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바라보기 - [오리엔탈리즘]

2007/03/23 23:53

#. 이 글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주저 [오리엔탈리즘]를 소개하는 글에 불과합니다. 물론 예전에 쓴 글인데요. 좀 줄이고, 추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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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 1935 ~ 2003.9.24]


자기 바라보기
: [오리엔탈리즘]와 실천적 지식인의 초상


Ⅰ. 서
이 글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상식적인(그러나 그 '상식'은 얼마나 조작된 것인가!) 이해를 목적으로 한다. 여기서 '상식적'이란 의미는 사이드가 주창했던 [세속적 글쓰기]의 차원에서 '상식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되도록 쉽게 쓰려고 한다. 어렵게 쓰려고 해도 그럴 지식이 없기도 하다. 그러니 어느 정도는 익숙하고, 어떻게 보면 생소한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그리고 좀더 풍부한 배경지식과 함께 파악하는 것은 이 글의 기본적인 목표다.

이 책은 내가 그토록 존경해마지 않는 한 위대한 인물에 대하여 다른 관점으로 조명한다. 그건 충격적이다. 그 짧은 문장의 내용은 이러한 것이었다. 여기서 '그들'은 물론 동양인들이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을 대변할 수 없고, 다른 누군가에 의해 대변되어야 한다.”
- 마르크스, <루이 보나파르트 공화력 18일(The 18th Brumaire of Louis Bonaparte)> 중에서


사이드는 김성곤과의 한 대담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영국은 인도에 대해 두 가지 의무가 있다. 첫째는 아시아적 사회를 없애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그런 다음, 서구사회의 물질적 기반을 그곳에 세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주1)


마르크스마저도 오리엔탈리즘이라는 함정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과연 ‘오리엔탈리즘’이란 무엇인가?

내가 [오리엔탈리즘]을 처음 접했던 것은 97년 8월이다. 다소 지적 허영에 들떠 있던 시절의 나에게 마르크스와 프랑크푸르트 학파(특히 마르쿠제), 그리고 미셀 푸코와 에드워드 사이드는 철학과 사상사의 광대한 오딧세이를 항해하는 위대한 모험가들로 느껴졌다. 그 중에서도 사이드는 각별했다. 그는 서구 학자가 아닌(물론 당시 그가 몸 담고 있었던 대학은 미국의 콜럼비아 대학이었지만), 제3세계출신 학자로서, 자기 존재의 조건, 그 정체성의 근거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 거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은 이제는 어느 정도 그 이데올로기의 배후에 대한 부정적 회의를 내포하는 것이 되었다. 문예잡지나 시사잡지, 혹은 영화잡지에 이르기까지 비평용어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란 말은 이제 그 숨은 함의에 대한 어떤 태도를 지칭하는 말로 쓰여지고 있다. 그래서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그 말이 생산, 유통되는 과정과 시스템의 어느 한 쪽에 대한 비판이나 옹호를 의미하게 되었고, 중립적인 태도는 정말 '농담'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공로이다. 이제 누구도 오리엔탈리즘이 그저 단순히 동양을 가리키는 단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은 가치판단을 그 안에 내재하고 있으며, 좀더 분명하게 말하자면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어떤 판단(그것은 앞서 말했듯 부정적인 회의나 비판이 대부분이다)을 담고 있는 말이 되었다. 이 글은 [오리엔탈리즘]을 통해서 본 오리엔탈리즘의 의의와 그 연원, 그리고 그것이 추구하고 있는 문제의식을 고찰하고, 더 나아가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Ⅱ. 오리엔탈리즘의 의의
1. 오리엔탈리즘의 개념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오리엔탈리즘을 정의하고 있다.

"오리엔탈리즘은 서양이 동양에 관계하는 방식이며,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 ontological and epistemological distinction 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그것은 동양을 취급하기 위한 "동업조합적 제도"이며,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며 위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고 사이드는 말한다. 즉 서양은 동양으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서 스스로의 힘과 정체성 identity 을 획득한 것이며, 그것은 달리 말하자면, ‘타자’라는 존재를 만들어놓곤 스스로는 ‘자아’를 획득하는 일종의 지배철학이다.

사이드는 역사상의 그 무수한 위인들이 그 당대의 역사적 한계, 좀더 분명하게 말하면 자신의 ‘지리적’ 한계, 즉 서구 중심 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로크도 인종차별주의, 노예제도의 옹호, 그리고 제국주의의 비호사상에 물들어 있었으며, 플로벨이나, 존 스튜어트 밀, 매슈 아놀드, 토마스 카알라일, 조지 엘리어트 그리고 심지어는 찰스 디킨스까지도 그런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사이드는 그런 의미에서 '거짓된 영웅 신화'를 거부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아리비아의 우상이었던 T.E. 로렌스일 것이다. 사이드는 그가 백인으로서의 우월 의식이 없었다면 그리고 야만인들을 교화시키고 질서를 부여하겠다는 선교사적 의식이 없었다면 결코 그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로렌스가 결국은 스스로를 아라비아인들의 총지도자 자리에 앉혔음을 지적한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과정'의 메카니즘임을 분명히 한다. 사이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동양은 유럽사회라고 하는 '우리들' 세계의 경계선 밖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교정되고 처벌된다. 그리하여 동양은 '동양화'된다"[주3)].

즉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의 본질이 그것 자체의 고정된 의미,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어떤 형성과 과정의 메카니즘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는 담론체계임을 지적한다. 그리하여 푸코의 [감시와 처벌]의 표현을 빌었음이 분명한 '교정과 처벌'을 통한 오리엔탈리즘의 본질로서의 '형성화 과정'의 속성을 지적한다.


2. 연혁

사이드는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시키고, 지배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서양에게 동양을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서양의 경험과 서양의 의식 속에 투사된 그림자로서만 동양은 존재한다. 그리고 서양은 우선 동양을 신비화시킨다. 꿈과 보석과 환상의 왕국으로 동양을 신비화시킨 서양은, 그런 다음엔 그 환상과 낭만을 수탈하기 위해서 동양을 식민지화시킨다. 그리고는 동양을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하나의 거울로 삼아 서양은 지배자, 교화자, 그리고 우수인종이라는 스스로의 '이미지'를 창조한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담론의 체계가 생겨나고 발전해온 연혁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오리엔탈리즘의 특징적인 속성을 나타내는 변화의 시초는 18세기 중엽 이후라고 사이드는 말한다. 그 시기에 동양과 서양의 관계를 규제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계기,

ⅰ) 유럽에서 동양에 관한 체계적인 지식이 증대한 점
ⅱ) 유럽이 지배자의 지위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언제가 강력한 힘을 갖는 위치를 차지했다는 점이 그것이다[주3)].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동양 지배는 19세기초에서 2차 대전까지는 영국과 불란서가, 2차 대전이후로는 미국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수행하고 있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3. 방법론으로서의 '담론'이론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 서문에서 자신의 방법론에 대한 아이디어를 푸코에게서 빌어오고 있다고 밝힌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담합을 분석하기 위해 그 양자의 미시적 역학을 '담론'이라는 모델을 통해 파헤치고 있다. 사이드는 그 아이디어를 동양을 바라보는 서양의 태도와 시스템을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활용하고 있다. 즉 사이드는 미셀 푸코의 방법론을 준용하고 있다. 그래서 사이드는 권력과 지식의 담합이라는 이론적 역학의 모델이 어떻게 서양이 동양을 생산해내는 과정을 분석하는데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는지를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푸코는 그의 책 『감시와 처벌 Discipline and Punish』에서 감옥과 병원이라는 합법적인, 그러나 다분히 독재적인 사회기관의 연구를 통해 지식이 어떻게 권력으로 이어지고, 그 둘의 공모는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탐색한다. 사이드는 똑같은 방식으로 오리엔탈리즘의 구조를 해부한다. 그 권력과 지식의 담합이 어떻게 동양을 지배하는, 억압하는 체계를 구성하는지 사이드는 구체적인 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이 하나의 ‘담론(언설) discours'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즉 오리엔탈리즘은 그것이 신화나 허구임을 밝혀서 마치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님을 사이드는 거듭 지적한다. 언설로서의 오리엔탈리즘를 검토하지 않는 한 그 거대한 조직적 규율의 메커니즘을 파악할 수 없다고 사이드는 말한다.

4. 자기고백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
사이드는 그 자신 ‘저주받은’ 팔레스타인 출신이다. 비록 미국 일류 사립대학의 명망 있는 교수이지만, 그 자신 한번도 ‘나의 본질은 동양인’이라는 의식을 잊은 적은 없다고 말한다.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직접적인 집필동기가 ‘서양 속의 동양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임은 말할 것도 없다.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편인 미국에서 팔레스타인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사이드의 작업이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그것이다. 그는 자기 존재의 뿌리와 자기가 태어난 모국어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자세는 그의 비평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비평이란 오늘날과 같이 추상적이고 형식적이고 귀족적인 것이어서는 안되고, 오히려 세속적이고 현실적이어야 하며, 문학과 비평이 만들어지는 토양이자 배경인 역사, 사회, 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만 텍스트의 이해나 비평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이른바 [세속적 글쓰기]). 그는 개인적으론 자신의 조국인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의 해결 방법을 자기 나름의 학문 영역에서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 특수성만큼이나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주저인 [오리엔탈리즘]은 그 가장 좋은 본보기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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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현장에서 직접 돌을 던지는 백발의 사이드

Ⅲ. [오리엔탈리즘]의 문제의식
1. 지구촌이라는 허상

[오리엔탈리즘]은 ‘지구촌’이라는 말의 허구성에 대한 반성적 비판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이미 지루한 질문처럼 느껴진다. 인터넷 혁명이라고 불리는, 그 속도를 느낄 수조차 없을 만큼 빠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정체성’은 지워지고, ‘고유성’은 소멸되고 있다. 나는 한국인이다, 라는 의식도 우리가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에 사는 국민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자각케 하지는 못한다. 그 말은 이제는 생소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컴퓨터 모니터이며, 헐리웃 영화가 가득한 극장이며, 맥도널드로 대표되는 패스트푸드 체인점들이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환상이며, 위장술이다. 그것은 서구와 제3세계의 차이를 지워버린다. 그것은 또한 아직도 이 지구상에 헐벗고 굶주린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감추고, 서양의 지식과 문화를 일방적으로 유포하고 강요하는 기능을 또한 맡고 있다.

인터넷으로 상징되는 정보혁명(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한 정보의 편향과 차별적인 위계질서), 헐리웃으로 상징되는 미국 문화의 전세계적인 지배는 그러나 우리가 고민하고 아파하는 땅이 미국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바로 ‘여기’라는 것을 망각시킨다. 컴퓨터의 작은 모니터가 보여주는 상업광고 같은 세상, 헐리웃 영화의 솜사탕 같은 세상, 패스트푸드 체인점의 깔끔하고 정돈된 세상의 이미지는 우리의 내부에 스며든다. 아직도 점심식사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고, 전쟁이 끝나지 않는 ‘휴전’상태에 있는 땅이라는 사실은 그것들로 인해 감추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소파(SOFA. 한미행정협정)의 불평등 조약으로 우리 아이들을 죽인 미군 범죄가 무죄로 판결되는 땅에 우리는 살고 있다. 효순이 미선이 사건의 그 어처구니 없는 판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이라는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 앞에서 우리는 일개 극동의 변두리 나라에 지나지 않는가. 적어도 그들, 미국, 미국이라는 나라를 말할 때 우리가 떠올리는 코카콜라나 맥도널드가 아닌 그들의 정책은 그것이 진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나라 땅에서 벌어진 명백한 범죄에 대해서 우리가 재판할 수 없다는 이 자명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우리가 올림픽과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당당한 주권국가라고 말할 수 있는지 자괴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명백한 오리엔탈리즘의 현대적 잔재를 청산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작은 곳에서 시작될 수 있다. 소파 재협상을 요구하는 시민서명운동에 참여하고, 장갑차 사건의 정당한 재판을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에 우리의 작은 목소리를 더 하는 것. 그리고 조선일보를 비롯한 다수 숭미언론들의 의식적인 조작에 대해 비판하는 것. 이는 미국-한국이라는 명백한 오리엔탈리즘의  실현태로서의 불공평한 관계를 청산하고 극복하는 작은 출발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진실의 목소리 하나로, 스스로 작으나마 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2. 월드컵과 세3세계의 그늘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적 분석틀로 지난 2002년 6월의 월드컵을 다시 떠올려 보기로 하자. 월드컵은 우리의 민족적 자긍심을 드높였다. 16강의 염원은 4강 신화라는 더 큰 보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고, 질서정연하고 열광적인 우리의 응원문화는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크게 주목되었다. 

피버노바.

월드컵의 열기 한 편으로 나를 잠시나마 각성시킨 것은 신문의 작은 기사였다. '피버노바'라는 월드컵 공식 지정구를 만들고 있는 나라는 이른바, 제3세계,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인도라고 했다. 그 공을 만드는 과정은 기계화가 곤란하여 일일이 손으로 꿰메어야만 하는 공정이 있다고 했다. 그 공을 만드는 건 주로 아이들이었고, 하루 종일 일을 해서 그 아이들이 받는 돈은 고작 1~2달러라고 했다.

그 작은 기사는 그 공, '피버노바'를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화학약품들로 인해 암에 걸려 사경을 헤메는 아이를 보여준다. 정확히 암과 그 화학약품들과의 인과관계 판정은 확실하게 드러난 바 없지만, 상당한 개연성이 존재한다고 추정된다고 그 기사는 밝힌다. 그 아이의 다가올 죽음 앞에서 '세계화'는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인류의 축제인 [월드컵]은 또 어떤 의미인가? 우리의 관심이 월드컵의 꿈같은 환상에 젖어있는 동안, 그 환상의 축제 이면에는 암으로 신음하는 제3세계의 작은 소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어쩔 수 없는 비극의 드라마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것은, 우리의 불과 반세기 전 모습이 그와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어쩌면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 경제가 서구 뒷치닥거리 산업들을 통해, 이를테면 섬유산업이라는 고밀도 노동력이 필요로 하는 경공업위주의 극심한 노동착취를 거름으로 하여 성장해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부모세대들은 신음하며 쓰러져 갔다. 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그러한 세대의 상징적인 모습이었다. 그것은 불과 30여년 전 우리의 모습인 것이며, 그것이 다른 제3세계에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플라터(피파회장)의 오만한 태도들, 그를 등에 엎은 바이롬사의 어처구니 없는 경기장 공석사태, 안정환을 둘러 싼 이탈리아의 야만적인 발언들 역시 우리의 자긍심과는 상관없이 서구가 우리를 바라보는 태도는 여전히 그 오리엔탈리즘의 관성을 잃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것들을 굳이 오리엔탈리즘의 연장선에서 고찰한다는 것이 억지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행태가 오리엔탈리즘의 정서적 잔재임을 부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아닐까. 그들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는 아직도 변방의 낮선 동양의 작은 나라에 불과한 것이며, 그래서 그토록 무례하게 우리를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Ⅳ.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우리는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이미 포기한 상태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픈 질문이지만 지금의 우리 현실을 말하자면 우리를 ‘한민족’이라고 부를만한 문화적 연대,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서구중심주의가 내면화되어 있다. 우리는 서양놈들이 아닌데도 말이다.

더 나아갈 것도 없이 우리의 대학 문화를 생각해보자. 80년대 90년대 초의 대학문화가 독재 정권에 저항하면서, 그 독재 정권을 가능하게 했던 미국의 제국주의를 또한 거부하면서 보여주었던 것은 우리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패기 어린 고민이었다. 그래서 풍물패 동아리들이 생겨나고, 우리말을 살리려는 소박한 운동이 더불어 진행되었던 것이다. ‘서클’이라는 말이 ‘동아리’라는 말로, ‘엠티’라는 말이 ‘모꼬지’라는 말로 바뀌는 그 작은 차이는 하지만 얼마나 커다란 차이인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어떤 움직임도 대학 사회에선 존재하지 않는것 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미 사이드의 냉철한 지적처럼 ‘동양인’으로 규정된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언어습관 속에서도 뿌리 깊은 오리엔탈리즘의 잔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문화사대주의와 공동분모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를테면 '원서.原書'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보통은 영어로 된 교재를 말한다. 본래의 교재는 영어로 된 책, 즉 원서이며, 본래적이지 않은, 부차적인 교재는 우리말로 된 책이란 말인가. 이러한 전도된 언어사용은 습관이라는 견고한 골격을 갖고 있어서, 그것을 쉽게 허물어뜨리기란 의식적인 노력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Ⅳ. 결
[오리엔탈리즘]의 궁극적인 전언은 서로 다른 문화의 ‘차이’를 인정하고, 그 다름이 지배/피지배의 종적 관계가 아니라 조화와 평등의 횡적 관계로 서로를 인정하는 성숙한 세상에의 염원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누구이며, 우리 문화는 어떤 것이며, 우리의 뿌리는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즉 우리의 존재를 스스로 세워야 하는 것이다. 그 이후에야 우리와 다른 문화를 인정할 수도, 그들과 조화롭게 공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글쓰기가 그 자체로서 우리 안에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성의 기회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오리엔탈리즘의 찌꺼기들, 그것과 유사한 형태로서 식민사관을 잠시 생각해보자. 일제의 잔재로서의 식민사관은 우리 역사에 대한 교묘하게 조직되고, 설계된 역사관의 흔적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떻게 극복되었는가.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 광범한 캠페인을 통해서 비로소 그 견고한 껍질이 깨어지고, 그 알맹이를 드러내며, 우리는 그 알맹이들을 쓰레기 통에 쳐 박을 수 있었다. 물론 아직 그 과제가 완벽하게 수행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우리에게 치욕이며, 기만이며, 거절해야할 수치스런 역사의 상처임을 우리는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선 그것이 앞서도 말했듯, 그 말이 담고 있는 비판적 함의에 대한 충분한 공감이 비평의 영역에서는 어느 정도 확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있지만, 일상의 차원에서 그 오리엔탈리즘의 관성과 내면화는 아직도 여전함을 안다.

가령 국악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 우리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그네들의 영혼으로, 혹은 그네들의 설움이나 기쁨으로 만들어낸 노래들, 그 가락들이 우리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악’이다. 그것을 우리 문화의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 문화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가 우리를 ‘한국인’이라고 ‘한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타계한 한국이 낳은 위대한 음악가 윤이상의 음악은 그런 넓은 의미에서 우리에게는 ‘국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우리 역사의 아픔이, 우리가 체험한 고통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로서 되돌아본다면 윤이상과 같은 큰 인물이 정작 자신의 조국에서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아직도 우리 안에서 내면화된 반공이데올로기 만큼이나 치명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많은 문제의 근원적인 모순들은 우리 안에 있는 그 어떤 것. 그 순응화되고, 무비판적으로 길들여진 그 습관들, 사고의 패턴들에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긍정적으로 해체되어야 하고, 다시 세워져야 한다. 여전히 우리 안에는 '그들'이 만들어 놓은 '오리엔탈리즘'이 살아 있다.

[주]
1) 김성곤, '텍스트로서의 세계와 문학비평', <미로 속의 언어; 현대미국작가와의 대화>, 민음사, 1986, pp.99~121.
2)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 p. 120.
3) 에드워드 사이드, [오리엔탈리즘], 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1. p. 75.


* 확장점
희한한 인용과 주석 (neoscrum)
http://blog.jinbo.net/neoscrum/?pid=485 .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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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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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너바나나 2007/03/24 03:05

    그러게유 우리안에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이야말로 척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인 듯싶구만요. 서양인과 외국인 노동자를 바라보는 그 이중적인 시선은 정말.. 으

    근디 다시 느려진 것 같구만요. 웹제로 여기가 좀 느리긴 해도 다른 곳은 이정도는 아닌 듯싶던디.. 고생이 많으십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7/03/24 07:10

      1. 그러게나 말입니다. ㅡㅡ;

      2. 링크메뉴는, 없으면 이동이 불편해서리 다시 넣었는디.. ㅠ.ㅜ; 일단 첫페이지 글 갯수를 5개에서 2개로 줄였습니다.

      이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전을 해야 하는지, 증설을 해야 하는지.. ㅠ.ㅜ;
      너바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다시 조언 부탁.

    • 너바나나 2007/03/24 22:52

      지금 정도면 양호하구만요. 이제 괜찮아지는건지!

      알라딘 검색 플러그인은 알라딘 가입을 해야 가능한 듯싶어서 못하겠근영.

    • 민노씨 2007/03/24 23:16

      첫화면에 있는 글의 무게 때문에 그런건가 싶기도 하고.. ^ ^;
      저는 최소 글 5개 정도는 현출시키고 싶은데 말이죠.
      암튼 이거 좀 나아졌다, 또 느려졌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고만요. ㅡㅡ;;

      알라딘 사이트의 안내문을 읽었는데도..
      뭐, 이거 이해가 어려워서리..
      1. 일단 알라딘 플러그인은 설치해서 플러그인 목록에 활성화시킨 상태인데요.
      2. 알라딘 사이트에서 선결해야 하는 '어떤 과정'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상태입니닷. ㅡ.ㅡ; 제 소박한 생각으로는 'TTB' 아이디어는 참 좋은데, 이걸 대중화시키려면 좀더 쉬운 매뉴얼을 제공해야 하지 않나 싶군요. : )

  2. 히치하이커 2007/03/24 10:25

    군대에서 틈틈히 읽다보니, 거의 일 년에 걸쳐(-_-;) 읽은 책이라 더 기억나는 책입니다.
    우린 안에 오리엔탈리즘은 깊숙히 들어와있지요. 위에서 너바나나님도 말하셨는데, 제가 가장 화나나는 건 스스로도 '노란 원숭이'인 주제에 '검은 사람'들에게 보이는 알량한 우월감이 이땅에 너무도 널리 퍼져 있다는 겁니다. 게다가 서구 '흰둥이'에겐 한없이 굽실거리구요.
    비관적인 생각이지만 과연 모든 인간이 서로 타자를 내 생각대로 재단해서 어떤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 '주체'로 인정하는 날이 오기나 할까 싶습니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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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치하이커 2007/03/25 00:57

      아하하
      꽤 오래 힘들게(상황이 상황이다 보니요...) 읽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더라구요.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 )
      그리고 위에다는 현실이 짜증나다보니, 좀 격하게 썼지만, 백인이라 나쁘고 흑인이라 좋고 뭐 이런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웃음) 저는 인종, 성별, 나이, 직업이런 거에 신경쓰지 말고 '존경할만한 사람은 존경하고 무시할만한 사람은 무시하자'는 주의(?)입니다.

      ps. 덧글창은 열었죠. 시원하게... 헉, 그럼 거짓말인줄 아셨단 말입니까! 으아~ 근데 민노씨 덧글은 없더라구요~ 우허허 ^ ^;

    • 민노씨 2007/03/25 00:58

      정말 반갑습니다. : )
      이 책 그 유명세에 비해서는 읽으셨다는 블로거분은 처음 만나네요.
      이 책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책 가운데서도 꽤 상위에 있는 책이라서 좀더 많은 분들이 읽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말씀하신 바에 대해선 크게 공감합니다.
      그런데요. ^ ^;
      역으로 서양 백인 싫다, 흑인 동남아시아의 한국체류 노동자들 무조건 좋다.. 이런식 '역편견'이랄까.. 이런 것도 조금은 조심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저 같은 인간으로서, 그런데 서로 다른 문화적, 역사적 조건 속에 있는 그 '차이'를 존중하고, 고려하면서 사귈 수 있다면,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네요.

      p.s.
      블로그 댓글창은 정말 여셨더라구요.
      반가웠습니다. : )

    • 민노씨 2007/03/25 01:05

      그러셨군요.
      물론 그런 취지라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히려 좀 과민하게 받아들인 건 아닌가.. 싶어서 살짝 민망하군요. ^ ^;

      댓글은 쓸까 말까 하다가.. ^ ^;
      말았는데요(이거 너무 솔직했나요? ).

      앞으론 댓글 가급적 쓰도록 할게요.
      가끔은 댓글을 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때가 있답니다.
      제가 잘 모르고, 깊이 고민하지도 않은 건데 그저 '격식'으로 댓글을 담는게 좀 민망할 때가 있어서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저 '안부'를 묻고, 또 '관심'을 표명하는 댓글도 그 나름으로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 사는게 뭐, 그런 훈훈한 정 아니겠습니까? ^ ^

  3. 민노씨 2010/01/04 11:17

    * 링크 보충
    희한한 인용과 주석 (neoscrum)
    http://blog.jinbo.net/neoscrum/?pid=485 .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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