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생각해봤더니 레진사건에 대한 논점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앞으로의 토론진행을 위해 간단히 짚어봅니다. 그런데 솔직히 더 토론이 진행될 수 있을는지는 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닐 확률이 더 높다고 생각해요. 그냥 흐지부지.. ㅎㅎ. 이게 우리 특기잖아요. : ) 물론 저는 이런 패턴이 이제는 익숙합니다. 한국화된(?) 의미생산 및 의미소비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건 학습효과이기도 하고, 게으름이기도 할테죠. 그냥 쉽게 말해서 세상살이의 순리(?)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걸 좀 기분나쁘게 부르는 용어는 '냄비'겠죠. ㅎㅎ. 그래도 가급적 뭐라도 하나 건지고, 최소한 얘기다운 얘기는 해봤다는 그 '추억'이라도 남겨야 하지 않겠나 싶어 불필요한 글이 될지도 모를 글을 또 남깁니다. ㅡ.ㅡ ;





1. 음란성과 표현의 자유
레진사건은 한국사회의 관습(도덕)과 제도(법률) 전부를 거론해야 하는 거대한 주제를 포함합니다.
이 주제는 하루 이틀 이야기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아무리 치열하게 토론한다고 해도 무슨 뾰족한 해결방법이나 그 논의 결실이 만들어지는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문화과 제도가 서로 엉켜 있는 문제이고, 또 그 괴리를 쉽사리 어떤 '입법운동'(?)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이건 정말 마라톤일텐데요. 

이 문제는 레진 사건의 경우에도 본질적인 질문이고, 문제이긴 하지만, 이미(?) 레진사건의 '민감한 부위'는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식으로든 레진 블로그는 재개장했고, 그 재개장은 블로거 레진과 티스토리간 '현실적 합의'가 이뤄졌다는 의미일테니까요.

물론 이 지점에 대해서도 좀더 글을 쓰고 싶기는 합니다. 특히나 '야구라'의 손윤님과의 추억이나, 한겨레 블로그에서 벌어졌던 '잡*지 글방 폐쇄 사건' 등의 기억들을 회고하고 싶네요. 이건 그냥 개인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그냥 독백으로나마 내뱉고 싶은(그렇습니다, 마스터베이션이죠).. 그런 주제에 가깝습니다다. (참고로, *은 상상하는 바로 그게 맞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구글에서 인정한 '포르노 블로거'이신(물론 저와 좌웅을 겨루다가 저는 탈락해버렸지만요) 그로커님의 견해도 몹시 궁금합니다. 그리고 달키님께서 써주실 글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재씨께서 '생물학적 관점'에서 써주셔도 재밌겠네요. ㅎㅎ. 그리고 좀 불경스런(?) 바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낙현신부님께서 '음란성'에 대해 쓰시는 글도 한번 읽어 보고 싶습니다. 


2. 정치적인 관점 : 이명박 시대의 대언론정책, 대포털정책이라는 구도
레진 사건의 직접적인 이유로 작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레진 사건과) '유사한' 사례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개연성'으로 여전히 설득력있게 존재하는 가능성이라고 판단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새드개그맨님도 그 의견을 함께 하고 있는데요. 새드개그맨님과는 이 지점에서 좀더 토론을 이어가고 싶은 개인적인 바람이 있습니다.


3. 미디어 역학
이명박의 대언론정책을 지지하는 정치적 버전이 한나라당,  방통위, 그 유사 나부랭이들이라면, 미디어 버전은 조중동일테죠. 이 조중동의 대포털정책에 대한 담론형성, 상징조작, 틀짓기의 양상이 어떨는지도 이번 레진사건의 '확장된' 형태로 미리 짚어볼 수 있는 이슈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 대한 다음 - 네이버라는 양대 포털의 대응이나 위 미디어들이 양자를 어떻게 함께, 혹은 다르게 취급하고 있는지도 계속해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문제 역시 새드개그맨님과 좀더 토론을 진행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4. 좀더 구체적인 논점으로는 웹서비스 사업자의 대외적인 커뮤니케이션
이 이슈는 레진 사건 초기의 이슈였다고 생각하는데요. 여전히 저는 티스토리 측의 대외적 커뮤니케이션의 방법론이 그 철학으로, 혹은 운영의 원칙으로 대외적으로 표명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해프닝인가요? 좀 두리뭉실하게 넘어가고 있는 모습인 것 같아요. 그리고 이와 관련한 그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이에 관한 글들이 부피로서는 가장 많았던 것 같은데요) 구체적인 교훈이 그 토론의 결과로서 도출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지점에서는 떠오르는 사건은 두 개 있습니다.
네이버의 '문성실 사건' : 여기에 대해선 여형사님께서 좀더 글을 써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습니다.
올블의 '채용번복 사건' : 이 사건에 대해선 저는 물론 올블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죠.

그리고 좀 지난 이슈이고, 과거이긴 하지만, 이글루스의 '레진 이글루 폐쇄조치'는 어떤 의미를 남겼고, 그 교훈은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할 필요를 느낍니다. 솔직히 저는 그 때 그저 먼산으로 구경하던 입장이라서(솔직히.. ㅡ.ㅡ;) 이게 어떤 의미와 교훈을 남기고 있는지, 과연 이글루스의 운영원칙에 어떤 티끌만한 영향이라도 준 것은 없는지, 좀 궁금해요. 이에 대해선 이를 잘 정리한 글이 있다면 추천을 부탁드립니다. 물론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hof'님께서 이에 대해 논평해주시면 꽤나 반가울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좀더 확장하자면, 특히 capcold님께서 구글 '블로거'라는 웹서비스의 '쿨하다 못해 차가운' 안내문구를 예시함으로써 의미있는 시사점을 던진바 있죠. 이 연장에서 '서비스형 블로그가 표현의 자유에 대해 가질 수 있는 합리적인 운영원칙, 정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도 뭔가 그래도 의미있는 이야기들을 건저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5. 블로그파워 / 파워블로거
끝으로 레진사건은 대한민국에서 현실적인 '블로그파워'는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 파워는 어느 정도로 평가할 수 있는가? 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레진님께서 (저는 개인적으론 이런 표현이 좀 웃기긴 하지만) '마이너' 블로거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ㅡ.ㅡ;) 저는 실은 이 질문이 더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이런 차원에서요. 물론 저는 서비스형 툴을 이용하진 않지만요. ㅎ). 이 문제는 블로그 서비스와 블로그 파워라는 혹은 '파워블로거'에 대한 논점으로 파생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에 대해서는 제가 제안한 서툰 토론제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신 점프컷님과 토론을 이어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물론 점프컷님께서는 위 4.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계신 것 같지만요. 그런데 개인적으론 환사마께서 이에 대해선 왜 아무런 말씀이 없는건지 것도 좀 궁금하긴 합니다. 그리고 너바나나님께서도 좀 끼어들면 좋을텐데.. 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파워블로거가 아닌 블로그파워라는 측면에서(물론 양자가 서로 적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우리나라 블로그계는 양자가 감정적인 적대적 긴장을 갖는 것 같기도 한데요. 이건 참 아이러니 하면서, 또 안타까운 일입니다)
웹서비스가 추구하는 이윤추구모델과의 관계에서 capcold님께서 지적한 "표현의 자유가 갖는 상품가치"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질문은 정말 흥미롭고, 심오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선 펄님이나 이정환씨나 foog님이 거들어준다면 정말 좋겠네요. : ) 





부제. 포르노의 교육적 가치


0. 원래 쓰려던 후속글의 주제는 아니지만,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가야겠다. 앞으로 당분간 '레진 사건'에 레이다 고정이다.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관련글이 좀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레진 사건'에 대해서만은 나도 좀 전투적이 되어야 할 것 같아 보인다. 물론 토론 효율성은 가장 우선해서, 가장 최후까지 고려한다. 나도 시간낭비하긴 싫다.

이 글은 레진 사건에 대한 생산적인 토론을 방해하는 어떤 가설(에 대한 맹목적 신념)에 대한 비판을 위해 쓰여진다.

우선 인정해야 할 전제.
레진 텍스트(글과 그림)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그 "포르노"보다 훨씬 순화(?)된 표현형태라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믿는다.
"레진이 포르노보다 더 해", 이런 해괴한 주장은 없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1. 어떤 가설

그 가설은 이런 가설이다.

"포르노 많이 보면 성폭행범된단다."
"초등학생 성폭행은 포르노 탓이란다."
(좀더 폼나게 이야기하면, 이 문장은 꽤 유명한데) "포르노가 이론이라면, 강간은 실천이다"

이런 가설이 가장 유치하고, 악질적인 차원의 선정주의적 저널리즘에 의해 확대 유포되고 있다. 그들은 도덕과 윤리를 표방하지만, 실질은 그 가식적인 사회의 이중구조를 오히려 공고히 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레진 사건과 관련해서 이야기한다면, 이 가설이 무슨 만고의 진리처럼(가령
이스트라의 글) 주장의 근거로 이야기된다. 이 가설이 그저 '가설'이라는 점은 차치하고, 이 가설이 과연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강한 가설'(정설)인지에 대해서도 매우 의심스럽다.

당신들이 상식의 보루로 생각하는 백과사전을 펼쳐보자.


2. 백과사전

백과사전이란 당대의 학문적인 결정체들을 가급적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그 요체에 대해 간결하게 서술하고 있는 당대 '상식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을테다.
여기에 누구나 '상식적으로' 공감하리라 믿는다.

(우리나라 백과사전의 대명사인) 두산백과사전을 보자.
표제어는 '포르노그래피'다.

인간의 성적 행위의 사실적 묘사를 주로 한 문학 ·영화 ·사진 ·회화.(요약)

[.... ]

포르노그래피의 목적은 인간생활의 기본적 현실을 묘사하기보다는 독자를 성적으로 흥분시키기 위하여 에로틱한 심상(心像)을 야기함으로써 심리적 최음제(催淫劑)의 역할을 하려는 데 있다. 1960년대에는, 포르노그래피를 단속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반사회적 행동을 유발하므로 유해하다는 것을 증명하여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에서는 19명의 권위자, 20명의 스태프로 ‘외설과 포르노그래피에 관한 위원회’를 조직, 1968년부터 2년간 실증적 연구를 하였다. 위원회는 보고서에서, “성에 대한 흥미는 극히 당연한 것으로 건강에도 이롭다. 그리고 포르노그래피 문제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성에 대하여 보다 솔직하고 대범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데 그 원인이 있다”고 기술하고, 성인에 대한 포르노그래피의 판매 ·진열 ·배부의 금지에 관한 법률을 모두 폐기할 것을 건의하였다.

덴마크 ·스웨덴 ·이스라엘 ·영국 등에서는 연구 결과, 미국과 같은 결론을 얻고, 이미 1960∼1970년대에 포르노그래피의 규제를 풀었다. 근년, 포르노그래피의 심리적 영향을 과학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포르노그래피를 보는 사람 모두가 흥분하는 것은 아니며, 연구자에 따라 수치는 다르지만, 남자의 23∼77 %, 여자의 8∼66 %만이 성적 흥분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 자극도 단시간밖에는 지속되지 않으며 그 반응 또한 억제할 수 있다. 성영화의 성적 자극효과는 48시간 이내에 급속히 약해지며 성생활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포르노그래피를 매일 보여주면, 흥미는 점차 떨어져 1주일 후에는 ‘싫증’이 나고, 3주일 후에는 ‘이제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라는 포화현상을 나타낸다. 러닝 ·할례(割禮) ·포르노그래피(성교)의 각 화면을 보여주고 혐오감을 갖는지의 반응을 조사한 결과, 쾌적한 기분을 느끼게 한 것도 성교장면이 가장 많았고, 불쾌감을 느끼게 한 것은 성교장면이 가장 적었다.

덴마크에서는 포르노그래피가 널리 퍼지면서 성범죄가 줄어들기 시작, 해금 후에는 3분의 1로 줄었다.

미국의 성범죄자는 10대 때 포르노그래피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중에 많다고 한다.

강간하는 사람은 대개 성을 금기시하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그 중 18 %는 에로틱한 물건을 소지하여 부모의 꾸지람을 들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성적 기록(표현)을 포르노그래피라고 생각하는 경향은, 성행동에 대하여 죄악감을 갖는 사람일수록 강
하며, 구미(歐美)의 포르노그래피에는 성교장면을 악마가 엿보는 모습을 그려 죄악감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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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제공 '두산백과사전' 표제어 '포르노그래피'중에서

이 네이버 제공, 두산백과사전을 읽었을 때 나는 아마도 처음으로 네이버에 '고마움'을 느꼈던 것 같다.


* 위 '포르노는 이론, 강간은 실천'에 대한 좀더 '장황한'(ㅡ.ㅡ;) 비판에 대해선 다음 글을 참조.
포르노와 페미니즘


3. 백과사전이 전해주는 상식

요약하자.
네이버라는 당신이 사랑해마지 않는 대한민국의 범용적 포털에서 제공하는, 두산백과사전이 주는 '상식적인 정보들'이다.

ㄱ. 성에 대한 흥미는 극히 당연한 것으로 건강에도 이롭다. 그리고 포르노그래피 문제의 대부분은 사람들이 성에 대하여 보다 솔직하고 대범한 태도를 취하지 않은 데 그 원인이 있다.

ㄴ. 덴마크에서는 포르노그래피가 널리 퍼지면서 성범죄가 줄어들기 시작, 해금 후에는 3분의 1로 줄었다.

ㄷ. 미국의 성범죄자는 10대 때 포르노그래피에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 중에 많다고 한다.

ㄹ. 강간하는 사람은 대개 성을 금기시하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그 중 18 %는 에로틱한 물건을 소지하여 부모의 꾸지람을 들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ㅁ. 성적 기록(표현)을 포르노그래피라고 생각하는 경향은, 성행동에 대하여 죄악감을 갖는 사람일수록 강하다.


물론 '포털 다음'의 백과사전에서 검색어로 '포르노그래피'를 치면 좀 다른 설명(좀 부실한)을 들려준다.


4. 청소년 보호논리의 허구성

제발 좀 솔직해지자.
경건하신 분들이 보기에는 레진의 텍스트들이 내 자식새끼 인생 망칠 별별 더러운 글로, 별별 더러운 그림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요즘 아이들 보기에는 심심한 수준이다. 이런 정도로는 심심해서 굳이 그 레진 텍스트들이 아이들에게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오히려 내 유년을 떠올리면, 레진의 텍스트들은 너무 어렵고, 때론 심오해서 "뭐, 이렇게 어려워?" 이럴 것 같다.

레진의 텍스트는 물론 주로 '성인남자'를 위한 텍스트인 건 분명하지만, 그 텍스트의 문화적 가치, 예술적 가치는 '포르노'라고 불릴만한 수준도 아니고, 음란물과도 전혀 상관이 없다. 이에 대해선 다른 글에서 레진 텍스트의 예술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유객의 논평과 이에 대한 답글로 이 글을 마친다.

유객 :

'음란함'이란 용어 속에 스며있는, 성에 대한 도덕적, 관습적 가치를 반드시 꼭 부정해야만 하는 것인지요? 글을 읽다보니, 사회의 제도적인 억압과 개인의 자유와의 충돌이라는 구도만을 가정한 채, 핍박받는 개인의 자유만을 옹호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민노씨가 언급하신 " '음란'에 대한 대한민국의 기괴할만큼 이율배반적인 의식구조 " 에 흥미가 일었으나, 이 점에 대해 좀더 상술하지 않았음이 아쉽네요.

음란물 규제에 관한 부분은 순수하게 입법의 취지를 살펴보건대, 분명 청소년 보호에만 한하여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는 데에 있습니다. 청소년의 건전한 성 도덕을 위함이 목적이라는데, 솔직히 무엇이 청소년에게 이롭고 해로운지 저로선 잘 납득하기 어려워요. 민노씨가 언급하신 것처럼 그저 명분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죠. 다만 이 문제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자식들이 있는 부모의 입장에서 쉽게 간과하기엔 어렵지 않을까요?

예를 들면, 딱정벌레님(
http://www.mediamob.co.kr/aidi )의 블로그에서 '아들과 함께' 카테고리에 있는 '중 1 아들 성교육하기 1편부터 보시면 아시겠지만, 부모의 입장에서 성에 대한 보수적인 가치과 개방적인 가치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갈등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습니다. 성에 대하여 정의함과 동시에 반드시 이것이 옳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대한 바람직한 관념을 형성해주고싶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터넷에 유통되는 음란물은 대부분 남성위주의 시각이 많이 반영되어 있거나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들이 많습니다.(레진님의 경우는 제가 확인할 수 없어 제외합니다) 그러한 것에 아무런 여과 장치 없이 노출되는 것을 어떤 부모도 바라지는 않겠죠.

- 논평 중에서 


민노씨 :

말씀처럼 오랜 시간동안 축적된, 그래서 당대의 도덕적, 윤리적 결정체로 남은 '관습과 도덕' 그리고 '제도와 법률'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하지만 감히 말씀 올리건대, 대한민국에서 그 '관념과 명분으로서의' 제도와 관습은 현실적인 생활인의 의식과 감수성과 '극단적으로' 유리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나 청소년 보호의 가치에 대해선, 모든 법률이 가장 우선해서 고려하는 것이 이 청소년, 혹은 미성년자에 대한 사회적인 보호일텐데요. 이 영역이 가장 현실과 유리된 '기만적인'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그 명분과 가치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론을 제기할 수 없겠습니다만, 그 '방법론'상의 효율성이나 유효성이 과연 담보되고 있는가라는 차원으로 생각해보면 여전히 '농담'인 수준이거나, '기만'인 수준이라는 점이죠.

좀더 나아간다면, 이 청소년보호라는 명분은 '표현의 자유'를 좀더 효율적으로 '억압하기 위한' '수단'으로까지 악용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리고 흔히 착각하는 것처럼 '음란물' 혹은 '포르노'가 청소년의 성의식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상식적인 가설'은 그다지 신뢰성이 높은 가설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오히려 '약한 가설'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오히려 포르노를 통한 성교육(까지를 주장하기란 어려운 일이겠으나…상징적인 의미에서는)를 개인적으로 오히려 찬성하는 편이라서요.

포르노를 통한 표현된 왜곡된 성의 형상화가 아이들에게 왜곡된 성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낸다기 보다 우리사회의 노골적인 이율배반과 기만적 성의식이 제대로 된 성교육의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 답글 중에서


다시 강조하고 싶다.

'청소년 보호'라는 이론적으로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고, 그 실질적인 효율성도 거의 없으며, 그저 있는 것이라곤 그 표피적인 명분뿐인 그 가식과 기만의 수사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관련글

빨간 약 먹을래, 파란 약 먹을래? : 레진 사건의 의미와 전망 1.


* 관련 참조글
포르노와 페미니즘
포르노, 노골적인 희생양


* 레진 사건 상황 (오전 12:31 2008-09-05 현재)
레진, 여자의 유두와 성기는 외설적이라 그 존재를 인정할수 없다 진정 나쁜것들이니까 (2008/09/03 20:15)
: 상황 급진전(?). 레진과 티스토리의 톰과 제리 게임. 상황을 보건대, 티스토리는 너무 순진했다... 이 글 읽으면 티스토리 관련 직원들이 좀 안쓰러워지기도 한다. ㅡ.ㅡ; 거시적인 구도에서 판단하면, 레진이 명백하게 가시적인 피해자(혹은 희생양)이라면, 티스토리도 일종의 피해자(?)(이명박 정권의 대포털 정책이라는 구도에서)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레진, 그래 내가 키라다 (2008/09/04 20:38)
: 레진의 놀라운 "여론몰이"(자그니의 날카로운 지적 ㅎ). 내가 좋아하는 성경 서양 격언 (각주 참조)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나는 레진의 여론몰이에 얼마든지 즐겁게 동원될 생각이다. 레진은 '파워'블로거가 아니라, '인기'블로거다. 나는 그런데 그가 정말 '파워'블로거가 되었으면 좋겠다. : )


* 추천글
레진 사건, 표현의 자유의 상품 가치 (capcold) :   일독 강하게 권한다.
하지만 각자 가슴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과연 표현의 자유는 내가 블로그 서비스를 선택함에 있어서 몇번째 고려 요소였는가(혹은 고려해본 적이라도 있기는 한가)? 사이트 엔진이 편리해서, 용량을 많이 줘서, 아는 사람들이 다들 쓰니까… 다른 여러 합당한 이유 사이에서 과연 어디쯤에 있을까.


레진 블로그 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오지랖이라고?(레일린)
: 멋진 주장. 오지랖이라고 설치는 그 오지랖이나 신경쓸 일이다. 가치 없고, 시간 아깝다 생각하면 그냥 신경꺼주는게 도와주는거다. 웬 오지랖 타령?

064. 지못미 레진? (08.09.05) - 가편집판 (새드개그맨) :

굉장히 기다렸던 팟캐스트다. 조중동이나 이명박 정부의 대언론(포털 당근 포함)정책이라는 거시적인 구도 하에서 이야기한 부분에 대해선 매우 공감하지만, 이번 팟캐스트에 대해선 이견도 꽤 있다. ㅡ.ㅡ;


포르노그래피로 성교육하는 것에 대하여 (서울비) : 이 글(내 글)에 대한 비판글. 음미할 만한 지적들이 많다.





* 정말 끝으로...
유객(논평을 준 임시필명)에게 깊은 고마움을 다시 한번 전하며..



* 본문 수정 사항 알림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성경 구절이 아닙니다. 
임시필명 '사족'님께서 알려주셨네요.
사족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 ^
좀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짧게 인용한 글을 참조하시면 좋겠습니다.

God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을 돕는다
天助自助者

이 말은 벤자민 프랭클린이 1757년 발행한 '가난한 리챠드 연보(Poor Richard' Almanac)'에 처음 나타난다.

-
http://jadenews.com/421 중에서








시정잡배님께서 블로그리뷰 전문 블로그를 만드셨네요. 정말 반가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블로거는 무엇보다 먼저 동료 블로거에 대한 우정어린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블로거는 태생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블로그가 태어난 그 순간 받아들여야 하는 의무처럼, 블로그 리뷰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죠.시정잡배님의 블로그 리뷰에 제 서툰 의견을 더하면... 이렇게 하면 좀더 좋은 블로그리뷰가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감으로 말이죠.


1. 블로그 체험치에 대한 설명.
리뷰 대상이 되는 블로그에 대한 체험치를 본문에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해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는 가장 기초가 되는 설명의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체적인 체험치 표시는 독자들에게는 해당 리뷰의 신뢰도를 높일 것으로 저는 기대합니다. 가령 대상 블로그의 글이 100개라면 그 중 50개 정도를 읽었다거나, 혹은 해당 블로그를 접한게 모년 모월 모일인데, 그 이후로는 꾸준히 구독했다거나... 이렇게라도 말이죠.


2. 평가(해당 블로그 장단점) 표준 : 판단근거. 
블로그 전체에 대한 평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요. 다만 그렇게 되면 다소 직관에 치우친 인상비평에 머물 위험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전체로서의 블로그가 아닌 그 블로그의 '장단점'에 대해 서술하실 때에는 가급적 특정 '글'단위로 비평을 가하는 것이 좋지 않을는지요?

가령 제 블로그를 대상으로 써주신 글을 예시로 삼자면( ^ ^; ),
ㄱ. "나는 그가 약간의 스노비즘에 빠져 있다고 본다." 라는 서술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ㄴ. 그렇게 판단한 글, 혹은 어떤 구절들을 예시해주시면, 독자에게는 좀더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게 되고, 리뷰 대상이 되는 해당 블로거(이 경우에는 저 자신이겠지요)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3. 추천과 비추천
해당 블로그리뷰의 대상이 되는 블로그들은 그래도 '가능성'을 평가하시기에 비평작업을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다면 그 해당 블로그에 대한 체험치의 구체적인 결과로서, 시정잡배님께서 인상적으로 읽었던 해당블로그들의 글을 말미에 몇 개라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최고의 글'과 '최악의 글' 뭐 이렇게 말이죠. : ) 그렇게 하면 역시나 위 2.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독자에게는 좀더 명확한 평가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되고, 해당 블로거에게는 앞으로 블로그를 운영함에 있어 큰 참조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4. 별점이라는 평가방식에 대해
실은 저는 별점이라는 평가방식에 그다지 호의적이진 않습니다. 물론 제 영화블로그(거의 반년 가까이 방치상태이긴 하지만요..ㅡ.ㅡ; )에서도 영화 별점을 매깁니다. 좀 세분해서 그렇게 하고 있기는 하지만요(비전, 내러티브, 비주얼, 대중친화도 등등).  특히 어떤 특정 블로그 전체에 대한 별점이란 너무 성급한 판단일 수도 있지 않나 싶어요. 블로그는 계속해서 변해가는 것이고, 그것은 마치 인간이 날마다 스스로 변화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그렇게 살아 숨쉬는, 변화무쌍한, 게다가 이율배반과 모순을 그 스스로 체현하는 온라인 실존의 집인 블로그라면 별점이라는 평가방식에 대해선, 그 대중적인 상징성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좀 저어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우려되는 것은 비평의 구체적인 판단재료들이 모두 제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블로그 에 수록된 글들 사이에서도 그 깊이와 무게는 서로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점이 손쉽고, 대중적이며, 직관적인 평가표준(그 가혹한 상징성이라니... )이라는 점에는 공감합니다. 그리고 시정잡배님의 블로그 리뷰도 나날이 발전하시길 더불어 기원드립니다. 그래서 언젠가 저도 이런 짧은 글이 아닌 좀더 명확한 근거를 갖는 긴 글로 시정잡배님의 블로그를 리뷰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시정잡배님, 건투를 빕니다.


추.
보잘 것 없는 블로그에 별을 세 개나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ㅎ 지금까지 리뷰한 블로그들 가운데는 가장 낮지만 말이죠. : ) 아참, 시정잡배님의 블로그를 알리기 위해 열심히 추천(믹시) 날리고 계신 '너바나나'님에게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점을 더불어 전합니다. 요즘 다시 블로그 활동을 재개하신 것 같아서 참 반갑더군요. ㅎㅎ


* 관련글
블로그 리뷰어로서의 블로거

* 발아점
시정잡배의 블로그 별점




이하 '레진 사건'은 다음 글들에 표현된 일련의 행위들의 집합을 의미한다.



그 밖에 티스토리를 성토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글들과 간혹 티스토리의 조처를 옹호하는 몇몇 글들, 그리고 사건의 의미를 중립적(?)으로 전하거나 하는 글들... 모두 '레진 사건'에 당연히 포함이다.


1. 어떤 질문
이제는 식상하게 느껴질 만큼 유명한 매트릭스의 한장면. 모피어스가 질문한다. "빨간 약 먹을래, 파란 약 먹을래?" 레진 사건이 티스토리 '서비스'를 이용하는 블로거들에게 던지는 궁극의 질문은 이와 유사하다. "당신은 자유로운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티스토리는 해방구가 아니며, 다음은 투사가 아니다. 포털이라는 매트릭스


티스토리는 포털 다음에서 제공하는 블로그 '서비스'다. 당신은 포털 다음에서 제공하는 블로그 서비스 시스템인 티스토리를 사용하고, 양자간 권리와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겠다는 계약(약관) 조건에 당신 의지로 '동의'했다. 그 계약에 대해서는 당신도 그 계약의 조건들을 성실하게 이행해야 하는 책임이 생긴다. 티스토리는 자신의 영업상 이익을 블로거의 이른바 '독립성'이나 '표현의 자유'를 위해 희생할 생각이 눈꼽 만큼도 없다. 이건 너무 당연하지 않나? 뭘 기대했나?

당신은 레진같은 '음란게시물' 올리는 블로거가 아니라서 상관없다구? 그게 당신의 대답이라면 나는 당신을 더 이상 블로거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다. 당신이 레진 블로그에 반대한다고 해도, 당신의 취향이 레진 블로그의 게시물을 '음란물'로 판단하는 '고귀한' 심미안을 가진 블로거라고 하더라도 이 문제는 그런 개개의 기호와 취향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다.

물론 약관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그토록 외치는 표현의 자유는, 이명박 시대를 맞이하야 점점더 그 실질적인 규범성을 상실해가고 있긴 하지만, '법'에 의해, 그 법이 아니라도 '관습과 도덕'에 의해 어떤 식으로든 제한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티스토리를  툴로 사용하는 이른바 티스토리 블로거(편의상 이렇게 표현하자)라면 당신의 '표현의 자유'는 티스토리라는 기업형 블로그 서비스 약관에 의해 가장 우선해서 제한당한다. 그 약관에 설정된 좀더 미시적인 '규정들'에 의해 제재받을 수 밖에는 없는 운명에 처한다. 그것이 서비스형 블로거가 항상 염두해야 하는, 그 거대한 '매트릭스'에서 당연한 숙명처럼 받아들어야 하는 잠재적 위험이다.

명심하자. 포털 다음은 자유를 위한 투사가 아니고, 티스토리는 기존의 도덕과 관습, 그 기만적인 이율배반의 구조를 파괴하는 가치의 전복자도 아니며, 티스토리 운영자들은 무슨 예술적인 심미안을 가진 평론가가 아니다. 서비스(사업)에 방해가 되는 요소들이 있다면 티스토리는 당연히 당신의 자유와 티스토리의 영업상의 이익을 비교할 수 밖에 없다. 양자를 비교에서 사업자인 다음은, 티스토리는 적극적인 방어 전략을 펼테고, 사업자로서의 이익이 좀더 우월하게 견지되는 방향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진짜 질문은 그 다음 부터다. 과연 티스토리는 옳은 선택을 했나? 과연 티스토리의 전략은 합리적이었나? 이 질문은 윤리적이거나 철학적인 차원에서 던진 질문이 아니다. 사업자로서의 판단에 관한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앞으로 전개되는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당신의 액션에 의해, 블로그계가 동원할 수 있는 실질적인 액션의 크기, 그 가시적인 '권력'에 의해 적극적으로 달라질 수 있다. 그런데 감히 예상건대, 티스토리는 사업자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평가한다.

왜냐하면 전체로서의
블로그 파워는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이기 때문이다. 각종의 미디어에서 '트랜드'로, 기사채우기로 양념삼아 블로그 파워니, 파워블로거니 떠들어도, 그런 가식적인 목소리들, 현실과는 동떨어진 목소리들이 반복될 때마다 그 허구성은 더욱 더 깊어지는 느낌이다. 블로그 파워는 기존 유통 얼개들(거대 유통망인 포털, 특히 다음 블로거뉴스)에 점점더 종속되어 갈 뿐이다. 그래도 진보적이라는 매체(시사IN)에서 블로그를 바라보는 관점도 이와 다르지 않다. 솔직히 기성매체에선 블로그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 체험치도 일천하며,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기대할 수 있는 그 진정성이라는 차원, 그 고민의식도 그야말로 한심지경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소위 "빠워블로거"는 어떤가? 블로거의 자유니 독립이니, 참여니 웹2.0이니 블로그 사업모델이니를 떠드는 파워블로거들,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언제라도 '다음 블로거뉴스'의 트래픽에 자신이 대외적으로 떠들었던 가치를 맞바꿀 준비가 된 자들처럼 보인다. 물론 전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혹여라도 의지가 있다고 치더라도
"파워블로거들은 파워가 없다"(이승환)

그게 대한민국 블로그계의 희극성이고,  
그게 대한민국 블로그계의 비극성이다.  


2. 티스토리를 억압하는 환경.

나는 티스토리가 과잉반응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솔직히 티스토리는 전략적으로도 뻘짓이라고 판단한다. 물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과 기대가 표현된 인상적인 판단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티스토리의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포털'을 둘러싼 객관적이고, 물리적인 억압적 환경이 점점 더 가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업자 다음, 사업자 티스토리를 억압하는 이 물리적인 환경은 사업자 다음으로서는 '블로거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를 떠올리기도 어려울 만큼 자신의 '밥벌이'와 직결되는 문제다. 다시 강조하자. 어떤 사이코의 말처럼 네이버를 '평정'했다면, 다음은, 티스토리는 어떤가? 다음은 무슨 포털의 '해방구'인가?

서비스 사업자에 대한 '콘텐츠 관리 의무'를 점점더 가중시키는 공권력(검찰)과 이에 대해 우호적인 법원의 태도. 여기에 수구 기득권 미디어집단(포털에 대한 태도에서는 한겨레나 경향도 쌤쌤이 아닐까 싶은데)과 이명박 정부의 변신합체모드는 거대여당이 지배하는 9월 국회에서 포털을 언론으로 포섭하는 언론관계법 재조정 작업에 박차를 가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전체적인 구도는 소위 '이명박의 언론장악음모'의 구체적인 실천이다.

문제를 좁혀보자. 포털에 대한 규제는 양날의 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포털은 분명히 규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포털이 갖는 '언론성'도 분명하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포털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정책이 내 기대와 호응해서 전개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런 기대는 나에겐 전혀 없다. 변희재 같은 자가 소위 포털전문가로 '100분토론'에서 씨부리는 그 한심지경인 판국에서, 그 반대패널로 의원 딱지 붙이고 말도 안되는 공상을 씨부리는 그 한심지경인 판국에서 도대체가 믿을 사람이 없다. 궁극의 파워라고 할 수 있는 전체로서의 블로거들은 여전히 바쁘고, 하루 하루가 팍팍하며, 레진 따위에 티스토리 따위에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티스토리로서는 이런 상황 속에서 판단해야 하고, 선택해야 하는거다. 그 판단은 '레진 사건'에 국한하지 않는다. 레진사건은 그 한 예시일 뿐이다.

참조 사례. 음란만화 유통에 대한 포털직원 방조 사건 (대법원. 2006년)
포털 직원에게는 음란만화를 삭제 요구할 조리상 의무가 있다고 하여 정기통신기본법 위반죄의 방조를 인정한 사건이다.

사건 표시 : 대법원 2006. 4.28. 선고 2003도4128
전기통신기본법위반(인정된죄명:전기통신기본법위반방조)


[1] 구 전기통신기본법 제48조의2에서 규정하고 있는 ‘음란’의 의미 및 그 판단 기준
[1] 구 전기통신기본법(2001. 1. 16. 법률 제6360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48조의2에서 규정하고 있는 ‘음란’이라 함은, 일반 보통인의 성욕을 자극하여 성적 흥분을 유발하고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을 해하여 성적 도의관념에 반하는 것을 말하고,

표현물의 음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서는 당해 표현물의
ㄱ. 성에 관한 노골적이고 상세한 묘사·서술의 정도와 그 수법,
ㄴ. 묘사·서술이 그 표현물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
ㄷ. 거기에 표현된 사상 등과 묘사·서술의 관련성, 표현물의 구성이나 전개 또는 예술성·사상성 등에 의한 성적 자극의 완화 정도,
ㄹ. 이들의 관점으로부터 당해 표현물을 전체로서 보았을 때 주로 그 표현물을 보는 사람들의 호색적 흥미를 돋우느냐의 여부 등 여러 점을 고려하여야 하며,
ㅁ. 표현물 제작자의 주관적 의도가 아니라 그 사회의 평균인의 입장에서 그 시대의 건전한 사회 통념에 따라 객관적이고 규범적으로 평가하여야 한다.

[5] 인터넷 포털 사이트 내 오락채널 총괄팀장과 위 오락채널 내 만화사업의 운영 직원인 피고인들에게, 콘텐츠제공업체들이 게재하는 음란만화의 삭제를 요구할 조리상의 의무가 있다고 하여, 구 전기통신기본법 제48조의2 위반 방조죄의 성립을 긍정한 사례.

이 사건의 논리가 이번 레진 사건과 본질적인 차원에서는 동일하거나, 최소한 구조적 유사성을 갖는다고 나는 판단한다. 물론 티스토리와 블로거간 계약 조건, 포털과 콘텐츠 사업자간 계약 조건(특히 책임 배분에 관한)은 명백히 다르겠지만.

3. '음란'과 '표현의 자유'에 대하여
'음란'(이와 관련한 표현의 자유)은 레진 사건의 본질적인 출발점이고, 그 최후의 종착지다. 이건 분명하다. 하지만 '음란'에 대한 대한민국의 기괴할만큼 이율배반적인 의식구조는 정말 그 자체로 난감지경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가식적 제도의 잣대는 레진 사건의 본질적인 쟁점인 '음란'과 '표현의 자유'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어렵게 할 만큼 거대한 모순의 구조에 우리는 둘러쌓여 있다.
 
즉, '음란'에 대한 한국 사회 전체의 의식적, 제도적 위선구조는, 애석하게도 레진 사건의 본질적인 쟁점임에도 불구하고, 이걸 '티스토리'와의 실질적인 역학 하에서 판단하기에는 너무 거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음란'을 둘러싼 한국사회 전체의 왜곡된 자기 기만과 그 기만의 구조들은 레진 사건이 여전히 중요하게 취급되어야 하는, 그래서 거듭 질문되어야 하는 본질적 쟁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참조 자료.
음란성과 표현의 자유에 관한 헌재의 유명한 판결이 있다.
좀 코미디 같은 느낌이 드는 판결이지만, 발췌해서 옮겨본다.
음란한 간행물 / 저속한 간행물 사건 (헌법재판소. 98.4.30. 95헌가16)
출판사및인쇄소의등록에 관한 법률 제5조의 2 제5호 등 위헌제청 사건
위 5조 중 "음란한 간행물" 부분 (합헌)
위 5조 중 "저속한 간행물" 부분 (위헌)

출판등록법 5조 중 "음란한 간행물"(합헌) 부분에 대한 판단
⑴ 헌21조 ④항은 언론출판의 자유의 한계를, 헌37②는 언론출판의 자유의 제한을 규정하고 있다. 문제는 헌법상 보호되지 않는 언론출판의 한계는 무엇인가이다.

⑵언론출판의 영역에서 국가는 단순히 어떤 표현이 가치 없거나 유해하다는 주장만으로 그 표현에 대한 규제를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대립되는 다양한 의견과 사상의 경쟁메커니즘에 의하여 그 표현의 해악이 해소될 수 없을 때에만 비로소 국가의 개입은 그 필요성이 인정되는 것이다. 따라서 언론출판의 영역에 있어서 국가의 개입은 원칙적으로 2차적인 것이다.

⑶ 그러나 모든 표현이 시민사회의 자기교정기능에 의해서 해소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표현은 일단 표출되면 그 해악이 대립되는 사상의 자유경쟁에 의한다 하더라도 아예 처음부터 해소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거나 또는 다른 사상이나 표현을 기다려 해소되기에는 너무나 심대한 해악을 지닌 것이 있다(주 : 음란물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바로 이러한 표현에 대하여는 국가의 개입이 1차적인 것으로 용인되고 헌법상 언론출판의 자유에 의하여 보호되지 않는데, 헌21④는 바로 이러한 표현의 자유에 있어서의 한계를 설정한 것(내재적 한계설)이라고 할 수 있다.

⑷ 이 사건 법률조항이 규율하는 음란 또는 저속한 표현중 "음란"이란 인간존엄 내지 인간성을 왜곡하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표현으로서 오로지 성적 흥미에만 호소할 뿐, 전체적으로 보아 하등의 문학적, 예술적, 과학적 또는 정치적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으로서, 사회의 건전한 성도덕을 크게 해칠 뿐만 아니라 사상의 경쟁메커니즘에 의해서도 그 해악이 해소되기 어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런 엄격한 의미의 음란표현은 언론출판의 자유에 의하여 보호되지 않는다.


구 출판등록법 5조 중 "저속한 간행물"에 대한 판단 (위헌)
저속은 외설이 음란에 달하지 않는 성적표현, 폭력, 잔인성 표현 등 상스럽고 천한 내용 등의 표현을 가리키는 것. 따라서 음란의 개념과는 달리 이 '저속'의 개념은 우선 그 적용범위가 매우 광범위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저속'이라는 문언은 보충적인 해석에 의한다 하더라도 그 의미내용을 확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추상적이다.

나는 당연코, 물론 레진 블로그의 모든 글을, 그 이미지들을 모니터링하지는 않아서 속단할 수는 없겠으나, 레진 블로그가 '음란'하다고 판단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대해서만은 티스토리는 정말 과잉대응했고, 판단착오했다. 지레 겁먹은 건가.. 싶기도 하고, 엉뚱한 음모론도 떠오르고...


* 추.
한명이 블로그 라는걸 시작하면 거기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과 사람과 이야기가 생기는지 아는 것들이라면 그걸 한벙에 펑 날리는 미친짓거리를 하냐? [....] 왜 씨발 젖꼭지 사진도 한장 없는 곳이었지만 니들이 보기엔 보짓물이 넘쳐나서 안지우곤 못배기겠더냐"
- 레진,
야이 티스토리 개새끼들아 중에서
당신의 동료 블로거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놈의 블로그파워니 파워블로거니 '참여니 공유니 개방'이니를 떠드나. 무슨 놈의 사회적인 모순을 이야기하고, 부조리를 씨부리나. 다시 말하지만, 이건 레진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냥 블로거라는게 스스로 쪽팔린 거고, 그 쪽팔린 걸 그대로 나둬야 하나... 이런 문제다. 찍소리라도 내야 하지 않겠나?

부연하자면, 지난 올블 사태에서 '올블 같은 반노동기업'은 상종하지 말자고 외치며 올블에서 탈퇴했던 블로거들(나는 물론 그 판단에 이견이 있지만, 그럼에도 그 판단을 당연히 존중한다), 특히나 나도 꽤나 좋아하는 매력적인 글을 쓰는
어떤 블로거가 생각나는데... 동일한 판단표준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마땅하지 않나 싶다. 특히나 소위 파워블로거로 불리는 블로거들은 더더욱 깊은 의무감을 느껴주길 바란다. 코딱지 만한 것이긴 하지만, 그건 그 권력에 마땅히 부여되는 의무와 같은 거다. 티스토리와 다음 블로거뉴스는 서로 딴 몸이 아니다. 올블을 성토하던 그 높은 도덕성과 비판정신을 다시 떠올려주길 바라는 바다.

블로거 지역 공동체를 고민하는 컨퍼런스(물론 다음 블로거뉴스 부흥회 같은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에 참여할 만큼 열렬한 블로거들 역시도 마땅히 레진 사태에 대한 관심을 표명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 그리고 최근 '뻘글'로 홍역을 앓았던 쿱미디어의 글도 기대해본다. 얼마나 좋은 기횐가? 쿱미디어의 '인터넷 지켜보기'란 표어가 "역시 이람님이다"... 류의 순진한 애정고백을 위한 표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옆에 있는, 서로 함께 "시간과 열정과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던 그 동료 블로거 문제부터 이야기해야 순서가 아닐까 싶다.


* 이 글은 연재를 염두에 둔 글이다.
다음으로는 '레진 사건에 대한 전망'("빨간 약 먹을래? 파란 약 먹을래?"에 대한 대답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이어진다. 실은 이어질 예정이다. 그런데, 내 평소 게으름을 생각하면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ㅡ.ㅡ;

* 후기.
(무슨 후기씩이나.. ) 어제는 내가 신뢰하고 존경하는 블로거 중 한명인 새드개그맨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새벽, 그의 퇴근길에 내가 전화했다...ㅡㅡ; ). 특히 레진 사건과 관련해서는 최근 판례나 포털이 사업자로서 갖는 어쩔 수 없는 딜레마 등에 이야기했다. 서로 공감하는 영역이 크긴 했지만, 때로는 이견도 없지 않았다. 시간이 허락할는지는 모르겠지만, 레진 사건에 대해서 만큼은
새드개그맨이 마이크를 잡았으면 좋겠다.

* 이 글은 다음 블로거뉴스에 송고한다.
다음 블로거뉴스가 "블로거뉴스"라는
우스꽝스런 명칭을 바꾸고, 악질적인 프레임 주소를 개선한다고 한다(이 약속이 언제 어떤 수준으로 지켜질지도 관심사다). 물론 반가운 소식이다. 그런데 내가 굳이 별다른 노출도 확대에 기대감도 없이 다음 블로거뉴스에 송고하는 이유는 이런 소식 때문은 아니다. 레진 사건은 다음 블로거뉴스라는 유통망에서 소통되어야 마땅한 이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 관련 추천글
레진 사건, 표현의 자유의 상품 가치 (capcold) : 레진블로그에서 이 글을 링크로 거는 바람에 트랙픽 급상승이네. ㅎㅎ. 좋은 글 나눠 읽기 차원에서 여기에도 capcold의 글을 링크한다. 일독 강하게 권하는 바다.

* 이 글은 다음 글로 이어진다.
청소년 보호 논리의 허구성 : 레진 사건의 의미와 전망 2.



  • * 표시 : 쟁점 및 역사적 의미
  • ( ) 표시 : 헌법학 체계상 위치
  • ** 표시 : 판결문 발췌 인용
  • (일부) 위헌 : 진한 붉은색
  • 불합치 : 다홍색
  • 합헌 : 녹색
  • 각하 : 보라색

- 변형 판결에 대해
위헌(양적 일부위헌 포함. 한정위헌을 질적 일부위헌이라고 부르는 것과 대비해서 양적 일부위헌이라는 표현도 쓴다. 그냥 위헌이라고 보면 된다)과 합헌 외에 변형 판결에 관해서는 간략하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서 쓴다.
ㄱ. 헌법불합치 : 위헌이지만 위헌인 법률의 효력을 정지시킬 때 수혜자가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그 형식상 효력만을 인정(국회입법을 촉구하면서 잠정 적용의 경우. 적용중지 헌법불합치도 존재)
ㄴ. 한정위헌(질적 일부위헌) : ~라고 해석하는 한 위헌이라는 결정.
ㄷ. 한정합헌 : ~라고 해석하는 한 합헌이라는 결정.

위 변형판결에 대해선 특히 당시 변정수 재판관의 비판을 눈여겨 볼 만하다.
변재판관 왈, "합헌이면 합헌이고, 위헌이면 위헌이지" (개뿔)


1. 구 사회보호법 5조 ①항 [단순위헌]
89.7.14. 88헌가5,8, 89헌가44(병합) 사건

* 합헌적 법률해석의 의의와 한계 (총론)
** 법률의 합헌적 해석은 헌법의 최고규범성에서 나오는 법질서의 통일성에 바탕을 두고, 법률이 헌법에 조화하여 해석될 수 있는 경우에는 위헌으로 판단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권력분립과 입법권을 존중하는 정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법률 또는 법률조항은 원칙적으로 가능한 범위 안에서 합헌적으로 해석함이 마땅하다. 그 해석은 법의 문구과 목적에 따른 한계가 있다. 즉, 법률의 조항의 문구가 간직하고 있는 말의 뜻을 넘어서 말의 뜻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변질되지 아니하는 범위 내이어야 한다는 문의적 한계와 입법권자가 그 법률의 제정으로써 추구하고자 하는 입법자의 명백한 의지와 입법의 목적을 헛되게 하는 내용으로 해석할 수 없다는 법목적에 따른 한계가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범위를 벗어난 합헌적 해석은 그것이 바로 실질적 의미에서의 입법작용을 뜻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입법권자의 입법권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입법권자의 의지는 재범의 위험성 유무를 불문하고 반드시 감호의 선고를 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 한정합헌을 한다면 법의 문구와 목적에 따른 한계를 벗어나는 것으로서 입법권의 침해가 된다. 따라서 당해 법률조항에 대한 합헌적 해석은 문의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합헌적 법률해석의 가능성이 없으므로 단순 위헌을 선고할 수밖에 없다.


2. 5.18불기소 (=사건종료설) [취하 -> 종료]
95.12.15. 95헌마221.233.297(병합) 사건

* (검찰이 주장하는) '성공한 내란의 불가벌'이 당연한 법리인지 여부 및 내란에 대한 국민의 승인 여부 판단. (헌법 수호)
** 성공한 내란행위자를 처벌할 수 없는 것은 법리상 당위로서 도출되는 규범적 결과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형벌법규는 피청구인(=검찰)이 주장하듯이 그것이 금지하는 범죄행위의 성공사실 자체로 인하여 곧바로 폐지되거나 그 내용이 변경되는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범죄행위가 그 성공 여부에 의하여 형벌법규는 피청구인이 주장하듯이 그것이 금지하는 범죄행위의 성공 여부에 의하여 형법법규의 존폐를 좌우할 수 있다는 논리는 법의 본질에 반하고, 법의 존엄을 해지는 것으로 결코 용인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권력의 장악에 성공한 내란행위자에 대하여는 국민으로부터 정당하게 국가권력을 위탁받은 국가기관이 그 기능을 회복하기까지 사실상 처벌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는 것 뿐이며, 훗날 정당한 국가기관이 그 기능을 회복한 이후에는 그 동안 사실상 불가능하였던 처벌이 실현될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국민이 완전히 자유롭게 주권적인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상태에서 내란행위에 대하여 승인을 하였다면 그 내란행위는 국민 전체의 의사에 의하여 정당화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경우에는 국민이 자유롭게 그들의 주권적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상태에서 피의자들의 이 사건 내란 행위에 대하여 승인을 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3. 국가보위특별조치법 5조④항 [위헌]
94.6.30. 92헌가18 사건

* 국가긴급권과 헌법질서의 수호 및 저항권 (헌법 수호)
** 국가긴급권은 국가의 존립이나 헌법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한 경우에 국가를 보전하고 헌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헌법보장의 한 수단이다. 그러나 국가긴급권의 인정은 국가권력에 대한 헌법상의 제약을 해제하여 주는 것이 되므로 국가긴급권의 인정은 일면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여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권력의 집중과 입헌주의의 일시적 정지로 말미암아  입헌주의 그 자체를 파과할 위험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헌법에서 국가긴급권의 발동기준과 내용 그리고 그 한계에 관해서 상세히 규정함으로써 그 남용 또는 악용의 소지를 줄이고 심지어는 국가긴급권의 과잉행사 때는 저항권을 인정하는 등 필요한 제동장치도 함께 마련해 두는 것이 현대의 민주적인 헌법국가의 일반적이 태도이다.


4. 국적법 부칙 7조의 "10년 동안" 부분 [잠정적용 헌법불합치]
2000.8.31. 97헌가12 사건

* 부계혈통주의에 의한 국적취득의 위헌성에 대한 판단. 전체 가족의 국적을 家父에만 연결. 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폄하하고 모의 지위를 침해. (국적)
** 국적취득에서 혈통주의는 사회적 단위인 가족에로의 귀속을 보장하는 한편 특정한 국가공동체로의 귀속을 담보하며 부모와 자녀 간의 밀접한 연관관계를 잇는 기본이 된다. 만약 이러한 연관관계를 부와 자녀 관계에서만 인정하고 모와 자녀 관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가족 내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폄하하고 모의 지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법조항은 헌36조①항이 규정한 가족생활에서의 양성의 평등원칙에 위반한다.


5.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 6조 [양적 일부위헌]
89년 가7

* 기본권의 효력이 국가작용에 미치는지 여부 (헌법전문)
** 국가가 민사소송의 당사자라고 해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우대받아서는 안된다. (기본권의 효력이 미친다고 판단)


6. 재외동포법 2조2호와 시행령3조 [헌법불합치]
2001.11.29. 99헌마494 사건

* 평등권침해의 판단기준 (국적)
* 국민의 기본권에 관한 차별에 있어서 합리적 근거에 의한 차별이라고 하기 위하여는 우선
ⅰ… 차별의 목적이 헌법에 합치하는 정당한 목적이어야 하고 (정당성)
ⅱ… 다음으로 차별의 기준이 목적의 실현을 위하여 실질적인 관계가 있어야 하며 (실질적 인과)
ⅲ… 차별의 정도 또한 적정한 것이어야 한다. (적절성)
본 사안에서 "정부수립이전" 부분은 평등권에 반한다.


7. 5.18 특별법 2조 [합헌]
96.2.16. 96헌가2, 96헌바7.13 (병합) 사건

* 개별사건법률이 예외적으로 합헌성을 획득하는 경우 (법치국가의 원리)
** 원칙적으로 법률은 일반적이라야 함으로 개별사건법률은 평등원칙에 반한다. 그러나 합리적인 이유로 정당화될수 있는 경우 합헌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올바른 헌정사의 정립을 위한 공익목적이 입법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개별사건법률금지의 원칙이 법률제정에 있어서 입법자가 평등원칙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특정규범이 개별사건법률에 해당한다 하여 곧바로 위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특정 법률 또는 법률조항이 단지 하나의 사건만을 규율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차별적 규율이 합리적인 이유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경우에는 합헌적일 수 있다.


8. 국제그룹해체 사건 [위헌확인]
93.7.29. 89헌마31

* 공권력행사로 인한 재산권침해 (경제적 기본질서)
** 헌119조 ①항은 시장경제의 원리에 입각한 경제체제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는 기업자유의 표현이며, 국가의 공권력은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이에 대한 불개입을 원칙으로 한다.  나아가 헌법 126조는 국방상 또는 국민경제상 긴절한 필요로 인하여 법률이 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영기업의 경영권에 대한 불간섭 원칙을 보다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9. 구 축협법 99조 복수조합 설립금지 [위헌]
96.4.25. 92헌바47

* 우리 헌법상 경제질서의 성격 (경제적 기본질서)
* 리나라 헌법상 경제질서는 사유재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자유경쟁을 존중하는 자유시장경제질서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이에 수반되는 갖가지 모순을 제거하고 사회복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국가적 규제와 조정을 용인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10. 소파(한미행정협정) 3조 ①항 등 [각하]
2001.11.29. 2000헌마462

* 용산 미군 독극물 방류사건 및 맥카시의 윤금이 살해사건 (조약, 국제법규)
** 청구인의 기본권행사와 원칙적으로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다(기본권 침해를 인정하지 않음). 협정 3조① 및 4조 ①항 부분은 환경에 관한 사항을 규율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독극물 방류를 근거지우거나 정당화하는 근거조항은 더더욱 아니다. (잘났다. ㅡ.ㅡ;  )



추.
두세번(세네번?)에 걸쳐 나눠 올린다.
예전 교양법학 시간에 정리했던 걸 다시 손봐서 올리는 것에 불과하다. 

헌법에 관해서는 (실제로) 도사급인 블로거 '행인'의 관련글(행인이 선정한 역대 10대 판례 뭐 이런)을 기대해본다.
물론 시간이 허락할는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