쨔스, 댓글로 하루를 살다.

2008/09/30 14:22
쨔스.
그녀가 쓰는 필명이다.
'자스민'에서 민을 빼고, 쨔스라고 부르기로 했단다.
그건 나에겐 내밀한 수줍음 같은 느낌인데, 나는 그게 뭔지 알 것 같다.
때론 내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어색하거나, 부끄럽게 느껴질 때가 있으니까.

사람은 균형을 취하려고 노력하는 존재라서, 유년의 왕국 속에 있는 '얼굴 빨개지는 아이'는 때론 얼음처럼 차갑거나, 봄날 꽃내음처럼 활달한 청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물론 그 유년의 찰나들 속에 있는 아이는 문득 문득 떠오르긴 할테지만...

나는 그녀를 잘 모른다.
그녀가 삼성전기에 근무한다는 것.
공포영화, 그것도 하드고어류의 영화를 좋아하는 것. ^ ^;
인사동에 가끔씩 들르는 맛좋은 찻집을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아주 의미있는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

그녀가 다니는 직장은 앞서 말했듯 삼성이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대한민국 최고 직장, 삼성.
'또 하나의 가족' 삼성에서 그녀는 심한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
상사의 성희롱을 알렸기 때문에, "청바지 입은 여직원은 성희롱 해도 되는"(프레시안) 직장상사가 있는, 혹은 그런 조직문화가 상존하는 그 '가족스러운 직장'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아니 우리가 날마다 학습하고, 권장하는 편견과 무관심은 우리들의 '생존 특허'니까...

그런 이유들 때문에...
그녀는,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왕따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겨레블로그에 둥지를 마련한 그녀를 필벗들과 만났다.
한참 전인데, 나는 이제야 그녀에 대해서, 그녀의 싸움에 대해 쓴다.
게으름 때문에, 내 고민도 천지삐까리라서, 이런 저런 이유들 때문에... 이제야 쓰는거다.
이 글이 무슨 대단한 글이라고...      

그 필벗 모임에서 그녀가 남긴 한마디가 잊혀지지 않는다.

"블로거 친구들이 남겨주는 댓글 하나 하나가 하루를 버티게 하는 힘이 되었어요."

나는 그게 어떤 건지 조금은 안다.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까.
아주 조금은 그 외로움이 뭔지 안다.

외로운 어떤 날.
댓글 하나의 온기로 하루를 버티는...
그 마음까지를 내가 모두 안다고 하면...
나는 알 것도 같다고 이야기하고 싶지만...
왜냐하면, 그건 내 이야기이기도 하니까...
아니 지랄같이 외로운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지도 모르니까...


물론 지금, 그녀는 아주 씩씩해졌다. : )


쨔스!
이렇게 마음 속으로 이름을 부르니, 마치 기러기 이름같다.


함께,
멀리 함께,
날아오르자, 쨔스!




추.
이 글이 그녀에게 또 다른 편견을 만들어내는 글이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생긴다.
이 글은 그저 그녀에 대한 내 소박한 체험이고, 그 체험이 그려준 감상과 공감의 표현일 뿐이다.
이 글을 읽고 그녀에 대해 편견이나 선입견이 생긴다면, 그건 오로지 표현이 부족해서다.
나는 그저 함께, 이야기하고, 웃고, 때론 슬퍼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고,
그리고 당신이, 아니 우리가 우리들이 만들어놓은 편견과 무관심과 게으름의 사슬에서 가끔씩 벗어나서, 그녀와, 아니 그녀'들'과, 그러므로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 관련 추천기사
"청바지 입은 여직원은 성희롱 해도 되나요" (프레시안, 2008. 8. 19) : 인터뷰.
인권위 "삼성전기, 직장내 성희롱 철저히 대처해야", 이은의씨의 '작은 결실' (프레시안, 2008. 9. 10) : 인권위 권고
자신과 같은 문제를 겪을 지 모를 다른 많은 여성 직장인들을 위해 스스로 겪은 일을 적극적으로 알려왔던 그의 노력이 최근 작은 결실을 맺었다.
그리고 현재 그녀는 1심(민사)을 진행중이다.


* 쨔스의 블로그
사회문화게릴라, '할 말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http://blog.hani.co.kr/pjasmine/  
 

* 끝으로, 블로거들께서는 이 주제에 대해 아주 조금만 관심을 갖고 글 하나 쓰시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 ) 블로그로 할 수 있는 가장 의미있는 이야기는 무슨 대단히 대단히 어렵거나, 전문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내 옆에 있는 이웃들과 그 이웃들이 맞닥뜨리는 현실에 대해 함께 목소리를 보태면서, 함께 힘내자고, 응원하는 그 마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네요. 그저 친구로서 말이죠.


* 관련 추천글
나 또한 죄가 많다 (mindfree)
쨔스, 성희롱, 그리고 인권
(xarm)


* 이 글 제목과 주소
쨔스, 댓글로 하루를 살다. http://minoci.net/613
 




최진실 일발 장전 : 코믹하고, 섬뜩한...

2008/09/30 12:38
안재환 이슈에 대해선 가급적 피하고 싶었고, 호기심이 일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굳이 읽지 않았다.
그게 왠지 고인에 대한, 유족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고, 찌라시즘에 대한 나름의 방어책(관심 끊는게 남는겨)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웝서핑을 하다보면 어찌어찌하다 내가 원하지 않는 웹사이트(주로 수구언론사닷컴)에 가게 되고, 그 사이트 사이드바에 '장전된'(말 그대로 '총알 장전') 자극적인 기사들과 화보들이 눈길을 잡는다.

그러다가 굳이 피해왔던 안재환 이슈들을 훑어보게 되었고, 최진실을 만났다.
그 소문 무성한 '사채'가 최진실 수중에서 흘러나왔다는 별 내용없는 기사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스포츠조선닷컴 DB에 저장된 최진실 사진이 저 엽기발랄한 사진 뿐이라면, 내가 오버하고, 괜히 혼자만 엄숙한 척 지랄옆차기 한 거 맞다. 하지만 아니라면, 이게 도무지 무슨 생각으로 저런 사진을 이런 기사에 굳이 올렸는지 알 길 없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문학평론가가 그랬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죽음 앞에선 경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비단 저 '우연한' 사진만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다.
찌라시즘은 죽음마저 엽기발랄하게 소비한다.
찌라시즘에게 죽음은 가장 싱싱한 먹이다.




댓글 승인제에 대해

2008/09/29 21:17
블로거가 댓글의 폭력성에 환멸을 느껴 승인제를 한다는 것도 의사가 피를 보고 기절한다는 것만큼 웃기는 일이다. 어떻게 댓글에 경끼를 느끼는 사람이 글을 쓸 수 있단 말인가? [....] 블로그뉴스의 댓글 차단 블로거 개인의 선택사항 아니다. 무조건 열고 관리해야하는 것이다. 그게 블로그 기사를 쓰는 사람들의 책임이고 의무다.
- 커서, 블로그 댓글 차단, 블로거 개인의 판단사항인가?

0. 나는 댓글 승인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댓글승인제를 운영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개별 블로거가 결정할 사항이다. 그러니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댓글을 열어두고 말고는(댓글승인제 당연 포함) 그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가 결정할 문제고, 그 블로그 운영상의 정책사항이라고 생각한다. '정책'이라고 표현한 건, 댓글 승인제는 반드시 사라져야 하는 '선/악'판단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의미다. 물론 그 정책에 대해서 달리 가치평가를 할 수야 있겠지만 말이다. 그 정책선택에 대한 장단점을 논하는 것은 추후 문제다.


1. 댓글 승인제(혹은 댓글을 원천 차단한 블로그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꽤 단순한 문제지만, 또 관점에 따라서는 복잡한 문제인 것처럼 착각할 수도 있는 문제다. 그 복잡성이 위 인용한 글처럼 개념의 혼동이나, 공격적인 감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의문.

A.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때문에 댓글 승인제 마음에 안든다(혹은 문제있다).
여기까지야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이겠지만,

B. 댓글 승인제 맘에 안든다, (그래서) 옳지 못하다.
이건 전혀 다른 문제다.

위에 인용한 커서 글을 예시로 한다면, 좀 너무 멀리 간 것 같다(A보다는 B에 가깝다). 물론 심정적으로 공감하지 않는 바 없다(앞서 말했듯 나는 댓글승인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주장이 너무 필요이상으로 공격적이고, 자신이 지적하는 문제가 담고 있는 (의미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무슨 편가르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감정에 호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리적인 근거나 설득력있는 자료들이 주장만큼 제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글 중간 중간의 논리적인 비약은 다소 심한 것 같다.

위 인용된 글에 표현된, 혹은 종종 커서의 글에 나타나는 오류에 대해 (다소 무책임하게, 커서식으로 표현하자면), 모르면 그냥 모르는 채로 소박하게 쓰는 것도 좋다(나처럼. ㅡ.ㅡ; 물론 어떤 고귀한 블로거들에게는 나 역시도 훈장질하는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 가끔 너무 주장이 근거의 한계를 훨씬 뛰어넘는 글을 쓰곤 하는데, 그건 '픽션'에 어울리는 형식이지, 논평이나 논설에 어울리는 형식은 전혀 아니다.

2. 저널리즘과 블로기즘의 혼동
블로그는 자기관여적 주관성을 그 본질로 한다는 점에서 '객관성'(최소한 현대의 정론지 모델의 저널리즘이 표방하는)을 본질로 하는 저널리즘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저널리즘은 여전히 생성하고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가진 역사적인 개념이다. 블로기즘은 더더욱 이제 막 '탄생'하고 개념이다. 이를 감안하더라도 '블로거의 개성있는 목소리'는 앞으로도 지워질 수 없는 블로기즘의 본질요소라고 나는 믿는다.

이런 본질적인 차이점 때문에 블로그 콘텐츠의 유통모델이 저널리즘 생산물과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주장도 의심스럽지만, 일개 기업이 운영하는 아리까리한 메타블로그(다음 블로거뉴스)의 정책을 위해 어떤 개인의 블로그 운영정책이 종속되어야 한다는(혹은 그 '간택'의 평가표준이 되어야 한다는) 감상적인 편견에 의한 일방적인 성토는 더더욱 이상하다.
(* 참조 추천글. September 16, 2003. 아거, Why is Fark.com not a blog?: The Blog should have a discernible human voice. )

위 커서의 글에 대해 굳이 비판하는 이유는 댓글 승인제 '좋다/싫다'라는 문제를 저널리즘의 문제, 블로기즘의 문제와 연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실상 그 글은 저널리즘과 블로기즘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과도 그다지 가깝지 않은 글이라서...). 그리고 개인적으론 알 수 없는 '유사 저널리즘'으로 블로기즘의 가치를 왜곡하고 있는(물론 기여하는 부분도 없지는 않겠으나) 다음 블로거뉴스의 정책에 대한 조언으로 자신의 과도한 주장을 끼워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는거다.

커서는 지금 자신이 하고 싶은 주장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승인제 싫어!).
하지만 그 주장의 근거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제대로 된 비판이 될 가능성은 점점더 희박해진다.
소통하지 않는다면 블로거의 기사가 아니다. 언론사의 기사도 아니다. 자신만의 주장일뿐이다. 소통없는 주장만으로 주요한 기사 대접받는다면 소통에 공을 들이는 다른 블로거들은 얼마나 허탈하겠는가? 이런 식이라면 누가 쓸데없이 블로그의 소통에 시간을 들이겠는가? 블로그뉴스의 댓글 차단 블로거 개인의 선택사항 아니다. 무조건 열고 관리해야하는 것이다. 그게 블로그 기사를 쓰는 사람들의 책임이고 의무다. (커서)

커서 글의 결론이다.
좀 작정하고 노골적으로 지적하자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거다.
ㄱ. 댓글창 막고 다음 블로거뉴스에 송고하는 '인기있는'(ㅡ.ㅡ;) 블로거들을 단속해달라!
ㄴ. (왜냐하면) (나처럼 댓글창 열어두고) 소통하는(!!) 블로거들과의 형평을 위해서 말이다.

블로그를 통해 생산하는 글을 '기사'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몹시 의문이지만, '댓글'을 차단하거나, 혹은 제한(승인제)한다고 해서 그런 블로그의 글이 다음 블로거뉴스(블로거+뉴스라는 이상한 이름처럼. 덧. 자기들도 오죽하면 이름을 바꾸겠다고 하겠나?)를 통해 유통되지 않도록 '기사의 평가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은 더 이상하다.

3. 블로그에서의 소통 방법 : 미시적인 접근

나는 댓글을 통한 순발력있는 소통도 좋아한다. 하지만 댓글은 블로그를 통한 소통의 '한 방법'일 뿐이지, 그것이 전부이거나, 혹은 그 방법을 '제한'한다고 해서 그 블로그가 소통하고 있지 않다거나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이런 과격한 주장이야 말로 소통을 '강요하는', 그래서 결국은 불통할 수 밖에 없는, 넌센스 같다.

ㄱ. 블로그는 그 글을 '공개'함으로써 이미 '소통'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의미의 소통'이란 어떤 타인의 의견이 '나'에게 전해짐으로써 생겨나는 것이고, 이런 의미 전달이 가장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댓글을 통해 그 의미가 좀더 적극적으로 키워지는 것은 별론으로, 그 블로그가 '댓글만 차단'하고 있다면, (독자로서는) 다른 방법으로 소통을 시도할 수도 있다(가령 트랙백이나, 이메일 등등).

ㄴ. 블로그상의 가장 강력한 소통 기제는, 그것 굳이 블로그상의 기술적인 얼개들로 예시해야 한다면, '댓글'이나 '트랙백'이라기 보다는(물론 이런 소통 기제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링크'다.  링크와 인용은 가장 추천할 만한 소통의 방법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이 경우는 해당 블로그의 독자가 블로거인 경우에, 혹은 적어도 게시판을 통해 글을 작성하는 경우에만 의미를 갖게 된다.

ㄷ. 즉, (독자가 블로그를 운영하지 않는) '순수한 독자'인 경우에, 댓글창을 막는 건, 혹은 댓글 승인 정책을 사용하는 건 문제가 될 수 있고, 실제로 답답하거나, 그렇게 댓글을 막거나 승인정책을 사용하는 블로그에 대해 정당한 판단의 재료로써 그 댓글 차단이나 승인제가 판단재료로 사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그 독자들 각자가 판단할 문제지, 댓글을 차단하거나, 이를 승인제로 한다고 해서 무슨 댓글을 차단하면 안된다는 둥, 블로거의 의무이자 책임이라는 둥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건지는 몹시 의문이다.


추.
서비스형 블로그 차원의 댓글 정책(가량 네이버나 이글루스, 한겨레 블로그 등등에서 댓글 로긴제도를 사용한다거나 하는)에 대해서는 좀더 생각해볼 여지가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런 선택권(특히 네이버와 이글루스, 한겨레 블로그 등등에서의 '댓글 로긴' 정책)를 '굳이' 블로거에게 부여하는 정책이 왜(도무지 왜!!) 필요한 정책인지에 대해선 좀 비판적이다.


* 대상글
블로그 댓글 차단, 블로거 개인의 판단 사항인가? (거다란, 커서)

* 참조 추천.
Why is Fark.com not a blog?: The Blog should have a discernible human voice. (아거)

* 관련 추천.
블로그 댓글승인, 자기보호인가? 소통거부인가? (J준) : 합리적이고, 무난한 지적인 것 같다.



"적대적 공생"과 이승환님의 "강의석과 기존 언론의 공통점"은 상당 부분 맞닿아있는 셈이겠구요. 헌데 이 대목에서 제가 한 고민은, 그럼 이 구도를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 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로, 이런 부분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차원에서 "악플 호객행위"라는 말은 유효하지 않아보였기에, 한 말씀 드린 것입니다.

저 말이 가리키는 것은 아마도, 지엽적인 것을 중요한 것으로 부풀려 그것을 선정적으로 고발하는 보도 행태일 텐데요, 제가 볼 때 강의석씨가 가진 언행의 결격은 "지엽적"인 거라고 할 수 없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남은 부분은 '선정적인 고발'이 될텐데, 분명 최근의 강의석씨 기사에는 그런 부분이 있지요. 하지만 이런 고발 역시, 저널리즘의 중요한 전략이나 기능의 일부로 비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그로 인한 피해는 뚜렷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선정적인 고발' 자체를 공박하는 건 효과적인 전략이 아닌 것 같습니다. 너무 광범위한 지적이기 때문에, 역으로 유효하기가 힘들다고 할까요. 다시 말해, (의도가 그렇진 않으셨겠지만)언론의 속성에 대해 지나치게 근본주의적인 비평을 가하고 계신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근본주의적인 비평은 '근본'적인 만큼 너무도 많은 부분을 타격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그 대상은 보수언론으로든, 진보언론으로든, 어디로든 흐를 수 있습니다. 여기 1인미디어도 예외는 아니죠.

'선정적인 고발'에 대한 근본주의적 비평이 어디까지 확장, 적용될 수 있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악플 호객행위"란 말이, 현 상황의 어떤 특수한 부분을 속시원히 표현하는 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뒤집어 어떤 상황을 '고발하는 데에만' 그치는 개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민노씨께서 예를 들어주신 "적대적 공범"관계의 "역할극"이라 불릴 만한 특정 언론 보도의 패턴 역시, 어떤 의미에선 무엇을 '고발'하는 데에만 그치는 데에서 비롯된 게 아닐런지요.

"악플 호객행위"라는 말의 내용이 "역할극"으로 전락하는 언론보도 행태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데 반해, "악플 호객행위"라는 말 속에 깃든 선동적인 어투나 고발의 구조는, "역할극"이라는 말이 가리키고 있는 언론 보도 형태의 근간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는 이 말의 내용과 형식 사이에서 어떤 당착을 느꼈던 것입니다.

-
cryingkid, '강의석, 찌라시즘, 악플 호객행위'에 대한 논평 중에서

예리하고, 열정적인 논평에 우선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 )  우선 논평하신 대상글은 현상에 대한 단순한 비판을 목적으로 한 글입니다. 글의 물리적인 부피로 봐도 그렇구요. 이에 대해선 이하에서 좀더 풀어쓰고자 합니다.


1. 논평하신 주제에 대해 좀더 일단 생각나는대로 쓰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선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제가 볼 때 강의석씨가 가진 언행의 결격은 "지엽적"인 거라고 할 수 없는 듯합니다." 특히 '결격'의 의미가 문장 내에서(문맥상으로도) 명료하게 이해되지 않는데요. 제 글은 이런 제한적 이해의 전제에서 드리는 대답입니다.

2. 공론화할 수 있는 소재와 가치의 차원
강의석을 통해 공론화되는(그럴 가능성이 높은) 이슈의 중요성(가령 병역문제)에 대해선 저 역시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의 차원에서 그 이슈를 밀어붙이고 나가기에 너무도 허술하다는 것이 문제겠죠. 강의석의 언술이나 그를 인용하고, 재활용하는 언술 모두요. 강의석의 엉뚱한 논리전개는 그렇다고치고, 강의석을 '희생양' 삼는 찌라시즘 기사들 역시 강의석이 구사하는 논리를 그대로 전달하거나(그래서 그대로 답습하거나), 혹은 오히려 그 수준을 더더욱 저열한 것으로 표피화시킵니다. 그런 차원에서는 그 의미를 좀더 효과적으로 공론화시키겠다는 의미에서의 '선동적인' 전략이 갖는 의미는 현저하게 그 가치를 상실한다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선정주의 자체가 목적인 고발 vs. 방법론적 전략으로서의 선정주의적 고발
선정성, 선동성이 물론 가장 쉽고, 유효한 대공중 전략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어떤 이슈의 중요성을 자각한 노련한 담론생산자의 철학적 원칙을 견지한 방법론일 수도 있을 겁니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좀더 많은 눈과 귀를 붙들기 위해 벌이는 직업적으로 숙련된 찌라시즘 전공자들의 '기술'일 수도 있구요. 이런 일반의 방법론을 인정하지 말자라고 제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따라서 후술할 '이율배반'은 이런 차원의 이율배반은 아닙니다.

고발의 선정성과 고발의 전략적인 방법론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전략적인 방법론으로서 '선정성' 혹은 '선동성'이 채택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 역으로 '선정성'이 전략적인 방법론과 등가로 교환되는 것은 또 아니죠. 그것은 선동과 선정성을 활용하는 그 개개의 상황과 개개의 구체적인 조건들에 따라 달리 평가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건대, '강의석'류가 생성하는 이슈는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 이슈를 끌고 갈만큼의 최소한의 문제제기, 혹은 담론으로서의 생명력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때문에 여기에 '선정성'을 방법론으로 더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슈는 재밌는 이슈도 아니기 때문입니다(유희가치도 별로 없다는 겁니다). 그 이슈는 그 어떤 중요성도 갖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리죠. 그리고 그 이슈를 띄우기 위한 전략 역시도 유효하지 못한 전략일테구요.

위와 같은 판단하에서 제 짧은 글은 그 '무의미'를 표피적으로 화장 떡칠해서 팔아먹는 그 '행태'와 '경향'에 대한 단순한 비판 목적을 갖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선정적 고발'에 대한 공격이 갖는 단순한 취지, 그 이후의 '대안'을 언급하시는 부분은 이 글의 원래 취지와는 다소 먼 이야기이긴 합니다.  다만 이에 대해서 좀더 이야기해보죠.

4. "근본주의적 비평"...이 아니라 그냥 인상비평입니다.
'근본주의적 비평'이라고 제 짧은 글을 폼나게(? ㅡ.ㅡ;)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만, 제 글은 그저 즉각적인 인상비평에 가까운 글입니다. 이것을 저는 긍정합니다. 논평해주신 제 글은 20분 안쪽에서 쓰여진 글이고, 여기에 어떤 새로운 고민이나, 혹은 이전에 했던 고민들을 다시 회고적으로 성찰하거나, 그 고민의 재료들을 다시 전략적으로 조합하거나, 이런 논리조작은 전혀 없습니다.

쉽게 말해서 말씀해주신 그런 깊이 있는 '대안'에 대한 제 나름의 고민을 담은 글이 아닙니다. 명징한 상징으로서 호밀(intherye)님께서 말씀해주신 '악플 호객행위'라는 말을 나름으로 널리 알리고 싶어서 쓴 글입니다. ㅡ.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해주신 부분에 대해 간략히나마 제 입장을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말미의 이율배반에 대해선, 저로선 다소 강하게 항변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물론 그 취지에 대해선 제가 기존에 써왔던 주제 혹은 이야기와 매우 닮아 있고, 또 제가 그런 이율배반에 대해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말씀해주신 취지는 충분히 알겠습니다.  하지만 다소 착오가 계신 것 같습니다. 누구나 착오가 있기 마련이고, 그 착오가 때로는 창조적인 오독인 경우도 있겠지만요. ^ ^;

ㄱ. "악플 호객행위"는 선정적인 외피를 갖고 있을지언정 그 안에 담겨진 함의가 적어도 (극복되어야 하는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진실'을 내재하고 있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때문에 같은 비교 대상으로 말씀해주신 '언론의 역할극'(에서 드러나는 선동과 선정주의)와는 그다지 큰 관계가 없는 언어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는 그 현상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기 위한 '비판언어'로 평가해야 마땅하지, 그것이 갖는 표현의 강도만으로 언론의 선정주의나 역할극에서 등장하는 과도한 선입견의 언어로 평가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ㄴ. 그리고 좀 다른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텐데, '언론의 역할극'은 그 자체로 반드시 비판되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역할극'이라고 표현하는 대개의 문맥은 대한민국 언론이 갖는 과도한 정치적인 당파와 집단적인 이기주의, 그리고 동업자 의식 속에서 그 담론생산자(집단)의 '정치, 경제적 위치와 조건'과 괴리된 담론생산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언론은 언제어디에서나 나름의 역할극을 벌여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은 대체로 '계급적인 특징'을 강하게 갖는 역할극이었겠죠. 그 역할극의 배우가 자신의 물적 존재근거를 배반하거나, 혹은 그것을 애써 외면하는 양상들이랄까요? 그런 것들이 저는 너무 너무 가증스럽거나, 혹은 그냥 (정서적으로 너무) 싫었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완전하게 자유로운 사람은 없겠지만요.

가령 오마이뉴스는 진보적인 매체입니까? 아니면 보수적인 매체입니까? 오마이의 선동주의와 모험주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오마이의 생존 전략이 과도하게 변질된 형태입니까?  물론 오마이 전체(여기에서는 오마이를 '한겨레'와 바꿔 불러도 무방합니다)를 추상적으로 일반화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다소 부당하다는 것은 압니다만, 최근 오마이뉴스 오연호씨가 말한 '연립주택론'(촛불 마케팅?의 일환으로써 블로그의 미디어적 가능성을 논한 글에서)은 거기에 분명히 진정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언론기업으로서의 '오마이'에 대한 비지니스적 욕구를 상당히 반영하고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그것은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에는 블로그가 갖는 미디어적 잠재력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런 이상한 비유를 오연호씨가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읽기에는 좀 웃겼습니다.

왜냐하면 오연호씨는 스스로를 무슨 민주주의 투사로, 민주주의를 위한 미디어의 선구자로 규정하고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보다 앞서 언론사 CEO로서의 욕구를 좀더 강하게 그 글에서 담고 있다고 저는 느꼈고, 또 그렇게 그 글 자체를 읽었을 때 그렇게 (이성적으로) 평가했기 때문에 그 양자간의 이율배반은 생산적인 '긴장'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화"(홍세화씨의 식상한 레퍼토리이긴 하지만)의 제스처, 그 연장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전적으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요.

즉흥적으로 생각나는대로 쓰는 글이라서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제대로 전달되는지 매우 걱정스럽습니다만, 제가 생각하기엔 이렇다는 것입니다.  불가피한 자기 배반은 누구에게나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존재가 향하는 존재론적 지향을 고려하셔야 합니다.  누구나 자기를 기만하고, 자기를 속이고, 또 그렇게 이율배반의 삶을 삽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실존과 현상을 내용과 형식을 완벽하게 일치시키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겠죠.

다만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그 '이율배반' 자체가 갖는 (본질적인) 모순이 아니라, 그 이율배반이 어쩔 수 없이 불러오는 '갈등'과 '긴장'입니다. 그 갈등과 긴장 속에서 이 비참한 세계가 '나와 너'로 이어져 있다는 공동체적 소망을 끝끝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 최후의 비전은 공동체적인 상상력과 개인의 이기심, 그리고 그 이기심을 구성하는 욕망을 서로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다소 추상적이 되는데, 간단히 다시 되돌아가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악플 호객행위'는 어떤 대한민국 저널리즘(찌라시즘)과 이를 둘러싼 시스템의 메카니즘이 갖는 구조적 경향에 대한 단순한 묘사, 혹은 상징적 지적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좀더 견고하게 그 현상의 의미를 포착하고, 붙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하신 것처럼 극복과 대안을 담은 구체적인 방법론이 아니고, 그저 그 '출발점'으로서의 문제의식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저로선 그것만으로 '기존의 언론의 부정적인 패턴'을 답습하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은 너무 멀리 가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 문제는 좀더 심도깊게 논의되어야 마땅하지만요.

'cryingkid'님께서 지적하신 문제제기의 취지에 대해선 깊이 공감합니다. 이 점에는 전혀 오해가 없다는 점을 거듭 말씀드리고 싶고, 또 거듭 고마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정말 끝으로 사족이겠습니다만, 이야기를 그저 연상이 이끄는대로 좀더 이어가자면, 저널리즘과 블로기즘(저로선 추구해야 한다고 믿고 있는)은 정말 서로 다른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제 썼던 글에서 간략하게 이야기했지만, 기존의 저널리즘 생산물에 의해 생겨난 수동적인 세계인식에 대한 관극틀을 적극적으로 깨뜨려, 그 세계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자각을 불러 올 수 있는 것, 저는 그런 주관적인 상상력과 공동체적인 상상력의 결합이 블로기즘의 이상적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자기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욕망의 일기장이자, 동시에 낯선 누군가에게 열려진 공간으로서 이어져 있는 블로그가 갖는 잠재력은 매우 중대한 것이라고 생각하죠.

저널리즘(찌라시즘)의 천박한 호객행위나 혹은 저널리즘의 역할극에 내재된, 혹은 거기에서 파생된 부정적인 속성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서 블로기즘의 가능성은 매우 중대하고 저는 평가합니다. 그 잠재력은 매우 도전적이고, 흥미로운 고민거리를 우리 자신에게 던져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블로그는 이전의 세대에서는 할 수 없었던 '거대한 집단의 기억'을 '자기 삶의 생생한 주관적 토대' 위에서 직접적인 자기 관여 속에서, 스스로 기록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줍니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또 관계적이고, 공적입니다.

그 블로그가 새로운 미디어로서, 온라인 실존의 근거로서 부피와 무게로서의 정치적, 사회적인 역사성을 획득한다면, 그런 수준으로 진화한다면,
그 기억을 자신의 실존 속에서, 그 실존이 체험한 관계적 대화의 풍경들 속에서 불러올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의미는 더이상 '즉자적 감수성'으로 수용되지 않고, '대타적 감수성'으로, 그러니 관계적 감수성으로 수용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무슨 환상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분명히 가능성으로 남겨져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좀더 구체적인 이야기는 추후에 이어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고맙습니다.


* 최초 발아점
강의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른스러운' 사회 (이승환)
어떤 콘텐츠가 살아남을까? (위 글 후속글)
intherye논평

* 직접 발아점
cryingkid, '강의석, 찌라시즘, 악플 호객행위'에 대한 논평




그들이 소재의 선정성을 버리고 진정 중요한 이슈에 주목할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강의석 글을 좋다고 게재한 대학내일뿐 아니라 이걸 그저 선정적 이슈로 재생산한 다른 언론들도 대체 뭐 하고 있는 꼴인지 모르겠다. 그냥 애 하나 밟는 게 즐거운 새디스트라는 생각만 든다.

사실 강의석과 기존 언론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뒷 일 생각 안 하고 튀려고 한다는 점이나 근거가 약한데도 주장은 강하다는 점에서 아주 똑같다. 단 그 영향력이 기존 언론이 더 강하고 그들은 경험치가 꽤나 축적되어 있어 어떻게든 자신들은 욕 먹지 않으려는 면피의 자세가 되어 있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뭐, 이러한 기사를 바라고 있는 우리들도 이들 언론의 주요한 스폰서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정말이지, 강의석이 불쌍하다. 얘가 싫기는 하지만 그래도 불쌍하다.

- 이승환, 강의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른스러운' 사회 중에서 


저는 강의석의 "너도 군대 가" 뿐만 아니라, 낸시랭 "장례식 의상" 건도 비슷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자, 우리 여기 다 같이 악플을 답시다!"라고 호객행위 하는 듯한 기사를 써갈겨대는 무리들이 제일 나쁜 놈들인 것 같아요.

- intherye, 위 글에 대한 댓글 중에서


이승환의 지적도 지적이지만, intherye의 논평이 참 재밌다.
정말 탁월한 비유다.


'악플 호객행위'


우리나라 저널리즘 혹은 찌라시즘은 정말 분노해야 하는 대상(가령 정경언 찰떡궁합이랄지, 지식인사회의 이율배반이랄지)에 대해선 그냥 '비판'하는 흉내만 내거나, 혹은 그냥 적대적 공생구조의 '역할극'에 탐닉할 뿐이다. 거기에 그들이 그렇게 즐겨 이야기하는 '진정성'이라거나, 혹은 적극적인 '싸움'의 의지라거나, 정말 이 사건은 우리가 끝장낼겨, 이런 근성이라거나...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게 대가리는 못 건드리고(혹은 건드리는 척만 하고), 꼬리에 있는 쉬운 놈만 패는거다. 그렇게 증오를 전이시킨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잡아 붙들고 한판 굿거리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허무한 굿거리. (이승환도 글 서두에서 지적한) '겸손'을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들, 네티즌들, 독자들 불러다가 세상에서 가장 흉폭한 '새디스트'를 만든다. 그렇게 증오와 질투와 시기로 피가 끓어오르는 무의미한 희생양 제의를 펼친다.

이건 특히 연예찌라시즘의 세계다.
하지만 근엄한 척하는 기타 저널들에서도 이런 구조적 패턴은 반복된다.
이게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풍경들 가운데 가장 악질적이고, 가장 천박한 그 하나의 풍경이다.



* 발아점
이승환, 강의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른스러운' 사회
그리고, intherye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