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기도가 되는 곳... via media

2008/08/27 18:52
거기다 적은 글들로 심기가 불편한 분들이 뒷담화하거나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통에 마음이 산란했다. 이런 일로 마음에 파장이 이는 건 분명 내 그릇이 작은 탓이요, 마음이 깊지 않은 탓이겠다.

수련과 내공이 깊지 못해서 얻은 상처라 해도, 우선 싸매고 치료하고 봐야 한다. 자칫 만신창이가 되면 남겨둔 수련의 일정을 소화할 틈도 없이 불구가 되어 하산해야 한다. 예전엔, 죽도록 싸워봐야 하리, 했는데, 돌아보니 객기였을 성 싶다. 우선 싸매고 보살펴야 한다. 몸과 마음을 움츠리는 건 자연스런 보호 본능이다.  [....]

게시판에서 그야말로 장난질하는 사람이나 뒷담화하는 분들은 극히 적은 한 두 사람에 불과하고, 사실 또다른 배려의 대상이요, 기도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 화살에 맞는 사람은 그 충격을 감당하고 그 상처를 싸매느라, 혹은 그것이 나중에 덧나지 않을까 걱정하며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그러니 이 참에, 사서 고생하는 일은 그만 두어야 할까?

- 주낙현, 집으로 돌아오는 길 1. 중에서.


“아무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포용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일이나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관용이라고 한다면, 이는 포용과 관용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톨레랑스는 톨레랑스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불용(앵-톨레랑스)을 포함하는 것인데.”

- 집으로 돌아오는 길 2. 중에서


블로깅하다 마음 지치면, 가서 위안만 찾고...
또 그렇게 염치 없이 잊고 지내다, 또 마음 어지러우면, 다시 그렇게 찾는...
그런 곳이 있다.

'via media : 주낙현 신부의 성공회 이야기'

오늘도 오랜만에 그곳을 찾았다.
그런데 우연처럼 거기에 내 마음이 있더라.
내 쓸쓸한 마음 거기에 있고, 그 마음 풀어놓고, 그렇게 스스로 바라보고, 응시하는 글이 있더라.

나 역시 세상을 참 쉽게도 경멸하지만, 세상은 참 신기해서, 그 경멸을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성찰들을 만나게 해준다. 그런 성찰을 만나면 마치 그 우연이 나에게만 있는 축복처럼 새삼 신비롭게 느껴지는 거다.  나는 빨강머리 앤을 너무 좋아하는데, 앤이 그랬다. "세상을 경멸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언젠가도 어떤 글에선가 인용한 문구지만, 앤의 바람처럼, 세상을 경멸하기 위해 살고 싶지는 않다.

내가 좋아하는 한 형님이 있다. 그 형님은 소위 386인데, 첫 입학한 의대에서 제적당하고, 다시 역사학과에 들어가서 운동하다 구속되고, 최근까지는 대리운전을 하시다가, 지금은 답사를 하시면서 책을 쓰신다. 그 형님은 일제시대가 다시 와도 나는 이제 운동 안한다, 이런 회한이 담긴 말씀도 언젠가 하셨는데, 그 형님을 생각하면 나에게 들려준 이런 말이 떠오른다.

"너는 미제를 좋아하는 사대주의자다. 그래도 아는 것만 말해서 좋고, 소박해서 좋아."

나는 미사대주의자란 소리는 태어나서 그 형님에게 처음 들었다. 왜 그런 말을 나에게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내가 알고 이해하고, 느끼고, 어느 정도는 나에게 머문 것들에 대해 내가 이야기한다고 말씀해주셔서 나는 참 기분이 좋았고,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했다.

역시나 같은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수다장이고, '고독도 가나와 함께라면 감미롭다'류의 유치한 CF 카피의 세계, 그 감수성의 바닥에서 한치도 올라올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란 인간이 그렇다...

얘기가 옆으로 샌 것 같기는 하지만, 주낙현 신부님의 글들은 그 형님을 떠올리면 느껴지는 그 말의 풍경들처럼 나에게는 항상 따뜻하고, 포근한 어떤 공간이고, 시간이다. 거기엔 마치 내가 가끔씩 "태어나길 참 잘 했어..." 이렇게 느끼는 봄밤, 불켜진 초저녁의 감미롭고, 따뜻한 바람이 낮게 불고 있는 것 같다.

주낙현 신부님의 글은 우리가 지켜야 하고, 또 견뎌야 하는 것들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자는, 기꺼이 즐겁게 고민하자는 메시지를 그 안에 담고 있다. 그건 글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로 기도다. 나는 성당에 나간지도 한참이고, 영세도 뭣모르고 어릴 적에 날림으로 받았지만... 주낙현 신부님의 기도는 종교적인 신념을 떠나 언제나 깊은 감동과 위로를 나에게 준다.

주낙현 신부님 글에서 다시 우연한 선물처럼 깊은 위안을 얻어서...
그 고마움을 적어봤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 발아점
주낙현, 집으로 돌아오는 길 1.
집으로 돌아오는 길 2.




Urtextedition

2008/08/27 04:44
사용자 삽입 이미지


Urtext edition이라는 블로그가 있다. 글이 너무 짧고 솔직하게 쓴 흔적이 있으나 거기에 애정과 고민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 대개는 무의미한 배설에 머문다. 세상이 못마땅하지만, 세상을 바꾸기엔 너무 게으른 것 같다. 애정결핍이 만든 미숙아적 기형이 틀림없다. 안타까울 따름이다. 친구야  Urtextedition 글도 보내지 말아 주길 바란다. 잘. 잘. 잘.


경멸에 대해 경멸로 대답하는 건 대개는 가장 치명적인 시간낭비일 확률이 높다.
나는 그런 경멸로 대답하기는 싫었다.
그런 유혹이 없지 않았지만.
그렇지만...
이렇게나마 대답하고 싶었다.
이건 내 나름으론 우호적인 말걸기다.

그를 잘 모르지만, 왠지 궁금하다.
그는 나를 얼마나 읽었을까...
기형이라는 말은 참 충격적일만큼 격렬한 언어인데, 그가 쓴 지난 글들을 읽으니, 그 기형이라는 말에 어떤 깊은 고민이 담긴 것 같지는 않고, 그냥 지나가는 넋두리나 신경질인 것 같아서 좀 아쉽긴 하다... 기형이다.. 라는 말이 애정과 고민에서 나온 비판이었다면, 그런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비평언어였다면 나는 아마도 감동했을지도 모르겠다.

덧. 가만히 글을 다시 읽어보니 '펑크 관련글'만을 읽고 '미숙아적 기형'으로 선언하고 있는 것 같다. 슬슬 짜증이 난다... 나는 왜 이렇게 순진한가... 싶은 그런 짜증. 이 글도 괜히 썼다는 생각이 들고... 이 글은 언제 폭파할지 모르겠다. 당분간은 폭파할 생각 없지만. (만약에 댓글이 있다면...) 댓글의 안녕을 장담할 수 없다. 의미없는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만큼 허무한 것도 없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기형이 맞다.
그게 좀 슬프기도 하다.
그게 좀 기쁘기도 하지만...
나는 내가 항상 잘못된 것 같고, 그건 그런데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할테지만...

아, 그리고 좀더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렇다.
전영혁은 아니다.
정성일은 맞다...
정성일이 나라는 실존의 주형을, 그 거푸집을 설계한, 그래서 나를 만든 '나에 관한 창조자'들 가운데 하나인 것은 맞지만, 그는 무수히 많은 나라는 인간에 관한 창조자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실은, 쓸쓸하게도 점점더 희미해지는 이름 가운데 하나다. 물론 그게 정성일이 나에게 소중한 이름이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고 좀더 고백하자면 잘 모르는 것에 쓰는 건 정확히 맞다. 왜 내가 뭔가를 가르치는 것 같다고 느꼈을까... 갸우뚱하게 된다. 나는 뭘 가르치기 위해 쓰지 않고, 그럴 주제도 안된다. 예전에도 말했지만, 대개는 궁금하기 때문에, 배우기 위해서, 실은 그저 대화하기 위해, 뭔가 답답하기 때문에, 지랄같기 때문에, 혹은 습관으로 쓸 뿐이다.

그 바탕에는 자기 위안이 있다.
글을 쓰는 건 스스로에 대한 위안이 되는 것 같아서...
그건 때론 아주 쌍스런 자기 배설이 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위행위를 한다.

물론 거기에는 또....
아주 작은 희망, 서로 함께 좀더 재밌게 살고 싶어...
이런 희망 말이다...
그런게 있기도 하다.


끝으로, 사소하게 궁금한 게 있다.
"친구야 민노씨.네 글도 보내지 말아 주길 바란다."

이건 무슨 의밀까?



추.
1. 사소한 오타. '공들려'

2. 링크는 의도적으로 생략한다. 같은 형식으로 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3. 물론 이런 글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에게 막연히나마 끌린다. 아마도 칭찬에 익숙해진 내 온라인실존의 어처구니 없는 모습에 나조차도 별다른 감흥없이 익숙해진 탓일테다. 나는 여전히 애정결핍이긴 하지만... 그리고 아주 형식적인 칭찬에도 나는 마치 아이처럼 기쁜 마음이 되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애정이 담긴 비판이다. 애정이 없다면 굳이 경멸적인 언어를 씨부릴 이유도 없다. 내가 무슨 공적인 인물도 아니고...

4. 그의 씨부림이 권장할 만한, 예의있는 방식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나에겐 많은 자극이 된다. 요즘 워낙에 감흥도 없고, 어떤 자극도 자극이 안되서.... 그런데 이번엔 좀 자극이 되는 것 같다. "미숙아적 기형"이라는데 자극이 안되면 것도 이상하긴 하다. 이런 격한 단어들은 쉽게 지워지는 것도 아니고.. 언어 폭력에 가깝다는 생각도 드는데..ㅎㅎ. 건 그렇고, 최소한 그런 말을 어떤 누군가에게 씨부릴 때는 그 누군가가 대답할 수 있는 기회는 마련해 주면 좋겠다. 특히나 가장 최근 글(퍼머링크 나불 나불)은, 어떻게 최소한의 애정도 없이 그렇게 함부로 나불될 수 있는지 불가사의하다. 내 글에 대한 경멸보다 훨씬 더 불쾌하다. 그건 스스로에게도 매우 경멸적인 태도다. 가장 쓸쓸한 자기경멸이다. 어떤 냉소적인 제스처로 씨부려도 그게 달라지는 건 아니고, 반복이지만, 애정 없는 상대방에 대해 필요 이상의 언어를 쥐어짜낼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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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는 펑크다

2008/08/26 05:22
잠도 안오고...
원래는 강간에 관한 판례를 정리하고 싶었는데, 히치하이커의 트랙백을 읽고, 역시나 삘 받아서...


히치하이커, 난 펑크를 모른다.


0. 나도 히치하이커를 참 좋아한다. : )
언젠가 그가 살부의식을 느낀다고 했을 때부터 그가 좋아졌던 것 같다.

이건 그렇지만 이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러니 히치하이커가 나에게 "난 민노씨를 꽤나 좋아한다"고 고백(?)해준 것에 대해 나는 무척 고맙게 생각하지만(물론 예쁜 여자 블로거가 그랬다면 좀더 고마웠겠지만... 이것도 쿱미디어의 뻘글에 버금가는 뻘발언 같지만...: ), 이 역시도 그와 나의 '펑크'에 관한 어떤 견해 차이, 혹은 오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1. 펑크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다시 [키노]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아니 키노의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아니 정성일을 만나게 해준 정은임의 [FM 영화 음악]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언젠가 [FM 영화음악]에서 정성일이 '아키라'와 '블레이드 러너' 등등의 영화를 이야기하며 '사이버 펑크'를 이야기한 적 있다. 당시 영화광들 사이에서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갖는 다소 무거운 SF를 이른바 '사이버 펑크'라고 부른다는 거였는데, 그 때 정성일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이버 펑크 모르면 영화광 자격 상실이라면 저는 기꺼이 영화광 자격 상실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정성일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펑크는 저항입니다.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가 왜 '신이시여, 여왕을 구하소서'라고 절규하면서 죽어갔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왜 그렇게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아가리에 총구를 집어 넣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저항 정신이 없는 펑크는 펑크가 아닙니다. 저항정신은 쓰레기장에 쳐박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폼나는 이야기를 하는 건 펑크가 아닙니다. 펑크정신은 이미 모두 죽어버린 펑크가 무슨 펑크입니까?"


2. 나는 그게, 그 정성일의 목소리가, 그 옆에서 이야기 듣고 있었을 정은임이, 그 새벽의 라디오가, 다소 격정적으로, 어떤 찰라의 연극처럼, 어떤 폭풍같은 비극처럼 폼나게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사이비다.


3. 다시 정석원의 인터뷰가 있는 [키노]로 넘어오자.

Q(키노). '인디밴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A(정석원). 인디정신이니 펑크정신이니 떠드는데 연주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 '펑크'가 있다면, 'DJ D.O.C'다.


이 인터뷰가 나에게 '감동'적이었던 이유,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이 인터뷰의 맥락이 '사이버 펑크' 이야기의 맥락과 같기 때문이다(같다고 나는 느끼고,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성일이 야유를 퍼부었던, 사이버 펑크 모르면 영화광 자격 상실이라던 '유치한 가짜 펑크'들에게 보내는 야유를 정석원은 겉멋에 취한 당시 인디밴드들의 어떤 '경향'에 대해 똑같이 날린거다.

인터뷰의 문맥들이 전부 기억나지는 않기 때문에 정확히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인터뷰에서는 어떤 인디밴드에 대해선 꽤 호의적인 평가를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정석원은 그냥 자기 꼴리는대로 이야기했을 뿐이고, 거기에 무슨 엘리트 의식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DJ D.O.C가 펑크라고 이야기한 건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지, 인디밴드들을 엿먹이기 위해 그런 건 또 아니다. 그러니까 정말 DJ D.O.C의 음악을 싸구려 클럽 댄스 음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쟤들은 지들 놀고 싶은데로 노는구나, 뭐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한 것 같다고 나느 느꼈다.

그런 즉, 뭐 뻔한 이야기지만, 나는 정석원이 엘리트 음악인이기 때문에, 혹은 내가 연주지상주의자이기 때문에, 정석원의 그 발언에 감동했다고 한게 전혀 아니다.

아, 그리고 그 인터뷰는 90년대 후반에 이뤄진 인터뷰다.
아마도 10년은 넘은 기억일테다.
그러니 이 글은 그 온전한 기억은 아니다.
대개는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억일테지만.


4. 컬트 십계명.

언젠가 펑크가 마치 유행인것처럼 이야기되던 때에 컬트라는 영화 현상이 함께 유행인 적 있다. 그 때 역시나 영화잡지 [키노]에서 펑크 십계명을 특집기사로 올렸던 기억이 있다.
그 중 기억나는 두 가지는 이거다.

"어제의 컬트가 오늘의 컬트는 아니며, 거기의 컬트가 여기의 컬트는 아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계명은 이거였던 것 같은데... )

"컬트는 컬트다."

그 어투를 빌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펑크는 펑크다.
그리고 여기의 펑크가 거기의 펑크는 아니며, 오늘의 펑크가 어제의 펑크도 아니다.

하지만 저항정신이 없다면, 그건 정말 펑크가 아니다.
하지만 저항정신만 있다고 해서 그게 펑크(음악!)이 되는 건 또 아닌 것 같다.

이 지점에서는 나는 후진 연주에 대해서, "우리는 펑크밴드라서 연주는 중요하지 않은걸!"이라고, 그게 무슨 대단히 폼나는 정당화라도 되는 양, 그렇게 자신의 게으름을 장식하려는 태도에 대해 공감해줄 수는 없다.


5. 음악은 그냥 음악일 뿐이다.

어떤 훌륭한 작곡과 훌륭한 연주에 대해선, 그 음악에 펑크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뽕짝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나는 그 음악들에 어떤 위계도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음악들은 모두 훌륭하다. 모두 똑같이 저마다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메탈리카가 위대한 만큼 심수봉은 위대하다.
유재하가 위대한 만큼 (지금은 지상파에서 생계에 여념이 없는) DJ D.O.C도 위대하다.

물론 나에게는 메탈리카가 가장 위대하긴 하지만... ㅡ.ㅡ;

펑크가 펑크인 이유는 펑크가 펑크가 아니기 때문이다.
펑크는 궁극적으론 자신을 부정하고, 극복하고, 엿먹이려는 정신이라고 나는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물론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아무런 열정없이, 그저 차갑게 식은 기억의 집 속에 은둔하는 나를 엿먹이는 것도 참 멋진 펑크렸다).

아,

"정석원의 말은 주류 쪽에서도 엘리트 코스(특히 어덜트 컨템퍼래리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다가 고급스런 이미지를 갖게 된 부류)를 밟아온 이들이 펑크에 대해 자주 하는 말이다. '것도 연주냐?' 이거지.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펑크를 안다면, '넌 연주가 어째 그 따위냐'같은 면박을 펑크를 지향하는 이에게 한다는 게 얼마나 웃긴 일인지 금새 알 수 있을 게다. (물론 펑크라고 다 단순하고 어설픈 연주를 지향하는 건 결코 아니다.)" (히치하이커)


여기에 대해선 좀더 부연하고 싶은게 있다.
정석원은 그저 대중음악가로서,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철학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라고 나는 느꼈다(물론 이것 역시 매우 희미한 기억이다).

나로선 우리나라 소위 음악 마니아들에게 매우 실망한 기억이 있는데, 가령 메탈리카의 'Load'앨범이 발매된 시점에서 메탈리가 '쓰레쉬메탈'의 본령을 저버렸다는 둥, 너바나 이후의 얼터너티브를 메탈에 수용했다는 둥의 이유로(이게 무슨 이유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메탈리카가 변절했다'는 류의 이상한 집단적인 실망감이 떠돌았던 적 있다.

이건 정말 음악을 박제화하려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히치하이커의 위 발언이 그렇단 의미는 전혀 아니지만, 펑크 이전에, 메탈 이전에, 댄스 음악 이전에...(물론 나는 락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댄스 음악이 락음악에 비해 저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다를 뿐이지) 음악은 그냥 음악이라는 태도가 가장 우선해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음악을 너무 마니아들만의 비평언어로 가두지는 않기를 바란다(물론 히치하이커가 그렇다는 의미는 또 아니다).

비평은 새로운 창작인데, 그게 창작인 이유는 그 비평이 어떤 텍스트(그것이 음악이든 문학이든 그 무엇이든)를 가두는 행위가 아니라, 그래서 그 텍스트를 박제된 언어로 고정하고, 그 의미를 고갈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 텍스트를 해방시키기 위한,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일탈이며,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연애감정 같다. 가두고 싶지만, 그럴수록 그건 더이상 사랑이 아닌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 연애(감정)은 너무 치열하고, 쉽게 집착이 되며, 그래서 생명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비평이 창작이 되려면 연애가 아니라,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에는 연애감정에는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대상적이지 않고, 관계적이다.



* 발아점
히치하이커, 난 펑크를 모른다.



* 관련 추천글
foog, 펑크의 자기 부정에 대한 단상  (짧은 글)
뮤즈홀릭,펑크학 입문 : Punk Generation 101 (긴 글)






1. 시사저널 부활했나요?

시사저널이라면 삼성 비판 기사를 편집부에서 '검열'함으로써, 그리고 이 사건을 기화로 기자들이 뛰쳐나가고, 그들이 '시사IN'이라는 새로운 매체를 만들어냄으로써, 결국 시사저널이라는 매체의 실질적인 의미는 '쫑'난 거 아니었나요?
개인적으론 시사저널은 역사 속으로 완전히 묻어버렸는데 말이죠.

새로운 인적교체가 있었던건가요?
뭔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던건가요?
왜 미디어오늘에서, 것도 개인적으론 꽤 신뢰하는 류정민 기자가 이런 홍보용 기사를 쓰는걸까요?

언론신뢰도,한겨레 KBS MBC 1~3위 (미디어오늘, 류정민)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1703


2. 궁금증은 깊어만 가고...

ㄱ. "반가운 시사저널" (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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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사망선고 받은 시사저널" (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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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에 댓글을 남긴 만수님과 흠냐님의 상반된 반응이 제 궁금증의 요체입니다.

반가워해야 하는 일인가요?
아니면 사망선고 받은 시사저널 홍보해주는 기사나 쓰고 있는 미디어오늘을 비판하고, 걱정해야 하는 일인가요?

이를 판단하기 위해선 시사저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알아야 할 것 같은데요. 만약에 시사저널이 여전히 '짝퉁 시사저널'인 상태에서 미디어오늘이 이런 홍보성 기사를 실었던 것이라면... 미디어오늘도, 류정민기자도 몹시 실망스러울 것 같네요.

사정을 아시는 분 혹시 계시면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너무 궁금해서 말이죠.

실력있는 기자이자, 정말 멋진 블로거이신 '그 분'이라면 사정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만...



* 보충
이정환님께서 솔직하고, 진지한 논평을 주셔서 본문에 보충합니다.

류정민 기자에게 직접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 짝퉁 시사저널도 이제 새로운 기자들이 들어와서 나름대로 열심히 만들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왜 수많은 직장 놔두고 굳이 이 말 많은 곳에서 일하는 것일까 생각하겠지만 이 사람들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을 겁니다.

이 기사를 인용 보도한 것이 짝퉁 시사저널을 홍보하는 일일까요. 같은 질문이지만 짝퉁 시사저널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뭔 소리를 하든 그냥 무시하고 이왕이면 아무도 안 봐서 하루 빨리 망하기를 바라야 하는 걸까요.

이 기사와 관련해서는, 아마 류 기자도 나름대로 기사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인용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뭐 시사저널 사태야 아직도 생각만 해도 복장이 터지지만 그리고 몇달이나 지났다고 벌써 그걸 잊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 자체가 팩트는 팩트인 거니까요.

과연 이 짝퉁 시사저널의 기사를 신뢰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일단 매체 자체에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어느 매체든 비판적으로 좀 거리를 두고 읽을 필요가 있겠지만 조중동이든 한겨레든, 짝퉁 시사저널이든 애초에 선입견을 깔아두고 접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짝퉁 시사저널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기사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비판해야겠지만 "니가 말한 거니 못 믿겠다"거나 "왜 저런 놈 이야기를 듣느냐"고 비난하는 것은 곤란하지 않을까요.

회사에 늘 들어오지만 저도 별로 내키지 않아서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조금만 더 여유롭게 생각합시다. 시사인도 이제 자리를 잡고 잘 하고 있고, 오히려 전화위복이 됐다고 할 수도 있으니, 이제 "그래, 이왕이면 너네, 할 거면 잘 해봐라, 시사저널 이름 쪽팔리지 않게." 뭐 그런 여유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도저히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고요? ㅎㅎ 뭐 멀리 내다보고 이제 승자의 여유를 가져도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조급할 거 없습니다.

- 이상 이정환님의 논평.


논평에 우선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 )
어느 한편으로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만... 그래서 글을 쓰면서도 생각이 '경계' 사이를 왔다 갔다...쓰면서 지우고, 쓰면서 지우고를 반복하지만...ㅡ.ㅡ;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으로선 다음과 같이 판단합니다.

저는 짝퉁 시사저널을 퇴장시켜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그저 망했으면 좋겠다는 감정적인 호불호가 아니라, (마땅히)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시사저널 사태가 지니는 그 '상징성'이 너무도 큽니다. 저널리즘이 지켜야 하는 최소한을 적극적으로 배반하면 짝퉁 시사저널처럼 망할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사저널에 새롭게 입사하신 분들께는 다소 서운하고, 비정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 분들께 어떤 유감도 없습니다만, 좀더 큰 당위의 차원에서 (짝퉁)시사저널은 마땅히 언론소비자들의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야 할 '지나간 역사'라고 저는 판단합니다. 그것이 참여적인 소비자(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과거의 행위로 인해 생겨난 선입견으로 현재를 재단하는 것이 옳지 않을 수 있겠지요. 하지만 시사저널 사태가 담고 있었던 문제의 '심각성'이 너무도 심대했다고 평가합니다. 그 문제의식의 연장에서 '짝퉁 시사저널'은 더 이상 언론이라고 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대한민국 언론에서 퇴장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이는 순전히 저 개인의 바람(?)에 불과한 것이고, 여전히 시사저널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의 자율적 선택까지를 적극적으로 비난하거나, 공격할 의지는 없습니다. 물론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는 하겠지만요. 전체적으론 '관심 없음'이 좀더 솔직한 표현이겠네요. 그리고 그것이 시사저널을 망하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론이기도 할테구요(물론 소극적인 실천론이겠지만요).

그런 소극적인 실천론이라는 차원에서 제가 그래도 애정을 갖고 있는 미디어오늘이나 한겨레(당연히 한겨레에서는 자신에 대한 우호적인 설문조사 결과를 홍보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사저널을 인용했으리라 예상하는데요) 모두에게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생기네요. 본문에 '실망'이라고 표현한 것은 나름의 애정에서 비롯된 아쉬움과 안타까움의 크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사이트 없나 싶었는데, 오늘에야 발견한 사이트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저는 EBS 지식채널e를 챙겨볼 정도로 애정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EBS 지식채널e'를 볼 때마다 느끼는 건 그 프로그램에 대한 제작자들의 애정과 열정입니다.
제가 이 3, 4분짜리 영상물을 만들기 위해 투여된 땀과 열정과 시간을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얼핏 듣기로는 한 편을 위해 수 백개의 동영상들, 관련문헌들을 조사하고, 검토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이 거짓이거나 과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EBS 지식채널e'를 보고 있노라면 여기에 담긴 일초 일초를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가 그대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EBS 지식채널e 자료검색 : http://syuae.net/ebs/
EBS 지식채널e 자료검색 RSS : http://syuae.net/ebs/rss_recent.xml

RSS 보다는 (분량이 방대한 관계로) 직접 사이트에 들어가서 검색하면서 이따금 살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관련 참조기사

EBS '지식채널ⓔ' PD 교체…'보복 인사' 논란 (미디어오늘)
지난 5월 EBS(사장 구관서) 경영진의 지시로 한 차례 결방된 뒤 청와대 외압 논란을 촉발했던 EBS TV <지식채널ⓔ>를 담당하던 김진혁 PD가 1일 정기 인사를 통해 교체된 것을 두고 보복성 인사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돼 논란이 일고 있다.

최시중 암시하는 듯한 ‘괴벨스의 입’ 동영상 화제 (데일리 서프라이즈)

448. 괴벨스의 입 (구성 : 김이진. 연출 : 김진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