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널리즘

저널리즘은 유기적인 조직의 메카니즘을 통해 사회성원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달하고, 진실을 추구한다. 저널리즘은 그렇게 담론 생산 및 유통 시스템의 중핵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이런 대한 상식적인 기대는 마치 그 자체로 농담처럼 느껴진다. 가혹하게도 대한민국 저널리즘은 두 가지 죄에 빠져있다. 그것은 거칠게 말하자면 선정주의와 과도한 당파성이다. 그리고 양자는 서로 딴 몸이 아니라 한몸이다. 선정주의가 언론'기업'으로서의 경제적(수단적) 지향에 가깝다면, 정치적 당파는 '언론'기업으로서의 목적적 지향에 가깝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2. 매체비평

매체비평은 본질적으로 비평에 관한 비평이다. 그런 점에서 단순한 사실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매체가 전달하는 사실과 그 사실 비평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쉽게 말해서 매체비평은 구조적인 시각을 더 더욱 강력하게 자신의 관점으로 견지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소위 '뉴스'라는 것을 둘러싼 권력의 역학, 당파성의 역학을 통해 단편적인 진실이 아닌 입체적인 진실, 때론 모순적이기까지 한 그 이율배반의 진실을 매체비평은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그것이 매체비평의 존재이유다.

저널리즘에 대한 저널리즘이고, 해석에 대한 해석이며, 사실에 대한 새로운 사실(그 사실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달리 투영되는)이다. 철학이 모든 학문에 대한 메타학문으로 그 방향을 설정하는 것처럼, 매체비평은 매체에 대한 나침반 역할을 하게 된다.


3. 질문 

좀더 구체적으로 질문하자. 그렇다면 저널리즘에 대한 메타비평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것은 매우 난감한 질문이다. 두 가지 상식적인 대답이 존재한다.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과도한 정치적 당파성을 해체하는 시도를 해야 하는가?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천박한 선정주의를 적극적으로 깨뜨리는 항체로서 존재해야 하는가? 그래서 현재 저널리즘의 지향점으로 정착한 정론지 모델을 매체비평은 자신의 목적으로 삼아야 하는가?

이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야기는 아무런 실효성 있는 논의도 가져오지 못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사실, 그 사실(뉴스!)을 선택하고 해석함으로써 추구하게 되는 진실은 앞서 말한 것처럼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진실은 당파성의 한계 속에서 해석된 진실이고, 그 당대의 경제, 정치, 문화적인 환경 속에서 파악되는 제한된 진실이며, 이런 역학 속에서 그 진실 자체가 자기 모순적 성질을 갖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본질적인 한계와 어려움에 더해서 매체 수용자들의 콘텐츠 소비 경향 역시 낙관적이지는 않다. 매체 수용자들은 날로 연성화된 자극적 뉴스들에 길들여지고 있다. 그리고 매체비평은 매체와 콘텐츠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수용자들이 아니라면 대개 따분하거나, 건조한 스타일을 갖곤 한다. 그렇다면 글 서두에 부정적으로 서술한 '선정주의'와 '당파성'은 달리 접근되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 양자가 갖는 부정적인 속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현실이고, 또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마땅히 갖는 '흥미가치'(유희가치)와 '고민가치'(자신의 계급적인 이해가 투사된)를 갖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미디어오늘과 미디어스 

논의를 좀더 현실화시켜보자. 이미 미디어오늘이라는 매체비평 전문저널이 존재한다. 미디어오늘이 갖는 의미와 한계는 미디어스에 그대로 유의미한 시사점을 갖는다. 미디어오늘의 당파성은 무엇이고, 미디어오늘의 전략적인 방법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미디어스에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전해주는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매우 추상적이고, 또 단편적인 편견에 치우친 개인적인 주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소박한 독자들도 나와 크게 다르지는 않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써본다.

미디어오늘은 우리나라 저널리즘 스펙트럼에서, 소위 진보 대 보수(수구)라는 평면에서 본다면 진보파 언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미디어오늘은 흔히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기성 언론의 과도한 당파성을 비판한다. 미디어오늘은 의미있는 문제의식으로 대한민국의 미디어 환경에 대해 그 자신의 예민한 촉수를 가동하고 있고, 그 지향점 역시 상당히 동의할만한 철학을 견지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거친 직관적 해석틀을 통해 보자면, 이미(!) 미디어오늘이라는 매체비평 저널리즘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미디어스는 미디어오늘과 어떤 차별적인 존재가치를 획득할 수 있을까?
나는 미디어스가 그 대답을 기성 저널리즘에서 찾기 보다는 블로기즘의 새로운 영역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블로기즘의 가능성과 서로 자극을 주고 받고, 상생할 수 있는 매체비평 저널리즘 모델을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디어오늘은 매우 찬성할만한 미디어비평을 전해주고 있지만, 거친 인상비평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좀더 이야기해본다면, 다소 경직되고, 정돈된 객관성의 신화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그것이 물론 정론지로서의 불편부당 모델에 온전하게 부합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 자신의 당파성이 너무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언어를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독자들의 '고민가치'를 자극할 수는 있겠지만, 독자들의 '흥미가치'를 자극하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진다.

미디어스가 자신만의 존재가치를 획득할 수 있는 전략적인 방법론은 저널리즘의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그것을 문제시하면서, 또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하는 사실에 대한 불가침이라는 스스로의 본원적 요구 사이에서 창조적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론이어야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하건대, 블로기즘이 갖는 미디어적 역사성을 스스로의 자극으로 수용함으로써 좀더 효율적으로 생겨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5. 블로기즘과 저널리즘, 그리고 미디어스

나는 블로거다.
이 글은 블로거로서, 소박한 독자로서 미디어스에게 내 나름의 부족한 조언을 평가를 들려주는 자리다. 물론 그 평가가 구체적이고, 세밀한 미디어스의 이런 저런 모습에 대한 비판이나 조언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그러기엔 미디어스에 대한 체험치를 얻기 위한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는 개인적인 핑계를 대본다).

다수의 블로그가 행하는 미디어 비평은 대체로 자신의 감정적인 정치적 당파에 치우쳐 있다. 그래서 당파성이 강한 기존 언론의 이슈들이나 논조들에 기대어 그 담론을 확산하는 단순한 기여, 혹은 편승 모델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것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최소한 미디어에 대해 '스스로 글을 쓴다'는 그 비평의 차원에서는 스스로 진화하고, 학습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블로기즘에 바탕한 매체 비평은 기존 전통 저널리즘의 전문적인 매체비평과는 다른 차원의 역사성과 미디어적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미디어 역학, 기존 미디어 권력의 재분배 차원에서 블로그는 특히나 기성언론, 그 중에서도 종이신문, 그 중에서도 수구적인 기득권 신문들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 성장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현실적인 정치적, 권력적인 미디어 쟁투의 역학에서 판단건대, 이는 온라인을 중심으로 하는 전문 매체비평 저널들과 그 거시적인 차원에서 유사한 역사성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대체적으로 그 수구 기득권 신문은 (그 철학이나 개성의 차원에서) 시민사회의 위협이 될 만큼 편파적이고, 악질적인 당파성에 함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온라인 영역에서 블로그의 미디어적 영향력은 포털이나 기존의 언론사닷컴들의 영향권 안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성장하고 있거나, 그 잠재력을 스스로 고갈시키고 있는게 사실이다. 이점은 매우 유감이지만, 포털 종속, 기성언론 의존적 경향은 더욱 강화될 수도 있고, 혹은 블로거들이 스스로의 잠재력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방법론을 진화시킬 수도 있다.

미디어스는 기성언론과의 권력 쟁투나 그 권력역학에서 좀더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근시안적인 전략을 마련해서는 안된다. 미디어스가 표방하는 철학 혹은 그 표어처럼 '우리가 미디어'라는 그 엄청난 역사적인 함의, 미디어 전환기에서 자신의 위치를 블로기즘의 역사성이라는 좌표 안에서 고민해야 마땅하다.

나는 낙관론을 경계하지만 여전히 블로그의 미래는 밝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미디어적 가능성, 그 혁명적인 잠재력을 실천할 수 있는 열혈블로거들의 창조적인 네트워크가 여기 저기서 만개할 시간이 점점더 다가오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 때가 오면 블로거들은 자신이 스스로  미디어의 미래였음을 드디어 현실로서, 피부로 자각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실천론의 차원에서 미디어스는 그저 표피적인 개방성이나 블로기즘의 가치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전형적인 기사형의 글들을 통해 자신을 미디어오늘의 아류로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저널리즘의 객관성이라는 신화에 도전하고, 그 도전을 통한 긴장을 통해 방법론을 수립하며, 그 구체적인 방법론들을 통해 블로거들과 함께 대화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그저 미디어스의 메인 공간에 블로거들의 글을 수록하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웹을 중심으로 하는 거시적인 대한민국적 웹 콘텐츠 유통의 구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독립적인 콘텐츠 생산 및 유통의 시스템을 모색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미디어스 혼자만의 힘으로 가능하지 않고, 기존에 미디어스가 표방한 상호 협력적인 네트워킹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미디어스의 부단한 전진을 기원한다.




* 미디어스 일주년 기념 기고문.



* 추. 후기


1. 아쉬움
이 글은, 말미에 밝혔듯, 미디어스라는 신생 미디어비평 저널 일주년을 위해 쓴 글이다.
본문에도 썼지만, 솔직히 미디어스에 대해선, 나는 아는 바가 별로 없다.
그래서 이런 추상적 총론으로서의 글 밖에는 나오지 못한 것 같다. ㅡ.ㅡ;
이 점은 스스로에게도 아쉽다.

2. 왜 굳이 나에게?
이건 지금도 의문이다.
내 블로그를 미디어스 기자들 가운데 누군가가 구독하는건가?
미디어스에 자주 기고하는 블로거 자그니의 추천이 있었나?

미디어스 1주년을 기념하는 기고는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이 썼다.
나머지 두 분은 전규찬씨(학자 몫?)와 김현석씨(기자 몫?)다. 내가 쓴 글은 블로거 몫이다.
촉박한 원고마감 기한을 생각하면(3일 정도의 여유였던 것 같은데) 다른 블로거 누군가 수락했는데, 그게 틀어져서 내가 쓰게 된건가... 싶은 생각도 든다.

3. 원고료 [덧. 이 부분은 착오. 원고료 있다. ^ ^;; ]
청탁이니 당연히 원고료가 있으려니 기대를 했었는데, 없는 것 같다.
물론 이걸 탓하려거나 이게 굉장히 아쉽다거나(살짝 아쉬운 정도?) 그런 건 전혀 아니다.
프레시안도 열악한 경제적인 사정 때문에 원고료 없는 기고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 이는 미디어스 일주년 기념 기고문인 전규찬의 글을 참조. 사족으로 짧게 논평하면, 전규찬의 글은 각론 차원에서 꽤나 의미있는 비판을 담고 있는데, 실은 몇몇 지적에 대해선 갸우뚱하게도 된다.

암튼 프레시안이나 미디어오늘, 그리고 미디어스처럼 찬성할만한 온라인 저널들이 돈도 많이 벌어서 나같은 가난한 블로거에게 청탁도 종종 해주고, 원고료도 듬뿍~! 주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란다.
농반진반이다.
:D

돈을 주든, 돈을 주지 않든...
나는 나에게 어떤 글을 써달라고 부탁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 주제가 내가 정말 쓰고 싶은 주제라면 말이다. ㅡ.ㅡ;;
그러니까 언제든지 나에게 글을 부탁하고 싶다면(혹시라도...), 그렇게 하면 된다.

4. 기념샷. (스스로도 좀 유치한 것 같지만... ㅎㅎ)

more..




5. 트랙백이 없다!
이제야 발견한 건데, 미디어스 개별 기사들에는 '트랙백'을 설정할 수 없다.
인터넷한겨레의 경우에는 개별 기사에 트랙백을 보낼 수 있는 설정이 있다(물론 유명무실이다. 왜냐하면 이게 거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구조라서 그렇다).
이건 온라인 저널로서는 점점더 필수에 가까운 설정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설정은 제공되었으면 좋겠다.

6. 블로그 주소 링크.
이건 내 불찰이기도 하다.
그걸 요청(?)했어야 했던건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나로선 이건 당연히 신경써줄 줄 알았다.
내가 블로거 자격(?)으로 쓴 글임에도 불구하고, 블로그와 연결된 어떤 링크도 없는 점은 좀 아쉽다.
더불어 내 글 본문에 참조 링크를 설정하지 못한 점(이건 내가 게을러서 못한 것이지만)도 좀 아쉽다.

7. 북마크시 글제목이 안뜬다.
이것도 기술적인 아쉬움인데, 미디어스 개별 해당기사를 북마크하면 그 개별기사의 제목이 아니라, '미디어스' 이렇게 썰렁한 제목이 뜬다.
이건 온라인저널로서는 당장 개선해야 하는 문제라고 본다.
물론 트랙백 문제가 좀더 중요한 문제라고는 생각하지만.


* 관련 추천글
미디어스에 대해 뒤늦게 블로그 관련 글들을 살펴보다가...
좀 오래 된 글이지만, 이런 글을 읽었다.
관련 추천글로 링크 걸어본다. : )

미디어오늘 미디어스, 대체 뭐하나 (김주완) : 이명박 태극기 사건에 대한 글. 애정어린 비판.




'명망성의 압박'(앞으로 2,30분 있다가 등록할 글 제목인데)이란 글을 쓰기 위해 히치하이커의 블로그에 갔다가 열받아서 쓴다. 왜냐하면 글주소를 인용해야 하니까. 물론 FF 라이브 북마크를 이용해서 접근하면 이글루스의 기술적인 제약을 회피할 수는 있겠으나... 혹은 트랙백을 클릭해서 그 트래픽 주소에서 tb를 뺀다던가 하는 방법으로도 가능하지만, 너무 귀찮은 거다.

아주 간단한 거다.

제목 클릭이 안된다!

아무리 제목을 클릭질해도 헛방이다.
그 제목을 단위로 한 한 개의 글 단위로 화면이 잡히지 않는다.

종종 느꼈던 문제인데... 뭐랄까 이렇게 한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
어떤 이글루스 블로그에서 여러 개의 글을 읽다가 그 중 어떤 글을 인용하고 싶을 때 이글루스 블로그의 이런 설정은 이를 굉장히 어렵게 한다. 그러니까 블로그간 링크와 인용에 의한 상호 소통에 장애가 되는거다(그러니 이건 꽤 심각하다면 심각한 문제다).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글 제목을 클릭하는데, 글 단위로 프레임이 구성되지 않고, 글 주소도 뜨지 않는 건 정말 짜증난다. 거기에 아무리 우클릭으로 그 링크 주소를 복사하려도 해도 이것마저 안된다.

우라질!은 "좋은 글 나쁜 글"을 클릭하려다가 클릭이 안되서 내뱉은 소리다.
물론 마음의 소리.

ㅡ.ㅡ; 



추.
블로거 아틸라의 친절한 댓글
(이 댓글 읽고 얼마나 뻘쭘해지던지.. )

"글의 맨 아래쪽 태그 아래에 있는 날짜를 누르세요... " (아틸라)

뻘쭘한 가운데 굳이 항변(?)을 해보자면...
굳이 통상적인 블로깅 습관과는 다르게 '날짜'를 클릭해야 글 주소가 뜨도록 한 건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 관련 추천글
1. 파이어폭스로 이글루에 댓글 적을때 나오는 오류..
(Alphonse) : 내가 지적한 문제와는 좀 다른 (완전하게 기술적인 오류로 기인한 어떤) 문제인 것 같은데... 어서 해결되기를 바란다. :D

2.이글루스 글제목엔 왜 링크가 안걸려있을까?(추측) (hof) : 이 글의 의문에 대한 hof의 추론. 이글루스와 무버블타입의 관계.






0.
잘 모르는 것에 대해 쓰지 않는 게 내 나름의 원칙이다.
여기엔 두 가지 예외가 있다.

1.
하나는 거기에 확인적 지식이 필요 없는 경우다.
가령 사랑이나 연애감정 등에서 만날 수 있는 낭만적 아이러니의 범주에 속한 것들이 그런 것들이다.

2.
나머지 하나는 좀더 알고 싶기 때문에, 쓰는 경우다.
이 범주는 내가 모르는 것들을 명확히 알게 해주는 (역설적인) 정리이면서 또 그 나름으로 공부의 의미다.

3.
약간 코믹한 귀결인데, 나는 거의 단 한번도 내 글쓰기의 원칙을 고수한 적이 없다. 
나는 항상 나의 원칙을 파괴하는 글쓰기를 한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것에 대해 완전하게 안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
거의 두번째 범주에 속한 것들에 대해 나는 써왔다.
그런데 이제는 첫번째 범주에 속한 것들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7.
내가 열 아홉이나 스물인 그 까마득히 먼 과거에 나는 항상 연애편지를 썼었다.
정말 자주 나는 연애편지를 썼는데, 그 연애편지야 말로 내 글쓰기의 원천이다.
그 고통과 환희는 매우 통속적이고, 가장 익숙한 이율배반의 감정을 가져다 주는데...

나는 그 시간들이 항상 나에게 흘러가고 있다는 걸 안다.
단 한순간도 그 시간이 나에게 흐르지 않았던 적은 없다.

그게 내 삶이 행복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라면 이유다.
그 행복이 통속이라고 해도 그건 이미 깨져버렸으니까.

9.
앞으로 연애편지도 종종 써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닷컴의 '시사IN' 벗겨먹고 왜곡하기

2008/10/13 22:38
시사IN이 정선희와 인터뷰했다.
그 인터뷰 자체에 대해선 뭐랄까...  시사IN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라는 생각도 들고(솔직히 이건 여전히 특종아닌가..), 한편으론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라는 생각도 든다. 물론 대중의 정당한 관심사에 대해 언론사가 이를 보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긴 하다. 암튼 그렇다.

내가 정작 말하고 싶은 건 조선닷컴이다.
조선닷컴은 시사IN의 그 인터뷰를 짜깁기한다.
여기서 짜깁기란, 말그대로 큰 따옴표 신공을 발휘한 발췌 요약 인용기사를 말한다(그러니 이 기사들은 매체비평 기사가 전혀 아니다).
타언론사의 보도에 대해 그걸 짜깁기하고 있는 언론사를(아무리 조선일보가 아니라 조선'닷컴'이라고 해도) 언론사로 불러야 되는지는 난 잘 모르겠다. 이런 짜깁기 기사는 어떤 기자가 썼는지도 없다. 기자명이 올라가야 할 자리에 그냥 '조선닷컴'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이다. 하기는 자기들도 쪽팔린 건 아는가보다 싶은 생각이 들긴 한다.

이렇게 짜깁기한 기사들(!)은 하나도 아니고 무려 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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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닷컴의 시사IN 인터뷰 짜깁기 기사 1.(클릭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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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닷컴의 시사IN 인터뷰 짜깁기 기사 2. (클릭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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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닷컴의 시사IN 인터뷰 짜깁기 기사 3. (클릭 비추)


거기에 더 해 '짜깁기 기사들'을 메인에 올린다. 조선닷컴은 이 민감한 이슈를 끊임없이 자사의 트래픽 장사를 위해서 활용한다. 여기에는 저널리즘이라고 불릴만한 어떤 고민도, 어떤 의미있는 관점도 없다. 그러니까 조선닷컴은 언론사로서는 정말 해서는 안되는 일, 시간(屍姦) 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그러니까 네이버의 시체애호증과 비슷한 풍경이다). 정말 인면수심도 이런 인면수심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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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 짜깁기 기사들을 필두로 예전 관련기사를 세트로 묶어주고 있는 조선닷컴 메인


여기에 더해 그 시사IN 인터뷰 짜깁기 기사들의 면면을 살피면, 이 파렴치한 짜깁기 기사들을 통해 독자들의 감정적 대중심리를 부추기는 선동의 도구로 활용한다.

즉, 정선희 인터뷰의 단면들을 악의적으로 인용배치함으로써(저널미장센), '촛불'에 대한 적대적인 대중심리를 부추기고, 정부와 한나라당의 사이버 모욕죄나 '나경원법'(일명 최진실법)을 지원하기 위한 철처한 도구로 활용한다. 그러니 시사IN 인터뷰를 자기 멋대로 모자이크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쉽게 말해 시사IN 인터뷰를 공짜로 벗겨먹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인터뷰의 취지를 자신의 정치적 당파성을 위해 멋대로 왜곡한다.

A- 정선희는 악플 안 본다. 촛불집회 때 악플 보면 못살 것 같았다”고 말했다. 정선희는 “나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 내게 댓글을 이야기하면 ‘순간 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면서 “‘아, 내가 죽어야 정리되겠구나’. 발이 빠지면 무릎을 원하고, 다시 허리를 원하는 늪과 같다. 장례식장에도 병원에 있는 동안에도 악플 이야기가 들려온다. 고스란히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전해받았다”고 말했다.

[....]

B - 정선희는 그러나 정치권에서 추진중인 사이버 모욕죄 신설등을 골자로 한 이른바 ‘최진실법’에 대해서는 “나도 진실언니 가족도 ‘최진실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데 동의하지 않는다”며 “‘최진실법’이 나올 때마다 유족 가슴이 찢어질 것이다. 진실언니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닷컴, 정선희, '사악한 유포자가 무고한 최진실 보냈다' 중에서

이런 식이다.

A. 부분이 시사IN 인터뷰 기사를 짜깁기하는 방식을 보여준다면,
B. 부분은 이 인터뷰의 취지를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여준다.

즉, 실제로 시사인 인터뷰는 다음과 같은 질문과 답변으로 마무리된다.




그런데 조선닷컴 짜깁기 기사의 결론은 이렇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 짜깁기 기사 뿐이 아니다.
다른 기사들의 제목과 결론도 악의적으로 '편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사IN 인터뷰에서 정선희가 마지막 질문에 대답한 바를 정확히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댓글이 의견 나누는 것이 아니라 마녀사냥의 도구이자 사형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막는다고 될 일인지 모르겠다. 나오지 말아야 할 싹이 나온다고 흙을 통째로 갈아엎을 수는 없는 일이다. 외국에서도 댓글을 규제하는 나라가 없다고 들었다. 문화는 거대한 호수와 같다. 어떤 미생물이나 병균이 자란다고 해서 물을 뺄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시사IN, 정선희 인터뷰 "세상은 죽은 사람도 쉬지 못하게 한다" 중에서

그러니 조선닷컴의 짜깁기 기사들은 타언론사가 고생고생해서 인터뷰한 기사를 짜깁기해서 장사해먹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인터뷰이의 전언마저 멋대로 왜곡한다. 정선희의 표현을 빌자면, 조선닷컴은 "죽은 사람도 쉬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도 부족한건지, 살아있는 사람의 취지마저 왜곡하고, 자신들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바의 철저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들에게 이제 사람의 가치, 인간의 가치는 자신들의 장사질과 선동질을 채울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평가되는 것 같다.


이건 정말 언론의 수치다.
아니 이들은 이미 언론이 아니다.


"촛불시위 사태를 촉발한 주범"으로 "인터넷 포털 '다음'"을 지목하는 조선일보는 저널리즘을 '찌라시즘'으로 전락시키는 주범이 자기 자신은 아닌지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발아점
조선일보, 불굴의 찌라시 정신 (여형사) : 이 글 읽고, 문득 궁금해져서 조선닷컴에 오랜만에 한번 가봤다... 그리고 본문에서 쓴 바와 같이 여전한 불굴의 찌라시 정신을 확인했다.


* 관련기사
시사IN, 정선희 인터뷰 "세상은 죽은 사람도 쉬지 못하게 한다"



* 이 글 제목과 주소 (불펌도 권장)
조선닷컴의 '시사IN' 벗겨먹고 왜곡하기.  http://minoci.net/625





"민노씨의 블로그에서 소개 받고 구독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민노씨의 블로그는 ㅡㅡ;이 이모티콘이 싫어 구독하지 않습니다"

블로그 개장 1주년 기념(?) 설문조사 분석 결과 중에서 (@ foog.com)


때론 정말 아주 사소한 이유가 정말 중요한 선택이나 판단에 작용하는 것도 같습니다.
물론 민노씨.네 블로그를 구독하고 구독하지 않고는 그다지 '중요한 선택'은 아니겠지만요. : )

foog.com. 개장 일주년 기념 설문에 위와 같은 응답을 해주신 응답자가 처음에는 궁시렁님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궁시렁님 방명록에 실례를 범했네요(죄송..^ ^; ). 

궁시렁님 블로그 방명록에도 남겼지만, 위와 같은 응답을 해주신 분께는 좀 야속한(ㅎㅎ?)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재밌고, 솔직한 대답이라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왠지 그 마음이 이해가 될 것도 같고요.. 물론 그렇다고 제가 억지로 이모티콘을 사용하지 않거나 할 것 같지는 않지만요. ^ ^;;

제가 자주 사용하는 이모티콘은 ㅡㅡ; 이거보다는 ㅡ.ㅡ; 이겁니다.
여기에는 작은 사연이 있는데요.
그 이모티콘을 자주 쓰던 어떤 여자를 제가 많이 좋아했거든요.
그 이모티콘을 쓸 때마다 일초나 이초쯤은 그 여자를 생각합니다.

그냥 그렇다구요. : )



* 발아점
블로그 개장 1주년 기념(?) 설문조사 분석 결과 (foog)
http://foog.com/677

궁시렁 블로그의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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