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승덕, 한국 교육 실패의 전형 (소요유)
* 블로거들의 이명박, 고승덕 비난은 틀렸다! (여름하늘)


1. 소요유님의 글은 틀리거나 맞거나 할 수 있는 글이 아니다. 그건 자신의 사상, 그러니 역사의식과 세계관을 담아 어떤 정치 행위, 정치 현상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피력한 글이지, 수학문제처럼 검증가능한 명제가 아니다. 그러니 그 글의 설득력이나 진정성에 대한 판단은 오로지 독자의 몫이다.

물론 주장에는 그 주장과 비례하는 근거의 무게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소요유님의 글은 한국교육이 잘못이라는 주장(을 위한 글)이 아니고, 고승덕 변호사가 어떤 논리필연적인 과오를 범했다는 글이 아니다. 그 글은 고승덕이 행한 정치행위에 대한 역사적 관점에서 행한 판단이고, 소요유님의 입장일 뿐이다. 그 입장은 그 자체로 자신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담은 것일 뿐이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논증 게임이 아니라 설득력 게임이다.
메시지를 주는 것일 뿐.


2. "인터넷의 폐습에 젖어 생산적이지도 못한 논쟁을 유발시키는 악플 수준의 인신공격"(여름하늘)

이렇게 과격하게 말씀하시는 여름하늘님의 취지는, 글 전체를 읽어보면 어느 정도 이해되는 바 없지 않으나, 이런 다소 감정적이고, 과격한 수사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 수사는 '네거티브'를 지양하자는 글 전체의 취지를 배반하고 있다고 느낀다.


3. 고승덕은 기득권이고, 기득권이 이명박을 지지하는 것을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는가? 그의 자유의사일 뿐이다, 라고 여름하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논리로 고승덕이라는 공인의 이명박 캠프 참여에 대한 '정치적 입장 표명'은 소요유님의 자유의사다. 이것을 잘못이라거나, 혹은 틀렸다(이건 앞서도 말했듯 '틀렸다/맞다'가 왈가왈부될 수 없는 문제라고 나는 판단하는데)고 말할 수 없다.


4. 한국교육을 억지로 끼워맞춰서 이명박과 고승덕을 인신공격하고 있다고 여름하늘님께서는 지적하신다. 이렇게 발언하는 소요유님은 이를 정치적 논평의 수사로서, 자신의 입장을 좀더 뚜렷하게 세우기 위해 사용한 것이지 반대 예시들에 의해 이 관점과 세계관이 '교정'되거나, 혹은 이 명제가 '반증'되거나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아닐테다). 이것은 거듭 이야기하지만, 반증이되거나 혹은 논증이 되는 명제가 아니라, 설득의 수사에 속한 영역이다.


5. 물론 나는 전체적으로 여름하늘님의 지적들 중에 새겨들어야 할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고, 특히나 대안을 고민하는 비판, 그리고 흔히 매니페스토(공약검증운동)로 이야기되는 선택을 위한 자료 축적과 그 자료에 대한 토론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블로깅이라는 것은 그저 자신의 진실로 이야기하고, 그저 발언하는 것 자체에 그 본질적인 에너지가, 잠재력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나는 평가한다.
"나의 기록이 당신을 위한 '콘텐츠'가 될 필요는 '전혀' 없다."(가짜집시)


6. 나는 여름하늘님의 글에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지만, 여름하늘님의 글을 높게 평가한다. 블로그는 누군가를 위한 콘텐츠(정보나 자료)가 될 필요도 없고, 발언하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비판대상의 예외가 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공표된다는 그 자체로 블로그는 공적인 성격을 띤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이웃집 순이에게 쓰는 연애편지라고 하더라도 그렇다. 그 문건을 연애편지가 아닌 정치적인 선언으로, 사회비평으로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해석'을 통해 여전히 존재하게 된다.

그러니 공표된 텍스트로서의 블로그는 그저 애정어린 관심의 가장 고양된 표현인 '비판'을 만나 더욱 더 가치있는 어떤 것, 서로 대화의 재료로 삼을 수 있는, 그리하여 공유할 수 있는 어떤 것이 된다. 이 점에서 여름하늘님의 글 중간 이후의 지적들은 음미해야 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7. 여름하늘님께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블로그 상호간 비판은 좀더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어떤 정치적 입장에 대해 "틀렸다!" 혹은 "옳다!"라고 선언하는 차원이 아니라, 좀더 세련되게 자신의 입장을 설득하고,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차원이라면 좋겠다. 이것은 여름하늘님께서 자신의 글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전언이기도 하다(고 나는 읽었다). 발언 강도가 너무 쎈 것 같다. : )



기형도, 2007년 겨울, 여전히 홀린 사람들

2007/11/22 17:44
부제 : 기형도, 홀린 사람, 그리고 정치적 상상력

0. 나는 언젠가 기형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모두는 삶과 세계의 고립에 대해, 자신을 둘러싼 그 차가운 피처럼 소름끼치는 세계, 한강 위에는 여전히 평화롭게 유람선 떠 있는 그 대한민국을 둘러싼 그 온갖 거지발싸개 같은 것들의 위선에 대해 진심을 다해 분노했고, 치열하게 증오했다. 때론 이성의 차가운 응시를 통해, 때론 감성에 홀린 듯 취하여 그 모든 것들을 살로 비비듯.. 그들은 세계를 분석했고, 그렇게 노래했다.  (... 중략...) 그의 시는 그 당대에 있어 가장 혁명적인 상상력으로 쓰여진 미학적, 정치적 성취들 중 하나일 것이다.  
- 기형도와 나 중에서
기형도의 시는 미학적인 성취 뿐만 아니라, 지금 다시 돌이켜 생각해도 정치적인 상상력의 성취라고 할만하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최근에 다시 읽은 기형도의 시, '홀린 사람'때문이다.


1. 즐겨찾는 블로그 중에 써머즈님께서 운영하시는 '어쿠스틱 마인드'가 있다. 거기에서 오래된 포스트 하나를 읽었다. 거기에는 기형도의 시, [홀린 사람]이 원문만으로 포스팅되어 있었다. 시를 옮긴 써머즈님의 심중이야 알 길 없다. 다만 그 오래된 시, 그리고 오래된 포스트를 읽는 내 마음은, 이내 우리를 둘러싼 구역질나는 정치적 풍경들로 채워졌다. 그건 정말 섬뜩하면서, 또 씁쓸한 체험이었다.

홀린 사람

                                        - 기형도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 분의 슬픔이었고
이 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 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 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 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 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 때 누군가 그 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 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 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 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은 실신했다.
그 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2. 정치적 맹목의 풍경들은 여전히 기형도가 살았던 80년대 뿐만 아니라 20여 년이 지난 21세기 대한민국의 풍경이기도 하다. 군중들은 숭배할 권리만을 부여받고 있고, 선거법은 국민들의 입을 틀어막고 있으며, 우리들은 어느새 스스로를 검열하는 감옥으로 들어가 자발적인 수인(囚人)이 된다. 온갖 비리와 온갖 부정부패가 와도, 묻지마 지지는 이어지고, 여전히 높으신 저 위에 계신 어르신들은 '구국의 결단'을 토해내며, 대한민국을 위해선 자신이 가장 필요하다고 외친다. 기형도의 시 '홀린 사람'은 아주 오래 오래 살아남아, 여전히 21세기 대한민국의 말라비트러진 정치의 풍경, 권력의 풍경을 노래하고 있다. 그 시가 이제는 회고적인 교훈으로만, 현실과는 상관없는 잠언으로만 노래되기를 나는 바란다.




0.
가장 신뢰하는 매체인 '프레시안'마저도 '미수다' 관련 기사를 연합뉴스에서 업어온다. 그리고 개인적으론 한국 최고의 칼럼니스트라고 생각하는 고종석씨도 예전에 매우 호의적으로 '미수다'에 대해 한 말씀 날렸다.

포털 하청업체인 연예 찌라시 업체들은 두 말하면 입아프고, 블로거들 역시 [미수다]에 대한 관심은 (당연히) 매우 높다. 현재 미수다의 핵심 키워드는 '자밀라'와 '윈터'인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미수다 사건' 한국인이 부끄럽다]는 글을 '다음 블로거뉴스'에서 전략적으로 밀어주기도 했다. (현재 스코어 24만의 21만의 조회수를 기록중이다. : )
가볍게 첨언하자면 나는 이 글의 취지에 대체로 공감한다. 물론 '우리나라 네티즌 부끄럽다'류의 과장된 수사에 대해서는 다소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자밀라와 윈터 사건(?), 그리고 이에 대한 도미니크의 발언으로 말이 많지만,
아무튼 '미수다' 전성시대라고 할만하다.


1.
'미수다'를 나는 꾸준히 시청하지도 않았고, 솔직히 거의 시청하지 않는 편이고(-_-;), 그렇다고 '미수다'를 앞으로 시청하게 될 것 같지도 않다.

개인적으로 '미수다'는 보기에 즐거운(이쁜 ㅡㅡ;) 외국 여성들 업어다가 꽃단장 시켜놓고, 이런 저런 농담 따먹기에 열중하는 오락 프로그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이건 비난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는 거다.

그러니까 '미수다'는 기본적으로 한국에 거주하는 (주로 백인) 쭉빵녀에 대한 남성들의 이국취향과 관음증에 기반하고 있는 오락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한다.

거듭 말하지만 이게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가 무슨 도덕적인 엄숙주의자라거나, 혹은 모든 TV 프로그램들이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 전혀 없다. 오히려 위장된 형태로 시청자들 훈계하는 유사 휴머니즘, 유사 도덕론의 가면을 쓴 막장 저질 프로그램(이를테면 TVN의 '독고영재의 스캔들'이랄까.. )을 저주하는 편이다.

그렇다.
나는 포르노(합법화)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2.
고종석의 솔직한 고백처럼 (다수의 남성 시청자들이) "이 프로를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은 새뜻한 외국 여성들을 한꺼번에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텔레비전의 이런저런 오락 프로그램에 비치는 한국인 여성들 역시 거의 다 미인"인 판국에 "출연자들이 죄다 미인이라는 것 역시 끄집어내 지적할 악덕이랄 순 없다."고 나 역시 생각한다.

'미수다'는 매우 훌륭한 외모를 소유(!)한 이국처녀들이 "우리말로"(고종석은 특히 이걸 강조하더라) 한국 풍속, 그리고 한국에서 살아가면서 느낀 이모저모수에 대해 수다 떠는 오락프로그램이다. 이것이 "한국인 시청자들이 전혀 몰랐던 걸 이 외국인 여성들이 가르쳐 주는 것 같진 않다. (...중략...) 대개는 한국인이 잘 알면서도 평소에 의식하지 않고 있는 것을 새삼 일깨워 주거나, 외국에 대해 올바르게 짐작하고 있었던 것을 확인해 주는 정도다"(고종석). 공감한다.

"인형들의 전시장"(고종석)에 머물지 않는 프로그램으로 거듭나기를 바란다는 고종석의 지적들은 직접 음미하기 바란다. 모두가 (개인적으론 너무 호의적이고, 온건해서 좀 그렇지만) 타당한 지적이라고 생각한다.


3.
그런데, 그렇다면!
나는 왜 굳이 '미수다'에 대해 끄적거리는건가. ㅡㅡ;;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단순하다.

내가 느끼는 '미수다' 현상의 흥미로운 지점은 미녀 외국인이 한국말로 떠드는 이야기들에 대한 민족주의적인 성향 매우 강한 시청자들의 반응이다. 이걸 계량화해서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이를테면 위 이은호님께서 지적한 "부끄럽다"류의 반응은 '미수다'에서 이야기된 한국적인 어떤 문화, 제도적인 모순에 대한 지적에 대한 일반적인 시청자들의 반응과 큰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부끄럽다는 거다.
쪽팔리다는 거.


4.
제목이 좀 거창한데, 오리엔탈리즘이란게 별게 아니고, 서양이 동양(오리엔탈)에 대해 덧 씌어놓은 일종의 위장된 체계, 서양의 정체성을 보전하고, 이를 강화하기 위해 동양을 절대적인 타자로 설정한 담론들의 체계라고 이해하면 쉽다. 좀더 쉽게 말하자면, 서양이 표상하는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가짜 진실을 공고하게 세우기 위해 동양은 주술과 신비로움으로 가득한 비합리성이 지배하는 세계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아리따운 외국미녀들이 우리나라 사회의 모순들, 이런저런 못마땅한 풍속들을 이야기한다. 그건 이미 있어왔던 사회적 모순이고, 병폐들이다. 가령 윈터의 '성폭행' 이야기는 그 가장 상징적인 예시일테다. 이것이 고쳐질 필요 없다는 것이 전혀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는 태도가 무작정 "우리나라 부끄럽다"일 필요는 없다는 거다. 더욱 우려하는 건 이런 즉각적이고, 감정적인 반응들이 절대선인 것처럼 다른 고민들을 지워버린다는 거다. 가령 성범죄자의 인권문제는 논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강간대국'이라는 (그 출처 알 수 없는) 피상적 이미지들이 강화된다.

어떤 자극적인 이슈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들은 그 이슈가 제기하는 어떤 제도와 풍속의 모순과 비합리성에 대한 의미있는 시사점을 주기는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개선되고, 고쳐지는데에는 그다지 유용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쉽게 말해서 그냥 한번 뜨거워지다가 마는 수가 많다. 그리고 '성범죄 때려잡자'류의 선동은, 그 자체로 성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이성적인 고민, 국가공권력의 행사범위에 대한 반성적 사유와 논의를 묵사발내는 효과를 갖는다(이에 대해선 따로 글을 쓰고 싶다... ).  

제도와 풍속의 어떤 지점이 정말 문제인지에 대해 좀더 이성적으로, 좀더 냉정하게 접근하는 태도가 아쉬워서 하는 말이다.

외국의 미녀들이 성폭행 당했다.
신고했는데 창녀라고 거절당했다.
우리나라 부끄럽다.

이런 선정적인 단편들을 엮어서 얻어질 수 있는 건 극단적인 감정적인 폭주와 민족주의적이며 감상적인 감정의 과잉(우리나라 부끄럽다 류의), 혹은 전도된 변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일 뿐이다.

어떤 한 개의 사례가 모두를 대변할 수는 없고, 미수다 출연진의 한 명이 그 사건을 겪었다고 하더라도, 그게 외국인 전체에 대한 한국사회의 태도로 치환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나라만큼 '백인'(!) 외국인들에게 호의적인 나라가 세상에 또 어딨나? 이와 함께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그 잔인한 시선과 태도들은 또 뭔가?

배타적인 민족주의도 문제지만, 서구 문화에 대한, 특히 백인에 대한 지나친 경도와 무비판적인 접근방식도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건 스스로 내면화시킨 오리엔탈리즘의 문화적인 발현이지 않나 싶다.


5.
'미수다'에 건의하고 싶은게 하나 있다.
쭉빵 모델 자밀라로 장사하고 싶은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그런 외국 아가씨 말고도 정말 고생하는 동남아 외국인 아가씨들 훨씬 더 많은 것 같은데... 이런 한국에 거주하는 다수 외국인을 대표할 수 있는 평범한 아가씨도 좀 섭외하길 바란다. 그런 아가씨들 중에서 쭉빵(ㅡㅡ;)한 아가씨들 고르면 되지 않나.
그 3D 업체에서 일하는 쭉빵 외국인 노동자 아가씨들 이야기도 좀 들어보자꾸나.



참조.

1. 여기

형사정책연구원은 지난 12일 ‘주요 국가의 범죄발생추세 비교’라는 제목으로 연구 결과를 홈페이지(www.kic.re.kr)에 공개했다.

(... 중략 ...)

'서울과 부산 등 한국 주요도시의 외국인 상대 성폭행 범죄율이 아주 높은 수준;이라는 캐나다 외교부(www.voyage.gc.ca)와 미 국무부 웹사이트(www.state.gov)의 ‘경고’를 무색케 한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www.prkorea.com)는 “해당 웹사이트에 공식 항의했으나 조사를 통해 검증해야 한다며 지난달 홈페이지에 올린 내용을 그대로 실어놓고 있다. ”고 밝혔다.
* OECD:성폭행사건(인구10만명당)[2003년]

1 오스트레일리아 81.4
2 캐나다 78.1
3 미국 32.1
4 아이슬랜드 26.0
5 뉴질랜드 22.5
6 벨기에 16.6
7 영국 16.2
8 스웨덴 14.7
9 프랑스 14.4
10 스페인 14.3
11 멕시코 13.3
12 한국 13.0
13 노르웨이 12.4
14 핀란드 11.2
15 네델란드 10.4

ㄱ. 성범죄률에 대해선 한 마디 하고 싶은게 있는데, 통계청을 가봐도, 형사정책연구원 사이트를 가봐도, 대검찰청 사이트를 가봐도 이에 대한 정확한 통계치, 신뢰도 높은 통계치를 얻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통계청을 뒤저보니 '성범죄 통계'를 알고 싶다고 문의했던 기록까지 있는데, 그 답변의 링크를 쫓아가봤지만, 뜬금없이 서비스 형식이 바뀌었다는 안내창이 뜬다. ㅡㅡ;; 이런 통계치에 대해 궁금한 국민들은 당연히 국가기관에서 이런 정보를 쉽게 입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니 국가가 '알 권리'의 차원에서 국민들에게 해줘야 하는 당연한 서비스라고 생각하는데... 좀 많이 짜증난다.

ㄴ. 우리나라의 성범죄률이 낮은 이유는 유교적인 문화권인지라 '성범죄'에 대한 신고률이 낮다는 지적이 있는데, 적절한 지적인 것 같다. 다만 그렇더라도 그런 정황만으로 우리나라의 성범죄률이 높다라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ㄷ. 오히려 성범죄 재발을 방지하는 형사정책적 방법론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 논의를 좀더 생산적으로 이끌지 않을까 싶다. 성범죄자의 인권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과 성범죄자의 인권(프라이버시)보다는 정책적 목적(재범 방지)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일련의 움직임(전자팔찌 도입에 관한 움직임이랄지, 유아 성범죄에 대한 범죄자 정보의 확대 공표랄지.. )이 좀더 활발히 토론되어야 하지 않나 싶다.


2.
한국의 성범죄자에 대한 짧은 이야기 / 일지 2007/10/18 23:53
성범죄자의 인권에 대한 짧은 논평을 기록한 글.
http://zizec.tistory.com/trackback/1

3. 여기
경찰청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2005년) 성범죄는 1만 3446건으로 2004년의 1만 4089건보다 줄었지만, 7~12세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는 2003년에 492건이던 것이 2005년 584건으로 증가하고 있고, 거기에는 남자아이의 성폭력도 늘고 있어 부모의 공백이 직간접적으로 끼치는 영향이 상당히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4. 관음증적 '미녀들의수다'와 경박한 미디어 [뉴시스 2007.11.17 12:19:19]
그나마 추천할 만한 기사.



* 이 글은 예외적으로 제 영화블로그인 키노21에 동시등록합니다.
물론 메타사이트에는 중복발행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지인과의 전화통화를 통해서 왜 삼성비자금 사건라고 부르는가, 이건희 비자금 사건이라고 불러야지... 이런 취지의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삼성과 이건희는 좌웅동체, 변신합체모드이긴 하지만 이건희 = 삼성은 아니고, 아니어야 하고, 아닐 수 밖에 없어야 하는데, 그런데, 우리사회는 이건희 = 삼성. 이렇게 뇌에 고정시키고 사안을, 현상을 바라보는 것 같다.

이건 마치 영웅사관에서 1mm도 벗어나지 못한 한국정치판의 모습, 이를 바라보는 저널리즘의 관점과도 겹쳐진다. 우리나라에선 어떤 일개인이 그로 대표되는 모든 집단과 시스템을 대변한다.

물론 어떤 일개인은 매우 중요한 상징이고, 또 매우 결정적인 키워드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가 집단내의 모든 역학과 시스템 자체와 등가로 교환되어서는 안된다. 그 역시도 일부이어야 한다. 그러니 일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그 일부를 이야기 해야지, 그 전체를 일부와 맞바꿔서 이야기하는 건 본질을 흐릴 공산이 크다.

특히나 우리나라 저널리즘은 이런 식의 맞바꾸기를 잘한다.
이건희가 조사받으면 삼성 망하는 줄 알고, 대한민국 결단 나는 것처럼 오도방정 난리블루스다.

여형사님 블로그에서 이런 댓글을 만났다.

기업주와 기업을 동일시하는 한국사회의 인식이 문제인데
비리기업주에 대한 조사를 기업에 대한 탄압으로 몰아가서
결국 한국사회는 기업하기 힘들다는 식으로 결론내고
면죄부를 주는 결정이 항상 내려진다는거지
전원책도 말이 보수논객이지 이런 문제를 재벌에 대한 탄압이라고 보는 시각은 여전하거든
그 전에 이재용 불법상속도 그게 이건희 일가 문제지 삼성 문제는 아닌데도 삼성이니까 봐줘야 한다 이런 시각이 엄연히 존재하는데 이것부터 좀 다르게 봐야할 듯 (여기)

- 본능세대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 댓글이 담긴 글
여형사, 전원책 변호사의 해괴한 본질 흐리기



포털단상1 - 컨텐츠 소비의 악순환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현방식을 유지하는 건 이용자 관심의 흐름을 중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중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이렇게 실시간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중략...) 검색어 순위가 주로 가벼운 관심을 중계한다는 지적은 받아 마땅하다. 다각도에서 이용자의 관심을 포착하려는 노력은 아직도 부족하다. 최근 미국의 구글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와 개념이 같은 ‘핫 트렌드’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낯선 검색어들을 잔뜩 쏟아내 일부 언론과 블로거들의 비아냥을 받고 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왠지 반갑다. 사회철학자들에게 고민거리 하나 더 안겨준 ‘공범의식’에서일지도 모른다.
- 홍은택 NHN 이사, 한겨레 [세상읽기] 실시간 검색어 서비스의 이면 중에서

0. 
그 인기키워드가 네티즌들의 다양한 관심을 반영하는 민주주의적인 소통의 기제일까? 홍은택 NHN이사는 "이용자 관심의 흐름을 중계"한다고 항변하면서, "대중의 마음속에 있는 것들을 이렇게 실시간으로 끄집어낼 수 있었던 적은 없었다."고 뿌듯해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미국의 구글이 실시간 검색어 순위와 개념이 같은 ‘핫 트렌드’ 서비스를 시작"했다고 칼럼의 말미에 살짝 물타기를 시도하면서, 이에 대해 "동병상련"을 느낀다고, "반갑다"고 반색한다.

이용자의 관심은 유도되었고, 조종되고 있으며, 방송사 연예프로그램들의 기본적인 생산시스템과 그 콘텐츠의 경향에 종속되어 있을 뿐이다. 이를 "이용자 관심의 흐름을 중계"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단연코 이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는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나 혹은 유명 연예프로그램에서 이야기된 지엽말단의 가십과 소문에 대한 소비를 강요받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1. 중계한다? 
이건 중계가 아니다. 실질적으론 이런 검색어들을 유도하면서, 그런 패턴을 구조화한다. 이게 연예인 신변잡기 구도에서 벗어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고, 그럼에도 이 시스템은 유지될테다. 그러니까 홍은택씨의 "중계"라는 표현은 상당히 기만적인(-_-;) 수사에 불과하다. 구글과의 공범의식이니 '사회철학자의 고민거리'라는 둥의 폼나는 수사는 좀 그렇다. ㅡㅡ;; 뻔히 알면서 왜 이럴까? 이건 가장 손쉽게 돈 벌수 있는 포털 공통 아이템이다.

2. 찌라시 포털 하청언론들과의 공생 
아이들은 TV 연예프로그램을 열심히 시청하고, 포털은 찌라시들로부터 이런 잡다한(가령 무한도전 독후감 같은) 연예관련 기사들을 받고, 실시간 인기 검색어 시스템은 이걸 연결해서 막대한 트래픽과 막대한 시간낭비와 막대한 이윤을 창출한다.

3. 실시간 인기 검색어 시스템은 사라져야 한다.
이걸 포기하라고 포털에 압박을 가할 힘은 나에겐 없다. 그리고 아마도 상당히 돈되는 이런 시스템을 포털이 스스로 없앨리도 만무하다. 다만 이건 정말 사라져야 한다. 이 시스템은 정말 정말 불필요한 관심을 유도하고, 소비케하며, 연예인 뒷담화 탐정놀이에 빠져 허우적대는 다양한 네티즌들을 양산해낸다. 엄청난 사회경제적 낭비도 낭비려니와 이거 정말 청소년들에게는 정말 비교육적인 거다('비교육적'이란 학부모스런 말 나도 굉장히 싫어하지만).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네이버 /  네이트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야후 / 엠파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야후와 다음이 가장 쌈빡(ㅡㅡ;)한 것 같다. 뭐, 방구나 뽕이나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