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에 썼던 동일 제목 글을 대폭 수정, 보충하고, 추고합니다. 역시나 글 보존공간 이동 차원이고, 관련글(#.140. 141. 142)을 동시에 이동해야 할 필요(링크) 때문에 함께 옮겨옵니다.  


1. 대중 vs 시민

난 솔직히 대중과 시민의 의미/어감을 엄격하게 구별해서 사용하지 않았었다. 잘 구별되지도 않는 것 같고, 문맥에 따라 그 때 그 때 적당하다 싶은 용어를 쓸 뿐이었다. 그런데 후딘(블로그 친구)은 그걸 구별해서 쓰더라. 나름 효용이 있겠다 싶었다. 내 나름으로 다음과 같이 사용하기로 했다.

'대중'은 스스로의 이름을 갖지 못한 자, 대상화된 자, 어떤 권력의 목적이자 표적이 된 불특정 집단의 총합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권력의 의지에 따라 '사용된다'. 그 권력의 대표적인 이름은 자본권력과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이다. 그러니까 내가 '대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건 카를 만하임의 우려를 깊이 공유하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대중'이다.  

'시민'은 자신이 권력작용의 장(場), 한가운데 있는 것을 인식하는 존재이며, 그래서 그 권력들이 어떤 방향으로 자신들에게 부딪히는지를 그 각 상황 상황마다 인지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까 권력이라는 좌표에서 자기의 위치를 '자리매김' 최소한의 사회적, 정치적 인식을 갖는 자(집단)를 나는 시민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그는 쉽게 말해서 시민은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확정할 수 있고, 특정할 수 있는 존재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식으로 말하면, 시민은 '자신의 존재 좌표'를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비판적 사회구성원이다.

물론 '대중'과 '시민'은 구별되지만, 흔히 겹친다.
나는 대중이면서, 시민이다.
당신이 그렇듯이.


2. 제1권력 ; 자본

노무현이 언젠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 "권력은 자본으로 넘어갔다".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자본권력의 그 망라적인 지배력, 그 도저한 지배력은 매트릭스, 그 자체인 것 같다. 도무지 그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 자본은 어떤 색깔을 갖고 있을까? 그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나는 질문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는 마르크스가 아니다.

나는 막연하게 감촉할 뿐이다. 마치 그리고 장님처럼 더듬거릴 뿐이다. 그렇게 감촉되는 바를 기술하자면, 자본은 자본 스스로를 위해 복무한다. 자본 스스로를 위해, 그게 중요하다. 자본은 자본(의 증식)을 위해서는 어떤 인간적인 가치들도, 어떤 인간적인 의미들도  분쇄하고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적인 것들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최소한의 약속인 사회 윤리들, 관습들, 법제도들도 자본의 무한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제어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혹은 자본의 전령사들)은 늘 근사한 옷을 입고, 멋진 악세사리로 자신을 치장하며, 근사한 구두를 신고 또깍 또깍 우리 앞으로 온다. 그건 파티에 나선 신델레라처럼 화사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신데렐라를 꿈꾼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면 우리는 누더기의 현실로 돌아온다.

그 멋진 가면을 쓴 자본(의 욕망)은 인간의 온갖 욕망을 자극하고, 훨씬 더 인간적인 가치들, 훨씬 더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관심을 빼앗는다. 대추리 주민들이 쫓겨나도, 포스코 노동자가 죽어나가도 세상은 너무도 평온하고, 그건 마치 먼나라 이야기처럼 아련하게 희미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결정적으로 달콤한 망각의 속삭임이 있으니까. (공권력에 의한) 죽음이 갖는 정보가치와 정보의 무게는 온갖 상품 광고들, 그리고 그 광고들에 기생하는 오락 콘덴츠들, 스포츠 콘덴츠에 자리를 빼앗긴다.

이를테면 인터넷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네이버 제국] 최대 뉴스는 연예인의 신변잡기나 정치인들의 권력 놀음, 말장난, 그리고 스포츠 스타들이다. 그건 우리들의 속물근성을 자극하고, 거기에 빼앗기는 우리의 눈과 귀는 우리들에게 평온한 세속세계의 노곤한 감수성을 유포한다.

욕망은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 길들여진다.  
그리고 그 길들여진 욕망은 인간적인 고민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몰인간적이다. 그것은 좀더 매력적인 상품의 소비를 추구하고, 좀더 자극적인 욕망의 소비를 위해 '디자인'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성을 다시 디자인하고, 그 인간성은 상품이 스스로를 뽐내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과시적 나르시즘, 경쟁적 나르시즘을 학습시킨다. 이기는 놈이 장땡. 폼나는 놈이 장땡인거다.


3. 자본권력과 정치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의 공모

자본권력은 이제 정치권력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 있고, 최소한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권력의 우위를 지탱했던 최후 보루 '형사적 공권력'도 피라미드의 꼭지점에 존재하는 자본권력에는 이제 농담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김승현 한화 회장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그 형사적 공권력이 최소한으로는 존재하고 있음을 희미하게나마 증거하고 있기는 하다(그런데 이 양반 아니나 다를까 병원행이다. 우울증이라나 뭐라나).  

자본권력과 정치권력, 그리고 담론생산 집단으로서의 언론권력의 공모관계는 미셀 푸코의 정교한 이론들로 고민된 주제였고, 삐에르 부르디외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성찰한 것으로 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과거의 강준만이랄까? 이 주제에 대해 몇몇 스타급 지식인들이 대신 고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건 물론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렇게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일상의 설계도들, 그 욕망과 권력의 담합들, 거기에 이끌리는 자신의 습관들...을 비판적으로 회의하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내 보기에 가장 심각한 건 [조선일보 월드]라는 기만의 매트릭스와 [삼성공화국]이다.

그런데 우리는 즐거운 것이 좋고, 우울하고, 따분하게 이런 메마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그렇다. 문제는 놀이가 갖는, 유회로서의 담론, 유희로서의 대화가 갖는 가능성일테다. 그것은 물론 '이익'(생존)이라는 한계 상황에 복속한다.

각설하고..
자본권력과 정치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를 목적한다.
그건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다.
거기에 끌여들여지는 사람들, 숫자로서의 인간, 그들은 '대중'이다.
왜냐하면 그런 조건이 '자신의 기득권'유지와 '자본의 증식'과 '그것을 견고화하는 시스템 구축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체적인 양상은 좀 다양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경우엔 차기 집권세력(일 확률 무쟈게 높은) 한나라당을 지원하는 조선일보(및 다수 수구언론)와 집권 열우당과 일정 부분 정치적 포즈를 함께 하는 한겨레신문(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가깝다고 나는 판단한다)은 서로 대립항을 구성하지만, 그들 모두 지배하는 건 한나라도 열우당도 청와대도 아니고, '은둔의 제국'에 있는 그 분으로 상징되는 '자본'이다. 그들은 때론 적대적으로 공생하고, 때론 노골적으로 '통일전선'(기자실 통폐합 사건을 떠올려보자)을 형성한다.

자본권력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마치 '탈이념적' '탈정치적' 형태와 빛깔과 향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광고'라는 유혹적인 자본주의 꽃향기로 자신을 뒤덮어 버리고, 그래서 그 향기로운 빛깔들과 매혹적인 풍경들은 마치 자본권력과 정치, 그리고 이념이 서로 별개인 양 사람들을 현혹한다.

조선일보의 주된 레파토리 중 하나.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한 이 마당에 웬 이념타령이야"

그런데 웃긴건 북한과 관련해서, 그리고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있어서 조선일보야 말로 '냉전'이데올로기에 미친듯이 뛰어든다는 점이다. 조선일보는 경제적으로는 '탈이념'을 내세우고, 스스로를 위장하지만, 경제와 정치는 단 한번도 다른 몸인 적 없으며(이건 마치 날개 없는 새라는 수사처럼 기만적이다), 조선일보 코미디의 비극은 탈이념을 내세우는 그 제스처가 갖는 이념지향성을 간과한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이념, 혹은 철학은 '생존'과 '지배'와 '이익'이다.
거기에 방향성과 지향성은 없다. 그저 많이 갖고, 많이 누리고, 많이 지배하면 장땡인 진흙탕 생존법칙. 그게 독재를 통과하면서, 그 독재과 친해지면서 더욱더 비대해진 조선일보의 노하우인거다.  

자본과 정치와 언론.
그건 기본적으로 한몸이며, 다만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서로 담합하기도 하고, 공모하기도 하고, 또 서로 싸우기도 한다. 그들이 싸울 때는 이미 있는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을 때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있는 권력의 조정을 위한 '게임'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른 사정, 가령 진실과 철학의 다툼 따위는 그다지 존재할 여지가 없다.


4. 인터넷 민주주의의 가능성 ; 혹은 블로그 민주주의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물론 이건 현재 스코어다. 9회말 투아웃 역전 만루홈런(이거 무슨 밴드이름인 것도 같은데.. ^^;) 없으리라는 보장없지만, 이대로라면 콜드게임으로 지지 않으면 다행인 것 같다. 물론 이런 목적 지향의 목소리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많을테고,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라면 나는 역시나 추상적인 수준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일단은 이야기하자면, 결국 생명력 있는 활동은 '이익'과 '재미'가 수반되지 않으면 오래 이어지기 힘들다. 어떤 숭고한 목적 지향, 어떤 고상한 도덕 지향... 놀고 있다. 이건 그다지 생명력이 길지 못하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 역시 그렇게 도덕지향적이고, 숭고한 목적지향적인 인간들 역시 어느새인가 자신들의 이익과 재미를 추구한다. 인간이란게 원래 그런 동물이다.

이익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제1원칙이니, 이 원칙에 예외는 없다. 물론 산신령은 제외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제2원칙은 재미다. 이익이 없는 곳에서도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데, 그건 지가 재밌으니까 그러는 거다.

허황된 희망을 노래하는 일은 그 노래하는 동안은 현실의 지옥을 잊을 수 있겠지만, 노래가 끝난 뒤의 그 절망은 좀더 뚜렷해지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익과 재미다. 그렇다면 그건 뭔가? 어떻게 이익과 재미를 인터넷을 통해, 블로그를 통해 구현할 수 있나?

이익은 단순히 애드센스, 애드클릭스, 올블릿, 애드씨 등의 기존 수익모델 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블로그와 블로거들을 이어주는 '플랫폼'은 다양한 채널들로 분화되고, 또 퍼져갈 것으로 나는 예상하고, 기존 수익 모델과 같은 전적으로 기업적인 움직임, 경영적 마인드에 바탕한 모델만 존재하란 법도 없다. 블로거들 스스로가 일정한 규모를 구축할 수 있다면, 그런 규모들을 느슨하게나마 조직할 수 있는, 조율할 수 있는 매개를 가질 수 있다면, '의존적인 블로거'들이 스스로의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몰려들지만, 그걸 지금 당장 정리할 능력은 없다.
다만 대안적인 수익모델과 블로그를 통한 즐거운 블로깅. 그 즐겁다의 정체, 유희로서의 성격들을 유지한 채로 사회적인 의미를 더불어 확보하는 방법론. 이런 것들이 내 블로깅의 화두가 될 것 같다.




* 참조 - 용어 ; 대중과 시민

1. 대중 [大衆, mass]
 
지위·계급·직업·학력·재산 등의 사회적 속성을 초월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합체. 매우 다의적(多義的)이며, 이론 차이에 따라 규정방법도 달라진다.

⑴ 사회학상, 사회집단론의 범주 ; 대중문화론
대중은 군중·공중 등과 더불어 무조직집단(無組織集團:비조직집단)의 하나이다. 오늘날처럼 대중이 거대한 ‘매스(mass)’로서 사회의 모든 면에 나타나고, 사회에서 대중의 역할과 힘이 재인식됨에 따라, 대중화된 인간의 능력과 이성의 쇠퇴 등이 문제화되기에 이르렀다.

20세기에 와서는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의 산업기술과 통신 ·교통기관의 급속한 발달, 모든 사회조직의 거대화와 관료제화 등으로 이른바 ‘대중사회상황’이 출현하였다.     

K.만하임에 의하면, 산업적 대중사회에서 한때 자주적·이성적 심벌로 여겼던 ‘공중’은 수동적·정서적·비합리적 대중으로 변질해 간다. 대중 데모크라시는 민주주의를 확대하였지만, 그 반면에 이와 같은 대중화 상황이 진행하는 곳에 데모크라시의 위기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견해가 대중사회론의 전형인데, 여기서 파악한 대중은 동질화·평준화된 반면에 정서화·비합리화된 것으로, 지배자의 ‘심벌 조작’에 의해 쉽게 움직이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중화상황의 심화에 의한 위기라는 문제의식은, 이를 어떻게 극복하여 데모크라시를 방위하느냐의 문제이다.     

⑵ 파시즘 사상
원래 불평등주의를 기초로 하였다. 사회의 기본적 관계는 언제나 지배와 복종에 있으며, 엘리트와 대중의 구별은 본질적인 것이다. 가치의 창조자는 항상 소수의 엘리트이며, 대중, 즉 다수자는 그들에게 종속되어야 할 운명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이 경우 대중은 모래와 같은 무성격(無性格)·무규정(無規定)의 것으로, 선천적으로 자발성이 없고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히틀러의 ‘지도자원리’는 이러한 견해에 입각한 것이었다.

⑶ 마르크스주의
인민대중·생산적 대중처럼 역사의 담당자·역사의 추진력으로 파악된다. 대중이란 프롤레타리아적 근로대중과 비프롤레타리아적 근로대중을 포함한 ‘일하는 사람들의 가장 넓은 층’, ‘일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레닌)’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대중은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통일을 실현함으로써 사회변혁의 담당자가 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대중이라는 개념은 여러 각도에서 파악되고 있지만, 대체로 학자들은 광범한 대중이 프롤레타리아화라는 방향으로 동질화·평준화되어 가는 대중화현상 자체 속에서, 그리고 그 마이너스적 면과 함께 보다 높은 방향으로 향상되는 새로운 요인을 인식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대중의 개념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상 n백과사전 발췌]
 
2. 시민 : 이건 n백과에도, 위키백과에도 등록된 어휘가 아니다.

서유럽은 17∼18세기에 시민혁명을 겪었다. 독일도 이 흐름에서 예외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와 독일도 부르죠와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독일에서도 부르죠와들이 그 세력을 뻗기 시작한다. 산업화의 덕분으로 독일 역시 산업부르죠와들이 성장해간다.
   

부르조와 혁명은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길인 것인데, 독일에서는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의 부르죠와 혁명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해서 독일은 국가의 역활이 매우 강했다. 산업화가 위로부터, 국가에 의해 진행되었고, 보수적이고 봉건적 성격이 강했다.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독일의 부르죠와는 힘이 약했다. 민족국가 형성이 또한 늦었으며, 이 과업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1871년에 달성된다.

민족국가의 형성은 자본주의 발달에 매우 중요했다. 단일한 시장권의 통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독일은 1834년에 프로이센의 주도로 관세동맹을 맺어 이를 해결했고, 민족국가형성과 자본주의추구를 위해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를 포기한 나라였다. 이는 독일의 부르죠와지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혁명이후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었으나, 독일은 혁명이 실패한 탓에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지 않았다. 융커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은 부르죠와와 프롤레타리아를 동시에 억눌렀다. 독일에서 노동운동이 급격하게 다른 나라들보다 빨리 성장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독일의 프롤레타리아는 독일의 부르죠와지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까지 한꺼번에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노동운동이 가장 빨리 성장했고, 다른 나라들보다 관심의 촛점이 되는 것이다. 산업화가 위로부터 시작되면서, 자본의 대규모집중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노동자들도 일찍 집중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한국) 상황은 이런 점에서 독일과 매우 흡사했다. 
[위키백과사전 표제어 '독일의 역사' 중에서. 발췌 인용]



* 발아점
블로그 친구 후딘과의 전화 통화.



NL? PD? 주사파? - 이념과 현실의 간극

2007/07/14 15:02
#.예전에 썼던 글을 보관 차원에서 이동합니다. 글 부피를 줄이는 방향에서 추고합니다.

소위 진보라고 불리는 많은 오피니언 리더들의 상당수가 '주사파'가 갖는 그 상황 상황마다의 '선택'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적인 인식을 갖고 있고, 그렇게 발언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과거(?) 민주노동당 안의 NL, 특히 주사파에 대한 비판은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안다.

그 비판은 주사파가 갖는 논리적인 정당성에 대한 학술적 고민의 소산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주사파가 갖는 '맹목적 교조주의'가 '진보세력'의 외연을 '좁히는' 쪽으로 기능한다는 현실적인 안타까움, 현실적인 정세판단이 그 비판이 갖는 핵심이라고 나는 본다. 현실적 고민과 동떨어진 '소아적 당파성에 함몰된 관념적인 고민'이라는 거지. 


쉽게 생각하자.
어떤 사회 변혁도 소수의 당파적 순결성만으로 성취될 수 없다. 시민과 대중(이 양자의 성격은 분리되어 고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이 함께 할 때 가능한 것이라는 그 자명한 이치를 생각해본다면, 극단적인 이론적 순결성, 그 교조주의적인 운동형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Goya

좀 노골적으로 말하자.
가령 과거 북핵사태와 관련한 민노당의 어수선함, 그 우왕좌왕을 평범한 일반시민들이 어떻게 바라볼까? '아직도 저런 이론타령인가..' 일  것으로 나는 판단한다. 솔직히 다수 평범한 시민들이 그 이론을 '학습'한다고 해서, 그 사회에 관한 태도나 정치적인 관점을 바꿀 것 같지도 않다. 물론 공부할 생각도 없겠지만. 재밌는 드라마 보기도 바빠죽겠는데 재미 하나 없는 이념 학습, 정치 학습에 관심이 생길까?

80년대 소위 '사구체논쟁'(*주 : 한국사회 정체성 논의. NL 민족민주반봉건. 남한의 특수한 역사성을 강조한 입장 / PD 민중민주반독재. 계급투쟁 관점을 강조한 입장. 그 다수설로서의 결론은 소위 '신식국독자', 즉 신식민지 국가독점 자본주의, 라고 얼핏 기억한다)은 정말 큰 의미가 있었던 논의였고, 이를 통해 많은 청년들이, 시민들이 사회비판적 안목을 갖출 수 있었다고 본다. 인정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아직도 NL과 PD가 의미있나를 생각해보면..
나로선 회의적이다.

이는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의 '지적유희'에 가깝지 않나 싶은거다. 거기에 공감하는 '시민, 민중, 대중'이 그다지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 논의에 시민들이 대중들이 참여할 수 없다면, 그게 어떤 의미인가? 어떤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가? 관념적인 유희, 과거에 대한 향수, 교조주의적 관성에 젖은 자동반복적인 패턴에 불과하지는 않을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단순하다.
나는 '게임' '영화' '미디어' 등 소위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관한 논의야 말로 21세기적인 사구체논쟁의 중심에 선 하위 주제들이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우리 삶에 피부처럼 와닿아 있는 문제들이고, 이런 것들을 매개로 해야만 그 실천적인 방법론 차원에서 좀더 큰 효용을 갖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게 삶이란
약지 손가락에서 간신히 반짝이는
작은 다이아몬드를 지키기위해
매달 부어야하는 상환원리금이다.

- 겨울종소리, '삶이란' 중에서






* 발아점
안수찬, 21세기적 ‘사회구성체’ 논쟁 불지핀다 (2005. 05.)



#. 20초 짜리 동영상이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네요. 때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핫이슈에 기꺼이 편승해서 포스팅하는 것도 블로깅이 갖는 '참여적' 가치이자, 온라인 민주주의, 혹은 블로그 민주주의의 일상적인 토론 기제로서의 가능성으로 생각합니다. 저도 한마디 합니다.




1. 우리를 흥분시킨 20초짜리 동영상.

유튜브 동영상이다.
일명 "그래서, 그러시는구나"  
그걸 누가 어떻게 잡아서 유튜브에 올렸는지 난 모른다.
암튼 그 20초가 우리를 흥분시키고 있다.
일단 그 동영상을 보자.

 
출처 :  http://www.youtube.com/watch?v=2MdNIjWfaO8


전원책 : 애가 없습니다. 늦게 결혼해서...

이안 : 진짜요? 그러니까 이러시는구나. 저는 저분이 제 아빠면 참 힘들겠다...  

- 어디서 들리는지 알 수 없는 웃음소리. ㅡ..ㅡ;; -
(이것도 결정타 같다. 정말 짜증나더라)

전원책 : 방금 말씀하신 것은 정말 옳지 못한 토론태도에요.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남의 가족사를 들어서 '그래서 그렇구나' 라든지..
(그래서 '그래서, 그러시는구나'로 자막이 처리된 켭처사진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다)

이안 : 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너무 위험한 발상들을 하셔서요.

전원책 : 그건 예의를 잃은 말입니다.




2. 동영상 분석  

대본은 위와 같다.
이안 포~오즈를 보면, 턱을 괴고 앉아서 농담하듯 "그러니까 이러시는구나"라는 결정적인 대사를 날린다. 솔직히 보면서 나도 좀 화나더라. 방청객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웃음 소리는 또 뭔가? 한 인간이 이렇게 무참하게 '인격적인 모욕'을 받는 모습이 뭐가 그렇게 즐거운가? ... 라는 생각, 당연히 들지 않나?

위 20초 동영상에서 우리가 목도하는 건 한 '새파랗게 어린 한 건방진 여자가수'가 자신의 아버지뻘 되는 남자의 개인적인 불행을 자신의 주장을 지지하기 위해 활용하는 '어처구니'다. 그게 자신의 (기존)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가 될리 만무하다. 그건 인신공격일 뿐이고, 무례의 극치일 뿐이다. 여기에는 어떤 정당화도 불가능하다고 나는 판단한다.

물론 전체 토론 맥락이 궁금하긴하다. 그게 궁금한 건 이안이라는 젊은 '여자' 패널의 '어처구니'가 얼마나 '정상 참작'될 수 있을까에 대한 궁금함이지, 그녀를 구원할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감은 아니다.

솔직히 그렇다.
아무리 전원책이 이 토론에 나와 마초적 발언을 많이 했고, 또 가부장주의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고 해도, 정말 많은 뻘짓 했다고 해도... 이건 아니다. 물론 몇몇 블로거들은 이안을 구원(?)하기 위해 나섰지만... 솔직히 토론 맥락이 아무리 이안에게 유리하더라도, 이안의 '그 발언'은 구원 불가능할 것 같다.

블로고스피어를 뜨겁게 달구는 이슈의 중심에 있는 건 '전체 토론'이 아니라, 위 20초 짜리 동영상이다. '알파걸' 따위(?)에 관심을 갖는 블로거들은 그다지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건 개인적으론 매우 아쉽다. 토론의 '내용'에 대해 우리는 분노하고 있지 않고, 단편적인 '이미지'를 통해 본 어떤 태도와 제스처에 대해 흥분하고 있는거니까.
물론 이미지는 힘이 쎄고, 그 이미지는 때론 어떤 내용보다 본질적인 정보들을 담고 있긴 하다. 암튼 각설하고, 동영상 속 이안의 발언에 대해 좀더 끄적거리면...


3. 이안 발언의 논리적 재구성

한 인간의 불행할 수도 있을 가족사에 대한 농담투의 비아냥이 "개인적인 생각"이라거나, 혹은 "너무 위험한 발상을 많이 하셔서" 따위로 정당화될리 없다. 좀더 풀면, 자신과 견해를 달리 하는 토론 참석자를 '공격'(말그대로 토론에서의 공격과 방어에서의 그 공격)하는 방식이 이런 인신공격이고, 무례라면 그것이 토론방식으로 허용될리 만무하고, 토론을 떠나, 인간으로서의 예의는 아닐 것이다(전원책 변호사가 정확히 지적했다고 본다. 이건 정말 예의가 아니다).

이안 발언을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면

당신은 (딸)자식이 없어서 그렇게 (꼴통 가부장주의자 같은) 위험한 발상을 많이 하시는군요.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가 된다.


이 논리를 그대로 이안에 적용하면,

당신은 여자라서 이렇게 꼴페미스런 무례를 저지르시는군요.
물론 이건 제 개인적인 견해일 뿐입니다.

가 되고.

그러니 '자식이 없다'는 조건이 한 인간의 세계관과 여성관, 그리고 가족관에 당연히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근거로 세워 직접적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태도는 도무지 찬성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토론에서는 토론자 일신의 조건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토론은 견해와 주장, 그리고 그 주장을 지지하는 논리와 근거들의 경연장이기 때문이다. 토론 참석자의 일신상 조건을 자기 주장을 지지하기 위한 근거로 삼는 건 가장 천박한 토론 자세다. 그 일신상 조건이 그 행위(발언)에 부합하는지를 판단할 필요도 이유도 전혀 없다. 토론자들은 그저 주장과 근거를 통해 토론할 뿐이지, 자기 자신 일신상 조건들을 토론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건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상식 아닌가? 인신공격은 가장 악랄한 방식이다.

이안 발언이 생겨난 논리의 연장에서 이렇게 좀 과장되게 풀어볼 수도 있으리라.

당신은 고아라서(행위자 조건) 도둑질(행위)을 하시는군요.
당신은 예비역이라서(행위자 조건) 여자를 무시(행위)하는군요.

행위자 조건으로, 어떤 행위와 '견해'를 유추할 수 있고, 거기에 더해 그것을 공격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태도야 말로 '위험한 발상'이다.


4. 결

난 내 자신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ㅡㅡ;
그리고 난 전원책 좋아한다.
그게 양립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오죽이나 복잡해야지.

오늘에서야 군가산점 토론을 제대로 모두 시청했는데, 난 군가산점 부활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그래도 전원책이 좋다. 그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남자는 밖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여자는 집안에서 살림하는 걸 "인류 보편의 생활방식"이라는 다소간 황당한 마초적 발언을 해도 난 그가 좋다(물론 그 견해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그 솔직함이 좋고, 속시원한 화법에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는 여성 입장에서 보면 마초에 가부장주의에 권위주의자로 비춰질 수 있다. 인정한다. 내가 보기에도 그러니까.

어떤 블로거께서는 이안이 그저 무명에 가까운 철없는 여자 가수라서 전원책 변호사가 그렇게 바로 호통을 칠 수 있었을거다, 이러시는데, 내가 TV 토론을 통해 지켜본 바로는(그래봤자 '담배값 인상 토론' '군가산점 부활 토론' 이 두 개가 전부지만), 전원책 변호사는 최소한 상대방이 자신보다 권력이 크거나 작거나 때문에 발언내용을 바꾸거나 자기 스타일을 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원책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갖거나 갖지 않거나와 상관없이 전원책의 견해에 '반대'하거나(군가산점 토론 경우), 찬성(담배 토론 경우)할 수 있다. 전원책이라서 찬성이라거나, 혹은 전원책이라서 반대라는 건, 마치 당신은 자식이 없어서 마초라거나, 당신은 여자라서 꼴페미라는 것과 하등 다르지 않다고 본다.

주장을 지지하는 근거와 논리로 토론해야 한다.
그리고 논거와 논리가 부족할 때는 마음껏 공격해도 된다.
토론에서는 인정사정 보지 않는거다.
사정없이 물어 뜯어야 한다.

그게 그럴 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에 대해서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견해'와 '주장'에 대해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인간의 불행할지도 모를 가족사에 대해 "아, 그러니까 이러시는구나"라는 따위로 무례한 행동을 저질러서는 안된다.




p.s.
한 철부지(?) 여가수의 무례한 행동 하나로 전체 여성계(?)를 도매급으로 비난하거나,
이 사안을 또 다시 무슨 남/녀 대결적 구도로 몰고 가는 포스팅은 좀 자제해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이안씨 물론 실언하긴 했지만, 그 실언에 대해서 비판하는 것은 별론으로, 이안씨 자체를 무슨 몹쓸 인종으로 너무 심하게 비난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누구나 실수는 하지 않나.





* 참조
EBS - [토론카페] 알파걸, 남성을 넘어서는 여성인가?
http://www.ebs.co.kr/homepage/cafe/03_vod_list.asp#none

전체 토론은 위 링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다.
그런데 내 경우엔, 브라우저 문제인지(난 불여우 쓴다), 내 컴이 맛이 갔는지..
아무리 눌러도 실행이 안된다. ㅡㅡ;;
이따가 다시 해봐야겠다.


* 참조 2.
전체 동영상 직접링크

알파걸 1.
http://mirupsec.imeem.com/video/YNBkJOnK/alphagirl/
JoeanY님 고맙습니다. : )


알파걸 2.
http://blog.daum.net/kkss1/11996056 (헤르메스님의 블로그)
소개해주신 김희걸님 고맙습니다. : )



* 참조 3. 관련 후속 포스트
마녀사냥 원정대 - 포퓰리즘과 참여적 가치



사랑스런 삼성공화국

2007/07/12 07:19
삼성이 잘 나가면 나는 행복한가?
삼성이 애플까지 제치면 나는 즐겁나?

황우석 파동 때부터 생겨난 문제의식이지만 추상적인 애국심, 막연한 민족주의가 자본의 요구, 특정 세력의 이익추구와 연계되면 이성적 사고, 비판적 사고는 정말 힘들어진다. 펄님께서 쓰신 삼성에 대한 비판적 개혁안을 읽으면서도 과연 왜 우리는 삼성에 이토록 일방적인 애정을 보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좋은 글에도 이런 느낌이 들 정도이니까, 일반적인 삼성관련, 기업관련 언론 보도에서는 두 말하면 입 아프다.

그저 삼성이기 때문에, 삼성이 우리나라 기업이라서?
그런데 삼성 정말 우리나라 기업인가? '우리나라'라는 수사가 한정하는 '기업'이란게 과연 존재하기는 하나? 그 기업의 '일부' 종사자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라서, 그 물적 근거지가 공간적으로 남한 땅에 '일부' 존재하니까? 이건희, 이재용.. 삼성 로얄 패밀리가 한국인이니까? 이런 이유로 과연 삼성을 걱정해야 하는건가? 삼성이 망하면 우리나라도 같이 망하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 Goya

..... 자본은 그 국적이 그다지 의미없는 단계로, 이미 예전에 돌입했다고 나는 어렴풋이 느낀다. 그런데 세계 초일류 다국적 자본집단, 기업집단 삼성에 대해서 우리는 막연한 애국심과 심리적 포만감의 대가로서 (일방적인, 그리고 때론 편협한) 애정을 지불한다. 난 이게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황우석 파동의 광기를 목도하면서 이건 정말 죽음의 판타지가 될 수도 있겠구나 절감했다.

물론 삼성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삼성의 사회적 책임을 압박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럴수 있을까? 삼성이라는 일개 기업의 힘이 너무 비대해지면, 그 힘을 제어할 필요가 당연히 존재한다. 국가권력이 그 일 하나? 입법, 사법, 행정, 청와대까지 손 들었다. 노무현 대통령도 인정하지 않았나?

"이제 제1권력은 자본으로 넘어갔다"

그럼 민주사회 최후의 보루인 '시민권력'은 삼성이라는 기업집단을 최소한으로 압박할 수 있나? 그래서 시사저널 사태를 만들어내고, X파일 사건 터져도 끄떡없고, 김정일 형님 저리가라 싶은 매스게임하는 그 강력한 집단을 견제할 수 있나? 언감생심.

이학수씨와 어깨동무 하는 신영복교수나, 삼성으로부터 후원금 받는 박원순변호사의 모습을 보면서, 그래도 신뢰와 존경을 보내는 '사회의 어른들' '시대의 양심'이라는 분들이 이렇게 쉽게 자신의 사회적 기대를 '합리적으로' '인정주의'에 끌려 가뿐히 '극복'하는 모습을 보면 나로선 삼성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이상호 기자가 법정에서 진술했다는 "삼성 치하의 독재..."라는 말이 뇌리를 스친다.

이상호기자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말을 저는 믿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은 삼성 독재 치하에 있는 형식상의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라던가

 "....꿈깨시고...",

혹은 "삼성 독재 하에서는 삼성에 부역하는 언론인과 그들에게 반기를 들고 처참히 부서지는 사람들 둘로 나뉘어 질 수밖에 없습니다"...와 같은 격정적 토로들이 일단 가슴에 와 닿는다.

- 잡넘, [공평한 꿈] 에서 읽었던 글 중에서 (공평한 꿈 블로그 사정으로 현재 해당글 및 예전글들 퍼머링크가 파괴된 상태입니다).


삼성이 기업으로서 최고의 효율성을 만들어내고, 최고의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 그리고 삼성'맨'으로 자부심을 갖는 것과... 삼성이 입법, 사법, 행정, 그리고 언론까지 떡 주무르듯 주무르는 것은 서로 달리 평가해야 한다.

좋은 건 좋은 거지만, 그 좋거나 찬란하게 빛나는 것 때문에 추악하고, 악취나고, 쓰레기 같은 것이 아름답거나, 향기나게 되는 건 아니니까.

삼성이기 때문에...
그 악행이 용서되거나 묵인된다면...
그건 정말 삼성 독재 치하의 대한민국일테다.



p.s.
예전에 썼던 글 일부를 결어 부분에 추고해서 사용합니다.





* 발아점 
펄, 삼성이 소니는 잡아도 애플은 잡지 못하는 이유
http://blog.naver.com/pariscom/110019525752

정말 좋은 글입니다.
일독 권합니다.


* 삼성에서 최초로 내부고발 있었답니다. 관련글 소개합니다.
시사in, 삼성은 비자금과 편법의 제국이다"
한겨레신문, 정의구현사제단 "거대권력 삼성의 엄청난 비리 확인"


0. 펌/스크랩 글에 대한 제한 정책 07/07/09 14:13 (올블)  
http://event.allblog.net/index.php?pl=105

중요 내용을 발췌 요약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ㄱ. [취지] 스크랩 문화의 특성과 장점도 안다. 다만 부족하더라도 블로거 본인의 글이 더욱 가치 있게 평가되어야 한다. 링크 문화가 촉진되기를 더불어 바란다.

ㄴ. [내용] 펌/스크랩 글에 지속적인 모니터링을 통해서 [오늘 가장 많이 추천받은 글], [어제 가장 많이 추천받은 글]과 같은 제한적인 공간에서는 노출을 제한한다 .

ㄷ. [제한되는 펌글과 용인되는 '인용'의 한계] 다만, 다음 경우 예외적으로 노출 제한하지 않는다. 펌/스크랩한 내용이 포함되지만, 그에 대한 본인의 주장과 견해가 일정 길이 이상으로 명확하게 포함되어 있는 경우

ㄹ. [가이드라인] 운영상 악용 소지가 있어 따로 언급하지 않으며(... 후략 ...)  

ㅁ. [적용 시점] 2007년 7월 10일 화요일 자정부터 적용 시행할 예정.

- 펌/스크랩 글에 대한 제한 정책 중에서


1. 올블 새로운 스크랩 정책
메타블로그로서 당연한 조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올블은 '평가'를 수행하는 메타블로그이기 때문이다.
그저 '수집'과 '(물리적인) 분류'만을 담당하는 메타블로그라면 각 표준에 따라 수집하고, 분류하면 그만이다(스크랩 유무도 당연히 한 표준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위 올블은 유저들이 참여해서 '평가'하고, 나름 평판(평가)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스크랩한 글이 올블 평가시스템에서 제외되는 것은 당연하다.  


2. 그렇다면 제한되는 스크랩과 제한되지 않는 인용 간의 구별표준은?
그 양자 사이 구별표준을 명확히, 물리적으로 설정하기는 어렵다. 올블에서는 운영상 악용 소지(이건 잘 모르겠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악용할 수 있다는 것인지.. ^ ^)를 이유로 가이드라인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이해할 수 있다. '상식을 가진 소박한 독자'라는 추상적인 표준 정도로 족하다고 본다.


3. 저작권법과의 관계
지난 6월 29일 전부개정된 저작권법(이하 '신저작권법')이 전면 시행되었다.
최근 티스토리도 그렇고( http://notice.tistory.com/788 ), 올블도 그렇고, 저작권 정책(혹은 스크랩 정책)을 강화하고 있다. 이게 신저작권법 여파인지 아닌지 난 모른다. 아마도 아주 영향이 없지는 않을 것으로 추정할 뿐.

나는 신저작권법 전반에 관해 비판적이다.
그럼에도 일단 '정크(쓰레기) 블로그(도아)의 해악을 생각하면 티스토리와 올블의 정책을 환영한다.
이들 '블로그의 적'은 당연히 퇴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신저작권법이 사이트 운영자에게 '압박' 기제로 작용하면서 점차로 엄격한 저작권 정책을 펼칠 가능성이 농후한 현재 시점에서, 이런 조치들을 마냥 환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런 정책들이 과도하게 엄격해질 경우에는, 자유로운 창작과 비평, 그리고 향유자 확대를 위한 '합리적인 수준'의 인용문화, 스크랩문화, 공유문화가 위축될 수도 있을테니까.

어려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