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와 미투 외 - 5월 11일

2007/05/12 04:31
  • 미투는 블로그와의 연계성을 염두에 둔 모델이라고 느끼는데 (그게 단점이 아니라) 장점을 갖는다고 생각한다.  오전 10시 2분
  • 사람들과의 만남은 삶의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다. 오늘도 오랜만에 모임이 있는데.. 기분이 좋네. : ) 오전 10시 3분
  • 이제 친구가 모두 99명이다. 친구신청은 당분간 그만 받을까 싶다.. ^ ^;; 너무 많다. 오후 6시 19분


단상.

1. 3.
블로그의 독자수(미투의 경우엔 친구)는 다다익선일까?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때 부터 생각했던 주제다.
나는 블로그의 방향이 세 가지라고 생각한다.
그건 관계지향, 영향력지향, 그리고 자기지향이다.
그건 물론 서로 섞이고, 어떤 하나가 다른 나머지를 배격하는 관계도 아니며, 모두 각각 어떤 의미에서는 내재된 본질요소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와 세계(타인)은 서로 다른 것은 아닐 때도 많지만.. 그렇게 서로 다른 영역으로 전제하면, 나와 타인 그 사이, 그 교류에 가치를 둘 수도 있고, 나와 타인(세계,독자,친구)라는 관계의 쌍에서 나 -> 세계라는 화살표를 강조할 수도 있다. 이것들은 모두 자기를 스스로 탐구하고, 사색하고, 고민하는 방식이다. 그러니 자기지향의 방식이 크게 두 가지로 표현되는 것 같다는 생각이고, 자기지향은 모든 삶의 본질 요소다. 특히나 쓴다는 것, 상호 어떤 것들에 대해 '대화'한다는 것은 그 자기탐구, 자기지향의 요소를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미투 친구들의 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을까?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고, 나처럼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답을 말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만의 방법론(이라고 하기엔 좀 너무 오버고) 혹은 자기만의 취향이 있는거지. 하지만 단 두 세명과 대화하더라도, 아니 한 한명과 꾸준히 대화하더라도..
그 대화의 모델이 '영향력'을 가질 수도 있을테다.
그 대화가 진실하고, 또 서로에게 따뜻하고, 또 가볍게 진지한 것이라면...

p.s.
미투 방문자수를 신경쓴다는 건.. 굉장히 성가신 일이다.
블로그경 1장 1절, "네 블로그의 방문자 수에 연연하지 말지어다" (이건 꽤 유명하다고 생각하는데)
방문자 수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나.. 생각해보면.. 그건 역시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 싶고.. 모두들 조금은 그 방문자수에 연연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글은 minoci님의 미투데이 2007년 5월 11일 내용입니다.



기형도와 나

2007/05/11 09:25
1. 내가 처음 읽은 기형도는 권택영 정효구가 읽은 기형도였다. 어떤 잡지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외국 문학]이었던 것 같은데..(실은 '작가세계'였다). 권택영 정효구는 '죽음이 살다 간 자리'라는 짧은 시평을 썼고, 그 글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권택영 정효구가 읽은 기형도는 이미 죽음이었고, 그는 정말 죽었다. 기형도, 그 육체의 죽음은 이미 있었던 죽음의 확인이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나는 기형도를 처음 읽었다.

그 시를 읽는 동안의 매혹들, 그 스산한 느낌들, 그 냉랭한 바람소리,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그리고 그 안을 맴도는 축축한 욕망들...은 언제라도 그런 풍경들 속으로 다시 나를 데려갈 것만 같다.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고, 시간은 기억을 항상 조금은 더 따뜻하게 하는 것 같다고 나는 자주 느낀다. 기형도도 그렇다. 기형도는 죽었다... 그 죽음은 조금은 따뜻한 어떤 것이 되었다.

2. 기형도의 시에는 암울하고, 딱딱하며, 차가운, 그런데 문득 소름끼치도록 따스한, 그래서 더 싸늘하게 감촉되는 세계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물건처럼 메마르고, 시간은 오래된 송장처럼 푸석거린다. 그 메마른 물건 같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공간에는 놀랍게도 따뜻한 추억의 그리움 같은 시간이 흘러간다. 김현은 그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했다. 에밀 쿠스트리차(혹은 마르께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묻어 있는 따스함, 낙관은 기형도의 시 속 풍경에선 발견하기 힘들다.  

그 기괴한 세계는 물론 80년대의 공기 속에서, 그 문맥 속에서 좀더 특별한 이미지를 갖고 형상화된다. 나는 그 공기의 관성 속에서 박노해를 읽었고, 노동해방문학을 읽었고,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 그리고 황지우를 읽었고, 이성복을 읽었고, 송두율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기형도를 읽었다. 그들은 모두는 삶과 세계의 고립에 대해, 자신을 둘러싼 그 차가운 피처럼 소름끼치는 세계, 한강 위에는 여전히 평화롭게 유람선 떠 있는 그 대한민국을 둘러싼 그 온갖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의 위선에 대해 진심을 다해 분노했고, 치열하게 증오했다. 때론 이성의 차가운 응시를 통해, 때론 감성에 홀린 듯 취하여 그 모든 것들을 살로 비비듯.. 그들은 세계를 분석했고, 그렇게 노래했다.

기형도의 시세계는 마르크스 미학이론을 비판하는 마르쿠제의 저 유명한 명제를 떠올린다.
... 내용에 주어진 형식으로 인해 혁명적인 것이 된다. 실로 내용(기존 현실에 의해서 파생된)은 이 작품들 속에서 오로지 일탈되고 중재된 것으로서만 나타난다. 예술의 진리는 여기 - 세계란 참으로 예술작품 속에 나타나는 바 그대로라는 점에 있다. 이 명제는 문학이 노동계급이나 또는 '혁명'을 위해 씌어졌다고 해서 혁명적인 것은 아님을 함축한다. 내용이 형식이 됨으로써, 문학은 단지 그 자체에 관한 중대한 의미 속에서만 혁명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이란 오직 그 자체의 미학적 차원에 달려 있다. 실천과 예술의 관계는 냉혹하게도 간접적이고, 중재되고, 단절된 것이다. 좀더 즉각적으로 예술작품이 정치화되면 될수록, 그것은 갈등에 대한, 변화의 급진적이고 초월적인 목표점에 대한 힘을 축소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브레히트의 교훈적인 희곡에서보다는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 속에 좀더 거대한 혁명적 잠재력이 있다고 하겠다.

- 허버트 마르쿠제, [미학의 차원], p. 12. 청하,


3. 기형도는 자신을 둘러싼 비극적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미 죽음과도 같은 사람들의  굳어버린 비인간의 제스처들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그 비극적 제스처들을 만들어내는 세계와 그에 대한 감수성을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으로 형상화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비극적 제스처에 대한 극적인 거절'을 그의 시 속에서 실현하고 있다. 기형도는 죽음으로써 신화가 되었지만, 그의 시는 그 죽음으로 인한 상업적인 영웅신화보다 훨씬 더 극적이며, 위대하다. 아마도 그의 시는 그 당대에 있어 가장 혁명적인 상상력으로 쓰여진 미학적 정치적 성취들 중 하나일 것이다.


* 발아점 : 가즈랑님의 글



4. 기억의 변주 [07. 08. 22].
eunki님( http://eunki.kr/ )께서 방명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죽음이 살다간 자리'는 권택영의 글이 아니라, 정효구가 작가세계에 발표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혹시 같은 제목의 다른 글인가요?" - eunki님
죽음이 살다간 자리'는 권택영씨께서 외국문학에 발표하신 시평으로 기억합니다. 정효구씨께서 쓰신 글은 다른 글이 아닌가 싶네요. 당시 외국문학을 구입해서 읽었던 기억이라서요. '다른' 글이라고 추정합니다. ^ ^; 그런데 기억은 흔히 거짓말을 잘 하니, 저도 다시 한번 찾아보고 다시 대답드릴게요. : )

* 추가.
나름으로 찾아봤는데, 찾기가 쉽지 않네요. 외국문학 사이트가 따로 존재하지도 않은 것 같고, 외국문학(당시 기억에 의존하면 동서문화사에서 출판했던 것 같은데요)은 이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관련 정보를 찾아보니 98년 경제침체(IMF여파)로 '휴간'되었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그 이후의 기록은 찾기가 어렵네요. 당시 외국문학이 제 본가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혹여라도 본가에서 그 책을 찾게되면 다시 좀더 확실한 대답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정효구씨께서 쓰신 글 역시 기형도에 관한 '시평'이었나요? 작가세계는 저도 출간 초반에는 꽤 재밌게 읽었던 잡지였는데, 언제쯤 실린 글인지도 대략적으로 기억하고 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

* 다시 추가
[작가세계]와 정효구라는 이름을 다시 떠올리니 제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세계]가 막 출간될 무렵에 수록된 정효구씨의 시평일수도 있겠다는 기억이 떠올라서요. 정효구씨께서 기고한 [작가세계]는 이문열 특집(1호), 김지하 특집(2호) 중 하나인가요? 작가세계는 초기 몇년 동안은 꾸준히 모아두어서 나중에라도 본가에서 확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eueki님 덕분에 제 잘못된 기억의 변주를 바로잡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세심한 지적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점점 더 eunki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정확한 것 같고, 제 기억이 잘못된 변주라는 생각이 듭니다. ^ ^; 어서 확인해보고 싶네요. : )

* 최종 추가 [09.11.21]
eunki님께서 pdf 파일로 정효구씨의 서평을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맞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달리 채색되어 엉뚱한 권택영씨의 서평인줄로만 알았네요. 파일은 아주 예전에 받은 것인데, 이제야 본문에 표시하네요.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최종추가 일시는 댓글로도 표시합니다. 그리고 eunki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에 대한 것을 제목으로 표시했었으나, 이제는 어느 정도 그 표시가 충분했다고 생각해서요. 원래대로 제목을 돌립니다.



  • [애센 올블] "애드센스로 돈 얼마벌었다" 라는 글 자체에 유감이 있는 건 아니다. 물론 그런 글 좋아하진 않는다. 문제는 거기에 추천이 늘어간다는 거다. 이건 명백한 동업자정신(ㅡㅡ;)일텐데.. 이런 식으로 가면 올블에 대한 신뢰도는 추락한다. 추천인 공개가 살 길! 오후 1시 26분
  • [이어서.. 오해 소지를 줄이기 위해... ;;; ] 애센에 대한 논의나, 혹은 애센을 통한 블로그 수익모델 고민(논의 토론)에 대해선 난 어떤 거부감도 없다. 오히려 흥미롭지. 다만 내가 지적한 건 그저 애센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올블 추천'하는 경향을 지적한거다. 오후 1시 49분
  • 저널리즘과 관련해서 굉장히 흥미로운 이슈: 더불어 이 글에 보면 "트로피 아내"란 비유가 등장하는데.. 참 재밌는 비유인 것 같다. 난 '트로피 아내' 오늘 처음 들어봤네. ^ ^; 오후 2시 40분
  • "애드센스로 얼마 얼마 벌었어요" (일부러 올블 링크 주소로 걸었다) 이 글은 [나의 추천글]이다. ㅡㅡ;; 블로고스피어에서 어느 정도는 명망을 갖는 소위 '인기 블로거'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다. 주성치님께 어떤 유감도 없지만, 욕먹을 각오하고 남긴다. 오후 2시 53분



    메모.

    1. 2. 4.
    *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포스팅할 것.
    * 관찰 : 이 글을 쓴 뒤에 위 글의 추천 게이지 칸이 하나 줄었다. 물론 이 글 하고는 상관없을지도 모르지만.

    3. 강하게 권합니다. 특히 저널리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필독하시길 당부드립니다.


이 글은 minoci님의 미투데이 2007년 5월 10일 내용입니다.



성연광 기자께 사과드립니다.

2007/05/10 16:15
일단
[성연광 기자께 - 기사와 기자의 공적 가치] ( http://minoci.net/76 )
위 글은 비공개로 돌렸습니다.


저에게 남기신 방명록이 비밀글인지 몰랐습니다.
저로선 비밀글로 문의한 사안에 대해선, 그것을 공개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원칙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예외적으로 공적인 가치가 있고, 또 당사자의 '추정적 승낙'을 강하게 확신하는 것은 예외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지금까지 비밀글로 문의한 사안에 대해 공개적으로 포스팅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위 예외적 상황에 대해서는 한 두 번 정도 그런 경우가 있지만요. 다만 그 예외상황 경우에도 의견의 공적인 것들만을 표시했지, 그 당사자 개인의 사적 정보를 밝힌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제 부주의함으로 인해 그 방명록이 비밀글인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네요.
성연광기자의 댓글을 받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용하는 스킨은 로긴상태에서 방명록을 보면, 비밀글인지 아닌지가 표시되지 않아요.
물론 변명에 불과하지요.
이는 제 부주의함이고, 또 과실입니다.

다시한번 성연광기자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2. 이삼구님께서 더불어 댓글을 주셨는데요.
"성기자님은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IT쪽 이야기를 상당히 진실되고 깊게 다루는 몇안되는 기자 중 한분입니다. 성기자님 이름으로 검색을 해 보시면 아시겠지만요..."(논평의 일부) 라고 하시네요.
이는 물론 위 비공개된 글이 공개된 상태일 때 남기신 논평이십니다.

이삼구님을 잘은 모르지만, 구글에 대한 이모저모에 대해 매우 깊이 있는 글을 쓰시는 블로거로 생각합니다.
예전에는 메일을 통해 몇가지 궁금증을 상의드린 바도 있죠. 이삼구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정도라면, 성연광 기자에 대한 제 비판글이 너무 쉽게 쓰여진 혐의가 있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다만 저는 개별 기사의 내용을 문제삼았을 뿐이고, 이에 대해 비판할 부분이 있다면 어제든지 그저 그 의견과 비평에 대해 다시 비평하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 개인에 대한 사적인 호불호가 글과 연동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이 점은 제 원칙이라서요.

그리고 포스팅을 하면서 어떤 블로거의 닉네임을, 그리고 기자의 이름을 태그로 사용하고 말고는, 그것이 공적으로 표시된 '공적인 의견'에 대한 비평인 이상은, 그 블로거나 기자들도 간섭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합니다.
이 점은 다시금 양해를 구합니다.

다만 역시 신뢰하는 블로거로서 이삼구님께서 추천하신 성기자의 글을, 시간은 좀 지났지만 소개합니다.
그리고 성연광 기자의 이름으로 구글링하면 이렇습니다.

저도 글 몇개 더 읽어봤는데요.
좋은 기사들이 많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시길 기대합니다.

다만 제 판단표준에 의해 비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다면 언제든지 다시 비판할 생각이에요.
비판이란, 항상 강조하는 바이지만, 가장 의미있는 애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시간 남아서, 할 일 없어서 비판하는 건 아니잖아요.

다시한번 성기자께 사과드립니다.
죄송합니다.


p.s.
성기자께 부탁을 드리자면..
이전 글을 공개로 돌리고 싶긴 합니다.
물론 공적인 부분(특히 방명록을 통해 표시된 부분 중에서 공적인 것들만 추출해서요)만이요.
성기자께서 양해해주시지 않으면 이전 글은 계속 비공개로 두거나, 혹은 삭제할 예정입니다.

아, 그리고 이전 글에 댓글 논평을 주신 아웃사이더님과 레이니돌님께도 감사말씀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 )





 

블로그의 시간과 공간 ; 블로깅의 시의성에 대해
- 써머즈님의 [
대안 미디어로서의 블로그에 관한 생각]을 읽고






0. 써머즈님의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는 제 해석에 의해 '읽힌' 내용에 불과합니다.
위 글을 직접 읽어주시길 권합니다(무척 좋은 글이고, 또 중요한 지적을 담은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따옴표는 써머즈님 표현을, 작은 따옴표는 제가 해석한 내용을 강조합니다.  

1. 블로그는 "대안" 미디어가 "될 수도" 있다.
2. 블로그의 미디어로서의 성격은 주로 '롱테일'을 통해 발현된다.
3. 블로그의 미디어성이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방식은 메타블로그다.
4. 메타블로그는 그 자체로 '당파성' '경향'을 갖는다. 그것은 필터링을 통해(게이트키핑 혹은 편집이 그 자체로 가미된 알고리즘을 통해) 구현된다.
5. 가령, 그 예는 태그다.
6. 우리는 메타블로그의 분류 체계에 따라 '그 내용'에 좀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기존 미디어와의 차이다.
7. 시의성의 관점에서 기존 전통 미디어와 (메타)블로그는 게임이 안된다.
8. 블로그의 강점은 '관점과 시각'이다.
9. 그 '관점과 시각'은 시간에 의해 지배받기 보다는, (비유하자면) 공간적인 깊이에 의해 지배받는다.
10. 블로그는 기존 미디어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다. 블로그의 미디어로서의 가치는 이러한 "대안"적인 성격에서 파생한다.

- 써머즈, [
대안 미디어로서의 블로그에 관한 생각] 중에서




1. 블로그의 시간과 공간
이런 비유가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블로그의 시간은 블로깅의 동적인 성격을, 블로그의 공간은 그 정적인 성격을 담고 있다고 '느낍니다'.

콘텐츠의 시의성은 당연히 블로그의 시간과 보다 큰 상관관계를 맺고, 정보 아카이브로서의 블로그'들'은 시간보다는 (그 시간의 집적에 의해 형성된) 공간적인 깊이로서, 그 너비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시의성은 전통 미디어 저널리즘의 강점이고(이는 써머즈님의 지적이 지당하다고 생각하구요), 블로거의 개성이 반영된 관점과 개별적인 '미시 관심사' 폭과 깊이는 블로그(블로기즘)의 강점이라고 써머즈님께선 지적하고 계십니다.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

다만 몇 가지 점에서 제 서툰 생각을 보충하고 싶네요.
이하 간단히 '크로키'하는 정도로 적어봅니다.


2. 블로그의 시의성과 블로그의 시대적 가치
블로깅에 기대되는 시의성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써머즈님께서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고는 해석하지 않습니다. 써머즈님께서는 블로그의 동적인 성격보다는 블로그의 정적인 성격, 공간적인 측면에 대해 좀더 '강조'하는 것이고, 그것이 '시의성'을 생명(?)으로 하는 기존 전통 미디어와의 차별성이라고 지적하는 것일테니까요. 써머즈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계십니다.

"당장의 시의성이 반영된 글들은 정보에 접근이 용이한 분들에게 맞기면 됩니다. 혹은 블로그를 프로파간다의 수단으로 삼아 순발력있게 아젠다를 세팅하고 주장을 펼치는데 재능있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게 기존의 미디어를 통할 수도 있고,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특정 직업군의 블로거들을 통할 수도 있죠."

- 써머즈, [대안 미디어로서의 블로그에 관한 생각] 중에서



저로선 써머즈님의 지적에 대해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블로깅은 '시간'과 함께 '호흡'한다고 생각합니다.
좀더 강하게 제 견해를 밝히자면, 블로깅 역시 '다소 느슨한' 시의성의 요구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왜냐하면 블로그가 '민주시민들의 일상적인 차원'에서의 토론을 확장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려면, 최소한 '그 이슈가 유통되는 시간'에 대한 고민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통 미디어의 순발력과 (매우 강하게 요구되는) 시의성에 대한 요구를 블로그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통 미디어의 시스템(집단성과 그 집단성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효율성. 그리고 정보원에 대한 접근성)은 개개의 블로그(거)와는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요.

다만 블로그(거)에게도 '좀 느슨한 형태'의 시의성에 대한 요구, 혹은 그런 기대는 당연하게 부과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이는 다시 강조하지만, 블로그'들'의 공간적인 조직을 통해 구성되는 '정보 아카이브'로서의 역할이나 가능성이 중요한 만큼, 동적인 블로깅을 통해 '그 이슈의 시간들' 동안 생생하게 자신의 온라인 실존을 그 '구체적인 역사와 사건'들에 던지는 체험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블로그가 갖는 시대적인 의미는 실시간에 가까운 '토론'이 '일상'의 차원에서 구현될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인 가치'에 있다고 저는 판단합니다. 꼭 대단한 분석과 대단한 깊이가 담긴 인식과 관점을 보여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런 엄격성에 대한 억압이 '참여'에 대한 욕구 자체를 거세시킨다면 그것도 부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툰 의견이나마 그 논의에 그 이슈에 '참여'하는 것, 그 자체로 블로깅의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선 좀더 시간을 두고 논의가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서툰 생각을 적어봅니다.

이 글은 초안의 초안에 불과합니다.


끝으로 써머즈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p.s.
서툰 글이지만 올블 [나의 추천 글] 에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