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스킨 바꿔야겠네요.
꽤 맘에 드는 디자인이었는데 말이죠.
제가 사용하는 놋치 스킨의 포스트 제목 설정이 주된 이유입니다.

그 밖에
ㄱ. 글 편집시 more/less가 표시되지 않는 점도 다소 불편하고,
ㄴ. 가장 최근글에는 글 하단 믹시업 위젯이 있어야 할 공간에 난데없이 플러그인을 다운 하라는 문구가 나오기도 하고요(이게 스킨하고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http://minoci.net/617
그동안 이것 저것 개인화(?) 하느라 손때, 시간때가 묻었는데 아쉽네요.  

지난주 올블 4주년 잔치 때 Plan9의 주성치님께서 그러시더만요.  
"민노씨가 제목이 플래시인 스킨을 사용할 줄은 몰랐다" 뭐 이런 취지였죠.

공감했습니다.
날카로운 지적이라고 생각했죠. : )

실은 스킨을 처음 쓸 때는 인식하지 못했던 문제입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포스트 제목을 돋보이게 함으로써 포스트에 대한 자존감(?)이랄까, 그런 느낌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동료블로거 입장에서 생각해보니 이게 꽤 불편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 불편의 내용은 물론, 제 글을 인용할 경우 제목 긁어붙이기가 안된다는 점 때문이죠.
그래서 몇 주 전부터는 본문 하단에 글 제목과 주소를 따로 표기하곤 하는데, 이것도 좀 귀찮을 때가 있구요. ㅡ.ㅡ;


암튼 새롭게 스킨을 바꾸려고 텍스트큐브 스킨 페이지에 갔다가 윤소정님 블로그에 갔습니다.
거기에서 이런 글을 만났네요.




서설이 길었는데, 이 글은 그저 호기심 때문에 적는 글입니다.

소정님께서 WWW을 굳이 함께 주소를 표기할 경우에 부가해달라고 '부탁'하신 사연이 궁금합니다.
링크와 인용이 갖는 의미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기에 더더욱 궁금하네요.

제가 예상하는 이유는 웹이 발명된 그 (숭고한?) 취지를 기억하기 위한 취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리웹의 링크님은 웹을 고안한 팀 버너스-리에 대해 종종 이야기하곤 하는데, 참 감동적이더만요.

그 밖에는 딱히 다른 이유가 있을지 떠오르지 않네요. ㅡ.ㅡ;
물론 소정님께서 직접 알려주시면 좋겠지만, 혹 그 사연이 짐작 가시는 분이 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정말 궁금해서요.



* 발아점

Site Link Info.






너바나나의 글을 읽고..
그냥 묻을까 싶었던 글을 이어서 쓴다.


1. 연예인의 죽음, 더욱이 그 방식이 자살이라면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당연하다. 그것도 한 시대를 풍미한 수퍼스타의 죽음이니 말해서 뭐하나. 이 관심은 당연하고, 이것은 '대중의 정당한 관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보도하는 것 역시 자연스런 저널리즘 행위다. 나는 블로기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2. 그런데 여기에 흔히 죄의식이 동반한다. 뭔가 심리적인 장애를 느낀다. 그것은 사회적인, 문화적인 압력이다. 죽음에 대해 경건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사회의 동의가 그것이다. 이런 사회심리적인 환경 속에서 '스타의 자살'은 어쩔 수 없는 양가적 반응을 낳는다. 적어도 나에겐 그렇다.

그건 말할 것도 없이 다음과 같은 마음이다.

ㄱ. (독자의 입장에선) 궁금하다. (블로거의 입장에선) 쓰고 싶다.
ㄴ. 고인과 유족을 위해 가급적 신경 끄는게 고인과 유족을 위한 예의다. 나라도 귀 닫고, 입 다물자. (이는 특히나 우리나라 저널리즘의 만연한 선정주의 환경에서 더욱 그렇다)


3. 그런데 스타라는 '사회적 공인'은 그 죽음 마저 강한 사회성을 갖기 마련이다. 공인의 행위가 갖는 상징의 크기 때문이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행위가 갖는 상징의 크기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거기에 안재환의 자살이라는 맥락 속에서 벌어진 이번 사건은 더 커다란 상징(충격과 경악)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고인과 유족을 위한 마땅한 예의로서의 존중(이것은 주로 '침묵'으로 표현된다)은 '사회적 공인'으로서의 스타에 대한 대중들의 호기심(이것은 주로 '싸구려 추리극'으로 표현된다)과 대개 충돌한다. 좀 잔인한 말이지만, 이것이 죽어도 죽지 못하는 이른바 상대적인 '불멸'을 얻은 사람들(과 그들의 유족)이 받아들여야 운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죽음에 대해 경건해야 한다는 당연한 사회적, 문화적 합의와 세속적인 호기심으로서의 대중의 관심이 정당하다는 그 양자는 어쩔 수 없이 사회적인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 특히나 사회적인 의미 소통의 매개로서 언론에게는 더더욱 이런 '균형'이 요구된다(이는 새로운 미디어로서의 블로그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살 보도 권고기준' 따위의 권고안이 가이드라인으로 존재하는 거다.


4. 자살 보도 권고기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찬찬히 음미할 만한 지적들이다.

언론은 자살에 대한 보도에서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언론의 자살 보도 방식은 자살에 영향을 미칩니다. 자살 의도를 가진 사람이 모두 이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아니며, 자살 보도가 그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자살 보도는 사람들이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자살을 고려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자살이 언론의 정당한 보도 대상이지만, 언론은 자살 보도가 청소년을 비롯한 공중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충분한 예민성과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언론인들이 자살에 대한 보도에서 아래의 권고기준을 지켜주실 것을 권고합니다.

1. 언론은 자살 보도에서 자살자와 그 유족의 사생활이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중요한 인물의 자살과 같은 공공의 정당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사건이 아닌 경우에는 자살에 대한 보도를 자제해야 합니다.

2. 언론은 자살자의 이름과 사진, 자살 장소 및 자살 방법, 자살까지의 자세한 경위를 묘사하지 않아야

3. 언론은 충분하지 않은 정보로 자살동기를 판단하는 보도를 하거나, 자살 동기를 단정적으로 보도해서는 안됩니다.

4. 언론은 자살을 영웅시 혹은 미화하거나 삶의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오해하도록 보도해서는 곤란합니다.

5. 언론이 자살 현상에 대해 보도할 때에는 확실한 자료와 출처를 인용하며,통계 수치는 주의 깊고 정확하게 해석해야 하고, 충분한 근거 없이 일반화하지 말아야 합니다.

6. 언론은 자살 사건의 보도 여부, 편집, 보도 방식과 보도 내용은 유일하게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에 입각해서 결정하며, 흥미를 유발하거나 속보 및 특종 경쟁의 수단으로 자살 사건을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 출처 : 자살 보도 권고기준



 
5. 까뮈에게 자살은 철학의 제1명제였다. 그래서 인간이 가장 먼저, 가장 최후까지 고민하고, 성찰해야 하는 화두란 세상이 정말 스스로에게 존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에밀 뒤르켐은 자살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자살론'에서 이야기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까뮈를 굳이 빌지 않더라도 '자살'은 우리의 삶을 위해 성찰해야 하고, 고민해야 하는 화두다. 그런 차원에서 자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만으로 죄의식을 불러올 필요는 없다(물론 그것은 자연스럽긴 하다). 하지만 자살은 개별적 존재의 존재론의 차원에서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뒤르켐의 지적처럼 강한 '사회성'을 갖는다. 

위 '자살 보도 권고'안에서 가장 먼저 예시하는 것처럼, "언론의 자살 보도 방식은 자살에 영향"을 미친다. '언론의 자살 보도' 그 자체가 사회적인 (외부) 사실로서 인간 내면에 투사되기 때문이다. 병원의 연못이라는 '객관적인 외부의 물질'이 자살에 직접적인 계기를 부여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뒤르켕).

어떤 스타의 자살를 통해 우리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그것이 안타깝고, 슬픈 것이긴 하지만 그 자살을 통해 우리 사회의 상처를, 결국은 우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저 침묵만 지키는 것이 고인에 대한, 유족에 대한 예의인 것은 아니다. 그 죽음을 통해 우리는 이렇게 우리를 사회를 우리 문화와 제도를 되돌아 볼 수 있는 가치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거다. 그것이 우리가 때론 증오와 질투와 시기를 보냈던, 하지만 무엇보다 큰 애정을 보냈던 그 스타의 죽음을 얻는 마지막 슬픈 선물이다.


7. 최진실 자살이 갖는 사회적인 파장, 그 좀더 현실적인 문제는 찌라시즘과 악플 문제,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인터넷정책이다. 너바나나는 이를 지적하면서, 이명박 정부의 인터넷(억압)정책에 힘을 실어주는 계기로 이 사건이 작용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공감한다. 이명박 정부는 이 사건을 악용할 소지가 크다.

정말 경솔하고, 폭력적이기 짝이 없는 악플은 물론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그 저속한 현상들은 문화의 힘으로, 좀더 자유로운 대화와 토론의 힘으로 사라져야한다. 그것이 일방적인 검열적 억압정책으로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은 정말 위험한 공권력 친화적 발상이다.

더욱이 어떤 스타의 자살이 그 '악플' 때문이라고 공격하는 고귀한 저널리즘의 자기 모순적 행태는 역겨움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언론의 선정주의적 보도행태는 어떤 의미에서는 악플을 자라게 하는("악플 호객행위") 숙주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연예 찌라시즘의 도를 지나친 선정주의적인 싸구려 추리극은 오히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좀더 비판받아 마땅하다. 악플러를 논하기 전에 자신의 행태를 스스로 되돌아보는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할테다.

이런 차원에서는 위에 언급한 '자살보도 권고 기준'에 부합하는 보도행위를 보여준 언론사들이 과연 얼마나 되지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저널리즘은 한 스타의 죽음이 갖는 사회적인 의미를 '싸구려 추리극'으로 추락시키고, 자신들의 자극적인 뉴스로 가공해, 그것을 의미없는 피상적인 호기심 상품으로 확대재생산했을 뿐이다. 그리고 더불어 짐짓 고귀한 양, 엄숙한 척 하며 일부 철없는 네티즌들의 악성 댓글을 사건의 원흉으로, 자신들의 '희생양'으로 몰고 간다.

희생양 제의는 한 사회의 유지와 존속, 그리고 그 사회의 지배적인 권력이 스스로의 정당성을 인정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행위다(르네 지라르).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그 권력의 공모자인 (지배적) 담론권력이 가담한다. 스스로의 원죄는 까맣게 잊는다. 그리고, 손쉽고 만만하며, 가시적인 악(이번 사건의 경우에는 '악플 새디스트')을 악당으로 만들어 그 무찔러야 한다고 선동한다. 자신을 숙주삼아 자라는 자신의 '자식들'을 스스로 처단해야 한다고 선동함으로써 정의의 수호자를 자칭하게 되는거다. 이건 명백하게 근친살해의 폐륜적 의식이다. 그렇게 사회의 정화를 명분 삼아(마치 전두환처럼!)굿판을 벌인다. 최진실 자살이 가장 섬뜩하게, 의미없이 '소비'되고, '재생산' 되는 과정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고인을 위해서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
악플 새디스트 때려잡는 살풀이 굿판이 고인의 유지는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좀더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사회, 서로를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는 사회를 고인은 원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진실씨, 하늘나라에서는 늘 따뜻하고, 평온하시길...



추.
이런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김현의 지적.
이건 내 자신이 처량해지면 스스로에게 종종 들려주는 말이기도 하다.


자살은 어떤 경우에도 용납될 수 없다.
살아서 별별 더러운 꼴을 다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게 삶이니까.
- 김현




* 발아점
익명이 왜? (너바나나)



* 이 글 제목과 주소
최진실 자살 단상 http://minoci.net/617


글쎄요, 그런 블로거들은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일관성이 없다는 게 가장 문제겠지요. 댓글도 승인제면 트랙백도 못 달도록 해야 하는데 그건 또 허용한단 말이지요...

단순한 이야기만 늘어 놓는 개인 공간이라면 폐쇄적으로 가거나, 로그인 하도록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소통하기 위한 공간이면 반드시 개방적이어야 합니다. (떡이떡이)

- '블로그 댓글승인, 자기보호인가? 소통거부인가?'(j준)에 달린 댓글 


나로선 좀 해괴하다.
떡이떡이 의견에는 '왜'가 빠져있다. 설명할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고 판단했거나, 혹은 그 '왜'에 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후자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후자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댓글이라서 간단히 그저 즉각적으로 반응했으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논평은 좀 심했다.  

떡이떡이 댓글에서 '그런'이 지시하는 건, j준 글 제목에서처럼 '댓글 승인'설정한  블로거다.
이건 맞겠지?

이 전제에서 판단해보자.


1.
댓글 승인제를 사용하는 블로거들은 커뮤니케이션의 일관성이 없다는게 문제겠지요. 댓글도 승인제면 트랙백도 못 달도록 해야 하는데 그건 또 허용한단 말이지요...(떡이떡이)

왜 그런가?
왜 댓글 승인하는, 그 자체로 블로거들은 블로깅 커뮤니케이션의 일관성이 사라지는건가?
나는 모른다.
당신은 알겠나?
그런데 떡이떡이는 저절로 아는 그런건가 보다.

좀더 손쉽게 예시해보자.
당신이 댓글 승인 설정을 한 블로거라고 치자.
당신은 그것만으로 블로그 커뮤니케이션의 일관성이 사라진다.
설마 당신은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나? 아니면 뭥미를 외치고 있나?
이건 기가 차서 말이 안나오는 지경이다.

도대체 왜?
왜 일관성이 사라지나?

아, '댓글 제한(승인제)'하는 블로그의 논리적 귀결은 '트랙백 제한'인데, 트랙백은 열어두고 있어서? ㅡ.ㅡ;

그러니까 왜?
트랙백만으로 소통하고 싶다는데 그게 뭘? (그건 소통이 아니야? ㅡ.ㅡ; )

댓글만 열거나, 트랙백만 열거나, 혹은 둘 모두 열거나, 혹은 둘 모두 닫거나...
이건 블로그 소통의 기술적인 얼개들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지, 그 소통의 실질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그래서 그런 소통 형식의 제한이 소통 내용에 영향을 끼칠 수는 있겠다는 점은 별론으로,  블로그 커뮤니케이션의 실질적인 무게와 부피에 대한 절대적인 평가표준이 될 수 없다. 그렇게 판단해야 할 아무런 근거도 없다. 이건 마치 장애인 차별하겠다는 발상과 유사한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다.

이런 평가는 그러니까 댓글 승인제를 쓰면서 트랙백을 열어두고 있는 블로거들은 커뮤니케이션에 장애가 있는 '이상한' 블로거가 된다고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스스로를 차별주의자로 인정하는 발언이거나, 그럴 의도가 없었다면(당연히 그럴 것 같은데) 바보선언이다.

이어지는 다른 두 줄은 더 엉뚱하다.


2.
단순한 이야기만 늘어 놓는 개인 공간이라면 폐쇄적으로 가거나, 로그인 하도록 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소통하기 위한 공간이면 반드시 개방적이어야 합니다.(떡이떡이)

이 문장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비문이다.
문장 형식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문장 의미가 그렇다.
그러니까 이 문장은 (그 의미로만 본다면) (완전한) 문장이라고 할 수가 없겠다.

하나만 질문하자.
A. 단순한 이야기만 늘어 놓는 개인 공간
B. 소통을 위한 공간

양자는 서로 대립적인가?
자연적 해석을 해보자, 위 개인공간과 소통공간을, 떡이떡이가 말했을 법한 취지를 살펴서, 의미상 분류해보자는 거자.

A. 단순한 이야기를 위한 개인공간 -> 레스토랑에서 돈까스 먹은 얘기. 옆집 순이랑 뽀뽀한 얘기 등등  (혹은 수필, 꽁트 따위)
B. 소통을 위한 공간 -> IT 얘기. 철학 얘기. 이명박 까는 얘기 등등 (논설, 논평 따위)

양자가 서로 구별되나?
돈까스 먹은 얘기하면서 소통하면 이명박이 잡아가나?
순이랑 뽀뽀한 얘기하면서 소통하면 검찰에서 기소하나?

"단순한 이야기만 늘어 놓는 개인공간"이 나는 블로그의 본질요소라고 생각하는데, 떡이떡이의 논리를 쫓자면, 이런 블로그는 폐쇄형으로 가거나, 로그인 설정하는게 좋겠다는 거다. 이런 황당한 주장을 가장 대표적인 '빠워블로거'라는 떡이떡이에게 듣게 될 줄은 난 정말 몰랐다.

그러니까 당신이 "단순한 (개인) 이야기" 하면, 당신은 '소통'과는 거리가 먼 블로거, 아니 소통과는 '정반대'편에 선 블로거니까 댓글창도 닫고, 트랙백도 닫고(왜냐하면 그렇게 해야 커뮤니케이션의 일관성이 생기니까. 이건 무슨 ㅡ.ㅡ;;), 당신이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를 통해 소통 하는 사람이라면 댓글창도 열고 (그럴 경우에는, 반드시) 트랙백도 열어야 한다고 떡이떡이는 그 짧은 네 줄의 댓글을 통해 선언하고 있다.

궤변도 이런 궤변이 없다.

하나만 더.

떡이떡이가 운영하는 블로그는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개인공간인가?
아니면 단순하지 않은 이야기 하는 소통공간인가?

달리 표현하자면, 각종의 IT 뉴스들을 속보식으로 전달하는 블로그는 '단순한 이야기'를 하는 개인 블로그인가, 아니면 소통을 하는 블로그인가? 아무래도 전자에 훨씬 더 가깝겠지. 그렇다면 떡이떡이는 댓글창도 닫고, 소통도 하면 안되겠네?

물론 농담이다.
이런 획일적 이분법은 앞서도 말했듯 전혀 의미를 갖지 못한다.
왜냐하면 블로그는 단순한 이야기든 복잡한 이야기든 자기 이야기를 하는 곳이고, 그 수준(그런데 이건 누가 평가하는건대?)이 높든 낮든, 댓글을 막아놨든, 열어놨든, 트랙백을 열어놨든, 닫아놨든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인적인 이야기를 써도, 그 사적인 이야기에서 '공적인 의미'(통했다거나, 그 반대이거나 등등)를 독자들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좀더 심각하게 이야기하자면, 과연 미디어 수용자들이 얻어가는 '가치'있는 정보란 무엇이고, 소통의 재료란 과연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관한 심대한 논쟁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중대한 논점을 내포한 심각한 문제를 단 네줄로 정리해버리는 떡이떡이의 재주가 놀랍기는 하다.

다시 강조하자.
본질적으로 블로그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는다.
블로그는 자기관여적이고, 자기투사적인 주관성이 깊이 내재된 글을 쓴다는 점에서 '개인적인 공간'이지만, 기존의 저널리즘의 객관성이 표상하는 가짜 담론(그 당파성의 기만)을 깨뜨리는 미디어적 의미, 대안적인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는 점에서, 그리고 새로운 웹 콘텐츠의 생산 소비 유통방식을 생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공적이다.

블로그를 타성에 젖은 기계적 개념으로 재단하려는 태도는 블로거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 이 글의 공격적 표현은 의도적이다.
떡이떡이의 반론은 물론이고, 다른 블로거 동료들의 반론을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 관련글
댓글 승인제에 대해


* 발아점
'블로그 댓글승인, 자기보호인가? 소통거부인가?'(j준)에 달린 댓글 


* 이 글 제목과 주소
떡이떡이의 궤변에 대해 : 댓글 승인제2. http://minoci.net/616




 * 2 이하 부분은 예전에 썼던 글 추고.

1. 최근 강의석 알몸 퍼포먼스에 대해
말이 많더라. 나는 강의석 식의 퍼포먼스에 대해선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강의석 알몸 퍼포먼스는 말그대로 해프닝이라는 직관적인 감상이 강하다. 생기발랄하다 못해 미디어 노출증 환자라는 생각이 들 지경인 그 청년은 이 복잡하기 짝이 없는 '병역제도'가 갖는 사회적인, 역사적인, 정치적인 함의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다만 강의석 퍼포먼스에서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지점은 대중이, 특히 아직 군대가지 않은 청년들이 '병역의무'에 대해 갖는 양가적인 반응이다. 그 양가적인 반응은 대내적으론 '안가면 좋지'라는 지극히 소박한 이기심으로 표출되고, 대외적으론 '저런 개념없는 매국노 새퀴를 봤나'라는 다소 감정적인 공격성으로 표출되곤 한다.

물론 소수에게는 군대제도(문화) 전반에 대한 관념적인 거부가 표출되기도 한다. 강의석이 주장하는게 이런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거부인데, 그 거부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방식의 피상성은 제도 그 자체가 아니라 강의석이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표상적 욕망에 이끌리는 것 같다.

더욱이 그 청년이 기존에 보여준 행위의 괘적을 살피건대, 이런 거대한 이상이 그의 표피적인 퍼포먼스에 이끌려서 공론화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공론화는 차치하고, 최소한의 문제적인 인식을 전해주지도 못할 것 같다. 좀더 부정적으로 평가하자면, 병역 문제 자체를 희화화해서 그 문제의 본질을 흐릴 가능성이 오히려 높지 않나 싶다.


2. 양심적 병역 거부자? 대안적 병역 희망자!
언젠가 친구과 심한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그 친구는 종교나 양심을 '핑계삼아' 병역의무를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로선 '양심적'이든 '비양심적'이든 왜, 도대체 왜 병역'거부자'로 그들을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다. '병역'개념을 확장할 수 있다면, 그들 중 대부분은 ('집총'을 제외한 병역의무의 영역에서) 병역희망자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러니 내 질문은 이렇다. '병역'이란 의미에 군사훈련과 집총훈련이 개념 필요적으로 포함되어야만 하는가?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군대 그 자체를 거부하는 청년들을 제외한 대체복무 희망자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라고 부르기 보다는 그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대안적 병역희망자'로 불러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특정 언어표현에 투영된 편견과 선입견은 놀라운 것이어서 양심적이든 아니든 간에 '병역거부'라는 표현은 그 표현을 사용하는 언어사용자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영향력을 투사하기 마련이다.

병역문제도 이런 단계적인 접근을 통해서 그 문제를 풀어가야 하지 않나 싶다. 강의석 식 퍼포먼스의 휘발성 강한 관념적 거부로는 이 문제는 눈꼽만큼도 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찌라시즘에게 먹이감 하나 던져주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그리고 대다수 수용자들에게 그 퍼포먼스는 미디어 노출증 환장의 지랄발광 해프닝으로 기억될테다 (실질이 없으니 그렇게 해석할 수 밖에 없긴 하다). 


2-1. 위 2.에 대한 댓글 논평과 대화.

그렇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헌법학을 전공하는 사람입니다마는 원래 대안적 해결이란 말은 선택(alternative)의 여지를 준다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전문용어로는 대안식 해결방법[Alternativenloesung]이라고 합니다. 독일에서 확립된 대안식 해결방법의 기본정신은 양심상의 이유로 병역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병역거부자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 병역을 대신하겠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님의 지적이 정확합니다. 그들은 결코 국방의 의무로서의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병역 중 총을 들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하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대체복무 희망자"라고 불러야 옳습니다. (꿈꾸는 오리)


2-2. 김연식과 꿈꾸는 오리 간 댓글 대화
제가 알기로는 기본권 충돌은 기본적으로 형량을 합니다. 그래서 더 큰 쪽을 택하기도 합니다. 또한 양자의 법익을 만족할만한 새로운 대안을 내 놓기도 하지요. 양자의 법익을 조정해서 조화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번 인권위 입장은 비교형량을 통해서 양자의 법익을 0으로 만들지 않는 상태에서 조화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습니다. 그 조화점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인권위가 하나의 '입장'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논의가 더 필요하겠지요. (김연식)

국가인권위원회가 말한 기본권과 의무의 충돌과 님이 말씀하시는 용어의 선택문제는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단지 현재 용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에 이르고 있을 뿐입니다. 대안을 제시하기 이전이냐 이후냐에 따라 용어설명이 달라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 또 헌법학에서 충돌은 그렇게 엄격한 의미로 사용되는 말은 아닙니다. 어쨌든 좋은 의견.. 좋은 글이십니다. (꿈꾸는 오리)




미디어토크 40회를 녹음했습니다(벌써 40회네요. ㅡ.ㅡ;).
이제 가급적 홍보 겸 요약정리(혹은 후기)를 겸해서 미디어토크에서 다룬 이야기를 간단히 써볼까 합니다(물론 게으러서...계속 꾸준히 쓸 수 있으려나 모르겠지만요. ㅡ.ㅡ;).
이번주 미디어토크에서는 이야기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지상파 시사보도물의 폐지 및 축소 움직임 (~21:30)

언론에 대한 탄압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이명박 정부 하의 언론정책이 더더욱 노골적으로 진행중입니다. 물론 합법의 탈을 쓰기는 했을테죠, 그리고 방송사 내부의 자율적인 (조직)개편이라고 억지를 부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으론 이명박 정부의 언론 장악 음모의 실천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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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중심에 선 시사투나잇은 (팟캐스트 녹음 당시에는) 폐지가 확정되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네요. 다만 앞으로 시사보도물의 폐지와 (편성시간에 의한 실질적인) 축소는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은 것 같습니다.

링크님은 이명박 정부의 행태를 '탈레반'에 비유하는군요.

저는 소위 '뉴스'로 불리는 것들, 특히나 기존 저널리즘에서 '뉴스'로 선택되는 것들에 대해 불만이 없지 않지만, 사회성원이 마땅히 접해야 하는 공적인 이야기들이 있고, 이것은 사회에 필수적입니다. 정부가 이를 자신들의 정략적인 목적 하에 의도적으로 축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방송 콘텐츠의 연성화(물론 경성화를 찬성하는 것은 아니지만)는 이미 지나친 수준이라고 평가하는데(버라이어티, 드라마천국), 여기에 더해서 시사보도물을 축소한다는 것은 공영방송의 공적인 역할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던지기에 충분하지 않나 싶습니다.

당장 사람 죽고 사는 일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이렇게 무관심할지도 모르죠(살기도 팍팍한데.. ㅡ.ㅡ; ). 여기에는 기존 방송사들에 대한 자기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하지만 이게 남의 얘기가 아니라, 우리 얘기입니다.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블로거들이 글 한방 써주시면 좋겠습니다. 




2.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회의중 이명박의 발언 (~33:47)

이명박 대통령이 '법질서'를 강조하는 발언을 하셨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명박씨가 법질서 강조하면 웃음부터 나옵니다. 물론 우중충한 웃음이죠. 정말 씁쓸합니다. 범인은닉하고, 자녀 위장채용하며, 위장전입 하는 분은 대통령이 되서 법질서 강조하니까 뭐랄까... 코믹한겁니다.

그 법질서 강조의 '대상'은 '네티즌'입니다.
'사이버모욕죄' 기필코 만들어야겠다는 의지를 확인하셨네요.

다시 강조하지만, 이건 정말 있어서는 안되는 과잉입법입니다.
시민들 입막고, 언로를 틀어쥐고, 무슨 놈의 자유로운 토론과 상상력이 발아될 수 있겠습니까?

이명박 정부는 피상적으론 법질서를 외칩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론 그 법(취지)이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에 반하는 짓만 합니다.



특히 위 미디어오늘 기사를 보면,
국가경쟁력강화위는 “불법 폭력시위 등을 극복하고, 법질서가 확립될 경우 우리나라 브랜드 가치가 크게 개선될 것으로 전망된다”면서 “국가 브랜드가치가 일본수준일 경우 6배, 미국 수준일 경우 26배 증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하는데요.
도무지 뭘 근거로 그런 소리를 하는건지 정말 궁금하네요. ㅡ.ㅡ;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국가경쟁력 위원회는 폐지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3. 민주주의 2.0. (~40:30)

위 주제에 대해선 다음글을 참조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민주주의 2.0 단상 : 차라리 블로거 노무현을 보고싶다.




* 미디어토크 40회

공중파 미디어 비평 프로그램 폐지 외

위 링크를 통해 직접 들으실 수 있고, 다운 받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