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나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선 조중동을 '사멸의 형식'에 위치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최소한 조중동의 위상을 현저히 약화시켜야 한다. 그건 조중동을 읽는 독자들을 증오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오히려 조중동을 읽는 독자들을 설득해야 한다는 의미다. 조중동이 '정상적인 보수'의 역할을 자임하는 엽기 시추에이숑 코미디가 앞으로도 계속되면 "이런 비극적인 일"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조중동은 존재 자체가 '비극'이다.

[사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며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은 엊그제부터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은 현 정부 책임"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28일 "나라도 그런 결단을 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이 자신보다 20여년 젊은 다른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을 두둔하듯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듣기 거북하다. [....] 오늘은 국민 모두가 노 전 대통령이 이승을 편안히 떠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가다듬을 시간이다. 그를 편히 떠나보내고 나서 이런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을 찾는 데 모두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28/2009052801775.html
1. 조선일보가 이런 가증스러운 사설로 독자들을 현혹하는 사설을 쓰더라도, 그런 병맛스런 조선일보의 행태에 현혹될 수 있는 독자들 수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일.

[사설]국민葬을 국가 혼란의 場으로 만들려는 세력 누군가
그런데 우리 사회 일각에는 고인의 영결식을 이용해 한바탕 광풍(狂風)을 몰고 오려는 세력이 있다. [....] 북한의 핵실험으로 안보마저 비상상황을 맞았다. 이처럼 위중한 시기에 전직 대통령의 영결식에 반(反)정부 시위를 벌여 사회혼란과 국민 분열의 불쏘시개로 삼으려는 세력은 순수한 추모군중과 거리가 멀다. 일부 미디어도 고인을 추모하는 내용을 넘어 선동의 기미마저 보인다. 책임 있는 언론의 모습이 아니다. [....] 일부 세력이 ‘검찰과 정권 그리고 일부 언론의 합작 살인’ 운운하는 것은 무책임한 망발이다. [....]‘살인정권’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낙인에 주눅이 들어 일부 과격세력에 휘둘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인다면 큰일이다. 국민장을 국가 혼란의 장으로 끌고 가려는 세력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http://www.donga.com/fbin/output?rss=1&n=200905280089
2. 동아일보의 무뇌아적 증오 바이러스에 노출되는 독자수를 획기적으로 줄이는 일.

[사설] 집시법 합헌 결정, 불법·폭력시위 근절 계기 돼야
헌법재판소가 집회·시위 때 경찰에 사전 신고토록 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조항이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 공공질서를 위협할 가능성이 큰 집회는 금지·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 집회 사전 신고제는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란 점에서 헌재의 이번 합헌 결정은 백번 옳다. 그간 집시법은 시위대에 의해 조롱거리가 되기 일쑤였다. 버젓이 법을 어기고 폭력 시위를 해도 엄정한 대처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번 헌재 결정을 계기로 집시법 집행을 추상같이 해 공권력의 권위를 바로 세워야 한다. 집회·시위는 반드시 사전 신고돼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도록 하되 신고된 집회라도 폭력시위로 변질될 경우 엄정하게 대처해야 한다.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의사 표현은 권리가 아니라 폭력에 불과할 뿐이다. 불법 시위대에 의해 법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사태는 이제 영구히 추방돼야 한다.
http://news.joins.com/article/3626920.html?ctg=2001

[사설] 전국적 추모 열기 민주발전 밑거름으로
평화스러운 촛불집회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추모 행사다. 하지만 지난해 촛불 사태처럼 과격한 시민운동 세력이 가세해 과격한 대중집회로 방향이 바뀌면 우리 사회는 다시 ‘불안지대’로 진입하게 된다. 경찰도 장례식 행사장 주변에 대한 과잉 통제로 시민들의 불만을 사는 일은 삼가야 한다. 오늘 하루만큼은 시민의식을 믿어볼 필요가 있다. 애도는 애도로 끝나야 한다. 갈등 때문에 고통 받은 것으로 치자면 노 전 대통령만 한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 그 자신이 ‘아무도 원망하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 애도를 정치·사회투쟁으로 변질시키면 유서의 의미를 배반하는 것이다.
http://news.joins.com/article/3626918.html?ctg=2001
3. 중앙일보가 노무현의 유언을 들먹이며 이런 분열적인 사설을 쓰더라도 그 중앙일보식 분열증에 현혹되는 독자수를 가급적 줄이는 일. 이런 일들이야 말로, 일등신문 조선일보가 원하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이다.

4. 끝으로, 조중동 가운데서도 가장 무식하고, 노골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동아일보는 "일부 미디어도 고인을 추모하는 내용을 넘어 선동의 기미마저 보인다. 책임 있는 언론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꾸짖는다. 자신을 돌아볼 일이다. 영어교육으로 충성하는 동아일보의 "책임있는 언론의 모습"은 코믹하다기 보다는 끔찍하다. 유치하고, 저열하며, 병적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 동아일보

그 시위집단이 모든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나 보네.
그 시위집단이 모든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나 보네.
그 시위집단이 모든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나 보네.

이렇게 대놓고 국민들 모욕하는 신문이 세상에 또 있나 싶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거기에 가야겠다.



좀 시의성을 지난 것이고, 약간은 지엽적인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나름으로 관심을 갖고 있던 영역(저널리즘, 포털)에 속한 이슈라서 간단히 살펴봅니다. 결론을 우선 말씀드리자면, 사실무근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누락설은 사실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그러니 잘못된 정보원이나 미흡한 사실확인에 의한 오보가 아닌가 싶네요. 이런 전제에서 이런 설이 유포된 원인은 언론에 대한 불신과 언론보도에 대한 확신(언론에 대한 양가적인 태도)에 있다고 봅니다. 물론 경찰발표에 대해선 불신의 크기가 훨씬 크겠고요. 거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둘러싼 울분이 여기에 겹쳐진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특히 '누락'되었다고 주장되는 부분에서는 검찰수사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담고 있는데요. 그게 조작설, 혹은 축소설(누락설)을 부추긴 것 같기도 하네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미상.
붉은 글씨는 제가 쓴 것이 전혀 아닙니다...;;;
위 붉은 글씨 중에서 우측 상단에 있는 포털에서 삭제되고 있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닙니다(본문 참조)


최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과한 소문들, 특히 타살 의혹을 주장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고인께도 이런 과도한 음모론은 예의가 아닌 줄로 생각합니다.
간단히 적어봅니다.

0.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적인 유서
경찰과 언론에서 밝힌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는 모두 3개 문단, 13줄, 13개 14개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매우 짧고, 단호하며, 관조적인 시선들을 담고 있는 글입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1.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영재 기자의 기사  
다른 포털은 모르겠습니다만, 조작 혹은 누락 의혹을 주장하는 관련글들을 살펴보면 '네이트 뉴스'를 통해 유통된 '국민일보 이영재 기자'의 글을 주로 사실의 근거로 공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盧 유서에서 “돈 문제 깨끗했다”(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영재)
기사전송 2009-05-23 13:03
http://news.nate.com/view/20090523n05672

이런 누락설, 축소설에 대해선 다음과 같은 반대 주장의 기사가 있습니다.
[盧 전대통령 서거]유서 내용 더 있나?
기사입력   2009-05-23 16:4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4&aid=0002143382

인터넷에 유서 조작설… 사실무근 밝혀져 (동아, 김윤종)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905240027&top20=1
기사입력 2009-05-24 02:**

"경찰은 일부 언론이 유서 전문을 입수하기 전 노 전 대통령 측근으로부터 전해 들은 내용을 확인하지 않은 채 보도하고 이것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빚어진 해프닝이라고 설명"(위 동아 기사 중에서)

<盧전대통령 서거> `유서조작설' 왜 나왔나 (연합)
http://www.yonhapnews.co.kr/society/2009/05/23/0701000000AKR20090523100900004.HTML

2. 모순되는 기사 : 어떤 기사가 사실을 말하는 기사인가?
논리상 국민일보의 기사와 파이낸셜뉴스(혹은 동아일보, 연합)의 기사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국민일보 쿠키뉴스 이영재의 기사가 오보일 것으로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물론 이것은 확신은 아니고, 아마도 그럴 것 같다는 추정(강한 추정)입니다.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ㄱ. 이슈의 중요성으로 보건대 조중동에서야 그렇다고 쳐도, 한겨레나 경향, 프레시안, 오마이, 미디어오늘, 미디어스, 레디앙 등에서 이런 의혹에 대해 문제삼는 기사를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ㄴ. 더불어 유족들이 이런 축소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었다는 것도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고인의 유지를 담고 있는 유서라는 점에서 유서내용의 의도적인 누락과 축소는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ㄷ. 누락 의심 부분(이하 '의심 부분')과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부분('공식 부분')은 그 문장의 호흡이 매우 다릅니다. 좀더 부기하면 '의심 부분'은 개인적인 감상에 치우친 하소연의 어조가 강해서, '공식 부분'의 단호하고, 함축적이며, 관조적인 어조와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즉,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서 동시에 나온 글의 호흡이라고 판단되지는 않습니다. 물론 시간 간격을 두고 유서를 부기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겠습니다만,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글이라는 점에서 '의심 부분'과 '공식 부분'을 하나의 유서로 남겼을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봅니다. 즉 의심부분과 공식부분은 서로 다른 사람, 적어도 서로 다른 상황에서 쓴 글 같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유서라면 그렇게 다른 이질적인 부분을 하나의 글로 엮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3. 쿠키뉴스와 네이트 뉴스는 뭐하는 곳인가?
위 네이트에 송고된 기사가 '오보'라는 전제에서(물론 이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추정입니다) 말씀드립니다. 이 전제가 맞다는 가정에서, 쿠키뉴스와 네이트 뉴스는 뭐하는 곳인지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이것이 오보라면 당일 반박기사(위 파이낸셜 뉴스의 기사)가 있던 그 날(23일) 내렸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정보도를 냈어야 합니다. 기사의 중요성에 비춰 이것은 당연한 조처입니다. 그런데 해당 쿠키뉴스의 기사는 여전히 네이트 뉴스를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현재 시각 오전 6:02 2009-05-28 현재). 거기에 남겨진 댓글만 4839개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것이 오보라는 전제에서, 쿠키뉴스와 네이트 뉴스의 행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고, 이를 통해 불필요한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고인의 유지를 왜곡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인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검찰을 성토하고, 성토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그 자체로 메시지입니다. 그것은 민주주의와 대한민국을 고민하라는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현실 정치권력, 언론권력, 사법권력(검찰)에 대한 비판을 담은 메시지입니다. 유서에 검찰을 성토하는 문장이 있는지 없는지, 자신의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문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것이 전혀 아닙니다.

4. 쿠키뉴스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봅니다만,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한민국 언론들은 집단으로 직무유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추.
분노하더라도 흥분하지는 맙시다.



강준만은 '심정민주주의'라고도 했고 '욱 민주주의'라고도 했다. (한겨레21. 특집 : 시스템의 노무현 죽이기) 의미있는 명명이다. 강준만은 김주열과 박종철과 이한열이 4.19와 6월 항쟁을 불러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 사람이름, 그 고유명사가 그 혁명과 항쟁을 폭발시켰다고 강준만은 생각한다. 그게 강준만에게는 '심정'이면서, '욱'이라는 한국 특유 정서다. 좀더 보편적으로 말하면 그건 상징(에 의해 유도된 감정)이다.

민주주의와 상징의 상관관계는 이처럼 자명한 것이다. 민주주의가 각성한 시민사회의 자발적이고 이성적인 내적 성숙에 의해 그 자체로 점진적으로 진보를 향해 전진한다는 가정은 여전히 설득력이 있지만, 그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성장한다는 가정. 그게 망상이라고 강준만이 생각하고 있는지는, 그 짧은 기사의 인용만으로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일견 이성적인 시민사회라는 이상적 모델에 대한 불신이 강준만의 가설 속에선 자리하는 것 같다. 그런 거친 전제에 대한 추론이 어느 정도 맞다면, 나는 강준만이 행한 한국적 상황에 대한 진단(가설), 특히나 상징의 효용을 강조한 부분에 공감한다. 대한민국은 전혀 이성적인 사회가 아니다. 그렇다고 시민사회라는 게 과연 합리적인 운동원리를 갖고 작동하고 있는지도 솔직히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나는 대한민국의 현대사, 그 고비 고비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위대한 성취와 전진에 대해선 크게 공감하고, 또 감격하고 있기는 하다.  

이성적 토론과 민주적 대화를 통한 시스템의 내적 원리가 일상이라는 혈관으로까지 흐르지 못한 구조적 원인이 존재한다. ㄱ. 역사로서는 청산하지 못한 일제에 뿌리둔 정치권력 ㄴ. 자본으로서는 미종속적 매판자본에 뿌리한 기업권력, ㄷ. 그리고 이들과 딴 몸이었던 적 없는 수구적 담론권력(흔히 '조중동'으로 상징되는)은 이른바 우리사회의 '주류'를 자처하며 자신의 역겨운 태생을 적극적으로 위장했다. 그들은 학벌과 자본이라는 새로운 위계의 질서를 세우며 스스로를 귀족화했으며, '국민에게 주권이 있다'는 공화국의 정신을 짓밟았다.

국민주권이라는 공허한 관념은 공식적인 질서의 표피를 치장하는 악세사리에 불과했다. 더러운 원죄를 가진 그들은 타락한 귀족사회의 위계와 주류/비주류라는 구별적 표지의 성채들을 더욱 공고히 쌓았다. 그 성채는 이 모든 위계와 구별이 합리적이라고 강변하는 기만적인 제도와 시스템을 통해, 때론 정치적 선동과 계몽을 통해서 더욱 단단해졌고, 이것이 조선일보가 흠모하는 박정희 시스템의 완성이다. 물론 여기에 '북한'이라는 '영원한 타자'가 자리한다. 그리고 전두환은 이 시스템의 균열(광주)을 폭력으로 잠재우려 했던, 그 타락한 역사가 예정한, 박정희의 사생아에 불과하다.

아무튼 자본주의라는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교활하고, 막강한 자가발전적인 시스템 속에서 민주주의는 항상 '인간적'이라는 가치를 한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내딛기 위해서, 잔인할 만큼의 희생과 그 희생의 상징을 그 대가로 요구해왔다. 앞서 김주열이 그랬고, 잠재된 뇌관으로서 광주가 그랬으며, 박종철과 이한열이 그랬다. 그들은 인간성을 옥죄는 기만의 구조와 폭력의 구조를 극적인 상징으로 폭로한다. 그들은 내면화된 순응주의이라는 시스템의 원리를 '피'라는 가장 원초적인 상징으로 깨뜨리는 전복자로서의 상징들이다. 하지만 내면화된 순응화 기제들은  '인간적'라는 가치의 표피적인 진보와 더불어 진화해왔다. 그걸 주도한 건 일견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자본의 성장과 여기에 빌붙어 먹은 기만적 담론권력의 성장이다. 그리고 거기에 일상적인 욕망이라는 마취제가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눈부시고, 섹시한 발전으로 통해 그 주변을 애워쌓았다.

그래서 포스코 노동자들의 피와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절규와 용산에서 타올랐던 야만의 불기둥이 그토록 쉽게 지워버릴 수 있었으며, 우리들은 이 모든 것들을 기억하기엔 너무 많은 쓸모없는 정보들을 생존을 위해, 우리들의 습관을 위해 학습하고, 복습해야 했으며, 더 많은 물질적인 유혹들을 시기와 질투의 회로들 속에 입력해야 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욕망 기계로 만들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것이 우리들의 공식적인 사회에서는 '성공'이라는 자랑스런 비교 표지였다.

그래서 이토록 순응화되고, 내면화된 분노를 꺼내줄 상징은 좀더 고결하고, 좀더 드높은 상징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노무현은 거기에 가장 부합하는 상징이다. 그는 우리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드높은 상징이었다. 그는 국가를 대표하는 가장 존엄한 자리에 까지 올랐다. 물론 우리는 그를 그토록 쉽게 내버렸다. 그건  합법으로 위장된 야만의 기제들 속에서 우리가 기꺼이 합의한 무관심의 메카니즘에 따른 결과였는데,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은 우리 자신 내부에 있는 속물근성의 표지인 동시에, 그렇게 성취와 쇠락의 비극적 영웅의 표상이자, 우리들 자신이기도 하다.

이 상징을 무화시킬 다른 상징들은 앞으로 당분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렇게 일상적으로 내재된 분노와 그 분노를 억압하는 각종의 기만적인 장치들에 의해 억눌리고 내면화된 에너지를 꺼내줄 상징은 흔히 열사라는 이름으로 호명된다. 그렇게 불려진 이름들이 드디어 시스템에 의해 길들여지고 내면화된 억압을 폭발시키고, 그 폭발된 에너지는 사회의 근간을 새롭게 재질서화하는 초석적인 폭력의 형태로 표출된다. 이른바 혁명이라는 이름은 그런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다.

노무현의 죽음은 두 가지 원인적 의미로 크게 유추할 수 있다. 이명박으로 상징되는 '공화국의 적'(검찰과 한나라당, 조중동, 거대기업으로 상징되는 정경언사법 복합체)이 만들어낸 정치적 타살이 그 표피라면, 정치인으로서 스스로의 존엄을 최소한으로 지키기 위한 강요받은 선택으로서의 정치적 존엄사라는 내적 의미가 그것이다. 나는 노무현의 죽음이 지시하는 그 두 가지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정말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노무현의 죽음을 둘러싼 표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노무현의 죽음에 둘러쌓인 하나의 표지에 불과하다. 노무현의 죽음은 과거로서 대상화되는 죽음이 아니라 날마다 살아서 커져가는 '생명으로서의 죽음', '상징으로서의 죽음'이면서, '그 죽음 자체가 상징인 죽음'이다. 그 죽음은 점점 더 커다란 상징으로 자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는다.
이 질문은 앞으로 계속될 질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앞으로 계속되어야 할 질문이다.

노무현은 '혁명'을 불러내는 이름인가?
노무현은 초석적 폭력의 제의를 만들어내는 속죄양으로서의 상징인가?

노무현은 이제 타오르는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노무현은 이 압도적인 기만과 침묵의 사슬을 모두 녹여버릴 폭발하는 용암같은 존재로 화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무현의 유언인 "원망하지 마라"를 조선일보에서 인용하는 건 넌센스다. 그건 노무현이 조선일보(이걸 이명박이나 검찰, 혹은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으로 바꿔도 상관없다)에 건넨 마지막 농담 같다. 조선일보 김대중은 한 달 전 오늘 "노무현씨를 버리자"라는 칼럼을 쓰면서, 온갖 저열한 경멸과 저주를 노무현에게 퍼붇고 있다.(조선일보 독자만 그 저열함을 확인하시라는 차원에서 클릭 추천, 그 외에 클릭 비추)

김대중은 "더이상 '노무현'이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자신의 소박한 바람을 이야기했지만, 그 바람은 이제 이뤄지지 못하는 바람이 될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앞으로도 조선일보는, 조선일보 김대중이라는 이름은 노무현이라는 위대한 상징을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해 조롱했던 저열한 악당의 이름으로 인용될 확률이 매우 높다. 그 이름은 치욕스런 악명으로서 기억될 확률이 아주 아주 높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일보 김대중은 이제 "더이상 '김대중'이 (노무현과 더불어) 역사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유언을 남겨야 할지도 모르겠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공화국'이라고 할 때 그 민주주의와 공화국은 정신(사상)과 체제(시스템)를 공히 일컫는다. 노무현은 민주주의라는 정신이 체제(시스템)라는 표피적인 합리성에 의해, 그러니 법과 제도와 언론이라는 합법을 가장한 기만적인 시스템에 의해 교란되고, 배반당하는 그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럼으로써 그 시스템의 총체적인 기만에 경종을 울리며 스스로를 영원한 상징으로 한국의 현대사에 봉인해 버렸다. 그 봉인은 앞으로 풀려질 것이지만, 누가 그 봉인을 풀어낼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는 순결한 순교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용감한 속죄자다. 그가 시스템의 유혹들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웠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최소한 시스템에 저항하고, 그 시스템 자체를 회의했으며, 그 시스템에 유혹당한 자신을 처단했다. 생존만이 유일한 덕목인 타락한 한국 정치판에서 이런 고결한 자기 희생, 자기 속죄는 이전까지의 정치사에서도 없었고, 앞으로의 정치사에서도 만나기 힘들 것이다. 그건 마치 마틴 스콜세지가 그려낸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의 마지막 장면과도 겹친다. 생인지 꿈인지 모를 그 모든 유혹의 환영들이 지워진 뒤에 '그'가 낮게 읊조린다.

'다 이루었도다'

물론 지금/여기에서 이뤄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역시 노무현을 못박은 자들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그럴 분이 있을까 싶기는 하지만, 불펌도 아주 고맙겠습니다. 이 글은 제가 사용/참여하는 모든 블로그(그래봤자 몇 개 되지 않지만요)에 동시 동록합니다. 물론 메타사이트로의 중복송고는 피합니다.

* 목박다는 '못박다'의 오타입니다. 수정했습니다.



노무현이 죽었다. 나는 노무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뭐가 그리 서러운지 눈물이 난다. 이 서러움의 정체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이 개같은 나라에서 사는게 서러운 건지... 하지만 항상 대한민국은 눈물의 나라였다.

어제 우연히도 지났던 덕수궁 대한문 앞. 한 나라의 지도자였던 자에게, 아니 그저 한 인간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려는 그 최소한의 인간적인 몸짓을 "시위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순수한 애도자와 불법시위자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원천봉쇄"하는 이 좆같은 나라가 끔찍하게 환멸스럽다. 덕수궁 대한문을 둘러싼 경찰새끼들에게도 무한한 연민이 솟는다. "국민들이 배떼기에 기름기가 차서 그래!!" 서러운 격정을 토해내는 한 노인의 울분이 귓가를 때린다. "이명박 뽑은 죄로 전화도 못하겠어..." 어떤 아주머니가 전화하는 목소리 얼핏 스친다.

죽음에 대해 경건할 수 있는 자격을 국가에게 '허락'받아야 하는 나라, 인간이 인간에게 보내는 그 최소한의 인간적 몸짓들이 '예비범죄자의 음모'로 환원되는 나라에서, 나는 인간이 아니라 무슨 벌레같은 것, 욕망이라는 기계의 부품같은 것... 나는 그들에게 '순수한 애도자'와 '불법시위자' 그 둘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나는 그저 애도를 표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 뿐이라고, 이 개새끼들아...  

어제는 오랜만에 과음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의 좁은 골목길에서 이 개새끼들, 뭐가 그렇게 수줍고, 부끄러웠는지 마음 속으로만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그리고 짐승처럼 서럽게 울었다. 내가 정말 길잃은 어린 짐승같았다. 이 서러움을 끝장낼 수 있다면, 이 짐승처럼 서러운 울음을 끝낼 수 있다면...

그리고 까페 [길들여지기]에서 잠시 머물렀던 한가롭게 평화스런 풍경들이 떠올랐다. 그게 내 욕망인가, 그게 내 서러움을 만들어내는 소망의 풍경들인가... 거기에 있는 풍경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나의 욕망을 소망과 맞바꾸는가...

그렇게 알 수 없는 서러움에 지쳐서 잠이 들었다. 몇 시간 전에 일어나 처음 든 생각. '휴, 악몽이었구나..' 하는 안도감.. 그렇게 낯선 느낌의 안도감이 나를 찾아온다. 그런데 다시 잔인한 현실의 감각들이 돌아오고, TV 없는 내 작은 자취방에, 아는 형의 집에서 함께 술 마시며 틀어 놓았던 뉴스 방송들과 아프리카 '커널뉴스'의 이미지들이 다시 살아온다. 그 흔적들은 이 찬란한 오월의 햇빛들 사이에서 어둠으로 나를 감싼다. 노무현이 죽었다. 노무현이 죽었다.

우리가 우리에게 선물한 가장 찬란한 성취로서, 가장 높은 현실정치의 위대한 성취로서 세웠던 그 상징이 쓰러져버렸다.
 
노무현의 죽음이라는 생명이 이명박(시스템)이라는 살아있는 욕망이 만들어내는 보이는 죽음, 보이지 않는 죽음, 그 죽음의 시스템을 모두 불태워버릴 수 있을까... 그게 노무현의 죽음이 갖는 정치적인 유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건 남겨진 자들의 부채다.

노무현의 죽음은 한 자연인의 죽음이 아니라, 한 상징의 죽음이다. 그 상징의 성취와 쇠락에 우리는 관여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우리들의 부채가 된다. 죽음은 항상 실존의 부채가 된다. 하지만 죽음이 정치적인 부채가 되는 나라는 슬픈 나라다. 우리는 부채의식을 갖고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죽음은 결코 '무책임한 죽음'이라는 '경건한 목소리'에 의해 지워질 수 없는, 무시될 수 없는 '우리가 깊숙하게 그 죽음에 개입한' 무거운 죽음이다. 그 죽음에 우리는 모두 책임이 있다. 우리는 함께 죽음을 만들어냈고,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그 죽음들을 만들어낼 것이다.

하지만 그 죽음을 멈춰야 한다는 당위 앞에서 우리는 고민한다. 그 죽음을 멈추라고 경건하게 소리치는 그 개소리들을 모두 지운 뒤에야 그 죽음을 멈추는 일은 가능하다. 우리가 함께 더불어 왜 우리는 죽음을 만들어내고 있는가를 스스로 가슴을 치며 반성하고, 성찰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그 모든 과정으로서의 삶과 죽음, 그게 "하나"라는 실체적인 인식을 거친 뒤에야 우리를 둘러싼 그 보이지 않는 죽음들, 투명한 죽음들을 볼 수 있다. 그 죽음을 볼 수 있을 때까지, 그리고 그 죽음을 멈출 수 있을 때까지 노무현이라는 상징의 죽음은 우리의 '살아있는 죽음'을 억누르는 가장 무거운 부채가 될 것이다.

노무현의 죽음이 정치적인 존엄사인지 정치적인 타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지만 노무현은 스스로를 속죄양 삼아 그의 평생을 관통한 정치적인 숙명에 영생이라는 마침표를 찍었다. 그는 적어도 생존이 제일사명인 타락한 현실정치, 그 더러운 욕망의 아수라장에 가장 깊이있고, 고결한 질문을 던졌다. 그가 얼마나 큰 공과를 갖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전두환이 29만원으로 떵떵거리는 이 잔인하게 코믹한 오역의 현대사에서, 전과 14범의 대통령이 '법치주의'와 '도덕성'을 강조하는 이 전도된 현실정치의 한 복판에서, 노무현의 과오와 실수들은 오히려 얼마나 인간적인가?  노무현의 죽음은 얼마나 인간적이라서, 또 성스러운가? 노무현의 정치적인 오류들이 그의 죽음으로 무화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지만, 정치인 노무현을 둘러싼 압도적인 정치적 복수의 칼날들, 그 기만의 도덕성을 노무현은 자신 자신의 죽음을 통해 준엄하게 되묻고 있다.

그 질문은 아주 아주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힐 것이고, 그 괴로운 질문에 손쉬운 기만의 수사가 아닌, 자신의 욕망을 부정할 수 있는 실천으로 답하는 일이 노무현의 죽음을 지금/여기에서 살려내는 길이다.

우리들의 자랑스런 상징이었고,
우리들의 아픈 한계였으며,
이제는 우리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지며 떠난,
노무현 대통령, 이제 모든 짐을 내려놓고 편히 쉬시길...




TAG
나름으로 가장 좋아하는 언론사들 가운데 하나인 프레시안에서 이런 글을 읽....다가 말았다...ㅡ.ㅡ; 정신 사나워서 더 이상 읽기가 어렵더라. 보는 것과 같이 광고링크로 도배되다시피한 글인데, 읽는 걸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수준이라고 느낀다. 글 주제와도(꽤나 낭만적인 테마라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무차별 광고링크들 덕분에 더 짜증이 생긴 것 같기도 하다... 다만 무슨 프레시안 성토하기 위해 이런 글 쓰는 건 전혀 아니다.


1. 경영사정이 극도로 좋지 않은 가운데(적어도 풍문으론 그렇다고 알고 있어서) 수익 다변화, 수익모델 확보라는 차원에서 충분히 기본적으론 이해한다. 다만 최소한 기사 가독성을 적극적으로 해치는 정도라면 장기적으론 프레시안 수익성에도 좋지 않아보인다.
2. 이왕 표시하는 거 너무 티나게, 본문과 이질적으로 분리되는 느낌으로 표시하는 것보다는 본문의 다른 부분과 구별되더라도, 최소한 본문과 서로 어울리는 링크 표시방법을 고려하면 그나마 나을 것 같다. 현재는 정말 글을 읽기 짜증스러울 정도다. 하얀 바탕 위에 파란 링크들이 무슨 지뢰처럼 곳곳에 설치된 느낌이랄까?
3. 블로그들도 이런 직접적인 본문 내 키워드 링크 광고를 시도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이게 자동화된 방식이 아니라면 좀 귀찮긴 하겠다. 다만 몇몇 키워드를 설정하고, 그걸 어떤 특정한 광고주의 링크로 연결되도록 설정하는 방식이 가능하면 광고같지 않은, 좋의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세련된 광고도 가능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4. 위 '생기는 셈이다'에서 "생기"에 "알로에 한방 생기 전문"이라는 광고링크가 연결된 것처럼 가끔은 정말 문맥과 전혀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광고링크와 연결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자동화된 기계적 설정 시스템을 취하고 있어서 그렇겠지만... 그리고 이런데 다시 또 인력투입해서 편집하고, 수작업하는게 참 어려운 일일 것 같기는 하지만... 왠지 기사 신뢰도에도 악영향을 줄 것 같다는 염려가 생길 지경이다.
5. 기사 하나에 표시하는 키워드 광고링크의 수를 가독성에 방해되지 않는 합리적인 부피로 제한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가령 같은 줄에는 둘 이상의 링크를 심지 않는다던가, 뭐 최소한 이런식으로다가... ;;; 그게 광고효과를 고려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