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아래 조선일보 사설에 대한 패러디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길 바란다. 
[사설] '미네르바에 휘둘린 우리 사회의 수준이 더 문제다' (클릭 비추)

역사는 '조폭신문'이라는 별칭으로 통하는 대한민국 일등 신문 조선일보에게 여전히 무죄를 선고하고 있다. 저널리즘과 역사의식을  전문으로 공부한 적 없었던 조선일보는 대한민국에 돌아다니는 온갖 정보들을 짜맞춰 지난 1세기에 가까운 세월(1920년 창간) 대한민국 언론권력의 정점에서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유지, 확장해왔다.

조선일보식 틀짓기의 심리적 기저는 독자들의 욕망을 읽어내고, 경쟁적 속물근성을 무한 증식하는 것인데, 궁극적으로 그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한 대중적인 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지난 황우석 파동에서 보여준 조선일보의 저열한 둔갑술은 언론으로서 그 최소한 자격을 근본에서 묻지 않을 수 없는 황당한 사태였다. 이 뿐만이 아니다. 네티즌들의 '판사 비판'에 대해선 무지한 여론에 의한 사법부 흔들기라고 비난했던 조선일보는 스스로 마음에 안드는 법원 판결이 있으면 "구체적인 심문의 내용까지 거론"하며 판사를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조선일보에게 인터넷과 표현의 자유, 비판의식의 확장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짜증나는 시츄에이숑이다. 조선일보는 인터넷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인터넷 = 헛소문' '오프라인(신문) = 책임있는 고급정보'이라는 틀짓기에 오늘도 매진하고 있다. 그런 글 하나하나가 거짓인지, 나쁜 의도가 없는지를 비판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다만 조선일보는 특수한 사례다. 대한민국 언론사 대부분을 "홍길동"으로 만들어버리는 부소불위의 권력을 갖는 "해당언론사"로서, 그만한 영향력을 갖게 됐다면 자기 기사가 사회에 혼란과 피해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인터넷처럼 조선일보는 진실이든 헛소문이든 순식간 퍼뜨리는 힘이 있다. 조선일보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풍문은 알권리로 보도하며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풍문은 철처하게 외면하고, 물타기한다. 그런 조선일보 틀짓기를 걸러내지 못하면, 우리 사회엔 언제 또 제2의 황우석, 제2의 미네르바 구속 수사 같은 수준 이하 일들이 다시 벌어지게 될지 모른다.



* 참조
조선일보 친일부역 기사들 (한겨레. 2001년 8월)
한국어 위키백과 '조선일보'
한국어 위키백과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 강추

역사
1920년 3월 5일에 창간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의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에 의해 폐간(민노씨 주 : 이 기간 역시나 방응모가 사장으로 재임하던 기간이다. 이 폐간에 대해선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의 관련항목을 참조) 되었으나, 방응모가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친일 신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민노씨 주 : 이 서술은 앞의 서술 부분과의 논리적 인과 차원에서는 좀더 보완되어야 하는 서술 같다). 1945년 11월 23일, 미군정의 지원을 받아 속간되었다. 1968년에 《주간조선》을, 1980년에 《월간조선》을 각각 발간하였다. 1999년 3월 2일에는 전면 가로쓰기 체제를 도입했다.

방응모의 친일 행적

방응모는 일제 강점기 말기 조선일보 사장으로서 친일 행위를 한 기록이 있다. 그는 1935년 친일 잡지 《조광(朝光)》을 창간하였고, 1940년대부터 조광에 집중적으로 친일 논설을 기고하고 시국 강연에 참여하여 전쟁 지원을 독려했다. 애국금차회(1937),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1938), 임전대책협외희(1941), 조선임전보국단(1941) 등 대표적인 친일 단체에 가담하기도 했다.

재판 개입
2008년 8월 법원은 도주나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며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안진걸 조직팀장의 보석을 허가했고, 그는 11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판사 한 명을 집중적으로 비난했다.
이 판사는 일반인도 아는 법의 상식도 모르고 모든 판사가 지켜야 할 법관윤리강령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이런 판사가 아직껏 판사 노릇을 하고 있는 사법부의 현실이 놀랍기만 하다… 이 판사는 자신이 그 동안 촛불시위에 나가지 못하게 했던 거추장스러운 법복을 벗고 이제라도 시위대에 합류하는 게 나을 것이다.
— 2008년 8월 13일 조선일보 사설[31]

판사가 법정의 존엄을 지킬 각오가 없다면 아무도 법정의 존엄을 지켜주지 않는다. 법정의 존엄이 짓밟히면 판사도 법의 권위도 함께 사라지는 법이다. 그러나 요즘 사법부엔 이런 인과의 고리조차 모르는 판사가 너무 흔한 듯하다.
— 2008년 8월 14일 조선일보 사설[32]
이런 방식의 비난은 판사들의 독립적인 판단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있다. 임지봉 서강대 법대 교수는, 재판이 진행 중인 상태에서 언론에서 구체적인 심문의 내용까지 거론하면서 비판을 하는 것이 판사에게 어떤 심리적 압박으로 작용해서 재판에 영향을 끼칠 수가 있는데, 이는 사법권의 독립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고 했다, [33]

기타
* 2000년 5월 30일 소설가 황석영은 공개강좌에서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한겨레신문 7월 20일자 특별기고문에서 자신의 작품이 동인문학상의 심사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고 밝히며 조선일보를 비판하였다.[77]

군사 파시즘과의 결탁으로 성장한 조선일보는 침묵과 수혜의 원죄의식으로 동참하게 된 기득권층의 이데올로기로서 막강한 언론권력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난 시대에 사회의 기초 공리는 억압에 의하여 말살되거나 부인되었으며, 그 반대의 가설이 산더미처럼 재생산되었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수구 언론이 우리의 역사발전을 위해서도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시대적 당위일 것이다. …… 이와 함께 이른바 `안티 조선' 측이 소극적 진영주의로 `충실한 반대당' 식의 내부적 권력이 되어 버릴 위험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론 개혁을 위한 구체적이고 대중적인 운동의 대안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요즈음 조선일보는 정치·경제·사회면에서는 종전보다 더욱 반개혁적이면서도, 문화면에서는 '다양성'을 보여 주려고 하는 교묘함을 보이고 있으며, 좀 이질적인 문인들에게는 단 몇 매짜리의 칼럼 한 편에 다른 신문의 무려 다섯 배 가까운 원고료를 지급하고 있다. 어려운 시기에는 냉전적 공격과 터무니없는 폭로로써 '권력'을 누리고, 이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를 유지해보려 하는 것인가?
황석영, 동인문학상 심사대상을 거부한다(한겨레 2000년 7월 20일 특별기고문)
*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민간법정
2004년 10월 15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열린 ‘조선일보 친일반민족행위에 대한 민간법정(재판장 이덕우 변호사)은 피고인 조선일보(명예회장 방우영, 사장 방상훈)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다.[78]

- 한국어 위키백과 '조선일보' 중에서
- 한국어 위키백과 '조선일보에 대한 비판' 중에서 : 강추

* 관련
민노씨.네 미네르바 관련글 

* 관련 기사
미네르바 무죄 석방 여야 희비쌍곡선 (프레시안) : 각 정당의 반응. 한나라당 반응이 역시나 골 때린다.



익명성은 원칙이 아니라 오히려 예외 (모노마스크)
http://monomask.info/27
모노마스크님께서 엮어 주신 글은 잘 읽었습니다. : ) 매우 정성들여 쓰신 글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이견이 있습니다. 댓글로 남기려다 길어져서 블로그에 적어봅니다. 그저 떠오르는대로 쓴 글이라서 의견이 거칩니다. 이 점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1.
ㄱ. 인터넷에서 익명성은 기본적이며, 추구해야할 가치이다.
ㄴ.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익명성은 보호되어야 할 가치이다.
ㄷ. 나아가 인간의 본성은 익명성을 추구한다.
ㄱ.ㄴ.은 해석상의 한계에 포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만, ㄷ.은 다소 과한 확대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해석가능한 수준을 벗어났다고 보여집니다. 이것은 제도의 문제이고, 문화의 문제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규제하려는 경향을 갖는 국가공권력의 확장과 그것을 견제하려는 시민사회의 자율성이라는 양자가 갈등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후술하신 행정적인 관점에서 실명제를 옹호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다만 현대 민주주의가 국가의 과도한 간섭으로부터 시민사회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는 점을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2. "인터넷의 관점에서 본 익명성"이라는 문단에서는 정보 접근성의 편의를 확보하기 위한 '도구적인 관점'(팀 버너스-리가 스스로 강조하고 있는 웹을 고안한 취지기도 하지요)을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로 대체하는 듯한 뉘앙스는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정보 접근성의 편의, 그 보편성을 위한 것이지 '익명/실명'의 논의와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3. "익명성이 아닌 가명성"이라는 지적은 꽤 설득력 있게 들립니다. 다만 현재 인터넷실명제를 반대하는 입장에 선 분들은 그 '가명성'을 '익명성'에 포함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4. 행정적인 편의의 관점은 당연히 익명성이 불편합니다. 이건 당연한 지적이신데요. 다만 왜 서구 선진국에서는 '주민증 제도'를 굳이 채택하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왜 유독 주민증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지, 그리고 더불어 현재 있는 주민증제도를 '행정부'에서조차 개선하려는 노력이 시도되고 있는지(물론 그다지 실효는 없었지만요) 생각해보시길 권해봅니다.

그리고 예시하신 '금융실명제'는 인터넷실명제와 같은 논의의 평면에서 이야기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금융실명제가 도입된 취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앞서 금융실명제는 앞서 이야기했던 시민사회의 자율성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 선 문제입니다. 이것은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근간을 침해할 수 있는 공적이며, 구조적인 문제를 제도를 통해, 정책을 통해 풀어보고자하는 매우 공익적인 성격을 갖는 제도였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5. "익명성이 정체성을 망가뜨린다"는 주장, 더불어 "(원치 않는) 익명성이 정체성을 잠식하는 경우 인간은 자유를 누리기보다 오히려 각종 정신증/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는 주장은 주장의 최소한 근거, 그것이 실증적인 것이든, 체험적인 것이든, 논리적인 것이든, 그 최소한의 설득력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원치 않는 익명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밝히든 밝히지 않든 '그 선택가능성'을 익명성은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익명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익명성을 포기하는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6. 익명성을 '가명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넉넉히 인정하신다면, "익명의 토론이라는 게 가치있게 진행되는 것을 난 본적이 없다"는 말씀은, 물론 체험적으로 그러셨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저로선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도 많이 체험했고, 또 익명성이 긍정적인 토론의 윤활유 작용을 하는 경우도 봐왔기 때문에 어떤 것이 옳다거나 혹은 더 설득력이 있다는 것의 근거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7.
"사실 익명성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 대다수가 이미 익명성의 그늘 하에 있지 않다. 블로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가상이긴 해도 아이디를 가지고 유지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익명성에 대한 논의 자체가 익명 게시판에서 이뤄진다면 그저 욕설만 난무했으리라 짐작한다. 실명제를 반대하기 위해서는 검열의 부당한 측면을 강조해야지 [...] (모노마스크)

익명성의 존중과 "익명성의 그늘"이나 "가상이긴 해도 아이디를 가지도 유지"한다는 것이 이 논의와 어떤 상관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블로그를 갖고 있는 것과 인터넷실명제는 논리적인 필연성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물론 대형 블로그 서비스에서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들은 제한적 본인확인절차를 겪으셨겠죠. 그게 인터네실명제를 반대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취지로 쓰셨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 저처럼 독립형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들은 인터넷실명제와는 상관없이 자율적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는데요. 이처럼 '주민등록' 확인 절차와 아무런 상관없이 블로그를 운영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블로그의 토론이 게시판에서의 토론보다 정제되어 있다고 판단하시는 점에 대해선 물론 대체로 경험칙상 공감합니다.

끝으로, 대형 포털의 게시판에서 행해지는 다소 과격한 토론이나 모욕적인 언사들은 전적으로 '인터넷실명제'를 따르고 있는 게시판들에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물론 그것이 전적으로 나쁘기만 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요. 그리고 아직 '일일 평균 방문자수'가 10만이 되지 않은 군소사이트들은, 물론 제 체험치가 그다지 많지는 않습니다만, ㄱ. 우선은 공동 관심사를 향유하는 동호회 성격이 강해서 더 그렇겠지만, ㄴ. 오히려 매우 정제된 토론과 대화를 통해 나름의 자율적인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명예훼손이나 모욕 등이 문제된 사이트들의 절대 다수가 현재 '인터넷실명제'를 따르고 있는 사이트였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바입니다.

정성들여 제 글에 대해 반론을 담아주신 점에 대해선 다시금 깊은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상입니다.


참고. 인터넷실명제(제한적 본인확인제)
인터넷 이용자의 실명과 주민등록번호가 확인되어야만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릴 수 있는 제도. 2004년 3월 12일 개정 공포된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에 규정된 개념으로, 인터넷 언론사의 게시판에 선거에 관한 의견을 게시할 때 의견 게시자가 기입하는 성명과 주민등록번호의 일치 여부를 확인한 후 일치하는 경우에 한하여 의견을 게시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적 조치를 말한다. (네이버 백과사전. '인터넷실명제' 중에서 : 인터넷실명제의 취지에 호의적으로 기술)

제한적 본인 확인제 [制限的 本人 確認制] (= 인터넷실명제)
하루 평균 방문자수가 10만 명 이상인 인터넷 포털 사이트와 언론사 사이트 등의 게시판에 이용자가 글을 올리려면 서비스 사업자가 실시하는 본인 확인 절차를 거치도록 의무화하는 제도. 2006년 12월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여 도입되었다. 인터넷 실명제라고도 하며 본인이 확인되면 필명이나 ID를 사용할 수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제한적 본인 확인제' 중에서, 제도의 차원에서 객관적으로 서술)

제한적 본인 확인제
성과 및 논란
2007년 8월 ~ 9월에 실시된 조사에서는 악성 댓글의 비중이 1.9% (15.8% -> 13.9%) 감소한 것으로 조사되었으나, 이를 근거로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2009년 4월 1일 본인 확인제가 시행되는 대상에 구글 코리아가 운영하는 유튜브의 한국 서비스가 포함되었으나, 구글 측은 본인 확인제 실시 대신 한국 사이트에 한하여 업로드를 금지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국어 위키백과, '제한적 본인확인제' 중에서)

* 관련
구글의 인터넷실명제 거부와 블로그계 십인십색 : 실명제는 예외고, 익명성은 원칙이다.



* 보충 의견
지나가다(임시필명) 2009/04/30 03:12

참고로, 미국의 연방대법원은 수정헌법 제1조(표현의 자유 보호)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The right to speak anonymously (익명으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곧 헌법상 표현의 자유 보호의 핵심이며 "익명성"이야말로 표현의 자유 보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확고하게 판시해 오고 있습니다.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는 표현의 자유는 빛좋은 개살구일 뿐...





최보식 인터뷰의 속물 코드

2009/04/20 09:57
[최보식이 만난 사람] "난 진보적… 노(盧) 전(前)대통령 보니 욕 먹어가며 잘 싸워왔다고 자부" (조선일보, 2009.04.21.일자) (클릭 강하게 비추)
최보식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터뷰어다. 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간 긴장의 소산이다. 정답이 결정된 인터뷰를 나는 최악의 인터뷰 유형으로 보는데, 최보식은 매번 정답이 결정된 인터뷰를 보여준다. 인터뷰이는 철저하게 의도적인 틀에 의해 '선택'당한다. 인터뷰이는 인터뷰어의 철저한 도구로 전락한다. 둘 사이에는 어떤 긴장도 없다. 가장 어처구니 없는 직관적인 불쾌는 계급장 떼고 서로 치열하게 붙어야 하는 일종의 '전장'인 인터뷰에서 최보식이라는 자가 생각하는 현실에서의 권력 위계가 그대로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인터뷰는 최악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근 개봉된 '프로스트 vs. 닉슨'의 인터뷰는 왜 재미있는 인터뷰인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건 인터뷰이와 인터뷰어 간의 전쟁이고, 한 쪽이 모든 것을 얻는 자기를 건 승부이기 때문에 그렇다. 굳이 헐리웃 영화를 떠올리지 않아도 가장 훌륭한 인터뷰, 아니 최소한 가장 흥미로운 인터뷰는 인터뷰이와 인터뷰어와의 적대적인 긴장(혹은 순화시켜 표현하면 '창조적인 긴장'), 싸움이라는 구도 안에서 만들어지기 마련이다. 최보식의 인터뷰는 '최보식 & 아무개'이거나 '최보식 & 최보식'의 구도 안에서 벌어지는 인터뷰지, '최보식 vs.아무개'인 적은 한번도 없다. 이런 '저질 인터뷰'에 대한 불만에 대해선 리승환의 지적에 공감하는 바 크다(물론 나는 인터뷰라는 형식에 대해선 대단히 우호적이다. 이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글을 쓰고 싶다).

위 "우익의 두목"이라고 불리는 국민행동본부 서정갑과의 인터뷰에서 심어놓는  설계도의 골격은 "좌파정권" "노무현" "명계남" "촛불시위" 등이다. 물론 그 배경으로는 "북한 로켓"이 하늘을 날고 있다(이 와중에 신해철식 퍼포먼스는 계속되고, 소위 '보수단체'의 맞장구도 계속된다). 그래서 감동도 없고, 지적인 흥미도 없다. 여기서 그치면 그려려니하겠는데, 최보식은 여기에 저열한 학벌주의, 삼성 최고라는 대한민국식 '쓰잘데기 코드'들을 심어 놓는다. 가령 이 어처구니 없는 인터뷰는 이렇게 끝나고 있다.

"그는 지금껏 20건 넘게 고소·고발을 당했다. 검찰에 출두해 같은 날 이 방 저 방으로 옮겨가며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1남2녀를 두었고, 아들은 영국 케임브리지대 박사 출신으로 삼성전자에서 근무하고 있다."

아들이 영국 명문대학 박사출신이고,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는 것과 이 인터뷰가 어떤 관계가 있는건지 알 길 없다. 인터뷰 마무리를 이런 허접한 속물 코드로 장식하는 최보식의 그 후진 발상이 참으로 짜증스러울 뿐이다.


* 발아점(이라고 딱히 말하긴 뭣하지만... 이승환 덕분에 일등신문 대표 인터뷰를 오랜만에 한 번 훑어보게 됐다능...)
어떤 인터뷰 (리승환)
혹은 개성은 특성이 아닌 식별자 (리승환)




월요일 상쾌한 아침은 스팸과 함께~! ^ ^

2009/04/20 08:45
안녕하세요? 관리자님!

운영하시는 웹사이트 방문자들의 페이지 이동, 마우스 및 스크롤 움직임까지 실시간으로 지켜보면서(국내 유일/특허 출원) 고객에게 먼저 말을 걸고 일대일상담을 해줄 수 있으며, 상담중 고객이 보고있는 웹화면을 원격에서 이동시켜줄 수도 있는 실시간 고객응대 서비스인 "사이트모니터"(sitemonitor)를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로 시작해서

홈페이지 : www.sitemonitor.co.kr (홈페이지에 방문하셔서 데모와 시연동영상을 직접 확인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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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gung 사이트를 직접 살펴보고, 저희 서비스가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을것 같아 무례를 무릅쓰고 메일을 드렸습니다.
사업 번창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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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선착순 100분 한정 월 23,000원에 서비스중입니다. (결재는 3개월분 단위로 이루어지며, 이벤트 기간동안 신청하신 분에게는 이후에도 계속 할인가격을 적용해드립니다.)
로 끝나는 스팸(이라고 생각하고)(뻘짓이라고 느끼며)("이런 젠장"이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이메일로 나는 월요일을 시작했다.
월요일 첫 출발이 참 좋지 않다. : )




* 발아점
책을 읽다 짜증을 내다 (바하문트)

1. 우리말(의 형태)은 의미를 함축하기 보다는 의미를 풀어 놓는 방식과 훨씬 더 친하다고 나는 느낀다. 이게 무슨 국어학 지식에 근거한 의견은 아니고, 글을 쓰다보니 저절로 얻게 되는(느끼게 되는) 경험칙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말에서 조사나 부사, 용언(형태)의 (과도한) 발달은 그런 성격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 문장 주체의 신분에 대한 언어적 배려(쉽게 말해 '존칭/존대')가 발달했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고, 단순한 문화적인 환경이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가령 비교적 최근에 썼던 'deserve'만 하더라도, 여기에 해당하는 명료한 단어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디절브'라고 말하는 입장(쓰는 입장)이나 듣는 입장(읽는 입장)을 상상해보면 대단히 명료하다. 그건 단어 자체가 웅변한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할만 하다' '~할 만한 자격이 있다' '~얻을 만하다' 라는 우리말로 말하거나, 쓰면 그 의미가 다소 헐거워진다는 느낌이 드는거다. '적당' '합당' '자격' 등의 유사 의미로 한정하기엔 'deserve'란 단어가 갖는 단호하고, 명료한 울림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사상과 감정이 언어로 고정되는 과정에는 많은 환경적인 제약이 당연히 뒤따른다. 가장 커다란 제약은 언어 그 자체에 내재된 형태의 차이(문법의 차이), 그 문법에 내재된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에 의한 제약이고, 그건 아주 본질적인 제약 가운데 하나다.

2. 한편, 문학이란 그 자체로 세계라는 텍스트에 대한 개별 작가의 '비유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테다. 그렇지만 앞서 간략히 지적한 한국어 서술 형태와 영어 동사의 형태 차이, 그리고 문학 일반에서 갖는 비유의 중요함을 인정하더라도, 비유의 과도한 사용은 언어의 설명 기능을 약화시킨다. 그것은 명료한 의미 전달을 방해한다. 그런 일차적인 설명 기능이 약화된 뒤에는 아무리 심오하고, 아름다운 비유가 사유와 감정의 풍경들을 풍성하게 가꾸더라도, 그건 언어를 위한 언어, 자기 만족을 위한 작가들끼리의 '암호'가 되버리기 일쑤다.

소위 글쟁이들의 '비유를 위한 비유'들에 대해선 나 역시 종종 짜증이 샘 솟는다. 그건 마치 비유하기 위한 비유 같다. 자신과 세상이라는 텍스트를 좀더 정확하게, 좀더 풍성하게 풀어 놓는 고뇌와 영감의 산물이 아니라, 일종의 언어 강박증, 비유 강박증, 유치한 장난질 같다.

언젠가 어떤 작가(비평가)는 세계라는 텍스트의 진실을 설명해 줄 단 하나의 표현이 존재하고, 그 표현을 찾아 작가들은 여행한다고 이야기했던 것 같다(아마도 신비평의 입장에 선 누군가가). 나는 물론 세계라는 텍스트의 진실이 단일한 하나의 언어적 표현을 통해 재현된다고 생각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비유를 위한 비유들이 넘쳐나는 '울렁증'의 시대에 작가는 그 하나의 표현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작가에 대한 영원한 잠언들 가운데 하나다.

3.
"그 글이 잘 쓰인 글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는 잣대 중 하나는 외국어로 번역을 해보면 된다는 것." (바하문트)

물론 비유 강박에 걸린 글을 읽은 짜증, 그 후유 상태에서 쓴 다소 과장된 지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과장이라는 점을 넉넉히 인정하는 바탕에서 좀더 생각해보면, 이 지적은 매우 재밌고, 의미있는 지적이다. 위 지적은 아틸라가 영어 못하는 나를 위해 썼다는 책의 한 구절을 떠올린다.

댄 브라운의 진짜 재능은 아주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주제에 대한 따분한 연구와 조사와 탐구 과정을 마치 할리우드 영화처럼 흥미진진하게 묘사하는 그의 필력이다. 그 필력의 비밀은 바로 위에서처럼 생기 넘치고 발랄한 동사다. (김현, OTL English, '따분한 이야기를 재밌게 하는 요령', p.260)

작가 자신의 사변적인 인식, 그 풍경을 확장하기 위한 비유와 그에 따른 용언의 사용은 때론 매우 필요한 것이다. 다만 그것이 그저 사변 그 자체에 그치고,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자기치장적인 매너리즘에 그친다면 독자도 잃고, 자신도 잃는 지름길이다.

댄 브라운과 같은 작가들은 (글 읽는 독자의) 쾌락(영화적 이미지를 극대화하는)을 위한 글을 쓴다. 그러기 위해 동사를 적극적인 활용하고, 그것은 매우 의도적일테다. 그리고 그것이 반드시 권장되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른바 '문학을 위한 문학'의 풍토에 여전히 함몰되어 있는 우리 문단에서 작가의 사변적인 인식을 주저리 주저리 고백하는, 아니 차라리 강박증에 걸린 듯이 '비유를 위한 비유'를 늘어놓는 풍경들은 어떤 식으로든 달라져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실은 요즘 주목받는다는 소설이나 시, 평론들은 잘 읽지 않아서 큰 체험치가 있다고 할 수는 없겠다. 다만 간헐적인 체험치에 의한다면 여전히 고리타분한 '말을 위한 말, 비유를 위한 비유들'은 마치 문학의 전통처럼 존재하는 것 같다).

이 연장에서 김훈의 글이나, 공지영의 글이 대중들에게 호응받는 이유들도 한번쯤 생각해볼 만한 하다. 김훈과 공지영은 작가의 사념을 치장하는 비유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글을 쓴다(혹은 쓴다고 한다). 김훈과 공지영의 글들은 짧게 서술하고, 그렇게 사건과 인물들의 객관적인 행동들을 지시함으로써 작가의 의도를 충족시켜 나간다.

사족이지만, 나는 김훈과 공지영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다. 특히 공지영을 좋아하지 않는다. 공지영은 특히나 단편적으로 신문연재를 통해 간헐적으로 읽었을 뿐이라서 이 판단은 선입견이라는 점을 밝힌다. 영화 '우행시'와 소설 '우행시'가 별 차이가 없다면, 공지영은 인터뷰에서 대충 만족스럽다,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이 기억나는데, 그 영화도 소설도 대단히 실망스럽다. 그러니까 좀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공지영에 대해선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고 아주 질려버렸다. 그녀는 정말 스스로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참 쌍으로 놀고 있다. 이런 감상만이 밀려 온다. 물론 선입견인데, 이 선입견을 고치고 싶은 생각 아직 없다.

4. 요즘 꽤나 관심을 갖고 있는 주제 중에 국립 오페라합창단 문제를 보더라도, 말을 위한 말들은 점점 더 많아지는데, 합창단을 위한 말은 그 많은 말들 가운데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말과 글들은 대개는 '합창단'을 위해서 생겨난 말과 글들인텐데, 점점 더 자신들의 입장에 대한 자기애적 옹호, 혹은 다른 입장에 대한 조롱과 배타적인 거부로 변질된다. 시쳇말로 뭐하자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그 말과 글이 춤추는 모습을 보면서 차가운 냉소만이 내 안에서 차오른다. 그런 와중에 이런 관심을 발견하는 건 기쁨이다. 물론 그 방법은 좀더 고민되어야겠지만... 죽은 정명훈과 목수정에 굳이 인공호흡 시도하며 좀비 논쟁을 부추기는 비급좌파의 꼰대짓과 비교한다면 훨씬 성숙한 태도라고 본다. 말과 글은 목적을 갖는다. 그 목적은 항상 사람이다. 아니, 사람이어야 한다. 말과 글이 향하는 목적이 말과 글, 그 자체가 되면 그 글은 대개는 죽은 글이 되기 쉽다.


* 관련 추천
일곱, <깡통> 말할 수 없는 말, 잊혀져가는 의미, 사라져가는 감정 (누에)

* 보충 의견
종소리 2009/04/20 08:43

[....] 일단 전 언어의 유희를 즐기는 즐기는 편인것 같아서 참견해 봅니다.
글을 쓰는 사람치고 언어의 유희에 빠지지 않기가 쉽지 않다고 봅니다.
게다가 저는 주저리주저리 고백 형식의 글도 좋아합니다.
공지영은 아니더라도 김훈의 그 명료한 언어에 한하기도 했지만
여전히 한마디로 동사로 표현하지 못하는 글들을 좋아하고 그런 글을 읽다보면
작가나 혹은 글의 주인공내면에 앉아있는 느낌을 받곤하는데
어쩌면 그 내면은 저나 독자의 내면과 같기도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물론 쥐어짠 듯한 글까지 독자가 사랑할 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그런 글들이 우리 사회와 문단에 유행하고 사랑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고백해야 할 것들이 많았던 시간을 지내온 사람들의 만남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는 바뀌어야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요즘의 새로운 세대가 그 많은 형용사와 부사로 자신의 내면을 고백해야 할 것들이 있을까하는 것이지요
이미 신세대 소설은 간결한 동사만으로 행위의 포착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바람과 상관없는 대세가 아닌가 하네요
대세란 또하나의 문화코드이기도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