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내 일생의 테마들 가운데 하나가 연애감정이다. 그건 가장 난감한 속물근성이다. 그건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속물근성들 가운데 하나다.

1. 연애감정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도착하는 단어는 '불가피'다. 그 다음으로 '무자비'가 오고, 그 다음에야 '따뜻함'이 온다. 불가피한 무자비 속에서도 사람들은 따뜻함을 기다린다. 적어도 나는 그런 편이다.

2. 나는 연애감정에 휩싸이거나 연애감정에 파묻히는게 싫다. 하지만 이야기했잖아, 그건 불가피하고, 아주 무자비하게 온다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애감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는, 아주 조금은 그걸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바라볼 수 있는 뭔가가 생겨난 것 같기도 하다. 연애감정이 사랑은 아니라는 거. 다행스럽게도 사랑은 아주 멀리서, 아주 늦게,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온다. 연애감정이 없는 사랑은 불가능하지만, 사랑이 없는 연애감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연애감정은 차라리 우정에 가깝다. 아니, 가까우면 좋겠다.

3. 그런 의미에서 연애감정은 아무도 헤치지 않고, 아무에게도 상처주지 않는다. 다만 그 연애감정이란 것에 너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거나, 혹은 거기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자의식이 서로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적인 경쟁과 비교와 위계적 질서에 대한 관성화된 억압이 녹아 있다. 가장 강력한 관성은 소유욕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개 그걸 인정하지 않고, 문화적으로 위장하려고 든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나는 그게 싫다. 그게 얼마나 파괴적인 욕망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알기 때문에 그렇다.

4. 커피캬라멜. 이걸 커피카라멜이나, 커피캐러멜로 부르면 반칙이다. 그게 반칙인 세계에서 나는 커피캬라멜과 연애하고 있다. 그 커피캬라멜은 연애감정이 사랑에 닿는 순간 나에게 느껴지는 맛인데, 그건 마치 초저녁 거리가 달콤하게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밀크커피처럼 그 시간과 공간을 휘젓는 신비로운 느낌들과도 비슷하다. 그걸 빨강머리 앤의 첫 마차에 쏟아지는 저 푸른 이파리들 사이에서 춤추는, 갓 태어난 천사들 같은 햇빛들과 바꿔도 물론 상관은 없다. 사랑은 하나의 이미지가 아니라, 여러 개의 풍경들, 그 풍경들이 나에게, 당신에게, 우리에게 '함께 놀자'고 장난치는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런 풍경들을 만들어가는게 사랑이다.

5.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들 가운데 이런 문장이 있다.
그러나 사랑은 하나다. 감정은 '소유'되지만 사랑은 생겨난다. 감정은 사람 안에 깃들지만 사람은 사랑 안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다. 즉 사랑은 '나'에 집착하여 '너'를 단지 '내용'이라든가 대상으로서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나'와 '너' 그 '사이'에 있다.
- 마르틴 부버, 표재명 역, '나와 너', 문예출판사, p.26, 1995.

* 요즘 좀 싱숭생숭 새벽에 잠도 안오고 해서 끄적여보는 글입니다. 그럴 분은 없겠지만... 너무 심각하게 읽지는 말아주시길. :D 사적인 질문하는 댓글은 사절입니다. 물론 댓글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댓글이 있다면, 그런데 그 댓글이 맘에 안들면 이 글에 한해서  좀더 쉽게 삭제하거나, 이 글 자체를 지울수도 있습니다.  : )



5.18, 폭력의 구조, 그리고 투명한 죽음

2009/05/18 22:26
1.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미투데이에서 우연히 보게 된 대단히 매혹적인 "내 인생의 영화 베스트 10" 때문이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거기에 일곱번째로 소개된 '파이트클럽' 때문이다. 거기엔 짧은 소개글이 있다. "2시간19분 짜리 성서" (inthegroove) 그 짧은 소개가 [폭력의 구조]라는 책을 떠올리게 했다. 물론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걸작 [폭력의 역사]도 당연히 연상됐지만... (로쟈의 칼럼인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도 양자의 유사성은 간단히 언급되고 있다. 그런데 어떤 독자가 지적했듯이 너무 많은 책들이 인용되고 있어서.. 좀 망라적인 느낌이 강하다.) 

2. 박정희 시대 이후, 전라도 태생이라는 한국적인 낙인은 평론가 김현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인간의 삶과 그 삶이 자리한 세계를 가장 예민하게 다루는 문학비평가에게  그가 전라도 태생이든 아니든, 그의 고민이 '80년 5월 광주'에 닿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긴 하다. 다만 전라도 태생이라는 선택하지 않은 조건은 김현에게 더 큰 실존의 부채의식으로 자리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김현은 "1980년초의 폭력의 의미를 물어야 한다는 당위성"(19)으로 르네 지라르를 분석한다. 그리고 "폭력은 어디까지 합리화될 수 있는가?"(19)라고 질문한다. 그렇게, 그래서 태어난 책이 '르네 지라르 혹은 폭력의 구조'다. (* 내가 읽은 책은 민음사에서 나온 단행본이 아니라 김현 전집 10권에 '시칠리아의 암소'와 함께 수록된 '폭력의 구조'다. 김현, 폭력의 구조 / 시칠리아의 암소. 김현전집 10. 1992, 문학과지성사. 이 글에서 괄호로 표시하는 부분은 이 책의 페이지수를 지시한다.)

3. 광주의 기억과 관련해서 특히 의미가 있는 부분들,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큰 부분들은 지라르의 [폭력과 성(聖)]('폭력과 성스러움'으로 출간), [속죄양]을 분석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그 해당 장들의 인상적인 구절들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10. 초석적 폭력과 성(聖)
사회가 제대로 유지되려면 폭력에 사로잡히지 않아야 한다. 그 방법으로는 폭력을 오래 속이는 방법 외엔 딴 방법이 없다. 폭력을 속이는 폭력, 그것이 제의적 희생에 나타나는 폭력이다. 순수하고 합법적인 폭력과 분순하고 비합적인 폭력 사이에는 차이가 있으며 합법적 폭력의 초월성은 나쁜 폭력의 내재성을 이겨낼 수 있다고 믿어야 한 사회는 유지될 수 있다.(47)  

상호적 폭력에서 일인에 대한 만인의 폭력으로의 이행이 바로 모든 문화의 기원이다. 그것은 희생적 위기에 일어난다.(48, 49)

지라르의 모방이론은 인간 사이에 원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같음에서 연유하는 혼란과 싸워야 한다. 그 싸움의 방법은 이미 아는 방법을 다시 사용하는 것 뿐이다. 이 기제에서 나온 문화의 두 모순된 명제는 ㄱ. 위기의 몸짓을 다시 해서는 안된다. ㄴ. 위기에 끝장을 내준 신비로운 사건을 되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방의 근절과 근절의 모방이 문화의 두 축이다. (49)

지라르의 가설은 사회 계약에 의해 사회가 생겨났다는 주장이 환상적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인간의 폭력을 감추고 있으며 모방적 위기가 인간 사회를 짓누르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49)

문화는 금기와 제의라는 짝패에서 솟아나온다. (50)  

11. 지라르의 외디푸스 해석
지라르가 소포클레스의 [외디푸스왕]와 [콜로누스의 외디푸스왕]을 자세히 분석함으로써, 신화와 다르게 그리스 비극이 폭력의 해로움/이로운이라는 양면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희생양이라는 주제의 중요성을 드러낸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51)

희생양은 상호적 폭력에서 공동체적 평화로의 이행을 상징하는게 아니라 그 이행을 확실하게 하고, 이행 그것 자체가 된다. 외디푸스는 이제 평화의 초석이 된 것이다.(51)

지라르의 독특한 외디푸스 해석은 어머니에게로 되돌아감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온 요나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을 낳는다. 지라르는 요나 1장 4절부터 7절까지를 인용한 뒤에, "배는 공동체를 표상하며, 태풍은 희생적 위기를 표상한다. 바다에 던진 물건은, 차이를 잃은 문화적 질서이다. 저마다 자신의 신을 향해 울부짖는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분명 종교적인 것의 갈등적 붕괴이다. 조난선의 주제에 회개치 않으면, 멸망될 수밖에 없는 니느웨의 주제가 덧붙여져야 할 텐데, 거기서 문제되는 것은 위기이다."(지라르) 그의 요나 해석은, 누가 희생양으로 뽑히느냐는 문제가 거기에 내재하고 있음을 밝히는 데서 그 형안을 드러낸다. 그것은 제비뽑기라는 우연에 의한 것이지만, 그것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우연이 아니라 신이 만들어내는 우연이다. 현대 사회에서 우연의 주제는 신의 개입과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원시사회에서는 약간 다르다. 우연은 성스러운 것의 성격을 다 갖고 있다. 때로 그것은 인간들에게 해악을 끼치기도 하고 때로 시혜를 베풀기도 한다. 제비뽑기에 의해 희생물이 결정되고, 그가 바다로 던져지자 조난은 극복된다. 요나서 1장 8절에서 16절까지는 희생양에 의해 새 평가가 자리잡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52)

13. 기본적 인류학의 기본구조
[낭만적 거짓]이 나온 지(1961) 17년 만에 나온, [세상이 만들어질 때부터 숨겨온 것]은 [....] (57) 

하퍼(Ralph Harpper)는 지라르의 소론을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요약하고 있다.
ⅰ) 인간이 대면해야 하는 중심 문제는 폭력이다.
ⅱ) 폭력은 어떤 사람을 모방하려는 경쟁 상태에서 생겨난다.
ⅲ) 오래 전부터 인간은 폭력이, 모방 욕망처럼 끝이 없다는 것을 보아왔다.
ⅳ) 희생양이 발견되어 바쳐지면 폭력은 일시적으로 끝이 난다.
ⅴ) 이 희생양이 성화된다.
ⅵ) 그것이 종교적 제의의 시작이다.
ⅶ) 재판은 그것의 연장이다. 폭력만이 폭력에 끝장을 낼 수 있다. (57)

비극 분석에 주로 관심을 쏟았던 지라르는, 성서가 다른 신화, 중세의 처형서들과 다른 성서만의 특색을 가지고 있음을 예리하게 직관한다. 그는 그리스도만이 폭력의 구조에서 벗어난 유일한 주체라는 것을 인정하고, 유태, 기독교적 저술이 신화가 감추고 잇는 초석적 폭력을 드러내 해체하고 있다고 판단한다. 성서의 신화들은 다른 신화들과 다르게 "희생물이 무죄이며, 살인에 기반을 둔 문화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살인적 성격을 지니고 있어, 그것이 원래의 폭력의 질서 유지적, 희생적 덕성이 없어지면, 그 사회를 파괴하기에 이른다"(지라르)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신화들이다. (58)

지라르에 의하면, 욕망을 해방시키고, 금기를 없애면 "욕망의 유토피아"가 온다고 믿는 것은 헛된 믿음이다. "사람들이 욕망의 유토피아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으면 믿을수록, 해방의 이데올로기를 택하면 택할수록, 사실 그들은 경쟁 사회의 완성을 독촉하는 셈이다."(지라르) 욕망의 유토피아를 서로 실현하기 위해, 서로의 욕망을 해방시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문화적 위기, 무차별 현상이 가속화된다.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해방적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공격하여 없애려는 사항들을 희생양으로 만들 따름이다. 그가 들고 있는 희생양은 프로이트와 프로이트주의자들의 아버지, 법 등이며,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부르조아, 자본가 들이며, 니체의 노예의 도덕, 타자들의 원한 ....등이다.(61)

지라르는 위의 언급에서 현대사상가들의 사유의 핵심이 해방적 이데올로기임을 명백히 알고 있다. 해방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 억누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 억누르는 것, 금기를 지라르는 그들 이론의 속죄양이라 부르고, 그것의 해방이 욕망의 유토피아를 부르기는커녕 그것의 갈등을 더욱 초래할 것이라고 그는 진단한다. [...] 해방적 이데올로기, 혹은 탈신비화는 금기를 제거하여 사람들을 차별없게 만들어 희생 제의적 위기에 봉착하게 만들 것이다.(61)

금기가 없어지면, 사회 건설적 폭력이 그 긍정적 힘을 잃고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것이 지라르의 가장 중요한 전언 중의 하나이다. 그는 그 근거를 유태, 기독교적 저술에서 찾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반현대주의자이다.(62)  

15. 속죄양의 의미
[속죄양]에서, 지라르는 박해에 대한 인류학적 텍스트에는 희생자가 속죄양이라는 것을 말 안 하는, 오히려 감추는 텍스트(신화적 텍스트)와 그것을 말하는 텍스트(성서)의 둘이 있음을 지적한다.(66)

지라르에 의하면, 신화는 이처럼 박해 현상을 신비화시켜 그것이 없었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야기이다. 폭력의 재현을 없애려는 의지가 신화의 진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폭력지우기의 첫번째 단계는, 아즈테크 신화의 예에서 보듯 집단적 폭력이 지워지고, 개인적 폭력이 그것을 대치하는 단계이다. 두번째 단계는 그 개인적 폭력까지 지워버리려 한다. 그리스로마 신화가 그러하다. 모든 형태의 폭력은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단계를 넘어서면, 대부분의 경우는 모르고 그러는 것이지만, 집단적 살인의 흔적 지우기, 지라르가 데리다의 표현을 살그머니 도용하고 있는 것을 빌면, 흔적의 흔적 지우기라는 목표만이 남게 된다. (69)

[속죄양]에서의 지라르의 결론은 "이제 서로서로 용서할 때가 왔다. 아직도 기다린다면 시간이 없다"(지라르)라는 절박한 권유이다. 지금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파멸이 온다는 지라르의 경고는 충분히 납득이 가는 경고이지만, 그것의 처방이 서로 용서하는 것이라는 것은 해답을 위한 해답이다. 인간은 모방현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벗어나라는 말을 남에게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70)

16. 성서적 텍스트의 중요성
예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희생물이며, 그의 온갖 행동은 비폭력으로 특징지어진다. 다시말해 비창건적, 비초석적이다. 그의 수난에는 박해자들이 그를 희생양이 아닌 죄인이라고 믿게 만들 요소를 하나도 갖고 있지 않다. 그의 박해받음의 완전한 무죄성은 박해 체계, 초석적 폭력을 완전히 뒤집어 보여준다. 복음서의 진정한 독창성은, 완전한 예수의 무죄성을 통해 박해체계의 폭력성을 탈신비화시킨 데 있다. 그도 다른 희생자처럼 죽지만, 그는 신비화되지 않는다. 그는 드러내고 죽는다. 예수의 죽음으로 희생제의적 기제의 허구성이 폭로된다. 문화가 희생 기제 위에 세워져 있다면, 그 기제는 그것의 기능이 그것을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만 기능하는데, 그 기제의 허구성이 폭로되니까, 수난에 의해 예수의 지상 왕국은 세워질 수 없다. 그러나 서구 문화는 그 예수의 수난을 왜곡하여 세운 문화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서구 문화는, 모든 문화의 허구성을 탈신비화시키는 탈구조적 문화이며 동시에, 그 전언에 기초하여 희생 제의를 만들어낸 구조적, 신비화 문화이다. 우선, 기독교는 자기의 박해를 정당화시키는 박해자들의 신화를 벗겨내는 텍스트에 의지해 있다. 그 탈신비화의 능력은 기독교의 독창적 능력이다. (71, 72)

그러나 그 탈신비화의 기독교는 또한 신비화의 기독교이기도 하다. 예수의 수난을 제의로 만드는 순간, 기독교는 신화가 되어, 박해자의 대열에 서게 된다. 기독교 서구 문화가 제국주의적 박해 문화일 수 있는 것은 예수 수난을 제의적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성서는 성서를 제의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비제의적 텍스트이다.(72)

17. 될 뻔한 속죄양 : 욥
예수의 수난을 통해 욥의 불평은 그대로 이해될 수 있게 된다. 그 욥이 불평한다. :

나의 생애는 끝났고
나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실날같은 희망마저 끊기었네
밤은 낮으로 바뀌고
빛이 어둠을 밀어낸다지만,
저승에 집터를 마련하고
어둠 속에 자리를 까는 일밖에
나 무엇을 바라겠는가? (욥기 [17: 11~13])

욥의 그 불평을 이해하게 되면, 폭력의 악순환은 끝난다. 예수가 그때 나타난다. "욥은 박해자의 신에 대한 싸움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예고한다. 자기를 둘러싼 희생양 만들기 현상을 드러낼 때 [....] 그가 폭력과 성스러운 것의 논리를 벗어날 때 그는 그리스도를 예고한다."(지라르) 욥은 옛사람들이 꾸준히 걸어가던 속죄양 만들기, 집단 살인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 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탄식은 오늘에도 여기저기서, 특히 전체주의적 성향의 모든 나라에서 울려나온다. (74, 75)

3-1. 그리고 '지라르 비판'과 '지라르를 넘어서서'라는 장으로 분류된 부분들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들이다. 특히 지라르 비판과 관련해서 가장 흥미로운 장은 위에서 비교적 상세히 인용한 "13.근본적 인류학의 기본구조"라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김현은 우상파괴자들(니체, 프로이트,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지라르를 분석한다. 창건적 폭력과 속죄양과 금기의 효용에 대해 설파하는 지라르의 입장에서 그 위계와 차이를 무화시키며 모든 욕망들의 금기를 파괴하는 회의의 대가들(니,프,마)은 "금기가 없어지면, 사회 건설적 폭력이 그 긍정적인 힘을 읽고 부정적으로 작용"(62)하도록 만드는 위험한 사상가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라르 이론이 가질 수 있는 위험(정치적 보수주의)을 비판하는 부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특히 '14. 지라르 비판 2'에서 앙리 메쇼니크를 빌려와 지라르 이론이 가질 수 있는 파시스트적 사유 양태를 비판하는 부분은 음미할만 하다. 이 비판은 지라르의 종교인류학이 정치적인 욕망의 위장된 체계(비합법적인 폭력의 기만 요소)로 기능할 수 있는 그 가능성에 대한 비판이면서, 지라르의 엄숙주의와 보수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인용하면 이렇다.

"파시즘에서와 마찬가지로 지라르에게 있어서도, 질서는 폭력, 단순주의, 사회 질서 합법화, 반-비판에 결부되어 있다. 이 사유에 대한 증오는 역사적으로 카톨릭 신화에서 지상에서의 행복에 대한 반대 의견을 이끌어내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이다. 기원숭배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멸시를 품고 있다. 신의 편에 서기 대문에 이 사유는 개인에게 적대적이며 그 누구든 멸시한다."(메쇼니크) 그의 사유 양태는 파시스트적이기 때문에, "그의 담론은 과학의 담론이 아니라, 신화의 담론이다. 신화의 담론이란 의미를 전체성, 통일성, 진리와 동일시하며, 그것으로 자기의 의미, 유일한 의미를 만드는 담론이다. 그외의 것은 혼돈일 따름이다"(메쇼니크) 모든 것을 진실한 하나로 귀착시키는 "그의 담론은 [...] 모든 것을 하나로 귀착시키기 때문에 그의 담론은 필연적으로 전체주의적이다. [....] 그의 담론은 합리적 이론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질서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이다"(메쇼니크) (63)

4. 김현은 내 사유의 전범들 가운데 하나다. 김현의 책들을 읽으면서 내 사유가 언어로 풀려지는 그 주형의 윤곽들을 만들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김현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불만스러운, 동시에 가장 흥미로운 책들 가운데 하나가 김현 전집 10권에 수록된 [폭력의 구조 혹은 르네 지라르]와 [시칠리아의 암소 : 미셸 푸코 연구]다. 이 비평서들은 너무 분절적이고, 파편적인 서술체계를 취하고 있어서, 물론 그렇게 파편화된 사유의 조각들을 통해 유연하고 입체적으로 지라르와 푸코를 다시 종합하려는 그 새로운 시도야 인정한다고 해도, 지라르와 푸코의 사유체계를 자신의 관점으로 최소한이나마 소화하지 못한 독자들(나같은 독자들..;;;)에게는 매우 힘든 독서를 요구한다. 개인적으론 푸코에 대해서 보다 지라르에 대해서 특히 더 그렇다. 그건 개인적인 체험치가 푸코 쪽이 훨씬 더 크기 때문인데, 아이러니하게 푸코를 이야기하는 김현보다 지라르를 이야기하는 김현이 좀더 명료하고, 좀더 평이하게 느껴지긴 한다.

지라르를 통해 "1980년초 폭력의 의미"를 숙고하는 김현의 고민은 좀더 명료한 언어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좀더 현실과 부딪히는 치열함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불문학자로서의 학구적 성찰에 머물고 있는 느낌이 짙다. 그 사정을 미뤄 짐작할 수는 있지만, 이 책이 출간된 해의 상징성(1987년)을 고려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지라르를 통해 이야기되어야 하는 건  80년 5월 광주인데, 그 광주는 그림자로만 머물러 있다.

5. 1980년 5월 광주에서 "폭도"로 불린 사람들은 마치 지라르의 예수처럼 자신들의 무죄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희생양들이다. 혹은 욥처럼 "속죄양 만들기, 집단 살인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 한" 의미있는, 지워져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다만 그 희생은 사회 건설적인 폭력, 혹은 창건적인 폭력의 결과는 전혀 아니다. 그 희생들은 비합법적 폭력에 의해 일방적으로 유린된 야만성의 상징들일 뿐이었다. 그 비합법적 폭력은 당시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화적인 담론 기제들에 의해 지워지고, 위장되며,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희미해져 간다. 점점 더 욕망과 죽음이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서로 투쟁하며, 마치 그 둘이 한 몸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라는 걸 모른척 한다.

다시 돌아온 5.18에 김현의 '폭력의 구조'를 우연히도 다시 읽는다. 예수라는 희생양이 그 폭력의 기만성을 폭로하는 것처럼, 80년 5월의 광주는 아직도 이 땅에서 벌어지는 야만적인 폭력 기제들의 추악함을, 욕망과 모방의 내재된 폭력성이 가해자들의 질서 위에서 위장되어 가는 그 야만성의 기제들을 폭로한다. 이제 합법으로 위장된 폭력의 구조는 죽음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것들로 만들어 버린다. 그 구조 속에서 우리들은 항상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이며, 그 모든 폭력의 구조적 얼개들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그 위장과 기만의 동력, 우리 시대의 신화는 배타적이며 경쟁적인 욕망과 그 유혹에 근거하고 있으며, 그 욕망들과 결합한 무수히 많은 매개들, 우리들의 사랑스런 미디어들은 날마다 새로운 욕망의 변주를 들려준다. 우리는 기꺼이 거기에 뛰어들어 삶을 죽음과 맞바꾼다. 이제 우리 시대의 폭력은 보이지 않는 구조다. 우리들은 그 보이지 않는 구조 속에서 매일 매일 투명한 죽음들을 만들어낸다.


* 관련
조선일보, 80년 5월


* 발아점
"2시간19분 짜리 성서" (inthegroove)


* 확장점
5.18 상념 (비아메디아, 2009. 5. 22) 
이 글에 남겨진 주낙현 신부의 논평을 정리한 글.
인식과 고민의 깊이를 느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런 졸문에 너무도 과분한 논평이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막장TV 비난하는 거룩한 기사에 붙어 있는 뽀샤샤한 앵벌이의 시선들.
막장이라는 텍스트보다 막장을 둘러싼 컨텍스트가 중요하다.

[저질사회 부추기는 TV] [1] 부모 때리고 처제와 사귀고… TV, 가정을 파괴한다 (조선닷컴)
* 최승현 기자 vaidale@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송혜진 기자 enavel@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입력 : 2009.05.18 01:26 / 수정 : 2009.05.18 13:2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5/18/2009051800078.html
(일독 절대 비추)

1. 대한민국의 막장화는 시대적인 대세다. 나는 이게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한 건 이거다. 대한민국의 막장화에 가장 혁혁한 공이 있는,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는 거룩하신 해당일보사에서 막장 TV를 비난하는 기사를 목도하는 건 그 자체로 코미디라는 거다. 문득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이 정말 막장스럽다.

2. 도덕적인 계몽이 검열적인 사고, 위계적 권위의 사고로 가능할 수 있다는 건 망상이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아무리 박통과 전통시절의 검열적 행태를 강화해도 사회가 이미 막장인 바에야 당대의 사회를, 그 욕망을 반영하는 TV가 막장화되는 걸 멈출 수는 없다.

3. 거룩한 거 좋아하는, 스스로를 보수라고 착각하는, 보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기득권 기성언론사들은 자신들이 무슨 대단한 도덕적 기반 위에 선 것처럼 사회의 막장화를 비난한다. 막장은 어디에서 오는가? 막장은 어떻게 오는가? 막장은 무엇보다 정치적인 욕망이 생물학적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순간 온다. 그게 제어된 역사는 여기에서도 없었고, 거기에서도 없었다. 정치적인 욕망, 그 권력이 욕망의 포로로 전락하면, 아니 그 권력이 생물학적 욕망을 배타적인 이중성의 기만적 위계 속에 가두면, 그 사회는 필연적으로 막장화의 길을 걷는다. 여기에서의 막장은 '도덕적인 관습, 도덕적인 전통의 파괴' 정도로 이해하자.

4. 두 가지 막장이 있다. 해방적인 속성을 갖는 막장과 해방의 속성을 은폐하는 막장이 있다. 막장이라고 다 같은 막장은 아니다. 새로운 도덕성에 대한 충격과 자극이 되는 막장과 그저 거룩한 해당일보사가 비난하는 '시청률 지상주의'에 빠진 막장은 구별해야 마땅하다. 아, 또 하나의 막장, 막장을 비난하는 막장. ㅎㅎ.

5. 막장은 시스템이고, 메카니즘이다. 막장 TV는 가장 강력한 막장시스템의 동력들 가운데 하나이긴 하다. 그런데 실상 TV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사회가 막장인걸 뭐. TV를 희생양 세우려는 거룩한 움직임은 늘 더 야만스러울 뿐이었다. 장자연은 거룩함으로 위장된 막장 사회의 야만적인 메카니즘에 의해 희생당했고, 그런 가운데 우리들은 항상 가해자이면서 희생자다. 막장보다 더 막장스러운건 이런거다. 개인적으론 막장 아닌척 하면서 막장을 무슨 대단한 도덕적 권위의 제스처럼 비난하는 고결한 자들의 더러운 입, 정말 놀고있다, 그건 최고의 막장이라고 할 수 있다.

6. 자기성찰 눈꼽만큼도 없는 정경언 복합체는 사회 자체를 구조화된 막장으로 만들어버리고, 그 욕망의 향기에 이끌린 수동적인 모방자들인 욕망사회의 신민들은 변주된 욕망의 피사물들을 만들어낸다(가령 광고와 TV).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막장의 욕망들을 거룩한 해당일보사와 같은 순결하기 그지 없는 주둥아리들이 성스럽게 비난하는 가운데, 그 막장과 비난 사이에 알록달록 다시 광고와 욕망의 피상적 이미지들, 레걸들의 뽀샤시한 미소와 "거리 가득 메운 비키니걸" 혹은 "'역시 김혜수' 파격노출 섹시 화보 '휘둥그레'"같은 코믹하다기 보다는 역겨운 자기 기만과 자기 고백의 우스꽝스러운 막장 본색이,  앵벌이하는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눈동자처럼, 나를 당신을 유혹한다. 가히 막장의 전성시대라고 할 만하다.


* 관련
음란한 것들
5.18, 폭력의 구조, 그리고 투명한 죽음




블로그래픽 제19차 공개회의입니다. 회의는 대외비로 할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공개를 원칙으로 합니다(2009년 1월 1일 부터.) 블로거라면(독자도 물론이구요) 누구나 회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1주 1회 원칙. 일요일 혹은 월요일을 공개 회의안 작성일로 정할까 합니다.

* 지난 주 글

1. 3분링크[No.7] 5월 첫째 주 (2009.5.4~5.10)  : 소개된 글은 다음과 같습니다.

36. 다시금, 대학과 학생의 역할을 (뻥구라닷컴)
http://blog.jinbo.net/hi/?pid=1156

37. 트위터와 다른 인터넷 서비스와의 차이점 (써머즈)
http://blog.summerz.pe.kr/1417
 
38. 백투더소스 캠페인: 출처를 중시하는 습관 (capcold)
http://capcold.net/blog/3479

39. 산하의 썸데이 서울 - 미안하다 연아야 ㅠㅠ
http://nasanha.egloos.com/9668099

40. 백투더소스 캠페인 단상 (Crete)
http://crete.pe.kr/12728#2

2. 동서남북 by nooegoch (2009년 05월 16일)
: 진보/보수에 대한 누에님의 관점을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요, 음미하는 맛을 느낄 수 있는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 이번주 회의 ★

1. 컨퍼런스 준비를 위한 스카이프 회의 (펄 : 회의안 발제)
이번 주에 가장 중요한 의제는 컨퍼런스 기획 및 준비를 위한 온라인 회의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로 컨퍼런스 준비와 관련한 일정을 결정하는 것이 주된 회의 의제가 되리라 예상하는데요. 이와 더불어 ㄱ. 누에님게서 제안하신 포럼 공개안 ㄴ. 백투더소스와의 제휴 방안 ㄷ. 책임 카테고리 ㄹ. 새로운 테마 설치 문제 ㅁ. 동인들의 참여 활성화 반안들이 더불어 다뤄지길 바랍니다.

포럼내 관련대화
http://blographic.net/forum/topic.php?id=173 (펄. 회의 발제안) : 동인들께선 반드시 일독해주시길 !!
http://blographic.net/forum/topic.php?id=168 (기존)

기존 오프라인 회의에서 강세였던 ㄱ. 바캠프안ㄴ. 온라인 강화안(강정수 보충의견)간의 조율이 이번 온라인 회의를 통해 가시적인 진전을 볼 수 있기를 강력하게 기대합니다. 더불어 캡콜드님께서 일단은 '게스트 혹은 옵저버' 자걱으로 회의에 참석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요. 제가 캡콜드님께 문의토록 하겠습니다.

2. 포럼공개안 (누에) (1주차)
아직 제안이 정식으로 포럼에 발의된 상태는 아닙니다. 이번주에 이 포럼공개안도 정식으로 발의되어 좀더 실체적인 논의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아무래도 누에님께서 발의해주시면 좋겠는데요. ^ ^
- 포럼내 관련대화 : http://blographic.net/forum/topic.php?id=162
 
3. 백투더소스 캠페인과 제휴 (2주차)
이 사안도 너무 진전이 없어서 캡콜드께 내심 죄송한 마음마저 드는데요. 좀더 적극적인 대화가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이 사안은 동인들의 추정적 승낙을 예상할 수 있을만큼 좋은 제안이라서 어서 단계적인 제휴 방법을 결정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 백투더소스 홈페이지 : http://backtothesource.info/
- 포럼내 관련대화 : http://blographic.net/forum/topic.php?id=169

4. 이미지 아카이브 캠페인 (민노씨) (1주차)
딱히 급한 이슈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위 선결문제들이 해결되면 이 안에 대해서도 논의가 진전되기를 희망합니다.
- 짤방캠페인 : http://minoci.net/846
- 포럼내 관련대화 : http://blographic.net/forum/topic.php?id=167

5. 새로운 테마와 카테고리 (계속)
:
동인들께선 어서 참여여부를 결정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테마 교체 작업'과 '카테고리 재조정 작업'이 동시에 마무리되기를 희망합니다.

[책임 연재 분야]
1. Dear I(나에게) : 누에
2. 문학 : 비틀
3. 미디어(저널리즘) : 펄
4. 블로그서비스 : 민노씨

[공통연재 분야]
A. 3분링크
B. 사각사색 : http://blographic.net/forum/topic.php?id=151


★ 미지근한 이야기 ★

more..


* 블로그래픽 홧팅!
http://blographic.net 

* 의견 주세용! ^ ^



실타래의 촛불 : 아주 짧게  
http://minoci.net/849

위 글에 이런 반가운 댓글이 달렸다. : )

Jin_a 2009/05/15 18:30
안녕하세요~ 민노씨:> 촛불을 처음올 제작했던 Jin_a입니다.
지인분이 한번 읽어보라고 하시길래~ 얼른 달려와서 읽어보았답니다:>
아!! 맞아요.. 예전 촛불은 실타래 페이지로 바로 이동을하면 그 곳이 촛불을 받는 페이지였기 때문에 촛불을 눌렀을 때 실타래 페이지로 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지금은.. 저희 서비스 페이지로 연결된다는 굉장히 기본적인 생각을! 저희가 하지 못하였군요!!! ㅠ
짱구를 잘 굴려서~ 이제 촛불을 눌러도 저희 서비스 페이지로 오지 않도록 조취를 취하겠습니다;
가끔씩 이 블로그도 들리는데..저희 서비스 ㅠㅠ 뭐 볼 것은 없지만..대학생들이 짱구 굴리면서 열심히 하는 서비스거든요 ㅠ; 이왕.. 봐주신거라면 조금만 예쁘게 봐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ㅠ
그리고, 촛불 페이지는~ 곧 조취를 취하고 다시 방문드려서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베리_very 2009/05/15 18:38
안녕하세요 민노씨 :D 실타래의 베리입니다
저희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부분을 지적해 주셨네요
내부 회의 후 수정 방안을 모색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지적 감사드립니다

0. 우선 신속하고, 적극적인 반응이 반갑다. 오히려 내가 고마울 지경. 실타래가 (Jin-a의 익살스런 표현을 그대로 빌자면) "대학생들이 짱구 굴리면서 열심히 하는 서비스"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 ^ 엄청 부족하겠지만 나름으로 개선안을 제안하자면 이런 것들.

1. 주된 타겟 링크의 실효성 확보 : ㄱ. 이용자 선택권 배려 (혹은) ㄴ. 유익한 웹페이지 자체내 설정
내가 바란 것은 진아(Jin-a)의 답글처럼 "촛불을 눌러도 저희 서비스 페이지로 오지 않도록 조취"하는, 즉 실타래(http://sealtale.com)에 대한 접근성을 제한해줄 것을 원한 것이 아니다. 촛불 딱지 하단에 imaged by sealtale 혹은 disigned by sealtale 등의 한줄 홍보용(?) 링크는 얼마든지 상식적으로 용인될 수 있으리라 본다. 다만 ㄱ. 이용자가 스스로 자신이 선호하는 타켓링크를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거나, ㄴ. 혹은 실타래 측에서 딱지와 연결되었을 때 가장 유용할만한 웹페이지를 주된 타켓링크로 선정하거나, 이 둘 중 하나는 제공되었어야 하지 않나 싶은 아쉬움을 전한 것일 뿐이다. 물론 나는 전자(ㄱ.)을 선호하지만, 후자(ㄴ.)도 나름으로는 괜찮은 것 같다(이용자들의 귀차니즘을 고려하면).

가령 촛불 딱지 외 가장 널리 보급된 것으로 보이는 '승리의 MBC' 같은 딱지를 예로 들자.
이 딱지를 MBC노조사이트(http://mbcunion.or.kr/)로 링크 설정하면 실타래로 직접 연결시켜주는 것보다는 훨씬 더 독자의 입자에서는 유익할 것 같다는 거다. 좀더 기대한다면, 좀더 '똑똑한' 링크들을 자동으로 시의성에 따라 연동할 수 있는 시스템(가령 메타와 연계한다던가... 뭐 그런)을 마련해도 재밌을 것 같다. 물론 실현하기는 꽤 어렵겠지만. 혹은 실타래 자체 내에서 유익한 사이트(웹페이지)들을 각 딱지별로 선정해보거나, 혹은 이용자들에게 그 선정을 부탁해보는 참여형 이벤트를 열어보는 건 어떤가? 뭐 이런 저런 잡생각이 떠오른다.

2. 수익모델과 관련
딱지 하나에 100원 200원 정도로 구입할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문득 든다. 다만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한데 그 전제가 좀 까다롭긴 하다. 실은 블로그계에서 이런 소액결제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하는 영역은 '자발적인 테마(스킨) 제작자'의 영역, 그리고 '플러그인' 영역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소액결제 시스템이 마련되면 좀더 수준 높은 테마와 플러그인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ㄱ. 소액결제 시스템 : 100원 200원을 쉽게 지불 가능하게 하는 소액결제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하는데, 이게 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고. 이건 언젠가 써머즈와 대화를 나누면서 꽤나 아쉬워했던 부분인데... (써머즈의 글)
ㄴ. 외부 블로거들의 참여 공간 : 실타래 자체의 디자인만 제작하는게 아니라 외부 디자이너들(블로거들)의 참여를 받아 그 수익금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고.
ㄷ. 공익목적의 수익금 환원 : 수익금의 일정부분은 공익적인 목적(해당 딱지의 제작 취지에 맞는)에 사용할 수 있다면 좋겠다.

3. 웬 로그인?
이게 왜 필요한 건지 잘 모르겠다....;;; 굳이 로그인을 해야 할 필요(정통망법이나 저작권법 등의 규정 때문인건가?)가 없다면 로그인 절차는 없는 편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왠지 회원숫자가 중요한 상업사이트 냄새가 강하게 느껴져서, 그게 부정적인 선입견으로 작용하는 것 같다. 다만 로그인을 해야 하는 특별한 필요가 있다면 그 취지를 설명해주고 로그인을 유도하는 것은 별론으로...

* 관련 추천
써머즈의 '소액결제'에 관한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