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래픽 제21차 공개회의입니다. 회의는 대외비로 할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개를 원칙으로 합니다(2009년 1월 1일 부터.) 블로거라면(독자도 물론이구요) 누구나 회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주 1회 원칙. 일요일 혹은 월요일을 공개 회의안 작성일로 정할까 합니다.

* 사과말씀
이번 주도 좀 늦어졌습니다.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핑계지만 저 개인적으론 지난 일요일과 월요일 봉하마을에 다녀왔어요(네, 핑계입니다. ㅡ.ㅡ;;). 거두절미하고 지난 주 활동을 간략히 정리하고, 앞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가볍게 제안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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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블로그래픽 좌담회 (2009.6.11. 종로 토즈)
'촛불, 노무현, 블로그' 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뭔가 거창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블로거로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을까, 그리고 그 준비를 위해 현시국을 어떻게 판단/평가해야 하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참석자는 겨울종소리, 링크, 새드개그맨, 써머즈, , 행인, 저 (가나다순) 이렇게 7명이 참석하셨고요. 3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 좌담회는 녹음되었고, 실험적으로 링크님께서 1부는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정리해서 블로그래픽에 올려야 하는데, 분량이 상당한지라 아직 정리하고 있지 못하네요.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좌담회를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새드개그맨님께서 팟캐스트를 제작하시면 정리에 굉장히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말이죠...;;;; 아무튼 좌담회에 참석한 블로거들께선 간단한 소감이라도 기록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2. 가시적 활동에 대한 압박감
현재는 블로그래픽 활동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감이 오히려 블로그래픽의 정체를 가져오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고 이렇게 계속 넋놓고 있어서도 곤란하겠지만요. 일전에 말씀드린 블로그래픽 규약 및 다음세대재단의 지원프로젝트에 관한 재검토가 필요할텐데요. 제가 이번 달까지는 이 두 가지 안에 대해서 기존 안을 최대한 존중하는 바탕에서 새로운 안을 제안하도록 하겠습니다. 동인들께서도 적극적인 참여를 당부드립니다.

3. 좌담회 정례화 및 참여 공개에 대해
현재 장소(강남쪽 회의실)를 협찬해주실 블로거벗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한달에 한번 정도 그저 부담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더불어 지난 6.11.에 있었던 좌담회는 사정상 블로그래픽 포럼 및 개별적인 연락을 통해서만 참석자들을 섭외했는데, 앞으로는 열린 방식으로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고민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싶은 독자 및 동료블로거의 참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좌담회를 이어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4. 3분링크
현재 잠정적으로 3분링크의 업데이트가 중단되고 있는데요. 중단해야 하는지, 아니면 계속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방식으로 컨셉을 바꿔서 이어갈지를 결정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블로그의 미래 : 위기의 블로그

2009/06/16 19:00
0.
“예술과 관련된 그 무엇도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T.W.아도르노)는 [미학이론]의 한 문장을 빌어 글을 시작하면, 이제 블로그와 관련된 그 무엇도 더 이상 자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단도직입으로 이야기하자. 블로그는 위기에 빠졌다. 현상적으로는 여전히 별다른 위기 징후를 보여주지 않는다. 블로그는 여전히 새로운 미디어로서 웹의 중추적인 콘텐츠 생산과 소비를 담보할 형식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성언론 역시 자신의 담론권력을 확장할 수 있는 웹 생산 및 유통 수단으로 블로그를 채택하고 있다(각 언론사닷컴의 하위 서비스로서의 블로그). 하지만 불행하게도 블로그 자체의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을 찾아보긴 쉽지 않다. 기성언론과 블로그간 관계도 대단히 피상적인 채로 머물고 있다. 블로그는 새로운 미디어로서가 아니라 그저 단순한 광고판으로 주목받을 뿐이며, 새로운 웹의 시대에 부합하는 창조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기성 목소리를 확장시키는 단순한 재생기, 확성기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블로거들 역시 '블로그는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대해선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 "자연스러운 것이 좋잖아!"라는 일견 당연한 목소리들은 하지만 또 동시에 얼마나 기성 권위에 순응하는 목소리인가.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성 시스템의 관성에 실존적인 고민과 창조적인 저항을 거세시킬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이제 블로그는 새로운 방식으로 고민되어야 할 시점에 도달해 있다. 아니 이제야말로 블로그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블로그의 미래, 그리고 위기의 블로그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1. 여전히 문제는 포털이다.
포털이라는 지배적인 웹 콘텐츠 유통권력은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다. 포털은 블로그의 가능성을 확대하고, 지지하는 형식인가, 아니면 블로그의 가능성을 제한할 한계로서의 형식인가. 포털은 점점 더 후자의 가능성으로 기능하고 있다고 체감한다. 이것은 물론 주관적인 체험 한계를 인정하는 제한적인 소감에 불과하긴 하다. 그 체험 한계를 인정하는 전제에서 좀더 이야기해보자.  

아주 상식적인 명제, 웹2.0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웹 패러다임이 '개방, 공유, 참여'의 가치를 지지한다면, 포털은  이 개방, 공유, 참여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있는가, 그 가치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정책과 시스템 얼개들을 재조직화하고 있는가. 외피로서는 괄목할만한 성장과 시도들이 있었고, 현재도 그 시도들은 진행중이다. 네이버의 '뉴스 캐스트'와 '오픈 캐스트' 시스템, 그리고 그 보다 먼저 블로그의 대외적인 인지도를 한껏 끌어올린 '다음 블로거뉴스'(현 다음 뷰)는 개방성의 가치를 지지하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여전히 포털의 욕망은 '가두리 양식장' 시스템을 공고히 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것은 상업적인 기업으로서 포털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 수익을 높여줄 수 있는 최소비용 최대효율에 대한 고민이 반영된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포털이 웹을 매개로 유통되는 담론의 흐름에 지배적인 영향을 행사한다는 사회적, 공적 의미에서 판단한다면, 그저 사기업의 활동이기 때문에 방치되어야 하는가라는 적극적인 질문을 만들어낸다.

물론 사기업으로서의 정당하고, 자유로운 활동이 국가 정책이나 사회적인 압박을 통해 적극적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적어도 포털이라는 웹의 거대 담론 유통 권력은 그 지배적인 흐름에 저항하는, 그 지배적인 흐름에 창조적인 균열을 일으키는 새로운 형식들을 통해 분산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역할의 일부를 블로그가 담당해야 한다. 하지만 현지로선 이건 꿈꿀 수는 있지만, 실현할 수 없는 몽상이다. 블로그는 점점 더 포털의 영향권 안으로 끌려 들어온다.

특히나 '파워블로거'라는 허망한 이름을 욕망하는 블로거 상당수는 이런 포털식의 폐쇄적이고, 경쟁적인 욕망을 모방해 자신의 트래픽 강박증을 더욱 확대하고 있다. 그 자신, 포털이라는 거대한 권력과 욕망의 포로가 되어 간다. 물론 블로그 미디어 역량 확장 방법을 고민하는 건 당연하고, 오히려 권장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거기에 전체 웹생태계의 다양성에 대한 배려, 그리고 블로그가 발전해가는 좀더 거시적인 비전이 사상되어 있다면 이는 그저 기성 시스템의 폐쇄적인 욕망을 단순하게 새로운 형식으로 반복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2. 거대한 물결 : 광고판으로서의 블로그
블로그 상업화는 그 자체로선 아무런 문제도 없다. 블로그 상업화는 오히려 필요하고, 또 좀더 심도 있게 연구되어야 할 가치있는 주제다. 하지만 문제는 포털에 절대적으로 의존적인 웹의 제한적인 수익모델이 '가짜 목소리' 혹은 '위장된 목소리'를 확산하는 방식으로  블로그의 상업화를 유도한다는 점이다. 좀더 직관적으로 거칠게 비유하자면 많은 수의 블로그가 기성 상업자본의 '마케팅 이중대'로 전락하고 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체감하든 체감하지 못하든 간에 이 흐름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물결은 앞으로 더 거대해질 것이다.

광고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광고를 광고 아니라고 우기거나 위장하는게 문제고, 그런 광고글들이 재미없고, 천편일률적인데다가, 장기적으로 보면 블로그의 개성을 몇 푼 돈으로 침식시킬 것이라는 점이 문제다. 즉, 블로그를 통한 광고는 블로그의 본질적인 기능(무엇인가를 소개하고 알리는 일)에 포함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데, 문제는 블로그의 본질요소라고 할 수 있는 블로거의 개성('진짜 화자의 목소리')이 마케팅의 대가에 종속되고, 변질될 수 있다는 위험이다.

그러니 광고글도 충분히 매력적인 글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광고글, 광고블로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위해서라도 현재의 은폐/위장 구조는 곤란하다. 광고블로그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 다만 그것은 블로그의 다양한 풍경들 가운데 하나이어야 하지, 지배적인 경향을 갖고 너도 나도 광고블로그로서 '돈 벌어야지'하는 현상은 여전히 경계되어야 한다. 블로그의 광고판화는 소위 파워블로그라고 분류되는 층위에서는 블로그의 미디어성을 침식하는 방향으로 기능하고, 대다수 평범한 블로그에게는 자신의 소박한 일상을 기록하는 대신에 아르바이트에 참여하는 것이 오히려 낫다는 식으로 블로깅의 가치를 수단화한다는 위험으로 존재한다. 특히 후자는 포털 검색엔진을 통해 해당 홍보상품 키워드 링크로 검색결과 페이지를 도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곤 한다. 이는 포털 검색엔진의 취약성에 대한 문제와 포털 검색 품질을 훼손하는 문제(의도적인 어뷰징)를 동시에 내포한다.

3. 위기인가, 가능성인가 : SNS, 마이크로 블로그, 무선 웹시대의 도래.
기존 유선 웹에 중심한 웹 콘텐츠의 유통 흐름은 점차 무선웹에 기반한 소형 단말기 위주의 콘텐츠 유통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유선 웹이 여전히 주요한 웹 콘텐츠의 지배적인 유통 형식으로 자리할 것으로 나는 예상하지만, 무선 웹에 기반한 웹 컨텐츠의 유통 시장의 확장은 유선 웹에 기반한 콘텐츠의 성격에도 적극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기존의 미투데이와 함께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김연아를 통해 화제가 된 바 있는 트위터와 같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인맥 서비스) 성격이 매우 강한 마이크로 블로그의 득세 현상은 한층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현대인의 바쁜 일상 속에서 순발력있고, 간편한 콘텐츠 교환 시스템으로서 마이크로 블로그는 모바일(무선 웹) 기기와 자신의 회로를 연결시키며 웹을 중심으로 하는 일상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갈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성급하게 긍정/부정의 가치판단을 이야기할 수 없는 문제다.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과 접근성을 확장한다는 차원에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여기에 내포된 위험은 상존한다.

블로그에 문제를 한정하면, 기존의 다소 분량이 긴 문자 텍스트 위주로 생산/소비되었던 블로그 콘텐츠 생산 및 소비 경향은 적극적으로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고 본다. 여전히 부피적으로 긴 문자텍스트로의 블로그가 완벽하게 자신의 영토를 빼앗기지는 않겠지만, 그래서 일부의 우려처럼 급속하게 쇠락하지는 않겠지만,  무선 웹이 지배적인 경향으로 일상 속에서 자리하는 시대가 도래하는 근미래에는 웹 콘텐츠의 파편화, 감성화, 시각화는 무시할 수 없는 흐름으로 기존의 문자 텍스트 위주의 '긴 글' 블로그 유통 시장을 침식해갈 것으로 예상한다. 이것은 위협인 동시에 도전이며, 가능성이긴 하다. 앞서 이야기한 위험을 새로운 도전으로 수용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넋놓고 구경만 할 것인가. 항상 위기는 기회였고, 새로운 도약을 위한 힘겨운 통과의례이기도 했다(참조링크 4번)

4. 결 : "우리가 '뉴스'라고 부르는 것들"
(아거의 표현)
앞서 아주 간략하고, 거칠게 블로그를 둘러싼 웹 환경의 변화와 블로그에 가해지는 위기의 상황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블로그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저마다 대답을 가진, 그리고 그 대답들이 모두 각자에겐 진실인 열린 질문인다. 하지만 이 질문은 '블로그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적극적인 질문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블로그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가치지향적인 전제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블로그를 둘러싼 다양한 성원들과 환경들의 변수들이 존재하고, 아직 블로그란 무엇이고,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쾌한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케터는 블로그는 마케팅 수단이라고 강조할 것이고, 또 어떤 블로거는 기성언론의 지배적인 프레이밍을 교란하고, 거기에 저항하며, 궁극적으론 블로그에 바탕한 새로운 의제설정이 가능하게 하는 뉴미디어로서의 블로그가 함축한 가치를 강조할 것이다.

다만 아주 소박하게, 대부분의 블로거들에게 블로그는 그 자체로 자기회고적 성찰을 가능하게 하는 대화 시스템이라고 나는 이야기하고 싶다. 그래서 거대한 이슈와 유명인들만이 '뉴스'가 아니라, 우리들이 일상 속에서 고민하고, 실천하는 무수히 많은 작은 이야기들도 '어떤 누군가'에게는 진실로 스스로를 일깨우고,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하는 '뉴스'인 것이다. 그렇게 블로그가 다양한 풍경들을 갖고 서로에게 '영감과 정서적인 교감'을 주는 의미있는 콘텐츠로 작용할 수 있는 그 가능성, 그렇게 열려 있는 성찰과 회고의 기록으로서 기능하는 대화 시스템이라는 점은 블로그가 갖는 위대한 가능성이자, 쉽게 버려져선 안되는 가능성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블로그의 이런 본질적인 가치는 새로운 환경 속에서 심각한 위기에 처할 공산이 커졌다. 다만 그 위기를 성급하게 과장할 필요는 없다. 그 위기는 새로운 도전을 요구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블로그가 어떤 형태로 진화하고, 진보하든 간에, 그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고, 또 그 도전을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으냐에 따라 그 진화와 진보의 모습을 달라질 것이 분명하다.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고 싶다.

- 블로그 수익 모델로서 자발적인 후원이 손쉽게 가능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도입되어야 한다. 즉, 블로그 미디어에서도 손쉽게 채택할 수 있는 '소액 결제 시스템'이 도입(써머즈의 글 참조)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블로그 미디어의 가능성은 현실적인 물적 기반 위에서 좀더 창조적인 시도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토양을 갖게 될 것이다. 즉, 독자들이 500원 천원을 쉽게 후원할 수 있는 모델이 필요하다.

- 기존 메타블로그의 비효율적 시스템은 새로운 방식으로 혁신되어야 한다. 현재의 메타시스템은 기성언론의 지배적인 관성인 핫이슈 중심의 집중화되고, 자극적인 이슈 틀짓기의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쉽게 말해서 현재의 메타블로그 시스템은 고답적이고, 새로운 블로그 미디어의 가능성을 확장하기 보다는 축소시키고 있다. 물론 블로그는 그 자체로 자신이 궁극의 메타다. 링크와 인용을 통해 블로거는 스스로의 미디어성을 조금씩 확장시켜야 한다.

- 블로그는 자발적인 연대성을 강화해야 한다. 이것이 무슨 블로그 이익단체를 만들라거나, 기업을 만들거는 소리는 아니지만,  블로그를 둘러싼 제도적인 문화적인 환경 변화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갖고 참여하고, 또 그 참여를 위해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이런 활동들을 지원하는 비영리재단들과도 연대성을 강화하고, 그런 프로그램들을 좀더 개발해 현실적인 차원에서 함께 구상하고, 실천해갈 수 있다면 좋겠다.


* 이 글은 '616 이벤트, 블로거가 이야기하는 인터넷과 미래사회'에 송고하기 위한 목적도 더불어 갖고 있습니다. : ) (보충. 이 글은 위 이벤트?에서 1위에 선정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



* 스포일러 안내
이 글은 스포일러 '전혀' (민감한 독자에게도 '전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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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스프레이(Hairspary. 2007. 아담 쉥크만. 뉴라인시네마)

헤어스프레이는 걸작이다.
헤어스프레이는 뮤지컬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도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리고 나는 완전히 그 매혹적인 노래와 춤, 홀린듯 사랑스러운 이미지들에  빠져버렸다. 이 영화는 [싱잉 인 더 레인]만큼은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가 관객에게 줄 수 있는 희망이라는 메시지, 그렇게 오래도록 원형적인 이미지로 남아 마음 속 깊이 새겨지는 예술의 잠재력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떤 계몽적인 영화보다 혁명적이다.

영화 속 니키 브론스키는 삶이라는 축복과 신비를 위해 정말 온 힘을 다해 세상과 즐겁게 싸우는 우리시대의 빨강머리 앤같다. 니키는 정말 빨강머리 앤 이후, [중경삼림]의 왕정문, [브레이킹 더 웨이브]의 에밀리 왓슨 이후로, 가장 사랑스럽고, 매혹적인 캐릭터다. 60년대 미국 볼티모어를 공간적인 배경으로, 인종갈등이라는 다소 진부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 [헤어스프레이]는, 물론 그 예상 가능한 드라마의 관습을 크게 넘어서지는 않지만, 그 진부함을 깨뜨리는 방식은 탁월하다.

영화 속의 사랑스럽고, 생명으로 충만한 몸짓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처럼 날라리를 동경하는 몸치들도, 몸이 들썩거리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런데 몸만 들썩이게 만드는 여느 뮤지컬 영화와는 다르게 [헤어스프레이]는 우리의 마음을 들썩거리게 만든다.

마음으로 노래하고, 영혼으로 춤출 수 없다면, 그 싸움, 그 저항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헤어 스프레이]는 60년대의 정신, "불가능을 요구하라!" "모든 비인간적인 것들에 저항하라!"는 혁명과 저항의 정신을 미국식 뮤지컬 영화의 관습 속에서 해석한 영화다. 그런 의미에서 [헤어스프레이]는 "희망, 그게 뭐예요?"라고 묻는 우리시대의 우울한 회색인들을 위한 영화지만, 무엇보다 우리 사회를 기만적인 위선으로 질식시키는 위선적인 꼰대들, 경직된 교조주의자들을 진심을 다해 즐겁게 유혹하는 영화다.

꼰대들이여, 교조주의자들이여!
이 영화를 보시라!



김우재 vs. 시골피디. 
이율배반과 아이러니. 이 논쟁 구도가 자못 흥미롭다. 개인적인 관심사들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진실은 어떻게 거짓에 복무하는가. '작은 진실'은 어떤 방식, 어떤 이유로 더 '큰 거짓'을 위해 수단화되는가. 이런 일은 흔히 조중동에 의해, 기만적인 권력에 의해 자행된다. 혹은 맹목적인 신념(흔히 종교적인, 정치적인 광신) 때문에 이런 일은 벌어진다. 종종 인용하지만 황지우는 이 상황을 이렇게 비유적으로 이야기한다(이것은 물론 기억의 변주에 의한 오독일지도 모른다).

"범죄자는 거짓을 위해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 때의 진실이 중요하다."(황지우)

김우재와 시골피디 간 논쟁은 이런 구도하에 있는 논쟁이다. 사실의 얼개는 매우 단순하다.  왜 프레시안은 김우재가 "황우석 박사(교수)"라고 쓴 기고문의 표현을 "황우석(씨)" "황씨" 등으로 고쳤는가, 그것은 시골피디가 보기엔 "황당한 호칭조작"이며, "교묘한 인격살인"(시골피디)이다. 프레시안에서  호칭을 바꾼 것은 사실이고, 이는 시골피디가 김우재에게 문의해 얻어낸, 즉 김우재라는 정보원에게 '대외비'를 조건으로 받은 정보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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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제목은 모르고, 그냥 분위기가 왠지 어울려서..;; )

우선 질문. 과연 프레시안은 비판받을만한 행동을 한 것인가? 그럴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칼럼니스트의 표현를 자의적으로 편집한 것에 대해선 비난가능성이 존재한다. 그 호칭 변경이 김우재 기고문이 담고 있는 취지를 '배반'하는 것일 때는 그 호칭 변경은 시골피디의 비판처럼 "조작"이 된다. 하지만 이번 경우엔 "조작"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김우재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김우재 기고문의 취지와 황우석 호칭은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즉, 황우석을 '교수', 혹은 '박사'가 아닌 '씨'로 바꾼다고 해서 그 기고문의 취지가 침해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그 기고문의 취지가 강화된다. 그런 점에서 프레시안의 교정(편집)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봐야 한다. 즉 그 '교정 혹은 편집'은 기고자와 언론사간의 신뢰에 바탕한 '추정적인 승낙'(기고자의 승낙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

또 다른 질문. 시골피디는 정보원과의 신뢰를 파괴하면서까지 김우재에게서 얻은 정보를 공개하며, 프레시안을  공격한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힌트는 프레시안이 지난 황우석 파동에서 줄기차게 황우석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견지한 정말 드문(적어도 내가 아는 언론사들 가운데선 거의 유일한) 언론사라는 점이다.김우재도 지적하는 것처럼 '언론 윤리'를 그토록 엄격하게 문제삼는 시골피디는 정보원과의 신뢰를 배반하면서까지 김우재가 제공한 정보를 공개한다. 그 지엽적인 진실을 자기 주장의 수단으로, 도구로 활용한다. 그것은 아마도 황우석에 대한 맹목적인 신념에 바탕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 처음부터 시골피디는 김우재를 존중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던 것 같다. 즉 김우재와의 신뢰는 처음부터 전혀 중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시골피디에게 김우재의 글에 담긴 호칭 표현는 프레시안을 공격할 '그럴듯한 빌미'였을 뿐이다. 김우재의 글 제목은 이런 점에서 이해할만하다.

다시 범죄자의 진실과 거짓.
범죄자는 자신의 더 커다란 거짓을 숨기기 위해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 때 진실의 가치는 파괴되고, 진실은 목적으로 기능하지 못하며, 철저하게 수단이 된다. 결국 거짓을 위해 복무하게 된다.


추.
김우재 글에 이런 댓글을 남겼다.
"시골피디란 분의 글은 아주 지엽적으론 진실을 담고 있지만, 그 지엽적인 진실은 '김우재라는 외부 기고가가 프레시안에 쓴 글'의 본질적인 취지를 배반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 바, 우재씨께서 이 글을 통해 비판하시는 취지를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 다만 이정도면 충분히 대응하셨다고 생각합니다. 무가치한 억지에 귀한 시간 허비하는 소모전은 피하시길 바랍니다."


* 발아점
시골피디라는 황빠의 저열한 도덕성 (김우재, 2009/06/12)

* 시골피디 글은 의도적으로 링크 생략한다. 읽을 가치가 존재한다는 판단이 서지 않을 뿐더러, 여기에서 인용한 분량(양적, 질적 비중)을 보건대 링크를 생략해도 무방하다고 보인다.



문득 웹 서핑하다가 그림이 참 좋아서.
반말 찍찍하는 유모씨와 너무 비교되는 단아한 흑백톤의 느낌이 참 좋다.
네이버 주소는 http://blog.naver.com/loveknua
(이해 못하는 바 아니나, 왜 하필 네이버냐. ㅡ.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