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과 파블로프의 개

2009/05/14 19:28
사실.
ㄱ. 황석영이 이명박과 중앙아시아에 함께 놀러갔다. (뷰스앤뉴스)
ㄴ. 황석영이 광주항쟁을 '광주사태'라고 불렀다.

기타 참조 . (뷰스앤뉴스 기사 괜찮아 보인다.. : )
진중권 "황석영, 금붕어도 아니고..."
강기갑 대표 "황석영 발언은 궤변"
네티즌 "황석영, 조세희와 참 비교되네"
민노 "황석영, 국민을 상대로 구라 치냐?"

0. 마음에 들리가 없지. 하지만 황석영을 파블로프의 개처럼 맹비난하는 목소리를 들으면(특히 리장의 글), 그 마음을 너무도 이해하지만, 즉각적인 반발심이랄까 그런 것도 생겨난다. 나도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렇게 짖고 싶다. 그 마음 다 이해하고, 그렇게 분노하고, 황당하며, 허탈한 심정들이 다 이해된다. 나도 짖고 싶다니까.. 하지만 짖는 걸 보면 거기에도 짖고 싶다.. 그런 뒤숭숭한 심정이다.

1. 그리고 문익환이 떠올랐다. "김영삼 정권의 실패는 우리 모두의 실패이므로 그를 도와줘야 한다."(문익환) 이명박 정권의 실패는 우리 모두의 실패이므로 그를 도와줘야 한다고 황석영이 생각했는지, 그래서 이명박이 되면 안된다고 그렇게 열불 낸 양반이 갑자기 너무도 극적인 '변절의 삼위일체'를 보여줬는지... 그건 난 잘 모르겠다. 문익환을 인용하는게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개소리'일 수 있는지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위 뷰스앤뉴스 기사들 가운데 강기갑도 인정한, 혹은 기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최소한 황석영이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에 합리적인 균형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일말의 가능성' 말이다.

2. 내가 지식인을 판단하는 가장 강력한 표준은 '조선일보 적극 기고' 여부다. 그건 내가 갖고 있는 거의 유일하게 인정하는 내 나름의 정당한 '편견'이다. 조선일보나 이명박이나... 방구나 뽕이나... 그런 생각 들지 않는 거 아니고, [장길산]을 [태백산맥]보다 좋아하는 나로선 황석영에게 심한 배신감, 아쉬움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배신감, 아쉬움 너무도 이해하지만... 그래도 좀더 지켜보고 싶어지는... 뭐 이런 ('순진한' 혹은 '멍청한') 생각을 한다. 광주'항쟁'을 광주'사태'로 이야기하는 황석영은 여전히 극도로 불만스럽지만, 그건 의식적인(의도적인) 정치적 자살이거나, 혹은 그저 실언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3. 요즘 이런 생각은 한다. 이명박 뽑은 국민들 너무 너무 싫은데, 그네들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고, 그네들이 우리 형제자매들이며, 그네들이 우리 친구와 선후배들이라는 생각에 이르면, '너는 쓰레기다'라고 욕하는 건 마치 '나는 쓰레기'라고 대답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을 증오하는 것으로 그들이 우리들이 되지는 않는다. 이명박을 증오하는 것으로 이명박을 이길 수는 없다. 이명박이 만들어내려는 그 '야만의 시스템'을 이길 수는 없다. 대안이 필요하고, 방법론이 필요하다. 그런데 나처럼, 당신처럼, 파블로프의 개처럼 짖는 건, 물론 그 즉각적인 분노, 그 즉각적인 항의에 내 마음 한편에서는 무척이나 공감하지만, 그걸로 이명박이라는 '시스템'이 대한민국이라는 '욕망의 메카니즘'이 그 '야만의 메카니즘'이 민주주의로, 자유로, 진정한 화해로 (진중권의 장난스런 말투를 빌자면) '발효'되지 않는다. 이건 너무도 명백하다.

증오도 좋지만, 증오보다 더 독한 뭔가가 필요하다.


* 관련
포스트이명박의 딜레마 : 촛불 그 이후

* 관련 추천
통일에 대한 황석영의 배반 (김우재) : 본문을 적극적으로 반대해석하면 황석영이 구상하는 장기적인 역사적, 정치적인 포석을 위해 비현실('알타이문화연합'이든 '한몽 국가연합'이든)을 오히려 적극적인 외교적, 정치적 수사로써 활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일말의 희망'을 갖게 되기도 한다. 적극적이지만, 군더더기 감정이 최소화된 글이라서 오랜만에 참 잘 읽히는 황석영에 관한 글.

북한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펄) : 특히 대북관이라는 차원에서 황석영과 이명박 정권의 밀월(?)을 평가하는 글.


* 보충 : 댓글 논평에서 부분 인용
제 글 대부분이 그런 경우가 잦지만, 이 글은 특히나 댓글이 제 글보다 훨씬 좋네요. : ) 댓글창에만 두기가 아까워서 본문에 보충합니다. 그리고 아직 이 글을 읽지 않은 RSS 구독자들께도 제 나름의 작은 배려라는 생각도 들고요. 모쪼록 좋은 의견 주신 분들의 블로그에도 많이 많이 방문해주시길 바라봅니다.

뭐랄까요  2009/05/14 19:41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통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 사람을 통해 온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

Laputian 2009/05/14 19:51
마지막으로, 3번에 대해서. 용산참사가 일어났을 때 어떤 사람이 제 블로그에 "이런 식의 감정배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라고 댓글을 달았던 적이 있는데, 갑자기 그 댓글이 떠오르네요. 제대로 된 민주사회로 들어선 이후로 이만큼이나 거대하게, 집단적으로 분노를 표출해본 적이 사실상 없잖습니까. 저는 아직은 약간 기다려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분노를 통해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관심을 갖도록 이끌고.. 그런 식으로 충분히 기반이 다져져야 보다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서 그럴듯한 대안이 생겨나고, 생산적인 담론 환경이 조성되는 것 아닐까 싶네요.

나그네 2009/05/14 21:51
어쨌거나 이명박만 탓할 일은 절대 아니란 것은 확실하지요. 그 미친 꿈에 들러붙어서 같이 죽음의 춤을 추는 모든 이들이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어쩌면 더 큰 죄가 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 자에게 국가 최고의 권력을 주고, 칼을 쥐어준 꼴이니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일도 밑에서 다 알아서, 더 잘 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모두 어디 있을까요? 사람 하나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고 그를 뽑은 자들이 정말 원망스럽습니다. 그리고 그 삽질에 동조하여 나라를 절단낼 짓거리를 하는 모든 관련자들이 정말로 정말로 끔찍하게 싫습니다. 이 모든 것에 아주 지대한 역할을 한 종교의 힘...말할 것도 없구요. (작금의 종교현실을 보면, 중세가 부럽지 않습니다.ㅎㅎ 영화 '밀양'이 떠오르네요...엔딩의 노래가 정말 죽였죠~)

하루키가 '해변의 카프카'에서 나치학살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 모든것이 단지 미친 히틀러 한 사람만의 잘못이었을까? 소설에선 '효율'이란 말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어갑니다.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이 유태인을 태워죽이는 방법을 연구한 학자?가 나오는데, 그는 아무런 죄책감없이 자신의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죠. (읽은지 오래되서 자세한 기억은 안나고 표현이 약간 틀렸을수도 있습니다만, 대략)

용산참사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왜 저렇게, 그릇된 것에 대해서, 저토록이나 최선을 다할까? 정말로 지나치게 불필요하게, 너무나 온몸을 바쳐 열심이구나. 왜 그럴까요? 그들을 보면 항상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것이 주인되지 못한, 노예근성, 개의 버릇이구나 싶습니다. 우리에겐 누구나 부당한 것에대해 거절하고 거부할 수 있는, 하여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모르거나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안타깝고 처참한 일이지요.

우리는 스스로 정말 많이 반성해야합니다. 그리고 저자를 뽑았으나 뒤늦게 후회하는 자들은 더 많이 반성해야합니다. 저들에게 영혼을 팔고, 스스로의 권리를 포기한 자들은 더욱더 반성해야합니다. 마찬가지로, 황모씨 역시 욕을 먹어야 마땅합니다. 크게 잘못한 것은 더 많이 욕먹고, 된통 혼이나야 맞는 겁니다. 우리 안의 정신을 바로잡는다고 해서, 비정규직문제나 개운하문제에 입을 닫을 수는 없는 것처럼, 욕먹을 일은 욕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더 많이 화내고 분노해야합니다. 우리에게는 반성할 책임도 있지만, 분노할 권리도 있습니다. 그리고 분노할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랴퓨시안님께도 답했습니다만, 나그네님께서 주신 의견에도 같은 마음입니다.
분노를 표출하는 그 행위 자체로도 대단히 의미가 있는 것이고, 또 그런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가 갖는 잠재력은 대단한 것이죠. 저는 이런 즉각적인 분노의 표출, 의견의 표출에 대해 기본적으론 매우 호의적입니다. 다만 이 분노가 정당한 의견 표출이 '조건반사'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기우랄까.. 그런 것이 생기네요. 그래서 그런 잠재력이 마치 습관처럼 그 이상의 방향으로, 또 다른 잠재력으로 나아가지 못할까 염려가 된달까... 그런 마음으로 쓴 글입니다...



대지에 울음이 퍼지고,
그 울음이 하늘까지 채웠다.
이 세상 울음 아닌 곳 없었고,
이 세상 눈물 아닌 것 없었다.

내 안에는 나도 모르는 울음이 산다.
흐느끼는 소리 항상 가느다랗게 들린다.
버스가 지나가고, 지난 유행가가 내 귓가에 문득 내려 앉을 때
젊은 연인들의 환한 미소가
서로의 얼굴에
감미로운 어둠처럼 내리는
낮게 불켜진 바람부는 저녁의 거리를 지날 때

그렇게
어느 날
어떤 순간
시간이 기억을 만날 때
기억이 순간을 만날 때
그렇게 그렇게 울고만 있더라.


- 문득, 이소라의 어떤 노래를 듣다가...



민노씨의 믹시 위젯 조회수에 대한 비판에 부쳐.. (Krang, 2009/05/13 09:17)
http://krang.tistory.com/512
위 글은 일독 강추합니다. : )
이견이 없지 않습니다만, 합리적이며, 음미할 만한 비판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1. 제가 '상식' 혹은 '일반'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선 제가 경솔한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좀더 검토해보고, 숙고해야겠습니다만, 일단 그 표현에 있어서 신중하지 못했다는 점은 아주 잘 지적해주신 것이 아닌가 공감하게 됩니다.

2. 다만 저로선 아쉬움이 없지 않은 것이 이 글 전반의 어조는 제가 '믹시'라는 업체에 대해 대단히 적대적인 것처럼 묘사되고 있는 점입니다(제가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미리 넉넉한 양해를 구해봅니다). 저는 믹시에 대해 우호적이면 우호적일까 적대적이지 않습니다. 이는 제가 제 블로그에서 기존에 믹시와 관련한 글을 검토하셔도 충분히 수긍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제가 표현상 착오 혹은 과실이 있었을지언정, 그리고 그런 표현에 있어서 감정적인 요소가 담겨져 있었을지언정, 그것은 믹시라는 업체에 적대적인 선입견이 있어 믹시를 비난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믹시라는 업체에 대해 기대가 있기 때문인데요. 이 부분이 이 글의 전반적인 어조에서는 반대로 투영되고 있는 것 같아서, 물론 해석은 크랑님의 자율에 속한 부분이나, 저로선 아쉽군요.

3. 추천 단추 등에서 표시되는 조회수
이에 비판적인 태도를 갖는 일이 저를 비롯한 '소수 개인의 불만'이라고 간주하는 점은 저를 비판하는 동일한 관점에서 크랑님의 과도한 선입견일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어떤 실증적인 통계치나 조사도 있지 않는 바, 어떤 의견이나 입장, 관점이 '다수'인지는 확정되지 않은 문제입니다. 더불어 조회수 표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 '추천 박스의 조회수 표시 행위'를 블로거 각자의 관점과 철학에 따라 비판 혹은 옹호하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이것을 '불만'이라는 감정의 차원으로 한정하는 것도 저로선 다소 부당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저는 조회수 표시체계에 대해 꽤 비판적입니다. 이것은 제 '감정'의 차원에서만 그렇다는 것이 전혀 아니라, 이것이 초래할 블로그 문화의 부정적인 여파라는 점에서 그렇게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4. 블로거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어떤 메타서비스에 대해 비판하고 비판하지 않고를 결정하는 것은 '서비스의 고객 창구'에 가서 '건의'할 것을 결정하거나 결정하지 않거나를 선택하는 일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자율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즉, 믹시 건의 창구에서 건의한 뒤에 기다리는 것을 조언하신 크랑님의 말씀은 물론 갖아 효율적인 방식입니다만, 건의의 '정도'(자신의 블로그에서 블로깅의 일환으로 비판할 것인가, 아니면 그 해당 서비스의 문의 창구에서 직접적으로 건의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그것만으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갖고 있습니다.

5. 조회수 표시 유무에 대한 선택권
말씀주신 것처럼 제 의견은 아주 단순한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해당 서비스의 최종적인 선택권이 그 서비스사 자체에 있는 것도 아주 당연합니다.  다만 저는 제 블로그에서 추천 박스의 조회수 표시나 해당 서비스 화면에서의 조회수 표시가 획일적인 방식이 아닌, 추천 박스의 조회수 표시를 유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런 일관성의 관철을 위해서라도 메인에서 유통되는 조회수 표시 유무는 역시나 유저의 선택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 사용자의 "감놔라 배놔라" 를 저는 지지합니다.
저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감놔라 배놔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것은 '어떤 메타 서비스'에 대한 '간섭'이 아니라, 그런 메타서비스사에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하는 일반적인 유저들의 관심표명이자 애정어린 비판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너무 저 스스로에게 일방적으로 관대한 것이라면 죄송합니다.

블로거들은 원래 감놔라, 배놔라 하는 사람입니다.
특히나 그 블로거가 사용자의 위치에 있는 메타블로그와의 관계에서야 이건 뭐 말할 것도 없겠죠. 업체와 사용자라는 일반적인 용법으로 양자를 나눠보죠. 양자는 메타서비스라는 구체적인 계약관계의 '계약 당사자'이고, 그 계약이 좀더 원활하게 그 조건을 성취할 수 있도록 상호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양자는 서로 합리적인 조건에 의거, 권리와 의무를 갖는 관계이지, 어느 일방이 피동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메타서비스사는 유저에게 일방적으로 호의를 배푸는 자선단체가 아니고, 사용자들 역시 어떤 동기도 없이 메타살리기를 위해 블로깅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자는 그저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 협력하기도 하고, 또 서로 칭찬하기도 하며, 또 때론 서로의 이익과 공존을 위해 사용자들은 비판하고, 또 업체는 그 비판의견들 가운데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것은 채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제 의견이 충분히 한번쯤은 생각해볼만한 비판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물론 그 의견이 부족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비판은 달게 받겠습니다. 다만 그 의견이 성급한 것이었든 설익은 것이었든 그것은 차지하고 그것이 비판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비판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이 점은 크랑님께서도 넉넉히 동의해할 줄로 믿습니다. 물론 그 비판을 업체가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채택할 것인지는 업체의 자율성에 속한 문제겠지요.

다만 적어도 사용자들의 의견에 대해 경청해야 하는 계약상의 신의칙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고, 그런 일반 유저들의 관심이야말로, 특히나 '메타블로그'에게는 장애가 아니라, 오히려 큰 힘이 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비판의견들은 그것이 전적으로 감정적인 선입견에 기반한 일방적인 비난이 아닌 한은 오히려 메타블로그(를 비롯한 서비스사)에서 그 비판의견을 듣기를 먼저 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듭니다.

왜냐하면, 계속 반복해서 강조하는 바, 그것은 업체를 위해서도 양약으로 기능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고, 업체와 사용자는 궁극적으론 서로 협력하는 관계이기 때문이죠.


* 관련
민노씨.네 믹시 관련글
Krang이 비판 대상으로 삼은 글 (특히 4.부분)


사족.
아무튼 오랜만에 정말 제대로 된 비판의견을 접하니 저로선 한편으론 뜨끔하고, 제 경솔함에 대해 민망뻘쭘한 느낌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아주 마음이 흡족하네요. 물론 이견이 없지 않습니다만, 전반적으로 합리적인 비판의견들에 대해선 다시금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보충. 요약 버전. 
서울비님의 관련글을 핑계삼아 제 입장을 좀더 간추리면 아래와 같습니다.
믹시 위젯 및 메인 화면에서의 조회수 표시에 대한 제 비판의견의 골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위젯에서는 조회수 표시 유무의 선택이 가능한데, 메인화면에서는 그것이 선택 불가능하다는 점(반드시 공개되도록 설정)은 합리적인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저의 선택권을 존중하는 것이 좋겠다는 점.

2. 위젯 및 믹시 메인에 표시되는 조회수가 믹시의 프레임 하에서 존재하기에 일반적인 독자들에게는 그것이 '믹시'라는 고유의 유통망에서 '발생'한 수치라는 인식의 착오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점. 하지만 현재의 시스템은 믹시에서만 발생한 조회수가 아닌 광범위한 루트를 통해 기록된 조회수를 통합하고 있는 점.

3. 끝으로 저로선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인데, 조회수에 대한 '공적인 관심의 경향'을 강화함으로써, 그저 개인적으로 확인하는 것과는 다르게 조회수 경쟁심리를 부추길 수 있고, 이는 자극적인 미끼글로의 유인 요소로 작용할 확률도 높다는 점. 물론 이것이 미끼글을 유도하는 다양한 유인요소들 가운데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지만요. 즉, '인기글'에 대한 선망 혹은 다른 높은 조회수를 기록한 글에 대한 비교심리 등을 부추길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점.

이런 정도의 이유가 제가 조회수 표시 유무는 최소한 '유저가 선택가능하도록' 해야 하고, 또 그것이 서비스의 메인화면에서도 반영되길 바라는 이유입니다.





스포일러 안내 : 이 글은 스포일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죄다 여자 탓…찌질한 남자 영화
[세상 vs 영화 마주서다] 여자 잘못 만난 남자의 분투, <박쥐> (이안젤라)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3728
위 글은 클릭 절대 비추다.
다만 대상글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제목과 링크를 인용한다.


0. 정말 애정이 있어서 이런 글이라도 쓴다. 관심 없으면 이런 글 안쓴다. 솔직하게, 다만 그 찌질한 영화평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투는 그대로 돌려주는 차원에서(복수는 나의 것!) 그 '수준'에 맞춰 반박해보자. 다만 '의미론적 시퀀스 단위'의 반박은 괜히 독자들의 스포일러에 대한 불쾌를 유발할 것 같아서 피한다. 전체적인 차원에서 인상비평하기로 하자. 정말 궁금한 독자는 이메일을 이용해주시길 바란다. 위 제목 인용한 영화평이 얼마나 후진 영화평인지 나름으로 친절하게 설명해줄 용의 있다.

1. "레디앙 열정과 진보, 그리고 유혹의 미디어"라굽쇼? 놀고 있다. 칼럼니스트 수준 좀 관리하자. 이런 초딩 수준의 극단적인 남성혐오형 페미니즘(그러니 이런 사고방식을 나는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페미니즘은 양성평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남성혐오'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으로 '세상vs영화 마주서다'라는 거창한 타이틀의 칼럼을 기획하다뉘... 좀 민망뻘쭘하다.
이런 식이라면 모기도 박쥐다.

2. 아무리 박쥐가 실패작이더라도, 박찬욱이 과대평가 받았더라도, 이런 식으로, 그러니 비평을 가장한 조롱투의  징징거리기로 공격받는 건 정말 부당하다. 나 역시 [박쥐]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나는 페미니즘적 해석의 관점을 비판하는게 아니다. 나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할 정도니까.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건 그 주장을 위해 동원된 저열한 논리(라고 하기 보다는 감정적 선입견)와 근거의 희박함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평의 최저수준에 미달한다고 판단하는 그 비평의 태도 혹은 방법론이다.

3. 마루타 비평
이 글 읽으니, 기존에 읽었던 이택광의 '박쥐 비평'은 차라리 다이아몬드다(물론 개인적으론 그 글 역시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물론 양자 모두 마루타 비평이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위해 영화를 철저하게 비평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차원에서 그렇다. 비평이라는 행위에 있어 텍스트는 비평가의 자의식과 긴장하며 투쟁하고, 여기에는 또 세계라는 컨텍스트(이자 어떤 의미에서는 근원적 텍스트)가 개입한다.

마루타 비평에는 비평가의 자의식과 결합한 컨텍스트의 과도한 개입만이 있을 뿐, 텍스트와의 긴장이 없다. 그러니 독자들이 그 컨텍스트에 대한 당파적인 선호에 따라 어떤 철학적 긴장도 없이 그저 '유도된 선택'을 하면 쫑이다. 나는 이런 비평의 방법론을 가장 경계한다.

이런 비평은 손쉬운 아군/혹은 적군을 만들어내기는 쉽겠으나, ㄱ. 텍스트를 비평이라는 객관의 이름으로 위장된 감상적 당파에 철저히 종속시키고, ㄴ. 독자로 하여금 비평이라는 메타텍스트를 통해 다시금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철저하게 배제시키며, ㄷ. 비평이 마땅히 수행해야 하는 가치판단의 부분이야 차치하고, 그 비평 대상이 되는 예술이라는 텍스트가 본래적으로 수행하는 목적인 독자와 세계와의 긴장 가능성을 현저하게 무력화시킨다. 그러니 예술 자체의 잠재력을 무력화시키는데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4. 아침부터 정말 눈 버렸다. 이 허접한 영화평은 이야기한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영화는 아주 난삽하다" 나는 여기에 대해 이렇게 답하련다. 이 영화평은 근거도 난삽하고, 주장도 난삽하다.

5. 사족.
레디앙이 노이즈 마케팅을 의도한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특히 제목 설정은 그렇다). 설마 그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짜증은 이렇게 강력한 반작용을 만들어내곤 해서... 앞으론 좋은 글 소개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현명한' 방식을 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요즘 왜 이런지 모르겠다.... 이런 글 신경 쓸 시간에 차라리 잠을 더 자는게 현명하다.


* 관련
박쥐 프리뷰 :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길을 잃다
무비토크 58회 - 박쥐



실타래의 '촛불' 딱지를 뗄까 싶은 생각이 점점 더 든다.

실타래라는 서비스(?)에서는 이런 저런 딱지들을 제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딱지들이 맘에 들고 말고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그 서비스가 상업적인 효용을 갖는 방향으로 발전을 하든지 않든지 아무런 상관없이(물론 상업적으로 발전해도 별 불만 없다능..) 내가 가장 오래 사이드바에 붙여 놓고 있는 이 촛불은 그 효용성 차원에서 아쉬움이 없지 않다. 물론 이 촛불 딱지를 떼지 않고 붙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자체의 상징성은 여전히 발휘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이 딱지에 클릭하면 연결되는 웹사이트는 '촛불'에 관한 고민과 성찰의 기록들이 아니라(하다못해 '촛불'에 관한 위키백과도 아니라), 그저 실타래(sealtale.com)라는 촛불과는 별로 상관없는 사이트일 뿐이다.

내 아쉬움인 즉, 혹시라도 그 촛불을 클릭하는 방문객들에게 그 '촛불'에 관한 좀더 유용한 타켓 페이지들을 링크로 걸수 없다면, 그러니 현재처럼 '촛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보이는' 실타래로만 연결되는 건 좀 과도한 공간의 낭비란 생각이 든다는 거다. 차라리 누에님이나 오르페오님과 같이 이미지 작업을 하시는 동료블로거들께 대체할 수 있는 딱지 이미지 제작을 하나 부탁하고, 거기에 좀더 유용한 '촛불에 관한 고민과 성찰이 담긴 기록'의 웹페이지들을 링크로 블로거 각자가 연결할 수 있도록 하는게 혹시라도 그 촛불 딱지를 클릭하게 될 방문자들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 촛불 일주년 관련 추천글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