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욕망, 권력 : 심리적 노예사회

2009/04/26 10:37

자살의 원인은 개인적(생물학적이든, 심리적인 것이든)이면서 또 불가피하게 사회적(제도적이고, 관습적이며, 문화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쉽게 말해 '복합적'이다. 이건 너무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원인과 행위, 그리고 그 책임을 분리한다고 할 때, 그 원인에 기여한 다양한 인자들의 책임 귀속 문제가 남는다.

자살에 관한 한 책임 귀속(책임 분배)을 무한하게 확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법적인 차원에서는 자살은 대개 자살자 스스로에 대한 책임으로 한정되기 마련이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라는 우리네의 일반적인 연민과 안타까움은 이런 (특히 법)제도의 책임 한정을 인식하는 넋두리라고 할 수 있겠다. 자살을 '사회적인 타살'이라고 해석하는 정치적, 사회적인 상상력은 매우 필요하고, 그 동기 역시 대부분 사회성원들에게는 도덕적으로 고양된 태도에 바탕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타살이 아니고, 타살은 자살이 아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논란이 벌어지는 어떤 자살에 대해서는 그 메시지의 의미를 분석하고, 또 해석하기 위한 다양한 성원들의 개입이 벌어지게 되고, 그 책임 배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다. 그 자살은 '사회적인 메시지' 그 자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난 날 전태일의 자살이 그랬고, 김세진의 자살이 그랬으며, 최진실의 자살과 최근 장자연의 자살이 그렇다. 다만 전태일과 김세진의 자실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위한 저항으로서의 자살이라면, 최진실과 장자연의 자살은 개인적인 메시지가 강조되는 피해자로서의 자살이라는 성격이 부각된다.

그런 사회적인 메시지로서의 자살이 갖는 저마다의 성격('저항'이라는 속성과 '희생자'라는 속성)이 어떻든, 그 자살은 사회적으로 억제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법적인 책임 분배의 논의가 아니라, 이제 사회적이며, 도덕적인 책임 분배에 대한 논의가 되며,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선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점점 더 이 사회는 자살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보다는 그 책임의 분배, 그 자체에 대해서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언술을 증폭시킨다. 그러니 그 '다음 단계'의 논의가 점점 더 증발하고 있다. 있더라도 그건 오히려 '자살'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삼는 '사이버 모욕죄' 따위의 저질스러운 정치적 선동에 머물곤 한다.

그 권력적인 언술은 묻는다. 법적인 책임이 있는가? 권력이 있는가? 돈이 있는가? 나에게 피해가 오는가? 파워엘리트로서의 권력작용이든, 아니면 그저 소시민으로서의 본능적인 권력지향적 작용이든, 아니면 매개로서 작용하는 감시적 권력작용이든 질문은 점점 더 사회적인 해결을 고민하려는 본질과 멀어지고, 권력이 명령하는 그 틀에 따라 자살과 죽음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피상적으로 축소되고, 법적인 의미로 한정되며, 세속적인 가십의 수준으로 제한된다.

궁극적으론 자살을 권하는, 죽음을 부추기는 권력 시스템의 야만에 침묵할 것인가? 항거할 것인가? 이 배타적인 대답만 가능한 질문이 남는다. 법제도로서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권력'(욕망, 가령 그 대표적인 표상으로서의 '섹스'에 대한 배타적 독점력을 확보한 권언 복합체)은 그 법제도의 이면에서 그 권력(공권력)을 장악해버림으로써, 혹은 그 공권력과 담합함으로써 침묵을 적극적으로 퍼뜨린다.

최소한의 사회적인 정의, 객관적인 정의를 위한 공권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소시민들은 더 이상은 자신의 실존적이며 정치적인 근심이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본능적으로 포착해낸다. 그 근심은 '불이익' '손해' '좌절'...'등의 이미지들을 떠올린다. 그래서 점점 더 표피로서의 '쿨한' '항거'만이 살아남게 되고, 본질적인 질문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우리 시대의 성공적이고, 야만적이며, 때론 세련되고, 때론 폭압적이기 이를 때 없는 권력은 심리적인 노예 사회의 골격을 바야흐로 완성시켜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거기에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욕망의 표상들이 기만적 기표로서 넘쳐날 것이다. 그 속에 숨겨진 기의는 욕망의 배타성,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경쟁이다. 물론 권력은 그것을 조절한다. 자신들의 배타성을 침해하지 않는 정도로만 욕망의 기표들을 기의와 일치시킨다. 그렇게 욕망을 모방하려는 대부분의 소시민들과 그 욕망을 장악한 권력들 간의 소꼽장난은 계속될 것이다.


* 발아점
이 글  마지막 문장의 '희망'이라는 단어...





이 사회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도덕적, 정치적, 미학적 범주가 필요하다. 앞으로의 논의 과정에서 이 범주들을 발전시킬 것이다.  

논의에 들어가기 위해 '음란'이라는 범주가 쓸모있다. 질식할 것 같이 많은 양의 물품을 생산하고 과시하면서 외국의 희생자들에게서는 생활필수품조차 박탈하는 이 세계는 참으로 음란하다. [....] 정치꾼과 연예인의 말과 미소에서 그러한 음란성은 나타나며, 기도(prayer, 祈禱)나 무지, 어용 지식인의 지혜 속에서도 음란은 느껴진다.

음란성은 체제측의 언어 용법으로 말하면 도덕적 개념이다. 그들은 음란이라는 용어를 자신들의 도덕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도덕성을 표현하기 위해 남용해왔다.

음모를 드러낸 벌거벗은 여자가 음란한 것이 아니라, 침략전으로 받은 훈장을 드러낸 정장한 장군이 바로 음란하다. 히피들의 의식이 음란한 것이 아니라, 전쟁은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고 선포하는 교회 고위 성직자야 말로 음란하다.  

more..


- H. 마르쿠제, '해방론'(An Essay on Liberation, Boston: Beacon Press,1969.), 청하신서 16, 1991. pp.18~20,

마르쿠제의 전복적인 역설의 연장에서, 장자연 사건 속에 등장했을 그 룸살롱이 음란한 것이 아니라, 경찰의 수줍고 겸손한 수사결과 발표가 음란하고, 우리 언론의 갑자기 드높아진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음란하며, 우리 사회의 침묵과 그 침묵의 나선들을 조종하는 '죄 없는 권력의 경건한 훈계'가 음란하다.




* 기록 보관용.
* 중간수사결과 발표로 이제 이 사건은, 최소한 경찰선에서는, 쫑났다고 봐야 할 듯. 일본에 있는 김대표 소환(기소중지 + 체포영장 상태)이 이뤄져도(이뤄질 것 같지도 않지만) 변죽 앙코르가 될 확률이 높아보임.
* 발표 중 "각종 의혹을 밝히는데 수사력을 집중하였습니다"라는 부분이 나옴.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ㅇㅇㅆㅂㄹㅇ.


오전 10:30 2009-04-24. 경기도 분당경찰서 한풍현 서장 발표.
오늘 수사 중간 조사결과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수사결과를 발표하기 전에 이미 고인이 되신 장자연씨에 대한 명복을 빕니다.

1. 그동안 수사를 종합해보면
고인이 작성한 문건 사본을 토대로 수사를 확대하면서 김대표, 유씨의 집과 사무실 등 27개 소에 대한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컴퓨터, 주소록, 회계장부 등 842점의 자료, 통화내역 14만여건, 계좌 카드 사용내역 955건, 다양한 자료를 확보하여

ㄱ. 수사대상자 20명을 선별하게 되었으며,
-> 수사대상자 20명 : 감독 7명. 금융인 4명. 언론사 임원 3명. 기획사 3명. 기자 2명, 사업가 1명 총 20명
-> 피고소인 7명
  - 연예기획사 대표 유모 (적용법조 :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 입건
  - 언론사 기자 (사자명예훼손) -> 불기소 : KBS 기자
  - 언론사 기자 (사자명예훼손) -> 불기소 : KBS 기자
  - 연예기획사 대표 김모 (강요, 협박, 폭행, 횡령) -> 기소중지(체포영장)
  - 언론인 A씨 (강요죄 공범) -> 불기소 : "해당언론사"
  - 금융인 B씨 (강요죄 공범) -> 입건 후, 참고인 중지
  - 기업인 C씨 (강요죄 공범) -> 입건 후, 참고인 중지
-> 문건상 거명 5명
  - 감독 D씨 (강요죄 공범) -> 내사 중지
  - 언론인 E씨 (강요죄 공범) -> 내사 중지
  - 감독 F씨 (강요죄 공범) -> 내사 중지
  - 감독 G씨 (강요죄 공범) -> 내사 중지
  - 감독 H씨 (강요죄 공범) -> 내사 중지

수사 대상자 이외에 총 118명의 참고인 조사를 통해 각종 의혹을 밝히는데 수사력을 집중하였습니다. 그 결과
불구속 8명 (입건 후 참고인 중지 5명 포함)
기소중지 1명 등 9명을 입건하고 (기획사 3명, 감독 2명, 금융인 3명, 사업가 1명)
내사중지 4명
불기소 4명
내사종결 3명 등 총 20명의 수사대상자에 대한 수사를 완료하였습니다.


2. 두 번째 자살동기에 대한 판단입니다.
전속계약금 300만원에 위약할 경우 1억원이라는 고액의 위약금을 지불해야 하는 일종의 주종관계로 보여질 정도로 전속계약서를 소속사 김대표는 고인을 수십 차례에 걸쳐 술자리에 불러 술접대를 강요하였으며, 특히 금년 2월 초에 태국으로 와서 모감독 골프접대를 하라는 김대표의 강요를 고인이 거부하자 고인이 사용하던 업무용 차량을 빼앗아 매매처분 하는 등 소속사 지원중단으로 갈등이 심화되었고, 유모씨의 권유로 작성낸 문서 내용중 여자연예인으로서 밝히기 어려운 수치스러운 부분이 있어 공개될 경우 연예인 생활을 할 수 없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우려와 문건을 이유로 추후 이어질 고인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김대표의 보복에 대한 심리적인 압박이 심했을 것으로 보이며, 갑작스러운 출연 중단, 개인적인 경제적 어려움, 평소 앓고 있던 우울증 등이 겹쳐 복합적으로 자살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3. OO신문사 A씨에 대한 내용입니다.

문건상에 2008년 9월경 모언론사 사장이라는 사람과 룸살롱 접대에 저를 불러서 모사장님이 잠자리를 요구하게 만듦이라고 되어 있어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김대표 전화 3대 고인이 사용한 전화 3대 일년간 사용한 발신과 역발신 총 5만 1061회 통화와 통화내역을 대조해 보았으나 A씨와 단 한건의 통화도 없었고, 본인도 김대표 또는 고인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만난 사실이 전혀 없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특히 김대표의 스케줄에 "08년 7월 17일 모언론사 사장 오찬"이라고 적혀있는 부분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가지고 수사한 바, 당일 A씨는 모 재단 이사회에 참석하여 이사 10여명과 서울 L호텔 OO식당에서 오찬을 한 것으로 확인되어 알리바이가 입증되었고, 압수된 컴퓨터 복원을 통해 확인된 김대표의 주소록에 "박OO 모언론사 사장님 소개"라고 기록된 부분에 대해서도 확인한 바, 박OO씨는 A씨를 알지 못한다고 하고, 통화내역상 통화사실도 없고, 대신 다른 언론사 전대표와는 침목회원으로 간간히 만나거나 통화하면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잘못 기재된 것으로 추정되며, A씨는 김대표와 고인과는 관련성이 없고, 관련참고인들의 진술을 종합해 보아도 혐의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으므로 불기소처분했습니다.

4. OO금융인 B씨입니다. [여기에서 동영상 짤림... ㅡ.ㅡ;] 

* 출처 및 참조자료
장자연 사건 9명 입건... <조선> 임원은 불기소(오마이뉴스) 기사중  동영상에서 보여지는 문건 및 관련 자막을 종합 

경찰이 발표한 고 장자연 사건 중간 수사결과(아마도 보도자료용...이라기 보다는 변명용 문건인 듯) 
◆ '09.3.7 신인 탤런트 장자연 씨가 자살한 이후 1) 고인의 자살 동기 2) 연예계의 고질적 비리 등에 대한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분당경찰서장을 전담수사본부장으로 하고 지방청 형사인력까지 지원하여 수사본부에 준하는 전담팀(총 41명)을 편성, 40일간 수사에 전념하였음.

▲ 특히 연예계의 술접대, 성상납 등 고질적 비리에 대해 집중적으로 수사했지만, 이번 사건은 피해사실을 입증할 피해자의 사망, 중요 피의자의 해외도피 등 객관적 사실 확인에 제일 중요한 두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수사해야 되는 한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련자들 대부분이 범죄 관련성이 확실하지 않아 통신내역수사 등 강제수사가 곤란해 사실관계 확인이 어려웠고, 사회활동이 활발한 수사대상자들의 경우 조사일정을 정하기에도 애로사항이 있는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 수사를 진행해왔음.

[위 발표와 중복되는 내용 중략]

입건 후 참고인 중지는 사실관계 확인을 통해 강요죄의 공범 혐의가 높다고 판단하여 피의자로 조사태에서 김 대표 체포 시까지 수사를 일시 중지하는 것이고 내사 중지는 사실관계가 정하여 입건한 상확치 않고, 혐의의 정도가 낮다고 판단되어 별도로 피의자로 입건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지하는 것임.

출처 : 장자연 사건 9명 입건... <조선> 임원은 불기소 - 오마이뉴스

* 관련
음란한 것들




음.. 맥루헌의 미디어의 이해를 제대로 안읽으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롭고 오래되었고의 구분을 떠나, “메체 자체가 곧 메세지” 가 맞습니다.

좀더 설명을 덧붙이자면, 단지 오래된 기술을 기반으로 한 세력이,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한 집단과 충돌한다는건, 정말 초보적인 이해에 불과 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시다시피 맥루헌은 미디어의 “내용”이 아닌 속성을 기반으로 그 많은 이야기들을 진행했습니다.
그 속성이 인간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그 누구도 정의 내릴순 없구요.
즉, 올드미디어의 세력이, 뉴미디어의 세력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는것이죠.
예를 든다면, 위에서 말한 예의 바로 아래에 나와있는, IBM이 되겠죠.
비록 타인의 주장을 인용하신 글이긴 하나, 책을 직접 읽으면 너무나도 뻔한것 인데도 불구하고, 비판적인 내용 하나 없는걸 보니 우려를 금할 수 밖에 없습니다.

- '매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에 남긴 리카르도님의 댓글

위 리카르도님의 논평을 '매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이하 '대상글')라는 글과 관계 속에서 해석해보죠.
물론 저는 이 직전 글에서 이 논평은 무슨 해석이 불가능한 수준의 추상적 언급이라고 말했습니다만, 굳이 해석해보자면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고 생각(추론)합니다.

1.
음.. 맥루헌의 미디어의 이해를 제대로 안읽으신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롭고 오래되었고의 구분을 떠나, “메체 자체가 곧 메세지” 가 맞습니다. (리카르도)

"미디어는 메시지다."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의 제1부 첫째장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유명한 문장을 그 장의 제목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문장은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를 직접 읽어보지 않은 분들도 익히 들어보고, 또 종종 사용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리카르도님께서 강조하시는 관점은 이 문구의 해석, 특히 맥루한이 강조했던 관점에 관한 것입니다. 맥루한을 읽어봤든, 읽어보지 않았든, 그 책에 관한 이차 평론, 논문(에세이)를 읽어본 분들, 하다못해 맥루한의 위 명제에 대한 저널리즘 비평을 접한 분들 조차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단순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의미가 다소 맥루한의 취지와는 달리 오용되고 있다고 리카르도님은 불만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가령 제 글인 '조선일보 기고자들'에서는 위 맥루한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저는 이렇게 쓰고 있죠.

미디어는 메시지다. (마샬 맥루한)
미디어는, 그 자체로 메시지입니다.
당신이 어디에 기고하는지가 당신이 향하는 지향을 말해줍니다.
(물론 맥루한의 취지가 이런 것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겠지만요.)

그리고 이런 일반적으로 정치적인 당파를 강조하기 위해, 위 예에서처럼 조선일보를 비판하기 위해 쓰이는 용례의 폐해가 없지 않다고 여겨, 참고글로 '대상글'을 덧.으로 본문에 보충했습니다. (그 오래된 조선일보 관련글에 리카르도님의 댓글이 있었고, 그래서 첫 댓글에 대해선 인지하고 있었습니다만, 그 후에 다시 댓글이 있었는 줄은 '독자'라는 임시필명께서 이 글 직전에 쓴 글에 남겨주신 댓글을 보고야 알았습니다.)

덧. 위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에 대한 좀더 심도있는 해석에 대해선 다음 글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다’(the medium is the message)라고 했을 때, 그 메시지라는 것은 새로운 매체가 열어놓은 사회적 환경의 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토록 자주 인용되는 맥루한의 그 유명한 선언은 정확히는 “미디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the medium is socially the message)”라는 것이 ‘미디어 이해하기’의 비평판을 편집한 테렌스 고든의 해석이다. ('매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

아마도 리카르도님께서 이해하시는 바, 맥루한의 관점은 '미디어 그 자체의 속성', 즉 인간이라는 감각기관의 총체적인 확장으로서의 미디어가 갖는 속성에 주목했는데, 왜 정치적인 메시지의 당파적인 차원에서 맥루한을 인용하는가? 나는 그것이 불만이다. 이 부분에 대해 주목한 것 같습니다. 이것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에 대한 일반적인 오용이라고 인정한다고 칩시다(이하 '오용'). (물론 여기에 대해서 달리 판단할 여지는 매우 크지만요)

그렇다면 리카르도님께서 강조한 미디어의 속성이란 무엇인지 추론해보죠.
[미디어의 이해]의 부제는 주지하다시피 '인간의 확장'입니다. 리카르도님께서 강조하는 관점은 이런 비유를 통해서 쉽게 설명될 수 있겠죠. 자동차는 발의 확장이고, 전화기는 입과 귀의 확장입니다. 망원경은 눈의 확장이고, 마이크는 입의 확장이라고요. 이렇게 인간의 신체기관은 새로운 도구들의 발명으로 인해 끊임없이 확장합니다. 인간의 감각을 확장시켜주는 그 모든 것들은 바로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리카르도님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인식의 깊이를 필요로 하지 않는, 널리 알려진 '상식'에 가까운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제가 리카르도님의 논평에 대한 재해석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힌 이유는 리카르도님이 논평 대상으로 삼고 있는 글인 '대상글'은 이런 인식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즉, 대상글은 리카르도님께서 염두에 두고 있다고 저는 추론하고 있는 그런 '단편적인 문제'가 아닌, 혹은  맥루한이 비판받는 '쿨미디어/핫미디어'에 대한 아리까리한 구별 표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감각'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이것을 매개하는 수단이자, 그 자체로 인간의 확장으로서의 미디어가 어떻게 '사회적인 의미'를 획득하는지를 , 그리고 맥루한(혹은 맥루한 연구자인 어떤 학자)은 이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글입니다.

즉, 리카르도님의  거시적 의도를 추정해보면, 일반적인 '오용'에 대해 불만을 갖고 계셨다면, 그 의미를 포괄해서 좀더 포괄적인 의미의 지평을 마련하고 있는 대상글을 옹호해야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미디어의 속성'이라는 단편적이며, 교조적인 언어에 집착해서 대상글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거나, 혹은 오독하고 있다고 저는 판단했던 것입니다.

'대상글'는 두 가지를 주로 이야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오용'(혹은 과도하게 확장적으로, 수단으로 비유)되는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해석 용례에 대해 좀더 맥루한의 취지에 가깝게 그 의미를 한정하면서, 동시에 '고든의 해석을 토대로' 확대하고 있습니다. 즉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명제가 갖는 의미가 어떤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지를, 왜 "미디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라고 해석될 수 있는지를 다루고 있는 글입니다.

이에 대해 리카르도님의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ㄱ. ㄴ. ㄷ. 의 구별은 제가 임의로 붙인 것입니다)

ㄱ. 아시다시피 맥루헌은 미디어의 “내용”이 아닌 속성을 기반으로 그 많은 이야기들을 진행했습니다.
ㄴ. 그 속성이 인간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그 누구도 정의 내릴순 없구요.
ㄷ. 즉, 올드미디어의 세력이, 뉴미디어의 세력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는것이죠. 예를 든다면, 위에서 말한 예의 바로 아래에 나와있는, IBM이 되겠죠.
ㄱ. 에 대해선 앞서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ㄴ. 이 부분은 왜 뜬금없이 나왔는지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부분인데, 아마도 '대상글'에서 "새로운 매체가 등장할 때, 기존 매체는 늘 새로운 매체에 대해 불평하고 견제하고 심지어 폄하했다."라는 문장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미디어의 속성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를 '단정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러한 정의에 가까운 '해석'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미디어 연구자들, 미디어 학자들이겠죠. 리카르도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정의"가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1) 그저 '단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라면 대단히 무의미한 언어이고(따라서 비평언어로는 가치가 없고), (2) 이 '정의'를 '해석'으로 확장할 수 있다면, 미디어의 "속성이 인간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리카르도) 해석하는 것이 존재이유인 '미디어 학자'들의 존재가치를 아예 폐기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 반응은 ㄷ.과 이어지는데요.
ㄷ. "올드미디어의 세력이 뉴미디어의 세력과 일치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라고 리카르도님께선 말씀하시는데, 제가 거듭해서 '대상글'을 꼼꼼히 읽어주십사 부탁드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지적은 대상글을 최소한으로 정독했다면 있을 수 없는 '반론'이기 때문입니다. 때론에 이것은 반론이 아닙니다. 대상글 초반부는 이 기존 세력이 새로운 세력과 일치하는 경우를 매우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미국 3대 공중파 네트워크 방송(NBC, CBS, ABC) 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발명인 전기와 전신을 이뤄낸 세 개 회사의 이름이 나온다. 토마스 에디슨의 GE, 웨스팅하우스 전기, 그리고 AT & T 이다. GE는 현재도 NBC를 소유하고 있고, 웨스팅하우스 전기는 CBS로 이름을 바꿨다. NBC에서 분리되어 나온 ABC는 월트 디즈니사에 의해 인수되었지만, 최근에는 애플 컴퓨터의 스티브 잡스가 최대 주주로 등극하게 된다. 전기와 전등, 통신, 그리고 개인용 컴퓨터라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발명했던 회사들이 텔레비전 방송 네트워크라는 가장 진화된 올드 미디어 매체를 소유하고 있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매체는 사회적으로 메시지다')

리카르도님의 대상글에 대한 논평(이라고 굳이 쥐어 짜낼 수 있는 부분)은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리고 다시 훈계에 돌입합니다.
"비록 타인의 주장을 인용하신 글이긴 하나, 책을 직접 읽으면 너무나도 뻔한것 인데도 불구하고, 비판적인 내용 하나 없는걸 보니 우려를 금할 수 밖에 없습니다."(리카르도)

이런 댓글을 어떻게 해석해야하는지 저로선 오히려 독자와 동료블로거들께 여쭙고 싶습니다. 제가 감정적으로 리카르도님을 일방적으로 비난하고 있다고 판단하신다면 그 판단을 존중합니다. 다만, 리카르도님은 정말 맥루한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상적인 수준으로 알고 있' 한 줌의 지식을 근거로, 즉 자신이 이해한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해석를 근거로 좀더 깊이있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글을 일방적으로 훈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글 제목으로 표현했듯이 '오만방자'라고 밖에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서울비님께서는 저에게 침착을 당부합니다만(물론 그 마음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합니다), 저는 그저 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상글을 쓴 분을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존경한다고 밝힌 부분에 대해서 불만이 계신 것 같은데요(특히 김기자님). 제가 (어떤 의미에서든) 매우 좋아하는 어떤 블로거 A가 있다고 치죠. 그리고 그가 쓴 글 a가 있다고 칩시다. 그 a를 B라는 블로거가 매우 설득력있게 비판한다면, 저는 그 B가 a라는 글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B를 비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B의 비판행위의 가치와 의미를 매우 높게 평가했을 겁니다. 적어도 제가 그동안 해왔던 블로깅을 최소한으로 지켜봐주신 분이라면, 이러한 제 블로깅의 원칙과 방법론을 최소한으로 인정하시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B라는 블로거가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로 a라는 글에 대해 훈계를 늘어놓는다면, 당연히 짜증나고, 불쾌하며, 어처구니가 없어질 겁니다. 더욱이 그 B가 그래도 저에게 대단히 호의적이었던 블로거라면 더더욱 B를 위해서라도 B의 '태도'를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서울비님께서는 댓글을 통해 "논쟁에서 글쓴이의 '태도'를 공격하는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고 언급하셨던 기억"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논쟁의 본령에서 벗어나 반론의 근거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태도를 물고 늘어지는 행태에 대해선 물론 그 방법은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그와 유사한 언급을 했을 수는 있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까지 줄곧 그 비판의 '태도' 역시도 비판행위의 '일부'라고 이야기해왔습니다. 저는 그 태도야말로 비판행위의 매우 중요한 방법론이라고 강조해왔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진중권의 방식에 대해 때때로 매우 비판적인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비평의 몸, 비평의 마음)

즉, 제가 진중권의 진영에 속하면 진중권이 '우리의 적을 씹는' 그 공격적인 언어들은 저에게 큰 카타르시스를 줄겁니다. 하지만 어떤 이슈에 대해 진중권과 반대 진영에 선다고 치죠, 그럼 그 진중권의 조롱과 경멸의 외투를 입은 언어들은 저에게 큰 모멸감과 모욕감을 줄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비판행위는 좀더 커다란 조화의 이상 아래서, 서로의 '우열'이 아닌, '다름'을 보여주기 위한 것, 그래서 좀더 큰 조화의 방법론을 마련할 수 있도록 '이해 지평'을 넓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비판행위 그 자체에 내재된 '내용으로서의 방법론(논리, 근거, 철학, 지식의 양)'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것만을 '쿨'하게 이야기하는 것도 좋겠죠. 다만 일상적인 토론과 대화의 방식으로 실천을 얻는데 매우 중요한 그 '비판의 태도' 역시 저는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즉, 비판과 태도는 서로 따로따로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만 비판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어떤 무례한 행위에 대해선 그저 그 무례한 행위를 비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 관련
비판과 신경질 1.



어제 '걔/게네 : 블로그와 구어체 그리고 오타'라는 글을 썼는데요. 여기에는 잘못된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이 글에서 저는 "걔네" 혹은 "걔네들"은 잘못된 표기라고 했는데요. 서울비님께서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알려주셨네요. 린스님께 오해를 드려 죄송하고요, 린스님처럼 댓글로 말씀하신 분들 외에도 RSS를 통해 읽으셨던 분들, 눈팅하셨던 독자들께도 민망뻘쭘하네요.

이하 내용은 위 해당글에도 보충한 내용입니다만, 이전에 읽었던 독자들께 적어도 비슷한 부피의 노출도를 갖는 방식으로 '부정확한 정보'를 다시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리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부랴부랴 글을 씁니다. 다시 간략히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1. 표기법(맞춤법)상 "[][]"도 맞고, "게네[]"도 맞다.
2. 양자는 '문맥으로' 어떤 것을 쓰느냐가 결정된다.
3. "걔[][]"는 평칭으로 사용하면 되고, "게네[]"은 비하 혹은 비판(비난)의 문맥에서 사용하면 된다.

서울비 2009/04/23 08:35
걔네가 반드시 틀린 것인지. 찾아보니 다시 의아해집니다.

걔네 - 그 아이의 / 그 아이쪽 사람..
게네 - 거기, 상대방 쪽의 (특히 낮춰서 부르는 태도로)사람..

예문 몇 개 첨부 -
걔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나 우리가 새로 찾아낸 하느님이나 결국은 어슷비슷한 분일 것이라고….≪이동하, 장난감 도시≫ >>> 그 아이의 아버지
"걔네 누나 싸이 좀 가르쳐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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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kbs 사이트에서 퍼 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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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게네들’과 ‘걔네들’ 중 어느 표현이 표준어 인지 여부와 그 이유
답변1. “걔네들”과 ‘게네들’의 사전적인 의미와 관련된 어휘들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의 뜻풀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걔 ‘그 아이’가 줄어든 말 예)걔도 너처럼 이 꽃을 좋아하니?
   -네08 [접사] 1.(몇몇 명사 뒤에 붙어) 같은 처지의 사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동갑네/아낙네/여인네
         2. (사람을 지칭하는 대다수 명사 뒤에 붙어)
         그 사람이 속한 무리라는 뜻을 더하는 접미사
         예)철수네/김 서방네/아저씨네

   게-네 [대]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아닌 사람의 무리를 조금
         낮잡아 이르는 삼인칭 대명사
         예)게네가 나쁘지, 너희는 아무 잘못이 없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걔네(들)”과 ‘게네(들)’은 모두 삼인칭 표현이고 서로 의미가 다른 표준어입니다. 다만 후자는 점점 사용빈도가 떨어져가는 표준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2. ‘게네’라는 표현은 많이 쓰지 않는다는 질의가 많은데,
    이런 면에서 어느 범위까지 ‘표준어’라고 볼 수 있는지 여부
    문장이나 문맥에서 사용될 경우 어느 표현을 권장할 만한 표현으로 추천 가능한지
답변2. ‘게네’라는 표현이 많은 국어사전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낮잡아 이르는 의미가 있기도하고 현실적으로도 빈도도 낮으므로 그리 권장할 만하지는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3. ‘게’라는 말 자체에는 위의 뜻이 없고‘게네’로 독립된 뜻으로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전문적인 의견
답변3. ‘게네’에서 ‘게’의 의미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다만 ‘거기’의 용법중 이인칭 대명사적인 것이 있는데 이것이 번진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으나 근거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질문4. ‘걔들’ 또는 ‘걔네들’중 어느 표현이 보다 바른 표현인지 여부
답변4. "걔들“과 ”걔네들“은 동등한 것으로서 어느 하나가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복수를 나타내는 접사 ‘네’와 ‘들’이 같이 쓰이는 예가 많고 따라서 어법에 어긋난 것으로 보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단순 맞춤법의 범위에서 보면 ‘게네들’과 '걔네들‘이 모두 맞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위의 1번에도 언급했듯이 ‘게네들’ ‘걔네들’이 서로 다른 의미라고 언급되었던 바, 국립국어원에 재차 문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이 성립됩니다.

- 방송에서 신정환씨가 만약 낮잡는 의미의 무리를 뜻하는 말로 썼다면 맞는 표기는 ‘게네들’입니다

- 방송에서 신정환씨가 낮잡는 의미가 아닌 평칭으로 사용했다면 ‘걔네들’이 맞는 맞춤법입니다

- 그러나 방송에서는 신정환씨가 어떤 의미로 사용했는지 설명이 없기 때문에 정확한 맞춤법이 무엇인지는 문맥상 파악하기가 힘듭니다. 즉, 문맥으로 맞춤법이 결정되는 상황입니다. 이런 점에서 시청자들에게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해 혼란을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 그리고 ‘걔네들’이 ‘잘못된 국어’라고 언급된 일부 인터넷 소식지의 내용은 오보입니다. 위 상황에 따라 둘 다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 다만, 국립국어원과 상상플러스에서는 ‘게네’가 사용빈도가 많이 떨어지고 낮잡는 의미가 있으므로 방송이나 일상에서의 사용을 권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 서울비
님께 특별한 고마움을 전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