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연아 vs. 멍대성

2009/06/05 00:29
1. 멍연아
언젠가 한복을 입고 찍은 김연아의 멍한 표정를 모티브 삼은 패러디 이미지가 화제란다. 트위터 쓰는 김연아가 자신의 트위터 배경으로 사용했다고 하더라. 맘에 들었나보다. 느무느무 귀엽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게 포털 실시간 인기검색어에서 기어코 짱드셔야 하는 '소식'인지, 포털이라는 어쩌면 공공재적 성격을 갖는 '정보 광장'에서 이토록 많은 주목도를 가져야 하는 의미인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나도 엄숙한 거 욜라 싫어한다. 그래도 이건 너무 지나치게, 너무 끝간데 없이 몰입적이고, 끝간데 없이 가볍다.

정말 제발 부디 포털의 '실시간 인기검색어'류의 뉴스 유통방식은 이제 그만 사라지길 바란다. 물론 사라질리 없다. 그리고 이런 '주목의 편향'('수퍼스타의 김밥 옆구리를 보우하사'류의 뉘우스..)이 우리시대에 지배적으로 유통되는 의미들의 가장 중요한 일부라는 것도 넉넉하게 인정한다. 그래서 연아양이 밉다는 이야기 아니고, 연아양 좋아라하는 많은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상하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나도 연아양 보면 아주 조금은 므훗하다.

다만 인터넷 찌라시들에게는 한마디 하고 싶다. 연아 베껴먹기도 좀 정도껏 하자. 우리시대의 저널리즘이라고 할만한 인터넷 찌라시즘에 의해 '멍연아' 등은 적극적으로 발굴되고, 확대재생산된다. 이들은 기어코 김연아의 김밥 옆구리 소식들을 발굴해서 포털을 향해 쏘아댄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멍연아와 관련해서는 그 귀엽고 창조적인 일러스트 이미지에 기어코 자사의 로고를 박아 넣는다. asincho의 지적처럼 정말 "상식이 없는 언론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서울신문은 김연아의 근황을 전하면서 트위터 이야기를 하는데 "우리나라의 싸이월드와 같은 개인 홈페이지"라고 설명한다. 김연아의 근황이라는게 "아놔, 멍연아 왜케ㅋㅋㅋㅋ"라는데 기사수준이 이래서야...// 그 기사는 http://durl.kr/jfh 인데요.더 가관인 것은 김연아 배경화면을 캡쳐해왔으면서 거기에 떡하니 서울신문 로고를 박아놨다. 퍼온 사진이 자기거라는거겠지요. 상식이 없는 언론사.
- asincho, http://twitter.com/asincho/status/2028736389
http://twitter.com/asincho/status/2028752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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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아, 이 이미지가 니들이 만든거니?
왜 니들이 저작권자인양 로고를 박고 G~ral이삼? ㅡ.ㅡ; (출처 링크)


2. 멍멍 송대성('멍연아'에 힘입어 '멍대성'도 좀더 인구에 회자되길 바라는 바다)
멍연아는 찌라시즘의 트래픽 강박증이 만들어낸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식이긴 하지만, 그래도 연아양의 귀여운 모습을 보는 일말의 보람이나마 남긴다. 그런데 우연히도 멍연아의 소식을 접한 뒤에 "나는 멍멍이"라고 했다는 기상천외한 소식을 펄의 트위터에서 접한다.
세종연구소장 "나는 멍멍이" http://bit.ly/dwraZ 기사 맨 마지막 부분 실소
- 펄, http://twitter.com/pariscom/status/2026348515
좀더 정확히 기사 내용을 옮기자면 한나라당 의원연찬회에서 강사로 나온 세종연구소장 송대성이 "나는 멍멍이"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그 발언이 나온 문맥은 다음과 같다. 치매를 의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저런 치매 의심 노인을 강사로 초빙한 한나라당도 참 한심하기 짝이 없다.

송 소장은 또 “짹짹거리는 정권이 들어오면 짹짹거리고, 멍멍거리는 정권이 들어오면 멍멍거리는 강사들이 있으나 저는 한결 같이 멍멍거리는 사람”이라며 자신이 소신있는 인사임을 강조해 실소를 자아냈다.
- 쿠키뉴스 한장희 고세욱, “추모한 사람이 또 하고… 盧 추모객 인원 과대포장” 발언 논란 (2009.06.04)
기사를 읽을 당시엔 '찍찍거리는 정권이 들어오면 찍찍거리고...'라고 잠시 착각하기도 했으나, 지금 다시 읽어보니 '짹짹'이다. ㅡ.ㅡ; 아무튼 자신을 "멍멍거리는" "소신 있는 사람"이라고 밝힌 송대성은 같은 강연에서 "촛불시위는 北지령"이라는 취지로도 이야기했다고 한다. 
"북한이 오산으로 죽창 들고 가라고 하면 남쪽 앵무새들은 가고, 촛불 들고 가라 하면 간다"
- 노컷뉴스 김중호, 與연찬회 강사 "盧 조문 조직적 동원…촛불시위는 北지령" (2009-06-04)
여기에 자세히 논평하고 싶은 생각 별로 없다. 이건 뭐 최소한의 뇌세포를 사용하는게 아까울 지경이다. 조금은 오래된 영화 가운데 '개 같은 내 인생'이라는 걸작이 있다. "소신있게" "멍멍거리는 사람"이라는 대한민국 지도층인사 송대성을 접하면서, 그런 '소신있는' 인사를 연사로 초대한 한나라당의 안목을 보면서, 정말 '개 같은 대한민국'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늘나라에 있을 노무현이 이 처참한 광경을 보면, 한마디 하지 않았을까 싶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 관련 추천
학자의 견해 (뻥구라닷컴, 행인. 2009.6.5)




* 스포일러 안내 : 스포일러 (전혀, 민감한 독자에게도, 아마도 전혀) 없습니다.
* 트위터에 썼던 단상들을 시간의 역순으로 옮기고 가급적 최소한으로 추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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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를 연기한다는 건 홍보문구일 뿐이다.
김혜자는 그저 '엄마'를 연기한다. 그래서 더 설득력있는 연기를 펼친다.


7. 이병우의 음악은 정말 훌륭하다. '집시의 시간'이나 '굿바이 레닌'에서처럼 황홀하게 빠져들만큼 좋다는 느낌은 아니지만, 영화의 테마와 정말 잘 어울린다. 이병우의 음악은 김혜자가 자신의 이율배반, 자신의 모순된 진실을 담아 추는 그 춤 만큼 깊은 울림을 준다.
    
6. 마더에서 가장 슬픈 대목은 우리들의 '비루한' 행복이 유지되기 위해선 우리보다 더 비루한 누군가가 버려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행복이 누군가를 짓밟는 것이라면 그 행복은 과연 행복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인가? 
    
5. 마더는 관습적인 이야기의 구조를 영화가 얼마나 비틀수 있고, 또 그런 작위적이고, 계산된 비틀기가 어디까지 허용되며, 궁극적으론 영화의 테마와 어울리면서 영화적 성취를 이뤄낼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영화다. 시나리오는 매우 뛰어나다. 독창성의 요소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상투성을 가장 효과가 뛰어난 극적 요소로 배치함으로써 이야기 자체의 충격을 증폭시킨다. 마더의 시나리오는 영화가 뭔지 아는 시나리오다.
    
4. 마더는 극단적인 비극의 정서를 배경으로 한다. 서로를 잡아먹는 진실이 밝혀지면, 빛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기만이 열리고, 위선이 열린다. 아, 슬프도다... 그리고 우리도 누군가를 잡아먹는다.
    
3. 그 김혜자의 진실은 여러가지 다른 층위의 진실들로 엉킨다. 싸구려 경찰의 진실, 알 수 없는 범죄자의 진실, 목격자의 진실, 그리고 피해자의 진실은 서로가 서로의 진실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누구도 구원받지 못한다.
    
2. 마더는 '진실'을 김혜자를 통해 알려주면서, 최소한 그 '진실에 대한 정보'를 흘리면서 시작한다. 그 진실은 물론 이제 꼬이는 일만 남았다. 종종 인용하는 황지우의 경구, "범죄자는 거짓을 위해 진실을 진술한다. 그 때의 진실이 중요하다."
    
1. 마더는 [살인의 추억]의 소품 버전 같다. '살인의 추억'에서 전봇대에 오른 광호가 외친다, "뜨겁다, 뜨겁다." 진실은 뜨겁다. 그 뜨거운 진실은 하지만 얼마나 싸늘하고, 차가운 것인가. 그 뜨거운 진실이 차갑게 식어버리면, 이제 삶은 죽음보다 더 단단한 기만이 된다.

0. [마더]에서의 죽음의 구조는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우리사회를 둘러싼 죽음의 구조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린다. 우리들은 누군가를 죽이는데 적극적으로, 혹은 미필적으로, 최소한 의식하지 못한 채로 기여하고 있다. 우리는 그 죽음을 둘러싼 진실과 거짓의 구렁텅이에 빠져, 그렇게 우리를 기만하면서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죽음보다 더 독한 마약이 필요하다"(정현종의 시구에서 일부 빌려옴)


추.
최소한 영화의 주제가 성취된 수준, 영화라는 예술형식이 예술일 수 있는 그 작품의 매혹이라는 직관의 차원으로만 본다면 [마더]는 [박쥐]보다는 좀더 나아가고 있다. 칸의 선택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그건 아마도 지금/여기/대한민국이라는 일탈된, 하지만 거절할 수 없는 욕망과 그 욕망을 붙잡기 위해서 생겨나는 죄의식의 구조를 그네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1. 청담동 놀자 클럽 사진 유출 해프닝
이건 그냥 해프닝이다. 언제든 벌어졌고, 또 앞으로도 벌어질 해프닝이다. 언론에서, 특히 트래픽에 목매는 언론들에선 아주 고상하게 지랄들 한다. 언론에서 지랄하는 방식은 크게 둘이다. ㄱ. 네티즌 팔아 먹으면서 이 사진 유출에 대해 네티즌들이 뭐라 비판한다고 고상떨기 ㄴ. 사진 유출되서 사생활 침해, 인격권 침해 문제된다고 더욱 거룩하게 고상떨기. 둘다 역겨운데, 개인적으론 후자 쪽(ㄴ.)이 좀더 역겹다.   

이 글도 그런 미끼심리 유도에 일조하는 글이라는 거 인정하면서, 이런 류 소재에 대한 글은 쓰는거 자체가 '미끼질+사생활침해'다. 그러니까 이런 글을 쓰는 불우한 블로거는 내가 마지막이길 바란다. 정말 궁금하면 찾아서 봐라. 하지만 굳이 찾아서 확인할 사진도 아니다. 물론 나는 한겨레 미끼에 걸려 들어(인터넷한겨레에서도 연합뉴스 인용하고 있는데), 내 속물적인 호기심을 참지 못해 한 20분을 검색해가며 이런 저런 글들과 사진들 확인해보긴 했다. 아마도 대부분은 그런 속물적인 호기심이 발동될테고, 그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정말 별 사진 아니고, 별 대단한 지랄도 아니다.

그냥 돈 많은 젊은 애들이 클럽에서 놀고 마시고 비비고 (입술) 빨고 하는 사진들이다. 그런데 돈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젊은 애들, 특히 청춘남녀들은 욕구분출이야 나름으로 특권(?)이고, 여기엔 사회의식이고 나발이고가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하는 편이다. 물론 늙어서도 그렇게 아주 여럿이서 빨고 비비고 술취하면 추태긴 하지. 그래서 나이들면 룸살롱으로 삼삼오오 숨어드는건가? 고급 클럽이든 고급 룸살롱이든 흥청망청 돈지랄이 무슨 대단한 낭만이나 신분에 대한 확인이라고 착각하는 아해(혹은 꼰대들) 적극적으로 두둔하고 싶은 생각 전혀 없지만, 특히나 시기적으로 좀 짜증이 생기기도 하지만, 무슨 조선닷컴에서처럼 지들만 고결하고, 거룩한 양 힐난하고 싶은 생각도 나는 전혀 없다.

하기는 조선닷컴 쪽에서 설치는 사정을 이해할 수도 있긴 하다. 연예인 불러다가 술접대 시키고, 성접대 시키는 '퇴폐적인' 문화와는 아무런, 눈꼽만큼도 상관없는 사주들이 계신 거룩하고, 고결한 '해당언론사'에서 어련히 거룩하고, 도덕적이며, 금욕적인 기자들을 뽑았을까, 그들의 고결한 눈에 청담동 퇴폐 클럽이 대한민국 절딴낼 '소돔과 고모라'로 보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래서 이런 거룩한 제목을 뽑는다.
'청담동 클럽 사진' 유출…네티즌들 "너무 퇴폐적…충격" (조선닷컴)
참 거룩하고, 또 거룩하다.
할렐루야~!
 
2. 우리들의 광장
그리고 우리는 시청앞 서울광장을 빼았겼다. 이정환은 특히나 '공공재'로서의 민주주의를 강조하며, 크게 안타까워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은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진심어린 독려와 격려에 다름아니다. 참여에 대한 독려, 전폭적으로 공감하고, 전폭적으로 그 안타까움을 함께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광장에 대한 수성/탈환 논의는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논의, 혹은 그 자체로 무슨 대단한 상징성을 갖는, 그래서 이명박이라는 민주주의의 '적'에 대한 앞으로의 싸움에서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노무현이라는 상징의 가치가 광장을 빼앗기고 말고의 상징성으로 좌우된다면, 혹은 그것이 노무현이 죽음으로 만들어낸 상징의 가치를 판단하는 척도라면, 이 싸움은 이미 진 싸움이다. 물론 나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고, 그렇지 않기를 기대한다.

광장 수성론/탈환론이 현실적으로 치열하게 고민되고 있다고 가정해도 거기에 굳이 입장을 개진하자면 반대입장이다. 29일 오전 10시에서 30일 새벽 5시까지 시청광장(과 서울역)에 있었다. 안타까움에 누구보다 공감하지만, 거리에서의 싸움은 이제 끝난게 아닌가라는 성급한 생각마저 든다. 정치권의 전폭적인 지원도 없고, 최소한의 지도부도 없으며, 그렇다고 열혈시민들의 피끓는 전투도 기대하기 어렵고, 또 기대해서도 안된다. 2008년 한달이 넘는 촛불도 흐지부지가 되었는데, 2009년의 촛불이 광장을 장악한다고 해서 별다른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다(그게 의미없다는 건 전혀 아니다). 물론 2008년의 촛불은 그 상징이  사람이 아닌 '미친 쇠고기'였다. 하지만 지금 그 상징은 노무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라는 상징은 매우 불안정한 상징이고, 그 상징을 위해 자기 한몸을 던지겠다는 '자발적인 투사형 시민'들을 원한다는 건 정말 무리다. 그건 무리고, 지금과 같은 욕망과 가치가 뒤범벅인 이율배반적인 의식 구조에서는 실효도 없다.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광장 수성이 이명박 정권이라는 궁극적인 타켓을 설정하는 경우에 그 지속적인 전략 우위를 갖는 방법은 다음과 같은 경우가 있다고 본다. ㄱ. 다른 순결한 피를 부르거나 ㄴ. 정치권(야권총궐기 수준으로)이 정당의 명운을 걸고 합세하거나 ㄷ. 시민단체와 시민들(특히 학생들)이 죽기살기로 떼로 일어나거나... 실은 이 세가지 모두가 동시에 일어나야 그 수성론이 의미를 가질까 말까가 아닐까 개인적으론 예상한다. 그런데 이 세가지 가운데 하나도 성취되기 어렵다. 영결식 당일과 그 다음 날 새벽, 거리를 가득 채웠던 시민들을 나름으로 느껴본 결과는, 물론 그것은 매우 직관적이고, 감상적인 추론에 불과할테지만, ㄱ. ㄴ. ㄷ. 이 모두 불가능이거나, 혹은 매우 가능성 희박하다.  특히 ㄱ.는 있어서는 안되는 비극일 뿐이다. 거기에 여전히 숨죽이고 있는 '반노무현 진영'은 위 ㄱ. ㄴ. ㄷ. 이 어정쩡하게 진행될 경우에는 이걸 '극단적인 좌파의 모험주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반동의 원동력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니 좀더 안정적으로, 좀더 치밀하게 '분노를 장기화'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본다.

3. 느린 혁명, 아주 길게 계속되어야 하는 싸움 
그렇게 분노를 장기화하는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너무 거룩하고, 너무 심각한 방법론으로는 승산이 없다. 청담동의 욕망까지를 적극적인 싸움의 방법론으로 고민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청담동의 밀폐된 밀실의 땀내나는 욕망과 광장의 숨결을 함께 고민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나는 그렇게 판단한다.

사람 감정이란게 오죽이나 간사한가. 그리고 우리국민의 전세계 특허가 '냄비근성' 아닌가. 물론 나는 언젠가 누에가 그림으로 형상화한 바 있지만, 냄비처럼 끓어본 적도 없는 쿨가이들은 제발 좀 그 아가리 닥치라고 말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리고 누에의 패러디처럼 그런 냄비도 역시나 큰 가치와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만, 그 냄비가 언제까지 팔팔 끓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미 북한 핵실험과 권력 승계 연속 콤보쇼로 노무현 쇼크 이후의 폭발적인 추모 정국의 열기는 일단 한풀 꺾였다는 평가도 꽤나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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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 '냄비'
http://blographic.net/entry/1174
나는 냄비(근성)야 말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여기까지 올려놓은 일등공신이라고 생각한다.
끓었던 적도 없던 쿨가이들 보다는 훨씬 낫다.
다만 지금은 냄비보다는 솥단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뿐이다.

노무현에 대해 나는 하나의 질문이 남아 있다고 앞선 관련글들에서 이야기했다. 그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과연 혁명을 불러오는 이름인가라는 질문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론 그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혁명을 불러오는 이름이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혁명은 '거리에서 쇼부'보는 그런 폭력혁명이 아니라, 그 상징의 의미를 들을 거듭 거듭 성찰해서, 노무현이라는 상징을 뛰어넘을 수 있는 만큼 그 상징을 반복해서 성찰하고, 자신의 정치적인 의식고양의 매개로 삼을 때 가능한, 그런 '아주 느린 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노무현은 그 상징의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맹아'에 불과하다. 그 맹아는 물론 향후 대한민국 정치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거대한, 정말 장엄한 상징으로 커나갈 수 있는 그런 씨앗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라도 노무현의 죽음이 뛰어 넘어야 하는 과제, 노무현의 죽음이 극복해야 하는 숙제는 노무현 그 자신이면서, 노무현 체제가 이명박 체제를 불러온 가장 커다란 이유였다는 그 아픈 성찰과 냉정한 노무현에 대한 재평가다. 그런 재평가를 통해서 노무현이라는 상징은 그 의미를, 그 가치를 거세당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서부터 그 상징의 씨앗에 꽃과 가지가, 커다한 나무가 커나갈 수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무현은 무조건 짱이셈! 이런 '전적으로 종교적인 마인드'로는 노무현의 죽음에 정말 삽질하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노무현의 죽음을 살려내되, 정말 오래오래 살려낼 수 있는 고민, 그 지루하고, 거대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너무 성급하게,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자. 대통령이었던 사람도 '주류'에서 밀리니까 쓰러뜨렸던 시스템이고, 그 시스템은 우리가 선거로 만들어준, 적어도 그 외피로서는, '합법적인' 시스템이다.
그런 자기 확인으로부터 이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 발아점
빼앗긴 광장을 생각하며 (이정환, 2009.6.2.)




넌 너무 많은 한국인들에게 피해를 줬다.
너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네놈이 저지를 만행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한국인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대가리마저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참회를 할 수도 반성을 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전혀 슬퍼하지 않겠다.
이c박과 아키히로
어차피 모두 같은 쥐새끼 아니겠는가?
[....]
오래된 생각이다 (06.02 21:29)
- 경향신문 기사에 실린 어떤 댓글 중에서,

via 오늘, 아니 어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앰네스티 일기, 2009.6.3.) via nooe의 트위터

참고. 지나치게 자극적인 일부 표현은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노무현에 대한 아쉬움이 이명박에 대한 증오로 풀릴 수 있을까, 요즘 가장 자주 떠올려보는 생각은 이런거다. 잘 모르겠다. 아쉬움이, 인간적인 연민이, 혹은 그저 이 엿같은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그 서러움이 그저 이명박에 대한 증오로 온전히 풀려나지는 못할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노무현만은 아니고, 무엇보다 이명박이다.  또 우리는 조중동과 검찰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노무현이라는 거대한 상징의 죽음만은 아니고, 용산에서의 죽음과 택배 노동자 박종태의 죽음을 더불어 기억해야 한다. 그 죽음들은 모두 이 사회의 죄를 대속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죽음을 기억해야 하는 건 그게 단순히 당위라거나,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어서가 아니다. 그건 무엇보다 그저 간절한 호소이며, 절규다. 우리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더 이상 죽이지 마라"는 그 간절한 호소, "더 이상 죽어선 안된다"는 그 간절한 외침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 "죽음을 기억하라"는 라틴어 경구가 있다('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우리를 둘러싼 죽음과 그 의미를 기억해야만 우리 삶을 가두는 죽음, 이제는 더이상 보이지도 않는 '투명한 죽음'이 함께 더불어 보살피는 생명으로 풀려날 수 있다. 이것만은 자명하다.


* 발아점
오늘, 아니 어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앰네스티 일기, 2009.6.3.)
nooe의 트위터 : 여기에서 위 앰네스티일기 글을 소개받았다.




트위터 하루 체험기

2009/06/01 08:59
0. 어제 드디어(?) 트위터를 만들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쓰는 트위터 (HOME의 모습)
: http://twitter.com/minoci


1. 생동감 넘치고, 소셜하다.
소셜하다는 느낌이 팍팍 든다. 정보와 정서가 서로 교차하고, 부딪히는 느낌이 미투데이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펄이나 써머즈의 지적처럼 끈끈한 한국적 정이(라기 보다는 외교적인 관계의 부담감이랄까) 강조된다기 보다는 그냥 쿨한 느낌이 강조된다는 느낌이 강하다. 계속 사용한다는 가정에서 따라가기(following)은 많아도 100명 선으로 조절할 생각이다.  

1-1. 콘텐츠 접근성 : 정적이지만, 활발하다.
미투데이와 비교하면 정보 접근성 및 정보의 교차가능성이 트위터가 훨씬 높은 것 같다. 이건 디자인 체계에서 양자가 갖는 차이로 비롯되는 문제 같다. 미투는 다소 답답/복잡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트위터는 서로 교차하게끔, 그러면서도 독립성을 유지하게끔하는 UI가 꽤나 효율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

1-2. 그러니까 가령, 미투의 '친구들은' 같은 꼭지는 좀 답답하고, 비효율적이라고 느낀다.

미투데이도 ㄱ. 각 블로그 단위의 메인 ㄴ. 각 블로그 단위의 자기 공간 ㄷ. 전체 서비스 단위의 메인의 삼분화된 체계를 가져가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아래 관련 추천글들 속에서 나오는 의견들처럼 미투는 미투만의 한국적인 특성들을 살려가는 것도 방법이겠다는 생각이 들고... ㅡ.ㅡ;; 

2. 가입 해프닝.
어처구니 없이 이미 로긴되어 있는데 로긴하느라고 한 2,30분을 삽질했다. ㅡ.ㅡ;; 그게 이미 로긴되어 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minoci를 minoici로 잘못 타자해서 생긴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은데, 새삼 왜  이렇게 멍청해.. 이런 생각이 들었다.

3. 댓글창은 없다.
SNS에서 댓글이 없다는 건 우리나라 정서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나는 댓글 대신에 핑백을 통해서 답하는 게 훨 맘에 든다. 미투데이와의 가장 큰 변별점이라는 생각이 일단 든다. 미투데이의 댓글은 정서적인 교감을 위해선 효과적이지만, 거기에 신경을 쓰면 시간을 너무 불필요하게 잡아먹는다는 약점이 있다. 그리고 쌍방향성이라는 관점에서 확인도 다소 귀찮고... 미투데이도 '핑백'만 남기면 어떨까 싶은데...;;;

4. 직통 메시지
댓글은 없는 대신에 핑백이 있고, 또 '직통 메시지'가 있더라. 방금 전에 처음으로 사용해봤다.

5. 로딩장애 : (
이상에서 열거한 하루(실은 반나절의 이따금씩) 동안의 체험기에서 가장 짜증나는 일은 로딩장애의 빈번함인데, 특히 가입 해프닝과 겹치면서 계속 이런 식이라면 꾸준하게 사용하기는 힘들겠군.. 뭐 이런 생각이 들더라.

7. (긴) 블로그와의 관계
블로그와 마이크로 블로그로서의 트위터 간 관계가 ㄱ. 상호 보완일지 ㄴ. 상호 영역 잠식(특히 트위터라는 SNS가 블로그를 잠식하는 현상)일지가 나로선 가장 큰 관심사인데, 물론 두 가지 가능성은 항상 유동적일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으론 경향성(ㄱ.으로 향하든, ㄴ.으로 향하든)을 갖고 있으리라 본다.

7-1. 식상한 예상 : 양분화/양극화
소위 열혈블로거에게 양자(본블로그와 트위터류의 '마블') 보완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높겠다. 다만 절대 다수의 블로거들에게는 '바쁜 블로거를 위해 태어났다'는 미투데이처럼 트위터 자체에 시간을 빼앗기는 패턴이 가속화되고, 그래서 본블로그가 있는 유저들이 본블로그를 관리하지 못하는 일이 생겨나지 않을가 싶다.

그러니 부피적으로만 고려하면 소수 블로거에게는 트위터는 정보 습득의 창고이자 사고의 발아점으로 기능하겠지만, 대다수의 블로거들에게는 그 자체로 생산과 소비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기도 하다.

7-2. 나는 어떨까 생각해보면..
전자(ㄱ.)의 가능성이 높기는 하겠지만, ㄴ. 조짐이 보이면 생산보다는 정보를 관찰(following)하는 입장에 치중할까 싶다.


* 관련
미디어토크 64회 중 트위터 부분 (9:53 ~ 23:55)
http://www.soriweb.com/tech/?p=198


* 관련 추천
트위터와 블로그 (BKLove, 2009/04/28)
http://bklove.info/962

그런데, 주변 사용자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트위터 속의 내 공간은 웬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이 '블로그'가 내 집 같다고 하면, '트위터'는 그냥 잠시 괜찮은 모텔에 들어선 기분이다.
(호텔이라고 하기엔 서비스의 문제가 너무 잦아서...)

트위터 사용자 입장에서 본 미투의 개선 포인트 (만박, 4월 28th, 2009.)
http://sumanpark.com/sst3/archives/295

"...7월에 새로운 모습을 선보일 예정..."
: 미투에서 느낀 불편이나 아쉬움의 거의 전부(한 80% 이상)이 언급되고 있는 것 같다. ㅎㅎ. 이를 정리하는 만박의 모습도 꽤 평가하고 싶고.. 그런데 '댓글창'에 대한 부분에서 ㄱ. 댓글찾기 불편 ㄴ. 댓글창 있고/없고는 일장일단 이렇게 정리하는 만박의 답변이 있는데, 뭐랄까, 그 일장일단들 가운데 일단의 부분이 일장의 부분보다 큰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체험치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댓글에서 한국적인 정서를 체험하는 유저들도 여전히 많을 것 같기도 하고...

트위터를 통해 만박에게 전달된 의견들 가운데 허진호의 의견이 개인적으론 가장 공감된다. 특히 1번과 2번(모바일은 아예 신경을 끄고 있는 편이라서...;;;;)
1. 기능이 너무 많고 복잡해요. 2. 커뮤니티가 너무 strong tie 중심이라 그 커뮤니티에 끼지 못한 사람은 소외되요(저 같은 사람) 3. 외부 접근성이 트위터 대비 아직 불편해요(apps, 모바일 모두).
- 허진호, http://twitter.com/hur/statuses/1637578796

미투데이, 트위터와 블로그 (BKLove, 2009/04/29)
http://bklove.info/963

트위터는 약간 개방된 채팅의 느낌이 납니다. 채팅창을 통해서 내 이야기를 전하고, 누구나 쉽게 그 이야기를 따라(follow)읽을 수 있어서 혼자해도 심심하지 않습니다. [....] 미투데이는 채팅에서 조금 더 메신저의 느낌이 묻어나요. 다른 사람의 글을 제한없이 읽을 수 있지만, 친구는 여전히 '수락'을 구해야하고, '수락'이라는 조건은 신청할 때에도 부담을 느끼게끔하죠. (본문 중에서)

트위터와 다른 인터넷 서비스와의 차이점 (써머즈, 2009.5.6.)
http://blog.summerz.pe.kr/1417

서비스에 막 가입하고서도 외롭지 않다 - 아무나 무작정 따라가면 (follow) 된다.
정보량이 점진적으로 확대된다. - 상대방이 나를 따라오면 나도 볼 수 있다.
내 의지로 몰입하는 정도를 조절할 수 있다 - 내가 주체가 된 우리.
핵심 기능만 들어있다 - 그 외 기능은 입맛에 맞춰서 DIY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게 된다 - 구글이 탐낼만 하다 (본문의 목차들 발췌)
: 트위터를 써보고 싶다는 강한 동기를 마련해준 써머즈의 글.

트위터 인기 비결은 '광장'의 감성 때문 (칫솔, 2009/05/31)
http://chitsol.com/873

"트위터는 이용자 스스로 그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광장"
: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트위터의 특성을 우리나라 서비스인 미투데이와 플레이톡과 비교하면서 설명하는 글. 특히 위에 인용한 짧은 문장은 본문와 호응하면서 트위터의 특질을 효과적으로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야 워낙에 체험치가 짧아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