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욕망, 권력 : 심리적 노예사회

2009/04/26 10:37

자살의 원인은 개인적(생물학적이든, 심리적인 것이든)이면서 또 불가피하게 사회적(제도적이고, 관습적이며, 문화적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쉽게 말해 '복합적'이다. 이건 너무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원인과 행위, 그리고 그 책임을 분리한다고 할 때, 그 원인에 기여한 다양한 인자들의 책임 귀속 문제가 남는다.

자살에 관한 한 책임 귀속(책임 분배)을 무한하게 확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법적인 차원에서는 자살은 대개 자살자 스스로에 대한 책임으로 한정되기 마련이다. "죽은 사람만 억울하지..." 라는 우리네의 일반적인 연민과 안타까움은 이런 (특히 법)제도의 책임 한정을 인식하는 넋두리라고 할 수 있겠다. 자살을 '사회적인 타살'이라고 해석하는 정치적, 사회적인 상상력은 매우 필요하고, 그 동기 역시 대부분 사회성원들에게는 도덕적으로 고양된 태도에 바탕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타살이 아니고, 타살은 자살이 아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논란이 벌어지는 어떤 자살에 대해서는 그 메시지의 의미를 분석하고, 또 해석하기 위한 다양한 성원들의 개입이 벌어지게 되고, 그 책임 배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다. 그 자살은 '사회적인 메시지' 그 자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난 날 전태일의 자살이 그랬고, 김세진의 자살이 그랬으며, 최진실의 자살과 최근 장자연의 자살이 그렇다. 다만 전태일과 김세진의 자실이 정치적인 메시지를 위한 저항으로서의 자살이라면, 최진실과 장자연의 자살은 개인적인 메시지가 강조되는 피해자로서의 자살이라는 성격이 부각된다.

그런 사회적인 메시지로서의 자살이 갖는 저마다의 성격('저항'이라는 속성과 '희생자'라는 속성)이 어떻든, 그 자살은 사회적으로 억제되어야 마땅하다. 그것은 법적인 책임 분배의 논의가 아니라, 이제 사회적이며, 도덕적인 책임 분배에 대한 논의가 되며,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선택을 피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점점 더 이 사회는 자살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기 보다는 그 책임의 분배, 그 자체에 대해서 정치적이고, 권력적인 언술을 증폭시킨다. 그러니 그 '다음 단계'의 논의가 점점 더 증발하고 있다. 있더라도 그건 오히려 '자살'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삼는 '사이버 모욕죄' 따위의 저질스러운 정치적 선동에 머물곤 한다.

그 권력적인 언술은 묻는다. 법적인 책임이 있는가? 권력이 있는가? 돈이 있는가? 나에게 피해가 오는가? 파워엘리트로서의 권력작용이든, 아니면 그저 소시민으로서의 본능적인 권력지향적 작용이든, 아니면 매개로서 작용하는 감시적 권력작용이든 질문은 점점 더 사회적인 해결을 고민하려는 본질과 멀어지고, 권력이 명령하는 그 틀에 따라 자살과 죽음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피상적으로 축소되고, 법적인 의미로 한정되며, 세속적인 가십의 수준으로 제한된다.

궁극적으론 자살을 권하는, 죽음을 부추기는 권력 시스템의 야만에 침묵할 것인가? 항거할 것인가? 이 배타적인 대답만 가능한 질문이 남는다. 법제도로서의 합리성을 강조하는 '권력'(욕망, 가령 그 대표적인 표상으로서의 '섹스'에 대한 배타적 독점력을 확보한 권언 복합체)은 그 법제도의 이면에서 그 권력(공권력)을 장악해버림으로써, 혹은 그 공권력과 담합함으로써 침묵을 적극적으로 퍼뜨린다.

최소한의 사회적인 정의, 객관적인 정의를 위한 공권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소시민들은 더 이상은 자신의 실존적이며 정치적인 근심이 스스로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절망감을 본능적으로 포착해낸다. 그 근심은 '불이익' '손해' '좌절'...'등의 이미지들을 떠올린다. 그래서 점점 더 표피로서의 '쿨한' '항거'만이 살아남게 되고, 본질적인 질문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우리 시대의 성공적이고, 야만적이며, 때론 세련되고, 때론 폭압적이기 이를 때 없는 권력은 심리적인 노예 사회의 골격을 바야흐로 완성시켜가고 있다고 보여진다. 거기에 다시 젖과 꿀이 흐르는 욕망의 표상들이 기만적 기표로서 넘쳐날 것이다. 그 속에 숨겨진 기의는 욕망의 배타성,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경쟁이다. 물론 권력은 그것을 조절한다. 자신들의 배타성을 침해하지 않는 정도로만 욕망의 기표들을 기의와 일치시킨다. 그렇게 욕망을 모방하려는 대부분의 소시민들과 그 욕망을 장악한 권력들 간의 소꼽장난은 계속될 것이다.


* 발아점
이 글  마지막 문장의 '희망'이라는 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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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우리 살아갑시다 -블로그캠페인

    Tracked from Visual Poem 2009/04/29 14:42 del.

    어려운 시기입니다. 당신이 죽을만큼 힘든 이유를 세상이 몰라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살아갑시다. 다시 한 번 힘을내서 살아봅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다만 살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부디, 살아주세요. *여러 블로거 분들이 글로, 그림으로, 카툰으로 이 캠페인에 함께 해주시길 간곡히 바랍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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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퍼렁어 2009/04/26 13:56

    제글에 오타가 잔뜩 보이는군요 창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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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28 00:38

      저도 한오타 합니다. : )

  2. silent man 2009/04/26 14:52

    어디선가 커트 코베인 서거(무려!) 15주년 기념이란 말을 듣고 자살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게 됐는데, 마침 민노씨도 자살에 대해 말하셨군요.

    뭐, 그래도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여기는 편이긴 하지만, 누군가의 자살에 대해 너무도 쉽게 '지가 못 난거지', '왜 그 힘으로 못 사냐'고 말하는 걸 보면 참 슬프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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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28 00:45

      좀 딴 이야기인데, 문득 세속적인 호기심으로 롤링스톤지가 2003년에 뽑은 'The 100 Greatest Guitarists of All Time' ( http://www.rollingstone.com/news/story/5937559/the_100_greatest_guitarists_of_all_time/ )을 누가누가 있나 '구경'하다가, 커트 코베인은 12위 먹었더만요.

      아무튼 짱먹은 지미 헨드릭스의 1969년 우드스탁 공연실황을 한동안 넋놓고 봤더랬습니다. 지미 헨드릭스의 공연(집시밴드)를 바라보는 청중들의 모습들도 열광적인 환호라기 보다는 "쟤 뭐니?" 이런 표정들이 더 많이 포착되더만요. 아무튼 참 대단하긴 하군, 뭐 이런 감상이 들기는 하더만요. ( http://video.google.com/videoplay?docid=-3981364972665945187 )

    • silent man 2009/04/28 21:00

      문득 고딩 시절 기타 좀 친다고 깝치던 녀석이 지미 핸드릭스를 들으며 '넌 이런 건 죽어도 제 맛을 못 느낄 거다'고 하던 놈이 떠오르네요. 그 놈 지금은 뭐하고 살려나 궁금해진다능. ㅋㅋㅋ

  3. bayles 2009/04/27 01:48

    하이데거가 말했던 사유다운 사유로는 가지 못하고 표상작용에만 그칠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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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09/04/28 00:55

      하이데거에 대해선 '존재와 시간'의 간이 해설서 같은 책을 읽다가 관뒀던 기억이 어렴풋 있고, 또 니체와 관련한 하이데거의 책을 역시나 읽다가 관뒀던 기억이 있어서... 말씀하신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궁금해서 구글링했더니만, 이기상씨께서 쓰신 간략한 하이데거에 관한 꽤 좋은 글(이라고 생각되는 글)이 있고만요.
      http://www.freeview.org/bbs/board.php?bo_table=e001&wr_id=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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