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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단상으로 적었던 걸 정리한 글. 아래 정리된 글은 대개는 시간순입니다. 단상 중간 중간 트윗벗들의 관련 코멘트와 대화를 몇 개 삽입했습니다.
가장 먼저 나에게 온 것. 방금 돌아왔다. 역시
거리의 싸움은 이명박 정권을 움직이기엔 턱도 없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이건 패배주의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현실인식이다.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mepay
뙈넘들 속담에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린다.'는 말이 있죠. 누군가 해야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나마 누리고 있는 것도 잃을 수가 있는데.. 이 정권을 어떻게 움직여야 되나..
도착하다, 떠나다. 7시10분쯤 도착. 종로쪽에서 내려, 일행과 함께 서울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보신각 부근의 청계천을 넘어서자 경찰차와 경찰들이 압도적으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게 심리적인 위축효과를 노린건지 어쩐건지, 아니면 오늘 경찰에서도 그만큼 긴장했던건지, 둘 모두였겠지만, 걸어가는 내내 긴장을 주기에 충분했다. 자리를 떠난 건 11시 10분 20분 쯤.
두 개의 서로 다른 풍경 : 광장과 도로 집회는 서울광장의 공식행사와 대한문에서 조선일보쪽으로 향하는 도로에 진치고 있는 시민/경찰의 대치로 완전하게 나뉘었다. 서로 다른 동네 분위기. 지난 영결식 후 노제 뒷풀이에서도 이런 분위기였다. 왜 같은 목적으로 나온 집회인데 이렇게 둘로 나뉘어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거기에 딴지를 걸자는 것은 아니다. 서울광장에서는 주로 '프로그램에 맞춰진 행사'가 진행되고, 도로에는 중구난방이다. 앞쪽(광화문쪽)은 전선을 형성하는, 그러니 대치하는 경찰과 시민들이 있고, 뒷쪽(대한문쪽)은 촛불을 바닥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한가하고, 일견 여유로운 풍경들이 펼쳐지곤 한다. 나는 주로 도로쪽에 있었다. 지난 노제 뒷풀이에서도 그랬지만. 거기서 동행한 벗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실은 서울 광장의 공식행사에서 꼰대들 하는 이야기는 별로다. 차라리 거리에서 시민들이 즉흥적으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난 좋다. 물론 이번에는 스피커용 차량이 준비되지 않아서 그런 일은 없었다.
시청역 3번 출구 : 경찰, 인도를 막아서다. - 인도 통과 금지 : "예외를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시청역 3번출구 인도쪽에서 벌어졌다. 미쳤다고 밖에는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경찰들
(실은 그런 지시를 한 지휘관)이 인도를 막아섰다. 영국대사관쪽
(조선일보, 광화문쪽)으로는 누구도 , 단 한명도 들어가지 못했다. 시민들은 격렬히 항의했다. 내가 거기에 있던 시각은 9시쯤부터 11시 가까이. 시청역 3번 출구 인도에서 시민들과 경찰은 서로 실랑이를 벌였다. 영국대사관
(마당세실 극장, 서울 성공회 성당 부근)에 차를 대놨다는 아이 둘을 각자 무등태운 부부도 "예외를 인정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인도를 막아선 경찰을 뚫지는 못했다. 황당했다. 시민이 도로를 점거한 것도 아니고, 인도를 걸어가겠다는데 막아서는 경찰을 이해할 어떤 논리도 생각나지 않는다. 함께 동행한 벗이 경찰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왜 인도를 막아서는가'라고. 아직 앳띈 얼굴을 한 경찰이 뭐라고 이야기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정확히 들리지는 않았는데, 폭력을 행사하는 시민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그 비슷한 취지로 대답했던 것 같다.
mepay
마스크, 촛불, 아이들 무등 태우는거, 그 모든게 그들에겐 위협의 대상인가 봅니다.
조금 있으면 인간이 직립보행 하는것도 막을 태세입니다.
- 각목과 휴대용 찍찍이, 그리고 물통과 소주병 한 번은 어떤 취객이 경찰에게 각목을 휘둘러 살벌한 풍경이 잠시(2,3분남짓) 벌어졌다. 각목은 즉시 치워졌고, 그 취객도 단 한번 각목을 휘두르곤 경찰의 즉각적인 응전과 시민들의 비판 목소리에 자취를 감췄다. 동행한 벗 둘은 경찰 바로 앞에서 종이피켓을 들고 계속 항의했다. 그 중 한 벗은 눈에 찍찍이(휴대용 최루액인듯)가 뿌려져 한동안 빨갛게 충혈됐다. 그 벗(형)의 말을 빌면, 간이 최루액은 예전에 자신이 학생운동하던 시절의 최루탄에 비해선 꽤 약한 농도인 것 같다고 말하더라. 뒤에서 누군가 찍찍 하고 휴대용 찍찍이를 찍찍 간헐적으로 시민들을 향해 뿌려댔다. 찍찍!!
몇몇 흥분한 시민
(취한 듯)은 물병을 던지기도 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부터 소주병이 날아오기도 했다. 다행히 전경의 벽 바로 옆 가로등에 맞아 박살나기는 했지만. 대다수 시민들은 즉각 이 병에 대해 불쾌와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극히 일부의 편린이 합법준법 좋아하는 거룩한 해당언론사에서는 폭력시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포착되겠지. 나에겐 그 어떤 폭력보다 사람이 걸어가라고 만들어 놓은, 국민들의 세금으로 깐 인도에서 사람이 걸어갈 수 없다는 그 아이러니와 압도적인 비상식이 너무도 절망적일만큼 서러웠다. 어떤 시민(초로의 아주머니)는 "이렇게 사람들 살살 약올리는거구나...내 살다살다 이런 황당한 꼴을 보네..." 한탄하셨다.
- 경찰 벽 뒤의 막대 사진기 : "인도에 있는 시민들을 왜 찍어요? 이거 불법이예요!" 인도에서 "걸어가겠다"는 걸 항의하는 시민들, 그걸 항의해야 하는 상황도 골 때리지만, 경찰 벽 뒤에는 길다란 막대기 위로 플래쉬 사진기가 시민들을 향해 있었다. 인도에서 걸어가겠다는 것도 '채증'의 대상이 되나보다. 정말 미친 것 같다. 주변에서 왜 인도에 서있는 시민들을 찍느냐며 항의했다. "내 잘생긴 얼굴 실컸 찍어라" 어떤 사내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고성을 내질렀다. 정말 그 3번 출구 인도는 그 날 완전히 미쳤다.
- "한 명씩이라도 통과하게 해주세요" "예외는 없습니다" 시민들은 광화문쪽(실은 대부분은 영국대사관 쪽)으로 꼭 가야 하는 사람을 위해 한사람씩이라도 통행이 가능하도록 한줄만 인도에 공간을 내달라고 이야기했다. 역시나 예외는 허락되지 않았다. 인도를 막아선 불법 경찰에게 인도에 선 시민들이 하소연을 하는 풍경은 코믹하다기 보다는 서럽더라. 인도는 당연히 사람인 시민들이 걸어갈 수 있어야 하는데, 시청역 3번 출구 인도에서는 누구도 광화문 쪽으론 단 한발자국도 옮길 수 없었다. 흥분한 시민들은 꽤 심한 욕설을 경찰들을 향해 내뱉었다. 그게 이해되기도 하고, 그게 좀 싫기도 했다. 욕설은 산발적으로 파편화된 유리조각처럼 간헐적으로 내 뇌리에 와서 박혔다. 어떤 아저씨는 이런 비상식적인 지시를 내린 지휘관이 누군지를 따지며, 이게 경찰과 시민들의 충돌을 유도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경찰들에게 지속적으로 고성을 질렀다. 정말 그 지휘관, 누굴까, 도무지 어떤 정신세계를 가진 이라서 인도를 막으라고 지시한 걸까... 정말 그 정신세계를 이해할 길 없다.
광장을 떠나다. 실랑이 벌이던 시민들도 지쳤는지 삼삼오오 그 3번출구 인도를 둘러싼 작은 전선에서 이탈해갔다. 우리도 10시 40분쯤에 거기에서 완전히 빠져나왔다. 우리 뒤로는 더 이상 시민들의 무리는 없었고, 지친 패잔병들처럼 울분과 어이 없는 표정으로 가득한 시민들만 남겨졌다. 3번출구 인도에서 떠나기 직전에 새드개그맨이 합류했다. 아니 새드개그맨이 겸사겸사 그 3번출구 옆 인도에서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주행사를 벌인 서울광장은 거의 텅 비워져 있었다. 몇몇 작은 무리들만이 남아서 삼삼오오 이야기했다. 우리가 통과한 도로 위에도 역시나 시민들은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원래는 한바퀴 휭하니 둘러보고 좀더 이야기하다가 가려고 했는데, 그냥 발걸음을 계속했다.
아쉬웠던 것... 그 많던 사람들은 다 어디에 있나. 가장 아쉬웠던 건 너무 사람들이 적었다는 거다. 광장은 모두 채웠지만, 거리에선 대한문~시청3번 출구까지의 도로를 아주 헐겁게 채울만큼만 모인 것 같다. 내 기대보다는 훨씬 적은 수의 사람들이었다. 도로 위에선 단 한 대의 스피커차량도 없었다. 그래서 물론 시민들의 즉흥연설도 없었다. 하기는 그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채운 08년의 촛불시위에서도 이명박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았지만... 이명박은 이제 거리에서 선 사람들을 두려워하지도, 그들을 자신이 봉사해야 하는 국민으로도 생각하지 않는건가... 그런 생각도 잠시 머물렀다.
내가 원한 것. 나는 무엇을 원해서 광장에 나간걸까? 물론 청와대로 밀고 나갈 수 있을 거라거나, 여기에 모인 시민의 힘으로 MB를 하야시킬 수 있 있을거라는 그런 몽상을 하지는 않았다. 오늘 돌아오는 광장과 거리는 유난히 쓸쓸한 느낌이 강하다.. 지난해 촛불은 꽤 재밌었는데.... 동행한 벗은 그저 시민으로서 항의 의사를 전하고 싶었을 뿐이고, 그게 현재로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이라고 말했다. 그런 최소한들이 모여져서 좀더 나라가 살맛나고, 이명박 정부가 좀 정신차리고... 그런 소박한 것들. 나 역시 원하는 건 그런 소박하고, 상식적인 것이지 무슨 거창한 건 아니다. 이 놈의 나라에선 이런 소박한 게 너무 너무 힘들고, 상식적인게 별천지의 마술처럼 낯설다.
여담. - 거리에서 이상형을 보다 : 검정색 아식스 운동화, 하얀 티셔츠, 청바지, 안경 여담. 8시쯤(?) 이상형에 몹시 가까운 한 여성을 봤다. 담배 피우는 동성친구와 함께 우리 부근에 서 있었는데, 웃는 모습이 참 이쁘더라. 마치 커피캬라멜처럼. 검정색 아식스 운동화를 신은 약간 작은 키. 뿔대안경(?)에 웃는 모습이 참 착해보이는 순한 인상의 나이를 나늠하기 어려운 어떤 여성. 청바지. 가디건. 나머지는 까먹었다..ㅡ.ㅡ
혹시라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갑자기 이런 이산가족찾기 노래가 떠올랐다능..) - 아주 비싸고 짠 오뎅주변 포장마차 노점상의 폭리가 꽤 심하다. 핫도그 2천원이야 그렇다치고. 오뎅꼬치 하나 보다 조금 더 들어간 오뎅 한그릇이 5천원. 정말 이건 좀 심하게 비싸다. ㅠ.ㅜ; 그래도 날개 돋힌듯 팔리더라. 자리를 잘 잡으신 한 초로의 오뎅장수 부부. 오늘은 두분께서 위너십니다~!
- 야4당은 뭐한거지? 광장에서 '행사'를 벌인 야4당은 거리(도로)에선 볼 수 없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새드개그맨과 잠시 뒷담화. "쟤들은 쇼하러 온건가? 뭐 이래?" 광장을 무대 삼아 사진 찍으러 온 모델 같이, 홍보를 위해 극장순회하는 영화배우같이... 니들도 그런데 시민들은 무슨 용가리 통뼈냐... 아, 이정희 의원은 어서 쾌유하시길 빈다...
- 돌아오는 거리에서 광장에서 인권위건물 도로를 끼고 집으로 가기 위해 걸어갔다. 광화문역까지 걸어가는 동안 경찰은 그 부근을 말그대로 장악하고 있었는데. 그 풍경이 참 묘하게 쓸쓸하고, 묘하게 측은하기도 하더라. 물론 기본적으론 참 엿같은 느낌...
아, 노무현...!! 아, 그런데 왜 노무현은 구호로 외쳐지지 않은걸까. 노무현이라는 상징을 내가 너무 과대평가한건가? 아니면 그 상징은 여전히 잠복되어 있는 앞으로 더 거대해질 상징인건가? 물론 그 시간의 변수들은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일이지만...
weisskatze
저는 당연히 노란색이 많이 펼쳐져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없었습니다.
서울과 상황이 다르긴 하겠지만 상당히 안타깝더라구요.
Laputian_
불안감일수도있습니다. 보수언론에게 꼴통노빠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는 류의 불안감. 그리고 지금은 '노무현'이라는 의미 집약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민주주의 보장' 등의 구호를 사용하는 편이 훨씬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Laputian_
노무현 자체는 훌륭한 상징이나, 그 상징이 구호로써 외쳐질 정도의 힘을 지니기 위해선 아직은 숙성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또한 노무현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구체화하는 작업도 필요하겠죠.
viamedia
현재 그 상징과 구호에는 어떤 간극이 있고, 노무현은 좀더 긴 상징화의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다만 그의 모순적인 면모들이 좀더 깊이 성찰되고, 그 모순에 대한 애증이 우리의 위선을 치고들어올 때.. 아니면, 힘없는 구호만 남겠죠.
남은 것. 남은 건 기록과 기억의 싸움뿐인 것 같기도 하다. 그건 지루하고, 재미없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들이 많아지면, 인도에서 사람이 걸어가지 못하는 일은 생겨나지 않을거다. 기억하라, 그리고 기록하라. 이 재미없는 글을 쓰는 이유도 그래서다.
viamedia
좀더 자세히는 기억하는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요. 기억이라는 차원에서 냄비근성은 한국의 근대화 프로젝트로 형성된 것이라 보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기억하는 방식을 상실해 버린거죠. 기억의 매개는 모두 고물상에 내다 팔았어요.
민노씨(이하 '나')
상징과 구호의 간극, 기억하는 방식.. 모두 정말 중요한 지적이십니다.. 특히나 기억하는 방식, 일상 안에서 정치를 살려낼 수 있는 기억할 수 있는 능력과 방법은 정권과 결합한 언론들을 통해 더욱 강하게 거세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viamedia
결국 본뜻의 미디어가 문제겠는데요. 큰 매개 말고, 우리 일상에서 자잘한 기억의 매개가 상실되었다는 것에 관심이 가요. 그게 사회의 집단적 기억상실증의 자원이 된 셈이겠다는... 언론을 이걸 먹이감으로 삼은거고요.
나.
특히나 이분법(남/북, 귀/천, 부/빈, 영남/호남..)식 논리가 심리적인 관극틀을 획일화하고, 일상/정치라는 변질된 이분법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일상 안에서 정치적 상상력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작동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더불어 일상안의 유희성과 욕망의 문제를 죄악시하는 표피적인 도덕정권(박정희가 대표적이겠죠)은 이런 변질된 이분법(일상/정치, 세속/고결)을 심리적으로 내면화하고, 세속에 둘러쌓인 일상에서 정치를 추방해버린 것 같아요.
viamedia
흥미롭게도, 매개(media, sacrament)를 상실한 말씀중심주의, 이분법, 유희와 욕망에 대한 정죄(위선적으로), 성과 속의 구별 등은 한국 개신교(미국식 우파 복음주의의 유산으로서)의 프로파간다였죠. 2mb는 그 결정체고요.
나.
탁월한 지적이시네요. 다만 MB(시스템)은 자신의 도덕적 타락이 신성으로 인해 포괄적 면죄부라도 받은 듯이 행동하는게 유별난 것 같습니다. 타락을 위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락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로서의 신성의 도구화랄까..
viamedia
바로 칼빈주의신학(장로교)의 한 왜곡장인데요. '이중예정' 교리(구원받을 자와 아닌 자는 예정되어 있고, 그 예정은 변치 않는다)가 그런 '타락을 가능케 하는 전제'로 작동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또 선민주의와 파시즘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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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캡쳐당하셨군요 ㅎ
캡처라기 보다는 '모자이크'처리 당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엔 '노모'가 좋은데 말이죠. ㅎㅎ
닉네임마다 모자이크 네모 크기가 다르네요. ㅎㅎㅎ
민노씨는 모자이크 하나마나...
써머즈님도 모자이크 하나마나..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