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래픽 제13차 공개회의입니다. 회의는 대외비로 할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개를 원칙으로 합니다(2009년 1월 1일 부터.) 블로거라면(독자도 물론이구요) 누구나 회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주 1회 원칙. 일요일 혹은 월요일을 공개 회의안 작성일로 정할까 합니다.

* 지난 주에 쓴 글

한RSS의 멍청한 디렉토리 by 민노씨 Mar 31st, 2009
추비추(가제) [No.1] 3월 넷 째 주 (2009. 3. 23~29) Mar 31st, 2009
사소하지만 의미있는 차이, 페이스북의 외부 글 보여주는 방식 (프레임과 확인) by 써머즈 Apr 2nd, 2009

위 추/비추의 형식에 대해선 현재 내부 논의중입니다.

★ 따끈한 이야기 ★ 신사동 오프와 블로그 바캠프 , 그리고 추비추

1. 신사동 오프
오래간만에 신사동에서 블로그래픽 오프가 있었습니다. 이 날 오프에서는 주로 '컨퍼런스'의 주제와 형식에 대해서 이야기가 오갔는데요. 이에 대해선 가급적 빠른 시일 안에 그 날 오프에 참석하셨던 분들께서 기억을 남겨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저도 제 기억에 의존해서 간략하게나마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컨퍼런스 주제나 형식, 그리고 추비추에 대한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새드개그맨님과 둘이 남은 삼차에서의 대화도 따로 정리하고 싶네요.

2. 컨퍼런스의 주제와 형식 : 바캠프안에 대해
프라크님과 아틸라님의 적극적인 의견개진으로 '바캠프' 형식의 자유로운 컨퍼런스를 열면 어떻겠는가, 라는 안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선 그 모임 참석자들로부터 꽤나 많은 호응을 얻었고, 충분히 고민해볼만한 형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로선 여전히 '온라인'이 중심이 되는 컨퍼런스를 희망하지만, 바캠프 형식 자체도 온라인의 연계성을 충분히 강조하는 형식이라서 좀더 관심을 갖고 의미있는 선택지들 가운데 하나로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캠프안이 채택되면 주제는 바캠프의 취지에 따라 '열려 있게' 됩니다. 다만 그 참석자들은 '블로그' 에 관심을 갖는 블로거로 한정되겠죠.

3. 추비추(가제)에 대해
현재 방법론의 문제를 내부에서 숙의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 연재를 지금 당장 그만두는 일은 없을 겁니다. 이번 주에서는 그 내부 논의를 정리한 이야기를 추비추에 대신해서 등록할까 싶기도 하네요. 참고로 이승환님의 관련글이 있었는데요.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 http://www.realfactory.net/938 )

이상의 주제들에 대해 의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미지근한 이야기 ★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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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쓸거리]

more..


* 블로그래픽 홧팅!
http://blographic.net 

* 의견 "쫌" 주세용! ^ ^




잊혀지는 것과 기억해야하는 것 (소요유)

한국 저널리즘, 아니 의미 유통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는 총체적인 메카니즘, 그 시스템 자체가 ‘기억’과는 친하지 않다. 특히나 공식적인 기억시스템의 중핵으로 작동하는 저널리즘의 망각증은 심각해서 어떤 의미(사건)가 완결적으로 종료되었다는 인식을 얻은 경험은 우리에게 전무하다시피 하다. 특히나 이런  ‘망각’의 메카니즘이 권력(기득권)의 필요에 의해 조율되고 있다는 점은 이 망각 시스템의 가장 아픈, 비극적인 요소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한 것이다. 이 망각에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기억이 소멸되기 전에 그 기억의 의미들을 내면화할 수 있도록 얼마나 효과적으로 싸울 것인가? 우리 시대에서 가장 의미있는 싸움은 망각에 저항하는 싸움이다. 인간을 인간일 수 있게 하는 그 모든 의미들이 실존의 주형을 통과하지 못한 채 망각 시스템 속으로 급하게 빨려들어간다. 의미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인 한 인간의 실존적 기억도 마치 '이슈 상품'의 싸구려 부속품처럼 이내 지워진다.

대한민국은 그 자체로 가장 거대한 망각 시스템이다. 그 망각에 가장 결정적으로 관여하는 건 말할 필요 없이 권력이다. 그 권력의 이름은 '이명박'으로 호칭되기도 하고, '조중동'으로 불려지기도 하며, '삼성'이나 '재벌' 때론 '대법원'이나 '언론' 등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 망각에 저항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동조하고, 방조한다. 소녀시대와 동방신기로 동조하고, 일박이일과 무한도전으로 동조하고, 블로거로서 이야기한다면, 새로운 트래픽 사냥감에 아직 교훈을 얻지 못한 그 기억들을 기끼어 버림으로써 그 망각에 동조한다.

소요유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미네르바 구속의 의미는 신동아의 진짜/가짜쇼가 잡아 먹고, 용산참사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공권력의 야만은 강호순의 얼굴이 잡아 먹는 망각의 순환이 일어난다. 신영철은 WBC가 잡아 먹고, 장자연 리스트는 박연차 리스트와 북한 로켓쇼가 잡아 먹는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어떤 기억의 교훈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어떤 고민의 기억도 우리 안에 내면화되지 않는다. 끊임없이 영겁회귀하는 사건의 원형들만 '시트콤'의 무대처럼 반복된다. 권력은 여전히 거기에서 이 망각을 조율하고, 지리리 궁상인 시민들은 자신들이 이 무대의 주인공이라는 착각 속에서 철저하게 구경꾼으로 전락한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유명한 라틴어 격언이다. 이 격언을 차용한 '메멘토'라는 유명한 영화도 있고, '메멘토 모리'를 부제로 삼은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도 있다(사족. 이 영화는 미국 영화 '메멘토' 만큼 걸작이다). '죽음을 기억하라', '(당신의) 죽음을 상기하라'는 이 격언은 인간의 유한성, 인간은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그 절대적인 한계를 이야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살아 있는 동안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기억할 수도 없고, 그 기억들 역시 언젠가는 망각 속으로 흘러들어간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고, 우리가 분노했던, 우리가 고민했던, 우리가 즐겁게 더불어 환호했던 그 모든 의미들을 기억하려고 애써야 한다. 특히나 유희는, 즐거움은 그 자체로 해소되는 성격들의 의미다. 그 기억들은 그저 우리에게 쾌락과 즐거움을 주고, 그 임무를 다해 버린다. 하지만 고통은, 파괴는, 상실과 허무는 우리에게 그 의미들을 외면하게 만드는, 그 고통과 상실의 대상들을 피하게 하는 성향을 갖는다. 하지만 우리는 대면해야 한다. 그리고 좀더 끈질기게 그 의미들을 붙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블로거로서 제안하고 싶은 건 메멘토 리스트다. 블로거들 각자가 자신들의 '메멘토 리스트'를 만들어 보자. 물론 그건 혼자만 해야 하는 건 아니고, 더불어 함께 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 그게 '장자연 리스트'여도 좋고, 새드개그맨이 여전히 붙잡고 있는 '미네르바'여도 좋다. '용산참사'여도 좋고, 기성언론에 의해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는 '저작권법 개정안'이어도 좋겠지. 나는 요근래 '삼성전기 성희롱 사건'에 대해 좀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머물렀던, 그런데 망각시스템에 의해 그토록 허무하게 지워져버린 그 의미들, 우리가 분노했던, 우리가 그토록 애착했던 의미들을 우리는 좀더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사건들은 우리마저 기억하지 않으면 더 쉽게, 더 아무렇지 않게 지워질 기억들이다.  그건 인간을 인간일 수 있도록 하는 실천이면서 싸움이다. 그것은 '해변의 낙서처럼 지워져가는 인간(휴머니티)이라는 발명품'(푸코, 말과 사물)의 유통기간을 조금이나마 더 늘리는 길이다. 그 싸움이 사라지면, 인간도 비로소 사라져버릴 것이다.


* 발아점
잊혀지는 것과 기억해야하는 것 (소요유)


* 관련 추천
망각보다 더 무서운 그리고 망각보다 더 편리한. (시퍼렁어)



참고글 정책 (류동협)

생각이나 느낌이라는 것은 어느 날 문득 그저 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의 생각과 느낌들이라는 맥락 속에서 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창작도 어떤 텍스트에 대한 비평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그 텍스트는 가장 넓게 보면 세계 일테고, 안으로 들어오면 자기 자신이겠죠. 그리고 때론, 아니 자주 타인의 글, 그 글에 담겨 있는 사고와 사유의 편린들, 그 편린들의 다채로운 조합일 수도 있겠구요.

이렇게 글 속에서 그 생각과 느낌이 어떤 맥락들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지를 기록하는 것은 사유와 느낌들의 풍경을 다채롭고, 풍성하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나누고, 또 의지하며, 기대고 있다는 관계의 철학을 실천하는, 더 나아가 독자와 저자 스스로를 존중하는  방법론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피인용대상이나 참고대상이 되는 사유의 주인공들에게는 더더욱 그럴테고요. 이것은 그 참고대상, 피인용대상을 상찬하기 위한 경우에는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그를 비판하기 위한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나 웹 상의 텍스트가 서로 의지하고, 또 서로 보완하는 거대한 하이퍼텍스트 링크들의 무수히 다양한 연결들, 그 분산화된 민주적인 네트워크들의 총체라고 할 때 링크와 인용의 문화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론 '링크'가 없는 블로그들, 링크는 많지만, 거의 모두가 '자신으로만 향하는' 욕심쟁이들의 블로그들은 그 자체로 '단팥 없는 찐빵' 같은 블로그라고 생각합니다.
류동협씨의 블로그 정책에 전폭적인 공감과 함께 응원을 보냅니다. : )


* 이 글은 원래 댓글로 작성한 것인데 류동협씨의 블로그에서는 자꾸 오류가 생겨서요. 댓글이 입력되지 않네요... 물론 그다지 대단한 글도 아니고, 사라져도 그만인 짧은 생각이긴 하지만, 그 취지에 기꺼운 공감을 보내는 의미에서 굳이 이렇게 짧게 포스팅합니다.

* 관련
링크와 인용 : 블로그에서 마지막까지 남겨야 하는 두 가지
링크와 인용 : 기억이 시작된 곳


* 발아점
참고글 정책 (류동협)



DESERVE

2009/04/02 11:35
나는 미국드라마를 꽤 즐겨보는 편이다. 마니아라고 할 것 까지는 아니고, 그저 주변의 풍문을 통해 평가가 좋고 재밌다는 것들 가운데 한 두 편 보고 적성에 맞는 건 꾸준히 챙겨보는 편이다(관련해서 shain이 요즘 통 블로깅 하지 않는 건 매우 아쉽다). 물론 영어 난청이기 때문에 우리말 자막의 도움이 매우 절실한데, 영어에 대한 압도적인 스트레스랄까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을만큼 개인적으론 꽤나 인생의 발목을 잡았던 기억) 때문에 자막과 영어대사가 어떻게 부합하는지를 들으려고 간간히 노력하는 편이긴 하다. 영어공부가 될까 의문이지만, 이왕에 보는 거 틈틈이 듣기 연습이라도 하지 뭐, 그런 심산으로 그렇게 한다.

그렇게 안들리는 영어로 씨부리는 미국드라마들을 보고(듣고) 있노라면, 유독 인상적으로 남는 단어가 있다. 그건 이 글 제목인 'deserve'다. 인상적이라고 내가 느낀 순간부터 그 단어가 자주 '인상적'으로 들리는건지, 아니면 드라마 속 줄거리가 그 'deserve'와 친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단어는 아주 중요한 순간들마다 울림을 갖고 들려온다. 그네들(미국인)은 무엇을 받을 만 하다거나 무엇을 할 만 하다는 걸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가? 뭐 이런 생각이 들 지경이다. 이건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이면서, 그 인간의 존재가치와 연결되고, 특히나 칭찬과 비난/비판과 연계된다. 그 deserve는 정말 중요한 국면에서 그 사람에게 진심으로 격려의 마음을 전하거나, 혹은 그 사람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비난하기 위해 사용된다. 좀 극단적인 연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네들의 문화는 'deserve'의 문화는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나는 미국이라면 그저 왠지 좀 짜증이 생기는 편견이 있는 편이긴 하지만 이 'deserve'와 관련해서는 그네들의 문화랄까, 인식과 판단의 태도랄까... 좋게 느껴진다(물론 이게 내 과도한 해석이라는 걸 인정하는 전제에서 말이다).

여기서  당연히 우리네들은 이 'deserve'라는 거 얼마나 생각하나 뭐 그런 연상이 닿는다. 쥐뿔. 그런거 없다. 마땅히 상찬해야 하는 행위도, 마땅히 비판해야 하는 행위도, 그냥 좋은게 좋은거다라는 문화(?)에 모두 묻힌다. 그게 우리네 사고의 바탕이지 않나 싶은 그런 씁쓸함이 생긴다. 대통령은 대통령답지 않고, 정치인은 정치인답지 않고, 언론은 언론답지 않고, 이른바 "유력인사"들은 유력인사답지 않다. 그들은 'deserve'의 세계에 있지 않고, 그냥 '예외'와 '특권'과 '뻘짓'의 세계 속에 있다. 그들은 모든 것들을 초월해서 '무엇을 할 만 한 존재'라거나, '무엇을 받을 만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그냥 그럴만하지도 않은데 그러고, 그럴만하지도 않은데 모든 것을 누리는 그런 존재들로 보인다.

그럼 블로그판은 과연 어떤가? 모든 것들을 블로그계의 생리들, 그 안에서 유통되는 의미들의 흐름으로 되돌려 생각하곤 하는데, 블로그 역시나 'deserve'의 미덕과는 별로 친하지 않은 것 같다. 무엇을 할 만하다거나, 무엇을 받을 만 하다는 걸 생각하기 보다는 나랑 친한 블로그가 장땡이고, 그냥 좋은게 좋다는 식의 소극적이면서, 은밀한 처세가 장땡이다. 마땅히 칭찬하고 싶으면 칭찬해주고, 마땅히 비판해야 할 때는 그래야 하는게 귀찮은 것 같다. 그래봤자 돈이 나오나, 떡이 나오나. 나만 고단하고, 혹시라도 괜히 '경찰'소리나 듣고. 나에게 별 이익되지 않는 짓을 귀찮고, 성가시게 할 필요가 뭐있나, 뭐 그런 게 이제 바야흐로 블로그계의 생리인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언젠가 이정환이 블로그에 한번 써보고 싶었다던 마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 1892–1984)의 시를 삼월의 마지막 칼럼에 박상주가 인용한다(물론 박상주 칼럼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것도 아니고, 동의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 핵심 취지에 대해선 공감하고, 동의한다).

나치가 공산당원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그들이 노동조합원에게 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nicht protestiert;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그들이 유태인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Jud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Jude.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항의해 줄 누구도 더 이상 남지 않았다.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en konnte.

- 마틴 니묄러 (Martin Niemöller)

참조 : First_they_came...(위키백과)

칭찬받을 만하다거나, 존경받을 만하다거나, 사랑을 받을 만하다.
비판받을 만하다거나, 문제를 제기할 만하다거나, 책임을 질 만하다.

'deserve'의 세계에서 그게 향하는 대상은 궁극적으론 사람이다. 하지만 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기 위해서, 재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관계의 맥락 속에서 그 사람과 함께 나눠야 하는 세계를, 그 의미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다. 그건 대한민국 버전으로 민쯩 까고, 화부터 내는 세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과연 'deserve'인가 아닌가를 그저 솔직하게, 때론 치열하게 대화하는 거다. 그렇게 함으로써 좀더 나은 세계에서 좀더 무엇할 만한, 무엇 받을만한 성숙한 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 대답하는 형식으로 질문하고, 질문하는 형식으로 대답하는 거다. 무슨 자격증 타령하는게 아니라, 정말 실질적이고, 실체적인 이야기, 'deserve'인가 아닌가를 이야기한다.

그걸 블로그계로 돌리면 어떤 블로깅, 어떤 포스트, 그러니까 글과 그 글에 담긴 입장과 세계관, 그 의미에 대한 칭찬과 격려, 비판과 문제제기가 없다면, 그냥 좋은게 좋은거고, 나랑 친한 블로그가 장땡인 그 세계, 'deserve'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세계, 그저 나에게 불똥이 튈까 안튈까, 나에게 유리하나 유리하지 않나, 내가 편한가, 불편한가라는 그런 유아론적 세계가 계속 득세한다면, 비유적으로 '돈 되나 안되나'의 세계가 계속 커져가면... 그러니 'deserve'가 여전히 우리와는 별로 상관없는 단어로 남게 되면.... 마틴 니묄러의 시가 나치를 걱정했던 그 암울한 시대가 우리에게 기필코 온다. 그리고 그런 암울한 시대가 오면, 우리가 아무런 저항의 목소리도, 격려와 연대의 목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를 위해 항의해줄, 아주 작은 목소리로나마 우리 스스로를 위해 우리를 대신했던 그 목소리는 더이상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동안 블로그래픽은 내부에서는 이런 저런 목소리들, 이런 저런 시도들과 논의들이 참 많기도 많았지만, 정작 대외적인 생산물을 만들어내는데는 몹시도 서툴렀다. 이것은 물론 핑계이고, 변명이다. 방금전 진간장의 제안에 따라 작지만 의미있는 공동작업의 첫 글을 남겼다. '추비추'가 그것이다. 아직 가제의 형식이지만, 말 그대로 추천과 비추천을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 블로그래픽이 지금 당장 함께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작업은 뭔가  대단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다음세대재단으로부터 후원받은 프로젝트사업으로서 '온라인 컨퍼런스' 같은 일견 폼나는 대외행사들을 무턱대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좀더 겸손하게 우리 주변을 돌아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료블로거들이 쓴 글을 읽고, 그 글이 쓰여지기까지의 노고에 대해 우리들의 관심과 시간을 기꺼이 보답으로써 그 글에 보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취지는 명백하다. 좋은 글은 좀더 널리 읽히도록 장려하고, 좋은 글에 담겨진 정신을 널리 퍼뜨리는 것이고, 그 고민과 성찰과 사유들을 좀더 멀리, 우리가 퍼뜨릴 수 있는 데까지 멀리 퍼져가도록 조금이나마 조력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목적하는 바다. 그리고 우리가, 아니 동인 각자가 스스로의 자율적인 판단 하에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글에 대해선 (굳이 심리적인 부담을 무릎쓰고) 비판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솔직담백하게 이야기함으로써, 비판받는 블로거에게, 그를 단순히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열린 토론의 장에서 우리의 다른 관점, 다른 입장이 당신에게 대화를 원하고 있다고 밝히는 일.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추구하는 소박한 취지이자 목적이다.

이 작업이 블로그계에 좀더 솔직하고, 좀더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가 퍼져갈 수 있는 데 아주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 관련글
추비추(가제) [No.1] 3월 넷 째 주 (2009. 3. 23~29)


* 안내
두 번째 추비추는 포럼이 아닌 '끄적끄적'(블로그래픽 마이크로 블로그)에서 링크를 남기고, 그에 대한 그 때 그 때의 이야기들을 그 링크들에 보탤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