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에 썼던 동일 제목 글을 대폭 수정, 보충하고, 추고합니다. 역시나 글 보존공간 이동 차원이고, 관련글(#.140. 141. 142)을 동시에 이동해야 할 필요(링크) 때문에 함께 옮겨옵니다.  


1. 대중 vs 시민

난 솔직히 대중과 시민의 의미/어감을 엄격하게 구별해서 사용하지 않았었다. 잘 구별되지도 않는 것 같고, 문맥에 따라 그 때 그 때 적당하다 싶은 용어를 쓸 뿐이었다. 그런데 후딘(블로그 친구)은 그걸 구별해서 쓰더라. 나름 효용이 있겠다 싶었다. 내 나름으로 다음과 같이 사용하기로 했다.

'대중'은 스스로의 이름을 갖지 못한 자, 대상화된 자, 어떤 권력의 목적이자 표적이 된 불특정 집단의 총합이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권력의 의지에 따라 '사용된다'. 그 권력의 대표적인 이름은 자본권력과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이다. 그러니까 내가 '대중'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건 카를 만하임의 우려를 깊이 공유하는 차원에서 사용하는 '대중'이다.  

'시민'은 자신이 권력작용의 장(場), 한가운데 있는 것을 인식하는 존재이며, 그래서 그 권력들이 어떤 방향으로 자신들에게 부딪히는지를 그 각 상황 상황마다 인지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니까 권력이라는 좌표에서 자기의 위치를 '자리매김' 최소한의 사회적, 정치적 인식을 갖는 자(집단)를 나는 시민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그는 쉽게 말해서 시민은 자기 스스로의 존재를 어렴풋이나마 확정할 수 있고, 특정할 수 있는 존재이다. 프레드릭 제임슨식으로 말하면, 시민은 '자신의 존재 좌표'를 '그릴 수 있는 능력'을 갖는 비판적 사회구성원이다.

물론 '대중'과 '시민'은 구별되지만, 흔히 겹친다.
나는 대중이면서, 시민이다.
당신이 그렇듯이.


2. 제1권력 ; 자본

노무현이 언젠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다. "권력은 자본으로 넘어갔다".

우리나라 상황을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자본권력의 그 망라적인 지배력, 그 도저한 지배력은 매트릭스, 그 자체인 것 같다. 도무지 그 매트릭스에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 자본은 어떤 색깔을 갖고 있을까? 그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 나는 질문한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나는 마르크스가 아니다.

나는 막연하게 감촉할 뿐이다. 마치 그리고 장님처럼 더듬거릴 뿐이다. 그렇게 감촉되는 바를 기술하자면, 자본은 자본 스스로를 위해 복무한다. 자본 스스로를 위해, 그게 중요하다. 자본은 자본(의 증식)을 위해서는 어떤 인간적인 가치들도, 어떤 인간적인 의미들도  분쇄하고 배반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적인 것들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최소한의 약속인 사회 윤리들, 관습들, 법제도들도 자본의 무한한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제어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혹은 자본의 전령사들)은 늘 근사한 옷을 입고, 멋진 악세사리로 자신을 치장하며, 근사한 구두를 신고 또깍 또깍 우리 앞으로 온다. 그건 파티에 나선 신델레라처럼 화사하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신데렐라를 꿈꾼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면 우리는 누더기의 현실로 돌아온다.

그 멋진 가면을 쓴 자본(의 욕망)은 인간의 온갖 욕망을 자극하고, 훨씬 더 인간적인 가치들, 훨씬 더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관심을 빼앗는다. 대추리 주민들이 쫓겨나도, 포스코 노동자가 죽어나가도 세상은 너무도 평온하고, 그건 마치 먼나라 이야기처럼 아련하게 희미하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결정적으로 달콤한 망각의 속삭임이 있으니까. (공권력에 의한) 죽음이 갖는 정보가치와 정보의 무게는 온갖 상품 광고들, 그리고 그 광고들에 기생하는 오락 콘덴츠들, 스포츠 콘덴츠에 자리를 빼앗긴다.

이를테면 인터넷 세계를 지배하다시피 하는 [네이버 제국] 최대 뉴스는 연예인의 신변잡기나 정치인들의 권력 놀음, 말장난, 그리고 스포츠 스타들이다. 그건 우리들의 속물근성을 자극하고, 거기에 빼앗기는 우리의 눈과 귀는 우리들에게 평온한 세속세계의 노곤한 감수성을 유포한다.

욕망은 '상품'을 소비하기 위해 길들여진다.  
그리고 그 길들여진 욕망은 인간적인 고민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몰인간적이다. 그것은 좀더 매력적인 상품의 소비를 추구하고, 좀더 자극적인 욕망의 소비를 위해 '디자인'된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성을 다시 디자인하고, 그 인간성은 상품이 스스로를 뽐내는 방식으로 스스로에게 과시적 나르시즘, 경쟁적 나르시즘을 학습시킨다. 이기는 놈이 장땡. 폼나는 놈이 장땡인거다.


3. 자본권력과 정치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의 공모

자본권력은 이제 정치권력에 대한 우위를 점하고 있고, 최소한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국가권력의 우위를 지탱했던 최후 보루 '형사적 공권력'도 피라미드의 꼭지점에 존재하는 자본권력에는 이제 농담처럼 느껴지는 것 같다. 물론 김승현 한화 회장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그 형사적 공권력이 최소한으로는 존재하고 있음을 희미하게나마 증거하고 있기는 하다(그런데 이 양반 아니나 다를까 병원행이다. 우울증이라나 뭐라나).  

자본권력과 정치권력, 그리고 담론생산 집단으로서의 언론권력의 공모관계는 미셀 푸코의 정교한 이론들로 고민된 주제였고, 삐에르 부르디외 역시 이 문제에 대해 성찰한 것으로 안다. 우리나라로 치면 과거의 강준만이랄까? 이 주제에 대해 몇몇 스타급 지식인들이 대신 고민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건 물론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정말 심각하게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렇게 고민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일상의 설계도들, 그 욕망과 권력의 담합들, 거기에 이끌리는 자신의 습관들...을 비판적으로 회의하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내 보기에 가장 심각한 건 [조선일보 월드]라는 기만의 매트릭스와 [삼성공화국]이다.

그런데 우리는 즐거운 것이 좋고, 우울하고, 따분하게 이런 메마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나도 그렇다. 문제는 놀이가 갖는, 유회로서의 담론, 유희로서의 대화가 갖는 가능성일테다. 그것은 물론 '이익'(생존)이라는 한계 상황에 복속한다.

각설하고..
자본권력과 정치권력, 그리고 언론권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를 목적한다.
그건 소수에 의한 다수의 지배다.
거기에 끌여들여지는 사람들, 숫자로서의 인간, 그들은 '대중'이다.
왜냐하면 그런 조건이 '자신의 기득권'유지와 '자본의 증식'과 '그것을 견고화하는 시스템 구축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구체적인 양상은 좀 다양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 경우엔 차기 집권세력(일 확률 무쟈게 높은) 한나라당을 지원하는 조선일보(및 다수 수구언론)와 집권 열우당과 일정 부분 정치적 포즈를 함께 하는 한겨레신문(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가깝다고 나는 판단한다)은 서로 대립항을 구성하지만, 그들 모두 지배하는 건 한나라도 열우당도 청와대도 아니고, '은둔의 제국'에 있는 그 분으로 상징되는 '자본'이다. 그들은 때론 적대적으로 공생하고, 때론 노골적으로 '통일전선'(기자실 통폐합 사건을 떠올려보자)을 형성한다.

자본권력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마치 '탈이념적' '탈정치적' 형태와 빛깔과 향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광고'라는 유혹적인 자본주의 꽃향기로 자신을 뒤덮어 버리고, 그래서 그 향기로운 빛깔들과 매혹적인 풍경들은 마치 자본권력과 정치, 그리고 이념이 서로 별개인 양 사람들을 현혹한다.

조선일보의 주된 레파토리 중 하나.

"무한경쟁 시대에 돌입한 이 마당에 웬 이념타령이야"

그런데 웃긴건 북한과 관련해서, 그리고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에 있어서 조선일보야 말로 '냉전'이데올로기에 미친듯이 뛰어든다는 점이다. 조선일보는 경제적으로는 '탈이념'을 내세우고, 스스로를 위장하지만, 경제와 정치는 단 한번도 다른 몸인 적 없으며(이건 마치 날개 없는 새라는 수사처럼 기만적이다), 조선일보 코미디의 비극은 탈이념을 내세우는 그 제스처가 갖는 이념지향성을 간과한다는 사실이다.

조선일보의 이념, 혹은 철학은 '생존'과 '지배'와 '이익'이다.
거기에 방향성과 지향성은 없다. 그저 많이 갖고, 많이 누리고, 많이 지배하면 장땡인 진흙탕 생존법칙. 그게 독재를 통과하면서, 그 독재과 친해지면서 더욱더 비대해진 조선일보의 노하우인거다.  

자본과 정치와 언론.
그건 기본적으로 한몸이며, 다만 자신의 욕망에 따라 서로 담합하기도 하고, 공모하기도 하고, 또 서로 싸우기도 한다. 그들이 싸울 때는 이미 있는 자신의 권력이 위협받을 때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이미 있는 권력의 조정을 위한 '게임'에 불과하다. 그리고 다른 사정, 가령 진실과 철학의 다툼 따위는 그다지 존재할 여지가 없다.


4. 인터넷 민주주의의 가능성 ; 혹은 블로그 민주주의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다.
물론 이건 현재 스코어다. 9회말 투아웃 역전 만루홈런(이거 무슨 밴드이름인 것도 같은데.. ^^;) 없으리라는 보장없지만, 이대로라면 콜드게임으로 지지 않으면 다행인 것 같다. 물론 이런 목적 지향의 목소리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많을테고, 그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라면 나는 역시나 추상적인 수준으로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일단은 이야기하자면, 결국 생명력 있는 활동은 '이익'과 '재미'가 수반되지 않으면 오래 이어지기 힘들다. 어떤 숭고한 목적 지향, 어떤 고상한 도덕 지향... 놀고 있다. 이건 그다지 생명력이 길지 못하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 역시 그렇게 도덕지향적이고, 숭고한 목적지향적인 인간들 역시 어느새인가 자신들의 이익과 재미를 추구한다. 인간이란게 원래 그런 동물이다.

이익은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의 제1원칙이니, 이 원칙에 예외는 없다. 물론 산신령은 제외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제2원칙은 재미다. 이익이 없는 곳에서도 인간은 존재할 수 있는데, 그건 지가 재밌으니까 그러는 거다.

허황된 희망을 노래하는 일은 그 노래하는 동안은 현실의 지옥을 잊을 수 있겠지만, 노래가 끝난 뒤의 그 절망은 좀더 뚜렷해지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익과 재미다. 그렇다면 그건 뭔가? 어떻게 이익과 재미를 인터넷을 통해, 블로그를 통해 구현할 수 있나?

이익은 단순히 애드센스, 애드클릭스, 올블릿, 애드씨 등의 기존 수익모델 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블로그와 블로거들을 이어주는 '플랫폼'은 다양한 채널들로 분화되고, 또 퍼져갈 것으로 나는 예상하고, 기존 수익 모델과 같은 전적으로 기업적인 움직임, 경영적 마인드에 바탕한 모델만 존재하란 법도 없다. 블로거들 스스로가 일정한 규모를 구축할 수 있다면, 그런 규모들을 느슨하게나마 조직할 수 있는, 조율할 수 있는 매개를 가질 수 있다면, '의존적인 블로거'들이 스스로의 '노동조합'을 결성할 수 있다면...

이런 저런 생각들이 몰려들지만, 그걸 지금 당장 정리할 능력은 없다.
다만 대안적인 수익모델과 블로그를 통한 즐거운 블로깅. 그 즐겁다의 정체, 유희로서의 성격들을 유지한 채로 사회적인 의미를 더불어 확보하는 방법론. 이런 것들이 내 블로깅의 화두가 될 것 같다.




* 참조 - 용어 ; 대중과 시민

1. 대중 [大衆, mass]
 
지위·계급·직업·학력·재산 등의 사회적 속성을 초월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합체. 매우 다의적(多義的)이며, 이론 차이에 따라 규정방법도 달라진다.

⑴ 사회학상, 사회집단론의 범주 ; 대중문화론
대중은 군중·공중 등과 더불어 무조직집단(無組織集團:비조직집단)의 하나이다. 오늘날처럼 대중이 거대한 ‘매스(mass)’로서 사회의 모든 면에 나타나고, 사회에서 대중의 역할과 힘이 재인식됨에 따라, 대중화된 인간의 능력과 이성의 쇠퇴 등이 문제화되기에 이르렀다.

20세기에 와서는 독점자본주의 단계에서의 산업기술과 통신 ·교통기관의 급속한 발달, 모든 사회조직의 거대화와 관료제화 등으로 이른바 ‘대중사회상황’이 출현하였다.     

K.만하임에 의하면, 산업적 대중사회에서 한때 자주적·이성적 심벌로 여겼던 ‘공중’은 수동적·정서적·비합리적 대중으로 변질해 간다. 대중 데모크라시는 민주주의를 확대하였지만, 그 반면에 이와 같은 대중화 상황이 진행하는 곳에 데모크라시의 위기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견해가 대중사회론의 전형인데, 여기서 파악한 대중은 동질화·평준화된 반면에 정서화·비합리화된 것으로, 지배자의 ‘심벌 조작’에 의해 쉽게 움직이는 존재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대중화상황의 심화에 의한 위기라는 문제의식은, 이를 어떻게 극복하여 데모크라시를 방위하느냐의 문제이다.     

⑵ 파시즘 사상
원래 불평등주의를 기초로 하였다. 사회의 기본적 관계는 언제나 지배와 복종에 있으며, 엘리트와 대중의 구별은 본질적인 것이다. 가치의 창조자는 항상 소수의 엘리트이며, 대중, 즉 다수자는 그들에게 종속되어야 할 운명을 지닌 것으로 간주된다. 이 경우 대중은 모래와 같은 무성격(無性格)·무규정(無規定)의 것으로, 선천적으로 자발성이 없고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존재로 여겨진다. 히틀러의 ‘지도자원리’는 이러한 견해에 입각한 것이었다.

⑶ 마르크스주의
인민대중·생산적 대중처럼 역사의 담당자·역사의 추진력으로 파악된다. 대중이란 프롤레타리아적 근로대중과 비프롤레타리아적 근로대중을 포함한 ‘일하는 사람들의 가장 넓은 층’, ‘일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레닌)’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대중은 조직된 프롤레타리아를 중심으로 통일을 실현함으로써 사회변혁의 담당자가 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대중이라는 개념은 여러 각도에서 파악되고 있지만, 대체로 학자들은 광범한 대중이 프롤레타리아화라는 방향으로 동질화·평준화되어 가는 대중화현상 자체 속에서, 그리고 그 마이너스적 면과 함께 보다 높은 방향으로 향상되는 새로운 요인을 인식하는 두 가지 측면에서 대중의 개념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상 n백과사전 발췌]
 
2. 시민 : 이건 n백과에도, 위키백과에도 등록된 어휘가 아니다.

서유럽은 17∼18세기에 시민혁명을 겪었다. 독일도 이 흐름에서 예외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19세기에 들어와 독일도 부르죠와혁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며, 독일에서도 부르죠와들이 그 세력을 뻗기 시작한다. 산업화의 덕분으로 독일 역시 산업부르죠와들이 성장해간다.
   

부르조와 혁명은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길인 것인데, 독일에서는 실패로 돌아갔다. 독일의 부르죠와 혁명이 실패로 돌아감으로 해서 독일은 국가의 역활이 매우 강했다. 산업화가 위로부터, 국가에 의해 진행되었고, 보수적이고 봉건적 성격이 강했다. 프랑스나 영국에 비해 독일의 부르죠와는 힘이 약했다. 민족국가 형성이 또한 늦었으며, 이 과업은 비스마르크에 의해 1871년에 달성된다.

민족국가의 형성은 자본주의 발달에 매우 중요했다. 단일한 시장권의 통합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독일은 1834년에 프로이센의 주도로 관세동맹을 맺어 이를 해결했고, 민족국가형성과 자본주의추구를 위해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를 포기한 나라였다. 이는 독일의 부르죠와지의 힘이 약했기 때문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혁명이후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었으나, 독일은 혁명이 실패한 탓에 '국가와 시민사회'가 분리되지 않았다. 융커를 중심으로 한 보수세력은 부르죠와와 프롤레타리아를 동시에 억눌렀다. 독일에서 노동운동이 급격하게 다른 나라들보다 빨리 성장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이다. 독일의 프롤레타리아는 독일의 부르죠와지들이 이루지 못한 과업까지 한꺼번에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노동운동이 가장 빨리 성장했고, 다른 나라들보다 관심의 촛점이 되는 것이다. 산업화가 위로부터 시작되면서, 자본의 대규모집중이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노동자들도 일찍 집중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한국) 상황은 이런 점에서 독일과 매우 흡사했다. 
[위키백과사전 표제어 '독일의 역사' 중에서. 발췌 인용]



* 발아점
블로그 친구 후딘과의 전화 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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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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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베네치안 2007/07/14 23:31

    뭐 푸코가 이야기한 '통제 사회'의 파놉티콘이 한국 사회에서 구현되고 있는 것이겠죠 ㅋㅋ

    민노씨 말대로 움베르토 에코가 (푸코가 이야기한) 권력의 망을 타파하기 위한 대안으로 제시했던 '게릴라 전술'의 일환으로 블로그가 기능할수도 있겠네요 ㅋ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7/07/15 04:23

      베네치안군 정말 오랜만입니다. ^ ^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말씀처럼 블로그가 게릴라(그런데 이건 오마이가 이미 써먹었군요. ㅡㅡ;; ㅎㅎ)전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뭐, 이런 거창한 말 말고도 그저 사회의 민주적 담론 및 토론, 비판의식을 재밌게 배우고, 또 그렇게 대화하면서 학습하는 일상적 하부구조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베네치안군 덕분에 겨우 무플 면했네요. ㅎㅎ

      : )

  2. 그럭저럭 2007/07/15 15:56

    윗 글 잘 읽어봤습니다 :)
    예전부터 인터넷의 그런 가능성을 보고 권력층에서는 계속 강하게 통제했지만 최근에는 알게모르게 뒤에서 조이더군요.
    이미 인터넷(블로그)의 민주주의의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대다수의 블로그를 봐도 기껏해야 네이버의 시덥지않은 기사를 링크하거나 남의 블로그 원문을 그대로 베끼는 수준의 포스팅이 대부분입니다.(그렇다고 제가 잘 쓰는 것도 아니지만...

    권력을 가진 측은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모습만 변할뿐.


    덧 : 어려운 용어는 모릅니다(유유)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07/07/15 21:14

      저도 어려운 용어 잘 몰라요. ^ ^

      베끼기도 어떻게 보면 그 의미가 아주 없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또 기사링크의 경우에는 자신이 스스로 적극적으로 편집행위를 수행하는 것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물론 부족하더라도 스스로 글을 쓰는게 가장 좋겠지만요. : )

  3. angora rabbit 2007/08/08 23:15

    친구는 너의 위치의 현재 팬이 되었다!

    perm. |  mod/del. |  reply.

가벼운 마음으로 댓글 한방 날려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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