 이렇게 공지에 나와서, 착오를 했네요.

명칭은 '한겨레 블로그'로 바뀌는 것 같네요. : )

성급하고, 다소 황당한 해석은 사과드립니다. ^ ^;

물론 저 개인적으론 '하니 블로그'를 선호하지만요. 운영진의 판단을 존중하는 의미에서는 선택을 따라야 할테지만, 전면개편되는 서비스를 '홍보'할 겸 '하니 블로그'와 '한겨레 블로그' 중에서 좀더 선호하는 명칭에 대한 의견청취 이벤트 같은 거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5. 서로이웃 기능
서로 이웃 하는 블로그는 저는 네이버 밖에는 모릅니다. 다른 블로그도 서로 이웃 기능 제공하는 블로그 있나요? 네이버를 '벤치마킹'(?)한건가 싶은데요. 이 취지를 도무지 모르겠네요.

이건 좀... 재고하셨음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네요. 기존 필넷 자체가 '커뮤니티'의 성격이 강하고, 또 그 안에서 좀 큰 논쟁이 벌어질 때 마다 파벌이니 뭐니 이런 익명의 댓글로 넘쳐나는 판에, '서로이웃' 기능은 그런 폐쇄성(에 대한 오해)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넷 자체의 다양한 성원들간의 스킨쉽을 보다 '개방적으로' 지원하는 기능에 대해 고민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6. 기타

* 메인디자인 개편
: "새로워집니다" 이렇게만 말씀하셔서 어떻게 달라질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 블로그 디자인 기능 업그레이드
: 이것도 봐야 알겠죠.

* 동영상 업로딩 기능 강화

* 필명 변경 가능
: 이건 미스터 잡 사태의 여파인건가 싶기도 한데, 뭐 잘 모르겠네요. 그 취지는.

* 감성형 통합포인트 + 강추 블로거 제도
: 필넷은 좀 과도한 순위시스템을 기반하는데요. 이를 유지하면서 그 표준을 좀더 합리화(?)하려는 시도로 생각합니다. 역시나 구체적인 모습은 봐야 알겠네요. 



이상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검토는 31일 이후 직접 체험해보고 할까 합니다.
물론 예정일 뿐이지요.  


: )



포스팅 타이밍

2007/03/26 12:06



0.
포스팅 타이밍을 종종 생각한다. 처음에는 그다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점점 더 '타이밍'을 고려하게 된다. 그런 내가 좀 스스로 웃긴다. 예전에는 정말 그냥 꼴리는대로(양해바랍니다 ^ ^; ) 썼던 것 같은데 말이지.

아니다, 생각해보니 예전부터 글쓰는 타이밍을 정말 많이 고려했던 것 같다. 특히 필넷에서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로 다른 의견 대립의 감정적인 소모가 우려되서. 그런데 지금 하려는 얘기는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기다.


1.
실은 나는

* 불륜드라마를 비판하는 스포츠신문의 '거룩함'에 대해 쓰고 싶었고(이건 티스토리),
* [한니발 라이징]에 대해 쓰고 싶었고(이것도 티스토리), 
* 조선일보의 '거실을 서재로' 캠페인의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해보고 싶었고,
* 관련해서 조선일보의 '엘리트 교육' 찬양론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포스팅하고 싶었고,
* 역시 관련해서 '3불 정책'에 대해, 모르는 거 정리하는 차원에서, 포스팅하고 싶었다.
* 그리고 아거님께서, 격려차원이었겠지만, '블로기즘과 민주주의'에 대해 써보면(책을 내보면) 어떻겠나, 하셔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지만, 준비하는 차원에서 초안 성격으로 이것저것 써보고 싶었다.
* 아참, 저작권법이나 선거법과 관련한 UGC 문제도 좀 공부하는 셈치고 포스팅하고 싶었고.

그런데 하나도 쓰지 못하고 있다.


2.
물론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다.
게으름에 발목 잡힌 게 가장 크긴 하다.
다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고, 이미 '지나 버린 이슈'라는 생각들이 위 글 상당수(물론 모두는 아니지만)을 쓰지 못하게 하는 이유기도 하다.

포스팅을 하면서도, 점점 더 '시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어떤 압박(?)을 은연중에 내면화시키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건 벌써 지나버린 이슈잖아?'라거나, 혹은 '이건 현재 이슈와는 너무 동떨어졌잖아?' 따위의.

블로그가 공적 '미디어'로서의 성격을 갖는 이상은, 그 미디어가 갖는 '시의성 높은 소재'에 대한 글쓰기는 당연한 유혹(?)내지는 압박(?)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시의성은 '타인에게도 의미있는' 글쓰기에 대한 요구를 그 안에 함축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포스팅은 기본적으로 그냥 쓰고 싶어서, 표현하고 싶어서, 그 표현이 일단은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어서 쓰는 것일테다. 그리고 아무리 개인적인 '독백'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공개되면' 그것 자체의 운명을 갖고, 새롭게 의미생성과정을 거친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그 과정은 전적으로 개인적이지는 않고, 관계적이라는 점에서, 공적이다.

자기에게 의미있는 글이 타인에게도 의미있는 글일 확률이 높지 않나, 그렇게 편하게 기대하면서 써야겠다. 스스로의 주절거림이 의미없는 '독백'이지 않을까 움츠리는 습관은 좀 의식적으로라도 떨쳐내고 말이지.

시의성이 없어도, 또 그게 뜨는 이슈가 아니라도, 나에게 진실하고, 또 진지한, 그렇게 가볍고 투명한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에 화답해줄 친구들을 언제가는 만날 수 있을테다.



p.s.
너무 시의성을 고려하는 제 스스로의 모습이 좀 웃겨서 짧게 써보는 겁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니, 히치하이커님의 글 ( http://liquideus.egloos.com/1020055 )에 썼던 댓글이 생각나네요. 프로그레시브 메탈 좋아하시는 분 혹 계시면 위 글 일독 권합니다.

: )



#. 이 글은 아주 아주 예전에 쓴 글인데요. 아틸라님의 [충동적 책사기]를 읽고 갑자기 생각 나서요. 이 글에 담겨진 냉소적인 뉘앙스는 아틸라님을 향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오히려 아틸라님의 글에 공감해서 등록하는 글입니다. : ).



다람쥐족 -‘느림’에 관한 단상



"기도가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기도 안에 있으며, 희생의 제사가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희생의 제사 안에 있듯이……"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중에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는 내게 갑자기 마르틴 부버가 찾아온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부버는 이렇게 말했고, 이 구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중의 하나인데, 시간이 기도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무얼까, 이따금씩 나는 곰씹어 보거나, 내 주변의 知人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수학문제처럼 하나의 해답이 존재하는 물음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각주를 드려다 보아도 거기에 진실한 답이 있지는 않다.

해답. 그렇다. 해답이 없는 질문, 질문 그 자체로서 한없이 이어지는, 끝이 없는 대화를 나는 상상해본다.

또 나는 상상한다. 시간과 경쟁하며,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시간과 싸우도록 강요하는 세상의 논리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살아가는 현대의 평범한 사람들, 그러므로, 나와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슬픈 손을, 그러므로, 우리의 부모들의 지친 눈동자를 떠올려 본다.

이를테면 퇴근 후의 지친 몸을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늘어뜨리고, 모니터를 이리저리 꾹꾹 누르는, 손톱에 때가 낀 앙상한 손을, 그리고 그, 혹은 그녀의 지친 눈동자에 들어있는 일일드라마의 화면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슬퍼진다. 그것이 아주 일상적인 현대의 행복이자 슬픔의 조건이 아닐까.

우리는 답이 정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답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답이 없다면, 그 답을 찾아 여행해야 하며, 그 답을 꼬셔내기 위해 대화해야하며, 그 답이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거다.

너무 오래 걸리니 실속이 없다는 것. 쉽게 말해서 '시간은 돈이다'라는 거지. 이 표어는 속도와 시간과 자본에 대한 아주 소름끼치도록 평범한 현대의 잠언이다. 그러니 "시간이 기도 속에 있다"는 말은 아주 배부른 몽상가의 잠꼬대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잠꼬대라고 비웃는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뭐라 힐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우리이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나인 것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나는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현대는, 참으로 신기하게도, 속도를 강요하다가도, 이런 종류의 책을 또한 강요한다. 나는 이 책의 진정한 가치와는 상관없이, 출판사의 '발빠른' 기획력과 책 제목과의 괴리감을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이 베스트셀러라는 책의 제목을 보면서, 그 내용과는 상관없이, 아주 짓궂게, 나는 생각한다. 병 주고 약 주는 세상에 나는 살고 있구나, 라고. 이 책을 '빨리' 읽고, 교양을 찾는 녀석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당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너무 속물인가, 아니면 세상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저 웃겠지. 하하하. 하지만 나의 진심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책, 예전에 읽어보려고 했지만, 저자의 의도를 책의 제목만으로 아주, 정말 너무도 악의적으로, 작정하고 오해하여, 천천히 읽어야지, 하면서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게으름과 느림이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게으름이 느림에 대한 일종의 유머가 될 수는,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보는 것이다.

중심에 대한 저항.
무중심의 여행. 
속도와 무관하게 부유하는 방랑.
일탈의 쾌감이 내면에서 터질 듯한 산책...

중심은 나를 잡아당긴다.
그래서 우리들은 빙빙 돈다.
그 구심력 때문에 우리들의 원심력은 가속도가 붙을 수 있다. 구심력이 강할수록 우리들의 속도는 빨라진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나가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붙잡는 힘이 세니 아무리 빨리 돌아도 원심력이 구심력을 이기지 못하는 바에야 한없이 빙빙 돌 수밖에 없다. 그 놈의 구심력은 우리들의 원심력과 비례해서 증가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 구심력에 우리들의 원심력을 맞추어야 한다. 그건 무언의 압력이다. 때문에 혹여 그 힘에서 벗어나거나, 그 힘에 휩쓸려 버린다면, 우리에게는 당장 '낙오자'라는 딱지가 이마에 붙게 된다.

그러니 그 힘을 견디며 빙빙 도는 기술을 채득해야 하는 수밖에.

현대인은 다람쥐족이다.
다람쥐로 길들여져 가고 있다.

빙빙 돈다.
빙빙 돈다.
쳇바퀴가 망가지지 않는 한 빙빙 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빙빙 돌다가, 어느 날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사야 하는 것이다.


p.s.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도 많을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한때 대박났던 피에르 쌍소의 책 제목입니다. 지금 찾아보니 '99년 프랑스 논픽션부문 1위'였다고 하네요. 이 글은 리포트로 쓴 글입니다. ㅎㅎ. 블로그에는 처음 공개하네요. 너무 상투적인 글이지만, 추고는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 )



자기 바라보기 - [오리엔탈리즘]

2007/03/23 23:53

#. 이 글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저 [오리엔탈리즘]를 소개하는 글에 불과합니다. 물론 예전에 쓴 글인데요. 좀 줄이고, 추고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 1935 ~ 2003.9.24]


자기 바라보기
: [오리엔탈리즘]와 실천적 지식인의 초상


Ⅰ. 서
이 글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상식적인(그러나 그 '상식'은 얼마나 조작된 것인가!)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상식적'이란 의미는 사이드가 주창했던 [세속적 글쓰기]의 차원에서 '상식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되도록 쉽게 쓰려고 한다. 어렵게 쓰려고 해도 그럴 지식이 없기도 하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익숙하고, 어떻게 보면 생소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그리고 좀더 풍부한 배경지식과 함께 파악하는 것은 이 글의 기본적인 목표다.

이 책은 내가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는 한 위대한 인물에 대하여 다른 관점으로 조명한다. 그건 충격적이다. 그 짧은 문장의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물론 동양인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 공화력 18일(The 18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중에서


사이드는 김성곤과의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영국은 인도에 대해 두 가지 의무가 있다. 첫째는 아시아적 사회를 없애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그런 다음, 서구사회의 물질적 기반을 그곳에 세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1)


마르크스마저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함정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과연 ‘오리엔탈리즘’이란 무엇인가?

내가 [오리엔탈리즘]을 처음 접했던 것은 97년 8월이다. 다소 지적 허영에 들떠 있던 시절의 나에게 마르크스와 프랑크푸르트 학파(특히 마르쿠제), 그리고 미셀 푸코와 에드워드 사이드는 철학과 사상사의 광대한 오딧세이를 항해하는 위대한 모험가들로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사이드는 각별했다. 그는 서구 학자가 아닌(물론 당시 그가 몸 담고 있었던 대학은 미국의 콜럼비아 대학이었지만), 제3세계출신 학자로서, 자기 존재의 조건, 그 정체성의 근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거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이제는 어느 정도 그 이데올로기의 배후에 대한 부정적 회의를 내포하는 것이 되었다. 문예잡지나 시사잡지, 혹은 영화잡지에 이르기까지 비평용어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은 이제 그 숨은 함의에 대한 어떤 태도를 지칭하는 말로 쓰여지고 있다. 그래서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 말이 생산, 유통되는 과정과 시스템의 어느 한 쪽에 대한 비판이나 옹호를 의미하게 되었고, 중립적인 태도는 정말 '농담'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공로이다. 이제 누구도 오리엔탈리즘이 그저 단순히 동양을 가리키는 단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가치판단을 그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어떤 판단(그것은 앞서 말했듯 부정적인 회의나 비판이 대부분이다)을 담고 있는 말이 되었다. 이 글은 [오리엔탈리즘]을 통해서 본 오리엔탈리즘의 의의와 그 연원, 그리고 그것이 추구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고찰하고, 더 나아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Ⅱ. 오리엔탈리즘의 의의
1. 오리엔탈리즘의 개념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오리엔탈리즘을 정의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이며,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 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distinction 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동양을 취급하기 위한 "동업조합적 제도"이며,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고 사이드는 말한다. 즉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서 스스로의 힘과 정체성 identity 을 획득한 것이며,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타자’라는 존재를 만들어놓곤 스스로는 ‘자아’를 획득하는 일종의 지배철학이다.

사이드는 역사상의 그 무수한 위인들이 그 당대의 역사적 한계,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자신의 ‘지리적’ 한계, 즉 서구 중심 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로크도 인종차별주의, 노예제도의 옹호, 그리고 제국주의의 비호사상에 물들어 있었으며, 플로벨이나, 존 스튜어트 밀, 매슈 아놀드, 토마스 카알라일, 조지 엘리어트 그리고 심지어는 찰스 디킨스까지도 그런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사이드는 그런 의미에서 '거짓된 영웅 신화'를 거부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아리비아의 우상이었던 T.E. 로렌스일 것이다. 사이드는 그가 백인으로서의 우월 의식이 없었다면 그리고 야만인들을 교화시키고 질서를 부여하겠다는 선교사적 의식이 없었다면 결코 그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로렌스가 결국은 스스로를 아라비아인들의 총지도자 자리에 앉혔음을 지적한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과정'의 메카니즘임을 분명히 한다.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양은 유럽사회라고 하는 '우리들' 세계의 경계선 밖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교정되고 처벌된다. 그리하여 동양은 '동양화'된다"[주3)].

즉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본질이 그것 자체의 고정된 의미,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어떤 형성과 과정의 메카니즘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는 담론체계임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표현을 빌었음이 분명한 '교정과 처벌'을 통한 오리엔탈리즘의 본질로서의 '형성화 과정'의 속성을 지적한다.


2. 연혁

사이드는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시키고, 지배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서양에게 동양을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의 경험과 서양의 의식 속에 투사된 그림자로서만 동양은 존재한다. 그리고 서양은 우선 동양을 신비화시킨다. 꿈과 보석과 환상의 왕국으로 동양을 신비화시킨 서양은, 그런 다음엔 그 환상과 낭만을 수탈하기 위해서 동양을 식민지화시킨다. 그리고는 동양을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하나의 거울로 삼아 서양은 지배자, 교화자, 그리고 우수인종이라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담론의 체계가 생겨나고 발전해온 연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리엔탈리즘의 특징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변화의 시초는 18세기 중엽 이후라고 사이드는 말한다. 그 시기에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규제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계기,

ⅰ) 유럽에서 동양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증대한 점
ⅱ) 유럽이 지배자의 지위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언제가 강력한 힘을 갖는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이 그것이다[주3)].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동양 지배는 19세기초에서 2차 대전까지는 영국과 불란서가, 2차 대전이후로는 미국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3. 방법론으로서의 '담론'이론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서문에서 자신의 방법론에 대한 아이디어를 푸코에게서 빌어오고 있다고 밝힌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담합을 분석하기 위해 그 양자의 미시적 역학을 '담론'이라는 모델을 통해 파헤치고 있다. 사이드는 그 아이디어를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의 태도와 시스템을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활용하고 있다. 즉 사이드는 미셀 푸코의 방법론을 준용하고 있다. 그래서 사이드는 권력과 지식의 담합이라는 이론적 역학의 모델이 어떻게 서양이 동양을 생산해내는 과정을 분석하는데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푸코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 Discipline and Punish』에서 감옥과 병원이라는 합법적인, 그러나 다분히 독재적인 사회기관의 연구를 통해 지식이 어떻게 권력으로 이어지고, 그 둘의 공모는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탐색한다. 사이드는 똑같은 방식으로 오리엔탈리즘의 구조를 해부한다. 그 권력과 지식의 담합이 어떻게 동양을 지배하는, 억압하는 체계를 구성하는지 사이드는 구체적인 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하나의 ‘담론(언설) discours'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그것이 신화나 허구임을 밝혀서 마치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사이드는 거듭 지적한다. 언설로서의 오리엔탈리즘를 검토하지 않는 한 그 거대한 조직적 규율의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 없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4. 자기고백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
사이드는 그 자신 ‘저주받은’ 팔레스타인 출신이다. 비록 미국 일류 사립대학의 명망 있는 교수이지만, 그 자신 한번도 ‘나의 본질은 동양인’이라는 의식을 잊은 적은 없다고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직접적인 집필동기가 ‘서양 속의 동양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임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인 미국에서 팔레스타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사이드의 작업이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뿌리와 자기가 태어난 모국어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자세는 그의 비평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비평이란 오늘날과 같이 추상적이고 형식적이고 귀족적인 것이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세속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하며, 문학과 비평이 만들어지는 토양이자 배경인 역사,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텍스트의 이해나 비평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이른바 [세속적 글쓰기]). 그는 개인적으론 자신의 조국인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의 해결 방법을 자기 나름의 학문 영역에서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 특수성만큼이나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주저인 [오리엔탈리즘]은 그 가장 좋은 본보기라고 말할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위현장에서 직접 돌을 던지는 백발의 사이드

Ⅲ.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의식
1. 지구촌이라는 허상

[오리엔탈리즘]은 ‘지구촌’이라는 말의 허구성에 대한 반성적 비판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이미 지루한 질문처럼 느껴진다. 인터넷 혁명이라고 불리는, 그 속도를 느낄 수조차 없을 만큼 빠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정체성’은 지워지고, ‘고유성’은 소멸되고 있다. 나는 한국인이다, 라는 의식도 우리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에 사는 국민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자각케 하지는 못한다. 그 말은 이제는 생소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컴퓨터 모니터이며, 헐리웃 영화가 가득한 극장이며,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 체인점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환상이며, 위장술이다. 그것은 서구와 제3세계의 차이를 지워버린다. 그것은 또한 아직도 이 지구상에 헐벗고 굶주린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감추고, 서양의 지식과 문화를 일방적으로 유포하고 강요하는 기능을 또한 맡고 있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혁명(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정보의 편향과 차별적인 위계질서), 헐리웃으로 상징되는 미국 문화의 전세계적인 지배는 그러나 우리가 고민하고 아파하는 땅이 미국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여기’라는 것을 망각시킨다. 컴퓨터의 작은 모니터가 보여주는 상업광고 같은 세상, 헐리웃 영화의 솜사탕 같은 세상,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깔끔하고 정돈된 세상의 이미지는 우리의 내부에 스며든다. 아직도 점심식사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고, 전쟁이 끝나지 않는 ‘휴전’상태에 있는 땅이라는 사실은 그것들로 인해 감추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소파(SOFA. 한미행정협정)의 불평등 조약으로 우리 아이들을 죽인 미군 범죄가 무죄로 판결되는 땅에 우리는 살고 있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의 그 어처구니 없는 판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 앞에서 우리는 일개 극동의 변두리 나라에 지나지 않는가. 적어도 그들, 미국, 미국이라는 나라를 말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가 아닌 그들의 정책은 그것이 진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 땅에서 벌어진 명백한 범죄에 대해서 우리가 재판할 수 없다는 이 자명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올림픽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당당한 주권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백한 오리엔탈리즘의 현대적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될 수 있다. 소파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민서명운동에 참여하고, 장갑차 사건의 정당한 재판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에 우리의 작은 목소리를 더 하는 것. 그리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다수 숭미언론들의 의식적인 조작에 대해 비판하는 것. 이는 미국-한국이라는 명백한 오리엔탈리즘의  실현태로서의 불공평한 관계를 청산하고 극복하는 작은 출발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진실의 목소리 하나로, 스스로 작으나마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2. 월드컵과 세3세계의 그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적 분석틀로 지난 2002년 6월의 월드컵을 다시 떠올려 보기로 하자. 월드컵은 우리의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였다. 16강의 염원은 4강 신화라는 더 큰 보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고, 질서정연하고 열광적인 우리의 응원문화는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크게 주목되었다. 

피버노바.

월드컵의 열기 한 편으로 나를 잠시나마 각성시킨 것은 신문의 작은 기사였다. '피버노바'라는 월드컵 공식 지정구를 만들고 있는 나라는 이른바, 제3세계,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인도라고 했다. 그 공을 만드는 과정은 기계화가 곤란하여 일일이 손으로 꿰메어야만 하는 공정이 있다고 했다. 그 공을 만드는 건 주로 아이들이었고, 하루 종일 일을 해서 그 아이들이 받는 돈은 고작 1~2달러라고 했다.

그 작은 기사는 그 공, '피버노바'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화학약품들로 인해 암에 걸려 사경을 헤메는 아이를 보여준다. 정확히 암과 그 화학약품들과의 인과관계 판정은 확실하게 드러난 바 없지만, 상당한 개연성이 존재한다고 추정된다고 그 기사는 밝힌다. 그 아이의 다가올 죽음 앞에서 '세계화'는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인류의 축제인 [월드컵]은 또 어떤 의미인가? 우리의 관심이 월드컵의 꿈같은 환상에 젖어있는 동안, 그 환상의 축제 이면에는 암으로 신음하는 제3세계의 작은 소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비극의 드라마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불과 반세기 전 모습이 그와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경제가 서구 뒷치닥거리 산업들을 통해, 이를테면 섬유산업이라는 고밀도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경공업위주의 극심한 노동착취를 거름으로 하여 성장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신음하며 쓰러져 갔다. 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그러한 세대의 상징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은 불과 30여년 전 우리의 모습인 것이며, 그것이 다른 제3세계에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플라터(피파회장)의 오만한 태도들, 그를 등에 엎은 바이롬사의 어처구니 없는 경기장 공석사태, 안정환을 둘러 싼 이탈리아의 야만적인 발언들 역시 우리의 자긍심과는 상관없이 서구가 우리를 바라보는 태도는 여전히 그 오리엔탈리즘의 관성을 잃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것들을 굳이 오리엔탈리즘의 연장선에서 고찰한다는 것이 억지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행태가 오리엔탈리즘의 정서적 잔재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닐까.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아직도 변방의 낮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 불과한 것이며, 그래서 그토록 무례하게 우리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Ⅳ.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우리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이미 포기한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픈 질문이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을 말하자면 우리를 ‘한민족’이라고 부를만한 문화적 연대,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서구중심주의가 내면화되어 있다. 우리는 서양놈들이 아닌데도 말이다.

더 나아갈 것도 없이 우리의 대학 문화를 생각해보자. 80년대 90년대 초의 대학문화가 독재 정권에 저항하면서, 그 독재 정권을 가능하게 했던 미국의 제국주의를 또한 거부하면서 보여주었던 것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패기 어린 고민이었다. 그래서 풍물패 동아리들이 생겨나고, 우리말을 살리려는 소박한 운동이 더불어 진행되었던 것이다. ‘서클’이라는 말이 ‘동아리’라는 말로, ‘엠티’라는 말이 ‘모꼬지’라는 말로 바뀌는 그 작은 차이는 하지만 얼마나 커다란 차이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어떤 움직임도 대학 사회에선 존재하지 않는것 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미 사이드의 냉철한 지적처럼 ‘동양인’으로 규정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언어습관 속에서도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의 잔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문화사대주의와 공동분모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원서.原書'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보통은 영어로 된 교재를 말한다. 본래의 교재는 영어로 된 책, 즉 원서이며, 본래적이지 않은, 부차적인 교재는 우리말로 된 책이란 말인가. 이러한 전도된 언어사용은 습관이라는 견고한 골격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쉽게 허물어뜨리기란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Ⅳ. 결
[오리엔탈리즘]의 궁극적인 전언은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다름이 지배/피지배의 종적 관계가 아니라 조화와 평등의 횡적 관계로 서로를 인정하는 성숙한 세상에의 염원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 문화는 어떤 것이며, 우리의 뿌리는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즉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야 우리와 다른 문화를 인정할 수도, 그들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글쓰기가 그 자체로서 우리 안에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성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찌꺼기들, 그것과 유사한 형태로서 식민사관을 잠시 생각해보자. 일제의 잔재로서의 식민사관은 우리 역사에 대한 교묘하게 조직되고, 설계된 역사관의 흔적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극복되었는가.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 광범한 캠페인을 통해서 비로소 그 견고한 껍질이 깨어지고, 그 알맹이를 드러내며, 우리는 그 알맹이들을 쓰레기 통에 쳐 박을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그 과제가 완벽하게 수행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우리에게 치욕이며, 기만이며, 거절해야할 수치스런 역사의 상처임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선 그것이 앞서도 말했듯, 그 말이 담고 있는 비판적 함의에 대한 충분한 공감이 비평의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확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지만, 일상의 차원에서 그 오리엔탈리즘의 관성과 내면화는 아직도 여전함을 안다.

가령 국악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그네들의 영혼으로, 혹은 그네들의 설움이나 기쁨으로 만들어낸 노래들, 그 가락들이 우리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악’이다. 그것을 우리 문화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가 우리를 ‘한국인’이라고 ‘한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타계한 한국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의 음악은 그런 넓은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국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 역사의 아픔이, 우리가 체험한 고통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로서 되돌아본다면 윤이상과 같은 큰 인물이 정작 자신의 조국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아직도 우리 안에서 내면화된 반공이데올로기 만큼이나 치명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많은 문제의 근원적인 모순들은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것. 그 순응화되고, 무비판적으로 길들여진 그 습관들, 사고의 패턴들에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긍정적으로 해체되어야 하고, 다시 세워져야 한다. 여전히 우리 안에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오리엔탈리즘'이 살아 있다.

[주]
1) 김성곤, '텍스트로서의 세계와 문학비평', <미로 속의 언어; 현대미국작가와의 대화>, 민음사, 1986, pp.99~121.
2)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 p. 120.
3)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 p. 75.


* 확장점
희한한 인용과 주석 (neoscrum)
http://blog.jinbo.net/neoscrum/?pid=485 . 추천.



#. 조언을 구합니다. ㅡㅡ;; 해당업체와 문의했지만, 그다지 만족할만한 해답을 구하지 못했네요. 두 가지 문제입니다.



[상담] 1. 늦게 열리는 페이지와 2. 퍼미션 변경





- 문의

저는 태터툴 블로그를 사용하기 위해 귀사와 계약했는데요.
http://minoci.net 입니다.

1. 페이지가 너무 늦게 열립니다.

보통 2, 3초는 기본이고, 어떤 때는 4, 5초씩 걸립니다.
다른 페이지로 변환되는 속도도, 제 컴퓨터로 여는 다른 웹페이지들보다 현저히 늦습니다. 이벤트 기간 중에 (1년 가격으로 5년 동안) 계약해서 그런것인지.. ㅠ.ㅜ;; 제 웹페이지(블로그) 방문자는 근래 일일 단위로 많으면 5백여명 안팎, 적으면 1, 2백명 안팎인데요. 이 정도의 방문객 숫자 때문에 페이지가 느려지는 것인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계속 늦게 페이지가 열리면, 증설 혹은 이전을 고민해야 할 것 같아서요.

- 답변.
안녕하세요 웹호스트 입니다.

1. 확인해보니 늦게 뜨는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는 아무래도 db쪽과의 연동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듯 합니다만...
서버쪽 문제는 아닌것으로 보여집니다.
회선 속도등의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 문의
2. 블로그 스킨의 설정을 변경(편집)하려고 하면, '작성권한 없습니다'라는 팝업이 뜹니다. 이는 전화로도 잠깐 문의드린 사안인데요. ftp를 이용해서 분명히 해당 skin 페이지의 작성권한을 '허용'으로 바꿨는데도 불구하고(퍼미션 넘버를 777로), 제 블로그 편집툴에서 작업하고 '저장'을 누르면, 권한이 없습니다. 이렇게 팝업이 계속 뜨네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 답변
2. ftp클라이언트는 기본적으로 파일전송 프로그램입니다. 이는 퍼미션이 쉽게 변경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자주 변경 하실 경우라면 putty등의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터미널 서비스를 사용하시고..
자주 변경이 아니신 경우라면 당사에 요청하시면 퍼미션 변경 하여 드리겠습니다.


- 2차 문의
신속한 답변에 우선 감사드립니다.
1. 늦게 열리는 페이지
"이는 아무래도 db쪽과의 연동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듯 합니다만...서버쪽 문제는 아닌것으로 보여집니다. 회선 속도등의 문제는 전혀 아닙니다".

라고 말씀 주셨는데요.

현실적인 해결방법(가급적 간단하게요)을 여쭙고 싶네요.
db 연동 문제라고 추정하셨는데, 만약에 그것이 정말 문제라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요?

- 2차 답변
음....
1. 저도 프로그래머가 아니라서 정확한 문제점을 꼬집을 수가 없습니다. db문제인지도 정확하진 않습니다. 프로그램상에서 db와 연동되는 부분에서 자료가 많거나 병목현상에 의하여 느려지는 경우를 추측하여 볼 수가 있습니다.

- 2차 문의
2. 퍼미션 변경

1) putty등의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터미널 서비스를 사용하시고..
2) 자주 변경이 아니신 경우라면 당사에 요청하시면 퍼미션 변경 하여 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셨는데요.

1)에 대해 좀더 쉽게 설명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2)에 대해선 우선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네요. 제 블로그 스킨의 퍼미션을 조정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게 제대로 요청한 것인지 모르겠군요). 제 블로그 스킨은 '레터-태터'입니다.

- 2차 답변.
2.
1) http://www.webzero.co.kr/m_zterm.html 참조하여 주세요.
2) 해당 스킨이 있는 정확한 경로를 알려주세요.


~~~~~


이상이 제 문의 및 업체의 답변이구요.
업체의 답변이 신속하긴 한데, 저로선 해결된 것이 없네요. 2.의 경우엔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참조하라고 알려준 페이지의 활용으로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 아무래도 2- 2)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것 같아요. 퍼미션 변경을 위한 프리웨어의 활용이 아직은 제겐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요.

제 시급한 고민은 1. 입니다.
너무 늦게 열리는 페이지요.
이거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요?
염치불구하고, 많은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 -)(_ _)



p.s.
참고로, 일단 너바님의 조언에 따라
1. 사이드바의 링크메뉴를 잠시 사용하지 않고,
2. 첫페이지에 표시되는 글 갯수도 5개에서 3개로 줄인 상태입니다.

그동안 신경써주신 너바나나님께 특히 감사드립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