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좋아했던 시와 낱말

2012/07/15 05:44

deulpul의 글, “시인 이상이 가장 좋아했던 시와 낱말”을 읽고 

나는 시를 참 좋아하는 편이다. 그래봤자 ‘시의 시대’로 불렸던 80년대의 시들에 한정되긴 하지만. 특히 황지우(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그 전까지만 읽었다)와 박노해('참된 시작'은 별로였고, 노동해방문학의 르뽀시들도 그땐 참 우와! 했는데, 지금이나 그때나 ‘노동의 새벽’이 여전히 좋다)가 참 좋았다. 하지만 가장 반복해서 여러 번, 그 여러 번은 한 쉰 번 이상, 어쩌면 백 번 이상 일텐데, 그렇게 여러 번 읽은 시집은 이성복(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남해금산)과 기형도(입 속의 검은 잎)가 거의 유일하다. 정현종의 서늘하지만 따뜻한, 여전히 어쩔 수 없는 도회적 감성이 좋았고, 장정일의 ‘서울에서 보낸 3주일’이나 ‘길 안에서의 택시 잡기’는 그 객기와 뒤틀림의 감성이 꽤 공감 어리게 신났던 기억이 난다(햄버거에 대한 명상은 별로). 오규원, 황동규, 그리고 황인숙과 유하, 김지하, 이상, 김수영, 함민복 등은 그냥 그때 그때 읽었다. 유하 시집(아마도 ‘바람 부는 날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에 김지하를 인사동 찻집에서 보고 ‘지하 형’이라고 부르는 어떤 후배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는 잔상은 그런 세속적인 편린들일 뿐이다. 그 밖에 유명하다는 랭보, 보들레르, 발레리, 로트레아몽, 네루다 등의 시를, 물론 한국어로 번역된 책으로 읽었다.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를 뽑자면, 그건 아마도 황지우나 박노해의 시는 아닐 거다. 아마 네루다의 ‘망각은 없다’나 이성복의 ‘이제는 다만 때 아닌, 때 늦은 사랑에 관하여’를 뽑을 것 같다. 하지만 제목에서처럼 내가 오래전 가장 ‘좋아했던’ 시는 황지우의 ‘나는 너다. 17’이다.

나는 너다. 17

내가 먼저 대접받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러나
하루라도 싸우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으니.
다시 이쪽을 바라보기 위해
나를 대안으로 데려가려 하는
환장하는 내 바바리 돛폭.  
만약 내가 없다면
이 강을 나는 건널 수 있으리.
나를 없애는 방법.
죽기 아니면 사랑하기 뿐!
사랑하니까
네 앞에서
나는 없다.
작두날 위에 나를 무중력으로 세우는
그 힘.

지금 읽으면 그때만큼 좋진 않지만, 그땐 참 환장하게 좋았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했던 낱말들은 너, 바람, 풍경, 무지개, 아이…다. 그 어감이나 조어 자체의 물질감이 좋다기 보다는 그 낱말이 지시하는 이미지의 빛과 투명함이 좋다. 아, 그리고 요즘은 ‘달고나’도 좋더라. 하얗고, 귀엽고,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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