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언젠가 김수영의 시론에 대한 대답으로 김지하는 '풍자냐, 자살이냐'라는 짧은 시론을 쓴다. 문학(시, 예술로 바꿔도 무방하다)은 사회의 부조리와 정치권력의 거짓에 저항하고, 또 저항할 수 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건, 그게 바로 예술의 숙명이기 때문이다(마르쿠제). 하지만 그 저항은 비극의 방식인 자살로도, 희극의 방식인 풍자로도 표출될 수 있고, 그렇다면 민중적인 저항의 방식은 자살이 아니라, 풍자가 아니겠냐는 뭐, 그런 정도의 시론이라고 기억한다.

사족이지만, 그 연장에서 김지하가 생명사상(살림)에 심취하거나, 공안당국과 바콩과 조선일보가 주도했던 '분신정국'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고 일갈했던(물론 이 때 김지하는 한마디로 소위 진보권으로부터 완전히 껌이 되도록 얻어터졌는데, 왜냐하면 그걸 조선일보에 기고했으니까) 것도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1. 압도적인 기만과 압도적인 거짓과 압도적인 환상이 현실을 내리누르고,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아니 좀더 끔찍하게 표현하면, 오히려 시민들이 '자기 안의 대중심리'를 적극적으로 표출하면서 스스로를 억압해달라고 외치는 작금의 대한민국(물론 그건 최진실 자살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그저 그 자살 사건으로 땡잡은, 이명박 정부와 여권의 하하호호하는 엽기적인 아수라장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인데)은 어떤 식으로든 탈수기의 쥐새끼
(이건 어떤 특정 정치인을 겨냥한 것이 절대 아니다)처럼 쪼그라든 당신들의 영혼에 저항을 요구한다.


2.  블로거 소요유는 '인터넷만이 우리들의 유일한 해방구'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여기에 공감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거대한 조직도 없고, 우리에게는 거대한 방송사도 없고, 우리에게는 거대한 자본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에게는 우리를 이야기할 수 있는 작은, 아주 작디 작은 마이크와 이어폰(블로그나 게시판 따위), 그리고 이들을 이어주는 네트워크 망(웹)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언젠가 이야기했듯 웹은 포털을 만들어냈고, 블로그는 망했다.  : ) 씨바, 그래도 좀 찍소리(이건 어떤 특정 정치인을 겨냥한 것이 절대 아니다)라도 내야 하지 않겠나. 싶은 쪽팔림... 자괴감... 세상사는 무미건조함이 나를 누른다.


3. 강만수라는 대한민국 경제정책을 책임지는 최고 수장이(물론 이명박은 빼고) 이런 선문답을 국감장에서 나눴다고 한다.

야당의원 왈, "국민 80%가 종부세 완화 반대"
강만수 왈, "1%가 내는 걸 왜 80%에 묻나?"                    ...... via 오마이뉴스

나는 강만수의 이런 초절정 유머감각 앞에서 잠시 죽음에 가까운 숨죽임 끝에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우리는 강만수를 배워야 한다.
사이버 모욕죄든 최진실법이든 나경원법이든 그 뭐든 간에 강만수와 같은 초절정 유머감각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아니겠나... 하는 그런 생각을 문득 했다.
그 뻔뻔함과 야만스러울 만큼 앙큼한 센스를 배워서 저항하자.
우리는 강만수를 배워야 한다!



* 관련글
이명박 댓글 놀이와 풍자의 생명력



* 관련 추천글
악플은 스타라는 동전의 뒷면 (이승환) : 이게 왜 관련글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글쎄.. 그건 강만수급에게나 어울리는 너무 어려운 질문이다.



* 발아점
조아신의 미투데이 : 여기 있는 기사 링크 클릭했다가 엉뚱한(?) 강만수 기사로 점프~! 선플운동(?)을 하는데 있어서도 강만수의 유머감각은 많은 시사점을 줄 것 같다. 물론 약간 지나치게 오덕스럽긴 하지만...


* 이 글 제목과 주소
강만수를 배우자 : 강만수의 초절정 유머감각에 나는 그만 숨이 멈추는 듯한 충격을…  http://minoci.net/623


'충청신문 편집국장 강현준'이라고 블로그 서브 타이틀로 자신을 소개한 peter153님께서 쓰신 글을 읽고 정말 참담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글의 요지는 블로그상에서 프로필과 사진을 공개하지 않은 글을 읽으면 역겹다는 건데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일부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블로거님들 peter153이 무례한 제안하나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포스팅하실 때는 프로필하고 사진 공개하고 씁시다.
무슨 지하세계에서 글 씁니까?
무슨 죄라도 지었습니까?
프로필 공개하면 누가 쫓아 옵니까?
솔직히 말해서 그런 분들 역겹습니다.
그것도 매우 역겹습니다.
누가 누군지 유령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필명을 쓰는 것은 좋습니다.
실명 공개 안하는 것도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지 프로필하고 사진 정도는 공개해야 하지 않을까요?
명색이 뉴스인데...

[....]

태그 : 사진,  프로필,  비공개,   소통,   블로거,  신문사,   건방진 peter153, 기명기사

-
http://blog.daum.net/ccdaily/17951865 중에서

이게 정말 저널리즘이나 블로기즘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 없는, 그저 소박한 블로거께서 술한잔 먹고 쓴 글이면 그려려니 하겠습니다. 그런데 지역신문 편집국장이라는 분이 이런 어처구니 없는 글을 쓰시니 정말 이건 용감한 건지 뭔지 알 길이 없네요. 본인이 태그로도 쓰셨지만 이건 건방진 것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냥 어처구니 없습니다.


블로그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블로그에서 무슨 남 이야기 훔쳐서 이야기하나요?
여러분은 블로그에서 지킬박사와 하이드 놀이 하십니까?

블로깅는 본질적으로 자기를 쓰는, 자기를 투사하는 행위입니다.
블로그의 모든 기술적인 얼개와 블로그식 토론과 대화의 메카니즘은 (자연스럽게, 혹은 저절로) 자신을 투영할 수 밖에 없는 속성을 갖습니다.
그래서 (대개) 블로그에는 그 블로그 만의 개성있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The Blog should have a discernible human voice." via gatorlog)  

블로그는,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세상 이야기를 하든, 동네 이야기를 하든,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하든, 하물며 음식 이야기를 하든, 그 블로깅 속에 '자기'가 투영됩니다. 자기 실존이 투사될 수 밖에 없는 메카니즘을 갖습니다.

블로깅을 통해 이야기하는 주제가 무엇이든 크게 관련이 없습니다.
정치 이야기를 하든, 아니면 자신의 소박한 일상을 이야기하든, IT를 이야기하든, 경제를 이야기하든, 영화를 이야기하든 그 '글' 속에, 좀더 포괄해서는 '블로깅'(블로그를 매개로 읽고 쓰는 그 모든 행위들)을 통해 '자신의 온라인 실존'을 구현합니다.

블로깅은 오프라인과는 별개의 환상적인 '자아'를 만드는 역할극이나 판타지극이 아닙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오프라인과 다른 자기를 꿈꿀 수 있고, 좀더 이상적이거나, 혹은 때론 좀더 다른 온라인의 자아를 꿈꿀 수는 있겠습니다. 소극적인 오프라인의 실존이 맘에 들지 않아서 좀 터프한 자신을 꿈꿀수도 있고, 그 반대로도 성립할 수 있을겁니다.

하지만 그런 역할극 역시 매우 치명적인 한계를 갖습니다. 정말 고도의 글쓰기 능력을 갖추지 않은 경우라면, 정말 다양한 분야의 지식과 체험을 갖추지 못한 대부분의 평범한 블로거들이라면, 이런 판타지나 역할극을 꿈꿀 수 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글은 본질적으로 자기(의 소망과 욕구와 결핍이라는 '자기', 그러니 자기 실존)를 반영하는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블로그에 '자기'를 담아내기에도 능력과 시간이 부족합니다.
무슨 천재 사이코라고 블로그를 통한 역할극에 심취할 수 있겠습니까?


정신분열 놀이를 하지 않는 이상은, 매우 특수한 자기 욕구의 배출을 위해 블로깅을 하지 않는 이상은 오프라인 실존과 온라인 실존은 서로 닮아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말이죠. 그것은 하나의 '자아'의 서로 다른 모습일지언정, 그 양자가 무슨 '지킬박사와 하이드'처럼 전혀 별개의 독립적인 인격을 갖거나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프로필을 굳이 타인에게 알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진을 통해서 굳이 타인에게 자신을 보여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프로필에 괜찮은 몇 줄(학력이나 경력)이 있으면 똥같은 블로그가 무슨 황금 블로그로 바뀌는 건가요? 혹은 그 반대가 되는 겁니까? 이건 정말 무슨 어처구니 없는 주장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 그토록 억지를 쓰는 인터넷 실명제를 블로그에서도 구현하자는 주장인겁니까?

자신의 자율적인 선택으로 프로필을 통해 자신을 알리는 행위까지를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흔히 프로필이라고 적는, 무슨 무슨 대학 졸업, 무슨 무슨 기업의 무슨 무슨 직위... 이런 것들이 블로깅의 정체성을 얼마나 알려주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사진은 또 뭡니까? 무슨 미인대회하나요? 사진을 보여주고 말고와 블로깅하는 것과 무슨 관련이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되도 않는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온갖 장식적 프로필로 유치한 속물근성 발현하는 블로그들에 대해서는 오히려 역편견이 생길 지경입니다.
블로거는 그저 블로깅으로 자신을 표현할 뿐입니다.


블로거의 세계관과 철학이 투사된 언어적 감수성이 그 실천(블로깅)의 무게와 부피로 축적됨으로써, 저절로 그 블로그 자체가 그 블로거의 프로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그 블로그를 판단하면 되는 것이지, 오프라인의 프로필이 그 블로그를 평가하는 전제로써 작용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 보입니다(그걸 알린다고 하면 그것까지 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요). 오프라인의 프로필을 알려주고 말고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블로그는 그 블로깅을 통해서 블로그의 개성과 가치를 추구하고, 그렇게 평가받아야 마땅합니다.

제 블로깅이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블로거들과 교류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블로깅하면서 얻은 가장 큰 즐거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블로거들과 교류함에 있어서 그 블로거들의 오프라인 '프로필'이 제 (진지한, 혹은 의미있는) 관심사가 된 일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물론 세속적 호기심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요). 그저 그들의 블로깅이 좋았고, 거기에 관심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래서 대화를 나눴고, 또 인연이 닿아 오프모임도 하고, 뭔가 함께 프로젝트도 기획하고 그랬던 것입니다.

그렇게 교류하게 된 블로거들 가운데는, 평범한 회사원도 있고, 학생도 있고, 취업 준비생도 있고, 교수도 있고, 보따리 장수(시간강사)도 있었습니다. 방송통신대학에 다니는 가정주부도 있고, 의사도 있고, 가난한 화가도 있고, 대리운전기사도 있고, 기자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무슨 직업을 갖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분들도 여럿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고 말고가 그 블로거들을 사귐에 있어서 어떤 장애로 작용한 일은 전혀 없습니다. 블로깅을 통한 교류 역시 물론이구요.

블로그는 명함 교환하는 비지니스 클럽이 아니고, 얼굴 자랑하는 미인대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프로필과 사진이 블로깅의 책임감에 매우 깊이있게 작용하거나, 혹은 (프로필과 사진이 없다고 해서) 블로깅의 실질적인 교류를 방해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너무 황당한 글을 만나서 짧게 적어봤습니다.
이 글에 있는 다소 격한 표현은 깊은 양해를 구합니다.
다만 그런 과격함도 제 블로그(프로필)의 일부이겠네요.
제가 원래 좀 그런 블로거입니다.



추.
'프로필을 적는 것도 좋지 않나요?' 뭐 이런 정도로 쓰셨다면, 그려려니 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런 비판글도 굳이 쓰지는 않았겠죠. 그런데 역겹다니요, 정말 어처구니 한참 없네요. ㅡ.ㅡ;


추2.
물론 블로거 스스로가 자신의 오프라인의 이력을 독자에게 '보충적인 참조자료'로 알려주는 일은 굳이 비판받을 이유가 없겠죠(오히려 독자로서는 선입견이 생기는 단점이 있을 수 있지만, 반대로 블로그를 판단할 수 있는 작은 자료를 얻는다는 점에서 장점도 있으리라 봅니다). 프로필이 블로깅 방법론의 일부로서 채택하거나 말거나 그건 블로거 각자에게 속한 영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블로거 프로필을 공개하지 말자라는 글이 전혀 아닙니다. 본문에도 어느 정도 표현되어 있지만, 굳이 부연합니다. : )



* 관련(이라기 보다는 참조할만한)
기성언론과 블로그의 차이 : 블로그발 미디어 비평의 의미

민노씨.네 블로기즘 관련글
민노씨.네 저널리즘 관련글


* 관련(이라기 보다는 문득 다시 읽고 싶어지는) 추천글
February 10, 2005
블로그는 에피소딕 기억과 시맨틱 기억을 남긴다



* 이 글 제목과 주소
블로거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http://minoci.net/622




잘 모르지만, 이 도깨비 잔치 같은 판을 나름으로 제대로 이해해보고자 써본다.
이하 잘못된 사실 확인이나 (상식을 벗어나는 비이성적인) 판단이 있다면 지적을 당부드리는 바다.

1. 기초 사실 : 사이버 모욕죄과 최진실법 같은 법인가?
양자의 구별은 기사에서조차 모호하게 취급되고 있다. 일명 최진실법은 (나경원 의원의 포털 규제안에 얹어진 형태이긴 하지만) 급조된 논의 수준에 머물고 있고, 기존 '사이버 모욕죄'는 정보통신망법의 규정을 보충하는 차원에서 이미 강력하게 거론되어 왔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중앙일보는 "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의 문화체육관광부 국정감사에서 이른바 ‘최진실법’이라 불리는 ‘사이버 모욕죄’ 신설과 관련한 여야 간 공방이 치열했다"(중앙일보, 10. 6. "인격 살인 막아야" "인터넷의 계엄령" 중에서)고 하여 최진실법이 '사이버 모욕죄'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고 표현한다. 이에 반하여 조선일보는 "정치권에서 사이버 모욕죄와 인터넷 실명제 강화를 위한 신설 법안(일명 '최진실법') 제정 논의가 진행 중인 가운데 연예인 노조가 6일 "악플(악의적 댓글) 방지 대책을 강구하는 모든 노력에 적극 동참하겠다"며 사실상 지지 입장을 밝혔다."(조선일보, 10. 7. '악플 방지법<일명 '최진실법'>' 도입 3색 움직임 중에서) 고 하여 양자가 별개 입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덧.] 그런데 괄호 "(최진실법)"이 설명하는 게 '"A~와B"의 직전 문구 가운데 A와B 모두인지, 아니면 B인지 좀 헷갈리는데, 처음 글을 썼을 때는 B만 가리키는 것 같았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A와 B 모두를 지시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 "최진실"법이라는 명칭.
지난 6일 국회 문체관부 국정감사에서 유족과 최진실 소속사는 민주당 최문순 의원을 통해 '최진실법'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했고, 문체관부 유인촌 장관은 이에 대해 '최진실법'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도록 할 것임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지적해야 하는 사실. 블로거 행인의 명징한 지적처럼 '최진실법'이 아니라 '나경원법'이다.

굳이 '최진실법'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뭐겠나. 이건 상징 전략이다. 대중적인 감수성에 호소함으로써, 망자의 죽음을 여론몰이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는거다. 이 점은 조선일보도 인정하고 있는 바다. "최근 이 법안에 피해자인 '최진실법'이란 이름이 붙으면서 '인터넷 실명제 서명운동'이 벌어지는 등 찬성 여론이 높아지자 민주당은 당혹해 하는 분위기다." (조선일보, 10. 7. '악플 방지법<일명 '최진실법'>' 도입 3색 움직임 중에서)

3. "피해자" 최진실과 자기책임의 원리, 형벌적 입법이 최선인 사회
고인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아쉬움, 그리고 인간적인 연민은 별론으로 위 조선일보 기사에서 사용된 "피해자 최진실"이라는 표현은 정말 문제가 있는 표현이다. 피해자라는 표현은 가해자를 당연히 예정한 표현이다. 물론 여기서 그 '가해자'는 '악플(러)'이다. 이것은 정황을 '사실'로 확정하는 매우 문제 있는 보도태도다. 즉 자살보도 기준 권고안의 합리적인 지적들에 정면으로 반하는 보도태도다.

최진실 죽음이 경찰 발표대로 '충동적인 자살'이라면, 이런 상식적인 최소한의 합의 전제에서 논의를 이끌자면, 최진실의 죽음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본인에게 있다. 이것이 글을 쓰는 나 자신에게조차도 못마땅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가혹하고, 메마른 이성의 판단이라고 해도, 이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이 자기책임의 원리를 법질서, 특히나 형법적인 법질서의 기반으로 하는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한 논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물론 최진실 본인이 자살을 '선택'한 원인에 대한 사회의 관심과 논의는 분명히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최진실의 '자살'이 사회적인 원인에 주로 기인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다. 또 이를 사회적으로 방지하려는 노력으로써 사회적인 제도 마련(사이버 모욕죄나 나경원법과 같은)을 모색하는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인정될 수 있을테다. 하지만 스스로 잔인하다는 생각을 지울 길 없음에도, 다시 강조하자. '정황'으로만 어떤 행위의 원인을 판단하는 일은 정말 바람직하지 못하다. 더욱이 시민의 잠재적인 자유를 제한하는 형벌에 관한 입법작용이 '정황'에 대한 판단에 기인한다는 것은 이명박 정부에서 외치는 '법질서'가 추구하는 그 이상과도 전혀 관계가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 법질서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손쉬운 발상은 시민들이 자신의 피를 뿌리며 지키고자 했던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시민사회', 그리고 그런 이상과 가치가 법질서로서 표현된 헌법과 형법의 죄형법정주의, 그 정치적인 역사적인 가치를 스스로 망각하는 것이다. 거듭해서 다시 강조하자. '직접적인' 원인을 '확정할 수 없는' 하나의 사례(최진실 자살 사건)를 빌미로 국가공권력의 직접적인 개입을 당연시하는 형벌적 법률을 가장 먼저, 가장 활발하게 논의대상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우리사회의 미성숙을 반영한다.

그것은 우리 시민사회의 미성숙한 수준, 흔히 '냄비근성'으로 표현하는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대중심리를 반영하는 것이면서, 스스로의 권리를 잠재적으로 제한할 것임에 분명한 입법에 대해 그런 감상적인 판단을 전제로 스스로 '권력의 올가미'를 원하다는 점에서는 매카시즘적 행태에 취약한 시민사회의 기반을 그대로 방증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거대 담론권력의 악질적인 틀짓기에 자율적인 비판능력을 상실한 채로 스스로 권력장치의 피동적인 신민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은 우리 사회의 자율적인 정화능력에 대한 깊은 절망감을 더불어 불러오는 것이기도 하다.

4. 정치적 담론권력의 역학 : 누가 나경원법을 원하는가?
사이버 모욕죄와 나경원법을 원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나경원법'(최진실법)과 사이버 모욕죄 논의로 발전된 최진실 이슈는 여권과 수구 언론들에 의해 더더욱 부풀려진 정치적 담론 투쟁 전략에 가깝다. 그것은 현재 논의되고 이쓴 법안이 자신의 권력에 얼마나 유리하게 작용할 것인가를 가장 우선한다.

당장에 최진실 이슈는 정부 여당이 근심해마지 않았던 '멜라민 이슈'를 잠재워버렸고, 이명박 정부의 대언론정책(현재로서는 방송장악에 대한 적극적인 의지)에 대한 비판적 관심을 소멸시키고 있다(물론 이에 대한 양상은 최진실 이슈와의 관계에서 좀더 복잡하게 엉켜있긴 하지만). 상식적으로 접근해보자. 악플이 없는 사회는 악플 처단하는 법률이 마련되면 가능할까? 두 가지 가능성이 상존한다. 그렇다면 그저 상식으로 판단해보자.

A. 시민들의 소박한 바람처럼 파렴치한 악플을 처단하겠다는 그 목적에 기여할 가능성
B. 아니면 거대 담론권력(모니터링이 가능한)을 휘하에 둔, 혹은 그들과 짝짜궁으로 붙어 먹는 권력들(정치권력 및 자본권력)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여론과 담론을 유통시키기 위한 '합법적인 장치'로 활용할 가능성


무슨 대단한 지식이나 논리의 조력이 없어도 그저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왔던 짬밥과 최소한의 상식으로 판단하면 답 나온다. 사이버 모욕죄든 나경원법(최진실법)이든 이 법률은 특권화된 소수 권력에 이바지할 가능성이 현저히 높고,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에게 그 법률의 가치가 확장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 보인다. 여기에 연예인 노조가 이런 법률안에 찬성하는 것은(물론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연예인이라는 계층 자체를 특권화하려는 권력적 의지로 읽을 여지가 크다.

5. 숭고한 사회의 악당들 : "Kill with me
악플이 최진실이 자살을 선택한 주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치자. 그리고 이 악플 때문에 많은 인터넷 사용자들의 '인격권'이 잠재적으로 침해당할 위험성이 높다고 하자. 악플을 멸절하기 위한, 그 폐해를 줄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시민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논의의 풍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의 잠재적인 '악당'들인 악플러들을 '처단'하기 위한 형벌적 법률을 마련해달라고 정부와 여권에 요청하는 일인가? 아니면 그런 악플러들이 더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는 고양된 토론과 대화의 문화를 가꿔가는 일인가? 형법적인 법률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지, 그것이 최선의 수단일수는 없다.

우리사회의 '숭고한' 저널리즘과 '숭고한' 정치권력, 그리고 '숭고한' 시민들이 원하는 건 그 그저 자신들의 욕망과 권력유지의 메카니즘을 공고하게 할 수 있는 어리석은 중생들과 그 중생들에게 뿌려질 희생양의 피일 뿐이다. 그리고 그 희생양은 시스템의 야만적인 욕망과 그 시스템을 관장하는 '숭고한' 권력의 그 날카로운 이빨을 숨긴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스스로의 자율성을 확대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고양하기 위한 자신에 대한 신뢰에 바탕한, 공동체에 대한 희망에 바탕한 대화를 원하기 보다는 자신을 규율해달라고, 자신들을 규제해달라고 '자발적으로' 요청한다.  

그리하여 현재 진영이 갈렸다. 정의의 편에 선 자들이 있다. 최진실의 주검을 높이 들고 정의를 외치는 숭고한 저널리즘과 숭고한 정치권력과 숭고한 시민들이 있다. 정치권력과 거대담론권력과 이들의 담합구조, 그 극악한 메카니즘은 그 뒤에서 새나오는 웃음을 참고 있다. 법질서 좋아하는 정치꾼들은 최진실을 죽인 저 악당들을 처단하자고, 우리는 피를 원한다고 외친다. "Kill with me!"                     

그렇다.
사태가 이렇다면, 나는 악당을 자청하련다.


추.
우리나라에는 '킬 위드 미(Kill with me. 원제: untraceable. 2008.)'로 소개된 그레고리 호블릿의 영화는 매우 흥미로운 소재(위험한 대중심리나 경쟁적인 저널리즘의 폐해)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문화에 대한 극단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결국은 인터넷에 대한 국가공권력 강화가 바람직한 논리 귀결이라는 식의 엉뚱한 전언을 극단적으로 확대재생산하고 있는 영화다.


* 관련
최진실 자살 단상 : 악플과 찌라시즘, 그리고 희생양
우려되는 악플 사냥 (medea talk) : ~ 18:40


* 관련 추천
한나라당은 기필코 '나경원 법'을 만드려 한다. 이 법에 대해 저들이 아무리 '최진실 법'이라고 너스레를 떨더라도 나는 악착같이 '나경원 법'이라는 말을 쓰련다." (행인, 천정배씨, 좀 남새스럽지 않우??)

미국산 쇠고기에 대한 광우병 위험이 제기될 때, 과학을 들이밀던 인간들이 지금 최진실의 자살에 대해서는 “최진실법”을 운운하며 인터넷 통제를 하려 하고 있다. 이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고인의 죽음까지도 이용하는 그런 인간들이다." (소요유) : 최진실 자살을 다루는 정치권력과 거대 담론권력의 야만적인 정략에 대한 문제제기. 

최진실 법'에 대한 한 중앙일간지 기자의 의견에 대해.. (펄) : 대중적인 여론몰이에 편승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조장하는 건 저널리스트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아니다. 일간스포츠 송원섭에 대한 실랄한 비판.

표현의 자유와 사이버모욕죄 사이, 간단 문답 (capcold) : 간단하지만, 심오한 문답! 강추.

거 참.. 그 연예계 바닥이 얼마나 험한 동넨데 악플에 자살...-_-;;
사람들 생각하는게 참.. 요즘 언론도 OECD 자살율 1위 어쩌면서 악플로 슬금슬금 물타기 하네요..
OECD 자살율 1위는 경제가 어려워서다. 사채 이자가 OECD 최고 수준인 49% 라서 그런거고. -_-;;
아놔, 진짜, 사람 죽은걸로 뭐라 하기 미안하지만, 정말 이건 아니다 싶네요. -_-;;
진짜 이유는 알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악플 악플...-_-;;

- 게르드, 익명이 왜?(너바나나)에 대한
댓글
익명 댓글에 책임을 전가시키는 엉뚱한 희생양 놀이를 비판하는 글의 문제의식에도 찬동하지만, 댓글에도 크게 공감하게 된다능... ㅡ.ㅡ;;


* 이 글 제목과 주소
숭고한 사회의 악당들 . http://minoci.net/621



로망롤랑님의 글을 읽고, 짧게 부연합니다.


1.“우리는 자유에 처단되었다”고 사르트르는 인간이 자유로울 수밖에 없음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로워야 하고, 또 그렇게 인간은 자유를 궁극적인 인간성의 본질이자 그 조건으로 희구합니다. 물론 현실 속의 인간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말이죠.

2. 블로그에서의 소통도 마찬가지죠. 소통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대화입니다. 하지만 소통이라는 의미를 이루는 큰 테두리, 그 구조를 생각한다면, 소통은 발화(몸짓, 표시, 글쓰기)로 부터 출발하죠. 사람 동물의 욕구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애정결핍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동물적이면서, 또 너무도 인간적입니다.

3. 미디어적 의미에서는 블로그는, 정말 이제는 식상한 느낌이 드는 '쌍방향 커뮤니케이션', 즉 '대화를 염두에 두고 설계된' 관계모델입니다. 대화 도구이자 시스템이죠. 그것을 가장 강하게 상징하는 하위 얼개들은 링크, RSS, 댓글, 트랙백 등등이겠죠.

이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소통의 도구는 링크와 RSS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링크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만큼 강력한(블로그는 링크다!) 소통 도구이고, RSS 역시 '발행'자의 입장과 '구독'자의 입장을 염두에 둔 모델이라서, '서로 짝'으로 존재합니다. 댓글이나 트랙백 역시 마찬가지죠.

이렇게 블로그를 둘러싼 기술적인 설정들은 '홀말'이 아니라 '짝말'로 이뤄진 소통의 매개들, 소통의 도구들을 자신의 육체로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 블로그는 이미 '소통'에 처단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싶어요.


4. 블로그를 사르트르의 '자유'에 비유한 첫 문단으로 돌아가면, 그렇다고 누구나 '자유'를 느끼는 것은 아니고, 또 '자유'가 인위적으로 '강요'된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그것은 그저 즐겁게 추구하는 것이고, 즐겁게 고민될 수 있는 것일지언정, "당신은 자유로워야 한단 말야!!!"라고 타인에게 '강압'하는 태도는 자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죠. 그리고 "나는 자유에 대해선 관심 없어!!!"라고 말하는 자유까지도 존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블로그가 소통이든 뭐든 관심없어!!!"라는 (광의의) '소통'의 표현도 존중되어야 할 줄로 생각해요.

그러니 미루님께서 이에 대해 논평하신 바의 취지를 떠올리자면, 이것이 자유이다/아니다라는 것은 그다지 실효적인 논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유의 풍경, 자유의 방법론, 이와 같은 의미로, 소통의 풍경, 소통의 방법론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 그 소통의 풍경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이제는 이야기해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짧게 써봅니다.



* 본문 참조 링크

실존주의 선언의 의미와 52년 논쟁 http://minoci.net/129
기도와 희생 : 나와 너 http://minoci.net/106  
마지막으로 남겨야 하는 블로그툴 - 링크와 인용 http://minoci.net/164

미루님 http://blog.joeaney.com/
미루님의 논평
http://minoci.net/616#comment13627



* 발아점
일방적인 전시를 위한 블로그? (로망롤랑)
http://iblogger.kr/278



믹시를 처음 인식하게 된 계기가 '펄'님 때문이었는데 말이죠.
솔직히 약간 믹시업 단추가 없어서 추천하기 좀 불편했는데(ㅎㅎ), "민망함"을 극복하시고, 드디어(?) 본문 하단에 믹시업 단추를 다시는군요.  개인적으론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 )

펄님께서 쓰신 글을 읽으면서 더불어 믹시에 좀더 바라는 점이랄까, 그런 것이 생각나서요. (처음에는 답글로 적다가) 굳이 포스팅해봅니다. ㅡ.ㅡ;

1. 시스템 에러나 장애가 종종 생기는 점. 이건 뭐, 나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2. 믹시업캐스트 위젯 요약문에 블로그(블로거)가 표시되지 않는 점.

3. 위문제와 더불어 (물론 클릭하면 그 블로그로 그대로 연결되기는 하지만) 커서를 올리면 링크주소가 믹시 프레임으로 덮여 있다는 점은 아쉬움이네요.

4. 딱히 믹시에 로긴하지 않아도, 회원이 아니더라도(그러니까 지나가다 우연히 읽은 독자들께도) 기본으로 '한 표' 정도는 추천할 수 있도록 해주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로긴하면 부가적으로 추천행위의 강도(?)를 조절(1표의 추천에서 3표의 강하게 추천까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이런 정도라면 형평(?)에도 크게 무리가 없을 것 같고 말이죠.

암튼 특히 2.가 좀 개선(?)되면 좋겠습니다.
블로그를 널리 알리는 추천행위에 있어, 블로그과 블로거를 명확하게 표시해주는 일은 기본 중에서도 기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무한 친절 엔들리스9님(http://endless9.com/) 블로그에도 트랙백 한방 쏴야겠군요. : )  



추.
엔들리스님은 하루에 믹시업 추천 몇 방이나 날리시나요?
올블의 훈남 비트손님(
http://feeling-diary.tistory.com/)께서는 하루에 보통 500 개 이상의 글을 읽으신다고 하시더만요. 얼마전 올블 4주년 잔치 때 뵙고, 궁금해서 여쭤봤더니 그러시더군요. ㅎ



* 발아점
믹시업 단추를 달았습니다. (펄)
http://pariscom.info/189


펄님 블로그는 제가 손꼽을 만큼 개인적으론 좋아하는 블로그인데요.
동료이자 애독자로서의 바람을 좀더 적자면, 사이드바에 있는 '한RSS 단추'를 본문 하단으로 옮기시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ㅎㅎ

펄님 블로그를 한RSS로 추가하실 분은
http://www.hanrss.com/add_sub.qst?url=http%3A%2F%2Fpariscom.info%2F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