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질한 네티즌을 위한 항변

2007/08/04 00:22
부제 : 권위 붕괴 시스템으로서의 블로그
이 글은 예인님께서 쓰신 글에 보내는 트랙백입니다. 

네티즌은 찌질하다 (예인, 2007/08/03)

0.  
예인님께서 쓰신 위 글은 '네티즌'이라고 불려지는 '일부' 블로거, 네티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네티즌'에 대한 의미규정은 스티브님께서 쓰신 글을 참조하면 좋을 것 같아요. (스티브 한, 그들이 왜 네티즌인가? ) 그 글은 '인터넷 사용자'와 '네티즌'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다소간 어감이 강하지만(^^;), 그 취지에는 공감합니다.

예인님 글로 넘어가서.. 예인님 해당 글 댓글로도 남겼지만, 해석은 해석자의 자율성에 기반한 고유권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해석은 구체적인 맥락(조건) 상황에서만 설득력을 가질 뿐이고, 그 해석을 채택하는 다수에 의해 다수설의 형태로만 권위를 갖는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해석 그 자체의 절대적인 우열이나 위계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다만 그 해석의 (현실적인) 위계, 권위와는 상관없이, 해석으로 이뤄진 그 개별적인 텍스트(포스트)을 '대화의 매개'로 삼아 즐겁게 토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블로그라는 우리시대의 도구는 매우 순발력있게 조력하고 있구요. 그러니, 예인님께서 의도하신 바에 대해서는 다소간 해석상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차이가 오히려 즐거운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호기심 요소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다만 간단히 하나만 언급하고 넘어가죠.
저로선 예인님께서 다소간 의도하신 것으로 느껴지는 '위악' '냉소'의 수사에 대해서는 그것을 그저 개성적인 표현으로서, 수사법으로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겨진 다소간 권위적인 계몽주의의 태도에 대해서는 우려를 갖습니다. 가령, 시민케인의 딥 포커스나 롱 테이크 기법을 이해하고, 그 철학적인 의미를 인식해야 영화비평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물론 전적으로 그런 취지로 쓰신 것은 아닐테지만요. ^ ^; ).

저 역시 때론 몹시 찌질스런 '개티즌'에 불과하지만, 그렇게 부족한 채로 서로 배울 수 있고, 또 조금씩 시민으로서의 비판적인 안목을 학습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일방적으로 타인의 어떤 태도들을, 그 편차와 다양한 해석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일반화시켜 재단하고, 그것을 가르치려는 태도에 대해서는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그것은 비판하려는 대상(의 태도)를 스스로 실천하고, 반복하는 아이러니라고 생각하는 때가 많아요. 그리고 그 비판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도 그다지 효율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각설하고... 예인님 글을 즐거운 대화의 '매개'로 삼아 부족한 의견이나마 끄적일까 합니다.

1. 맥락 : 디워와 아프간, 그리고 좀 오래된 황우석
디워와 아프간, 그리고 '황우석 파동'은, 그 내용의 차원에서는, 모두 다른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는 다른 이슈들입니다. 논점과 쟁점도 다르고, 그 개별 이슈(텍스트)를 둘러싼 맥락(컨텍스트)도 다릅니다.

가령, 디워/황우석 이슈 vs. 아프간 이슈를 보죠. '애국주의' '민족주의'라는 디워와 황우석 공통의 키워드는 아프간 이슈에 대해서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습니다. 적어도 문제되는 현상을 비교하면 그렇습니다. 가정적으로 예시하자면, 디워나 황우석을, 애국주의(민족주의) 정서에 바탕해서 응원하는 어떤 A의 태도는 '당연히' 아프간 이슈에 대해 '우리 국민 살리자'로 표출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 반대 정서를 표출하는 A(들)이 많을 것으로 저는 예상합니다.

그리고 저로서는 각 해당이슈는 매우 복잡한 맥락을 갖고 있는 문제라서, 그 각 이슈들을 하나의 문제틀로 이야기하기가 몹시 어렵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뭉뚱그려서 이야기할 때 추상적인 '인상비평'의 폐해들이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다고 염려합니다. 즉 각 사안 '내용'과 그 내용을 둘러싼 '맥락'이 다른 바에야 이 사안을 함께 동일평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좀 위험한 방식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전하고자 하는 의견과 주장의 효율성 차원에서도 그다지 찬성할 수 있는 방법론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인님께서 쓰신 취지를 살피면, 예인님께서는 다음의 점을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은 (거대) 이슈 소비 패턴입니다.


2. 거대 이슈에 대한 접근 및 소비 태도
'거대 이슈'에 접근하는 이슈 수용자(뉴스 소비자)의 '태도', 이 점을 예인님께서는 지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즉 디워나 아프간, 그리고 황우석 이슈의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기 보다는, 어떤 거대 이슈의 수용과 소비 패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는 제 해석입니다.

예인님께서 우려하시는 바에 대해 일면 공감합니다. 그리고 예인님의 글에 표현된 바, '찌질이'들 많습니다. 성급하게 자신의 성급한 판단과 지식을 과시적으로 발산하려고 하고, 또 타인의 해석을 일방적으로 배척하고, 해석은 그저 해석일 뿐인데, '정답'을 강요하려는 독선적인 태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 태도에 대한 비판이라는 차원에서 위 예인님의 글이 갖는 공적 비판을 인정하고, 거기에 공감합니다 다만 예인님의 비판 역시나 주장의 무게와 근거의 무게, 그리고 주장을 지지하는 논리의 일관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비판할 여지가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간략하게 제 의견을 적자면, 우선 네티즌들의 층위는 그야말로 다양합니다. '네티즌'을 비판한다라고 하면, 그 네티즌의 문제되는 행위 유형을 특정해서 비판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데요. 너무 비유적인 수사들로 감정적인 선동을 강요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가령 황우석 이슈에 대해서는 "황우석 사태에 대한 음모론을 제기하는 위대한 네티즌은 실험실에서 며칠밤을 새고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절망해본 적이 있는가?" 라는 지적을 하셨는데, 황우석씨의 '사기행각'을 비판하기 위해 실험실에서 밤새 절망할 필요 전혀 없습니다. 저 개인적으론 황우석 파동의 가장 큰 교훈으로 생각하는 언론의 기만시스템을 비판하기 위해서 '기자'가 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처럼요.

오히려 저널리즘은 많은 다양한 성향과 지식의 층위를 갖는 '시민'(네티즌, 혹은 국민)이 '상식적으로' 토론할 수 있도록 아리까리하고, 어려운 문제(이슈)들에 대해서는 '보통의 언어'로 풀어서 제시해야 하고, 얼마든지 상식에 바탕해서, 다만 자신의 주관적인 진실에 기반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똑똑하고, 명석하고, 지혜롭고.. 현실적인 표준으로는, 철학자나 교수나 무슨 평론가들만 이야기해야 하는 건 아니고, 어떤 '현상'을 비판할 때 그 현상이 갖는 사회적인 의미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이지, 그 현상 속에 있는 '내용'을 모두 이해하고, 또 그런 정도의 '지적 수준'을 담보해야만 비판이 유효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가령 비유적으로 이야기하면, 서울대 비판하기 위해서는 '서울대 출신'이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에 대한 논의는 이쯤하고요. 이하 앞서 좀더 강조하고 싶었던 '담론생산소비 시스템 변화'라는 관점에서 이에 대해서 좀더 씁니다.


3. 권위적 담론 붕괴 시스템, 그리고 블로그
현재의 담론 생산 및 소비 시스템, 특히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비약적인 발전은 기존 전통적인 담론 생산자들만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기 어려운 '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버마스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커뮤니케이션' 매개들의 비약적인 발전은 '사회진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토대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새로운 '담론 생산 및 소비' 시스템에서 가장 혁명적인 잠재력을 갖는 장치는, 물론 블로그입니다.

이제 기자, 교수, 평론가들만이 아니라 기존의 담론 소비층에 불과했던 블로거들도 글을 쓰고, 어떤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 자신의 해석을 적극적으로 투사합니다. 저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 '새로운 시스템'이 갖는 혁명성을 옹호합니다. '블로그 민주주의'라는 이상적 모델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 그런 물적 토대가 어느 정도는 갖춰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온라인 하부구조로서, 그 기본이 되는 물적 장치로서 '블로그'에 대해 무한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물론 현실은 그렇게 단순한 희망대로 굴러가지는 않죠. 많은 경우에, 기존의 권위적 매체들에서 생산되는 담론들은 여전히 그 질과 수준에 있어서(물론 그 콘텐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산출한다는 것은 힘들겠지만요), 다수 블로거, 네티즌이 생산하는 콘텐츠보다 뛰어납니다. 예인님 말씀 그대로죠. 질적으로 좀더 '고급의 콘텐츠'이고, 좀더 책임과 근거를 갖고 쓰여지는 글들이 당연히 많습니다.

제가 많은 영감을 얻고, 또 블로그에 대해서 많이 배우는 '아틸라님' 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블로그는 '뉴스 소비 패턴'의 변화에 있어서 의미있는 '단계'에 있지, 뉴스 생산 시스템 전반을 재구성할 만한 역량을 갖고 있지는 못합니다. 앞으로도 기존의 전통적인 담론생산 시스템의 한 '요소'로서 블로그는 존재하는 것이지, 그것을 전면적으로 재구성하는 단계에 까지는 이르지 못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미래는 알 수 없긴 하지만요.

즉 블로그는 기존의 담론 생산 시스템 변화에는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못합니다. 다만 그동안의 전통적인 뉴스 '소비 패턴'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동인이라는 점에서, 현 단계의 블로그, 그리고 블로거, 네티즌은 의미를 좀더 강하게 갖고 있는 것 같아요(사적으로 첨언하자면, 아틸라님께서 "민주주의는 블루오션"이라는 포스트를 어서 작성해주시길 기대합니다. ^ ^;). 다만 기존의 담론들, 그 담론의 구체적인 어떤 성격들을 비판하는 역할은 여전히 의미있고, 또 가치있는 블로기즘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비판이 집단적이고, 감정적인 어떤 정서에 의해 쉽게 휘발되는 '냄비'근성이 아니기를 바라지만요.

그러니 기존 담론 생산집단, 그 전통적인 시스템에서 만들어지는 담론들, 콘텐츠들을 비판하는 역할은 충분히 의미있는 행위라고 생각하구요. 블로거들이, 네티즌들이 수행하는 비판의 '편차'와 다양한 '층위'들을 무시하고, 어떤 일시적이고, 현상적인 차원만에만 주목해서, 그것을 추상적으로 일반화하여 네티즌의 행태는 찌질하다고 말하는 것은 좀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좀 찌질하면 어때요. ^ ^; (실은 저도 찌질이를 굉장히 증오하긴 하지만요. ㅡ.ㅡ;; 자기 증오인가요? ㅎ) 찌질이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찌질한 행위, 현상'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구요.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찌질스런 행위 유형을 비판하는 의견이 이렇게 있고, 또 그 의견을 비판하는 의견이 있고, 또 제 글도 또 다른 어떤 블로거께서, 혹은 예인님께서 다시 비판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의견들이 '대화'로서 순환하고, 또 그런 순환이 유기적으로 이뤄지는 시스템이 구축된다면.. 그렇게 즐겁게 의견으로서 대화할 수 있다면, 저는 좋겠습니다.

다만 고양된 의견만이 발표되어야 하고, 다수의 부족한 의견은 침묵해야 한다면.. 그 권위가 어떤 식으로 형성되고, 어떻게 그 권위가 부여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로선 전통적인 권위 형성 시스템에 대해선 매우 회의적이라서요, 그다지 재미가 없을 것 같습니다. 고상한 의견들만 유통되는 메마른 풍경보다는 시장판의 언어들, 아직 여물지 못한 의견들이 그 자체로 생생하게 피어나는 풍경이 좋습니다.  다만 주장의 무게는 근거의 무게에 비례해야 하고, 또 어떤 사사로운 의견도 공적으로 발표된 이상은 그 공적 의견에 대해 책임의식을 가져야겠죠. 이상입니다.


p.s.
글이 너무 길어져서.. 그런데 솔직히 쓰고 싶은 말은 계속 무럭무럭 피어나고.. ㅡㅡ;; 끝이 없을 것 같아서요. 예인님께 특별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여기서 미쳐 나누지 못한 이야기에 대해선, 앞으로 종종 대화를 갖기를 기대합니다. 이제 주말이라서 블로깅 휴식타임이겠군요. 부족한 글이지만 주말 블로깅을 즐기시는 블로거들에게 조금이나마 어필(?)하고자 ㅎㅎ 올블 '나의 추천 글'에 올립니다. 좋은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디워와 이야기 강박증 : [디워](D-War) 단상

2007/08/02 00:43
#. 이 글은 스포일러 불안을 고려합니다.
개인적인 표준입니다만, 스포일러는 '전혀' 없습니다.
디워 줄거리가 너무 후지다, 이런 이야기들이 많은 것 같아서요.
그 비판은 그대로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좀 달리 생각할 여지가 없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간단히 씁니다.






디워와 이야기 강박증 : [디워](D-War) 단상

- 이미지 내러티브와 이야기 내러티브






우리는 영화를 '본다'.
우리가 가끔씩 영화를 '읽는다'고 표현했을 때, 그건 일종의 비유일 뿐이다.
영화가 우리시대의 가장 위대한, 적어도 가장 힘이 쎈, 문화양식으로 존재하는 이유는, 영화가 대학 강단과 전시회에 갇힌 고상한 예술이거나,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성찰을 주는 위대한 철학을 제시했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가 우리시대의 지배적인 문화양식이 된 가장 큰 이유는, 복제기술의 발전(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주는 가장 중요한 전언은 '아우라의 상실'이 아니라, 복제라는 기술의 진보를 통한 민주주의적 양식의 획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 양식의 본질 요소인 '시각적인 쾌락' 때문이라고 나는 소박하게 생각한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문화비평가 중 한명인 아놀드 하우저는 20세기는 영화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고, 21세기 초입에 도달한 우리는 그 '예언'이 충분히 실현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비주얼시대, 영상시대라는 직관적이며, 순간적인 이미지들이 폭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은 축복이면서 재앙이다.

물론 문자중심적 사고, 관습, 권위의 패턴과 그 문자의 미덕은 여전히 유효하며, 그 문자중심적 시스템의 관성은 이미지 중심적인 사고, 정확하게 확정할 수 없는 시각적 이미지에 언제나 불안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것은 최초에는 권위에 기반한 근엄한 목소리로 '싸구려 구경거리'인 영화에 경멸을 보냈지만, 이제 초초하고 파리한 목소리로 영화에 질투어린 시선을 보낸다.

이제 '권력은 (시각) 이미지'에게 넘어갔으며, 그 이미지의 나라에 사는 가장 강력한 군주는 영화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시각적인 이미지'만으로 구성된 건 아니다. 그 안에서는 여전히 '이야기'가 흘러간다. 그 흘러가는 이야기는 우리가 읽는 소설과 다를바 없다. 다만 영화에서 줄거리, 이야기, 스토리, 내러티브 등으로 불리는 '의미구조'는 소설에서의 그것과는 다르다. 영화는 '이미지-액션'을 통해 내러티브를 구축하며, 소설은 문자를 통해 내러티브를 구성한다. 영화의 이미지는 '쏟아지며', 소설의 내터리브는 좀더 완만한 속도로 수용자에게 재구성된다.

그러니 영화의 내러티브는, 굳이 쉽게 설명하기 위해 용어를 만들자면, 이야기 내러티브와 이미지 내러티브가 혼재된 형태로, 하지만 이미지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그것은 영화 양식의 본질이다. 아무리 내용이 멋진, 구성이 탁월한, 줄거리가 흥미진진한 영화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영상, 화면, 이미지들의 끊임없는 연속들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지, 문자를 통해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디워의 형편없는 스토리가 비판의 도마에 오른다.
디워는 정말 형편없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디워는 '이야기 내러티브'로서는 정말 언급할 만한 거리가 없다.

그러니 스포일러를 쓸래야 쓰기조차 어렵다. 즉, '이야기 내러티브' 요소로서 스포일러를 유출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당신이 예상하는 바로 그 고색창연한 선악구조, 운명론의 주인공들, 그 남/녀 주인공의 낭만적인 연애의 각본들이 그대로 실현된다. 그 얼개에 세부적인 디테일들은 논리적 인과를 가뿐히 무시하고 있다. 물론 '디워'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ㅡㅡ;

다만 디워는 '이미지 내러티브'로서는 충분히 평가해야 하는 영화다.
물론 그 자체로도 '디워'는 새로운 '시각적인 쾌감'을 디자인하거나, 심형래 감독의 바람처럼, 매력적인 '캐릭터'를 창출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하지만, '이무기'라는 캐릭터가 '둘리'처럼, '스타워즈'의 관련 캐릭터 상품이나, '슈퍼맨'등의 수퍼 히어로들, 'ET'나 '반지의 제왕' 혹은 '해리포터', 그리고 최근의 '트랜스포머'와 같은 '친근한' 캐릭터 상품으로 연계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디워의 스포일러는 단 하나 밖에는 없다.
그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나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들은, 그다지 구조적으로 훌륭한 이야기 내러티브를 갖는 영화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디워의 '이미지 내러티브'의 성취라고 생각한다. 그 장면은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 장면들 만으로 나는 '디워'를 응원하고 싶어진다.


사족.
디워를 둘러싼 '애국주의 마케팅'에 대해선 나는 그다지 심하게 우려하는 편은 아니다.
어느 정도 이유가 충분한 마케팅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그렇다.
다만 그 애국주의 마케팅이 너무 무거운 배타성으로 쇼비니즘적 성향으로 발전하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심형래 펜이라면 최소한 이제는 영화를 보고, 영화를 통해서 '서로 다른 의견'들과도 즐겁게 대화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 다만 '필름 2.0'에 대한 '쇼박스'(디워 한국배급사)의 '조처'는 대단히 유감스럽다.
잡지사에 대해 광고를 빌미로 '협박'하는 마인드로 어떻게 '홍보'하겠다는 건지 의문이다.
심형래를 응원하는(?) 펜들이라면, 이런 사건들에도 좀더 깊은 관심을 갖기를 바라는 바다. ^ ^;




p.s.
이 글에 못한 좀더 긴 이야기들은 http://kino21.com 에서 쓸까 싶습니다.
물론 안쓸수도 있지만요. ㅡㅡ;

앞으로 영화/영상/드라마/광고 등등에 관한 이야기들을 민노씨.네에서도 동시에 발행하거나, 혹은 kino21.com(제 영화블로그)에 수록하는 글에 대한 초안 성격으로 등록합니다. 물론 kino21.com에만 쓰는 글도 좀 늘릴까 싶습니다만.. 너무 관리를 안해서.. ㅡㅡ;;



#. 나도 드디어 (본격적으로) 한마디.
실은 관련 기사들, 관련 포스팅 메모, 정리 자료 날렸다.
다시 메모하고, 링크 주소 따고, 정리하자니.. 부담된다.
독자들도 링크 만땅인 글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냥 쓰련다. ㅡㅡ;

0. 아프간 피랍 사태에 대해서는 떠들지 말아야지, 처음엔 그랬다.
극소수(혹은 소수, 또는 상당수?) 블로거, 독자, 네티즌들이 쏟아내는 '증오'에 그만 질려버렸다. 소름 돋고, 섬뜩했다. 자신들이 모든 진리를, 진실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다는 듯한 그 뻘짓들, 과장된 제스처들이 짜증났다.
솔직히 그랬다.

하지만 언론에서도, 블로그에서도 계속 계속 관련 기사, 관련 포스트들은 쏟아지고, 관심갖고 싶지 않아도, 갖지 않을 수 없더라. 그래서 관련기사도 읽고, 관련 포스팅도 나름으로 열독해봤다. 그랬더니 생각이 좀 바뀌더라.

나는 착한 휴머니즘이 싫다.
나는 악당이 좋다.
나는 니들이 말하는 찌질이다.





아프간과 저널리즘 ; 착한 국민 vs. 찌질이 네티즌
- 나는 착한(척 하는) 휴머니즘이 싫다.






1. 아프간 이슈와 블로기즘

블로그는 가장 쉽고, 가장 경제적으로, 그러니 일상의 차원에서 공동체적인 체험을 쌓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다.  거듭 강조하지만, 블로깅의 민주적인 가치는 조금 부족해도, 조금 무식해도, 스스로 진실하다고 믿는 것, 스스로 관심을 갖는 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 대화를 시도하는 것, 그럼으로써 민주적 시민으로서의 소양(대화, 존중, 토론 등등)을 즐겁게 배우는 것. 그러니 블로깅 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그 이야기(=참여)의 주제는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웃집 오빠든, 드라마든, 스포츠든, 영화든, 좋아하는 연예인이든. 그 주제는 모두 나름으로 소중하다. IT에 관해 쓰면 뭔가 세련되어 보이고(놀고있다), 철학자에 대해 쓰면 왠지 폼나고(얼씨구), 연예인에 대해 끄적이면 허접한 게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생각하는 선입견이 허접하다면 허접할까. 소재가 가치를 담보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콘텐츠 자체로서, 그 콘텐츠에 담겨진 의식과 태도에 따라서만 블로깅의 가치는 결정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무리 개인적인 것도 공적인 성격을 내포하고,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 절대적인 담론의 위계, 이런 건 개뿔, 없다고 본다. 공적 성격과 주관적 성격은 상호간에 침투하고, 섞이고, 항상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이다.

그런데 시의성 있는 이슈는 '블로그 민주주의' 모델이 작동하는 풍경에서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그건 그 이슈가 유통되는 사회에 속한 성원이라면 마땅히 관심을 갖을 만한 공적 이슈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시의성 있고, 사회성원 전체가 집중적으로 관심을 보이는 이슈들은 그 맥락에서는 좀더 적극적인 의미를 갖는다.

가령 현재를 표준으로 본다면, 이랜드 사태나 아프간 피랍 사건이 대표적일텐데, 나는 이런 이슈라면 사회성원으로서 마땅히 참여할 만한, 한번쯤 고민할 만한 이슈라고 본다. 서로 다른 해석들, 견해들을 통해 누가 누가 잘났나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대화가능성의 영역을 확장하는 '기회'를 갖는거다. 그게 그 공적인, 시의성 있는 이슈가 갖는 중요성이다. 누구 KO시키고, 어떤 의견 짓밟아야 하는 거 아니다. 물론 토론은 치열하면 치열할 수록 좋다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어떤 이슈에 구체적으로 참여하기 위해선, 블로거라면, 최소한의 원칙을 가져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을 한번쯤은 생각해야 하지 않나 싶다.

ㄱ.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한다.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무지는 상대적이다), 쥐뿔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건 정말 부끄러운 거다. 블로깅하는게 무슨 시험치르는 것도 아닌데, 좀 틀리면 어떤가? 좀 부족하면 어떤가? 부족하면 배우고, 좀 남으면 알려주면 되지. 다만 좀 관용하는 자세를 갖기를 바란다.

좀 엄격하게 말하자면, 주장의 무게와 근거의 무게는 비례해야 한다.
주장은 1톤인데, 주장을 지탱하는 근거와 논리가 1근이면, 그건 좀 누가봐도 뻘짓이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적극적으로 어떤 이슈에 대해 참여하고, 자신의 진실로 목소리를 보태는 것은 응원하고, 격려해야 마땅하지만, 그게 과시적인, 배타적인, 그리고 무엇보다 저열한 승부욕에 빠져서는 곤란하다(물론 그런 심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ㄴ. 표시된 발언에는 항상 공적인 책임이 수반된다.
그러니 그 책임에 대해 항상 고민해야 한다. 거대 언론만 책임이 있는 건 아니고, 단 한 명의 독자가 읽는 글을 쓰는 블로거에게도 공적인 책임은 당연히 부과된다. 물론 그 책임의 무게가 같다고 말하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어떤 개인적인 글도 그것이 공중에 접해질 수 있는 형태로 발표되는 순간, 공적인 성격을 갖는다. 그건 이미 '개인적인' 영역에서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는 사생활이 전혀 아니다.

그것은 공적인 담론이며, 공적인 의견이 된다. 가령 나는 삼순이가 참 좋아, 이렇게 한줄 남겨도, 그게 삼순이에게만 보내는 연애편지로 쓰여졌더라도, 그건 이미 공적인, 삼식이의 손을 떠난 공적인 '담론'이 된다.

역시 생각없이 끄적거리니 글이 길어지고, 삼천포로 빠진다.
가급적 간결하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마무리 할까 한다.



2. 한국 저널리즘의 착한 휴머니즘 ; 착한 국민 vs. 찌질이 네티즌.

이번 아프간 피랍사태에는 두 개의 여론이 존재한다.
대다수 저널들에서 쏟아내는, 의미없는 관습적 수사로서의 '국민'이 만들어내는 '천사표 여론'(A)이 그 하나다. 나머지 하나는  네티즌 찌질이들, 그러니까 나와 같은 '막가파'들이 만들어내는 '악마표 여론'(B) 이렇게 두 개다.물론 나는 이런 이분법적인 관점과 태도 그 자체가 정말 폭력이면서, 야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 신해철 몹시 싫어하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서만큼은 할 말 제대로 한 것 같더라. 물론 마지막에 언급한, 피랍자들 무사귀한하더라도 비행기에서 내리면서 고개 푹 숙이고 들어와라, 이런 쓸데없는 소리는 왜 하는건지 모르겠다. 고개 뻣뻣이 세우든, 고개 숙이든 솔직히 나는 관심 없다. 암튼, 신해철 할 말 했다. 차인표도 그렇고, 김혜수도 나름으로 그랬다. 그 주장과 의견이 어쨌든 간에, 자신의 소신으로 당당하게 진술하고, 관심을 쏟았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높은 평가를 내리고 싶다.

그런데 정작 우리나라 저널들, 언론들이 그랬는지, 할말 했는지 솔직히 좀 의심스럽다.
민감한 사안인거 인정하고, 언론사에서 다뤄지는 기사 하나 하나에 현지 피랍인들의 생사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 없지 않다는 것도 인정한다(솔직히 탈레반의 대미, 대한 전략이 언론사의 몇마디로 급변경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무게로 봤을 때 충분히 고민해야 하는,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이슈는 당연히 '일부' 기독교의 독선적이고, 편협하며, 배타적인 정복자식 공격적 선교활동이고, 또 그 선교활동이 갖는 위험성이다. 이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한 언론이 있다면, 제발 좀 알려주시라. 내 보기엔 없다. (관련 보충 1. 하단 참조)

소위 대부분의 메이저 언론사들은 그저 피랍된 동포, 내나라 국민 걱정하는 (또 다른) 국민의 목소리를 그저 '관념적으로' 조직해냈을 뿐이고, 이전의 관습과 관성에 의해 '그려려니'하면서 '추리'했을 뿐이다. 그리고, 신해철 지적처럼, 기독교 눈치보기에 바빴다. 정치인이란 인간들 역시 뭐, 아니나 다를까다. 방구나 뽕이다.

(그리고 부연하자면.. 이번 사태를 아프간에 있는 미군을 철수하고, 한국군을 철수하는 명분으로 삼겠다는 민주노동당.. 뭐, 입장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실은 전폭적으로 그 원론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다만 정치적인 센스를 좀 발휘했으면 한다. 전략적으로 그다지 실익이 크지 않다. 고리타분한 정치적 공세로 본다. 차라리 일부 기독교의 폐단을 적극적으로 비판한다면 효과적이지 않을까 싶다).

각설하고..
네티즌은 (이미) 국민이다.
아닌가?
국민 중에서 네티즌 따로, 네티즌 중에서도 블로거 따로인건가?
대한민국 국민은 '그냥 국민' '네티즌' 이렇게 크게 양자로 분리되었던 거였어? (설마..)

적어도 네티즌은 그 자체로 국민의 여론을 대표하는 최소한의 상징성을 갖는다고 추론해야 하고, 그것이 국민 여론 따로, 네티즌 여론 따로라고 생각해야 할 하등의 논리적 근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요 언론들에서 다루는 네티즌들은 극소수의 '증오신자'들로 대표될 뿐이며, 그렇게라도 솔직한 일부 모습이라도 적극적으로 다뤄주면 다행일 지경인데, 대다수 기사들을 살펴보면, 그저 막연하게 천사표 얼굴을 하고선 피랍된 봉사단을 맹목적으로 걱정하는 국민들이 있을 뿐이다. 국민들 (상당수가) 꽤 화나 있는데, 언론 속에는계속 천사표 얼굴로 피랍자들 걱정하는 국민들 밖에는 없다.

솔직히 좀 가증스럽다.
오히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들은 화끈하다.

한 기자는 극소수 네티즌들의 치기어린, 그리고 다소간 이해할 만한 여지 없지 않은 행위를 침소봉대하고, 네티즌 상당수를, 실은 적어도 그 효과에 있어서는, 네티즌 전부를 '찌질이'로 재단해버린다. 블로거도 당연히 개념상 '네티즌'의 일부라고 나는 생각하는데, 그러니까, 나 찌질이다(이런 ㅡㅡ; ).



또 다른 사회부 기자는 이번 사태가 김선일씨 사건과 '붕어빵'이고, 국민들 보호하지 못한 무능한 정부, 생색내는 몇마디로 표심을 붙잡으려는 정치인들 싸잡아 비난하는데 그 공적인 지면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다(부라보~!).


위 두 기사들은 그래도 솔직하게 '커밍아웃'하고 있다는 점에서만은 정말 높게 평가하고 싶다.
국민들이 뭘 아나, 철없는 '찌질이'인 네티즌들이 뭘 아나.
고매하신 기자님들께서 계몽하고, 가르쳐야지.
암, 그렇구 말구.

농담은 이쯤하고, 위 두 기사는 솔직히 심하게 삽질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위 두 기사들에 남겨진 독자들의 댓글 논평들이야 말로, 내가 보기에는 국민들의 솔직하고, 성숙한 '여론'을 조금은 보여주는 댓글 논평들이라고 본다. 위 기사에 대한 독자들의 댓글들 읽으면서 차라리 이런 쪽팔린 수준의 기사들 보다는 일반 국민들의 소박한 의견이 훨씬 더 호소력 있고, 논리적이며, 또 비판적으로 음미할 만한다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일독 강하게 권한다.

상당수 국민들이 일부 기독교 선교방법론만을 가지고 기독교 전부를 일반화시켜 비난하는 것. 나도 문제 있다고 본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들에서 피랍 봉사단과 그 봉사단을 이끈 배후 기독교 단체들, 그 단체의 수뇌부들은 특히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가령 최한우 목사 경우를 보자.

1. 이 양반 정치와 종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 이슬람 국가에 가서 2천여명이 집단적으로 (기독교) 평화축제 한다는 황당한 발상을 실천하려고 했단다.  이거 정상인가? 이게 예정대로 였다면 8월에 벌어질 사태였다고 한다.

2. 당연히 자숙해야 마땅한 이 기독교 원로(?), 기독교 선교에 관한 기독교  권력자께서는
"공격적인 선교가 이슬람을 자극한다는 우려에 대해 “한심하다”며 “이슬람인들이 가장 혐오하는 것은 기독교인이 아니라 무신론자들이며, 이슬람권에서 ‘나는 기독교인이다’고 말하면 대부분 반가워한다”고 여전히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주장한다. (관련 한겨레 기사)

3. 끝으로, 그 문제의 최한우 목사가 약 1년전(2006.06.26)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이 양반은 손석희 시선집중에 나와서도 할 말 하더라(계속 선교단 보내겠다는 투로).

"세계 175개국에 나가서 활동하는 우리 국민의 안전을 정부가 100% 보장한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정부가 가이드라인을 통해 효과적으로 안내하거나 또 필요시 경고할 수 있지만, 최종 책임은 국민 당사자가 지는 방향으로 시급히 정책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 [기고/최한우] 위험국가 여행 규제법안 행정편의적 발상 아닌가
http://www.donga.com/fbin/output?sfrm=1&n=200606260024

참 말 잘했다.

우선 피랍된 우리 국민, 봉사단 살려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이걸 부정하고, 그냥 죽어, 이건 정말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솔직히 그 '심리'가 처음에는 정말 끔찍했는데, 그 속사정을 이리 저리 듣고 보니, 다소 격앙되어, 감정적으로 그렇게 비상식적인 일탈로 표출되었구나, 그 배경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 솔직히, 강하게 든다.

다만 그래서는 안되는게 뭐냐면, 그럼 그 독선적인 선교형태를 갖는 (일부) 기독교(의 행태)를 '개독교'로 부르면서 비판하는 이유인, 그 편협함, 배타성, 존중 결여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고상한' 휴머니즘, 인간애, 민족애, 동포애에 기대어 그렇게 하면 안되는게 아니라, 최소한 비판하는 대상의 속성을 그대로 흉내내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렇다는거다.

하지만 최한우 목사 본인 말처럼, 책임은 국민 당사자가 지는 방향으로 '시급히 정책을 전환'하자. 유사사례가 일본에 이미 있다고 한다. 국가는 국민을 살리되, 그 국민(들)이 행한 과실과 오판으로 인해 생긴 손실은 그 국민과 그 국민(봉사단)에 대해 책임을 갖는 단체와 조직에게 부과할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요약한다.
피랍자 무조건 살리자.
다만 책임은 묻자.
물론 그 책임, 관련 기독교 단체들이 연대해서 져야 함은 물론이다.

(덧. 댓글논평을 확인하니 다소간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요. 저는 피랍과 관련한 구호에 투여되는 '경제적' 손실에 대한 비용을 복구하는 차원에서 국가가 그 비용소모에 직접적인 책임을 갖는 '개인 혹은 단체'에게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한 것이지, 피랍자나 관련 기독교단체가 형사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죄형법정주의 원칙상 그럴 수도 없겠지만요. 이점에서는 오해를 풀어주시길 바랍니다).





* 보충 1.
펄님께서 소개해주신 (한국일보의) '의미있는 기사들'입니다.
펄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 한국 개신교 강한 선교 열망에 외국서 마찰 잦아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7/h2007072019100984330.htm

* 사설 '해외 위험지역 '모험선교' 자제해야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7/h2007072218033676070.htm

* 칼럼] 원하지 않는 손님 (특히 일독 권합니다.)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7/h2007072418583624420.htm
한국 개신교의 해외 파송 선교사는 170여개 국 1만6,000여명으로 미국에 이어 세계 두번째 규모다. 타 종교의 선교활동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이슬람권에서까지 공격적 선교활동을 함으로써 한국 교회 내부에서조차 무모한 양적 팽창주의, 정복주의적 행태로 비판받고 있는 한국 개신교도들이 왜 아프간에서, 자신들이 속한 교회 담임목사의 말대로 그곳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손님이 돼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가.

 아직도 이데올로기 충돌의 질곡에 옥죄여 있는 이 땅의 사람들이 문명 충돌의 언저리에 또 얼쩡거려서야 되겠는가. 종교를 바탕에 깐 충돌은 이데올로기의 충돌보다 훨씬 뿌리 깊고 그 결과는 더 처참하다는 것을 역사와 현실은 보여주고 있다. 원하지 않는 손님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 외부기고] 진중권,  '디지털 시대의 중세적 순교'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707/h2007072317521486330.htm
전세계에 제 나라 깃발을 꽂으려 했던 제국주의자들의 심보와 비슷한 욕망을 본다. 제국주의자들이 '미개한 종족'이라 불렀던 것을 기독교인들은 '미전도종족'이라 부른다.

* 외부기고] 정진홍 '낯가림과 오만의 문화' (특히 일독 권합니다)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7/h2007072619312324060.htm

여러 해 전에 인도의 사르나트에 있는 녹야원에 간 일이 있습니다. 모든 아픔에서 풀려나는 지혜를 부처님께서 설파하신 '처음자리'에 서는 감동은 사뭇 경건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환청인 듯 문득 찬송가 소리가, 그것도 우리말로 들렸습니다. 저는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제게 말했습니다. '여기 와서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 이루었습니다.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팔다리에 힘이 빠졌습니다. 분노 때문도 아니고, 부끄러움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상식 없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긴 공포가 거기 환한 웃음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그림자는 지금 우리의 더운 여름을 불안과 분노와 연민과 원망으로 뒤덮고 있습니다.


p.s. 안내.
현재 방문인원을 추정건대..
오늘 자정 전에, 즉 트래픽이 새롭게 초기화되기 전에, 트래픽 초과로 제 블로그 접근이 제한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혹여라도 그런 일이 있다면.. 죄송하다는 말씀 미리 올립니다.



자기배반 - 상상플러스, 혹은 아프간

2007/07/30 15:37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
기억을 떠올리면 다음과 같다(불완전한 기억이고, 변주가 있을 수 있다, 물론).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추구하는 방식에 의해 해체된다.

즉,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취지, 내용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그 과정(방식, 방법론)을 통해 그 취지, 내용이 전복되기도 한다'라고 평범하게 해석한다. 이 문장은 '해체주의'에 관한 해설서에서 읽었던 글인데, 아마도 그 출처는 고려원에서 나왔던 '해체비평'이라는 얇은 책일거다(이 책 꽤 재밌다).

이런 거창한(?)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가 있을까, 써놓고 보니 좀 내 자신이 웃긴다.
어떤 독자께서 "너는 왜 그렇게 현학적이니?" 이러셨던 기억도 있고..
그런데 뭘 알아야 현학적이거나 말거나 하지.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이란게 모두다 거기서 거기일 뿐인 지식들이다.
수박 겉핥기지 뭐.

다만 내 나름 내밀한 자부심이 있다.
나는 게으르지만, 그리고 박약한 지식의 소유자지만, 어떤 텍스트의 취지와 그 취지를 구현하는, 표현하는 방식, 그 양자의 상관관계, 맥락에 대해서 나름으로 고민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아는 것에 대해서만 쓰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모르는 것에 대해선 호기심을 표할 지언정 아는척하지는 않는 편이다.

각설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내용'과 '형식', '취지'와 '방법'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상상플러스'라는 지상파 오락 프로그램을 예시로 삼은 거다. 요즘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항상 보면서도 이상하다.. 싶었던 상상플러스 [올드앤뉴]. 그건 정말 나에게는 미스터리였다.

알 수 없는 교양미(?)를 풍기며,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우리 시대 지성의 대변자(ㅎㅎ) 아나운서님께서(ㅋㅋ) 문제낸다. 별 시덥지 않은 단어 하나를 맞추기 위해 출연자들은 별별 쇼쇼쇼를 다 보여주고. 이 프로그램은 항상 아나운서님께서 마지막에 근사한 한 말씀 던지며 쫑낸다.

"4천 8백만(7백만?) 국민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그 날까지, 올드앤뉴는 계속됩니다"

종종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특히나 그 마지막 마무리 인사말을 들으면서는...
참 놀고 있다.
육갑팔색이네.

이런 마음이 생기곤 했다. 속된 표현 사과 드린다.
다만 그 양반다리 아나운서양께서 '훈계'하신다면, 그런 시츄에이숑을 상상하면, 단연코 '반사'를 날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우리말을 자유롭게, 아름답게' 구사할 수 있는 단어실력, 어휘력을 갖자, 뭐 이런 프로그램 취지는 그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 '방식'에 의해 완전 뽕빨나는 느낌이라서 그런다.

1. 고정 패널이 읽는 시덥지 않은 '별명'들부터
2. '상상 plus'라는 전체 프로그램 제목부터, [Old & New]라는 세부제목까지.

왜 굳이 이렇게 영어식 표현을 제목으로 쓴걸까,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이건 프로그램의 취지를 배반하는 제목인 것 같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더군다나,
3. 일본식 표현에 대해서는 그토록 민감하지만
4. 영어식 표현에 대해선 그게 마치 "지성의 척도인양 착각"(야동 순재 옹)한다. 특히 전혀 웃기지도 않는 이휘재의 뻘짓은 불쾌지수 제대로 상승시킨다. 뉴요커 운운하면서 혀를 굴리는 모습으로 웃겨보겠다는 그 가공할만한 유머감각도 감각이지만, 이러면서 '우리말을 사랑하는' 프로그램이라니. ㅡㅡ;; 이건 영어 사랑하자는 프로그램 같다. 그렇게 '소통'이 되면 '폼나는 건지' 어쩐건지는 난 모르겠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는 거다.
아주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문득 생각나서 끄적거린거다.




- 그리고, 아프간
...

아, 그리고 굳이 부연하면,
아프간 피랍에 대해서 일부 네티즌들이 갖는 증오에 대해서는 나 역시 우려를 함께 한다. 그 증오가 위험한 이유는 소위 '개독교'로 비난받고, 조롱거리가 되는 그 기독교 일부가 갖는 배타성과 폭력성을 비판하는 방식이 그 배타성과 폭력성을 흉내내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그건 비판의 취지를 지워버리는 '방식'이다.

그리고 더불어 부연하면, 거대매체, 거대언론들이 보여주는 그 순진한 휴머니즘, 그 착하디 착한 휴머니즘도 솔직히 좀 짜증난다. 그런 뻔한 소리 하려고 지면과 전파 낭비하나, 싶은 생각 솔직히 생긴다.

특히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들)의 인식은 정말 가공할만한데(물론 그 솔직함에 대해서만큼은 평가하고 싶다. 최소한 어떤 울림도 주지 않는 형식적 휴머니즘을 지루하게 설교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일부 네티즌을 "찌질이"라고, "막가파"라고 비난(김정우 기자)하기 전에, 그 비판의 방식이 과연 그 '찌질이'들을 얼마나 계몽할 수 있을지를(그 취지가 실현되는 효과 차원에서), 그리고 그 원색적이고, 감정적이며, 도덕심 충만한 비난은 찌질스럽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보기를 진심으로 권한다.

나야 곤조 블로거를 표방하는 경박한 블로거라서 이렇다고 치고, 소위 '불편부당'과 '객관성'을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중앙일간지에서 이런 식으로 '막장'에 동참하겠다고 나서면 뭐하자는 건지, 솔직히 모르겠다.

나 역시 아프간을 둘러싼 일부, 정말 일부 네티즌, 블로거들의 '증오'가 좀 심리적으로 버거워서 관련글도 일부러 피했고, 또 나 자신 글을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도저히 관심을 어쩌지 못해, 오늘 나름으로 관련기사, 관련포스트들을 찬찬히 정독해보니, 중앙일간지의 교과서적인 휴머니즘 보다는 다수 블로거와 네티즌의 솔직한 비평이 훨씬 더 '인간적'으로 느껴지더라.

아프간에 대한 중앙언론, 특히 종이신문의 형식적 휴머니즘과 '자기배반'에 대해서는 조만간 글을 쓸까도 싶다.

사족이 길었다.
이상이다.


답글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 ^;
필로스님께서 월요모임과 화요모임을 '합치자~!' 이러셔서요. ^ ^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인원이 많아지면서 대화 밀도가 좀 떨어지지 않을까 우려가 되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사람이 많으면 부담감을 덜지 않을까 싶어서요.

현재 참석을 희망해주신 분들은 (참석희망순)

1. 필로스님 http://philomedia.tistory.com/
2. 노바님 http://trivial.tistory.com/
3. 칫솔님 http://chitsol.com/
4. 정신병자님 http://psychoic.dothost.co.kr/
5. 수재님 http://inthenet.tistory.com/
6. 작은인장님 http://may.minicactus.com/
7. 박형준님 http://blog.daum.net/ctzxp/
8. 저(민노씨)

이렇게 여덟분입니다.  
생각보다 좀 많긴 하네요. ^ ^;
여전히 성비불균형은 극심하지만요. ㅎㅎ (전부 남자죠)
혹여라도 참석하시는 분이 더 계시면 3명 정도는 더 오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위  희망블로거 중에서 박형준군은 다소 유동적입니다.


* 일시 : 7월 31일 화요일 오후 7시

* 회비 : 1만원 + @ (알뜰한 모임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 ^;; )


* 장소 : 강남역 혹은 강남구청역(?) (구체적인 장소는 아직..  ^ ^;
)

다음 중에서 참석이 확실히 가능하신 블로거들께서 (비밀 혹은 공개)댓글로 한표 던지시면 의견을 반영해서 결정하도록 할게요. 시간이 다소 촉박한 관계로 오늘 자정까지 의견주신 바를 반영할까 싶습니다. : )

1. 2호선 왕십리역 6번 출구 우측 치킨마루 3층
비교적 조용하고, 오픈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라서 나름 깔끔합니다.
꽤 저렴하다는 장점이 있구요.
제가 한겨레 블로그에서 활동할 때 필벗모임을 종종 했던 곳이기도 하죠.

2. 건대 뜰아래채 : 2호선 건대 2번 출구
http://chamisulfresh.menupan.com/Restaurant/Onepage/Onepage.asp?cate=_Q05&acode=D101093

3. 혜화동 뜰아래채 : 4호선 혜화역 4번 출구(1번출구 맞은편) 퓨마매장 바로 옆 골목
http://chamisulfresh.menupan.com/Restaurant/Onepage/Onepage.asp?cate=TM_Q02&acode=T167762

4. 강남역 (구체적인 장소 미정)
현재까지 참석희망해주신 블로거분들의 직장이나 댁이 강남 쪽에 집중(?)되어 있어서 모임 뒤에 귀가에 다소 장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4번을 선택하시는 경우에는 구체적인 장소 추천도 부탁드립니다. : )

한표 행사 부탁드립니다.
이 글에 (공개 혹은 비밀) 댓글을 남겨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번 모임의 주제는, 역시나 그저 만남 그 자체인데요.
다만 굳이 이런 저런 주제 중 하나를 가볍게 예상하자면, '블로그코리아'입니다.
새롭게 부활한 블로그코리아 운영자이신 필로스님께 이 모임의 최초 주선자신데요, 블로그코리아에 대한 이런 저런 궁금증과 애정어린 비판, 그리고 더불어 격려를 보낼 수 있는 자리가 될 수도 있으리라 예상합니다. 물론 이는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이에 대해 사전 주제 설정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 ^;




p.s.
현재까지 참석희망해주신 블로거들의 방명록에는 즉시 이 글을 방명록을 통해 알려드리구요. 여기에 댓글로 표시해주시지 않은 참석희망 블로거께는 제가 개별적으로 전화연락 드리겠습니다. 다행히도 제가 전화번호를 거의 알고 있네요. ^ ^;



덧. 장소 결정 투표

필로스님 - 강남
수재님 - 강남
노바님 - 강남 (전화 연락)
제니님 - 강남

칫솔님 - 건대 혹은 혜화
와니님 - 혜화
5thtrack님 - 강남 빼고. ^ ^;

이상 의견을 주셨구요.
저는 의도적으로 기권합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