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도' 일종의 '패러디'입니다. 웃자고 쓰는 글입니다(그렇다고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요). FTA 관련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에 대해서도 짧게나마 쓰고 싶은데... 골이 띵하네요(특히 글로벌 스탠다드 외치는 종이신문들의 태도를 보니 뒷 골 땡깁니다. ㅡㅡ;; )

0.
* 아거님의 글 : http://gatorlog.com/?p=678
* 아틸라님의 글 : http://koreanjurist.com/index.php?id=495


1. 김성곤과 토도로프의 인터뷰

김성곤 질문 :

선생님께서는 스스로를 '구조주의' 학자로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탈구조주의' 학자로 생각하고 계시는지 스스로의 입장을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후략... )

토도로프 답변 :

위대한 비평가가 되는 두 가지 조건은, 1) 첫째 자신과 반대되는 이론도 포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2) 둘째로는 자신이나 상대방을 어떤 특정 카테고리 속에 집어 넣어 분류하려고 하는 태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스스로를 구조주의자로도 혹은 탈구조주의자로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꼭 저를 어떤 비평학파에 포함시켜야 직성이 풀린다면, 저는 스스로를 바흐찐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화의 비평학파]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비평이란 저자와 비평가의 대화, 텍스트 상호의 대화, 그리고 반대 이론끼리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 김성곤, '츠베탕 토도로프; 탈구조주의와 문학비평의 새 지평' , [미로속의 언어], pp.157, 158. 중에서, 민음사, 1986.



2. 자문 자답

자문 :
민노씨는 스스로를 '인기 블로거'로 생각하시는지, 아니면 '좋은 블로거'로 생각하고 계시는지 스스로의 입장을 밝혀주셨으면 합니다.

자답 :
좋은 블로거가 되는 두 가지 조건은, 1) 첫째 자신과 반대되는 이론도 포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2) 둘째로는 자신이나 상대방을 어떤 특정 카테고리 속에 집어 넣어 분류하려고 하는 태도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스스로를 인기블로거로도(이건 솔직히 말도 안되고 - -; ) 혹은 좋은 블로거  로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꼭 저를 어떤 블로그계파에 포함시켜야 직성이 풀린다면, 저는 스스로를 아거님을 우두머리로 하는 [관계(대화)의 블로그계파] 속에 넣어 달라고 부탁하겠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저는 블로깅이란 블로거와 독자의 대화, 포스트 상호의 대화, 그리고 견해를 달리 하는 포스트 끼리의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첨언하자면, 저는 물론, 좋은 블로그가 유명해진다면 좋겠습니다.



: )



p.s.
저로선 꽤 거금(3만원)을 들여 호스팅 이전했는데요.
이거 효과가 있어야 할텐데 말이죠.
아직 그다지 빨라진 것 같지 않네요.
이전완료 24시간 지났는데...
이런이런... ㅡㅡ;;

이전에 종종 와주셨던 동료 블로거들께서는 페이지 열리는 속도에 대해 짧게나마 코멘트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




무거운 이야기들.
가령 FTA.
난 실은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는지, 내 목소리가 얼마나 많은 다른 목소리를 깨울 수 있을지, 그냥 기운이 없다고 해야 하나, 그런 기분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난 FTA에 대해 잘 모르니까.
뭐 알려줘야 알지.
제기랄.

그렇게 좋은 거라면서, 왜 이렇게
뒤에 숨어서,
광장 아닌 밀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해야 하는건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난 무거운 것들도 가볍게, 즐겁게 이야기되길 원한다.
아니 무겁지만, 가볍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힘드니까.
모든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필요로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람들이 무겁게 생각하는 이야기들은, 때론 쪽수가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거운 걸 싫어한다.
나?
나도 그렇다.
난 가벼운게 좋다.
다만 그게 진지하게 가볍길 바란다.

싸움을 하더라도, 그게 즐거우니까 하는거다.
도덕적인 우월감?
투철한 사명감?
사회적인 연대의식?

놀고 있다.
나한테 그런거 없다.

난 그게 얼마 가지 않아 심각한 자기배반을 만날 거란 걸 잘 안다.
안다고 말했지만 실은 쥐뿔도 모른다.
하지만 그럴 것 같다.
거의 확신에 가깝게 추정한다.
아마도 당신도 그렇게 생각할거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시스템의 포로다.
그 시스템의 유혹은 언제든 우리에게 파고든다.
그건 때론 익숙하게, 때론 느끼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파고든다.

난 진보도 아니고, 그렇다고 보수도 아니고, 실은 난 진보이면서 보수고, 보수이면서 진보다. 그러니까 모두가 그런 것처럼 난 이도 저도 아니고, 그저 여러 개의 '나들'이 모여진, 모순의 총합이다. 그게 '나'다.

아거님께서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민노씨는 생각이 참 깊은 분입니다..."
http://gatorlog.com/?p=674#comment-117471

라고 격려(?)해주셨는데,
나는 거기에 솔직하게 고백(?)했다.

"저는 실은 날라리를 동경하는 어중간한 몽상가일 뿐입니다. 그게 가끔은 좋고, 자주 스스로에게 실망스럽기도 해요."


황지우가 언젠가 그랬다.

"나는 날라리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그들은 날 것을 먹는다."
- 황지우,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 중에서


나는 날라리를 동경한다.
그들은 몽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천한다.
머리 속에 박혀 있는 그 잘난 책들보다, 그 날라리가 훨씬 더 멋지다.

블로거에게 실천이란,
쓰는거다.

자기의 진실로,
그게 잘난 이야기든,
어설픈 이야기든,
외국잡지, 외국서적에 나온 누구누구의 이야기를 인용한 폼나는 거든,
아니면 그저 공중파 티브이의 뻔한 드라마를 보고 느낀 감상이든... 

우리에게는 상상력이 있다.
그 상상력이 정치적 상상력으로 확장하기를 나는 바란다.

FTA는 반드시 아마도, 좀더 많은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사살'할 거다.
난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사살당할 사람들은
아마도
늘 그랬듯
무식하고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일테다.

난 그게 싫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다.




덧]
http://deulpul.egloos.com/
위 주소(들풀님의 블로그)에 가시면 좀더 많은 FTA 관련 포스트를 볼 수 있습니다.  

http://blog.hani.co.kr/onecard/6363
이 글도 일독 권합니다. : )



#. 지금은 필넷의 운영정책에 제 나름으로 '대답'하는 차원에서 좀 제한적으로 활동하고 있지만(포스팅 중단),저는 필넷(한겨레 블로그)에 여전히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나름으로 열심히 일년 반을 그 안에서 활동했으니까요. 그 필넷이 오는 3.31일 개편을 맞는다고 하네요.

조금이나마 이 소식을 알리고, 또 그 내용을, 물론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요, 검토하기 위해 포스팅합니다. 이 글은 필넷 도우미씨 방에도 동시에 등록할 생각입니다.





한겨레블로그 전면 개편 예고(3.31)
; '필진네트워크'에서 '블로그'(?)로.







0. 필넷 메인에서의 공지 내용 ( 여기 )

관심있는 분은 위 링크를 참조해주세요. : )


1. 태그 지원
저로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데요.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나 올블에서 론칭 예정인 '블카'( http://minoci.net/25 )의 글 수집 표준이 '태그'라서 더 반가운 소식이네요.


2. 인터넷한겨레 UCC 서비스 '필통'과 연계
필통. - -;
뭐 나름 정감어린 이름이네요. ^ ^;;


"블로그 '필통 흔적'에 나의 모든 UCC 가 담"기고, "블로그에서 인터넷한겨레 UCC 서비스(필통)로의 글 동시 등록"하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이게 "내가 올린 글과 동영상으로 만드는 나만의 웹진, I-미디어 서비스 신설"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지켜봐야겠네요.


인터넷한겨레와의 연계를 강화하는 방향은 적극 찬성입니다. 그런 기술적인 지원(?)으로서 "내 글에 라이브폴을 붙일 수"도 있다고 하네요. 


3. 기사희망글 관련
1) 기사희망 단추 (필벗들은 기사'허락'단추, 라고도 부릅니다)
필넷의 가장 촌스런(?) 모습 중 하나가 글 옆에 초록색 [기사희망단추]를 붙이고 있는 모습이었데, 이건 해당글방 운영자만이 볼 수 있도록 바꾼다고 합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네요.

2) 기사글 추천 기능
구체적으로 얼마나 '반영'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지금까지의 관행을 나름으로 가까이서 지켜본 저로선 전적으로 기대할 수 없겠다 싶지만, 기사글로의 추천 기능이 신설된다는 점은 적극 환영합니다.

좀더 바라자면 구체적인 반영비율이나, 참고의 '수준'까지를 가급적 자세히 개량화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네요. 물론 현재로선 이것만으로도 환영하는 바입니다.


4. 새로운 명칭과 관련해서 ; '블로그'라구요?

'필진네트워크'에서 '블로그'로 바꾼다고 하는데..
이건 정말 좀 저로선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필진네트워크(필넷)이라는 이름에 저로선 좀 정이 들었는데, 그다지 감성적으로 호소할 수 없는 이름이라는 점에는 저 역시 동의하는 바라서 이건 이 쯤으로 하구요.

문제는 새롭게 바뀌는 서비스 명칭이 '블로그'라는 점입니다.

비유하자면, 병원을 개업하면서 병원이름을 '병원'으로 짓거나, 언젠가 미래주의님께서 예시하셨듯, 메타블로그를 명칭을 '메타블로그'로 하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블로그'라는 명사는 이미 '보통명사'인데, 이걸 어떤 특정 서비스의 '고유명사'로 사용하겠다는 건 좀 노골적으로 말씀 드리면, 벙찌네요. ㅡ.ㅡ;

그냥 인터넷한겨레와의 연계를 강화하고, 한겨레 서비스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면, 단순하게 '하니블로그'라고 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는 생각입니다.

혹은 필진들께 새로운 명칭을 공모하는 것도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deca님의 댓글(필넷 도우미씨 방에서의)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한겨레'라는 수식어는 당연히(^^;)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너무 고지식하고, 성급하게 판단했네요. 전 "필진네트워크가 새로운 이름 '블로그'로 새로워집니다" 이렇게 공지에 나와서, 착오를 했네요.

명칭은 '한겨레 블로그'로 바뀌는 것 같네요. : )

성급하고, 다소 황당한 해석은 사과드립니다. ^ ^;

물론 저 개인적으론 '하니 블로그'를 선호하지만요. 운영진의 판단을 존중하는 의미에서는 선택을 따라야 할테지만, 전면개편되는 서비스를 '홍보'할 겸 '하니 블로그'와 '한겨레 블로그' 중에서 좀더 선호하는 명칭에 대한 의견청취 이벤트 같은 거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5. 서로이웃 기능
서로 이웃 하는 블로그는 저는 네이버 밖에는 모릅니다. 다른 블로그도 서로 이웃 기능 제공하는 블로그 있나요? 네이버를 '벤치마킹'(?)한건가 싶은데요. 이 취지를 도무지 모르겠네요.

이건 좀... 재고하셨음 하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네요. 기존 필넷 자체가 '커뮤니티'의 성격이 강하고, 또 그 안에서 좀 큰 논쟁이 벌어질 때 마다 파벌이니 뭐니 이런 익명의 댓글로 넘쳐나는 판에, '서로이웃' 기능은 그런 폐쇄성(에 대한 오해)를 더욱 부추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필넷 자체의 다양한 성원들간의 스킨쉽을 보다 '개방적으로' 지원하는 기능에 대해 고민해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6. 기타

* 메인디자인 개편
: "새로워집니다" 이렇게만 말씀하셔서 어떻게 달라질지 굉장히 궁금하네요.

* 블로그 디자인 기능 업그레이드
: 이것도 봐야 알겠죠.

* 동영상 업로딩 기능 강화

* 필명 변경 가능
: 이건 미스터 잡 사태의 여파인건가 싶기도 한데, 뭐 잘 모르겠네요. 그 취지는.

* 감성형 통합포인트 + 강추 블로거 제도
: 필넷은 좀 과도한 순위시스템을 기반하는데요. 이를 유지하면서 그 표준을 좀더 합리화(?)하려는 시도로 생각합니다. 역시나 구체적인 모습은 봐야 알겠네요. 



이상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검토는 31일 이후 직접 체험해보고 할까 합니다.
물론 예정일 뿐이지요.  


: )



포스팅 타이밍

2007/03/26 12:06



0.
포스팅 타이밍을 종종 생각한다. 처음에는 그다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점점 더 '타이밍'을 고려하게 된다. 그런 내가 좀 스스로 웃긴다. 예전에는 정말 그냥 꼴리는대로(양해바랍니다 ^ ^; ) 썼던 것 같은데 말이지.

아니다, 생각해보니 예전부터 글쓰는 타이밍을 정말 많이 고려했던 것 같다. 특히 필넷에서는 쓰고 싶은 글을 마음껏 쓰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서로 다른 의견 대립의 감정적인 소모가 우려되서. 그런데 지금 하려는 얘기는 그것과는 좀 다른 얘기다.


1.
실은 나는

* 불륜드라마를 비판하는 스포츠신문의 '거룩함'에 대해 쓰고 싶었고(이건 티스토리),
* [한니발 라이징]에 대해 쓰고 싶었고(이것도 티스토리), 
* 조선일보의 '거실을 서재로' 캠페인의 의미를 다각도로 분석해보고 싶었고,
* 관련해서 조선일보의 '엘리트 교육' 찬양론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포스팅하고 싶었고,
* 역시 관련해서 '3불 정책'에 대해, 모르는 거 정리하는 차원에서, 포스팅하고 싶었다.
* 그리고 아거님께서, 격려차원이었겠지만, '블로기즘과 민주주의'에 대해 써보면(책을 내보면) 어떻겠나, 하셔서 정말 아무것도 모르지만, 준비하는 차원에서 초안 성격으로 이것저것 써보고 싶었다.
* 아참, 저작권법이나 선거법과 관련한 UGC 문제도 좀 공부하는 셈치고 포스팅하고 싶었고.

그런데 하나도 쓰지 못하고 있다.


2.
물론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다.
게으름에 발목 잡힌 게 가장 크긴 하다.
다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고, 이미 '지나 버린 이슈'라는 생각들이 위 글 상당수(물론 모두는 아니지만)을 쓰지 못하게 하는 이유기도 하다.

포스팅을 하면서도, 점점 더 '시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어떤 압박(?)을 은연중에 내면화시키는 것 같다. 그러니까, '이건 벌써 지나버린 이슈잖아?'라거나, 혹은 '이건 현재 이슈와는 너무 동떨어졌잖아?' 따위의.

블로그가 공적 '미디어'로서의 성격을 갖는 이상은, 그 미디어가 갖는 '시의성 높은 소재'에 대한 글쓰기는 당연한 유혹(?)내지는 압박(?)이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 시의성은 '타인에게도 의미있는' 글쓰기에 대한 요구를 그 안에 함축하고 있다.

그렇더라도, 포스팅은 기본적으로 그냥 쓰고 싶어서, 표현하고 싶어서, 그 표현이 일단은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어서 쓰는 것일테다. 그리고 아무리 개인적인 '독백'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이 '공개되면' 그것 자체의 운명을 갖고, 새롭게 의미생성과정을 거친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그 과정은 전적으로 개인적이지는 않고, 관계적이라는 점에서, 공적이다.

자기에게 의미있는 글이 타인에게도 의미있는 글일 확률이 높지 않나, 그렇게 편하게 기대하면서 써야겠다. 스스로의 주절거림이 의미없는 '독백'이지 않을까 움츠리는 습관은 좀 의식적으로라도 떨쳐내고 말이지.

시의성이 없어도, 또 그게 뜨는 이슈가 아니라도, 나에게 진실하고, 또 진지한, 그렇게 가볍고 투명한 목소리라면, 그 목소리에 화답해줄 친구들을 언제가는 만날 수 있을테다.



p.s.
너무 시의성을 고려하는 제 스스로의 모습이 좀 웃겨서 짧게 써보는 겁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니, 히치하이커님의 글 ( http://liquideus.egloos.com/1020055 )에 썼던 댓글이 생각나네요. 프로그레시브 메탈 좋아하시는 분 혹 계시면 위 글 일독 권합니다.

: )



#. 이 글은 아주 아주 예전에 쓴 글인데요. 아틸라님의 [충동적 책사기]를 읽고 갑자기 생각 나서요. 이 글에 담겨진 냉소적인 뉘앙스는 아틸라님을 향한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오히려 아틸라님의 글에 공감해서 등록하는 글입니다. : ).



다람쥐족 -‘느림’에 관한 단상



"기도가 시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기도 안에 있으며, 희생의 제사가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희생의 제사 안에 있듯이……"
- 마르틴 부버, [나와 너] 중에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하는 내게 갑자기 마르틴 부버가 찾아온 이유를 나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부버는 이렇게 말했고, 이 구절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 중의 하나인데, 시간이 기도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무얼까, 이따금씩 나는 곰씹어 보거나, 내 주변의 知人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수학문제처럼 하나의 해답이 존재하는 물음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각주를 드려다 보아도 거기에 진실한 답이 있지는 않다.

해답. 그렇다. 해답이 없는 질문, 질문 그 자체로서 한없이 이어지는, 끝이 없는 대화를 나는 상상해본다.

또 나는 상상한다. 시간과 경쟁하며,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시간과 싸우도록 강요하는 세상의 논리에 자신을 끼워 맞추며 살아가는 현대의 평범한 사람들, 그러므로, 나와 나를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슬픈 손을, 그러므로, 우리의 부모들의 지친 눈동자를 떠올려 본다.

이를테면 퇴근 후의 지친 몸을 텔레비전 수상기 앞에 늘어뜨리고, 모니터를 이리저리 꾹꾹 누르는, 손톱에 때가 낀 앙상한 손을, 그리고 그, 혹은 그녀의 지친 눈동자에 들어있는 일일드라마의 화면을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정말 슬퍼진다. 그것이 아주 일상적인 현대의 행복이자 슬픔의 조건이 아닐까.

우리는 답이 정해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답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답이 없다면, 그 답을 찾아 여행해야 하며, 그 답을 꼬셔내기 위해 대화해야하며, 그 답이 오기까지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거다.

너무 오래 걸리니 실속이 없다는 것. 쉽게 말해서 '시간은 돈이다'라는 거지. 이 표어는 속도와 시간과 자본에 대한 아주 소름끼치도록 평범한 현대의 잠언이다. 그러니 "시간이 기도 속에 있다"는 말은 아주 배부른 몽상가의 잠꼬대로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잠꼬대라고 비웃는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뭐라 힐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우리이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나인 것이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나는 도무지 갈피를 못 잡겠다. 현대는, 참으로 신기하게도, 속도를 강요하다가도, 이런 종류의 책을 또한 강요한다. 나는 이 책의 진정한 가치와는 상관없이, 출판사의 '발빠른' 기획력과 책 제목과의 괴리감을 생각한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이 책을 아직 읽어보지도 못했다.

그렇지만, 이 베스트셀러라는 책의 제목을 보면서, 그 내용과는 상관없이, 아주 짓궂게, 나는 생각한다. 병 주고 약 주는 세상에 나는 살고 있구나, 라고. 이 책을 '빨리' 읽고, 교양을 찾는 녀석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당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너무 속물인가, 아니면 세상에 너무 잘 적응하고 있는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저 웃겠지. 하하하. 하지만 나의 진심을 이야기하자면, 나는 이 책, 예전에 읽어보려고 했지만, 저자의 의도를 책의 제목만으로 아주, 정말 너무도 악의적으로, 작정하고 오해하여, 천천히 읽어야지, 하면서 이렇게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그러나 게으름과 느림이 같지 않다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게으름이 느림에 대한 일종의 유머가 될 수는, 한번쯤은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보는 것이다.

중심에 대한 저항.
무중심의 여행. 
속도와 무관하게 부유하는 방랑.
일탈의 쾌감이 내면에서 터질 듯한 산책...

중심은 나를 잡아당긴다.
그래서 우리들은 빙빙 돈다.
그 구심력 때문에 우리들의 원심력은 가속도가 붙을 수 있다. 구심력이 강할수록 우리들의 속도는 빨라진다.

아주 거칠게 말하자면, 나가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붙잡는 힘이 세니 아무리 빨리 돌아도 원심력이 구심력을 이기지 못하는 바에야 한없이 빙빙 돌 수밖에 없다. 그 놈의 구심력은 우리들의 원심력과 비례해서 증가하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 구심력에 우리들의 원심력을 맞추어야 한다. 그건 무언의 압력이다. 때문에 혹여 그 힘에서 벗어나거나, 그 힘에 휩쓸려 버린다면, 우리에게는 당장 '낙오자'라는 딱지가 이마에 붙게 된다.

그러니 그 힘을 견디며 빙빙 도는 기술을 채득해야 하는 수밖에.

현대인은 다람쥐족이다.
다람쥐로 길들여져 가고 있다.

빙빙 돈다.
빙빙 돈다.
쳇바퀴가 망가지지 않는 한 빙빙 돌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빙빙 돌다가, 어느 날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사야 하는 것이다.


p.s.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 분들도 많을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한때 대박났던 피에르 쌍소의 책 제목입니다. 지금 찾아보니 '99년 프랑스 논픽션부문 1위'였다고 하네요. 이 글은 리포트로 쓴 글입니다. ㅎㅎ. 블로그에는 처음 공개하네요. 너무 상투적인 글이지만, 추고는 최소한으로 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