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의 불안을 고려합니다.
개인적인 표준으론 스포일러 '거의' 없습니다.



0.
[덱스터]는 놀랄만큼 따스하고, 비정하리만큼 차가운, 정말 흔하게 만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이율배반에 관한 드라마다. 최소한 이 드라마의 매력에 비견할 수 있는 미국 드라마는, 내 부족한 체험치를 물론 인정하지만, [24] 정도에 불과하다. [덱스터]는 최소한, 극 후반으로 갈수록 지루해지고, 늘어지는 [프리즌 브레이크]보다는 훨씬 뛰어난 드라마다.


1.
드라마 제목이기도 한 주인공인 '덱스터 모건'는 연쇄살인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에게 느끼는 건 차가움이 아니라, 따스함이다.
그는, 적어도 내가 본, 가장 인간적인 연쇄살인마다.
드라마는 연쇄살인마라는 공포스럽고, 차가운 질감을 덱스터의 나레이션으로 따뜻하게 감싼다. 그 덱스터의 건조한 듯, 때론 유머러스한 나레이션은 드라마에 온기를 부여한다.

 
2. 이분법의 해체, 그리고 매력적인 이율배반

이야기는 만화적 상상력에 기반해 있다.
"연쇄살인마를 쫓는 연쇄살인마"라는 홍보문구처럼.

[덱스터]는 기본적으로 선악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심정적으론, 선악이라는 이분법이 존재하며, 덱스터가 살인하는 대상이 그 도덕률의 마지막 보루처럼, 덱스터가 행하는 살인의 정당성, 아니 덱스터라는 캐릭터에게 최소한의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한다. 아무리 케이블에서 만들어진 드라마라도, 그리고 19금 딱지가 붙은 드라마라도, 이 드라마를 소비해야 하는 시청자들을 최소한으로 '보호'(?)할 필요는 존재하니까.

그런데 놀라운 건, 드라마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덱스터는 그 도덕의 최소한을 유지하면서, 또 배반한다는 점이다. 그 배반의 극단적인 모호함(?)은 덱스터가 운명론의 주인공이 되면서 정점에 이른다.그 운명의 실타래는, 매우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다소간 아쉬움을 주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장 비인간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가장 인간적인 드라마





3.   
주인공 덱스터와 그의 연인 리타가 '노말 라이프'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그 장면 직전에 등장하는 장면과의 대비)는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그 장면은 물론, [아이다호]에서 '노말 패밀리'에 대해 리버와 키에누가 나누는 그 장면만큼 간절하지는 않지만, 어떤 드라마에서도 쉽게 느끼지 못할 따스한 온기를 전해준다.

그리고 모든 출연자들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지만, 특히 덱스터를 연기하는 마이클 C. 홀과 그 연인으로 등장하는 줄리 벤츠('리타'역)는 황홀한 앙상블을 보여준다.



※ 별점

* 총평점 : ★★★★★ (다섯개 만점)

* 비전 : ★★★★★
* 대중 친화도 : ★★★★★

* 비주얼 : ★★★★
* 내러티브 : ★★★★★



p.s.
[덱스터] 시즌 1의 에피소드는 모두 12개입니다.
쓸지 안쓸지는 모르겠지만, 가급적 12개의 에피소드를 다시 보고, 제 영화블로그(kino21.com)에 단상들을 올릴까 싶기도 하네요. 이 글은 예외적으로 제 영화블로그에 동시등록합니다.
물론 메타(올블 표준)에는 민노씨.네에 올린 글만을 등록합니다.




* 참조

1. [덱스터] 소개 페이지
덱스터의 제작개요(쇼타임)와 수상내역, 각회별 시놉시스 수록
http://www.foxchannel.co.kr/program/program.asp?txtPgmCd=PG32

2. [덱스터] 편성
폭스 채널, 월~금 오후 10시 50분.
현재 에피소드 5편이 방영될 순서.

3. 한국 폭스 채널 방영분의 오역과 편집에 대해
ㄱ. 몇몇 번역부분에서 좀 짜증나는 오역이 존재한다. 또 등장인물간의 관계상 우리식 감성으로의 '의역'(가령 존대/반말의 사용선택이랄지)도 상당부분 아쉬움이 남는다.

ㄴ.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한국 폭스 채널 방영분에서는 과도하게 잔인한 장면이나, 다소 과하게(?) 야한(ㅡㅡ;;) 몇몇 장면들은 손 본 것 같기도 하다. 그리도 우리나라 케이블 방송 준칙(?)상 흉기는 모자이크 처리된 것도 같고... 보다보면 좀 심하게 짜증이 솟구칠 수도 있을 듯.

어둠의 경로(?) 쪽의 번역과 영상이 내 경우엔 훨씬 좋았다는..
뭐, 그런 얘기다.


#. 외출 때문에 간단히 씁니다.
돌아와서 보충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 )







[올블 top 100 블로거] 대안은 없나?





저도 있네요.
솔직히 기분 좋습니다.

각설하고.. 몇가지 점에 대해 지적합니다.

1. 이벤트의 필요성

올블 자선단체 아닙니다.
수익을 창출해야 합니다.
(덧. 그 규모를 좀더 크게 키워야 할 필요도 존재합니다.
요즘 다음 블로거뉴스 하는 거 보면 그런 생각이 좀더 강하게 듭니다)

'올블 top 100 블로거'와 같은 이벤트 필요하죠.
그 현실적인 필요성을 전적으로 거절하기 힘들다고 봅니다.
이 이벤트는 올블을 대외에 알릴 수 있는 유용한 홍보수단입니다.
지난 이벤트들 역시 꽤 많은 대외적인 홍보효과를 발생시켰다고 체감합니다.  
또 올블에 참여한 블로거들의 나름 화기애애한 축제이기도 하구요.

저는 의도적으로 '이벤트'라고 강조했습니다.
올블 평가시스템은 '시상'이라는 그 말 자체의 최소요건인 객관성을 충분히 만족한다고 볼 수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평가합니다.
물론 올블 평가시스템의 결과로서 영향력있고, 좋은 블로거를 격려하는 측면이 물론 존재하죠.
하지만 객관적인 '시상'이라기 보다는, 적어도 제 개인적인 판단에 의한다면, 올블 나름의 이벤트라고 봅니다.

이 이벤트를 없애자는 말은, 그 취지에는 깊이 공감하는 바이지만, 자본주의 회사로서 올블에게는 너무 부당하죠.
이건 이쯤하구요.

그렇다면 올블 top 100 블로거 이벤트를 대신할 만한 대안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2. 기존 제도의 보완 - 평가표준은 과연 합리적인가?

현실적으로 강력한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제도를 보완하고, 개선하는 일일테죠.

일단 너바나나님께서 간략하게 지적했듯이
http://www.nirvanana.com/246

* top 블로그, 라고 해야 하는 것 같습니다.
블로'거'가 아니고 말이죠. 이건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구요.
다만 너바나나님의 취지가 공감하면서도, 이건 그다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 평가표준을 투명하게 개방해야 하고, 이를 좀더 합리적으로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해주셨습니다.
이는 많은(?) 분들께서, 저 역시도 지난 이벤트에서 강조했던 부분이었는데요.

특히 평가표준에 대해서는 좀더 숙고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네요.

ㄱ. 자기추천(자추) 문제
이는 올블 유저의 자발적인 올블로의 유인을 강화하는 장치입니다.
올블입장으로서는 유저들의 가장 강력한 블로깅 동인인 '이기심'(ㅡㅡ;;)을 시스템을 활성화하기 위한 메카니즘으로 활용하는 '현실적인 대안'의 성격을 갖는다고 봅니다.

즉 자추하기 위해서 올블에 한번이라도 더 들린다는 거죠.
물론 제 추정입니다.

역으로 가정해서, 만일 올블에 자발적으로 많은 유저들이 방문하고, 거기서 좋은 글을 발견하고, 또 매우 높은 참여도를 보인다면, '자추'가 존재할 필요 전혀 없습니다. 물론 이는 추정이구요. 다만 강한 추정입니다.

즉, 자발적인 열혈유저가 꾸준히 증가했고, 일정한 규모 이상으로 올블에서 활동량을 늘려갔다면, '자추'제도는 없어졌을 것으로 판단합니다.  

원칙적으로 사라지기를 바라는데요.
현실적으로 올블의 입장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 아닙니다.


ㄴ. 자추와 메인 노출도의 상승


자추문제는 그 자추로 인해 메인 노출도가 상승하고, 그로 인해 좀더 많은 올블 유저들에게 노출되고, 그로 인해 '추천' 및 '조회수'가 높아진다는 점입니다. 이는 확률적으로 당연한 것이겠죠. 아무리 좋은 글이 있으면 뭐합니까? 그걸 올블 시스템의 얼개 안에서 '평가'하지 않으면 '올블 top 100'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어버립니다.


ㄷ. 메인 디자인의 미디어적인 성격 강화와 평가시스템

올블은 하늘님의 말씀처럼 블로그 '미디어'로서의 성격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메인디자인을 개선해왔습니다. 즉 일종의 언론사닷컴의 메인처럼 '중요이슈' 중심으로, 올블 자체의 '알고리즘'에 바탕해서 나름의 '헤드라인'을 선정하는 디자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고 생각하는데요.

일단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면, 블로그계의 시의성 있는 이슈에 블로거들의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서, 이슈의 공론화를 좀더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역할합니다. 이는 제가 자주 강조해왔던 블로그 민주주의적인 토론 시스템의 하부적 얼개로 기능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만 부정적으론 측면을 생각하면, 그런 거대 이슈중심적인 포스팅들이 당연히 많아지고, 그런 경향을 가속화하는 차원에서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메인 하단에는 좀더 다양한 관심사를 갖도록 개별 포스트를 중심으로 망라적인 나열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여전히 상단 메인의 영향력에 종속되는 프레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메인 우측의 보조장치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역시나 메인 상단이 발산하는 그 거대이슈 중심의 소통 경향화를 효과적으로 보완하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즉 다양성을 담보하기 어렵게 되고, 거대이슈에 종속되는 포스팅을 강화하게 됩니다.

메인 디자인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올블에서 메인디자인을 개편한 시점도 얼마되지 않았고, 또 올블 스텝들의 열정어린 노고에 대해서는 미뤄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3. 올블 top 100 블로거, 대안은 없나?

ㄱ. 올드 멤버는 '명예의 전당'에 모십시다.

좀 과격한 주장인데요. 기존 올블 top 100 블로거들은 명예의 전당과 같은 공간에 따로 모시고(ㅡㅡ;;), 각 회마다 새로운 올블 top 100 블로거를 선정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것이 너무 파격적이라면, 각 당해년도의 10위(혹은 20위, 30위 ...)를 '명예의 전당'에 '모시고'(ㅡㅡ;;), 뉴페이스를 '알릴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하면 어떨까 싶네요.

이는 현실적으로 올블 100 블로거로 선정될 정도의 블로거들, 그것도 상위에 랭크될 정도의 블러거들은 '올블'이라는 루트를 통하지 않고, rss 리더기를 통해 그 블로거들의 콘텐츠에 직접 접근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에, 그 상위의 블로거들은 솔직히 올블이라는 '매개'가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고, 많은 올블 유저들 역시 굳이 올블에 들러서 그 블로거들의 콘텐츠에 접근할 필요성도 현저히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제도가 마련될 수 있다면, 올블 메인 상단의 미디어적 성격을 좀더 파격적으로 강화할 수도 있지 않나 싶기도 하구요. 불필요한 중첩을 줄이는 대신에 미디어성을 좀더 강화하는 방식의 작은 대안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ㄴ. 획일적인 표준이 아닌 각 강조영역별로 top 블로거를 선정하는 방식

현재의 방식은 획일적이며, 망라적인 카테고리 하에 1등부터 100등까지를 선정하는 방식인데요. 이를 각영역별로 종합순위, it(여기는 덩치가 크니까 it/블로그 등등으로 세분해서), 정치, 시사, 문화, 생활 등등으로 나눠서 그 블로그의 특성을 나눠서 평가하면 어떨까 싶기도 하네요. 이렇게 하면 올블을 '바깥'에 존재하는 독자들에게는 꽤 유용한 설명적 기능을 함께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약속 시간이 늦어져서 여기까지 씁니다.

나머지 내용은 가급적 빨리 보충할까 싶네요.





올블이 존재할 수 있는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올블 유저 여러분, 올블 top 100 블로거, 그리고 올블 관계자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덧.
sk가 뻘짓하는 것 같은데요.
이에 대한 블로거 여러분들의 관심을 당부드립니다.






보충 1.

도아님께서 제 부족한 포스트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보충해주셨는데요. 일독 권합니다.

도아, 올블로그에 바란다.

위 도아님의 지적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1. 추천 하고 싶어도 추천하기 어렵다.

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저로선 이 문제가 가장 큰 것 같습니다.
특히 이와 관련해서는 어느 정도 교류가 있는 블로거인 경우에는 '올블'이라는 매개(중간 경로)를 통하지 않고, 직접 rss 리더, 제 개인적인 경우를 본다면, 불여우 라이브 북마크,를 통해 그 개별 포스트에 접근하는데요.

독자로서 그 글을 읽고, 적극적으로 그 글을 '올블'이라는 매개를 통해 다른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현실적으로 그 포스트 하나를 추천하기 위해 '올블을 헤메고' 있을 만큼의 여력은 생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올블을 매개로 하지 않는(그럴 필요성이 떨어지는) 블로그들의 경우는, 현실적으로 좀더 오래된 시간과 경험상 형성된 신뢰도가 있기에, 상대적으로 좀더 좋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블로그일 확률이 더 높다는 문제가 생겨요. 즉, 블로거로서의 체험치가 쌓이면 쌓일수록 올블의 평가시스템에 조력할 수 없는 구조가 생기는 셈이죠.

이 문제를 올블에서는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자발적인 노력을 필요이상으로 요구하는 방식이 아닌, 평가행위가 적극적으로, 하지만 손쉽게 구현되는 방식에 대해서 고민이 필요할줄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적극적인 평가행위가 올블 메인에 '반영'된다면, 올블 메인이 갖는 미디어적인 성격은 좀더 강화될 수 있을테고, 또 그런 적극적인 평가를 기반으로 해서, 그 상단 메인화면을 좀더 다양하게 디자인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네요.


2. 특히 '올블 툴바'와 관련해서 올블 링크-올블 툴바-가 갖는 기술적인 헛점을 악용하는 경우, 혹은 본의 아니게 그 툴바의 기술적 설정이 평가시스템에 장애로 작용하는 경우에 대해선 위 도아님의 포스트 중 첫번째 개선안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3. '올블 링크'는 언제쯤 사라지게 될는지 살짝 궁금하네요. ^ ^;;


이상입니다.


* 확장
nova, 오블 탑100 블로거.
http://trivial.tistory.com/170




0. 어떤 질문
최근 블로깅을 시작한 속류히피님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주셨습니다.

"다른 블로그의 글을 일부 또는 전부 인용한 경우에(물론 출저 밝히고 링크걸었습니다.) 해당 블로거에게 알려줘야 하나요? 아님 인용한 부분이 들어있는 글을 트랙백을 거는 것이 예의인가요?" (속류히피)

제 블로그에 방문하시는 많은 분들께서는  블로깅에 대한 기술적인 이해가 매우 높은, 최소한 저보다는 높은(저는 중간 혹은 중간 이하로 생각하는데요) 분들이 많으셔서요. 이런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좀 민망합니다. 다만 그렇지 못한 분들도 있으시고, 또 블로그를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도 제 블로그의 독자들 중에서는 상당히 계실 줄로 생각합니다. 많은 초보 블로거들을 위한 블로그, 그리고 포스트들이 존재하는데요. 제가 괜한 짓하는 것인지 모르겠네요.

저 역시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많은 좋은 블로그 스승들을 만났지요. 특히나 아틸라님아거님으로부터 블로깅의 기술적인 것들, 그리고 블로그가 갖는 사회적인 함의, 블로그 철학에 관한 깊이 있는 인식과 고민 등.. 많은 것들을 배우고, 또 자극과 영감을 받았습니다. 물론 제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런 것이지만요. 이제 제가 갖는 일천한 체험치와 지식의 한계 내에서나마 초보블로거들께 블로깅을 시작하면서 느끼는 어려움들에 대해, 저 역시 초보블로거로서 함께 공부(?)하는 기분으로 글을 써볼까 합니다. 이 연재(?)는 물론 단발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추가. 두 발로 끝났군요...;;;) 이 글은 초보블로거들을 위한, 그러니 저를 위한 글이기도 합니다. 잘못된 서술에 대해서는 언제라도 지적과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1. 링크와 인용
언젠가 전화 통화중에 아틸라님께서 그러시더군요.

포스팅을 위한 편집도구들을 하나씩 버려야 할 때
마지막까지 남겨야 하는 두 가지는 링크와 인용 (아틸라)


그만큼 블로그에서 링크와 인용은 중요합니다.
왜 그럴까요?

2. 링크와 인용이 중요한 이유 - 관계모델로서의 블로그
블로그라는 툴 자체가 블로거 스스로가 작성하는 글쓰기(저작행위. 물론 UGC 혹은 UCC는 글뿐만 아니라 팟캐스트, 동영상들을 포함)를 기반으로 하면서, 동시에 타인이 작성하는 글쓰기를 '서로 연결'시키는 모델로서 설계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블로그는 블로거 스스로의 독립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다른 블로그와 연계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블로그 스스로의 독립성에 기반하지만, 블로깅한다는 것 자체에 담겨 있는 공동체(연결 매개로서) 의식이랄까요. 블로깅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가치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기존 게시판(BBS)은 그 게시판으로 독자들을 모아오는 말 그대로의 '게시판' 역할을 했다면, 블로그는 각각 자신의 근거지인 블로그 안에서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블로거들과 '관계'할 수 있는 모델을 구축합니다.  혁명적인 전환이죠.  그 '관계'를 위한 기술적인 수단은 하이퍼텍스트 (퍼머) '링크'이고, 그것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포스트에 표시되는 것은 인용에 관한 편집도구를 통해서입니다. 즉 링크와 인용도구는 '관계'의 '상대방'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 저작권과의 관계

많은 분들께서 저작권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감수성을 갖는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저부터도 그러니까요. 즉, 자신의 저작물(블로그에서는 당연히 포스트겠죠)에 대해선 그토록 민감하지만, 타인의 저작물에 대해선 굉장히 둔감한 것 같아요.

포스팅한다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문자(혹은 소리, 영상)에 투사하는 행위입니다. 거기에는 자신의 지성과 감성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세계관이 고스란히 투영되죠. 그런 이유 때문에 저작권 중에서도 저작인격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창작자에게 고유한 권리이고, 일신전속권입니다. 즉 양도 불가능한 성질을 갖죠. 다만 저작권으로 생겨난 저작재산권은 양도 가능합니다. 이 때 비로소 저작자와 저작권자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죠.

인터넷과 블로그로 돌아오죠. 저작권과 관련해서는 진영이 양분되어 있습니다. MS로 대표되는 카피라이트 진영과 리눅스, 혹은 그누프로젝트의 대부 리처드 스톨먼으로 대표되는 카피레프트 진영이 있죠. 그런데 현실적으로 카피라이트와 카피레프트는 서로 반의어가 아니라, 현재 시스템 하에서는 서로의 짝말이라고 생각해요. (참조 : 개정 저작권법 정리) 풀어서 설명드리자면, 인터넷의 기술적인 설정들, 그 기술적인 진보는 공유가 얼마든지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해 있습니다. 복제기술과 전송기술의 발전은 얼마든지 손쉽게, 기존의 상품소비에 당연히 지불했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도 타인의 저작물들을 '향유'할 수 있는 구조이죠.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시스템하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어떤 전지구적인 시스템으로서의 단일정부를 갖고 있지도 않고, 그 지구정부에서 인터넷에 유통되는 컨텐츠를 '공유'한다고 선언하거나, 그런 법률을 제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뭐 말해봐야 입 아프죠. 촘스키는 공공재로 만들어진 인터넷이 사기업에 불과한 MS 등에 의해 사유화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 비판적인 지적에 깊이 공감합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사유재산은 당연히 인정되고, 그 사유재산 중에서 저작권을 갖는 생산물들은 당연히 보호해야 할 필요가 존재합니다. 그게 종이매체라는 '책'의 형태로 유통, 소비되든,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전자기호로서 유통, 소비되든 본질적으론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인터넷 시대의 기술적인 진보와 부합하는 방식으로 그 저작권은 보호되어야 하고, 인터넷이 공공재로 탄생한 그 취지에 맞게 조율되어야 할 필요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얘기가 너무 길어졌는데요. 이상은 최소한의 배경지식으로 숙지하고 계신 것일텐데, 제가 너무 길게 이야기한 것 같아 몹시 민망해지네요. 이제 첫 질문으로 돌아가죠. 속류히피님께서 주신 질문에 대한 제 소박한 견해입니다.

4. 블로그에서의 인용 및 스크랩
1) 정당한 범위 내의 인용
저작권법상 적법한 인용은 저작권 제한 조항의 적용을 받습니다. 당연히 합법이죠. 즉, 보도ㆍ비평ㆍ교육ㆍ연구 등을 목적으로 공표된 저작물을 정당한 범위 안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되는 방식으로 인용하셨다면(저작권법 28조) 이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이 경우에는, 그 출처를 표시하고, 링크를 통해 접근성을 확보하시는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해당 원저작자인 블로거에게 알려주시고, 인용한 포스트를 트랙백으로 보내주신다면 더욱 좋겠지만요.

2) 불펌(모두 데려가기). 혹은 정당한 범위를 벗어난 인용

ㄱ. 각각의 포스트에 대한 권리는 각각의 포스트를 작성한 블로거에게 있습니다.
어떤 저작물(포스트)를 사용하는 일반적인 양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상 살펴보신 바와 같이 자신의 저작권을 어떻게 행사할 것인지도 저작권자인 그 개별 블로거에게 달려 있는 것이죠. 인터넷 시대에 자신의 저작권 정책을 손쉽게 표현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CCL)죠. 이는 일종의 운동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거님의 다음 포스트를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아거, August 12, 2003, 인터넷과 저작권
http://gatorlog.com/mt/archives/001095.html

여기서 간략히 말씀 드리자면, CCL은 다음과 같은 형태로, 주로 사용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이나 일본 등과 같이 저작자표시(attribution)는 모든 라이센스에 기본으로 들어가 있어 실제 운용되는 라이센스는 "저작자표시"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저작자표시-변경금지" "저작자표시-비영리" *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6종류입니다.(Creative Commons License의 종류 ) 이상과 같은 라이센스가 부착된 블로그 경우에는 그 정책에 따라 이용 한계가 결정됩니다.

우리 블로그계에서는 주로 다음 두 가지를 많이 사용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일단 현실적으론 애드센스와의 관련하에서 '비영리'의 범위가 해석상 문제됩니다. 즉 애드센스를 운용하는 블로그 경우에, 이 블로그를 영리목적 블로그로 보아야 하는지, 비영리로 보아야 하는지가 문제되는 것이죠. 이에 대한 CCL 쪽의 입장도 없고, 이런 사례와 관련해서 유권해석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아시는 분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다만 CCL을 법률해석에 참조할 만한 조건으로 보지, 이를 공적 효력을 갖는 '규범'으로 보지는 않는다는 판례는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것도 같지만요.

저 개인적으로는, 제 블로그 공지글로 '블로깅 원칙 및 방법론'에 이에 대해 짧게 썼는데요. 구글애드센스와 다음애드클릭스를 사용하는 블로그에서 제 글을 인용 및 스크랩하는 경우에  원칙적으로 '비영리'라고 해석합니다.  예외적으로 콘덴츠 전부(혹은 상당부)를 스크랩만으로 구성하는 블로그인 경우에는 '영리'로 해석합니다. 즉 이 경우에는 제 블로그에 있는 콘텐츠를 이용할 수 없고, 이를 이용할 경우에는 제 저작권을 침해한 것으로 봅니다.

ㄴ. CCL(혹은 이와 약간 다르긴 하지만 정보공유라이센스)를 사용하지 않는 블로그인 경우
원칙적으로 해당 블로거에게 '승낙'을 받아야 합니다.

ㄷ. '펌(전부 데려가기)'에 대해서는, 제 경우엔 저작권 정책상(출처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 물론 허용하는 바이지만, 이 점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a. 전부인용은 그 해당블로그(혹은 해당 언론사닷컴- 대외적으로 언론사닷컴은 제목과 링크만을 허용하고, 기사의 전부인용은 저작권침해로 간주합니다)으로 돌아가야 할 독자들을 빼앗는 것이 되기 쉽습니다. 즉 접근성을 차단하고, '관계'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일이 되기 쉽죠.  b. 그리고 그 블로그가 수익모델을 운용하는 블로그라면(언론사닷컴이야 말할 것도 없구요), 그 블로그 트래픽을 감소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그 수익을 빼앗는 것이 될수도 있습니다. 좀더 자세한 제 견해는 '스크랩 문화에 대한 단상'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3) '번역' 포스트에 관해 짧게

요즘에 올블을 중심으로 이슈가 되었던(되고 있는?) 문제인데요.
이에 대해서는 수재님께서 좋은 글을 써주셨는데요. 혹여 아직 읽지 못한 블로거들께서는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수재, 불펌 블로그와 번역, 그리고 인기 블로거)

ㄱ. 어떤 개별 포스트의 내용을 '보충'하고, 또 그 포스트와의 의미론적인 연계상 꼭 필요한 경우라면, 즉 앞서 살핀바와 같이 '정당한 범위'에서 '공정한 관행에 합치하는 방식'의 인용이라면 이는 위 1)와 같은 경우라고 생각하구요.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ㄴ. 다만 전적으로 그 '피번역'된 포스트에 의지하거나, 그 내용을 '소개'하는 것에 불과한 포스트
인 경우에는 좀 문제가 다르지 않나 싶어요. 물론 그 번역의 적법성은 피번역된 블로거의 승낙 여부 및 그 피번역 블로그의 저작권 정책에 의해 판단하면 그만입니다.


ㄷ. 제가 주목하는 건 메타블로그와의 관계입니다.
적법하게 '번역'된 포스트의 경우만을 놓고 보죠. 나머지 경우는 그 포스트가 갖는 현실적인 의의,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확장하는 차원에서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하지만, 메타블로그에는 편입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개인적으론, 저로선 적법하게 '번역'된 포스트의 경우라도, 개별 포스트에 대한 평가(솔직히 노출도에 따른 인기도에 불과하다고 생각되기는 하지만요)를 수행하는 메타블로그의 평가시스템에는 '편입'되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견해입니다.

이는 블로깅의 독립성이라는 차원, 그리고 블로그 포스트에는 그 블로거의 실존과 인격이 강하게 투사된다는 차원, 즉 앞서 말씀 드렸듯 저작권의 본질내용인 '저작인격권' 측면, 그리고 메타블로그의 평가시스템과 우리 블로그계의 자율적인 성장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다지 전적으로 찬성하기에는 좀 곤란한 측면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에 대해선 노숙자님께서 쓰신 다음 글을 강하게 일독 권합니다(
노숙자, 블로깅과 사람)

물론 번역이 그 자체로 새로운 창작에 버금가는 노고가 깃든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인정하는 바입니다(참조 : 영어 글을 번역해서 쓴다는 것 ). 그리고 많은 분들께 유용한 정보에 대한 접근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도 중요한 가치를 갖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구요. 어려운 문제네요. 여러분들의 견해가 궁금합니다.


* 알림. (2008. 3. 16.)
'초보블로거'란 카테고리를 지우고, 이 글은 [블로기즘] 카테고리로 이동합니다. ^ ^




#. 정말 디워 얘기는 그만하고 싶었는데요. 주말이고, 뭐 블로깅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지도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끄적거려봅니다.

이 글은 특히 제 글에 명랑님께서 보내주신 글
약간 짜증이 나는 허튼소리
http://philsnote.egloos.com/3330133
에 보내는 트랙백입니다.


대중은 지식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지식을 무기로 군림하려는 태도를 거절할 뿐입니다.


우선 황우석 사태의 광기와 디워라는 영화로 촉발된 사회현상은 동질성보다는 변별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명랑님께서는 양자를 등가로 평가하시나요? 그 폭력적인 배타성이라는 '현상적인 태양'은 비슷할지 모르지만, 그 안에 담긴 함의나, 그런 현상이 발생한 원인과 전개과정은 저로선 매우 상이하다고 평가합니다.  

언론권력이 '디워'를 응원하기 위해 담합했나요?
정치권력이 '디워'에서 나오는 떡고물 먹으려고 심형래씨에게 아부하고 있나요?
시민단체들이, 아니 평론가들이 '디워펜들' 무서워서 찍소리도 못하고 있나요? (설마.. )

'디워'를 하나의 상업영화로서, 문화상품으로서 소비하시는 많은 소비자들이 계시고, 영화펜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소박한 관객들이 좀더 많을 것으로 그저 추정합니다. 그런데 이 분들은 디워논쟁, 디워현상에서 완벽하게 배제된 분들이죠.

가시적으로 과장되게 표출되고, 언론은 이를 통해 장사 제대로 하게 만들어준(MBC 100분 토론을 '탄생'시킨) 디워를 '응원'하는 분들. 이 분들이 디워현상을 '만드신 분'들입니다. 언론은 그저 이 분들을 '뉴스상품'의 하나로 소비하고 계시구요.

그렇게 디워를 열렬히 응원하는 일종의 '컬트펜들', 그 분들은 소위 '먹물'들이 무시하고,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있는 "개떼"들, 혹은 '개티즌들'입니다. 무서우신가요? (ㅡ..ㅡ;) 언론도, 지식인사회도 이분들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그냥 왜 저러나, 이러는거죠. 그러면서 좀 짜증도 나고요(진중권씨처럼).

물론 일부 극렬 디워펜들의 행태, 저 역시 전혀 공감하지 않고, 또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여기서 출발합니다. 자신의 무식과 과열된 애정을 비판하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거에요. 제가 소위 '디워빠'라고 불리는 중딩, 고딩, 넓게 잡아서 대딩이라고 치죠. '데우스 엑스 마키나' 운운하면서, 이런 후진 영화를 보면 안되는거잖아~!!! 이러면, 속으로 뭐라고 할까요? 놀고 있네, 이럽니다.

사족 : 진중권씨는 비평과 응원을 혼동하고, 영화와 축구게임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좀 오버같습니다. 영화가 축구게임이라서 그 '국적만'으로 응원한다는 거 아닙니다. 막연한 운명공동체로서, 역사공동체로서, 문화공동체로서 이런 대중들의 심리반응은 너무도 자연스럽습니다. 이게 이상하시다고 한다면, 도대체 스크린쿼터는 왜 필요한가요? 좋은 상품이 그대로 시장에서 승리하면 그만입니다. 왜 보호하고, 우리 영화라서 지켜야 한다고 그렇게 난리를 치나요. 노무현 대통령의 그 과감무식한 발언처럼 "그렇게 자신이 없나?"라고 폼나게 한마디 하고, 시장논리에, 소비자들의 선택에 쿨하게 맡기면 그만이죠. 사족이 너무 길었네요. 각설하고...

우리에게는 좀더 많은 지식이 필요하고, 좀더 수준높은 시민의식의 고양이 필요합니다. 인정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의 각 분야에 좀더 많은 '비평'이 '대화'가 필요하겠죠. 그런데 비평만 하면서 대화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뭔가요? 비평은 그 자체로 대화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비평을 자신이 갖고 있는 지식을 나열적으로 풀어놓고, 그거 모르면 대화할 가치도 없다고 무시하는 거라면, 그게 무슨 비평입니까, 뻘짓이죠.

하버마스가 포스트 모더니즘 논쟁의 한축에서 주장했듯 (서구에서도) 계몽주의는 '미완의 프로젝트'이고(혹은 인 측면이 많고, 또는 일수도 있고), 더군다나 우리나라와 같은 척박한 현실에서(언론집단도, 교육집단도 끼리끼리 떼거리로 붙어먹을 궁리만 하는) 계몽주의는 더더군다나 미완의 프로젝트겠죠.

그리고 송두율이 명징하게 지적했듯, 그리고 그 자신이 그 역사적 조건의 피해자가 되었듯, 우리나라는 아직 남/북으로 갈려 있는 분단국이고, 그 분단국가라는 조건에서 온갖 이념적인 편견과 의식의 왜곡이 아직도 그렇게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처럼 국가권력, 언론권력, 자본권력이 변신합체해서 온국가 전체를 광기로 몰아넣은 황우석 파동도 불과 2년이 채 흐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계몽주의이라는 그 자체의 방법론과 계몽주의를 꽃피우기 위해 수행해야 하는 현실적인 방법론은 서로 구별되어야 할 필요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대중들은 지식 그 자체를 거절한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과시적으로, 배타적으로 전달하는 그 방식을 거절한 것이고, 그 방식, 그 방법론에서 또 다른 폭력성과 배타성을, 소위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평론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지적 권위의식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얼마나 그 지적 권위가 타당한 것인지도 물론 회의적이긴 하지만요.

"허튼소리" "열등감"... 제목도 그렇고, 본문에 쓰신 표현도 그렇고.. 계몽이 좀더 필요하다고 생각하신다면, 무식한 대중들의 "집단광기"와 "개떼이즘"이 불만이시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극복하고자 하시고, 그런 풍토를 개선하고자 하신다면, 명랑님께서 글에 표현하고 분출하신 "다각도 짜증"들은 그다지 계몽주의의 이상, 그 실현을 위한 방법론과는 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짜증은 짜증을 키우고, 어떤 분야에서 자신이 좀더 많이 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니가 그러는 건 열등감이야"라고 이야기하는 건 비평도 뭣도 아니고, 그저 폭력이고, 잘난척입니다. 그건 유아적인거죠. '캔디'에서 이라이자가 했던 그런 겁니다. 계몽주의의 이상과 전혀 상관없어요. 저는 그렇게 평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중권씨는, 최소한 100분 토론에서는, 일부 극렬 '디워빠'와 마찬가지였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상한 비평용어를 동원하자면 '쌤쌤'이죠.

이상입니다.


#. 이 글은 디워관련 100토론 단상 1 : 어찌하여 진중권은 소통하기를 그치고, 권위의 사제가 되어 기어코는 꼭지가 돌았는가.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권위적 계몽주의의 종언 - 디워 관련 100분토론 단상 2.

: 무식한 대중도 존중받고 싶단 말이다.







1. 진중권의 정답, 그리고 채점  

진중권이 디워 현상의 네 가지 코드를 지적한다.

ㄱ. 애국주의 코드
ㄴ. 민족주의 코드
ㄷ. CG 기술에 대한 찬미  
ㄹ. 심형래 개인에 투사되는 인생극장 코드

진중권의 위 네 가지 가설은 모두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다만 진중권은 문화비평가로서 '디워'를 둘러싼 사회적인 현상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지, '디워'현상이라는 문제를 출제하고, 그 '정답'을 결정하고, 그 정답에서 일탈하는 '해석'들을 채점하는 시험관은 아니다.

그런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 진중권이 100분토론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자신에게 그런 권력이,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자기 해석과 다르는 이유로 비아냥과 조롱과 짜증을 폭발시키는 태도는 디워에 대해 비판하면 무조건 역적으로 취급하는, 무슨 매국노로 취급하는, 그러니 진중권이 비판하는 소위 '디워빠'로 불리는, 일부 디워 열혈펜들의 유아적 행태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 양자간 태도의 본질은 동일하다. 그 본질은 폭력성과 배타성이다. 물론 그 양자의 의견,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들, 무기들이 있느냐 없으냐의 '부차적인' 차이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부차적이다. 적어도 그 태도 자체가 표현하는 폭력과 배타성과 비교형량하면, 그건 정말 부차적으로 보인다.

무식하면 입다물라!
진중권은 그렇게 근엄하게, 때론 짜증섞인 어투로 무식한 네티즌에게 '명령'하고 있다.


2. 문화상품 비평

당신은 왜 디워에 대해 떠느나?
그건 그저 단순한 자기과시욕에 사로잡힌 나르시시즘인가, 아니면 자신의 고결하고, 정의로운 견해에 반하는 그 '무식한 악당'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의감의 발현인가?

문화상품에 대한 비평(행위, 그 비평의 광장)은 그저 자신의 관점, 자신의 인식틀과 방법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무수히 많은 개별 행위들의 어울림에 불과하다. 자신의 해석만이 정의라는 강박관념을 실천하는 강박증 환자들의 사이코드라마도 아니고, 자신의 정답이 세상의 정답이 되어야 한다는 칼부림 나는 권력쟁투의 콜롯세움도 아니다. 선과 악, 혹은 진보와 보수라는 획일적인 구획을 나누고, 상대 진영을 묵사발 만들어야 하는 전투가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문화상품으로서 영화를 비평한다는 것은 자신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을 섞이게 하고 싶다는, 대화하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며, 그래서 좀더 재밌게, 의미있게 살고 싶다는 투정에 불과하다. 적어도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해 토론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치투쟁하는 거 아니고, 권력쟁투하는 거 아니다. 그래서 그 쟁투 끝에 얻는 건 무엇인가? 어느 일방의 승리, 그게 가능할지도 의문이지만, 어느 일방의 패배, 그게 남기는 건 도대체 뭔데?  

'디워 전투에 나서자'는 '한' 네티즌의 선동적인 글을 특별히 선별해서 인용하는 진중권은, 그런 특정의 선동적 문구를 인용함으로써 논의를 자극적으로 디자인하고, 일부 디워 열혈펜이 행하는 전투를 스스로 행하고 있다. 이제 한 영화를 둘러싼 대화는 즐거운 토론이, 차이가 흥미롭게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교류가 아니라, 전투가 된다. 전투적 선동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전투를 선동하고 실천하는 이 아이러니.


3. 디워, 그리고 황우석

디워는 '악'인가?
디워는 '타도해야 하는 적'인가?
심형래는 황우석인가?

디워를 둘러싼 현상에서 디워에 대한 열광적인 일부 펜들의 맹목적 환호와 그 공격적인 배타성을 근거로, 심형래와 황우석을 등가로 맞바꾸는 그 놀라운 둔갑술, 그 놀라운 포장술에 나는 감탄하지만, 전혀 동의할 수는 없다.

해석의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문화상품을 둘러싼 견해대립과 국가권력, 언론권력, 그리고 바이오산업의 장미빛 미래를 기대하며 군침을 흘렸던 자본권력이 '담합'해서 카르텔을 구축하고, "진실보다는 애국"이라는 기괴한 이데올로기를 유포했던 황우석 파동의 광풍이 어떻게 같나?

디워 열풍 뒤에 국가권력과 언론권력, 그리고 영화산업의 기이한 담합과 그런 권력의 카르텔이 과연 존재하나? 어떤 형태로 어떻게 존재하는데?


4. 목적론적 비평의 방법론

다시금 질문해보자.
비평은 무엇이며, 또 비평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진중권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진술한다.
비평은 피드백 시스템이며, 그래서 그 비평(비판)이 비평대상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기 위해선 그 비평은 냉정해야 하고, 감정적인 이끌림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비평은 대중의 감수성에 아부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전문비평가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텍스트를 중심에 놓고, 다른 외부의 조건들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텍스트만을 중심에 놓은 방법론이 채택된다. 이 방법론은 과연 유일무이한 비평의 방법론인가?

비평은 한 해석자의 해석이며, 그 해석은 다양한 방법론을 갖는다.
어떤 방법론이 다른 어떤 방법론보다 우월한 것도 아니고, 어떤 방법론이 다른 방법론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의 위계가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그 당대의 시간/공간을 지배하는 '다수설'로서의 방법론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권력과 권위로서 채택된 것일 수는 있을지어정, '진리'로서 채택된 것일 수는 없다.(보유 참조)

앞선 글에서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법은 권위있는 가설일지는 몰라도, 그걸 거절하면 쓰레기 취급되어야 하는 도덕적인 규범이나, 사이비로 취급되어야 하는 종교적 진리는 아니다.
비평가는 해석하는 자일뿐, 사제가 아니다.

대중은 계몽대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그저 대화의 상대방으로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비평가는 권위의 사제가 되어서는 안되고, 그 대중이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말동무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전문비평 집단과 대중의 간극이 심각하다.
디워는 그 간극을 비약적으로 표출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창한 '세속적인 비평'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사이드가 말한 그 '세속'은 그저 단순한 대중추수가 아닌 비평의 목적론적 이상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유.

이하 단상1.에 남겨주신 여러 블로거들의 의미있는 논평에 대한 제 대답을 정리해서 본문을 보충하는 의미로 남깁니다.

1. 시네마/무비의 구별,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그리고 괴물 (베네치안)

"상업영화, 즉 '무비'는 사회적인 담론을 제시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대중이 사회적인 담론에 무심하도록 만듭니다." 라고 하셨는데요.

가령 가까운 영화사를 되돌이켜보더라도, 프랑스 누벨바그 아이들이 가장 존경했던 히치콕은 철저히 '상업영화'를 찍었던 감독이었잖아요. 히치콕 영화는 어떤 영화보다 상업적이면서, 또 동시에 당대의 자본주의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분열증적 정서를 표현했던 위대한 예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누벨바그 감독들의 상징처럼 이야기되는 '작가주의' 역시도 그게 무슨 대단한 예술에 대한 지향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벨바그 출신 감독들의 영화들은 대체적으로 '난해해지는' 경향을 갖는데, 이에 대해선 정성일씨 역시, 그게 본의인지는 알수 없으만, 매우 비판적인 논평을 남기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영화'산업'과 영화'예술'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방식에 대해 찬성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 자체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상품'이면서, 또 '당연히'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의식지향적인 영화, 쉽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가 있다고 치죠. 그것이 목적하는 바는 '대중의식'의 각성일테죠. 그런데 대중과 만나지 못하는, 아니 대중을 무시하는 '태도'로 대중과 만나겠다면 그건 전제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괴물은 상업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 상업영화는 당연히 예술이기도 하겠지만요. 반복해서 제 견해를 말씀 드리자면, 저는 영화는 산업이면서 동시에 예술이지, 그 양자의 영역을 획일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표준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표준이 존재한다면, 그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해석자들의 주관적이며, 자율적인 수용회로 안에서 '상대적'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구요. 이를 획일적으로 규범화, 개념화할 수 있는 '권위'가 존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가령 말씀하신 '괴물'을 '예술'로 보아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예술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강한 동기가 괴물이라는 텍스트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정도라면 그 견해에 공감합니다만. 괴물은 '당연히' 객관적으로 예술이고, '디워'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라는 지적이시라면 전적으로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2. 문자중심주의. 텍스트 중심주의 (베네치안)

누벨바그 악동으로 고다르와 함께 누벨바그를 이끈 트뤼포의 경우에도 문자중심주의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제 편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진중권씨의 영화해석은 너무 문자중심적이고, 또 텍스트의 서사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텍스트의 해석이 '텍스트로 돌아가자'라는 표어 하에 이뤄져야 할 필요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텍스트 중심주의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굳이 비평용어를 거칠게 빌자면, 독자반응비평, 혹은 수용미학적인 관점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야 하고, 오만하고, 불친절한, 그리고 그 수준이 그다지 높다고 평가되지도 않는 저널비평에서도 문자중심주의적인 텍스트 비평(좀더 직관적으로 풀어보자면 '줄거리' 비평)에서 좀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굳이 부연하자면, 적어도 '디워'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진중권시의 방법론은 '텍스트 중심주의' 문예사조를 비유적으로 인용하자면, 신비평의 태도에 가까운데요. 저는 그 방법론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를 텍스트 해석의 얼개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독자반응비평, 혹은 수용미학적 방법론도 충분히 다른 방법론으로, 텍스트 분석의 방법론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3. 가설로서의 해석.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디워를 예술로 '발견'하는 해석도 가능한가?) (베네치안)  

해석은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일 뿐인데, 그걸 정답으로 강요하고, 그게 만장일치라고 '단정'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정말 심한 억압을 느낍니다. 그게 제 솔직한 느낌이에요. 그리고 해석은 어떤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행위이지, 영화를 어떤 객관적이고, 추상적으로 규범화된 획일적인 표준으로 '등급'매기는 행위가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비평의 본령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진중권씨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적어도 디워에 대해서 논하시는 바를 관찰하면 그런 것 같아요. 이는 좀 과장해서 말씀드리자면 문화적 파시즘의 태도라고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좀더 적극적으로 디워라는 텍스트 자체에 대해서 거칠게나마 논하자면, '디워'를 예술로 볼 수 있는가.. 란 질문을 던지신다면, 저는 당연히 '긍정'합니다. 디워는 물론 훌륭한 영화가 아니지만, 디워를 예술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요.

디워를 예술로 '해석'하는 제 주관적 수용회로가 '가능'할수도 있다는 차원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가령 영화가 그 전체로서, 텍스트 전체의 부피가 온전하게 보전되는 형태로서만 예술적인 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장면 하나, 어떤 잔상 하나로 예술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신다면, 가령 기형도가 "단 한 줄일 수도 있다"라고 노래하는 바나, 마르쿠제가 "예술은 중재된 형태로 그 혁명적인 잠재력을 표현한다"는 바의 취지를 긍정하신다면, '디워'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가능성을 저는 제 나름으로는 발견했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그 마지막 장면은 '심형래씨의 민망한 연애편지'를 말씀드리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4. 푸코, 영화의 사회적인 기능 (베네치안)

푸코 영화를 '자본주의의 반동적인 회상장치'라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죠. 저는 푸코의 방법론과 인식틀에 감탄하고, 푸코를 매우 존경스럽게 생각합니다만, 최소한 영화에 대한 푸코의 인식에 대해서는 그다지 찬성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베네치안군께서 말씀하시는 취지("영화라는 매체가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 사회의 긍정적인 발전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에 저 역시 전폭적으로 공감하고, 영화가 그런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데요. 그것이 '예술'영화로만 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거듭 말씀 올리자면, 영화는 산업이면서 그 자체로 예술양식의 하나라고 보구요. 그 정도의 차이는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유럽쪽에서는 존 맥티어넌의 '라스트 액션 히어로'를 굉장히 중요한 포스트모던 경향을 표현해주는 영화로 취급(해석)했지만(그 개봉 당시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대대적인 특집을 기획했던 것으로 압니다), 정작 미국내에서는 그저그런 '애들 영화'로 폄하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해석은 그 해석을 낳는 공간/시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어요.


5. 비평의 영역과 재미의 영역은 같은 층위인가 (N.)

본질적으로 그 영역은 같은 것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비평'과 '영화적 재미'는 서로 구별되는 영역에 속한 것으로 취급된다고 봅니다. 이는 현실 비평이 자신의 지식을 과시적으로 배설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보통의 소박한 관객들이 영화 후체험(영화를 보고 난뒤에 그 영화를 매개로 좀더 즐겁게 대화하고, 그 의미를 풀어가는..)에 대해서 그다지 큰 의미를 두고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과 소감을 배타적으로 '유지'하려는 성향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 점에 대해서는 큰 아쉬움을 갖고, 양자 모두 영화를 통해 좀더 즐겁게 영화 그 자체를, 더 나아가 사람과 사회와 '관계'를 즐겁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양 집단(?) 모두 전향적인 태도의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5-1. 같은 층위라면 왜 그런가 (N.)

위 답변으로 갈음합니다. ^ ^
그것은 궁극적으로 같은 층위에서 서로 구별없이 비평하는 것, 그리고 그 비평에 대해 즐겁게 대화하고, 영화를 매개로 자신의 인식 지평을 좀더 크게 확대하는 것, 이런 일들이 '재미'로 일상적으로 향유되기를 바랍니다.


6. 전문가 집단의 비평에 대한 가치 평가(N.)

솔직히 현실적으로 신뢰하고, 또 그 의견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비평가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간략히 기존 비평가를 언급하자면,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비평가는 정성일씨구요. 온라인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허지웅씨의 견해는 꽤 신뢰하는 편입니다.

한국 영화 비평의 수준(?)에 대해서도, 물론 제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합니다만,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든 것 같구요. 특히나 저널리즘에서 행하는 비평들, 그리고 포털의 시스템과 연계되어 업/다운, 한줄 논평.. 등을 행하는 비평은 그 자체로 비평으로 인정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다만 전문비평의 영역은 여전히 의미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구요. 대중들이 만들어내는 아마추어 비평들과 서로 많은 접점을 갖고 즐겁게 대화를 만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로서는 전문비평이 대중들의 소박한 비평에 많은 자극이 되고, 또 그렇게 대중들의 자발적인 비평문화가 고양되는 이런 모델이 정립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7. 영화에 대한 비판을 관객에 대한 비판으로 동일시하는 문제 (별밤)

물론입니다. 양자는 서로 별개죠. 다만 서로가 '정답'이라고 우기는 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저 해석이고, 또 관점의 차이임을 인정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즐겁게 대화할 수 있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뭐 서로 '응원'하고, '지지선언'하고.. 이러고 있으니.. 좀 이상해보입니다.


8. 관객들과 '호흡'하는 비평이란 무엇인가 (Gloridea)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호흡'하는 그 다양한 행위 유형을 추상적으로 개념화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네요. 그 '호흡'과 '존중'의 형태는 객관적인 추상화가 어려운 개별 상황마다의 '편차'를 갖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다만 최소한으로 제 소박한 견해를 말씀 드리자면, ㄱ. 적어도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항상 인정하는 태도가 견지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ㄴ. 그리고 비평행위의 목적성과 부합하는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필연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9. 진중권 토론 태도는 '자위행위' 같다 (과객)

자위행위라는 표현은 ^ ^;; 굉장히 강하지만, 직관적으로 진중권씨의 태도를 상징하는 표현같네요. 물론 진중권씨도 사람이고, 때론 꼭지 돌 수 있고, 그 분노가 비평의 동인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을 과도한 공격성향으로, 과시적인 제스처로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지에 대해선.. 진중권씨에게 막연하게나마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아쉬움이 깊네요.


10. 계몽대상으로서의 대중 (이스트라)

대중을 일방적인 "계몽 대상"으로 보는 태도를 비판해주셨는데요.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 물론 '대중심리'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때론 폭력적이지만, 그 현상 자체를 '대중, 혹은 시민'과 동일시해서 적대적으로 취급하는 것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설득하고, 유혹하고, 대화하는 '상대방'으로 바라본다면, 이런 비평태도가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물론 때로는 '싸워야 할 필요'가 존재하겠지만, 최소한 '디워'에 대해서는 그렇게 싸워야 할 이유가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서로 충분히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매개라고 생각해요.


11. 촘스키가 좌파 지식인들의 방법론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대중을 가르치려 들지말고 사실을 보여주고 그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릴수 있도록 도와주워라" (시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