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대를 말한다

2007/04/29 22:46

#. 제가 존경하는 한 블로거께서 한화 김승연 사건에 대해 '다시 박정희 시대로 돌아간 것 같다'는 절망감을 개인적으로 토로하십니다. 현재의 진행경과를 보니... 그 절망감에서 쉽게 빠져나오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불난데 기름 붇고", 거기에 "가스통 던진" 형국이네요.

박정희 시대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많은 줄로 압니다. 저 역시 그러합니다. 다만 아주 조금은 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바가 있습니다. 이
글이 그 '박정희 시대'를 이해하는 작은 참조가 된다면 좋겠습니다. 물론 이 글은 제 주관적인 단상에 불과합니다. 이 글은 2001년, 혹은 2002년에 쓰여진 글인데요, 중간에 두 번 정도 추고한 글이고, 한겨레블로그에 일년 남짓 보관했던 글입니다. 이 글은 메타에 발행되었던 적 없던 글이라서 이미 공개된 글이지만 발행할까 합니다. 한겨레블로그에서 글을 굳이 옮겨오는 사유는  한겨레 블로그의 공식적인 정책에 대해 이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정희 시대를 말한다.

 

Ⅰ. 서  

우리는 구체적인 '사회/문화/역사' 속에서 산다. '사회/문화/역사' 속에서 산다는 말은, 그 의미는 '지금/여기'에 함축된, 스며들어 있는 '그때/거기'의 관성과 토양 속에서 산다는 의미이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사회/문화/역사 속에서 산다고 말할 때 그 '우리'는 인류 전체, 인간 전체를 가리키는 보편적인 표현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적 공동체'를 가리키며, 그것은 그래서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인 한반도의 남쪽에 사는 '우리'를 지칭한다. 우리는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중화문명의 변두리에서 생겨나, 반만년 시간의 고속도로를 통과하여, 지금,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체제 혹은 사회 또는 문화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지금'의 구조 혹은 그 토양을 이야기하기 위한 한 방법은 통치구조 형태를 살펴보는 일이다. 우리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통치구조의 주축으로 하는 정치제도를 갖고 있다. 그래서 대통령은 우리 삶의 조건이 되는 제도다. 그것은 우리 삶의 토양을 구성하는 강력한 요소들 중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나간 시대를 통칭하는 표현으로 대통령의 이름을 수사로 하여 이승만 시대, 박정희 시대, 전두환 시대 등등으로 지나간 시대를 함축한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는 고유명사에 불과했을 그 이름들은 보통명사가 된다.

'보통명사化'된 대통령의 이름들 중에서 가장 강력했던, 지금도 여전히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름을 하나만 뽑아야 한다면 그 이름은 박정희가 될 것이다. '박정희'라는 이름은 해방 이후 현대사에 있어, 그리고 지금도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단지 과거 한 시대를 지칭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의 '이데올로기' 형태를 띠며 아직도 '지금/여기'에 부딪히고 있다. 그것은 관성으로서의 '과거'가 아니라, 그 관성이 시스템을 구축하여, 지금 여전히 우리에게 스며들어 있는 강력한 담론구조의 핵심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지금은 일단락된 송두율 교수 문제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 시대의 정체를 밝혀야 할 때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화두다. 송두율 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은 유보하더라도, 최소한 이것만은 말할 수 있다. 독일이라는 분단국에서 성장하고 학문적인 성취를 이루어오던 한 진보적인 지식인이 독일의 통일 이후에도 여전히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자신의 모국에 큰 맘 먹고 돌아온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는 '건국 이래 최대 간첩'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수감된다. 역사의 가정만큼 어리석고, 무용한 일은 없겠지만 '박정희 시대'가 없었다면, 송두율이라는 '경계인'이 있을 수 없었을 것이며, '김일성'이라는 또 다른 보통명사도 그 존립이 그다지 용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박정희 시대는 60년대 초반에서 70년대 말까지의 한국사회와 북한 사회를 규정하면서, 아직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며, '살아 있다'.

이 글은 그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다. 어떤 한 시대를 분석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살펴봐야 하는 꼭지점 세 개, 즉 정치, 경제, 문화 측면에서 박정희 시대를 고찰하고자 한다. 1) 정치이데올로기로서의 '반공' 2) 개발독재 신화 3) 문화 ( 달리 말하자면 사회구성원의 내면적인 의식의 풍경) 영역에서 박정희와 그 시대를 살펴보도록 한다. 그 작업이 지금/여기의 우리를 돌아보며, 내가 나아가야 할 지향의 지침을 마련하는 작은 연습이 될 수 있다면, 이 글이 감상적인 에세이에 그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의미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Ⅱ. 정치이데올로기 ; 반공
반공이라는 한국전쟁 이후 남한을 규정하는 최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국민들 대다수 의식에 내면화된 시대는 박정희 시대였다. 그것은 남한이 취한 생존 전략이었으며,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박정희 정권이 취한 생존 전략이었으며, 그럼으로써 김일성 주의의 한 대척점이 된다. 박정희 시대의 '반공'과 김일성 시대의 '주체사상'은 그 본질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그것은 서로에게 타자였다. 그리고 그 정치적 지배 이데올로기는 서로를 극단적으로 타자화하면서,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의 정당성을 구축하면서 공생한다. 그 둘은 서로에게 반대말이 아니라, 마치 서로에서 있어 동전의 뒷면과도 같다.

비유하자면, 반지를 구성하는 것이 구멍과 동그라미라면 그래서 동그라미만 있어도, 혹은 구멍만 있어도 완전한 반지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양자는 서로에게 동그라미와 구멍이 된다. 그 동그라미라는 울타리 안으로 자기 진영을 결속시키고, 구멍에 무한한 공포와 증오를 쏟아 붇는다. 그 구멍은 무한하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양자는 극히 이례적인 '장기 집권'에 성공하게 된다.

우선 타자에 대한 간략한 의미규정이 있어야겠다. 타자는 국어사전을 찾아볼 것도 없이 쉽게, 우리의 일상적인 의미회로 속에서 말하자면, ‘남‘이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서구 철학은 그렇게 우리를 학습하고 있으며, 그 서구 개인주의적 전통과 주체철학은 우리들 자신에게도 어느 정도 ‘강제적‘으로 내면화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범위와 테두리와 영역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개별적인 개인을 기준으로 하자면 위의 의미규정이 맞지만, 범위를 확대하면 ‘나-우리‘와 ‘그-그들‘이 대립항으로 존재할 때 우리 속에 있는 ['나'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남이 아니다.

나는 홀로 스스로를 규정할 수 없다. 나는 남자이며, 대한민국에 살고 있으며, 특히 수도 서울에 살고 있으며…라고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관계‘의 그물망에 내가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그 관계의 그물망에 포획되지 않고선 나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내가 나를 ‘세우기‘위해선 타자들과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필요로 한다. 내가 나 홀로 [나]일수는 없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최초 논점으로 돌아가 보자. 남한의 존립근거는 북한이다(혹은 이었다). 남한 권력은 스스로의 이름과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 타자로서 북한을 설정했다. 북한 역시 남한에 대하여 그러했다. 남한은 북한을 타자로 설정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서 주체를 확립할 수 있었다. 주지하는 것처럼 남한 군사독재정부는 북한을 철저하게 타자화시킴으로써 자신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아니 그 순서를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북한을 철저하게 타자화시켰다. 그것이 극명하게 노출된 것은, 극도로 심화되어 정점에 오른 시기는 박정희 시대일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유신체제가 가능했던 근거 중 하나가, 그 ‘야만‘이 존립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북한 유일지도체제라는 것도 사실이다. 유신과 유일지도체제는 서로를 극단적으로 타자화시킴으로써 스스로 정당성을 획득했다.

박정희 시대는, 그 시대 남한은 북한이라는 ‘괴물‘로부터 스스로 도피하고,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써, 그리고 그 ‘괴물‘을 더욱 흉칙하게 만듦으로써 자기 스스로는 빛나고,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으며, 그 자기 모멸이 심화될수록 북한에 대한 타자화는 가속되었다. 그런 야만의 시대가 가능했던 것은 ‘혼자서 말하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타자-북한이 ‘지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주체-남한이 혼자서 말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북한의 입장에서 타자-남한이 지옥이 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주체-북한이 혼자서 말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인과를 엄밀히 따지면, 주체-남한이 스스로를 위해서만 말했기 때문에 북한은 타자가 된 것이며, 북한 역시 남한에 대해 그러했다.


Ⅲ 경제 ; 개발독재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새마을 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신화를 이야기한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6,70년대 눈부신 경제 성장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낭만적인 향수를 자극하는 가장 커다란 유혹이다. 그래서 정치적인 측면에서 폭압 정치와 공작정치, 더 나아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반민주적인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집권을 꾀했다는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점만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면제부로 작용하곤 한다.

규모 면에서 박정희 시대의 경제개발 성과는 '파이'를 키웠다. 그래서 그 '파이의 분배'이전에 그 규모 측면에서만 말하자면 박정희 시대는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렇지만 파이가 커질수록 배가 불렀던 사람들은 정말 극소수 자본가들뿐이었다. 세계적으로도 그 고유한 의미로서는 하나뿐이라는 '재벌'이 생겨나서 심화된 것도,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을 무자비한 방식으로 탄압하고, 전태일이 그렇게 자기 몸을 산화하며 죽어간 것도 박정희 시대였다.


박정희 시대 경제개발 성공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공은 박정희라는 개인에게 돌아가야 하는가? 반문하고 싶다.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에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환경 속에서도 묵묵히 자기 몫을 찾을 생각도 해보지 못하고, 그렇게 자기 노동을 착취당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들이 실은 [한강의 기적]의 주역이다. 기적은 그런데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감동적인 모습으로 그들 삶으로 스며들지 못했고, 자신이 받아야 하는 정당한 파이를 주장하기라도 하는 날에는 당장 회사에서 쫓겨나거나,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가 고문당해야 했다. 반면에 해외 차관을 싼 값으로 기업에 빌려주고, 그 돈으로 부동산 투기에 열을 올려 성장 기반을 확보하는 파렴치한 행위를 했던 기업들은 지금은 거대 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이것이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의 본질이다. 그래서 그 야만적인 경제구조의 편파적 분배는 아직까지도 우리의 지금/여기에 작용하고 있다. 재벌개혁을 외치고, 평등한 분배을 주장하는 시민사회가 그 작은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87년 6월까지 기다려야 했으며, 그 87년 위대한 여름을 지나고서도 아직까지 분배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없다.


Ⅳ 문화 ; 자기 검열
의식이 자기 스스로를 주인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 노예가 되는 가장 치욕적인 방식은 스스로를 ‘타인’의 시선으로 감시하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흔히 '검열하는 자'의 시선을 자기 내면에서 심어서 자기 자신이 검열자가 되어 스스로를 사지절단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내면을 파괴하고, 황폐화하며, 그는 정당한 주체가 되지 못한다. 그는 조정 당하는 자이며, 누군가로부터 감시 받는 자이며, 국가라는 거대한 감옥에 수감된 자이다.

그 감시 기제들, 방법들은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제도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회 안의 개인에게 작용한다. 박정희 시대에 억압장치들은 가장 왕성하게 노골적인 형태를 갖고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조정했으며, 끊임없는 순응화를 시도했다. 甲은 밤 12시가 지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와야 한다. 아니면 구치소 신세다. 밥 딜런과 비틀즈 팬인 乙은 머리를 기를 수 없다. 당장 순경이 '바리깡'을 들고서 乙 앞머리를 밀어 버린다. 甲, 乙, 丙, 丁은 길을 걷다가도 5시가 되면 얼어붙어 국기 하양식을 지켜보며 왼쪽 가슴에 손을 갖다 대아야만 한다. '박정희'라는 이름은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이름이다. 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는 최소한 '대통령'이라거나 '각하'라는 명칭을 그 뒤에 존경의 형식으로 붙여 써야 한다. 아니었다가는 '국가원수 모독'혐의에 걸리는 수가 있다.


긴급조치 시대, 지성의 요람이라는 대학은 휴교로 빈터가 되고, 시위를 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인혁당 사건이라는 세계 사법사상 더없이 치욕스런 사건을 조작해내서 그 최종판결 다음날 죄 없는 목숨을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지게 하는 시대. 그런 시대에 양심에 따라 자신의 사고를 비판적으로 무장하고 자기 신념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일이다. 그러니 어떻게 신념의 자유, 양심의 자유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박정희 시대는 개인의 양심이 국가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무참하게 압살 당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순응적인 인간, 새마을 운동정신으로 근면성실하게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그저 아무런 비판정신 없이 살아가면 그는 '모범시민'이 된다.


예술은 세종문화회관의 거대한 장식들 속에 갇히고, 일상의 차원에서 샘솟는, 말 그대로 [삶을 위한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무수히 많은 국민들은 몇몇 엘리트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자기 것으로 착각하며, 그 성취에 존경만을 보낼 자격만을 갖게 될 뿐이다. 스스로 무엇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 위해선, 그것이 국가에 '흠'이 되지는 않는지, 박정희 각하에게 노여움을 사지 않는 것인지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그러한 자기 검열을 의식하지 못하고, 스스로 검열하고 있다는 사실마저도 망각할 때, 그 자기 검열을 자기 내부에 이식하고, 스스로 완전히 내면화하여 그 검열이 습관처럼 작용해야만 '평온'을 얻는 시대. 박정희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가장 커다란 흉터는 자기 검열의 내면화다. 자기 검열과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극단적 소외의 집단화는 우리가 그 적극적인 거부로써 87년 6월의 시청 앞 광장 체험을 획득하기 까지 우리 사회 전체를 보이지 않는 감옥으로 만들어 놓았다.


Ⅴ 결: 우리의 매트릭스, 우리의 시온 

부버는 두 개의 근원어를 말한다. ‘나-너‘라는 근원어와 ‘나-그것‘이라는 근원어다. ‘나-그것‘의 관계에서는 오직 메마른 지식과 지배/복종과 욕망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진정한 관계가 아니며, 가상인 관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 남는 것은 자기 내부의 소외다. 나는 스스로에게 멀어지며, 나는 결국은 내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타인은 지옥
일 수 있지만, 그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 진정한 관계를 가진다면, ‘나-너‘라는 근원어의 관계를 만들 수 있다면, 이미 그 때 그 타인은 ‘너‘가 된다. 그 ‘너‘는 이미 ‘나‘이다. 그것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혼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또 다른 나와 분열적인 ‘복화술‘로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로서, 주체로서, 나와 너로서 대화하는 것.


정치로서는 민주주의를, 경제로서는 사회주의적 자본주의를, 문화로서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유주의를 지향하여야 하는 것이 우리의 '시대적 선택'이라면, 박정희 시대는 그러한 시대를 만들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적지 않는 과제를 남긴다. 그것은 부정되어야 하며, 청산되어야 하는 유산이자 부채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자랑스럽게 보전해야 하는 유산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성원들이 아직도 많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우리는 '아니다'라고 말해야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중해야 한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것은 박정희라는 그 개인이 아니다. 우리가 부정해야 하는 것은 박정희라는 인물로 상징되는 그 시대, 쉽게 말해서 [박정희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는 것은 박정희라는 그 개인의 치적이나 과오가 아니라, 그 박정희라는 시대, 박정희라는 '시스템'의 관성이 아직도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사회 여기저기를 비판적으로 점검하고, 거기에서 박정희의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는 일이다.


우리는 박정희 시대가 남긴 아픈 흉터들을 통해 그 흉터가 보이 싫다고 외면하거나, 무조건 비판하는 극단론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박정희를 부정하면서, 그 박정희 시스템을 흉내내고, 다시금 확대 재생산하는 어리석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하는 것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속성과 그 안에 숨겨져 있는 반동성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지양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의 반대자들을 포용하되, 그들과 적극적으로 토론하고, 서로 대화함으로써 가능한 일이다. 그럴 때 박정희 자체를 옹호하든 비판하든, 우리는 [박정희 시스템]이라는 '매트릭스'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우리의 '시온'이 어디이며, 어떤 모습일지는 '지금/여기',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치열한 노력들, 존중과 관용과 대화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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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516 쿠데타 특집 I: 노무현,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

    Tracked from 새틀 New Frame 2007/05/17 19:02 del.

    근대화는 중화학공업화가 아니다.오늘은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날이다. 지 딴에는 그것을 "혁명"이라 불렀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라 말한다. 지랄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다. 근대화는 주로 산업화, 도시화 등과 함께 이루어지는 어떤 사회변화이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그 자체가 근대화인 것은 아니다. 아파트를 세우고 고속도로를 놓고 대규모 중화학공업 단지를 조성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로 근대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는 조국 공..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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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ainydoll 2007/04/29 23:58

    '매트릭스'라는 저 비유가 참 마음에 드네요. 더군다나 그 '박정희 시스템'이라는 것이 막연히 막아버리고 깨트려버리고 불질러버려 없애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연구해서 밝히고 공유하며 지금과 융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모종의 동질감도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만 지금의 현실에서는 '시온'을 표방한 공간에 모인 사람들과 '매트릭스'에 지배된 사람들이 모인 집단과의 이면적인 대립만 부각되고, 자꾸 그것만 이슈화되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

    네오와 트리니티가 필요하달까요...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7/04/30 01:18

      레이니돌님께서 네오하고,
      가을님께서 트리니티 하시면 좋겠네요. : )

    • rainydoll 2007/04/30 01:21

      선글라스와 예의 그 멋들어진 휴대폰만 지급해주신다면, 모피어스로 모시며 열심히 뛰어보겠습니다. :)

    • 민노씨 2007/04/30 01:23

      선글라스라면.. 어떻게 동대문에서 구해보겠는데.. ^ ^;;
      핸드폰 때문에... ㅜ.ㅠ;;
      다음 기회에.. :P

  2. 미고자라드 2007/04/30 01:1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7/04/30 01:19

      고맙습니다. : )

  3. 비밀방문자 2008/02/14 02:27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8/02/14 07:59

      ㅎㅎ
      긍정적인 답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늘만 해도 고대에서 120명으로 택도없다.. 인가거부 움직임이 있다는 보도를 접했는데요.
      재밌게 대화를 나눠봤으면 좋겠네요.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 )

  4. serhee0311 2012/06/29 03:04

    전태열같은 노동투신자들은 어느정권이나 있었는데..노무현정권에서도..하물며 이제막 산업화하는과정에서 열악한 노동환경은 당연한과정아닌가?이글쓴사람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편협하단생각. 그나마 우리나라 지도자로서는 세계에서 젤알아주는 자랑인 박정희대통령을 지금의우린 과대평가가아닌 지나친폄하와 비판에 집착하는거같다.

    perm. |  mod/del. |  reply.
  5. 지나가다 2012/07/27 08:33

    역사 공부는 안 하고 피상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머릿속에서 개념과 수사학으로 정리하는 글이군요. 민노씨가 역사에 접근하는 방식이 그러한 것입니까? 팩트는 어디갔어요?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12/07/28 00:07

      이것은 질문이 아니다. ㅎㅎㅎ
      앞으로 제대로 된 질문을 주시면 저도 한번 고민해보겠습니다만, 이런 질문을 빙자한 모호한 훈계질은 삼가시길 바랍니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인터넷에서도 예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으신지요. 저라면 참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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