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최초, 한겨레블로그(   http://blog.hani.co.kr/skymap21/4495 )에 등록했던 글을 추고한 글입니다. 추고는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이 글은 이 블로그 민노씨.네[minoci.net]의 지향을 알리는 의미에서 공지로 사용합니다. 이 글은 블로그카페 '잇다넷'의 철학과 방향에 대한 너바님 의 질문( 저널리즘과 블로기즘의 관계 )에 대한 최소한의 대답 성격이기도 합니다.


저로선, 이 글이
1. 그저 '곤조 저널리즘'를 조금이나마 소개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2. 좀더 바라자면, 전통 저널들이 추구한다는, 그 객관성과 불편부당의 신화가 얼마나 가식적이며, 위선적인지를 조금이나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네요.
3. 여기서 조금 더 나가면, 신문의 미래'와 '블로그'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벼운 토론이 이 서툰 (소개)글로 이끌려 나온다면, 물론 공상어린 기대일 뿐이지만요, 정말 더 바랄 나위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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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ter S. Thompson
(1937 ~ 2005)




곤조저널리즘와 블로그정신(블로기즘) 









0. 곤조 저널리즘과 헌터 S. 톰슨의 죽음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아래 링크출처에서 소개한 [필름 2.0] 한선희 기자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정말 좋은 글이다. 다만 우리들은, 실은 나는 게으르니까.. 노파심이 생겨서.. 여기서는, 그 개요를, 발췌인용한다.


곤조 저널리즘에서 '곤조(Gonzo)'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곤조 저널리즘’이라는 말은 ‘켄터키 더비는 퇴폐적이고 타락했다’를 읽은 어느 저널리스트가 내뱉은 감탄사에서 유래했다. 거침없고 자유 분방한 수사로 분노와 울분을 토해냈던 그 기사에 대해 보스턴 글로브의 기자가 “이건 완전히 곤조!”라고 외친 것이다. ‘곤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어가 아니라 보스턴에서 '술자리에서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을 뜻하는 아일랜드 속어다. 혹자는 ‘황당함’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곤자가스(gonzagas)’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필름 2.0 한선희 기자).


'곤조 저널리즘'이란 위 '자유분방한 수사, 분노와 울분'에서 짐작되는 바와 같이  "간결성과 객관성을 중시했던 보도 저널리즘의 원칙을 깨뜨리고 취재 대상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면서 필자의 개인적인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고, "취재 대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관찰하고 이를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는" 저널리즘이다.

곤조 저널리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톰슨의 스타일은 1960년대 톰 울프, 게이 탤리즈, 노먼 메일러 등이 주도한 미국 ‘뉴저널리즘’ 운동과 궤를 같이 했"지만, 뉴저널리즘이 "어떤 식으로든 필자가 사건을 재구성해서 보도하는 것"이라면, "곤조 저널리즘은 사건 현장에서 기자가 노트에 기록한 것을 편집 없이 그대로 발표하는 것에 가까웠"다고 한다(큰 따옴표는 한선희).

곤조 저널리즘에서 '곤조'의 유래는 들풀 님의 글을 참조할 것. (2017년 1월 6일 업데이트)


1. 곤조 저널리즘, 그리고 다시 발견한 '게이터로그' 이야기.

내가 곤조 저널리즘, 그 어휘로나마 처음 접한건, uglish(= 아틸라님. a77ila님)의 글 [한겨레에 훈수하기: 한겨레다운 중독성] 에서다. 그게 작년(2005년) 말이다. 시간 참 빠르다. 하지만 난 잊고 지냈다.

내가 다시 uglish님 필넷점을 찾은 이유는 [기자시험 유감 1] [기자시험 유감 2 ; 즐거운 논쟁을 위하여]라는 연재 포스팅 자료를 구하는 차원이었는데, 거기서 오랜만에 uglish님의 글 이것저것 다시 읽다가, 위 '한겨레에 훈수하기'도 읽은거다.

그 글에서 다시 아거님에게 가는 열쇠(링크)를 발견했다. [GatorLog]를 다시 발견한 기분, 이건 뭐, 보물섬을 찾은 기분이랄까? 이미 많은 블로거들에게 알려진 유명한 블로그지만, 정말 여기엔 많은 보석들이 있다. 

특히 저널리즘과 블로기즘 ( http://gatorlog.com/mt/archives/002340.html )에 대한 깊이 있는 에세이와 칼럼이 여기에 있다. 여기서 '한겨레는 한겨레다운 중독성을 만들어야 한다'을 나는 '다시' 만났다. 

나로선, 굉장히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해서, 좀 길지만, 이하 원문 그대로 인용한다.

나는 한겨레가 지향해야 할 길은 두가지여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블로그글 같은 뉴스”를 만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드 뉴스(경성 뉴스)를 줄이고 피쳐 기사를 늘리는 것”이다[*민노씨 주. 피쳐(Feature)기사 : 사실 자체보다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나 화제거리 등 흥미제공을 목적으로 하며, 정보전달의 목적보다는 공중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한 사실보다 진한 감동을 주는 뒷이야기 등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읽을 거리의 기사].

나는 오래전에 우리나라 신문이 기사 트랙백을 도입할 것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를 가장 먼저 시도하는 신문사가 한겨레이길 바랬다. 아직까지 기사 자체에 대한 트랙백을 시도하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최근 한겨레 필진 등의 시도를 아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지금 쓰는 이 글도 홍세화님의 글 아래에 트랙백을 보낼 생각이지만, 앞으로 신문의 기사가 반드시 6하원칙에 근거한 뉴스이거나 연통의 글을 이어받는 기사일 필요가 없다고 본다.

때로 필요하면 칼럼이 아닌 기사에도 과감하게 “1인칭 화자”를 도입하는 이른바 곤조 저널리즘의 도입꺼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물론 1인칭으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1인칭으로 쓰는 기사는 잘못 쓰면 아주 유치한 글이 될 수 있는 위험이 있기에, 남용하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내가 과거 저널리즘 교과서에 나온 형식을 깨자는 이야기는, 이제 기자들도 “지켜지지도 않을 중립성”이라는 허울좋은 신화를 과감히 부수고 좀 더 과감하게 뉴스를 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황우석 파동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독자들은 이제 단순히 뉴스를 읽는데서 끝나지 않고 뉴스를 “주관적”으로 해석해서 자기 식으로 다시 전파하는 뉴스의 수용자이자 재생산자로 돌아서고 있다.

기존의 주장을 되풀이하자면 이른바 “오픈소스 저널리즘“ 까지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면이 아닌 온라인 편집에서는 이런 오픈소스 저널리즘이 점점 확산되고 있지만, 이제 그 영역을 지면에도 반영시킬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미 관점이 명확한 신문이기에 한겨레보고 관점있는 신문이 되달라고 부탁할 이유는 없을 듯 하다.

두번째는 피쳐기사와 피쳐기사를 전문으로 쓰는 기자들을 늘여야 한다. 피쳐기사는 칼럼도 에세이도 아니다. 물론 관점을 갖는 기사일 필요도 없다. 인터넷의 등장과 우리나라처럼 포탈의 뉴스 중계라는 기형적인 뉴스 배급구조를 가진 나라에서는 이제 통신사발 뉴스를 전달하는 신문사는 재미가 없다.

일례로 미국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이 대결하고 법정 공방도 있었지만 이런 뉴스들을 자세하게 기억하거나 주목하는 사람은 드물다. 머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경성뉴스를 피쳐기사로 바꾸면 이야기나 관심이 틀려진다. 일전에 소개한 그랜드 캐년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이라는 피쳐기사가 그 대표적인 기사다. 뉴욕타임즈 1면에 실려서 전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이런 기사들이 바로 앞으로 한겨레가 추구할 기사들이다.

결론적으로 한겨레가 저널리즘과 블로기즘의 경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블로거 독자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진짜 “중독성”있는 신문을 만들길 희망한다

- 아거, 한겨레는 한겨레다운 중독성을 만들어내야 한다 [December 27th, 2005]
http://gatorlog.com/?p=297


아거님의 지적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물론 그 방향에 대해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않는다.
특히 한겨레의 관점을 너무 쉽게 호의적으로 긍정하는 부분은 그렇다.
하지만 아거님의 지적은 정말 '실천적인' 대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고급지 한겨레 선언' 은 이러한 바람과 반대로 가고 있는 것도 같지만,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다. 위 아거님의 의견은 '고급지 한겨레' 논의에서 깊이있게 고민해야 마땅한, 의미있는 대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각설하고, 여기서 내가 주목한 건, '저널리즘과 블로기즘의 경계'다.
흔히 가장 중요한 문제는 '경계'에 존재한다.
명확한 것은 문제 없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곤조 저널리즘은 전통 저널리즘에 어떤 의미를, 충격을 줄 수 있을까?


이하 이에 대해서 서툰 생각을 정리해본다.
물론 '한겨레 블로그 필넷'에서의 활동을 토대로 한, 주관적인 기술이 주를 이룰 것 같다.


2. '불편부당'이라는 '농담' 

내가 주로 필넷에서 쓴 글은 필넷 그 자체, 조선일보, 대추리, 황우석 파동, 영화글, 그 밖에 내 잡다한 단상들이다. 그러니 이것들에 대해 주로 쓰겠다.


1) 황우석 파동 예를 들자
조선일보도 그렇고, 한겨레도 그렇고, 불편부당,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는 저널리즘 본연의 사명을 다하겠다, 놀고 있다, 이거 농담이다.

아거님도 짧게 예시하셨지만, 황우석 파동은 전통 저널리즘이 가진 그 위선, 그 놀랄만한 비윤리성, 그 노골적인 상업주의, 그러니 저널리즘의 모든 부정적 모습을 어떤 드라마보다 더 극적으로 보여줬다. 황우석 파동에서 자유로운 언론은 없다(그래도 있다면 '프레시안' 정도랄까?). 

황우석 파동 와중에 저널리즘의 불편부당과 사실의 객관적인 보도는 '실종'됐다. 거기에 남은 건 광적인 메카시즘(피디수첩 죽이기)과 '진실보다 앞선' 애국주의(중앙일보 홍혜걸 기자는 TV 토론에 나와서 진실은 국익을 위해 유보될 수도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러니까 기자수칙 1장 1절을 국익이라는 모호한 유령과 바꿔 먹었다. 기자의 전문성은 '의사'라는 타이틀로 생기는게 아니다)였다.

조중동이 만든 '잔혹 판타지극' ( http://wnetwork.hani.co.kr/skymap21/708  )에 시민들이 홀리는 동안, 그 위선적인 담론생산집단이 '여론'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거기에 즐겁게 편승하고, 유린하는 동안에, 한겨레를 위시한 소위 진보언론들은 그저 먼산 구경과 뒷북으로 일관했다. 

다만 '황우석 파동'은 의미있는 교훈을 남겼다. 그 아비규환, 그 소용돌이 와중에 소수의 네티즌들, 블로거들은 조중동이 생산해내는 쓰레기 뉴스를 그저 수용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뉴스를 직접 비평하고, 스스로 궁금해하며, 국익이라는 허깨비가 아니라, '진실' 그 자체에 목말라하며, 진실을 그 자체를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한 채로 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그들은 거대언론에서 상업적으로 활용하고, 기만의 재료로 삼은, 그리고 결국은 포기한 '황우석을 추적' ( http://wnetwork.hani.co.kr/skymap21/709 )했다.


2) 조선일라는 기만의 공장, 그 가공할 만한 매트릭스, 조선일보 월드 
우리나라에서 가장 '당파성'을 잘 구현하고 있는 신문은, 내가 보기엔, 한겨레신문이 아니라, 조선일보다. 그 사소한 짜투리 글(팔면봉 같은거) 하나에도 조선일보의 당파성은 구현된다. 여기에 '개별 기자'가 갖는 진실에 대한 내적 고민, 그 실존적 고민이 편집권과 긴장하는 흔적은 없다.
조선일보라는 거대한 이름 안에서 기자는 그저 조선일보 월드의 부품, 일개 기능공에 불과하다. 그리고 조선일보의 저널리즘은 反저널리즘이다.


그런데 조선일보의 위대함(?)은 그 당파성을 드라마로 연출하는 탁월함에서 나온다. 나는 그걸 '드라마 조선일보' ( http://wnetwork.hani.co.kr/skymap21/4202 ) 라고 부른다.


가령 부동산에 대해 조선일보는 정책의 실패를 강조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그래서 그 정책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 조언하고, 비판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기득권, 자신이 지켜야 하는 독자들에게 아부하고, 또 그렇게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니 장기적으론 부동산이 갖는 그 부의 불균형 틀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의식조작 능력을 거기에 쏟아붇는다.

그건 너무 극적이면서, 감정적이고, 또 재미있다!
그게 재미있는 이유는 '매슬로 욕구 5단계설'의 표준에 의한다면, 가장 낮은 차원에 존재하는 욕구를 자극해서다. 쉽게 말해서 조선일보는 속물본능을 가장 저열한 수준에서 자극한다. 여기에 대해선 아거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위장하기 위해, 흔히 여론조사를 벌인다. 여론조사라는 '객관성'에 대한 환상 (   http://blog.hani.co.kr/skymap21/5366 )은 그저 노골적인 자사 이기주의, 조선일보 당파성을 '치장'하고, '위장'하기 위한 화장술에 불과하다.

여론조사, 그게 객관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건 그저 어떤 권력이 그 권력을 유지하거나, 강화하기 위해 흔히 동원하는 기만적인 '수치'에 불과한 경우가 허다하다(물론 전부 그렇다는 건 아니다. -_-;). 가령, 이렇게 묻는다고 치자, '재벌이 언론을 소유하는 것은 옳은가요?' 당연히 옳지 않지. 그렇게 여론조사하고, 언론통폐합시킨다(전두환아저씨). 


조선일보의 당파성을, 그 반대의 관점에서,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다.
이건 반어가 아니라, 직설이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역할을 나는 한겨레가 했으면 한다고 바랐지만, 이제는 한겨레의 역할에 대해 그다지 큰 희망을 걸고 있지 않다. 나는 이제 그 역할을 우리 블로거들이 하기를 바란다.


3) 그리고, 대추리... 포스코...

대추리 문제의 본질은, 내가 보기엔, 절차적 민주주의가 그 실질로서 지켜지지 않은 점에 있다. 그 절차는 오직 형식으로만 지켜졌을 뿐이다. 합법적인 '행정대집행'은 가장 야만적인 합법이었을 뿐이다. 황파동도 마찬가지지만, 대추리 문제에 대해서도 기존 언론들은 할 말 없다.

조선일보는 말할 것도 없이 '빨갱이' 사냥에 집중했고, 한겨레 역시 자신이 지켜야하는, 혹은 지켰으면 하고 기대했던 그 당파성을 청와대와 엿바꿔 먹었다. 최소한 나는 그렇게 의심할 만한 기사편성, 배치들이 잦았다고 판단한다. 물론 '진보적인 제스처'는 있었다. 다만 그건 정말 제스처에 불과했다고 나는 판단한다(물론 한겨레21은 그나마 예외지만).


[참조 - 대추리 관련글 중에서]  
* 블로거들이여 연대하라 :
http://blog.hani.co.kr/skymap21/1404 [2006/03/20]
* 야만의 논리 :
http://blog.hani.co.kr/skymap21/1696 [2006/04/12]
* 대추리, 작전 진행중 :
http://blog.hani.co.kr/skymap21/1946 [2006/05/04]
* 대추리, 작전 그 이후 :
http://blog.hani.co.kr/skymap21/1957 [2006/05/05]
* 대추리, 그 기만의 매트릭스 :
http://blog.hani.co.kr/skymap21/1977 [2006/05/07]
* [속보] 대추리 파괴 작전 진행중 :
http://blog.hani.co.kr/skymap21/3660 [2006/09/13]
* 대추리와 저널리즘 :
http://blog.hani.co.kr/skymap21/3685 [2006/09/14]

포스코 사태는 말할 것도 없다.
노동자가 죽었다.
사람이 죽었다.

당신 이웃일 수도 있고, 당신 아빠일 수도 있고, 당신 남편일 수도 있다.
조선일보 당파성은 '인간의 죽음'을 '저 빨갱이들 때문에 포스코 업무손실이 너무 너무 크다, 이거 누가 책임질거야?' 혹은 사람이 죽건 말건, '저 빨갱이들 때문에 포스코 기밀이 밖으로 빠져나간거 아냐?'라고 말하는 당파성이다. 그 철두철미한 당파성이 나는 정말 두렵다.

더 두려운 건 한겨레다.
한겨레의 당파성은, 금속노조에서 의뢰한 '의견광고'를 더 큰 광고주 무서워서 실지 못하는 어중간한 당파성이다(금속노조 광고 거절 사건 :
http://wnetwork.hani.co.kr/skymap21/3926 ). 


3. 곤조 저널리즘과 블로그 정신(블로기즘), 그리고 블로고스피어.  

위 글에서 아거님는 "한겨레 필진 등의 시도를 아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고 썼다. 직접 한겨레 필넷에서 한달만 '필진'으로 활동한다면, 과연 저 기대를 유지할 수 있을까 나로선 의심스럽다. 필넷을 운영하는 그 한겨레의 정책에서 '저널리즘과 블로기즘'에 관한 철학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나로선, 유감스럽게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 상호간 긴장, 그 역동적인 상호보완적 작용은 전혀 없다. 한겨레 필넷은, 정말 속되게 표현하면, 그저 언론사 따까리 블로그 사이트일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게시판(BBS)인 '한토마'를 유지하면서, 그 짝궁으로 '필넷'이 만들어졌다. 아마도 이런 구도에서 예상할 수 있는 한겨레의 철학은 딱딱한 정치토론은 한토마에서 하고, 필넷에서는 '말랑말랑한 문학청년'이 되라는 거 아닐까 싶다. 난 처음에는 이런 일부 필진들의 지적을, 설마 그렇기야 하겠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넘겼다. 그런데 인터넷한겨레 메인이 돌아가는 풍경을 지긋이 지켜보자면, 정말 그런 것 같다.

글이 좀 옆으로 샜다. -_-;; 다시 돌아와서.


블로그 정신이란게 있나? 혹은 블로기즘이란거 있나? 그게 뭔가?
블로그 자체가 아직 정립되지 않은 개념이고, 블로그는 진화하고 있다.

그건 그 기술적인 설정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링크, 트랙백, 댓글창, RSS가 블로그의 '몸'인 건 사실이지만, 블로그의 육체가 있다면, 그 정신이 없을 수 있나, 그 정신이 그 육체에 깃들여질 때 블로그는 그 육체와 정신으로 온전하게 개념정의될 수 있을리라 본다.

그런데 그 정신, 그 블로그의 몸에 담겨야 하는 어떤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질문을 바꿔서, 정해진 육체에 깃들여져야 하는 그 정신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대답은 모든 블로거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그 습관적인 블로깅 속에, 그 거절할 수 없는 포스팅의 유혹 속에 있을테다. 다만 좀 진지하게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살짝 고민해보자.

어떤 블로거께서 곤조 저널리즘이 뭔지 모르겠으니까, 그 곤조저널리즘의 정신이 블로그 정신과 상통한다고 (니가) 그랬는데, (결국은) 블로그 정신이란게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겠다, 라는 취지로 말씀하셨다.


나 역시 쥐뿔 모르고, 그저 감히 그랬음 한다라는 취지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 나름으로 서툴게 답하자면, 블로그 정신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진실을 주관적으로 웹상에 기록하고, 그 기록을 통해서 자기의 자아를 자라게 하고, 그 성장한 자아, 그 정신을 다른 많은 블로거들과 '공유'하고, 대화하고, 토론함으로써 거대한,  중심없는, 하지만 서로 연결된 지성의 세계(이걸 요즘은 블로고스피어, 블로그+로그+스피어, 라고 흔히 말하더라)을 구현하는 거라고 소박하게 생각한다.

그게 포털제국에 의해 '삥뜯기'는 거에 대한 우려는 높지만, 뭐, 어차피 자본주의 아닌가,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방법도 있는 법이다. 이 부분은 너무 복잡하니까 넘어가자.


가령, 자기가 유럽여행한 사진 올려서, 과시하고 싶어하고, 자랑하고 싶어하는 거, 그거 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이게 나는 싸이월드의 아주 흔한 풍경이라고 생각하는데..). 자랑하고 싶지, 나라도 그러겠다. 다만 그게 주된 포스팅의 재료라면, 그건 내가 '주관적으로 기대하는' 블로그의 풍경, 블로고스피어의 풍경은 아니다.


혈액형 이야기로 주구장창 나랑 어울리는 놈은 누군가, 나랑 어울리는 뇬은 누군가... 그런 포스팅하는 블로그도 물론 의미없지 않지만, 나는 블로그 정신은 곤조 저널리즘의 정신이라면 좋겠다(그래야 마땅하다가 아니라, 그랬음 좋겠다는 거다).


자기의 목소리로, 좀 무식해도, 좀 모자라도, 그저 자신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거.
난 그게 블로그의 육체에 깃들었으면 좋겠다.
난 그게 그저 자기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니라면 좋겠다.
나의 이웃을, 내가 숙주처럼 기생하고 있는 사회와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좋겠다.
물론 그게 전부 나를 이야기하는 거지만.


난 이 보잘 것 없는 블로그가 그런 블로고스피어라는 천체를 반짝거리며 돌아가는, 조금은 의미있는 작은 행성이라면, 좋겠다.


이상이다.




[인용 링크]

* uglish, [한겨레에 훈수하기: 한겨레다운 중독성 |2005/12/29 17:35] 
http://wnetwork.hani.co.kr/uglish/660

* 이하 아거

1. 어느 곤조 (gonzo) 저널리스트의 자살 [February 22, 2005 06:31 AM]
http://www.gatorlog.com/mt/archives/002173.html

2. 블로기즘과 저널리즘 1 [June 01, 2004]
http://gatorlog.com/mt/archives/001771.html

3. 블로기즘과 저널리즘 2 [November 12, 2006]
http://gatorlog.com/mt/archives/002340.html

4. 한겨레는 한겨레다운 중독성을 만들어내야 한다 [December 27th, 2005]
http://gatorlog.com/?p=297

5. 미래의 신문 1: 포털은 국내 신문사들의 월마트가 될 것인가? [December 29th, 2005]
http://gatorlog.com/?p=302



* 조민경
[월드리포트] 미국 ‘쓴소리 작가‘ 잃었다 [뉴스메이커  616호. 2005.3.18]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sec_id=117&art_id=9342

위 글 중에서..

주관적 보도 ‘곤조 저널리즘‘ 개척자

그의 초창기 작품은 여러 면에서 오늘날의 블로거(Blogger: 뉴스와 개인적 견해 및 경험을 바탕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자칭 시사해설자)를 반영한다. 블로거처럼 톰슨은 기자 출신 작가로서 자신의 생각을 바탕으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미국사회를 그려나갔다.

권력에 대한 신랄한 비판은 72년의 미국 대통령선거를 다룬 ‘선거유세에 관한 공포와 혐오‘에서도 잘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닉슨 전 대통령을 “엉큼하고 타락한 구제불능의 잔학함을 가진 미국인“이라고 쏘아붙였다. 최신 저서인 ‘공포의 왕국‘에서는 현 부시 정권의 관료들을 “인종차별주의자에 선동자이며, 소위 쿠 클럭스 클랜(the Ku Klux Klan)“이라 했는데, 이것이 가장 정중한 표현일 정도였다.

그가 장년기에 구축한 이미지-조종사용 안경을 쓰고 술-담배-마약을 즐기며 총기를 휴대하고 사는 독설적인 사회비평가-는 문자 그대로 만화 주인공이다. 실제 톰슨을 모델로 한 시사만화 ‘둔스베리‘에 ‘듀크 아저씨‘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유언장에 자신을 화장한 뒤 유해를 대포로 발사해달라고 부탁하는 글을 남겼다(조민경).


* [필름 2.0] 한선희
타협을 거부한 곤조 저널리즘의 대부 추모, 헌터 S. 톰슨, [2005.03.24]
http://www.film2.co.kr/feature/feature_final.asp?mkey=2855

위 글 중에서...

헌터 톰슨(1937~2005)의 자살로 한 시대가 끝났다. (...중략...) 미국 저널리즘 역사에 굵은 획을 그은 필자이자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상징하는 소설을 쓴 작가로서 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USA 투데이'를 비롯한 주요 일간지는 톰슨의 기이한 삶과 사건 정황을 자세히 소개했다. ‘타임’과 ‘뉴요커’ 등 시사 잡지는 톰슨이 미국 현대 문학과 저널리즘에 남긴 유산을 재평가했다. 30여 년 동안 톰슨의 글을 실었던 음악 잡지 ‘롤링 스톤’은 웹사이트에 그의 글과 인터뷰 등으로 구성한 특집을 긴급 링크했다. 톰슨의 대표작이자 스테디셀러인 소설 <라스베이거스의 공포와 혐오>는 자살 직후 갑자기 주문량이 치솟아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 15위까지 올랐다. 이 책을 바탕으로 한 테리 길리엄의 동명 영화에 대한 네티즌 리뷰도 갑자기 늘어났다.

‘곤조 저널리즘’이라는 말은 ‘켄터키 더비는 퇴폐적이고 타락했다’를 읽은 어느 저널리스트가 내뱉은 감탄사에서 유래했다. 거침없고 자유 분방한 수사로 분노와 울분을 토해냈던 그 기사에 대해 보스턴 글로브의 기자가 “이건 완전히 곤조!”라고 외친 것이다. ‘곤조’는 우리가 흔히 아는 일본어가 아니라 보스턴에서 '술자리에서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을 뜻하는 아일랜드 속어다. 혹자는 ‘황당함’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곤자가스(gonzagas)’에서 나온 말이라고도 한다. 톰슨은 독특한 어감에 매료돼 이를 자신의 글쓰기 스타일을 지칭하는 말로 삼았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말했다. “나는 공격적인 글쓰기를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저널리즘에서 더 이상 ‘뉴욕 타임스’ 같은 스타일로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엘리베이터에서 추락해서 인어로 가득 찬 풀장에 떨어진 것 같았다.”

이는 미국 저널리즘 역사에서 상당히 획기적인 것이었다. ‘뉴욕 타임스’ 스타일의 저널리즘이란 무엇인가? 기자가 정보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주관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사실(fact)만을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톰슨은 취재 대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면서 관찰하고 이를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하는 글쓰기를 택했다. 간결성과 객관성을 중시했던 보도 저널리즘의 원칙을 깨뜨리고 취재 대상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면서 필자의 개인적인 감정을 마음껏 드러내는 것이다. 톰슨의 스타일은 1960년대 톰 울프, 게이 탤리즈, 노먼 메일러 등이 주도한 미국 ‘뉴저널리즘’ 운동과 궤를 같이 했다. 하지만 톰슨은 뉴저널리즘과 곤조 저널리즘을 동일시하는 것을 꺼렸다. 뉴저널리즘은 어떤 식으로든 필자가 사건을 재구성해서 보도하는 것이지만, 곤조 저널리즘은 사건 현장에서 기자가 노트에 기록한 것을 편집 없이 그대로 발표하는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곤조 저널리즘’은 블로그의 원시적인 형태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얼마 전까지 톰슨이 칼럼을 기고한 매체는 스포츠 채널 ESPN의 웹사이트였다. 정치권의 다양한 사건을 각종 스포츠에 비유한 그의 재기 넘치는 칼럼은 많은 애독자를 거느렸다. 그가 자살 직전 마지막으로 발표한 칼럼은 2월 15일에 업데이트된 ‘빌 머레이와 샷건 골프를’이라는 제목의 풍자 콩트였다. 물론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일부 보수 언론은 “헌터 톰슨의 곤조 저널리즘은 아무도 계승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정치인의 사주를 받은 가짜 저널리스트가 백악관 브리핑룸에 드나드는 요즘이 아닌가. 정치의 노예로 전락한 저널리즘이 각성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한선희).


* 이하 민노씨

1. 기자시험 유감 [2006/10/25] 
http://wnetwork.hani.co.kr/skymap21/4206

2. 기자시험 유감 (2) - 즐거운 논쟁을 위하여 [2006/10/27] 
http://wnetwork.hani.co.kr/skymap21/4234

3. 고급지 한겨레(1) - 한지붕 두 가족 이야기 [2006/09/28] 
http://wnetwork.hani.co.kr/skymap21/3912

4. [황우석] 잔혹 판타지극 - 황우석은 이순신이 될 것인가? [2005/12/09]
http://wnetwork.hani.co.kr/skymap21/708

5. 황우석 끝까지 추적하기-수험용[15일보도 보충] [2005/12/15]
http://wnetwork.hani.co.kr/skymap21/709

6. 드라마 조선일보 [2006/10/24]
http://wnetwork.hani.co.kr/skymap21/4202

7. 한겨레의 거듭남을 위하여 ; 금속노조 광고 거절 사태를 접하며 [2006/07/31]
http://wnetwork.hani.co.kr/skymap21/3926


* 매슬로 욕구 5단계설 (한겨레 기사)

요약 : 존재욕구로서의 자아실현 욕구(최상 5단계) - 결핍욕구로서의 '자존심 욕구'(4단계), 소속감욕구(3단계), 안전욕구(2단계), 생리적 욕구(1단계)
http://book.hani.co.kr/kisa/section-paperspcl/book/2005/12/0000000002005120120303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