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디워관련 100토론 단상 1 : 어찌하여 진중권은 소통하기를 그치고, 권위의 사제가 되어 기어코는 꼭지가 돌았는가.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권위적 계몽주의의 종언 - 디워 관련 100분토론 단상 2.
: 무식한 대중도 존중받고 싶단 말이다.
1. 진중권의 정답, 그리고 채점 진중권이 디워 현상의 네 가지 코드를 지적한다.
ㄱ. 애국주의 코드
ㄴ. 민족주의 코드
ㄷ. CG 기술에 대한 찬미
ㄹ. 심형래 개인에 투사되는 인생극장 코드
진중권의 위 네 가지 가설은 모두 충분히 설득력 있는 가설이다.
다만 진중권은 문화비평가로서 '디워'를 둘러싼 사회적인 현상을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지, '디워'현상이라는 문제를 출제하고, 그 '정답'을 결정하고, 그 정답에서 일탈하는 '해석'들을 채점하는 시험관은 아니다.
그런 권한은 누구에게도 없다.
그런데 진중권이 100분토론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자신에게 그런 권력이,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 같다. 자기 해석과 다르는 이유로 비아냥과 조롱과 짜증을 폭발시키는 태도는 디워에 대해 비판하면 무조건 역적으로 취급하는, 무슨 매국노로 취급하는, 그러니 진중권이 비판하는 소위 '디워빠'로 불리는, 일부 디워 열혈펜들의 유아적 행태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 양자간 태도의 본질은 동일하다. 그 본질은 폭력성과 배타성이다. 물론 그 양자의 의견, 입장을 지지하는 근거들, 무기들이 있느냐 없으냐의 '부차적인' 차이만이 존재한다. 이것은 부차적이다. 적어도 그 태도 자체가 표현하는 폭력과 배타성과 비교형량하면, 그건 정말 부차적으로 보인다.
무식하면 입다물라!
진중권은 그렇게 근엄하게, 때론 짜증섞인 어투로 무식한 네티즌에게 '명령'하고 있다.
2. 문화상품 비평당신은 왜 디워에 대해 떠느나?
그건 그저 단순한 자기과시욕에 사로잡힌 나르시시즘인가, 아니면 자신의 고결하고, 정의로운 견해에 반하는 그 '무식한 악당'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정의감의 발현인가?
문화상품에 대한 비평(행위, 그 비평의 광장)은 그저 자신의 관점, 자신의 인식틀과 방법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무수히 많은 개별 행위들의 어울림에 불과하다. 자신의 해석만이 정의라는 강박관념을 실천하는 강박증 환자들의 사이코드라마도 아니고, 자신의 정답이 세상의 정답이 되어야 한다는 칼부림 나는 권력쟁투의 콜롯세움도 아니다. 선과 악, 혹은 진보와 보수라는 획일적인 구획을 나누고, 상대 진영을 묵사발 만들어야 하는 전투가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문화상품으로서 영화를 비평한다는 것은 자신의 관점과 타인의 관점을 섞이게 하고 싶다는, 대화하고 싶다는 소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며, 그래서 좀더 재밌게, 의미있게 살고 싶다는 투정에 불과하다. 적어도 영화를 보고, 그에 대해 토론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치투쟁하는 거 아니고, 권력쟁투하는 거 아니다. 그래서 그 쟁투 끝에 얻는 건 무엇인가? 어느 일방의 승리, 그게 가능할지도 의문이지만, 어느 일방의 패배, 그게 남기는 건 도대체 뭔데?
'디워 전투에 나서자'는 '한' 네티즌의 선동적인 글을 특별히 선별해서 인용하는 진중권은, 그런 특정의 선동적 문구를 인용함으로써 논의를 자극적으로 디자인하고, 일부 디워 열혈펜이 행하는 전투를 스스로 행하고 있다. 이제 한 영화를 둘러싼 대화는 즐거운 토론이, 차이가 흥미롭게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교류가 아니라, 전투가 된다. 전투적 선동을 비판하면서 스스로는 전투를 선동하고 실천하는 이 아이러니.
3. 디워, 그리고 황우석 디워는 '악'인가?
디워는 '타도해야 하는 적'인가?
심형래는 황우석인가?
디워를 둘러싼 현상에서 디워에 대한 열광적인 일부 펜들의 맹목적 환호와 그 공격적인 배타성을 근거로, 심형래와 황우석을 등가로 맞바꾸는 그 놀라운 둔갑술, 그 놀라운 포장술에 나는 감탄하지만, 전혀 동의할 수는 없다.
해석의 다양성이 존중되어야 하는 문화상품을 둘러싼 견해대립과 국가권력, 언론권력, 그리고 바이오산업의 장미빛 미래를 기대하며 군침을 흘렸던 자본권력이 '담합'해서 카르텔을 구축하고, "진실보다는 애국"이라는 기괴한 이데올로기를 유포했던 황우석 파동의 광풍이 어떻게 같나?
디워 열풍 뒤에 국가권력과 언론권력, 그리고 영화산업의 기이한 담합과 그런 권력의 카르텔이 과연 존재하나? 어떤 형태로 어떻게 존재하는데?
4. 목적론적 비평의 방법론 다시금 질문해보자.
비평은 무엇이며, 또 비평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
진중권은 다음과 같은 취지로 진술한다.
비평은 피드백 시스템이며, 그래서 그 비평(비판)이 비평대상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되기 위해선 그 비평은 냉정해야 하고, 감정적인 이끌림을 허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비평은 대중의 감수성에 아부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전문비평가들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전제 하에서 텍스트를 중심에 놓고, 다른 외부의 조건들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텍스트만을 중심에 놓은 방법론이 채택된다. 이 방법론은 과연 유일무이한 비평의 방법론인가?
비평은 한 해석자의 해석이며, 그 해석은 다양한 방법론을 갖는다.
어떤 방법론이 다른 어떤 방법론보다 우월한 것도 아니고, 어떤 방법론이 다른 방법론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의 위계가 존재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그 당대의 시간/공간을 지배하는 '다수설'로서의 방법론은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적인 권력과 권위로서 채택된 것일 수는 있을지어정, '진리'로서 채택된 것일 수는 없다.(보유 참조)
앞선 글에서 말했듯,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작법은 권위있는 가설일지는 몰라도, 그걸 거절하면 쓰레기 취급되어야 하는 도덕적인 규범이나, 사이비로 취급되어야 하는 종교적 진리는 아니다.
비평가는 해석하는 자일뿐, 사제가 아니다.
대중은 계몽대상이 되기를 원하지 않고, 그저 대화의 상대방으로 존중받기를 원한다.
그리고 지식인으로서 비평가는 권위의 사제가 되어서는 안되고, 그 대중이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말동무가, 친구가 되어야 한다.
전문비평 집단과 대중의 간극이 심각하다.
디워는 그 간극을 비약적으로 표출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에드워드 사이드가 주창한 '세속적인 비평'는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본다. 사이드가 말한 그 '세속'은 그저 단순한 대중추수가 아닌 비평의 목적론적 이상을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유. 이하 단상1.에 남겨주신 여러 블로거들의 의미있는 논평에 대한 제 대답을 정리해서 본문을 보충하는 의미로 남깁니다.
1. 시네마/무비의 구별,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그리고 괴물 (베네치안) "상업영화, 즉 '무비'는 사회적인 담론을 제시하는 것을 거부함과 동시에 대중이 사회적인 담론에 무심하도록 만듭니다." 라고 하셨는데요.
가령 가까운 영화사를 되돌이켜보더라도, 프랑스 누벨바그 아이들이 가장 존경했던 히치콕은 철저히 '상업영화'를 찍었던 감독이었잖아요. 히치콕 영화는 어떤 영화보다 상업적이면서, 또 동시에 당대의 자본주의와 그 속에 사는 인간의 분열증적 정서를 표현했던 위대한 예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누벨바그 감독들의 상징처럼 이야기되는 '작가주의' 역시도 그게 무슨 대단한 예술에 대한 지향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벨바그 출신 감독들의 영화들은 대체적으로 '난해해지는' 경향을 갖는데, 이에 대해선 정성일씨 역시, 그게 본의인지는 알수 없으만, 매우 비판적인 논평을 남기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영화'산업'과 영화'예술'을 분리해서 사고하는 방식에 대해 찬성하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 자체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상품'이면서, 또 '당연히'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의식지향적인 영화, 쉽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가 있다고 치죠. 그것이 목적하는 바는 '대중의식'의 각성일테죠. 그런데 대중과 만나지 못하는, 아니 대중을 무시하는 '태도'로 대중과 만나겠다면 그건 전제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요.
괴물은 상업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그 상업영화는 당연히 예술이기도 하겠지만요. 반복해서 제 견해를 말씀 드리자면, 저는 영화는 산업이면서 동시에 예술이지, 그 양자의 영역을 획일적으로 구별할 수 있는 표준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표준이 존재한다면, 그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해석자들의 주관적이며, 자율적인 수용회로 안에서 '상대적'으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구요. 이를 획일적으로 규범화, 개념화할 수 있는 '권위'가 존재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가령 말씀하신 '괴물'을 '예술'로 보아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괴물'을 '예술적인 측면'으로 해석할 수 있는 강한 동기가 괴물이라는 텍스트 안에 잠재되어 있다는 정도라면 그 견해에 공감합니다만. 괴물은 '당연히' 객관적으로 예술이고, '디워'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라는 지적이시라면 전적으로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2. 문자중심주의. 텍스트 중심주의 (베네치안)누벨바그 악동으로 고다르와 함께 누벨바그를 이끈 트뤼포의 경우에도 문자중심주의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제 편견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진중권씨의 영화해석은 너무 문자중심적이고, 또 텍스트의 서사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어떤 텍스트의 해석이 '텍스트로 돌아가자'라는 표어 하에 이뤄져야 할 필요는 전혀 없어 보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텍스트 중심주의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하구요. 굳이 비평용어를 거칠게 빌자면, 독자반응비평, 혹은 수용미학적인 관점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야 하고, 오만하고, 불친절한, 그리고 그 수준이 그다지 높다고 평가되지도 않는 저널비평에서도 문자중심주의적인 텍스트 비평(좀더 직관적으로 풀어보자면 '줄거리' 비평)에서 좀더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굳이 부연하자면, 적어도 '디워'를 분석하고, 비평하는 진중권시의 방법론은 '텍스트 중심주의' 문예사조를 비유적으로 인용하자면, 신비평의 태도에 가까운데요. 저는 그 방법론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를 둘러싼 콘텍스트를 텍스트 해석의 얼개로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독자반응비평, 혹은 수용미학적 방법론도 충분히 다른 방법론으로, 텍스트 분석의 방법론으로 '인정'되어야 한다고 말씀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3. 가설로서의 해석. 해석의 무한한 가능성(디워를 예술로 '발견'하는 해석도 가능한가?) (베네치안) 해석은 정답이 아니라, 하나의 '가설'일 뿐인데, 그걸 정답으로 강요하고, 그게 만장일치라고 '단정'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정말 심한 억압을 느낍니다. 그게 제 솔직한 느낌이에요. 그리고 해석은 어떤 영화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행위이지, 영화를 어떤 객관적이고, 추상적으로 규범화된 획일적인 표준으로 '등급'매기는 행위가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비평의 본령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진중권씨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적어도 디워에 대해서 논하시는 바를 관찰하면 그런 것 같아요. 이는 좀 과장해서 말씀드리자면 문화적 파시즘의 태도라고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좀더 적극적으로 디워라는 텍스트 자체에 대해서 거칠게나마 논하자면, '디워'를 예술로 볼 수 있는가.. 란 질문을 던지신다면, 저는 당연히 '긍정'합니다. 디워는 물론 훌륭한 영화가 아니지만, 디워를 예술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요.
디워를 예술로 '해석'하는 제 주관적 수용회로가 '가능'할수도 있다는 차원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가령 영화가 그 전체로서, 텍스트 전체의 부피가 온전하게 보전되는 형태로서만 예술적인 가치를 획득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장면 하나, 어떤 잔상 하나로 예술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신다면, 가령 기형도가 "단 한 줄일 수도 있다"라고 노래하는 바나, 마르쿠제가 "예술은 중재된 형태로 그 혁명적인 잠재력을 표현한다"는 바의 취지를 긍정하신다면, '디워'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 가능성을 저는 제 나름으로는 발견했다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그 마지막 장면은 '심형래씨의 민망한 연애편지'를 말씀드리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4. 푸코, 영화의 사회적인 기능 (베네치안) 푸코 영화를 '자본주의의 반동적인 회상장치'라고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죠. 저는 푸코의 방법론과 인식틀에 감탄하고, 푸코를 매우 존경스럽게 생각합니다만, 최소한 영화에 대한 푸코의 인식에 대해서는 그다지 찬성하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물론 베네치안군께서 말씀하시는 취지("영화라는 매체가 우리가 살아가는 민주주의 사회의 긍정적인 발전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에 저 역시 전폭적으로 공감하고, 영화가 그런 역할을 하기를 바라는데요. 그것이 '예술'영화로만 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거듭 말씀 올리자면, 영화는 산업이면서 그 자체로 예술양식의 하나라고 보구요. 그 정도의 차이는 '상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유럽쪽에서는 존 맥티어넌의 '라스트 액션 히어로'를 굉장히 중요한 포스트모던 경향을 표현해주는 영화로 취급(해석)했지만(그 개봉 당시 '까이에 뒤 시네마'에서 대대적인 특집을 기획했던 것으로 압니다), 정작 미국내에서는 그저그런 '애들 영화'로 폄하되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해석은 그 해석을 낳는 공간/시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사례가 아닌가 싶어요.
5. 비평의 영역과 재미의 영역은 같은 층위인가 (N.) 본질적으로 그 영역은 같은 것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비평'과 '영화적 재미'는 서로 구별되는 영역에 속한 것으로 취급된다고 봅니다. 이는 현실 비평이 자신의 지식을 과시적으로 배설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보통의 소박한 관객들이 영화 후체험(영화를 보고 난뒤에 그 영화를 매개로 좀더 즐겁게 대화하고, 그 의미를 풀어가는..)에 대해서 그다지 큰 의미를 두고 않고, 자신의 주관적인 감상과 소감을 배타적으로 '유지'하려는 성향을 보여주기도 하는 것 같아요.
이 점에 대해서는 큰 아쉬움을 갖고, 양자 모두 영화를 통해 좀더 즐겁게 영화 그 자체를, 더 나아가 사람과 사회와 '관계'를 즐겁게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기를 원합니다. 양 집단(?) 모두 전향적인 태도의 변화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5-1. 같은 층위라면 왜 그런가 (N.) 위 답변으로 갈음합니다. ^ ^
그것은 궁극적으로 같은 층위에서 서로 구별없이 비평하는 것, 그리고 그 비평에 대해 즐겁게 대화하고, 영화를 매개로 자신의 인식 지평을 좀더 크게 확대하는 것, 이런 일들이 '재미'로 일상적으로 향유되기를 바랍니다.
6. 전문가 집단의 비평에 대한 가치 평가(N.) 솔직히 현실적으로 신뢰하고, 또 그 의견을 통해 즐거움을 얻는 비평가들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간략히 기존 비평가를 언급하자면, 가장 많이 영향을 받은 비평가는 정성일씨구요. 온라인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허지웅씨의 견해는 꽤 신뢰하는 편입니다.
한국 영화 비평의 수준(?)에 대해서도, 물론 제 주관적인 판단에 불과합니다만, 그다지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든 것 같구요. 특히나 저널리즘에서 행하는 비평들, 그리고 포털의 시스템과 연계되어 업/다운, 한줄 논평.. 등을 행하는 비평은 그 자체로 비평으로 인정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다만 전문비평의 영역은 여전히 의미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구요. 대중들이 만들어내는 아마추어 비평들과 서로 많은 접점을 갖고 즐겁게 대화를 만들어가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저로서는 전문비평이 대중들의 소박한 비평에 많은 자극이 되고, 또 그렇게 대중들의 자발적인 비평문화가 고양되는 이런 모델이 정립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7. 영화에 대한 비판을 관객에 대한 비판으로 동일시하는 문제 (별밤) 물론입니다. 양자는 서로 별개죠. 다만 서로가 '정답'이라고 우기는 태도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저 해석이고, 또 관점의 차이임을 인정하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고 즐겁게 대화할 수 있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건 뭐 서로 '응원'하고, '지지선언'하고.. 이러고 있으니.. 좀 이상해보입니다.
8. 관객들과 '호흡'하는 비평이란 무엇인가 (Gloridea) 중요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호흡'하는 그 다양한 행위 유형을 추상적으로 개념화하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되네요. 그 '호흡'과 '존중'의 형태는 객관적인 추상화가 어려운 개별 상황마다의 '편차'를 갖고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다만 최소한으로 제 소박한 견해를 말씀 드리자면, ㄱ. 적어도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항상 인정하는 태도가 견지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ㄴ. 그리고 비평행위의 목적성과 부합하는 방법론에 대한 고민이 필연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9. 진중권 토론 태도는 '자위행위' 같다 (과객) 자위행위라는 표현은 ^ ^;; 굉장히 강하지만, 직관적으로 진중권씨의 태도를 상징하는 표현같네요. 물론 진중권씨도 사람이고, 때론 꼭지 돌 수 있고, 그 분노가 비평의 동인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것을 과도한 공격성향으로, 과시적인 제스처로 표출해야만 직성이 풀리는지에 대해선.. 진중권씨에게 막연하게나마 호감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아쉬움이 깊네요.
10. 계몽대상으로서의 대중 (이스트라) 대중을 일방적인 "계몽 대상"으로 보는 태도를 비판해주셨는데요.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 물론 '대중심리'는 매우 비합리적이고, 때론 폭력적이지만, 그 현상 자체를 '대중, 혹은 시민'과 동일시해서 적대적으로 취급하는 것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설득하고, 유혹하고, 대화하는 '상대방'으로 바라본다면, 이런 비평태도가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물론 때로는 '싸워야 할 필요'가 존재하겠지만, 최소한 '디워'에 대해서는 그렇게 싸워야 할 이유가 크지 않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서로 충분히 즐겁게 대화할 수 있는 매개라고 생각해요.
11. 촘스키가 좌파 지식인들의 방법론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대중을 가르치려 들지말고 사실을 보여주고 그들이 스스로 결론을 내릴수 있도록 도와주워라" (시태오)
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저도 요새 즐겁게 보고있는 드라마에요.^^
쇼타임 드라마중에서 최고 시청률을 갱신한 드라마라고 하더라구요.
생각의 전환이 정말 신선한것 같습니다. 연쇄살인마는 항상 악당이어야 될것 같은데 말이죠.
쇼타임 오리지널 중에선 최고였다고 하더군요.
저도 굉장히 재밌게 봐서요.
시간되면 한번 더 찬찬히 보고 싶은 작품입니다. ^ ^
한국 드라마 아니네.
아니면 맞나? 드라마를 잘 안봐서 모르겠네요.
내용상 양놈꺼 같은데.
한국 드라마도 논평부탁.
ㅎㅎ
한국 드라마는 최근에 꾸준히 본 작품이 없어서요. ^ ^;
기회가 닿으면요..
정말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시즌 2 1,2편 보고나서 괜히봤다고 땅을 치고 후회하고 있는 중 입니다.-_-;;
예전에 미투로그에도 쓰셨잖아요? ㅎㅎ
미투 한방 강하게 날립니다. : )
요즘 기분도 꿀꿀한데 드라마에나 한번 빠져볼까봐요.
하이킥 이후에 TV프로 쪽은 쳐다도 안봤는데^^;
많은 위로가 되어줄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꼭 한번 보시길.. : )
자꾸 땡기기는 하는데, 아직 소프라노스도 끝내지 못해서요. 게으른 사람에게 드라마는 너무 힘듭니다~
그렇군요. : )
시간 되시면 꼭 한번 보세요.
정말 뛰어난 작품입니다.
정말 보고 싶어지는군요. 아 애는 언제나 안울고 자려나.. ㅠ.ㅠ
그로커님 때문에 히어로즈를 봤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 )
아이 때문에 즐겁고, 한편 다소 힘드시겠습니다. ^ ^
개인적으로 정말 재미나게 본 드라마입니다.
오프닝에서 주는 감각적인 영상과 달리 내용은 좀 쑈킹한 면도 있었지요.
저로선 24 이후로는 최고의 드라마가 아닌가 싶네요. : )
음... 이 글을 안 봤으면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프리즌 브레이크를 마지막으로 주변에서 추천하는
드라마도 안 본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이걸 보니 이 시리즈 막 보고 싶은 욕구가...
이러면 안 되는데... T.T
요즈음 너무 영화나 드라마를 많이 봐서...
자제를 하려고 하는데 그게 안 될 듯 하네요... ^^
본의 아니게 죄송. ^ ^;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앗! 정말 반갑네요.
미리 알았다면 맥주라도 한잔 했을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이렇게 다시(?) 연락이 닿으니 더 좋네요. ㅎㅎ
종종 들러주십시오. : )
'24'는 별로 뛰어난 드라마라곤 생각이 안 되네요. 처음은 재밌지만 시즌이 거듭될수록 재판을 보는 듯해.. 2시즌까지만 겨우 봤네요. 3은 첫 편 보다가 도저히... 또 볼 염두가...
그러셨군요. 아무리 뛰어난 작가들 수십명씩 뛰어든다고 해도 시즌을 거듭하면서 다소 식상하다는 느낌, 소재고갈이라는 한계에서 자유롭기는 힘들겠죠. 그런데 저는 시즌3을 그 재미의 차원에선 가장 재밌게 봤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