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처음 읽은 기형도는 권택영(?)이 읽은 기형도였다.
어떤 잡지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외국 문학]이었던 것 같은데.. .
권택영은 '죽음이 살다 간 자리'라는 짧은 시평을 썼고, 그 글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권택영이 읽은 기형도는 이미 죽음이었고, 그는 정말 죽었다.
기형도, 그 육체의 죽음은 이미 있었던 죽음의 확인이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나는 기형도를 처음 읽었다.
그 시를 읽는 동안의 매혹들, 그 스산한 느낌들, 그 냉랭한 바람소리,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그리고 그 안을 맴도는 축축한 욕망들...은 언제라도 그런 풍경들 속으로 다시 나를 데려갈 것만 같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고, 시간은 기억을 항상 조금은 더 따뜻하게 하는 것 같다고 나는 자주 느낀다.
기형도도 그렇다.
기형도는 죽었다...
그 죽음은 조금은 따뜻한 어떤 것이 되었다.
2.
기형도의 시에는 암울하고, 딱딱하며, 차가운, 그런데 문득 소름끼치게 따스한, 그래서 더 싸늘하게 감촉되는 세계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물건처럼 메마르고, 시간은 오래된 송장처럼 푸석거린다. 김현은 그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했다. 에밀 쿠스트리차(혹은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묻어 있는 따스함, 낙관은 기형도의 시 속 풍경에선 발견하기 힘들다.
그 기괴한 세계는 물론 80년대의 공기 속에서, 그 문맥 속에서 좀더 특별한 형상화, 이미지를 갖는다. 나는 그 공기의 관성 속에서 박노해를 읽었고, 노동해방문학을 읽었고,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 그리고 황지우를 읽었고, 이성복을 읽었고, 송두율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기형도를 읽었다.
그들은 모두 진심으로, 자신의 세계에 대해, 자신을 둘러싼, 대한민국을 둘러싼 그 온갖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에 대해 분노했고, 증오했다. 때론 이성적으로 때론 감수성에 홀린 듯 취해서.. 그들은 세계를 노래했고, 분석했다.
기형도의 시세계는 마르쿠제의 명제를 떠올린다.
좀 길지만 의미있는 문장들이고, 거기에 진실이 조금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옮겨본다(부자연스런 번역투 문장은 부드럽게 수정했다).
3.
기형도는 자신을 둘러싼 비극적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미 죽음과도 같은 사람들의 비극적이며 견고하게 굳은 표피적 제스처들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그 비극적 제스처들을 만들어내는 세계와 그에 대한 감수성을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스스로 '비극적 제스처에 대한 극적인 거절'을 그의 시 속에서 실현하고 있다.
기형도는 죽음으로써 신화가 되었지만,
그의 시는 그 죽음으로 인한 상업적인 영웅신화보다 훨씬 더 극적이며, 위대하다.
아마도 그의 시는 그 당대에 있어 가장 혁명적인 상상력으로 쓰여진 미학적 정치적 성취들 중 하나일 것이다.
* 발아점 : 가즈랑님의 글
4. 추가 - 기억의 변주 [07. 08. 22].
eunki님( http://eunki.kr/ )께서 방명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죽음이 살다간 자리'는 권택영씨께서 외국문학에 발표하신 시평으로 기억합니다. 정효구씨께서 쓰신 글은 다른 글이 아닌가 싶네요. 당시 외국문학을 구입해서 읽었던 기억이라서요. '다른' 글이라고 추정합니다. ^ ^;
그런데 기억은 흔히 거짓말을 잘 하니, 저도 다시 한번 찾아보고 다시 대답드릴게요. : )
* 추가.
나름으로 찾아봤는데, 찾기가 쉽지 않네요.
외국문학 사이트가 따로 존재하지도 않은 것 같고, 외국문학(당시 기억에 의존하면 동서문화사에서 출판했던 것 같은데요)은 이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관련 정보를 찾아보니 98년 경제침체(IMF여파)로 '휴간'되었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그 이후의 기록은 찾기가 어렵네요. 당시 외국문학이 제 본가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혹여라도 본가에서 그 책을 찾게되면 다시 좀더 확실한 대답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정효구씨께서 쓰신 글 역시 기형도에 관한 '시평'이었나요? 작가세계는 저도 출간 초반에는 꽤 재밌게 읽었던 잡지였는데, 언제쯤 실린 글인지도 대략적으로 기억하고 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
* 다시 추가 ^ ^
[작가세계]와 정효구라는 이름을 다시 떠올리니 제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세계]가 막 출간될 무렵에 수록된 정효구씨의 시평일수도 있겠다는 기억이 떠올라서요. 정효구씨께서 기고한 [작가세계]는 이문열 특집(1호), 김지하 특집(2호) 중 하나인가요? 작가세계는 초기 몇년 동안은 꾸준히 모아두어서 나중에라도 본가에서 확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eueki님 덕분에 제 잘못된 기억의 변주를 바로잡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세심한 지적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점점 더 eunki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정확한 것 같고, 제 기억이 잘못된 변주라는 생각이 듭니다. ^ ^;
어서 확인해보고 싶네요. : )
내가 처음 읽은 기형도는 권택영(?)이 읽은 기형도였다.
어떤 잡지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아마도 [외국 문학]이었던 것 같은데.. .
권택영은 '죽음이 살다 간 자리'라는 짧은 시평을 썼고, 그 글은 무척이나 매력적이었다.
권택영이 읽은 기형도는 이미 죽음이었고, 그는 정말 죽었다.
기형도, 그 육체의 죽음은 이미 있었던 죽음의 확인이었을까?
아무튼 그래서 나는 기형도를 처음 읽었다.
그 시를 읽는 동안의 매혹들, 그 스산한 느낌들, 그 냉랭한 바람소리, 앙상한 나뭇가지들의 흐느낌, 그리고 그 안을 맴도는 축축한 욕망들...은 언제라도 그런 풍경들 속으로 다시 나를 데려갈 것만 같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났고, 시간은 기억을 항상 조금은 더 따뜻하게 하는 것 같다고 나는 자주 느낀다.
기형도도 그렇다.
기형도는 죽었다...
그 죽음은 조금은 따뜻한 어떤 것이 되었다.
- 추가. 권택영과 [외국문학]은 잘못된 기억인 것 같습니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현재로서는 정효구씨께서 [작가세계]에 기고한 시평과 착오를 일으킨 것 같아요. 좀더 자세한 사연은 '4. 추가'를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 ^;
2.
기형도의 시에는 암울하고, 딱딱하며, 차가운, 그런데 문득 소름끼치게 따스한, 그래서 더 싸늘하게 감촉되는 세계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물건처럼 메마르고, 시간은 오래된 송장처럼 푸석거린다. 김현은 그걸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이라고 명명했다. 에밀 쿠스트리차(혹은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묻어 있는 따스함, 낙관은 기형도의 시 속 풍경에선 발견하기 힘들다.
그 기괴한 세계는 물론 80년대의 공기 속에서, 그 문맥 속에서 좀더 특별한 형상화, 이미지를 갖는다. 나는 그 공기의 관성 속에서 박노해를 읽었고, 노동해방문학을 읽었고, 공산당 선언을 읽었다. 그리고 황지우를 읽었고, 이성복을 읽었고, 송두율을 읽었다.
그리고 나는 기형도를 읽었다.
그들은 모두 진심으로, 자신의 세계에 대해, 자신을 둘러싼, 대한민국을 둘러싼 그 온갖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에 대해 분노했고, 증오했다. 때론 이성적으로 때론 감수성에 홀린 듯 취해서.. 그들은 세계를 노래했고, 분석했다.
기형도의 시세계는 마르쿠제의 명제를 떠올린다.
좀 길지만 의미있는 문장들이고, 거기에 진실이 조금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옮겨본다(부자연스런 번역투 문장은 부드럽게 수정했다).
... 내용에 주어진 형식으로 인해 혁명적인 것이 된다. 실로 내용(기존 현실에 의해서 파생된)은 이 작품들 속에서 오로지 일탈되고 중재된 것으로서만 나타난다. 예술의 진리는 여기 - 세계란 참으로 예술작품 속에 나타나는 바 그대로라는 점에 있다.
이 명제는 문학이 노동계급이나 또는 '혁명'을 위해 씌어졌다고 해서 혁명적인 것은 아님을 함축한다. 내용이 형식이 됨으로써, 문학은 단지 그 자체에 관한 중대한 의미 속에서만 혁명적이라고 불릴 수 있다.
예술의 정치적 잠재력이란 오직 그 자체의 미학적 차원에 달려 있다. 실천과 예술의 관계는 냉혹하게도 간접적이고, 중재되고, 단절된 것이다. 좀더 즉각적으로 예술작품이 정치화되면 될수록, 그것은 갈등에 대한, 변화의 급진적이고 초월적인 목표점에 대한 힘을 축소시킨다.
이런 의미에서 브레히트의 교훈적인 희곡에서보다는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 속에 좀더 거대한 혁명적 잠재력이 있다고 하겠다.
- 허버트 마르쿠제, [미학의 차원], 청하, P. 12.
3.
기형도는 자신을 둘러싼 비극적 세계와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이미 죽음과도 같은 사람들의 비극적이며 견고하게 굳은 표피적 제스처들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그 비극적 제스처들을 만들어내는 세계와 그에 대한 감수성을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스스로 '비극적 제스처에 대한 극적인 거절'을 그의 시 속에서 실현하고 있다.
기형도는 죽음으로써 신화가 되었지만,
그의 시는 그 죽음으로 인한 상업적인 영웅신화보다 훨씬 더 극적이며, 위대하다.
아마도 그의 시는 그 당대에 있어 가장 혁명적인 상상력으로 쓰여진 미학적 정치적 성취들 중 하나일 것이다.
* 발아점 : 가즈랑님의 글
4. 추가 - 기억의 변주 [07. 08. 22].
eunki님( http://eunki.kr/ )께서 방명록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죽음이 살다간 자리'는 권택영의 글이 아니라, 정효구가 작가세계에 발표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혹시 같은 제목의 다른 글인가요?" - eunki님
죽음이 살다간 자리'는 권택영씨께서 외국문학에 발표하신 시평으로 기억합니다. 정효구씨께서 쓰신 글은 다른 글이 아닌가 싶네요. 당시 외국문학을 구입해서 읽었던 기억이라서요. '다른' 글이라고 추정합니다. ^ ^;
그런데 기억은 흔히 거짓말을 잘 하니, 저도 다시 한번 찾아보고 다시 대답드릴게요. : )
* 추가.
나름으로 찾아봤는데, 찾기가 쉽지 않네요.
외국문학 사이트가 따로 존재하지도 않은 것 같고, 외국문학(당시 기억에 의존하면 동서문화사에서 출판했던 것 같은데요)은 이제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관련 정보를 찾아보니 98년 경제침체(IMF여파)로 '휴간'되었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그 이후의 기록은 찾기가 어렵네요. 당시 외국문학이 제 본가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혹여라도 본가에서 그 책을 찾게되면 다시 좀더 확실한 대답을 드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정효구씨께서 쓰신 글 역시 기형도에 관한 '시평'이었나요? 작가세계는 저도 출간 초반에는 꽤 재밌게 읽었던 잡지였는데, 언제쯤 실린 글인지도 대략적으로 기억하고 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
* 다시 추가 ^ ^
[작가세계]와 정효구라는 이름을 다시 떠올리니 제 기억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세계]가 막 출간될 무렵에 수록된 정효구씨의 시평일수도 있겠다는 기억이 떠올라서요. 정효구씨께서 기고한 [작가세계]는 이문열 특집(1호), 김지하 특집(2호) 중 하나인가요? 작가세계는 초기 몇년 동안은 꾸준히 모아두어서 나중에라도 본가에서 확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eueki님 덕분에 제 잘못된 기억의 변주를 바로잡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세심한 지적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점점 더 eunki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정확한 것 같고, 제 기억이 잘못된 변주라는 생각이 듭니다. ^ ^;
어서 확인해보고 싶네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