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minoci님의 미투데이 2007년 5월 2일 내용입니다.



김승연 사건과 알 수 없는 인정주의

2007/05/02 22:45

#. 이 글은 쏭군님의
반기업 정서, 그것을 이용해 인기 기사를 써 보기 위한 기자의 몸부림
이슈/상식/세상사 2007/05/01 18:21
http://monoeyes.com/166

에 보내는 트랙백입니다.

간략히 적어봅니다.


 

김승연 사건과 알 수 없는 인정주의
- "돈 써서 깡패 몇 명 보내면 그만인것을"


 

0. 김승연 사건의 본질

스파이더 맨이 그랬습니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사건의 본질은, 제가 생각하기엔 다음과 같습니다.

1. 권력에 부여되는 사회적 의무, 그 기대에 대한 극단적인 배반
2. 그 배반에 동원된 야만적인 방식
3. 국가권력(경찰)과 그 권력을 감시해야 하는 권력(언론)이 사건에 담합했다는 혐의들.

김승연 사건은 사사로운 사인(私人)들간의 폭행사건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 회장님이 자신의 사적 권력으로 국가공권력을 대신한 사건입니다.
거기에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려고 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은폐에 국가권력(경찰)과 언론이 자신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방기하거나, 거기에 더해 그 은폐에 가담하거나, 혹은 해태했다는 혐의가 강한 사건입니다.

이는 국가가, 사회가 형성되고, 유지하기 위한 기본이 되는 법의 정신, 그 전제를 일방적으로 부정한 사건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야만으로의 회귀, 박정희 시대로의 회귀에 가까운 사회적 의미가 있는 마땅히 '특종'인 사건입니다.

당연히 공인에 대해서는 그 사회적인 책임이 가중됩니다.
그 공인이 갖는 공적 위상에 비례하게 책임과 기대는 커지게 마련입니다.
이게 이상합니까?

일개 부랑자가 도둑질을 한 것과 대통령이 도둑질을 했을 때, 하나는 지나가는 이야기가 되고, 다른 하나는 특종이 되는겁니다.



1. 쏭군님의 견해

그런데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한화 그룹'이고, 한화 김승연 회장이다. 최대 수혜자는 북창동 양아치들의 대변인 노릇을 하면서, 국민들을 단단히 낚은데 성공한 한계레 모 기자다. 8명이서 한 명을 개패듯 때린 북창동 양아치들은 원래는 콩밥 먹어야 되는데, 제대로 운 좋게 피해자로 둔갑했다."


라고 말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내 버려 둔 아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8명이 넘는 장정들에게 소위 '다굴'을 당했다면 참을 수 있는 부모는 그 어디에도 없을거라고 생각한다."

라고 인정주의에 호소하더군요.
좀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어처구니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김회장은 사건을 중재하러 갔지만, 나 같으면 김회장보다 더 양아치들을 응징했을지도 모르겠다."

"김승연 회장은 남자답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한화 정도의 대기업회장이면, 작은 구멍 가게인 나이트클럽을 상대로 할 필요없이, 돈 써서 깡패 몇 명 보내면 그만인것을, 직접 찾아가서 얼굴을 비춘 것 만으로도 남자답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폭탄선언을 하시더라구요.
'돈써서 깡패 몇 명 보내면 그만인 것을..' 괜히 '남자답게' 몸소 가서 '얼굴을 비췄'군요.

쏭군님께선 언론의 '선정보도'를 비판하시지만, 정작 자신의 글은 전적으로 '추정'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한화 김회장님께 유리한 추정에 의존하고 있더군요.
더욱이 글을 진행하시는 방식은 감상적인 인정주의에 기댄 선동에 가깝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회장쪽에서 보복폭행을 행사하지 않았다고 부인은 하고 있지만, 북창동 나이트클럽의 양아치들은 회장이 돈을 100만원밖에 주지 않아서 앙심이 있는 것 같고, 언론이 김회장 죽이기에 들어가자, 제대로 대어(大魚)하나 물었다고 쾌자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벌써 거금을 받고 입을 닫았거나..."


이렇게 말씀하시는 근거를 묻고 싶습니다.

"물론 폭력은 어떤 경우에라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지만, 사건의 전말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다만 '재벌회장이 주먹 썼다'는 식의 낚시성 기사를 생산해대는 기자들을 보니 더 용납이 되지 않는다."

낚시성 기사가 용납되지 않으십니까?
저는 쏭군님께서 어떠한 물적 근거도 없이, 어떠한 논리적인 추론 근거도 없이 이렇게 쓰시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군요.

"또한, 김회장이 보복폭행을 했다는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김회장은 어떤 보복폭행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화해주를 사며 사건 중재를 하고, 젊은이들을 달래기 위해서 현장에 갔다고 알려져있다. 한화그룹은 최근 기업이미지를 높이기 위해서 천문학적인 금액을 투입하고 있고, 그래서 더욱이 경찰에 신고도 하지 않았는데, 김승연 회장이 바보가 아닌이상, 자기가 나서서 보복폭행을 했겠는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조사중인 사건의 결론을, 자신의 믿고 싶어하는 '희망'에 근거해서, 단정하시는 태도에 대해선 정말 두 손 두 발 다 들게 됩니다.

쏭군님의 마지막 말씀을 들어보죠.

"요즘은 정말이지 기자들을 어떻게 뽑는지 모르겠다.
포털이든 신문이든 제대로 된 기사는 찾아보기가 힘들정도니 말이다.
그리고, 반기업 정서가 팽배해 있는 대한민국, 그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식도 많이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이 돌아가야 하는 건 쏭군님 스스로에게 입니다.
위 글에서 어떤 기사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이 가해졌는지 묻고 싶습니다.
어떤 논리적인 근거가 설득력있게 조직되었는지 여쭙고 싶네요.

저는 쏭군님께 어떠한 유감도 없습니다.
오히려 동료 블로거로서 쏭군님께 막연한 호감이 있다면 모를까요.
다만 이런 무책임한 의견에 대해선 비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것이 동료로서의 최소한의 애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쏭군님이라서 솔직히 이런 글 쓰는거 저도 부담을 느낍니다.
다만 쓰지 않을 수 없네요.

좀더 첨언하고 정리할까 합니다.


2. 김승연 사건과 인정주의의 한계

물론 아버지로서 느꼈을 김승연이란 자연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화났겠죠, 애지중지 키웠던 둘째가 '양아치 새끼들'에게 맞고 왔으니, 그 화나는 마음 이해합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입니다.
거기까지만 이해합니다.

자신의 사적인 권력을 동원해서 '피의 복수'를 감행하시고, 거기에 만천하에 밝혀진 폭행사실을 부인하시는 그 모습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거기에 아버지의 부성이 참작될 여지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언론의 태도 역시 비판받을 요소가 없지 않습니다.
다만 쏭군님의 글에 거칠게 표현된 그런 '감정적인 비난'으로는 비판하고자 하는 언론의 선정주의를 그대로 흉내내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한번 강조합니다.
김승연 사건의 본질은 일개 사인인 아버지가 아들을 대신해서 화풀이 한 그저그런 사건이 아닙니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공인이 그 권력을 사사롭게 자신의 감정적인 만족을 위해, 자신의 사적 복수를 위해 동원했고, 거기에 자신의 조직적인 권력이 동원되었고, 또 그렇게 행사된 '야만'에 경찰이라는 국가권력이 그 사적권력의 야만적인 행사를 은폐하려는 혐의가 강한 사건입니다. 언론을 비판하려면, 그런 자본권력과 국가공권력의 '담합'을 예민하게 감시하지 못하고, 그 사건을 거의 두 달 동안 방치한 그 '언론의 직무유기'를 비판해야 합니다.


이상입니다.




p.s.
일단 등록하고 링크 보충합니다.
이 글은 [나의 추천 글]에 올립니다.



이 글은 minoci님의 미투데이 2007년 5월 1일 내용입니다.



시험삼아 당분간만 ..



김승연과 나

2007/05/01 16:09

1. 독백

나는 김승연이 무슨 개같은 짓을 하든 상관없다.
그가 사람을 죽이든, 살해를 당하든.
내 관심 밖이다.
나랑 무슨 상관 있는데?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실은 박지윤이 궁금하고, 인막녀가 궁금하다.
특히 인막녀,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이냐?
검색하면 금방 나오겠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궁금하다고 하면서 검색하지 않는 건 스스로의 경험칙상, 그 박지윤이, 인막녀란게 거의 쓰레기 정보일 것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실은 어떤 고립된 스피커, 어떤 고립된 실존, 고도를 기다리는, 그런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인도에 표류한 한 마리 짐승이랄까?
그런 기분이 들곤 한다.


2. 그런데...

김승연'들'이 많아지면..
내 자유와 내 존엄은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방식들로
썩어지고, 문들어지고, 사라져버릴테다.
난 정말 그런 두려움이 있다.

그걸 실천하는 건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의 메카니즘은 자본을 단위로, 권력을 단위로 단계적으로 그 자본과 권력에 봉사한다.

물론 시스템은 김승연을 보호하기도 하고, 김승연을 죽이기도 한다.
하지만 시스템은 나와 당신 보다는 김승연을 위해 봉사한다.
그 시스템은 보통 국가, 혹은 언론, 혹은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아, 그 시스템은 요즘은 '포털'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포털의 '촉수'에 걸려들어서, 박지윤을 클릭하고 말았다.
아.. 나는 또 이렇게 걸려든다.

그 시스템은 어리석은 자들,
그러니 나와 같은 자들의 망각과
그 망각을 찬미하는 가공할 만한 괴물, '일상'이라는 것과 함께 자란다.


3. 종속된 자유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
칸트가 이야기했다.
칸트가 무자비하게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칸트 역시 시스템의 정점을 위해 봉사했다.
그는 엘리트였다.
그는 보호받았다.

미디어는 이제 통제될 수 없다, 라고 선언한다고 치자.
그 미디어의 가능성이 현재의 블로그라고 치자.
하지만 미디어는 거대 시스템의 회로에 따라 움직이고, 조직되고, 또 유통된다.

현재로서는 그렇다.
이건 당연하지 않나?
아닌가?

거대 시스템은 여전히 우리들과는 상관없는, 우리들이 파악하기 어려운 자신만의 의지로 스스로를 세우고, 우리들을 통제한다. 우리들의 섹스와 우리들의 천박한, 하지만 사랑스런 비교심리들, 질투를 위해.. 그리고 우리들의 나르시즘을 위해서 우리들을 사육한다.


4. 권력

권력이 싫다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서 권력을 거절하고, 권위를 배격한다.
그렇게 히피처럼, 보헤미안처럼 낭만적으로, 마치 저주받은 시인처럼 노래한다.
그게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있다.
지랄 쌈 싸먹고 있네.
재수없다.

권력은 권력을 통해서만 부정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권력의 방향이고, 색깔이고, 풍경이다.

권력은 당신의 낭만적이고 뽀송뽀송한 동화 속 풍경 같은 그 작은 소망으로 그 방향을 바꾸거나 그 색을 바꾸거나 그 풍경을 달리 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 건 권력을 스스로 세우는 거다.
우리들은 그런데 섬이다.
그 섬으로서의 권력, 요즘 하는 말로 롱테일...
난 별로 그걸 신뢰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 말고는 우리들의 모래알 같은 권력들은 도저히 조직화하기 조차 힘들다.



p.s.
박지윤, 인막녀는 김승연을 잡아 먹는다.
제발 박지윤 이야기는 그만하자.
왜 남의 사생활에 그다지도 관심이 많단 말인가?
사생활 이야기 그만하자, 는 일견 정당한(나로서는) 관점 역시나 그 이야기에 '권력'을 보태는 행위다.
언제나 타이밍이 중요하다.



추억이 느린 안개처럼, 그런데 불현듯 몰아닥친다. 
그 추억은 색도 없고, 풍경도 없다.
난 그 기억들에 눌려서, 아니 그 기억의 색도 없이 풍경도 없이 존재하는 그 어떤 것들에 포위된다.
그건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고, 불행하지도 않다.
다만 숨이 멎을 만큼 아득한 공포와 설레임이 있을 뿐이다.

당신은 어려운 말을 잘 하시는군요.
아니요.
저는 벙어리랍니다.
당신은 기억을 구걸하세요?
아니요.
이미 기억이 절 버린 걸요.

...

어제 엄마가 왔다.
엄마가 나를 위해, 혹은 당신을 위해 울었다.
그건 세속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당신이 알고 있고, 나도 알고 있는 이야기들..
식상하고, 낡은 부엌 같은... 그런 이야기들.

나는 내가 왜 이런 글을 쓰는지
아니, 내가 왜 글을 쓰는지 가끔씩 궁금하다.
왜 나는 글을 쓰는가...




p.s.
이 카테고리의 글은 언제 삭제할지 비공개로 할지 모릅니다.




TA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