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람반장님 포스트에서 'MBC의 아메바급 설문조사' 을 접하고, 100분토론도 이런 아메바급으로 진행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재밌네요. 토론을 지켜보고, 생겨난 단상을 간략히(?) 정리합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서 나눠서 등록합니다.







비평의 종말 - 디워 관련 100분토론 단상 1.

: 어찌하여 진중권은 소통하기를 멈추고, 권위의 사제가 되어 기어코는 꼭지가 돌았는가?








1.
손석희가 불현듯 질문 때린다.
기억에 의지해서 그 질문 취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기존 전문평론가에 대한 불신 때문에 네티즌 스스로 문화상품을 평가하고, 소비하는, 문화집단으로서 비평 영역을 담당하는 그런 경향이 디워로 촉발되지 않을까요?"

모든 패널이 부정한다.
모두들 (전문)비평의 역할을 옹호한다.
그도 그럴것이 모두가 (전문, 준전문) 비평가들이다. ㅡ..ㅡ;

물론 나도 전문비평의 영역은 온존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믿었던 진중권이 뻘짓 제대로 한다.
이런 추세라면, 손석희의 질문이 실현될 날이 좀더 빨리 올수도 있을 것 같다.
그건 축복일까, 재앙일까?
물론 그 날은 아직 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오지 않을수도 있을테지만...


2. 진중권,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진중권이 '디워'의 구성(플롯)의 취약성을 지적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는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이라는 개념이 있다. 주인공을 비극에 밀어넣고는 해결이 안되면 신이 내려와서 구해주는 것이다. 이걸 피해야 한다는 게 극작술의 기초다. 아무리 스토리 구조가 허술하더라도 그런 구조를 갖는 영화는 없다. 평론가의 평이 짤 수밖에 없다" - 진중권


사족 : 토론 끝나기도 전에 기사완료하는 그 놀라운 순발력에 대해서는 정말 할말을 잃었다. 전형적인 온라인 속보 '미끼질'(!!)이다. 다만 진중권 발언의 상당부분이 개략적으로 정리되어 있기는 하다.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감수성과, 그 안에서 영화적 계보학을  '강의'하는 듯이 퍼즐을 즐기는 신기에 가까운 구성능력, 그걸 영화적으로 형상화하는 놀라운 연출력까지. 코엔형제는, 적어도 평론가들로부터는, (거의) 만장일치의 지지를 받는 시나리오 작가이자, 또 감독이다. 그래서 [바톤핑크] 같은 탁월하게 따분한(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솔직히) 영화는 칸에서 예외적으로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싹쓸이 한다.

그런 천하의 코엔 형제가 만든 [허드서커 대리인](The Hudsucker Proxy, 1994)란 영화가 있다. 회사를 먹어 삼키려는 악당 중역 폴 뉴먼과 어리숙한 '바지 사장' 팀 로빈스이 벌이는 한바탕 좌충우돌을 그려낸 로맨스 코미디다.

진중권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는 플롯장치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 그런데 [허드서커 대리인]에 대놓고 등장한다. 말도 안되는 물리적인 시간 원칙의 역전이 일어나면서 주인공 노빌 반스(팀 로빈스)는 구원 받는다.

중세에 유행했던 극작법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물론 개연성의 부족, 초자연적 힘의 인위적인 개입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을 갖는 극작법이다. 현대의 감독 대부분이 이런 촌스럽고, 과감하다 못해 무식한 영화적 구성을 회피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황당한 연출은 있을 수 있는 연출 방법 중 하나인 것도 분명하다.

사족 : 코엔형제가 영화 작법으로 활용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실은 프랭크 카프라에 대한 일종의 오마쥬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그 오마쥬를 바친 영화는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아마도) 프랭크 카프라의 걸작으로 칭송받는 [스미스 워싱톤에 가다] (Mr. Smith Goes To Washington, 1939)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 양 영화의 스토리를 비교하면 그렇다는 거고, 나도 이에 대해선 '권위있는 다수설'을 인용할 수는 없다. 암튼 그렇다.

프랭크 카프라 부분은 여기 참조.
http://movie.naver.com/movie/bi/pi/bio.nhn?code=446

서설이 너무 길었는데, '디워'에서 진중권이 조롱조로 비웃은 '결말' 부분은 솔직히 좀 심하게 엉성한 건 사실이고, 또 이것이 고도로 세련된 플롯으로 계산된 '일탈'(혹은 일종의 비유적 표현을 하자면, 시적 허용)에 속하는 건 분명히 아니다. 아니, 아니라고 나도 해석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당신의 해석에 영화 관극의 '결과적인' 감수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데? 문제는 이론이 아니라, 당신의 체감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알고 보면 영화가 갑자기 후지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모르고 보면 영화가 좋은 건 아닐테니까.

진중권이 제대로 뻘짓 했다고 생각하는 그 이유는 진중권식의 기계적인 비평, 텍스트에만 몰입해서 그 텍스트를 사지절단하는 그 건조함에 있다. 그 과도한 이론지향이 얼마나 텍스트를 풍성하게 만들 수 있을는지 나로선 회의적이다. 이건 지적 현학취미에 가깝지, 대부분 관객들에게는 텍스트 자체에 대한 풍성한 해석의 방법론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그건 관객들을 '훈계'하고, 관객들을 가르치려는 태도지, 관객들을, 좀더 특정하자면, 디워를 그래도 재밌는 상업영화로 소비한 관객들을 대화의 상대방으로 인정하고, 유혹하거나, 설득하려는 목소리는, 적어도, 아니다. 난 그게 좀 솔직히 짜증난다.

진중권식 해석과 비평은 관객들과 '호흡'하는 비평이 아니라, 스스로를 과시적으로 드러내는 자기만족적 비평이다. 그런 비평에 텍스트와 그 텍스트를 둘러싼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생명력이 깃들리 만무하다. 무식하니까 배워야 한다는 지적인 억압 만이 그 비평의 끝에 '무식한 관객'의 짐으로 남겨진다. 그런데 정말 무식하니까, 진중권 당신 똑똑하니까, 우리가 당신한테 무조건 배워야 하는거야? ㅡ..ㅡ;;

'데우스 엑스 마키나' 몰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몰라도, 대중은 얼마든지 영화를 즐길 권리가 있으며, 영화 '디워'가 갖는 구성의 취약성을 지적하기 위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리스토텔리스가 굳이 등장할 필요도 없다. 그냥 보면 아는데 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등장하나. ㅡㅡ;; 민망하게시리.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물론 내가 진중권처럼 대단한 문화평론가도 아니고, 나는 그저 그 오만한 언론에서, 그런데 하는 짓은 비생산적인 이런 논쟁 부추기고, 또 그거 팔아먹으면서 희희낙락하는 그 파렴치한 대다수 언론에서 '네티즌'으로 부르는, 블로거일 뿐이다. 진중권이 짜증나고, 꼭지 돈다고 하니까 나도 닮아가는 것 같다. 잠시 진정하고..

쉽게 국어시간에(작문시간에? 고등학교 졸업, 아니 자퇴한지 너무 오래되서 잘은 모르겠다) 배우는 논리적 오류, 그 중에서도 '권위에의 의존'의 전형적인 모습을 진중권에게 발견했다면, 이건 너무 과한 악의적인 해석인가?


3.
중요한 건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아니다.
중요한 건 디워라는 상업영화를 얼마나 즐겁게 소비했는가, 그리고 그 소비를 어떻게 다시 '즐거운 대화'로 재생산할 수 있는가이다. 그런데 진중권 무서워서 이거 뭐 무식한 관객들은 한마디나 제대로 할 수 있을랑가 모르겠다.

물론 소위 '심빠'로 불리는 일부 극렬펜들의 행태를 비호하고 싶은 생각 전혀 없다. 100분 토론에서도 잠깐 언급된, "성 두개 쓰는" 따위의 인격 모독을 '비평의 수사'랍시고 써재끼는 블로거들은 좀 반성적으로 자신의 행위가 갖는 폭력성을 반추해보길 바란다. 그건 정말 아니지 않나?

다만 비평이, 전문 비평의 영역이 온전하게 그 역할을 하려면, 진중권식의 훈계조 비평, 권위적이고, 교조적이며, 기계적인 이론비평의 권위의식은 사라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그 사제적 비평은 이제 종말을 고하고 있다.




p.s.
이 글은 초안입니다.
가급적 빠른 시일안에 추고, 보충, 정리해서 kino21.com에 등록할까 싶네요. 그런데 이왕의 디워 관련글들을 모아서 함께 글 하나로 추고, 보충, 정리할까 싶기도 하구요. 그러면 너무 길어지긴 하겠지만요. ㅡㅡ;

그리고 이글 서두 안내글 말씀 올렸듯, 진중권씨의 비평에 대해서는 좀더 하고 싶은 말이 많아서요. 100분 토론 단상 2. 도 곧 정리해서 등록할까 싶네요. : )


* 이 글은
권위적 계몽주의의 종언 - 디워 관련 100분토론 단상 2 : 무식한 대중도 존중받고 싶단 말이다.
로 이어집니다.





과도기적 딜레마 - 이랜드 사태

2007/08/09 10:21
'이랜드 반대리본'에 뒤늦게 달린 댓글을 이제야 발견했다.
댓글 일부를 인용한다.

사람들마다 의견이 있겠지요..
하지만 누가 내 가게, 우리 누나네 가게 앞에서 " 이 식당 오지마세요. 이 주인 나빠요. 이집 주인이 몇달 일하고 나가라고 했어요" 라고 식당문을 가로막고 손님들을 못들어가게 막고 서 있으면 당신은 어떻게 할 건가요? "당신 생각이 그러니까 그냥 계속 하세요" 라고 할 건가요?

그럼 그곳에서 일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 - 주방장, 서빙하는 사람들, 주차하는 사람들- 은 월급을 못받고 몇달 그러다가 직장을 잃으면 그만인가요? 그래서 그 주인이 망하면 "노동착취"는 사라지고 사회정의는
이제 달성된 건가요? 그러면 자본가는 죽고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이 오는 건가요? 나도 직장잃었는데 주인이 망하니까 이제 된건가요?

혹시 그 투쟁을 뒤에서 후원한 사람은 이제 목표를 달성하고 빠지면 되는 건가요?
제가 그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 주차원 같은 사람입니다.
제 가족은 누가 책임지나요? 제 자식들은, 제 부모님들은요....

- 익명 (임시 닉네임 I'm not Labor. I'm Worker) 께서 남긴 댓글 중에서


이런 질문, 혹은 항변과 비판은 정말 난감하다.
그게 난감한 이유는 그 비판, 항변, 반문이 이유 있고, 거기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그 질문에는 정말 절절한 현실과 그 현실의 아픔이 묻어있다고 나는 믿는다.

실은 이랜드가 망하던지 말던지, 나에겐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도 없다. 나는 이랜드라는 기업이 보여준 행태를 본건대, 이랜드라는 기업은 이 땅에서 사라지길 원한다. 나는 정말 그 기업이 '망했으면 좋겠다'고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한다.

물론 내 바람처럼 이랜드 같은 거대 기업이 쉽게 사라지거나, 망하거나 하지는 않을테다.
나는 국제그룹 싸가지 없다고 공중분해시킬 수 있는 전지전능한 전씨가 아니다.
전재산 29만원으로 골프치는 신비한 능력, 나에겐 없다.

내가 개략적으로 이해하는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은 모델이다.

ㄱ. 어떤 기업이 비정규직법을 악랄하게 (그러나 합법적으로) 악용(?)한다.  
ㄴ. 그 과정에서 '쫓겨난 직원'들은 실력행사에 들어간다.
ㄷ. 최후의 방법으로 실력행사할 수 밖에 없었던, 쫓겨난 직원들(주로 단순 노무직 아줌마들)에 대한 동정여론에 힘입어 그 기업에 사회적 비판이 쏟아지고, 대외적인 이미지는 추락한다.
ㄹ. 곳곳에서 불매운동에 동참한다(과연 얼마나?).
ㅁ. 그래서 그 기업이 망한다(!!!)
ㅂ. 그런데(!) 여전히 그 기업이 '밥줄'인 다수 사람들까지 직장을 잃는다. 즉, 선의의 피해자가 생겨난다.  

문제는 선의의 피해자다.
이는 큰 정의와 작은 정의의 문제이고, 구조적인 문제과 미시적인 문제 사이의 모순이다.
굳이 조어를 만들자면, '과도기적인 딜레마'랄까?

그런데 이 딜레마는 ㅁ. 이랜드가 정말 망해야 문제가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이랜드 망했나? 이랜드 안망했다. 이랜드는, 아직도 뻔뻔스럽게도, "엄마에게 친근한 일터(Mother-Friendly Workplace)’로 선정 됐다"고 언론사들에 '보도자료' 돌린다. (정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할 뿐이다. ㅡㅡ; )

그러니 '불매운동' -> '망한다'는 '공상'일 뿐이다.
그런 사례가 정말 존재하는지, 그래서 정말 '선의의 피해자'들이 생겨난 경우가 존재하는지, 나로선 정말 궁금하다.
혹여라도 이런 사례가 현실적으로 존재한 경우가 있다면 알려주시길 바란다. 

불매운동?
난 솔직히 이랜드 불매운동 리본 달았지만, 이거 정말 실효가 있는지도 의문이다. 그 많은 이랜드 계열사들 이름도 못외우겠다(정말 드럽게 많다).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망각은 빠르고, 상품 마케팅의 달콤한 유혹은 나날이 발전하고, 제도는 언제나 그랬듯 기업의 편이다. 아닌가? 불매운동으로 기업이 정말 망한다고 생각하나? '친근한 일터'라고 보도자료 여전히 날리고 계시는 이랜드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나?

정말 망하는 기업이 생겨나지 않는한, '과도기적 딜레마'에 대한 고민은 그다지 절실한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불매운동을 기업 망하게 하려고, 현실적으로, 기업 문닫게 하기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야만적인 '싸움'에서 그래도 도덕적이고, 힘없는 자들에 조력하기 위해, 이토록 악랄하게 '합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그 제도를 비판하기 위해서, 그 합법적이며, 동시에 악랄한 기업을 (아직 별 힘은 없지만) '시민들의 연대'로 압박하기 위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억울하고, 화딱지나니까 하는거다.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나?
벌써 예전에 공권력 투입해서 다 몰아냈더만, 뭐.
제발 이번 재협상은 노사간에 합리적인 합의점을 도출하기를 바라고, 정부는 제발 좀 중재자의 역할에 충실하기를 바란다.

어제 (8일) 지식인 1259명이 "이랜드·뉴코아 파업 정당"하다는 '지식인 행동의 날'을 선포했단다.
나야 지식인도 뭣도 아니지만, 나도 기꺼이 동참하련다.
이랜드 같은 기업이 많아지면, 결국 그 '야만'의 대가는 언젠가는 다수의 시민들에게 돌아온다.



사족.
시민의 힘으로, 소비자의 힘으로 기업을 쓰러뜨리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그 '과도기적인 딜레마'에 대한 고민은 커지겠지만, 최소한 전씨가 공중분해시킨 국제그룹 사건에서의 그 야만적인 권력의 교훈보다는 훨씬 더 유의미한 교훈을 남길테다.




* 관련 참조 기사
파이넨셜타임즈, [기자수첩] 이랜드가 친근한 일터?/이성재기자
http://www.stoo.com/news/html/000/769/370.html

오마이뉴스, 지식인 1259명이 "이랜드·뉴코아 파업 정당"하다
http://www.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427241



때론 지루하고, 따분하고, 뻔한 저널리즘의 정치논평보다 단 한줄의 인상비평이 사안의 본질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 같다. 물론 때론 노래하는 시가 아니라, 지루한 산문이 필요하기도 하지만.  

꿈씨, "왜 하필 지금이냐?"
http://ggumssi.egloos.com/3672673

읽고 엄청 웃었다. ㅎㅎ

나경원 대변인의 주저리 주저리를 굳이 애써 들어야 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래도 명박씨나 근혜씨는 여론을 조금은 신경쓰는 것 같은데, 한나라당의 구태의연한 반응은 어처구니가 없다.
정치적 센스가 정말 바가지다.
물론 그런 박가지 센스를 계속 보여주면, 개인적으론, 흐뭇하겠다. : )


* 발견장소  
YY



* 덧
아직 소식 듣지 못한 독자가 있으실 수도 있다 싶어서.. ^ ^;
물론 모두들 소식 들으셨겠다싶긴 하지만요.
9시 뉴스도 특집이더만요.
오는 28일부터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있을거랍니다.


* 관련 추천글
쟈칼(정통이단아), 제2차 남북정상회담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http://jaakal.egloos.com/3673625





1. 디워논쟁이 과열되는 이유

디워논쟁이 과열되는 이유는 '취향'과 '해석'의 차이에 있지 않고, 그 해석과 취향을 전달하는 '태도'에 있다고 본다. 디워를 비판하는 진영도 디워를 옹호하는 진영도 마찬가지다. 왜 서로 대화를 시도하지 않고, 배타적으로 자신이 옳다고만 말하나?

그런데 과연 해석이 '절대적으로 옳을 수'나 있나?

김현은 독재 메카니즘을 동어반복에서 찾는다.
독재는 동어반복이다.

나는 옳다.
왜냐하면 나는 옳으니까.

대화는 불가능해지고, 이제는 '권력 게임'만 남게된다.

이 영화는 정말 후졌단 말이다~!!!
심형래 감독을 욕보이지 말란 말이다~!!!

그래서?

거듭 강조하지만 해석은 해석일 뿐이며, 해석 그 자체의 우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석은 다만 그 해석을 낳은 텍스트와 맥락(콘텍스트)을 통해 유동적인 형태로만 유지된다. 어제의 걸작이 오늘의 걸작은 아니며, 여기의 걸작이 거기의 걸작은 아니다.

그러므로 해석은 '진실''사실''진리'의 형태로 채택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설 혹은 권위의 형태로 채택된다.

디워 논쟁, 그 현상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누가 권력을 갖고 있는가?
누가 권위 게임에서 우위에 설 수 있을까?

기존의 담론생산-소비 모델을 따르자면, 비평가들은 우월한 도구들(담론생산에 관한 유통장치들, 일종의 '확성기')을 확보했었다. 물론 지금도 그 시스템의 관성은 유효하다. 여전히 '좀더 큰 스피커'를 갖는 건 '소수의 비평권력'에 한정되어 있다. 하지만 블로그와 포털의 게시판은 이 기존 역학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황우석 파동과 디워 논쟁은 이 지점에서 많은 변별점을 갖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2. 디워, 권위적인 비평권력의 붕괴 - 그 위험한 게임

언젠가 정성일(개인적으론 가장 신뢰하는 영화평론가)이 '피아노'(제인 캠피언)를 비평하면서 그러더라. "관객들은 재미있는 칸 수상작과 재미없는 칸 수상작, 귀신같이 골라내요."

'피아노'라는 텍스트를 보자.
많은 비평가들은, 상식적인 의미에서, 그 '피아노'라는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가능한 의미를 좀더 다양한 관점에서 좀더 풍성하게 추출해낸다. 그런데 그 소위 고급 리뷰어들(비평가들)은 다수의 '예비적 향유자'에게 그 텍스트를 '풍성하게 읽어낼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을 해야한다.

비평가는 어떤 텍스트에 대해 '권위'를 강요하고, 학습시키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좀더 풍성하고, 다양한 '의견'들이 '대화의 형태'로 유통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자신의 해석과 동떨어진 해석을 보내는 관객들을 '야단'치는 역할을 해서는 안된다.

이건 자명하지 않나?
우리 시대는 유래 없는 나르시시즘의 시대다. '권위의 목소리'로 가르치거나, '훈계'하는 목소리가 반가울리 없다. 대중들에게 아부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그저 대화의 상대방으로 인정하자는거지.

피아노를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고(유지나), 제국주의 정치경제학의 관점으로 읽을 수도 있다(정성일). 그리고 나처럼 언어와 권력의 관계로 해석할 수도 있다.

어떤 해석이 '정답'인가? 정답은 없다.
굳이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개별 텍스트 소비자 내부에 서로 개별적인 형태로, 고립적인 형태로, 상대적인 형태로만 존재한다.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한다면, 그야말로 독재적인 성향을 가진 사이코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시대는 그것을 강요하고 있다.
놀라운 독재.


3. 아이러니 : 논쟁과 홍보 마케팅의 역학  

언젠가 '미투와 플톡' 논쟁이 블로고스피어를 뜨겁게 달군 적 있다.
그 논쟁 직후 아거님께서 이렇게 지적했다.

"논쟁은 공짜 홍보를 낳는다"
http://gatorlog.com/?p=676

'디워'와 관련해서 오늘 이런 기사가 실린다.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59622

디워를 '영화도 아니다'라고 비판하는 진영도, 본의와는 다르게, 디워 홍보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4. 결

나는 여전히 전문 비평의 영역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두가 아니라고 말하는 영화에 대해, 모두가 쓰레기라고 말하는 영화를 구원할 수도 있고, 모두가 열광하는 영화를 비판적으로 읽어낼 수 있도록 새로운 관점을 부여해줄도 있기를 바란다(사족 : 디워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올린 영화는 '지구를 지켜라'다. 이 영화는 정말 걸작인데.. 말이지).

하지만 소위 전문 영화비평가들이 자기 세계의 폐쇄적인 권위의식과 '무식한 대중'에 대한 혐오를 버리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버 영화 평점'의 그 유치한 시스템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그것도 비평의 일환으로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비평의 권위는 좀더 빠른 속도로 붕괴될 것이다.

정말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p.s.
여기에 쓴 글은 초안에 불과합니다.
가급적 보충 추고해서 가급적 빠른 시일내로 키노21에 등록할까 싶네요.
ㅡㅡ;;


정은임, 별빛들, 속삭임들...

2007/08/04 23:50
형준이가 정은임에 대해 썼더라.
어찌나 반갑던지... 
그런데 기분이 이상하다.
막 불안한거야, 그게 정은임 때문인지, 그 지나버린 시간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멀리 있는 달콤한 향기들.
바다 속에 가라앉은 깜깜하게 숨겨진 꿈들.

시간은 마치 파스텔같다.
추억은 언제나 그 실제보다 좀더 따뜻하게 채색된다.
그 때를 떠올리면, 지금보다 그닥 낭만적이거나, 혹은 굉장한 희망에 부풀거나, 철없는 설렘들로 일상이 피어나거나.. 그랬던 것 같지는 않다. 지금처럼 그렇게 지루하고, 또 지금처럼 그렇게 식상한 흑백톤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문득 그 시간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거다.
 
검푸르게 빛나는 새벽.
내 작은 골방.
그 작은 라디오 속에서 떨리는 듯, 속삭이는 정은임의 목소리...
지금이라도 어딘가로부터 들려올 듯 하다.
그러면 마치 세상의 모든 별빛들이 그 목소리에 스며들어 반짝거릴 것만 같다.


나는 영화 참 좋아하는데..
영화를 정말 정말 좋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정은임의 FM 영화음악'이다.
정성일과 정은임.
정말 환상의 콤비였지. ㅎㅎ
(물론 홍동식도 있었지만...)

언젠가 이안의 결혼 피로연을 비평하면서 정성일과 정은임이 나눈 농담이 갑자기 기억난다.  

미국으로 유학가 거기서 자리잡은 주인공에게 부모들은 어떻게든 결혼시켜려 한다. 그런데 이 주인공은 게이다. 그걸 알리 없는 부모들은 맞선을 강요하고, 그리고 이 주인공은 별별 조건을 요구한다. 발레 전공하고, 박사학위는 두 개 정도 있고.. 뭐 그런 여자.

정은임이 그 줄거리 듣다가,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여자가 있어요?"
장난스럽게 묻는다.

정성일이 (특유의 무뚝뚝한 듯한 말투로) 대답한다.
"정은임씨요"

그 때 얼마나 정성일이 부럽던지. ㅡㅡ;
왜 이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는지는 잘 모른다.
왜 그 기억이 지금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냥 정은임에게 갑자기 편지를 보내고 싶어졌다.
이 글은 정은임씨에게 보내는 편지다.
그런데 무슨 편지가 이래?

정은임은 이제는 답장을 보낼 수 없겠지만...


은임씨 고마워요.
당신 때문에 제 삭막한 새벽들이 참 아름답게도 빛났더랬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늘 그렇게 속삭이는 환한 별빛들처럼 그렇게 빛나시기를...



오늘 신청곡은,
늘 그랬듯이,
'집시의 시간' 중 '불의 축제'에 나오는 그 노래입니다.

여기...




p.s.
다음 블로거뉴스에 정은임 태그가 있더군요.
참 반가웠습니다.
정은임씨를 따뜻하고, 소중하게 기억하는 한명으로서 고맙기까지 하더군요.
그런데 글을 쓴 블로거에게 어떤 양해도 없이 제목을 함부로 바꾸는 것 같던데요.
정은임씨.. 이 모습 봤으면 가만 있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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