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도 안오고...
원래는 강간에 관한 판례를 정리하고 싶었는데, 히치하이커의 트랙백을 읽고, 역시나 삘 받아서...
히치하이커, 난 펑크를 모른다.
0. 나도 히치하이커를 참 좋아한다. : )
언젠가 그가 살부의식을 느낀다고 했을 때부터 그가 좋아졌던 것 같다.
이건 그렇지만 이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러니 히치하이커가 나에게 "난 민노씨를 꽤나 좋아한다"고 고백(?)해준 것에 대해 나는 무척 고맙게 생각하지만(물론 예쁜 여자 블로거가 그랬다면 좀더 고마웠겠지만... 이것도 쿱미디어의 뻘글에 버금가는 뻘발언 같지만...: ), 이 역시도 그와 나의 '펑크'에 관한 어떤 견해 차이, 혹은 오해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1. 펑크를 이야기하기 위해선 다시 [키노]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아니 키노의 편집장이었던 정성일, 아니 정성일을 만나게 해준 정은임의 [FM 영화 음악]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언젠가 [FM 영화음악]에서 정성일이 '아키라'와 '블레이드 러너' 등등의 영화를 이야기하며 '사이버 펑크'를 이야기한 적 있다. 당시 영화광들 사이에서 무정부주의적 성향을 갖는 다소 무거운 SF를 이른바 '사이버 펑크'라고 부른다는 거였는데, 그 때 정성일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이버 펑크 모르면 영화광 자격 상실이라면 저는 기꺼이 영화광 자격 상실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정성일은 이야기를 이어간다.
"펑크는 저항입니다. 섹스 피스톨즈의 시드 비셔스가 왜 '신이시여, 여왕을 구하소서'라고 절규하면서 죽어갔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왜 그렇게 커트 코베인은 자신의 아가리에 총구를 집어 넣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저항 정신이 없는 펑크는 펑크가 아닙니다. 저항정신은 쓰레기장에 쳐박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폼나는 이야기를 하는 건 펑크가 아닙니다. 펑크정신은 이미 모두 죽어버린 펑크가 무슨 펑크입니까?"
2. 나는 그게, 그 정성일의 목소리가, 그 옆에서 이야기 듣고 있었을 정은임이, 그 새벽의 라디오가, 다소 격정적으로, 어떤 찰라의 연극처럼, 어떤 폭풍같은 비극처럼 폼나게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사이비다.
3. 다시 정석원의 인터뷰가 있는 [키노]로 넘어오자.
Q(키노). '인디밴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A(정석원). 인디정신이니 펑크정신이니 떠드는데 연주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나라에 '펑크'가 있다면, 'DJ D.O.C'다.
이 인터뷰가 나에게 '감동'적이었던 이유,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이 인터뷰의 맥락이 '사이버 펑크' 이야기의 맥락과 같기 때문이다(같다고 나는 느끼고,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성일이 야유를 퍼부었던, 사이버 펑크 모르면 영화광 자격 상실이라던 '유치한 가짜 펑크'들에게 보내는 야유를 정석원은 겉멋에 취한 당시 인디밴드들의 어떤 '경향'에 대해 똑같이 날린거다.
인터뷰의 문맥들이 전부 기억나지는 않기 때문에 정확히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인터뷰에서는 어떤 인디밴드에 대해선 꽤 호의적인 평가를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정석원은 그냥 자기 꼴리는대로 이야기했을 뿐이고, 거기에 무슨 엘리트 의식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DJ D.O.C가 펑크라고 이야기한 건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지, 인디밴드들을 엿먹이기 위해 그런 건 또 아니다. 그러니까 정말 DJ D.O.C의 음악을 싸구려 클럽 댄스 음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정말 쟤들은 지들 놀고 싶은데로 노는구나, 뭐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한 것 같다고 나느 느꼈다.
그런 즉, 뭐 뻔한 이야기지만, 나는 정석원이 엘리트 음악인이기 때문에, 혹은 내가 연주지상주의자이기 때문에, 정석원의 그 발언에 감동했다고 한게 전혀 아니다.
아, 그리고 그 인터뷰는 90년대 후반에 이뤄진 인터뷰다.
아마도 10년은 넘은 기억일테다.
그러니 이 글은 그 온전한 기억은 아니다.
대개는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기억일테지만.
4. 컬트 십계명.
언젠가 펑크가 마치 유행인것처럼 이야기되던 때에 컬트라는 영화 현상이 함께 유행인 적 있다. 그 때 역시나 영화잡지 [키노]에서 펑크 십계명을 특집기사로 올렸던 기억이 있다.
그 중 기억나는 두 가지는 이거다.
"어제의 컬트가 오늘의 컬트는 아니며, 거기의 컬트가 여기의 컬트는 아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 계명은 이거였던 것 같은데... )
"컬트는 컬트다."
그 어투를 빌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펑크는 펑크다.
그리고 여기의 펑크가 거기의 펑크는 아니며, 오늘의 펑크가 어제의 펑크도 아니다.
하지만 저항정신이 없다면, 그건 정말 펑크가 아니다.
하지만 저항정신만 있다고 해서 그게 펑크(음악!)이 되는 건 또 아닌 것 같다.
이 지점에서는 나는 후진 연주에 대해서, "우리는 펑크밴드라서 연주는 중요하지 않은걸!"이라고, 그게 무슨 대단히 폼나는 정당화라도 되는 양, 그렇게 자신의 게으름을 장식하려는 태도에 대해 공감해줄 수는 없다.
5. 음악은 그냥 음악일 뿐이다.
어떤 훌륭한 작곡과 훌륭한 연주에 대해선, 그 음악에 펑크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클래식이라는 이름을 붙이거나, 뽕짝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나는 그 음악들에 어떤 위계도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음악들은 모두 훌륭하다. 모두 똑같이 저마다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메탈리카가 위대한 만큼 심수봉은 위대하다.
유재하가 위대한 만큼 (지금은 지상파에서 생계에 여념이 없는) DJ D.O.C도 위대하다.
물론 나에게는 메탈리카가 가장 위대하긴 하지만... ㅡ.ㅡ;
펑크가 펑크인 이유는 펑크가 펑크가 아니기 때문이다.
펑크는 궁극적으론 자신을 부정하고, 극복하고, 엿먹이려는 정신이라고 나는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물론 이렇게 주저리 주저리 아무런 열정없이, 그저 차갑게 식은 기억의 집 속에 은둔하는 나를 엿먹이는 것도 참 멋진 펑크렸다).
아,
"정석원의 말은 주류 쪽에서도 엘리트 코스(특히 어덜트 컨템퍼래리 스타일의 음악을 추구하다가 고급스런 이미지를 갖게 된 부류)를 밟아온 이들이 펑크에 대해 자주 하는 말이다. '것도 연주냐?' 이거지.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펑크를 안다면, '넌 연주가 어째 그 따위냐'같은 면박을 펑크를 지향하는 이에게 한다는 게 얼마나 웃긴 일인지 금새 알 수 있을 게다. (물론 펑크라고 다 단순하고 어설픈 연주를 지향하는 건 결코 아니다.)" (히치하이커)
여기에 대해선 좀더 부연하고 싶은게 있다.
정석원은 그저 대중음악가로서,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철학으로 이야기했을 뿐이라고 나는 느꼈다(물론 이것 역시 매우 희미한 기억이다).
나로선 우리나라 소위 음악 마니아들에게 매우 실망한 기억이 있는데, 가령 메탈리카의 'Load'앨범이 발매된 시점에서 메탈리가 '쓰레쉬메탈'의 본령을 저버렸다는 둥, 너바나 이후의 얼터너티브를 메탈에 수용했다는 둥의 이유로(이게 무슨 이유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메탈리카가 변절했다'는 류의 이상한 집단적인 실망감이 떠돌았던 적 있다.
이건 정말 음악을 박제화하려는 우스꽝스러운 행동일 뿐이다.
히치하이커의 위 발언이 그렇단 의미는 전혀 아니지만, 펑크 이전에, 메탈 이전에, 댄스 음악 이전에...(물론 나는 락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댄스 음악이 락음악에 비해 저열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다를 뿐이지) 음악은 그냥 음악이라는 태도가 가장 우선해서 존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음악을 너무 마니아들만의 비평언어로 가두지는 않기를 바란다(물론 히치하이커가 그렇다는 의미는 또 아니다).
비평은 새로운 창작인데, 그게 창작인 이유는 그 비평이 어떤 텍스트(그것이 음악이든 문학이든 그 무엇이든)를 가두는 행위가 아니라, 그래서 그 텍스트를 박제된 언어로 고정하고, 그 의미를 고갈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 텍스트를 해방시키기 위한, 다른 세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일탈이며,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연애감정 같다. 가두고 싶지만, 그럴수록 그건 더이상 사랑이 아닌게 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 연애(감정)은 너무 치열하고, 쉽게 집착이 되며, 그래서 생명 없는 것이 되어버리기 쉽다.
하지만 비평이 창작이 되려면 연애가 아니라, 사랑을 해야 한다.
사랑에는 연애감정에는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대상적이지 않고, 관계적이다.
* 발아점
히치하이커, 난 펑크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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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Mųźёноliс Archives.
2008/08/26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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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The 70's Show' 1x22 - 하이드가 말하는 펑크의 정의 : Hyde : I just met the most amazing woman, Chrissy. And she just ditched her entire life to start over in New York, man. (나 방금 진짜 괜찮은 애 만났다, 크리시라고.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뉴욕에서 새로 시작할거래.) Eric : Wait. Why is she going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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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
역시 블로깅은 재밌다. 아래 글들은 이른바 Punk Spirit 에 관한 일련의 커뮤니케이션을 시간 순으로 나열해본 링크들이다. ‘웅크린 감자’님이 펑크적이지도 않은 빅뱅은 펑크 흉내 내지 말라고 화두를 꺼내셨고, ‘민노씨’가 ‘웅크린 감자’님의 훈계가 모순되게도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사고”를 기반으로 대안을 찾고 있다고 비판하셨고, ‘히치하이커’님이 “다만 실제로 국내 음악신에서 아이돌이란 위치에 있는 이들이 얼마나 자율적으로 음악을 하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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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8 16:00
del.
펑크 들으면서 연주력 운운하는 건 좀 이상한 일이다.
뭐 연주력 좋고 실력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더 좋은 건 또 아니겠다.
원래 펑크가 노래도 하고 싶고, 기타도 치고 싶고, 소리 지르...
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민노씨 덕분에 RSS 리더의 배를 불릴 수 있게 되었네요. :)
이런 글을 써야 하는데, 작가는 아니지만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래저래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별말씀을요.
겸손이 과하십니다.
레이니돌님 글 참 매력적입니다. : )
저도 어제 그 글 읽고 마음이 짠~했습니다.
누구나 그런 순간을 겪게 될 때가 있는데 성직자이시지만 모든 걸 포용한다 식이 아니라 솔직한 마음도 드러내 보이셔서 더 위로가 되었던 듯합니다.
펄님 말씀처럼 '자기를 드러내는' 행위가 갖는 감동이 그저 성직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물론 그 마음도 고결하기는 하겠지만요..)이 주는 감동과는 다른 좀더 인간적인 공감을 이끌어주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너는 미제를 좋아하는 사대주의자다."와 비슷한 말을 많이 들었고, 지금도 듣고 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동병상련 비슷한 감정을 느껴봅니다(왜 이런 말들을 들었는지, 듣고 있는지는 대충 알고 있지만). 요즘 rss로만 읽고 흔적을 남기는데 게을렀던 것 같습니다. 사실은 모두의 주낙현 신부의 "아무 말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을 포용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런 일이나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을 관용이라고 한다면, 이는 포용과 관용에 대한 배신이 아닐까? 톨레랑스는 톨레랑스를 억압하는 것에 대한 불용(앵-톨레랑스)을 포함하는 것인데.”라는 말을 다시 보기 위해서 들어왔다가, 흔적 남기고 갑니다.
손윤님 정말 오랜만에 댓글창에서 뵙네요.
너무 너무 반갑습니다. : )
추.
항상 말로만 끝났던...
이번엔 정말 조만간 맥주라도 시원하게 한잔... ㅡ.ㅡ;;
덕분에 좋은 곳을 알았사옵니다. : )
그러고 보니 저도 미제 참 좋아하는구만요. 하하.
고마운 댓글이로군요. : )
감솨~!
추.
저는 미제 별로 안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아, 미제 영화(드라마)와 미제 음악은 좀 좋아하긴 합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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