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 울분토로용.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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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ya, Witches shapeshifting into dogs
점점 개가 되어간다...


참 지랄육갑도 가지가지다.
문화(관광체육)부가 '4대강 살리기'를 친히 홍보하시고자 대한늬우스를 부활시킨단다.
전국 52개 극장 190개 상영관에서 25일부터 한달동안 이 희대의 코미디를 몸소 실천하시겠다는 것.
조선일보와 인터뷰 하며, 배우 때처럼 자유롭지 못하다고 눈물 흘렸다는 사태의 장본인 문화부장관 유인촌은, 여기서 잠깐! 그래서 반말 찍찍 싸지르면서 학부용에게 세뇌 운운(유튜브)했던거구나..., "(...) 추억의 대한늬우스가 돌아온다!"(프레시안)는 이건 뭐 도무지 상식으로는 해석 안되는 감격적인 한 말씀을 남기셨다. 물론 조중동을 비롯한 고결한 언론사들은 "추억의 대한뉘우스"라는 제목(이 포함된 기사)으로 국민들 '추억'을 불러오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누군가에게는 공포와 억압과 절망의 기억이 저들에게는 화기애애 뽀샤샤하고, 따뜻한 추억인가보다. 추억...추억이라... 참 추억이라는 말을 이런데 함부로 갖다써도 되는건지 '추억'에게 미안한 마음 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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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호감 예약 : 양희성, 장동민, 김대희. 얘네들은 그냥 희생양인건가... 얘들 대체 뭔가...
코미디를 압도하는 코미디 대한민국

추가. 신봉선이 출현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선... 언럭키즈님의 보충논평 참조.
"좀더 찾아보니 스케쥴 문제로 매니지먼트 측에서 거절(TV데일리)했다는군요."(언럭키즈)


아놔, 이건 뭐 감당이 안되네...
무슨 대가리로 이런 짓거리를 하는거냐고...
대가리에 뇌세포가 한마리라도 살아 있으면 이런 짓거리 못한다.
정말 이 나라를 훨훨 뜨고 싶다.

한예종 사태로 쫓겨난(듯 사퇴한) 황지우(프레시안)의 우울한 시가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구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황지우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 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한 군(群)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룩하는 흰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 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앉는다.


* 단어설명
지랄 [명사] : 마구 법석을 떨며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
육갑 [六甲] [명사] : 남이 하는 언동을 비속하게 이르는 말.


* 관련 추천
한나라당의 서민을 구하라! -MB 서민정책 (레진) : 레진사마 바람처럼 "정치 이야기 좀 안하고 샤방샤방한 이야기만" 할 수 있게 좀 해달라고.. 이 ㅆㅂㄹㄷㅇ!! 이건 무슨 내 행복추구권 박탈하는 짓거리 하는데만 천재적이야...  

* 보충.
문광부만 있냐? 여기 국정원도 있다!
'안보신권'의 오묘한 세계로 오시라...!!!
이건 거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막상막하, 용쟁호투의 형국 되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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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거 정말 진짜 국정원 사이트에 있는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윤초딩님께서 어떤 패러디 웹페이지 캡처한 건 줄 알았는데...
이거 정말 정식 이벤트다. 빨갱이 때려잡기 게임 이벤트 "안보신권!!!"
국정원의 노고에 눈꼽만큼이나마 보답하는 차원에서 감히 홍보에 한숟가락 올려본다.
이런 극단적 롤러코스터 감각이라면 대한민국이 세계 코미디계의 일등국가로 추앙받을 날이 멀지 않았다. 

via 윤초딩, 문광부 "대한늬우스", 국정원 "안보신권"


* 관련 추가.
국정원 안보신권 이벤트가 가짜라는 의혹에 대해선... 궁금해서 111로 전화해봤다.
'국정원 안보신권 이벤트가 가짜?' 이 글 참조.

* 추천기사
"너희가 하면 농담 같지 않단 말이다"
[기자의 눈] 이명박 정부는 '코미디'도 무섭다
(프레시안, 채은하. 2009-06-25)




저련  2009/06/24 17:30
반지성주의라는 표현을 밑에서 보고(민노씨 주: 내가 답글로 적은 "이택광씨 블로그는 제가 이택광씨께서 성토하시는 '반지성주의자'인 것 같아서 피하고 있습니다"를 지칭) 나경원의 발언 취지를 다시 보니, 반지성주의의 쌍둥이라 할만한 '반 일상언어주의'가 역시 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반 일상언어주의는 파리통 언급하는 제 블로그의 글에서 정리해 본 태도라는.. 어쨌든 반 일상언어주의는 지적 강자의 의무 태만일테니, 지적 약자의 의무 태만에 비해 더 큰 문제라는 점은 부정하기 힘들 듯 합니다.


1. 탁월한 지적이다. 기회가 있을때마다, 그래서 좀 식상할 정도로 강조하는 것이지만, 지성주의는 지적 아리까리즘이나 지적 속물근성, 혹은 지적 배타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아니 그 반대이어야 한다. 왜 그토록 탁월한 지성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세속적 비평'을 주창했는가? 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진중권은 그토록 자극적인 막말(여기에 대해선 때론 비판할 여지가 없지는 않지만, 특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류)을 서슴치 않는가? 거기엔 이유가 있는 것이다.

2. 지하철 독서를 위해 한 일년째 내 작은 가방 속에 넣고 다니는 책이 하나 있다. 대여섯번은 읽었을 것 같다. 블로그에서도 종종 언급하곤 했다. 그래도 읽을 때마다 새롭다. 지하철을 탈 때면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읽고 또 읽는다. 마르쿠제가 68혁명의 젊은이들을 위해 바친 [해방론]이다. 거기에 '언어의 계급성'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들은 언어(랭귀지)-말(빠롤)에 지고의 권리를 부여하는 문화를 주장한다. 부르조아 계급이 가공한 언어는 자기 계급의 부속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소수 개인들의 부속물인 언어가 모든 사람들에게 유일한 의사 소통의 양식으로 강요되고 있다. 언어는 의사 소통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현실인식의 수단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실 인식 수단으로서의 기존 언어는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지적(知的)이기 때문에 경제적 특권에 의해 사회 생활의 갈등과 모순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특정 계급에게만 허용되어 있다.
- 리용학부 연락기구 Majuscule('대문자'), [어떠한 대학? 어떠한 사회?] 발췌, pp.45~46. 1968.5.29.
정치적 언어학은 기존 체제의 갑옷이다. 급진적 반대파가 자기 자신의 언어를 발전시킨다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잠재의식적으로 지배의 가장 유효한 '비밀 무기들' 중 하나에 대항하는 것이다. 법정과 경찰에 의해 유효화된 현존의 법과 질서의 언어는 억압의 목소리일 뿐만 아니라 억압의 행위이기도 하다.
- H.마르쿠제, '변화하고 있는 전복세력들', [해방론](1969, 비콘프레스, 보스톤), 청하편집부 역, p.92. 1984. 
 
3. 어떤 지극히 난해한 언어가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놓는 언어일 수도 있다. 그것이 우리의 마취된 지성과 감수성을 부수는 해방의 언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언어가 소위 지식인들만의 '암호'로 머물러선 곤란하다. 지식인(더불어 '저널리즘')은 그 난해한 언어를 시민의 일상어로 '번역'해야 하는 의무를 가장 우선해서 부여받는다. 폐쇄적인 배타성의 언어로 그 언어를 가둔채로 끼리끼리 즐겁다면, 그렇게 "언어의 감옥"(프레드릭 제임스) 속에서 자신들끼리만 지적 선민의식에 취해 있다면, 그 언어는 지성의 언어가 아니라 반지성의 언어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세속언어' '일상어'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저련의 논평, 특히 "반 일상언어주의는 지적 강자의 의무 태만일테니, 지적 약자의 의무 태만에 비해 더 큰 문제"라는 지적은 거듭 강조되어야 마땅하다. 더불어 이런 논의의 연장에서 새로운 모바일 혁명의 여명기에 웹 콘텐츠의 생산 및 유통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문자 정보 처리가 인지에서 감성으로 가는 현상"에 대한 아거의 글은 좀더 구체적인 질문과 고민을 던져주고 있다.


* 참조. 사이드의 '세속적 비평'에 대한 김성곤의 해설
현대의 이러한 극도로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형식주의적이고 현실과 괴리된 비평에 정면으로 도전한 비평가가 바로 [시작. Beginning]과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다. 사이드는 현대비평은 너무 고답적, 귀족적이기 때문에 현실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그것이 보다 더 세속화(worldly)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이드에게 있어서 비평행위는 곧 현실참여가 되고 삶 그 자체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때문에 이 세계도 곧 하나의 커다란 텍스트가 되는 것이다.

1983년에 나온 그의 비평서의 제목이 [세계와 텍스트와 비평가 The World, the Text, and the Critic]인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그는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처럼 급진적 마르크시스트 비평가도 아니고, 월터 잭슨 베이트처럼 보수적 극우파 비평가도 아닌 다만 고뇌하고 행동하는 오늘의 지식인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80년대 이후 미국문학비평의 미래는 어쩌면 에드워드 사이드 같은 비평가들의 노력에 의해 밝아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사이드는 우리의 주목에 값하는 이 시대의 중요한 비평가라고 할 수 있다.

- 김성곤, '신비평 이후의 미국문학비평', [미로 속의 언어], p. 22. 민음사. 1986.

* 관련 링크
국민호구론 : 나경원의 발언에 부쳐
노정태
이런 저런 댓글
[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
아거, 터치 시대의 글읽기 2 : 문자를 느낀다?

* 발아점
저련
(이 링크는 저련의 인문사회 공부방 카페)



행인, 모순의 시대 (2009.6.23)에 대한 단상.

1. "이명박 죽일놈이라는 생각이 이제 보편성을 띨 정도로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프리미엄이 어떻게 변동하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현상 (...)"

이 지적이야말로 현 대한민국의 사회정치경제적 제문제의 근본적인 상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파트 프리미엄에 집착하는 욕망, 소박해서 더 처절하게 뼛속까지 들러붙은 대한민국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이 세속적 욕망은 어떤 정치적인 쇼크, 어떤 사회적인 계몽으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런 경쟁적이고, 폐쇄적인 욕망들을 사회적인 상상력, 정치적인 상상력이 만개한 공동체적 소망과 최소한으로 '경쟁'시키거나, 혹은 양자를 '(상생적) 긴장'관계에 위치시키지 못한다면  현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암흑'과 '모순'의 시대는 계속되겠지요.

다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천이란 무엇인지, 그 실천이 과연 현 시스템에서 가능하기는 할지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파트가 대한민국 신민들의 경제적인 욕구를 상징한다면, 교육은 그런 경제적인 욕망을 성취할 수 있는 표피적 합법의 기만을 상징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저명한 서구의 사상가를 굳이 빌려오지 않아도, 교육과 경제라는 양대 시스템은 좀더 정교하게 21세기적 자본주의 신분 질서를 공고히 하고 있다고 느낍니다. 

이런 모순이 문화의 힘, 지식의 힘, 교양의 힘으로 전부 타기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모순적인 암흑의 구조를 거듭 거듭 고민하고, 또 이야기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무슨 권위적이고, 계몽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우리에게 스스로 부여하는 암흑의 구조에 한 부품처럼 소모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문제의식을 서로 나누고, 또 대화하는 일상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일상적인 대화의 방식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경계를 허무는 "소통하는 진보"의 커뮤니케이션 방법론을 고민하고, 확장하는 방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저처럼 따분한(ㅡ.ㅡ;;; ) 방식으로 글을 쓰는 블로거가 이런 이야기를 거듭 거듭 강조한다는 것도 좀 모순적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다"라는 인식을 좀더 널리 퍼뜨리고, 또 그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그렇게 대화하는 방식 자체가 '문화의 한 형태'로, '일상적인 대화'로서, 그 자체로 삶의 소박한 유희의 한 형태로 이 사회에 자리할 수 있을 때야 말로 이 모순을 깨뜨릴 수 있는 토양을 비로소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2.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이 구호는 아직도 비통한 마음에 사로잡혀있는 사람들에게는 훌륭한 감성적 접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 바로 그 구호는 또다시 이명박이라는 물건을 탄생시킬 수밖에 없는 한계를 노정 (...)

더불어 지적해주신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구호의 위험성에 대해선 저 역시 공감합니다. 하지만 이 구호는 그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함께' 박해하고, 박해받은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의 순교자로서의 중층적인 상징이라는  점에서, 그 구호의 위험에 대해 지적하기 보다는, 아직은 그 구호가 갖는 정치적인 함의와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하는 것이 좀더 효과적이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즉,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구호가 감성적이고, 순진한 접근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감성적인 접근이 갖는 잠재적인 에너지들, 그 안에 내포된 의미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와서, "노무현을 넘어서"라는  구호로 발전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구호는 너무 많은 것이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또 다른 이명박"을 예비하는 것이 될 수 있는 위험을 지금 고민하기 보다는, 현재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비상식'과 '반민주주의'의 가장 탁월한 항체로서, 그 상징으로서 좀더 드높게 서야 한다고 저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구호(상징)는 크게 두 가지 가치를 우리에게 끊임없이 언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가 상식의 회복이라면, 그것의 좀더 구체적인 표현형태인, 절대주의적 국가권력을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 다른 하나겠지요. 폭압적인 국가권력이 다시는 국민들을 옥죄어선 안된다는 기본적인 공화국의 정신, 국민주권이 그 최소한의 존엄성을 담보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질서의 회복을 "다시 노무현으로"라는 구호는 우리에게 '죽지 않는 상징'으로 거듭 되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가치가 현재의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너무도 극심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무현을 되살리면서, 동시에 다시 극복함으로써 노무현을 넘어서는 순간이 올 때까지, 노무현이라는 상징의 가치는 지워져서는 안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 본문 내 링크
노무현, 우리의 가장 위대했던 상징이 쓰러지다.
노무현을 못박다 : 상징으로서의 민주주의
'민주주의'라는 유행어

조아신, <소통하는 진보 - 미디어,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새드개그맨, 김작가의 이메일


* 발아점 / 대상글
행인, 모순의 시대 (2009.6.23)




사실 및 개요.
새드개그맨의 팟캐스트(검찰의 피디수첩 물어뜯기에 관한)를 듣다가 이제야 알게 된 소식. 좀 오래된 소식이더라. 지난주 목요일(2009.6.18.)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문화관광체육방송통신위원회(문방위) 한나라당측 간사 나경원의원이 나와서 깨달음을 주는 심오한 한 말씀 전해주셨다. 골자를 정리하면 이렇다.

ㄱ. 미디어법 여론조사? 부적절하심.
ㄴ. 여론조사 해도 국민들이 뭘 모르기 때문임.
ㄷ. 심지어 국회의원도 모르는데 뭐(이건 바보선언인지 뭔지 모를 지경).
ㄹ. 이미 미발위에서 돈 많이 썼고, 세금도 아깝고, 6월 임시국회에서 마무리 짓자고용.
ㅁ. 민주당은 반대만 하지 말고 대안을 내놔봐바바바바바.

나경원 : (....) 사실상 여론조사라는 것은 특히 정책에 관한 여론조사는 국민들이 이해하시기 어려운 부분도 있고요. 저희 국회의원들도 동료 의원들한테 미디어법에 대해 세세하게 물어보면 아마 정확하게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래서 이런 여론조사라는 것 자체가 정책에 관해서 여론조사를 한다면, 앞으로 모든 쟁점법안을 이렇게 여론조사 한다는 것은 적절치 않고. 또한 이것은 국회의 고유한 입법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형국이 된다고 봅니다.(민노씨 주 : 여론조사 여부와 고유 입법권의 포기가 어떤 논리적 인과를 갖는것인지 정말 묻지 않을 수 없다.)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나경원과의 인터뷰 대본 : 6/18(목)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 "국민들 미디어법 잘몰라,여론조사 소용없어" 중에서


단상 : 국민호구론  
국개론이라는게 있다. 국민개새끼론의 준말인데, "광활한 (국)개론"에 대해선 캡콜드의 글을 참조하시라. 개인적으로 국개론에 대해선 별다른 감흥도 없고, 별다른 논의 가치도 없다고 본다. 이런 과도한 자기모멸은 효용보다는 폐해가 크다고 느끼는 편이라서, 이런 용어(?)는 사라지는 편이 낫지 않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경원의 발언을 접하니 '국민호구론'이라고 명명하면 어떨까 싶은, 국민주권의 대리인에 불과한 국회의원이 국민을 정말 얼마나 거지발싸개 취급하고 있는지 불현듯 깨닫게 된다. 대한민국의 주권자인 국민의 일인으로서 비통한 심정을 가눌 길 없다. 나경원 발언 근저에는 '국민은 호구다'라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국민호구론이다.

얼마나 국민들이 호구냐면...
1. 국회의원 스스로 자신이 처리할 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고백을 듣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2. 지들도 모르니 국민들은 더 모를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은지,
3. 그러니 국민에게 좀더 알려서 이 중대한 법안에 대해 충분히 논의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게 아니라,
4. (결국) '여론조사'는 부적절하고, 입법은 우리들만의 권리라구!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정도로 호구다.

이 정도면 국민이 왜 필요한지도 모를 지경이다. 그냥 나경원 같이 똑똑한 전문가들이 나라 하나 만들어서 따로 독립하던가. 나경원은 국회의원이라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의 근거인 국민에 대해 경멸(물론 그것은 대단히 세련된 표현을 동반한 것이긴 하지만)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디어관련법에 대해 찬성여론이 다수였어도 이렇게 국민을 호구 취급했을지 대단히 의문스럽다.

좀더 본질적으로 접근해보자. 그렇게 잘난 국회의원도 모르는 법률이라면 그 법률은 법의 정신에 반하는 법률이다. 그 법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니들만 아는 그런 암호 같은 언어로, 니들끼리 해먹으려고 존재하는거였어? (나경원 좋아하는) '전문가'들만 위해서 존재하는 법률인거야? 법률이 법을 둘러싼 폐쇄적인 권력의 역사 속에서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아리까리한 언어의 벽 속에 갇히고, 그래서 서민대중이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가들의 언어로 박제화되었다고 치자. 그렇담 그 법률의 정신에 대해, 그 법률이 갖는 핵심적인 취지에 대해 국민들에게 좀더 쉬운 대중의 언어로, 세속의 언어로 설명해줘야 할 의무(이거 '의무'다!)가 국민의 봉사자인 국회의원에게는 존재한다. 그거 졸라 어려운 거니까, 니들은 짜져주셈, 니들은 입다무셈, 이건 졸라졸라 어려운 거라서 우리들도 헷갈리는 거임, 알겠심? 이러는 국회의원은 그 자체로 국회의원 자격 상실이다.

김현정의 지적처럼 대통령 후보도 '여론조사'로 뽑는 판에 국민들의 의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미디어관련법'을 처리함에 있어 대국민 여론조사를 '국민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필요없다고 이야기하는 국회의원이 버젓이 라디오 방송국에서 나와서 인터뷰 하고 있는 꼴을 지켜봐야 하는 대한민국 국민은 호구 취급 받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데 이런 국회의원이 추진하는 미디어관련법을 그대로 넋놓고 앉아서 지켜보기만 한다면, 그러면 이건 뭐, 호구 오브 호구지. 이제 제발 호구 취급은 그만 받자.

* 호구 [虎口] 명사. 당연히 2번. 되시겠다.
1. 범의 아가리라는 뜻으로, 매우 위태로운 처지나 형편을 이르는 말.
2. 어수룩하여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3. <운동·오락>바둑에서, 바둑돌 석 점이 둘러싸고 한쪽만이 트인 그 속.



a                                                                                                                                               z




* 참고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2009.6.18.)
보충. 토모야님께서 위 인터뷰 개별글 링크 주소 알려주셨네요. 고맙습니다. : )

개별 웹페이지에 대한 고유 URL(글주소)가 나오지 않아서 이렇게밖에는 표시하지 못한다. 위 링크를 클릭하면 개별글로 직접 들어가는게 아니라 <김현정의 뉴스쇼>로 들어간다. 제대로 개별 글주소가 나오면 간략하게 인용하고, 링크 표시하면 될텐데... 매우 아쉽다. (위 토모야님의 개별글 링크 주소 안내로 기존 서술 부분은 취소줄로 처리. 다만 어떻게 개별주소를 얻었는지는 좀 궁금하다) 암튼 직접 가서 한번 찾아보자. 인용보도에 대해선, 위 짤방에서 보는 것처럼 꽤 유연한 정책을 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흔한 "무단전재 금지" 안내문도 보이지 않는다. 이하 김현정과 나경원의 인터뷰 주요 부분이다(꽤 많은 부분을 인용하는 것이라서 관심있는 독자만 보시라는 취지로, 그리고 가급적 직접 CBS 라디오 홈페이지로 가서 읽으라는 취지에서 more/less 로 가둔다) .

more..



* 관련 추천
국회의원은 반품 안되나요? (seNSe)
미국 드라마 몽크에서 몽크의 형처럼 문체 하나까지 세심하게 고려해서 문학작품을 만들듯 설명서를 만들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읽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위 글 중에서)
모순의 시대 (행인)
"이명박 죽일놈이라는 생각이 이제 보편성을 띨 정도로 확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파트 프리미엄이 어떻게 변동하냐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현상 (...)"

* 발아점
083. 김작가의 이메일 (09.06.21) (새드개그맨) : 초강추. 검찰(및 조중동)의 '피디수첩 죽이기'가 얼마나 엉뚱한 자기모순과 반상식에 근거하고 있는지를 상식에 바탕해서 통렬하게 비판하는 팟캐스트. 이 주제에 대해선 따로 글을 써보고 싶다. 작금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면 상식과 비상식의 거대한 전장이라는 느낌이 들 지경이다. 




[릴레이] 독서란 '연애감정'이다

2009/06/19 03:29
1. 나에게 독서란 [연애감정]이다
대부분 속물근성과 막연한 허무를 채우기 위한 뻘짓거리, 돈낭비, (무엇보다) 시간낭비다. 연애감정의 현실적인 목표는 대부분 소유욕일텐데, 독서도 대개 마찬가지다. 이쁘고, 늘씬한 여자들에게 혹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서계의 '이쁘고, 늘씬한' 유행에 현혹되기 마련이다. 사소하게 '꾸준한 특이 취향'이 있기는 하다. 아주 가끔씩만 전인격적인 만남으로 이어지고, 신비로운 매혹들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건 매우 드물다. 독서도 연애감정도 거기에 빠진 순간의 느낌을 온전하게 재현한다는 것은 (거의 확정적으로) 불가능하다. 독서든, 연애든 거기에, 그 "관계"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있다면 얻을 것이고, 없다면 그 자체로 체험이지 뭐. 아무튼 그저 관찰하고, 구경만 하다간 죽도 밥도 안된다. 다만 너무 성급하게 뛰어들어서도 곤란하다. 딜레마다. (참고. 여기에서 시험용 독서는 제외)

2. 내 릴레이 경로
inuit 시작 : 독서란 [자가교육]이다.
-> 유정식 : 독서는 [성장]이다.
-> 쉐아르 : 독서는 [확장]이다.
-> 최동석 : 독서는 [삶]이다.
-> 구월산 : 독서는 [여행]이다. 
-> easysun : 독서란 [영양제 챙겨먹기]다.
-> 리승환 / 민노씨

3. 받아주세요. : )
폭넓은 독서편력을 보여주시는 성실한 독서가 여형사님
20대의 젊음이 부럽기 짝이 없는 열혈청년 레오포드님께 바통 넘깁니다.


규칙입니다.
1. 독서란 [ ]다. 의 네모를 채우고 간단한 의견을 써주세요.
2. 앞선 릴레이 주자의 이름들을 순서대로 써주시고
3. 릴레이 받을 두 명을 지정해 주세요.
4. 이 릴레이는 6월 20일까지만 지속됩니다. (민노씨주 : 이게 좀 아리까리한데요. 글을 20일 자정 땡할 때 등록한다고 치면, ㄱ. 그런 경우엔 바통을 넘기면 안된다는 건지, ㄴ. 그때까지는 바통을 넘겨도 된다는 건지 헷갈리네요. 전 후자(ㄴ.)로 생각해서.. 기한이 촉박하지만 바통 넘깁니다. ^ ^;; )
- http://inuit.co.kr/1712


* 관련
책 단상 1. 책 분류법 혹은 독서법
책 단상 2. 미인과 권력, 그리고 스펀지
책 단상 3. 나는 왜 책을 읽나...  (막연하게 기억은 있었는데, 이 릴레이 주제의 확장버전을 이미 썼었구나..ㅡ.ㅡ;; 지금과 별로 달라진 건 없는 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