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에 여자분 아주 미인이시네요..ㅋ"

한국사회에서 교수로 재직중인 어떤 이건희교도의 신앙 고백, 이 신앙 간증은 꽤 화제가 되었던 것 같은데,나는 며칠 전에야 들었다. 그 열혈신도의 신앙 간증을 짜깁기한 유튜브 동영상을 시청하던 한 네티즌이 댓글로 위와 같이 말했다. 그리고 이 댓글은 이런 댓글로 이어진다.

"네, 뒤에 여성분이 미인이시네요."


*
이한유라는 세속명을 가진 이 열혈신자의 영세명(혹은 세례명)은 뭘로 하면 좋을까? 가령 나는 카톨릭인데, 물론 날라리신도이지만, 내 영세명은 '베드로'다. 이건희교에도 이런 영세명이 있다면...이한유는 무엇으로 부르면 좋을까? '무노조'나 '비자금'은 어떤가. '애니콜', 혹은 '톡' '플레이' '러브'라면 어울릴 것도 같다. 혹은 '디램'이나 '에버랜드', '전환사채'나 '편법증여'라면 어떨까, 역시 썩 어울린다.


*
압도적인 비상식과 야만에 대해 우리는 분노한다.
하지만 삼성에 대해선 그렇게 하면 안된다.
잠깐 정신을 놓게 되거나, 딴 걸 보는게 오히려 현명하다.
그리고 이렇게 답하는 거다.
"뒤에 여자분 아주 미인시네요..ㅋ"

나도 이렇게 답해야 할 것 같다.
"와우, 정말 뒤에 여자분 미인이십니다..ㅎㅎ"


*
너무 웃기고, 너무 재밌다.
너무도 쓸쓸하고, 너무도 공포스럽다.
그리고 크리슈나무르티를, 나는 어쩔 수 없이 떠올리는거다.


*
크리슈나무르티는 이야기한다.

당신의 제약된 마음, 생활방식, 당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모든 구조는 당신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며 그것으로부터 즉각적으로 자유로워지지 못하게 한다. 당신은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볼 거야. 나는 자유로워지려고 해볼 거야"라고 말한다. '해볼 거야'라는 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우려할 만한 진술 가운데 하나다. 해본다는 것은 없으며, 최선을 다한다는 것도 없다.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다. 집이 불타고 있는데 당신은 뜸을 들이고 있다. 전세계와 자신 안의 폭력 때문에 집이 불타고 있는데 당신은 이렇게 말한다.

"어디 한 번 생각해보자. 어떤 이데올로기가 저 불을 끄는데 가장 좋을까?"

집이 불타고 있을 때, 당신은 물을 나르는 사람의 머리카락 색깔에 관해 말하겠는가?


-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폭력으로부터의 자유',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pp.89, 90. 물병자리 : 2002. 중에서


*
즉각적으로, 즉각적으로...
하거나 안 하거나 둘 중 하나...
어렵다.
특히나 삼성공화국, 아니 이건희일가족공화국에서는 너무도 어렵다.

김용철은 했다. 그리고 X됐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함께 했다. 그리고 함께 바보됐다.
그리고 이미 빠른 속도로 우리는 이들의 비극적 액션을 잊고 있다.
이건희 쇼도 시청했겠다, 광우병 롤러코스터도 빠방하게 360도 회전하고 있겠다...
삼성에 더 이상 관심을 보이기엔 여력이 없다.

우리는 몹시도 현명하게, 아주 유쾌하게, 소위 '쿨'하게, 이렇게 이야기할 뿐이다.
"뒤에 여자분 아주 미인이시네요...ㅋ"

어떤 야만이 우리를 짖누르고, 어떤 비상식이 우리를 조롱하더라도, 이제 우리는 할 말 없다.
우리는 자발적인 공범들이니까.
"뒤에 여자분 정말 미인이십니다!! 킹왕짱이예효~!"

이게 우리들의 방식이고, 또 삼성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방식이며, 삼성공화국에서 사는, 아니 이건희교가 국교로 군림하는 대한민국에서 사는 날라리 신도들의 무기력한 저항이다. 정말 슬프게도, 삼성에 관한 한 크리슈나무르티는 뭘 모른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행동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하거나 하지 않거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뒤에 여자분 참 미인이십니다...ㅋ"

그리고 아주 빠르게 이 모든 것을 잊고, 여전히 삼성이 지배하는 온갖 광고들을 소비하며, 그 이미지들을 흉내내고, 그 이미지와 자신들을 일체화시킨다. 부러움과 뿌듯함을 훈장처럼 가슴에 새긴다. 그리고 이건희 쇼가 끝난 며칠 뒤 어느 날, 조선일보에서 미술평론가라는 자가 "로열패밀리답지 않게 소탈하다"라고 써재끼는 야만과 몰상식을 읽으며, 나도 저런 '로열패밀리'라면 얼마나 좋을까, 마구 상상의 나래를 펴는거다.

우리들은, 삼성에 관한 한, 더 무시당해도 싸다.
삼성은 대한민국의 종교이고, 이건희 패밀리는 "로열패밀리"이며, 우리들은 여전히 삼성교도, 아니 이건희교도일 뿐이다.
열혈신자거나, 날라리신자거나 그 차이가 있을 뿐.
할렐루야~!
이건희여 영.원.하.라~!!(무릎팍 도사 강호동식 발음으로. : )


*
물론 이 글은 반어다.
반성이며, 지랄이다.
좀더 기억을 붙잡고 싶은 그런 지랄...

기억하라.
2008년 봄.
삼성 특검이라는 쇼와 함께 대한민국 법치주의는 부관참시되었다.
어떤 이건희교도는 TV 지상파에 나와 이건희를 그만 핍박하라며, 눈물겨운 신앙심을 보여줬다.
이건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고, SF가 아니라 현실이다.

정말 이래도 되는건지 모르겠다...

"광우병 수입으로 휴대폰 수출을 늘리려는 이번 정권 정책"에 반대하고, 의사를 표시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삼성을, 아니 삼성일가족 비리를 잊지 않고, 끈질기게 응시하는 일도 정말 정말 중요하다. 비록 지금은 할 수 있는게, "뒤에 여자분 아주 미인이시네요"라는 농담일 뿐이라도 말이다. 



* 관련글
사랑스런 삼성공화국
이건희 쇼의 본질 : 삼성 쇄신안 발표에 부쳐


* 발아점
"뒤에 여자분 아주 미인이시네요..ㅋ"  (유튜브) : 궁금한 건 이렇게 하는 것도 저작권에 걸릴텐데, 솔직히 [imbc - 100분 토론]에 직접 들어가서 보는 건 엄청난 인내심을 시험한다는 거다. 갈 때마다 뭘 깔라고 하질 않나... 프로그램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게 하고(100분토론 처럼 공익적 성격이 강한 건 좀더 싸게, 100원 200원... 정도로) 그걸 직접 블로그에 올릴 수 있도록 해주면 좋겠다. 직접 올리고 싶어도, 저작권법 때문에 좀 신경 쓰인다. 물론 imbc에서 쪼잔하게 이걸 트집잡을 것 같지는 않지만... ㅡ.ㅡ;

* 후속글
이건희교도 신앙간증 2 : 미인의 썩쏘 (0:32. 3:16)





나는 왜 글을 쓰는가

2008/05/09 19:44
*
이 질문은 아주 식상하다.
하지만 아주 근본적인 질문이다.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적었지만, 그게 왜 근본적인 질문인지는 나도 잘 모른다.
막연하게나마 그 답을 이 글을 통해 이야기해보고 싶다.

*
오늘은 너무 하고 싶은 말이 많다.
갑자기 마구 수다를 떨고 싶은거다.
하지만 말은 혼자 할 수 없으니, 내 말을 들어줄 '당신'을 필요로 하고, 그런데 내 앞에는 아무도 없어서, 나는 나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내 안에 있는 타자들, 나를 구성하는 어떤 다른 의미들, 그 의미들을 만들어준 나의 또 다른 주인들인 상상적 당신들, 우리들에게 이야기한다.

*
[100분 토론]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보자.
어제는 [100분토론 - 광우병 끝장 토론] 때문에 아주 기분이 좋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쟁전투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덧.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 같다..).

담론의 싸움은, 쉽게 말해 토론은, 피를 흘리지 않고, 상대방을 이성적으로 존중하면서, 하지만 가장 치열하게 좀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토론이 참 좋다. 그 말들의 향연이 끝나면 물론 언제나처럼 약간은 허무감이 함께 찾아오지만, 그래도 어제 광우병 토론만큼은 참 좋았다.
패널들 정말 애쓰셨다...

어제 [100분토론]은 나에게는 이런 시사점을 준다.
어떤 철학, 세계관의 우위를 지지하는 건 그 철학과 세계관 그 자체의 도덕성의 우월성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인 지식의 힘이라는 거다. 광우병이고 나발이고, 확률적으로 안정하다고 말할 수 있으니(혹은 확률적으로 그 위험을 무시할 수 있으니) 수입해도 괜찮다는 입장을 가진 정부측 관계자들은 그 철학이 갖는 도덕적 열세 때문에 토론에서 개망신 당한게 아니다.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식들, 근거들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망신 당했다. 물론 나는 그게 통쾌했는데, 그 상대방이 나와는 반대편에 속한 자들이라서 통쾌하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카타르시스는 감성적인, 정서적인, 직관적인 내포들, 함축들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그것이 충족되어야만 폭발한다. 광우병을 수입해도 괜찮다는 '이메가식 실용주의자'들을 떠받치는 본질적인 철학은 '엘리트주의'다. 이것을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대중은 신뢰할 수 없는 존재이며,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가식적인 위장기제들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들이다. 무식한 대중과 온갖 뻘질해도 자신을 뽑아주는 한심한 유권자들을 존중할 필요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는거다. 이런 그들에 대한 '직관적인' 느낌들을 그자들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전면 개방'으로, '영교시 수업 부활'로, '영어 몰입교육'으로, 구체적으로 증명해보여줬다.

그리고 권력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권력을 통해서다.
아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MBC라는 거대한 담론공장, 담론시스템의 조력을 얻지 못했더라면, 특히나 '피디수첩' '100분토론'이라는 담론시스템의 핵심기제의 조력을 얻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조중동에 의해 무식하고, 비과학적이며, "부드럽고 고소한 쇠고기" 못먹어서 환장한 어떤 것으로 취급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진 어떤 대중적 권위의 매개(피디수첩과 100분토론, 그리고 MBC라는 거대 방송사)를 통해 이제는 조중동이야 말로 비과학적이고, 싸구려이며, 무식한 족속이라는 '뿌듯함'을 우리는 느끼는거다.

물론 인터넷, 특히 블로그는 또 다른 가능성이긴 하지만, 너무 산발적이고, 너무 파편화되었으며, 자신의 잠재력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법을 아직은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그다지 그 성취가 수월할 것 같지는 않다(특히 어제 네이버가 공정위로부터 사실상의 면죄부를 받은 일은 이런 한국적 웹시스템의 암흑과 관련이 있을테다). 아틸라님께서는 종종 '집단지성  삥뜯기'란 표현을 즐겨 쓰는데, 한국 웹을, 특히 포털을 정의하는 가장 상징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든다. 시스템 얼개, 시스템의 구성요소들을 파악하는 노력을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기울인다면, 네이버가 대한민국 웹을 호령하는, 그래서 "사자가 이제 풀까지 뜯어먹는다"는 우스개는 듣지 않아도 좋으련만... (덧. foog님 댓글을 보면 사자도 풀 먹나보다. ^ ^ )

*
공동체라는 환상 내지는 이미지들은 내 구체적인 삶과 어떤 연계를 갖고, 그것은 나의 욕망과 어떤 구체적인 매개점을 갖는가.. 라는 생각을 나는 종종 한다. 광우병 사태와 관련해서도 그렇고, 삼성 특검이라는 쇼와 관련해서도 그렇다. 광우병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삼성 쇼야 어떻게 되든 말든... 만약에 나에게 아주 아름다고, 아주 현명한 어떤 여자가 있고, 그녀와 평생동안 따뜻하게 살 수 있다면, 그리고 내가 지켜야 하는 가족들, 내 누이와 내 동생과 내 어머니와 내 친구들과 더불어 그저 즐겁게 서로 위하며 살 수 있다면... 아무런 걱정없이, 그럴 수 있다면 솔직히 삼성이고, 광우병이고.. 내가 정말 이런 이야기들을 굳이 핏대세우면서 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런데 현대라는 괴물같은 시스템의 촉수들은 아주 작은 단위의 의미 관계망까지 그 영향력을 직접적으로 행사한다. 그 촉수들은 흔히 미디어로 불린다. 그 미디어들은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결합하고, 궁극적으론 정치권력은 그 배후에서 그 시스템의 키를 쥔채 사회 전체의 의미들, 유통되는 컨텐츠의 수준과 정도를 조종하려고 시도한다. 그리고 정치권력 그 뒤에 또 다시 자본권력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은 이미 한몸이다. 물론 그 방식은 예전처럼 방송국과 신문사를 통폐합하거나, 3S 정책을 취하는 무식한 방식이 아니다.

그것은 담론생산집단과의 결탁을 통해서 시도된다. 이를 위해 제도를 '합법적으로' 뜯어고치고(가령 앞으로 개정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신문법'과 '방송법'), 합법을 가장한 폐쇄적인 권력 분담을 시도한다. 그리고 당파성을 뛰어넘는 이익집단, 권력집단으로서의 미디어산업의 맹주들, 가령 우리나라로 치면 거대신문들을 통해서 구체적인  '미션'들은 수행된다. 그 미션은 자발적인 속물근성을 자극하고, 그래서 기끼어 스스로의 타락을 원하는 대중들을 사육하는 방식이다.

광우병 사태는 그 미션 수행자들이 패배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승리에 도취할 만큼 명백한 승리를 얻어낸 것은 전혀 아니고, 언제나 그랬듯 그들은 한 두번의 실수로, 한 두번의 패배로 좌절할 만큼 약하지도 않다. 이들의 생명력은 정말 아메바스럽다는 느낌이 드는데, 이들은 끊임없이 자기를 떼어내면서 그렇게 생존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단발적인 승리는 '거대 시스템'의 조력을 받아 얻어낸 승리지, 시민역량이 숙성되어, 그 역량 그 자체가 어떤 시스템을 구축하여 승리한 것도 전혀 아니다. 이 이슈는 필연적으로 '뉴미디어 전쟁'과 관련이 있고, 싸움은 지금부터다. 광우병 사태의 최대 수혜자는, 적어도 뉴미디어 전쟁이라는 관극틀을 통해 본다면, 다음(daum)과 MBC지만, 이들이 항상 시민들의 우군이라는 생각도 솔직히 들지는 않는다. 시민들이 바보짓하고, 멍때리면 언제든지 우호적인 파트너쉽을 스스로 포기할지도 모른다.

*
엉뚱하게 [100분토론]이니 광우병이니 이런 이야기들을 너무 길게 했는데, 글은 그 구체적인 시공간의 제약 안에 있고,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은 그 구체적인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떤 초월적인 지점을 갖지는 못하는 것 같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런데 물론 필요이상으로 부연설명으로서, 그 예시로서의 이야기가 길어진 감은 없지 않지만...

*
다시 좀더 개인적 이야기로 돌아오면, [일 포스티노]라는 영화로도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칠레의 국민시인 네루다의 유년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인상적이다. 그 이야기는 '양과 솔방울'에 관한 이야기다([양과 솔방울], 로버트 블라이와의 대담,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사랑의 노래'에 수록, 민음사, 1990). 어린 네루다의 집에는  담벽이 있었고, 이 담을 사이에 두고 그 옆집에도 어떤 아이가 있었나 보다. 두 아이들은 그 담벽에 뚤린 구멍(!)을 통해 서로 양과 솔방울을 나눠 가졌다. 그리고 그 체험은 네루다에게 평생동안 세상과 내가 소통할 수 있다는 소망,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가 되어 이어질 수 있다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
글을 쓰는 건 때로는 내가 가진 창고들을 비워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내가 가진 지식 나부랭이들의 창고들을 비워내고, 다시 채워넣고, 다시 비워내고... 이런 일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다. 물론 그런 채움과 비움이 반복되면서 어떤 방식들, 틀, 회로들이 만들어지고, 그런 사고의 주형들, 회로들은 좀더 세상을 합리적으로 바라보게 하거나, 좀더 세상을 풍성하게 바라보게 하고, 또 세상과 당신, 그리고 우리들의 대화를 좀더 아름답고, 즐거운 것으로 이끌 수 있는 훈련이 되기도 할테지... 하지만 여전히 그건 너무도 메마르고, 지루하고, 식상하다는 느낌이 드는거다.... 글을 쓰는 게 창고를 채우는 일이 될 수는 있는걸까? 물론 나는 항상 그런 기대를 갖고 있다고 믿지만, 종종 그런 대화로서의 글쓰기가 갖는 관계적인 이미지들을 놓치기도 한다. 그저 이야기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건 나쁜 건 아니지만, 그저 글을 쓰기 위해 글을 쓰는 건... 좀 다르다는 생각도 들고...

*
어떤 욕망이 그 자체로 숨겨져있고, 그래서 그 욕망을 풀어놓을 길 없을 때, 도무지 그 욕망에 대해 스스로 인정하기도 너무 욕되거나, 너무도 슬프거나, 너무도 비참할 때... 우리는 꿈을 꾼다. 그 꿈은 어떤 형상도 어떤 색도 어떤 향기도 없고, 유년의 '장롱' 환상처럼, 장롱 안에 있는 깊고 어두운, 절벽보다 깊은 구멍처럼 끝간데 없다. 가령 내가 가장 오랫동안 갈망했던 어떤 여자 아이에 대한 풀려나지 않은 욕망, 갈구는 이런 장롱 환상 같은 깊은 구멍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내 삶은 그것만으로도, 내가 나에게 들리지 않는 소리로 말한다. 너는 실패했다거나, 혹은 너는 버림받았다거나, 혹은 너는 이제 여분의 삶을 살고 있을 뿐이라는... 이런 비참한 감상들을, 그것은 물론 감상일 뿐이지만, 그 자체로 너무도 가혹한 느낌들을 내 안에 문득 문득 떠올리는거다. 그런 생각이 찾아오면, 이불 속에서 고요히 고요히 숨죽여 울거나, 혹은 음악을 듣거나, 혹은.... 글을 쓴다.


*
항상 글쓰기는 자기 치유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연민의 가장 예술적인 형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이토록 상처받았다오, 라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모든 글은, 모든 이야기는 가장 본질적인 자기 상처, 그것이 사춘기의 실패한 연애담이든, 아니면 영원히 들키지 않을, 그래서 스스로도 망각한 부끄러운 욕망이든 간에... 그 자기상처에 대해 그 '환자로서의 동료의식'을 나눌 친구들을 찾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기를 쓰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그 일기가 나만 읽을 수 있는 일기일지라도, 그 글은 내 안에 있는 어떤 나 아닌 것들의 독자, 나를 만들어준 어떤 체험들의 흔적으로서의 주인공들에게 읽히는 글이면서, 막연하게나마 이 공기들을 채우는 어떤 시선들, 종이 위에 스며들어 있는 어떤 영혼들에게 읽히는 글이기 때문이다.


*
나는 왜 글을 쓰는가...
역시나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는 못한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제대로 된 대답이 있을리 만무하고, 이 질문은 질문에 대한 질문에 대한 질문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에, 그 답 역시 영원히 반복적으로 그 질문들을 쫓아서 여행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영역이긴 하겠다.

당신은 왜 글을 쓰는가...
당신의 이유를 듣고 싶다.




광우병 사태 : 촛불문화제와 소녀들

2008/05/08 10:56
부제 : 문득 떠오른 추억들, 그리고 항상 사랑스러웠던 이기심...


[....] 최근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 겸 2MB 탄핵 집회(…)의 10대 참여율이 높은 것에 대해서 어떤 분들은 민주주의의 씨앗이라 부르며 감격하고 있는 듯 하다. 음… 뭐랄까…

왠지 2002년 월드컵 응원열기를 보면서 카니발이니 민주적 해방구니 월드컵 세대니 설레발쳤던 (그리고 열기가 사그러들자마자 버로우했던) 모습들이 떠올라서 애매한 느낌이 든다. [....]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이 모습들은 민주주의의 씨앗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예 관계없지도 않다. 바로, 민주주의의 ‘재료’다. 재료는 배합 방식에 따라서, 요리 방법에 따라서 전혀 엉뚱한 결과물로 나올 수도 있다. 재료는 사용법에 따라서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
-
capcold, 민주주의의 씨앗이라…  중에서


0.
지난 화요일 촛불문화제에 다녀왔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내려다보는, 아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라는 그들만의 성(城)에 둘러쌓인,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청계천, 그 광장에 그날따라 바람이 몹시 불었다. 시민들은 분노했고, 때론 즐겁게 웃었으며, 그렇게 마음을 함께 나눴다. 그게 반갑기도 하고, 늘 그렇듯 낯설기도 하였다. 그리고 내 마음에는 여전히, 세속적인 욕망과 공동체적 소망과... 그 둘 사이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는 또 다른 내가 있다.


1.
그날도 십대 소년소녀들은 저 나름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결혼해서 애기 낳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조중동이 '괴담'으로 부르는 그 '비과학적 공포'에 바탕해서 과장되게, 하지만 꾸밈없이 이야기하는 소녀는, "지금 엄마는 제가 도서관에 있는 줄 알아요. ㅎㅎ" 이런 이야기로 청중의 웃음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소녀의 공포는 비과학적이고, 그녀의 소망은 괴담에 바탕하고 있으므로 무효. 라고 '판정'는 조선일보는 참 과학적인 신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그 과학적 신념에 의해 '진실'보다는 '국익'이 우선한다는 황우석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려고 그렇게도 무던히 설레발치고, 그 압도적 거짓과 기만에 의해 국익의 실체조차도 모호해지고, 자신의 정체가 발가벗겨지자, 아니면 그만이지 뭐, 이렇게 모르척 했었나보다.


2.
내 십대에도 놀랄만한 암흑과 놀랄만한 별천지와 놀랄만한 건조함과 놀랄만한 달콤함들이 있었다.
나는 한겨레를 읽었고, 노동해방문학을 읽었으며, 학교를 자퇴하고, 남산도서관으로 등교하곤 했다.
나는 '0의 이야기'를 탐독했고, 삼류 재개봉 극장들을 배회했으며, 포르노와 헐리웃 영화가 정말 내 무미건조한 삶의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프랑스 포르노와 헐리웃 영화들을 좋아한다. 물론 좀더 그 취향은 다채로워지기는 했지만.

어느날 남산 도서관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대학생 누나, 형들의 물결에 휩쓸려 경찰에 쫓기기도 했고, 그 때 내 호흡기로 들어온 너무도 불쾌한 그 어떤 것... 사과탄, 지랄탄, 최루탄...숨쉬기 힘든, 눈물, 콧물 마구 흘러내리는 그 '과격한 놀이'를 끝낸 뒤에 집에 돌아와선, 그 때는 집에 자퇴한 걸 숨기고 있던 바로 그 때였던 것 같은데, 어서 숨겨둔 비디오를 봐야지(그건 아마도 아주 아주 야한 비디어였을거다... )라거나, 혹은 록키시리즈 중 어떤 것을 마저 보아야겠군.. 이런 생각이 마구 마구 마음 속에서 꽃피던 그런 시절이었다.


3.
광우병 사태는 이기심에 바탕하고 있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이 모든 에너지는 그 바탕에 이기심이 깔려 있다.
잘못하다간 내가 X되겠구나, 싶은 위기감이 여기에 있는거다.
그게 '광우병 로또'심리다.
우리는 로또에 당첨되지 않으리란 걸 뻔히 알지만 로또를 산다.
그와 똑같이 '광우병 로또'에 당첨되지 않을 확률이 훨씬 더 높음에도 불구하고, 백만분의 일, 아니 억만분의 일이라도, 그 광우병 로또에는 발을 들여놓고 싶지 않은거다.
이건 당연하지 않나.

그런 의미에서 촛불문화제에서 발언한 그 귀여운 마스크한 소녀의 발언은 정말 정말 이 사태의 본질을 명징하게 함축하고 있다.
나는 그 이기심을 지지한다.
그 이기심이 사회적인 상상력, 공동체적인 상상력과 만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일단 그 이기심은 여전히 지지하고, 이건 지지하거나 말거나 영원히 계속될거다.

시민들은 무슨 대단한 사회적인 공동체의식이나 반미의식이나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의식적인 거부나 이런거 별로 관심없다. 나부터도 이런 건 그다지 관심이 없거나, 혹은 관심을 갖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무슨 대단한 공동체의식이나, 정치권력에 대해 고도의 비판적 사고를 갖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미국은 무조건 짜증난다는 그런 반미의식, 나에겐 전혀 없다. 시민들 대부분도 그럴거다.

나는 다만 이건 정말 거지발싸개 같은 협상이고, 이 협상은 협상도 아니다라는 건 안다.
그래서 총선 한 달전에 협상 스케줄이 결정되었고, 총선 끝나자 마자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협상을 일주일 만에 쫑냈으며, 그렇게 미국축산업계에 한아름 선물바구니 준비하고 이명박과 부시가 캠프데이비스에서 사진 한방~! 한 그 일련의 파노라마, 그게 "국민의 생명과 건강이 무엇보다 우선"이라는 이명박의 즉흥적인 '애드리브'의 진정성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게 하는거다.


4.
"미국인이 먹는 똑같은 쇠고기"
요즘 본격적인 미국신문을 선언하고 있는 조선일보는 여전히 미국축산협회 홍보지 같은 소리를 반복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이제 너무 들어서 지겹다. 이건 정부에서 친여 기득권신문 일면에 내보낸 광고와도 물론같다. "광우병은 엉터리 소동"(5월 6일자 사설)이고, "어떤 탤런트의 미친 발언"이 "인터넷을 주름잡고 있는 사태"(5월 5일자 사설)를 막으려면, 이제라도 "국정의 예견, 조정, 감시, 통제 기능"(위동)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고 일장 훈계하신다. 이명박이 가난한 국민들을 너무도 사랑하여 "가난한 국민들을 '미쳐도 좋으니 고기를 먹겠다고 환장한 인간들로 만들어 버렸"듯(강유원), 조선일보는 무식한 국민들을 너무도 사랑하여, 감히 미국민과 한국민을 동격에 놓는 불경을 저지르고 있다.

언젠가 아틸라님은 이렇게 이야기한 적 있다.

세계관의 혼란: 선거로 권력을 잡은 사람이 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사람처럼 행동하면 도대체 그의 정통성은 어디서 오는걸까? (아틸라)

이건 마치 쿠데타 사령부에서 내리는 지령같은 느낌도 들고, 대한민국 정부가 과연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가 맞나 싶은 생각도 들게 한다. 계엄 상황, 혹은 준전시상황을 방불케하는 조선일보의 설레발은 물론 그 이면에 '뉴미디어 전쟁'의 전초전으로 이 광우병 사태를 위치시키려 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들게 한다. 밀리면 죽는다는 절박함이 이렇게 눈치빠른 조선일보를 더욱 더 노골적인 야만으로 이끌고 있는 건 아닐까 싶은거다.

그러니 '거대신문이 방송을 장악하도록 내버려 둘 것인가'라는 흥미롭고, 본격적인 싸움이 광우병 사태와 맞물려 펼쳐지려고 하고 있다. 조선일보, 급하긴 급했나 보다. 양상훈 칼럼은 그 조바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나는 실은 광우병 사태 보다는 이 싸움에 오히려 관심이 간다. 이에 대해선 따로 글을 쓰고 싶다). 암튼 미디어오늘, 프레시안, 그리고 조선일보 칼럼에서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미디어 장악을 위한 본게임은 그 소녀의 욕망과 나와 당신들의 욕망, 그리고 광우병을 통해 드러난 우리들의 이율배반적인 욕망들까지를 총체적으로 조정하고 싶다는 조선일보의 야심이 걸린 아주 아주 '커다란 한판'이 될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좀더 쉽게 말해볼까...
"피디수첩이 없었다면, 저 무식한 족속들이 이렇게 길길이 날뛰는 일은 없지 않았겠어?"
누군가, 가려진 미디어 저 뒤 편에서 이렇게 혀를 차고 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던져질 주사위가, 미친 소 덕분에, 좀더 빨리 던져진 느낌이다.



사족. 좀 딴 얘기...

more..




* 관련 추천글(팟캐스트)
새드개그맨, 청계천 촛불 문화제 현장 리포트 (08.05.04)

foog, 잡념 : 미국산 쇠고기 개방 사태에 대해
[.... ] 요컨대 쇠고기 개방 문제는 어떻게 보면 굉장히 복잡한 사안이다. 그것은 자유무역의 부작용, 식량의 생산과 소비 체계의 부조화, 육식 소비로 인한 환경적 재해,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의 소비불평등 등 여러 근본적이고 철학적이고 경제학적인 화두를 던져주고 있다. 물론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이 이러한 문제의 실체에 조금이나마 접근하게 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등장이 미제국주의의 실체를 두드러지게 했다면, 이명박 정부의 등장이 한국 자본주의의 모순을 두드러지게 한 측면도 있다. 그런 한편으로 자칫 일부에서 보이는 이명박 정부를 절대악으로 상정하는 저항이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우려도 있지 않은가 우려되기도 한다.

marishin, '광우병 정국' 단상
'광우병 정국'은 새로운 정치의 희망과 가능성이기 이전에, '한국 사회'가 안에서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내파'의 위기를 맞고 있다는 아주 분명하며 불길한 징후다. 기성 세대는, 제도권 정치는, 그리고 언론은 이 요구과 현실의 괴리를 이해하고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 그리고 이 문제는, 젊은이들이 광우병 촛불집회를 새로운 참여 정치의 공간으로 발전시킬 상상력과 감성을 발휘하고, 전략과 전술을 개발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또 그들과 적극 연대하고 그들을 지원할 세력이 존재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낡은 감성과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하는 한, 좌파 세력이 끼어들 자리는 좀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capcold, 민주주의의 씨앗이라…
민주주의는 종종 사회적 분노를 필요로 하지만, 사회적 분노가 민주주의가 되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개념함양이라는 역할을 맡은 개념인들의 임무가 더욱 커지는 것이며, 설득력있게 그 에너지를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유도할 담론전략들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지나친 오버는 가지치기도 해가면서.

강유원, 누구를 위한 국가인가
그는 '강부자', '고소영'으로 불리는 한국 사회 지배계급이 자신들의 집단이익을 위해 조직한 노력에 의해 대통령이 되었다. 그들은 입법(18대 총선 결과 진보신당은 단 한명의 국회의원도 배출하지 못했다), 사법, 행정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기 위해 그나마 공공영역으로 남아있던 교육과 의료를 완전히 개조하려 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이라는 모양새를 빌려 '지배계급을 위한'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미국에서 수입되는 쇠고기와
미국사람이 먹는 쇠고기는
똑같습니다!

3억인의 미국인과 96개국의 세계인들이 즐겨 먹는 바로 그 쇠고기가 수입됩니다.

1997년 동물성 사료 급여 금지 이후 미국에서 태어난 소는 단 한 마리도 광우병에 걸린 바가 없습니다.
정부는 국민들의 건강과 식품안전 확보를 위해 완벽한 검역시스템을 갖추고 원산지 표시 단속을 철저히 하겠습니다.

광우병, 들어올 수도 없고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농림수산식품부. 보건복지가족부


1. 어떤 '과학적 블로거'가 소위 '프빠'에게 보내는 경멸적인 태도에 대해선 이제 두 손 두 발 다들었다. 세상의 모든 진리를 자신의 손에 움켜쥔 듯 확정적으로 진술하는 그 태도에 대해선 뭐랄까, "광우병, 들어올 수도 없고, 들어오지도 않습니다"와 쌤쌤이랄까, 그런 느낌마저 든다.

흔히 '냄비근성'으로 표현되는 과도한 감정 과잉, 이성적 자기절제를 통과하지 않은 감정적 폭주에 대해 경계할 필요는 물론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지적하고 싶다. 과학적인 사고, 이성적인 사고, 비판적인 사고를 그토록 강조하면서 툭하면 '빠'를 즐겨 쓰는, 이토록 맹목적인  비이성의 단골 수사들을 즐겨 사용하는 그 언어적 행태는 그다지 과학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아참, '프빠'는 "프리온빠'란다. 난 오늘 처음 들었다. 좀더 풀어서 설명하면, 미국산 쇠고기 수입하면, 광우병으로 대한민국 절딴 날 것처럼 호들갑 떠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프빠' 혐의 다분하다. 그렇담 나도 '프빠'하련다.

2. 황빠, 심빠, 프빠
이들은 어디에서 겹치고, 어디에서 다른가? 물론 어떤 과학적 블로거의 눈에 이들은 모두 같다. 황빠의 맹목적 애국주의, 심빠의 감상적 민족주의, 프빠의 과도한 건강염려증, 보신주의(?)는 같다. 빠를 수식하는 황, 심, 프가 중요한게 아니라 '빠'가 중요하다. 빠는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거다. 이 경멸과 증오를 통해 자신의 어줍잖은 지적 허영을 만족시킬 수 있으니까. 이런 지적 딸딸이즘은 소위 민중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보여주는 감상주의, 냄비근성에 대한 혐오에 기반하는 것은 아닐까 추정한다.

가령 '무한도전' 보면서 낄낄대고, '결혼합니다'(제목 맞나?) 보면서 멍때리는 미디어의 포로들, 좀더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뉴타운 헛공약에 눈이 뒤집혀 집값이나 올릴까 싶어 노회찬 대신에 홍정욱 뽑는 그런 유권자들, 비판적 시각을 거세당한 채로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쿨한 줄 믿고 있는 한심한 20대들, 교육정책 비판하면서도 자기 자녀들에게는 기를 쓰고 일등 일등을 강요하는, 기어코 학원에 쑤셔넣는 그 무수히 많을 아줌마들....

나도 싫다. 하지만 거기에 나도 있고, 당신도 있고, 그게 우리들이다. 언젠가 행인이 지적했듯, 그래서 "진보가 어려운 거다". 그건 우리 안에 있는 속물근성에 대한, 세속적 욕망에 대한 지겹고, 따분한 설득과 회유와 아부와 유혹을 견디고 또 견뎌야 하는거니까... 그리고 우리는 속물근성을 증오하지 않는다. 그건 너무도 사랑스러우니까, 우리가 죽은 뒤에야 죽을 수 있는 것, 그게 속물근성이다.

3. "3억의 미국인, 96개국의 세계인"
너나 먹어라. 나는 쇠고기 먹지 않고 버티련다. 아, 그런데 한가지 궁금증. 96개국 명단 좀 어디서 볼 수 없나? 도무지 그 명단 전부를 알려주는 글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 96개국 세계인들이 각각 어떤 수준으로 그 맛난 미국산 쇠고기 수입해서 맛나게 드시고 계신지 내 눈으로 좀 확인하고 싶다.

4.
끝으로...

김치수의 지적
“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보수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데도 진보주의자인 척할 때는, 사소한 것에 과격해지고, 본질적인 것에는 무관심해진다.”  옳은 말이다.

- 김현, 행복한 책읽기 중에서


* 참조:
정부가 주장하는 "96개국의 세계인"
에 대해 관련 기사들
한국, 美쇠고기 개방 총대멨다 (서울경제)
연령·부위 제한없이 개방 주요 수입국중 처음


28일 미국 육류수출협회(USMEF)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를 가장 많이 수입한 나라는 멕시코로 11억8,507만달러어치를 사먹은 것으로 집계됐다. 이어 캐나다(6억203만달러), 일본(2억4,425만달러), 한국(1억1,879만달러), 대만(1억721만달러), 중국ㆍ홍콩(3,632만달러) 등이 미국산 쇠고기의 주요 수입국으로 이들 상위 6개국이 미국산 쇠고기 수출의 87.6%를 차지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국가인 멕시코와 캐나다를 제외하면 동아시아 4개국이 사실상 미국 쇠고기시장의 ‘큰손’인 셈이다.

이 가운데 미국산 쇠고기를 연령ㆍ부위 제한없이 받아들이기로 한 나라는 지난 18일 협상이 타결된 우리나라와 미국과 마찬가지로 광우병이 발생했지만 국제수역사무국(OIE)의 ‘광우병위험통제국’ 지위를 받은 캐나다뿐이다. 최대 수입국인 멕시코는 ‘30개월 미만’이라는 연령 제한을 두고 있고 3위인 일본은 더 강한 ‘20개월 미만’ 조건을 유지하고 있다. 대만과 중국ㆍ홍콩도 ‘30개월 미만, 뼈 없는 살코기’ 조건을 아직 고수하고 있다.
[....]
우리 정부와 여당은 “현재 전세계 96개국이 미국산 쇠고기를 연령ㆍ부위 제한없이 수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실제 수입실적을 고려할 때 이들 96개국에 큰 의미를 두기 어렵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미국 쇠고기 수출의 90% 가까이를 수입하는 주요 국가들이 대부분 미국산 쇠고기를 제한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들 96개국 중에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민감한 이슈가 될 만큼 수입하는 나라도 많지 않다는 것이다.

한겨레 : 미 쇠고기 전면수출’ 한국이 길 열어줘
정부 “96개국 전면수입” 해명은 거래량 적어 무의미 
중에서

“우리나라 외에 전 세계 96개국도 미국산 쇠고기를 연령과 부위 제한 없이 수입하고 있다”며 쇠고기 수입 협상 결과를 정당화하는 정부와 여당의 논리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수입실적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완전 개방’ 국가 숫자를 근거로 삼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다. 실제 미국 육류수출협회 통계를 보면, 지난해 미국산 쇠고기를 100만달러(약 10억원)어치 이상 수입한 나라는 23곳에 불과하다.

중앙일보 : “3억 미국인, 200만 재미동포가 미국 쇠고기 먹어” 중에서

Q:30개월 이상 된 소의 뼈까지 수입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는데.

A : 세계 96개국이 30개월 이상 된 뼈 있는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산 쇠고기의 주요 수입국 가운데서는 광우병 발생국인 캐나다를 제외하면 우리나라가 사실상 처음으로 제한을 푼 게 맞다. 미국은 일본·대만 등 수입국과 협상을 진행 중이며, 한국 수준으로 개방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OIE는 30개월 이상 된 소라도 SRM만 제거하면 안전하다고 밝히고 있다. (제목봐라, 참 중앙일보답다. 기사 중 있는 "크게 줄어든 세계 광우병 발생" 도표는 마음이 다 짠하다.. )

프레시안 : 미국인도 먹는 광우병 쇠고기 뭐가 문제냐고? 중에서

설령 미국인들에게 안전하다 하더라도 미국과 전혀 다른 미각과 음식 조리 문화를 가진 우리들에게까지 안전한 것은 아니다. 잘 알려진 대로, 미국인들이 좋아하는 것은 20개월 이하의 어린 쇠고기이고, 미국인들은 우리처럼 뼈와 내장까지 먹는 것이 아니라 살코기만 먹는 음식 문화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까지 알려진 광우병 위험과 관련해 미국인들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다. 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로 먹는 쇠고기는 24개월을 전후한 쇠고기이고, 특히 국물을 내기 위한 뼈는 나이 먹은 소의 것일수록 국물이 진하고 맛있다고 한다.
 
이규태의 글에 따르면,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마거릿 미드 여사는 쇠고기에 대한 미각이 가장 세분화된 민족으로 우리 민족을 들었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미국 사람들은 쇠고기를 35가지로 분류해 요리를 해 먹는데, 우리나라는 무려 120부분을 요리해 먹는다. 살코기로는 등심, 안심, 갈비, 사태, 차돌박이, 제비추리를 먹고, 양, 간, 곱창, 염통, 콩팥, 피 같은 내장에다가 우랑, 우신, 혀, 젖통살, 쇠고기, 쇠꼬리, 우족도 먹는다. 거기다가 쇠다리의 관절인 도가니까지 발라내고 척추뼈 속에 든 등골까지 빼먹는다.
 
우리가 미국의 쇠고기를 수입해서 살코기만 먹지 않았다는 것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다. 소 뼈다귀까지 외국에서 대량으로 수입해 와 그 속에 스며 있는 골즙까지 우려먹는데, 웬만한 한국인치고 수입 쇠고기 뼈를 사서 사골국을 끓여먹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처럼 광우병 특정위험물질(SRM)이 많이 포함된 부위까지 먹는 음식 문화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광우병 위험에 대한 노출 정도가 미국인과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의 광우병 쇠고기와 관련된 위험 평가는 미국과 전혀 다른 기준을 가져야 한다. 이는 문화 상대성에 대한 기본적 이해만 있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 '미국인이 먹는 쇠고기, 한국인이 먹는 쇠고기' 관련 기사 (07. 7. 프레시안 기사)


* 관련
계몽 혹은 소통의 딜레마


* 관련 추천
Forget the Radio :: 049. 5/3 청계천 촛불 문화제 현장 리포트 (08.05.04) : 내가 지금까지 들은 최고의 팟캐스트다. 이 팟캐스트는 다른 새드개그맨의 팟캐스트보다는 덜 분석적이고, 덜 이성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진실을 손에 쥔 듯한 어떤 과학적 블로거의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불필요한 신경질과 비교한다면 이 팟캐스트를 채우고 있는 따뜻한 마음은 더더욱 가치 있게 느껴진다. 물론 세상은 마음만으로 구성되지도 않고, 세상은 마음만으로 바뀌지도 않는다. 하지만 마음이 없다면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그 소박한 바람과 희망이 없다면 세상은 여전히 암흑이었을테다. 이와 비교한다면 어떤 과학적 블로거의 과민한 신경질은 그저 어줍잖은, 평균보다 조금 더 나은 지식 나부랭이로, 세상을 바꾸게 했던(자주 어리석고, 때론 절망스럽기도 했지만) 그 마음들을 조롱하는 것에 탐닉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거기에 어리석은 동조자들은 그런 가학행위에 동조하는 것이 자신의 있지도 않은 지적 수준에 대한 우월감을 확인하는 것이라고 착각들 하는 것 같다. 이건 정말 대단히 격조없는 태도들이다.

광우병 (YY) : 특히 유이채님 댓글을 매개로 전개되는 대화.




구글 페이지랭크 단상

2008/05/04 20:38
전 페이지랭크를 신뢰하지만 동시에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비교적) 객관적이지만, (역시나) 주관적인 신뢰를 담보하지는 못합니다.

전 효율적인 웹서핑을 위해, 특히나 가장 즐겨 검색하는 구글 검색 편의를 위해 구글툴바까지 브라우저 상단에 부착했습니다. 그리고 구글이 세계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우수한 검색엔진이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히 페이지랭크에 대한 신뢰도는, 웹에 대한 체험치가 높아질수록, 블로깅에 대한 체험이 쌓여갈수록 점점더 낮아지고 있습니다. 물론 페이지랭크라는 구글의 아이디어와 그 망라적이며, 우주적인(!) 규모에 대해선 대단하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이 글은 그저 구글이라는 검색엔진을 그래도 가장 신뢰하는 평범한 구글 소비자의 한명으로서, 그리고 블로거로서 구글 페이지랭크에 대한 이런 저런 단상들을 그저 생각나는대로 끄적거려본 글에 불과합니다. 이 글은 쓰게 한 동기는, 제 글 상당수가 그렇듯, 역시나 우연한 블로깅입니다. 우연한 블로깅(그 중 읽기) 중에 블로그벗인 레이니돌님 글을 읽고 즉흥적으로 끄적거리는 거죠. 정보나 감동(ㅎㅎ)과는 관계가 먼, 하지만 제 나름으로는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시 해보는 기회이기도 합니다(언젠가 한겨레블로그를 제1블로그로 삼았던 시절에 썼던 주제이기도 하고요).



* 페이지랭크 개요

페이지랭크에 대해선 구글을 주로 사용하시는 많은 블로거와 독자들께서 이미 숙지하고 계신 내용일테지만, 혹시 몰라서요. 제가 이해한 바를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구글 페이지랭크는 "구글 검색의 핵심요소"입니다.

구글 한국어 사이트에서 설명하는 바를 인용하는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페이지 순위의 설명

구글의 페이지 순위(PageRank)는 500변수와 20억의 용어가 있는 세밀한 공식을 사용하여 객관적인 웹 페이지 순위를 계산합니다. 이런 객관적인 순위를 구성하기 위해 구글은 인터넷의 광범위한 구조를 직접 이용합니다. 근본적으로, A라는 페이지에서 B라는 페이지로 연결하는 링크가 있으면, 구글은 그 링크를 일종의 투표로 봅니다. 많이 투표된 페이지는 구글에게 중요하게 보이며, 투표하는 페이지도 구글이 평가합니다. 구글이 “중요하다”고 평가한 페이지의 투표는 더욱 중요하게 평가되어서 투표대상의 페이지도 중요도가 높아집니다.

중요하고 고급인 사이트들은 높은 페이지 순위 점수를 받고, 구글이 검색을 할 때마다 그 점수를 기억 해 둡니다. 물론 결과의 페이지가 중요하다고 해서 검색에 관련성이 높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구글은 페이지 순위와 함께 최첨단 텍스트 검색 기술을 도입해서 검색 하나하나에 관련된 결과를 보여드립니다. 검색어가 페이지에 몇 번 나타나는가를 살펴보는 것을 월등히 초월한, 그 페이지에 대한 (그리고 그 페이지에 링크하는 다른 페이지에 대한) 여러 가지의 전체적인 검사를 해서 검색에 관련성이 가장 높은 결과만 보여드립니다.

- 구글 한국 사이트, '구글을 사용하는 이유' 중에서

가령 이렇게 비유하면 직관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 듯 합니다.
중요한 책들, 혹은 중요한 논문들은 많이 인용되고(백링크), 중요한 매체(백링크의 중요도에 대한 가중치)에서 인용됩니다. 그런 책들, 논문들을 펴낸 사람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으로 알려진 노벨상을 받게 되죠. 이게 구글 페이지랭크라는 아이디어입니다.

2. 구글은 페이지랭크가 무질서한 웹에 질서를 세우기 위한 시도라고 말합니다.

구글은 인터넷에 질서를 수립합니다.
구글은 웹의 정보대혼란에 질서를 수립합니다. 이것은 검색엔진의 역할이어야 합니다. 검색 결과를 돈을 따라 순위를 정하던지, 한정된 디렉토리에만 의지해서는 검색엔진으로서의 올바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 구글 한국 사이트, '구글을 사용하는 이유' 중에서

"검색 결과를 돈을 따라 순위를 정한다"는 문장은, 물론 비문(무려 세번에 걸친 '을''를'의 남용)이고, 오타('돈을 따라'부분)라는 생각까지 드는데요(갑자기 구글 한국어 사이트에 대한 신뢰가 반감되는군요! 물론 농담입니다. ㅎㅎ),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네.이.버.를 위시한 한국의 검색엔진은 자사에 지불하는 업체의 돈(광고비)에 따라 다양하게(스폰서링크, 파워링크, 어쩌구저쩌구...) 상단 검색 공간을 내어줍니다. 구글 역시 스폰서링크 영역이 없지 않습니다만,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검색 공간을 광고에 내어주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워낙에 영어권 국가에서는 광범위하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글 검색엔진인지라, 아주 작은 스폰서링크 영역을 제외한, 상품의 구매와 직접 연결되는 검색어 순위에서 (광의의) 구글 페이지랭크, 즉 키워드에 따른 링크된 페이지들의 검색 순위는 그 매출에 직접 영향을 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구글 검색순위와 관련한 소송도 있다고 압니다(좀더 높은 검색 공간내 링크 순위를 얻기 위해서요).


3. 개별 웹페이지의 페이지랭크 값 0에서 10까지

검색창에서의 순서가 아닌 웹페이지에는 페이지랭크 값이 매겨집니다. 웹페이지(어떤 사이트의 메인창이든 그 사이트의 개별글이든, 아니면 글타래이든..) 중요도를 평가하는 구글만의 판단표지인데요. 그 단계는 모두 11단계(페이지랭크 0에서 10까지)입니다. 숫자가 높을수록, 그러니 10인 페이지가 구글에서 평가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웹페이지입니다.


* 내가 체감하는 페이지랭크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갖습니다.
이는 물론 제 주관적인 체험을 통한 추정에 불과합니다.

1. 언어 : 영어 사이트는 페이지랭크 값이 상대적으로 높다.

영어권 인터넷 사용인구가 그만큼 많고, 그래서 백링크를 받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으며, 영어로 된 페이지들 중에서 권위있는(백링크 중요성에 따른 가중치) 사이트들이 많으니 상대적으로 이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겁니다.
웹상에 아주 훌륭한 내용의 글이 있다고 치죠. 같은 부피와 질량을 갖는(물론 가정적으로 생각해보자는 겁니다) 중요성을 갖는 글이 있을 때, 그 글이 영어로 쓰여졌는가, 한글로 쓰여졌는가에 따라 그 글의 웹상에서의 중요성, 적어도 구글이 평가하는 중요성은 달라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영어로 된 글이 페이지랭크 값이 높을 확률은 당연히 높구요.

최근에는 일본어 사이트들도 이런 점에서는 매우 유리하겠지요. 어떤 글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최근 가장 많은 인터넷 언어가 일본어라는 글도 읽은 적 있는 것 같습니다.

2. 웹페이지의 기술적 육체 - 검색엔진에 최적화된 사이트와 그렇지 못한 사이트

ㄱ. 미투데이는 페이지 값이 높다.  

이런 생각이 가장 많이 드는 사이트는 '미투데이'인데요. 비교적 신생사이트임에도 불구하고, 웹표준 준수와 검색엔진 최적화를 통해(물론 추정) 개별 미투로그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높은 페이지랭크 값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검색엔진 최적화 뿐만 아니라, 미투데이는 접근성에 대한 편의적 장치들도 꽤 발달해 있습니다. 가령 예전에는 이글루스 블로그에서만 제공되던 핑백(트랙백 유사의 링크 트랙백?)이 최근에는 태터기반(텍스트큐브) 블로그에까지 확대된 것 같더군요. 다만 솔직히 이런 자동화된 트랙백 설정들이 개인적으론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선 미투로그의 너무 협소한 글제한 설정(150자)이 그 첫 번째 이유고, 좀더 개인적인 이유는, 제 글을 제가 미투데이에 미투친구들의 접근편의를 위해 링크를 설정할 때, 그 글이 제 블로그 글에 트랙백으로 자동설정되면.. 뭐랄까 좀 민망합니다. 더불어 굳이 지워야 하는 수고를 수반하죠. ㅡ.ㅡ;

ㄴ. 가령 한겨레 블로그

한겨레 블로그에는 정말 좋은 필자들도 많으시고(물론 많이 빠져나가셨지만요...), 제가 좋아하는 글을 쓰는 많은 블로거들이 계시지만 각 블로그의 페이지랭크 값은 상대적으로 매우 낮습니다. 이는 한겨레블로그라는 '육체'가 검색엔진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을 뿐더러, 링크를 활발히 하는 외부의 블로거들 역시 한겨레블로그라는 거시적인 울타리에 대해 친화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죠.
그 대외적인 명망도나 글 자체의 중량감에 있어서 매우 높은 수준인(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박노자 글방의 글들을 그다지 재밌게 읽는 편은 아니지만요. 물론 박노자의 노선과 입장에 대해선 대개 공감하지요. : ) '박노자 글방'은 페이지랭크 값이 4에 불과합니다. 제 블로그와 같은 값이죠. 인터넷한겨레라는 비교적 중량감 있는 사이트(메인페이지 랭크 값 6)에서 백링크 자주 받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인터넷한겨레는, 당연히, 박노자 글방 글들을 인터넷한겨레 메인에 자주 링크시킵니다.  

좀더 노골적인 예를 들어보죠.
다른 블로거를 예로 들기는 뭣해서 저를 직접 비교대상으로 삼아봅니다.

민노씨와 박노자 중에서 누가 유명합니까?
당연히 박노자씨가 100만 배쯤 더 유명합니다.
저는 유명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죠.

하지만 구글에서 민노씨와 박노자(혹은 박노자 글방)를 검색하면 어떨까요?
구글은 '박노자'라는 키워드 보다도 '민노씨'라는 키워드를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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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링 : 박노자 .. 박노자 글방 


'박노자'로 검색하면 한겨레 블로그인 '박노자 글방'은 첫 페이지에 등장조차 하지 않고(맙소사!), '박노자 글방'으로 검색하면 박노자 글방보다 '한겨레 필통'(한겨레 블로그 개편 뒤의 시스템) 관련 페이지가 먼저 첫페이지 최상단에 등장합니다(맙.소.사!!). 그리고 각각의 검색 결과 갯수는 박노자 37만개 정도, 박노자 글방 51만개 정도입니다. 제 경우('민노씨')는 29만 개 정도입니다.

물론 검색결과 숫자는 그 키워드의 고유성에 의해 영향을 받죠. '박노자'라는 고유명사는 그 고유성의 정도에서 매우 높은 순도를 갖고 있습니다. 이는 제가 필명으로 사용하는 '민노씨'도 거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 ^;

'민노씨' 구글링은 어떨까요? (종종 심심하면 구글에서 민노씨를 쳐보는데요. 이걸 사람들은 허영검색이라고 합디다. : )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글링 : 민노씨


제 글이 박노자 글보다 수준이 높거나 대중적이라서 그런 것은 '전혀' 아닐겁니다. 민노씨.네에 있는 글의 숫자가 좀더 많아서(박노자 글방 264개, 민노씨.네 501개) 그런 것은 더더욱 아닐 겁니다. 게다가 박노자 글방은 저보다 훨씬 많은 RSS 구독자수(가령 한RSS 기준 : 박노자 글방 1443명, 민노씨.네 470명)를 보유하고 있죠. 약 3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군요. 박노자 블로그는 사회, 정치 블로그로 분류된 블로그들 가운데 가장 많은 구독자수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전체 RSS 구독자 수에서도 박노자 글방은 제 블로그 구독자보다 훨씬 더 많은 구독자들을 보유하고 있을 겁니다.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이는 한겨레블로그라는 육체의 결함(?)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굳이 이렇게 민망한 비교를 하는 이유는 한겨레블로그가 좀더 열린 마당으로, 좀더 날렵하고, 멋진 육체로 세상과 소통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불과 며칠 전 필벗모임에서 정말 오랜만에 인터넷 한겨레 UCC팀장님을 뵈었죠. 필벗들 목소리를 메모장에 기록하시는 모습은 보기 좋더군요. 그런 마음으로 좀더 애써주시길 바랍니다. 적은 인력으로 고생이 많으시겠지만 거듭 거듭 노력을 당부드립니다. 정말 마음 같아선 한겨레블로그에서 활동하시는 필벗들을 이런 후진 울타리가 아닌 좀더 개방적이고, 좀더 열려진 공간으로 빼내오고 싶은 심정입니다.


ㄷ. 네이버 블로그
이건 두 말하면 입 아프지만 간단히 하죠. 네이버, 네이버 '블로그'라는 가두리양식장(이 표현을 네이버'블로거'에 대한 폄하로 읽으시는 독자께서는 이 글을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은 네이버라는 국내 최대 포털의 어처구니 없는, 최소한의 객관성과도 담쌓은 검색 시스템에서는 우대 받을실지 몰라도(저는 개인적으로 전혀 그런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요), 그래도 가장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구글 검색엔진에서는 철저하게 소외되고 있습니다.

이 상호 소통 가능성을 차단한 것은 물론 구글이 아니라 네이버구요. 네이버에서도 후원한 블로그 컨퍼런스에서 그렇게 외쳤던 '개방과 참여와 공유'의 가치가 도대체 마케팅을 위한 수사로 변질되고 있는 곳이 대한민국 웹입니다. 적어도 그 웹을 지배하고 있는 포털의 철학에 대해선 이렇게 평가할 수 밖에는 없습니다.

구글 크롤러(검색을 위해 웹을 돌아다니는 로봇)의 접근을 네이버는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있습니다. 자기네 DB에서 보여줄 것으로 넘쳐나니 구글에서 유입되는 외부 블로거들, 독자들은 필요가 없나 봅니다. 이와 맞물려 당연히 네이버 검색엔진은 외부 블로그들을 잘 보여주지 않죠. 네이버 블로그들을 우선적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네이버 안에서만 놀게 되죠... 거듭 강조하지만 개방적이어야 할 블로그 육체, 그 얼개로서는 그 시스템이 너무도 악질적이고, 그 환경이 인위적입니다.

이러니 네이버 블로그에 있을 무수히 많을 좋은 블로그들에 대한 외부의 접근권은 네이버에 의해 차단됩니다. 그 부피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좋은 블로그도 많을 수 밖에는 없을텐데요. 네이버의 좋은 블로그들은 구글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그래도 가장 객관적이라는 검색엔진에서는 잡히지가 않습니다. 당연히 그런 블로그들의 페이지랭크 값은 그 실질보다 훨씬 더 하향평가될 수 밖에는 없겠죠. 이는 단순히 페이지랭크 값이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표지 문제에 국한하지 않습니다. 이는 거듭 거듭 강조하건대 네이버가 그 안으로, 안으로 네이버 블로거들을 뺑뺑이 시키는 '네이버 가두리철학'의 일부입니다.

4. IT 관련 블로그, 구글을 다루는 블로그
당연히 블로그의 기술적 설정에 대해 친하고, 그 기술설정에 대한 활용도도 높은 편이라서 적어도 구글 페이지랭크에 대해서는 상호 상승효과를 갖는 것 같습니다. IT 관련 블로그들은, 제 매우 한정적인 체험에 불과합니다만, 페이지 값이 상대적으로 높은 경향을 갖습니다.


* 페이지랭크 값은 아주 작은, 아주 아주 작은 참고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웹환경의 특수성이라는 관점에서 보건대 페이지랭크 값은 그 경제적 가치(구글 점유율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매우 예외적으로 보잘 것 없는 수준입니다. 특히 네이버가 독식하는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는 더더욱 왜소하죠)객관적 권위의 표준으로도 그다지 큰 가치를 부여하기가 곤란하지 않나 싶습니다.

특히 블로깅을 하면서 느끼는 체감으로도 페이지랭크 값은 전혀 중요한 판단 표지가 아닙니다. 페이지랭크는 물론 현존하는 웹페이지에 대한 평가표준으로서는 가장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주관적 실존의 투사를 그 본질로 하는, 적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블로그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저는 점점더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나라의 웹환경이 그만큼 비정상적으로 왜곡되었다는 방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즉 페이지랭크 값에 대한 설명적 기능은, 물론 어느 정도는 참조가 되기는 하지만, 자주 제 기대를 배반하곤 합니다.

물론 제가 가장 자주 들르는 블로그들(가령 게이터로그. 예전에는 5였는데 최근에는 4. 개인적으론 살짝 섭섭하다능.. : )은 페이지랭크 값이 다른 블로그들 보다는 상대적으로 높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틸라님의 경우에도 워낙에 블로그를 자주 바꾸셔서 현재 블로그의 페이지랭크 값은 제로입니다. 예전에 5였던 블로그는 현재 방치(?) 상태죠. 하지만 제가 자주 어떤 블로그를 자주 찾는 이유는 페이지랭크 값이 크거나 작거나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0이면 어떻고, 10이면 어떻습니까?

이는 물론 제 취향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아거님의 표현을 빌자면, 저는 시맨틱한 블로그보다는 에피소딕한 블로그를 좋아합니다. 제 블로그가 다소 딱딱한 블로그, 시맨틱한 기억의 전달, 혹은 이슈 확장을 위한 블로그로 대외적으론 평가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좀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시맨틱한 소재들을 에피소딕하게 다루는 블로그를 좋아합니다. 그러니 정보적 가치에 바탕하면서도 블로거의 개성이 좀더 강하게 투사되고, 그 실존적 풍경이 강하게 느껴지는 블로그를 좋아합니다.

more..


그런데 이런 블로그들은 상대적으로 재미없는 블로그로 자주 지목되거나, 혹은 제 기대보다는 많은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지는 못한 것 같은 아쉬움을 자주 경험합니다. 제 취향이 그다지 대중적 감수성과 호응하지 못하는 편협하고 까탈스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요. 저는 누구보다 제가 대중적인 취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ㅡ.ㅡ;

다른 블로거들께서 높게 평가하거나, 혹은 대중적으로 소위 (그 정체는 알 수 없으나) '파워블로거'로 지목되는 블로그의 상당수, 가령 IT 정보들을 속보식으로 전달하는 '전달형 블로그', 각종의 이슈에 대해 망라적으로 다루는 '이슈 파이터형 블로그'들은 제 관심 밖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가운데 매우 훌륭한 블로그들이 있는 것은 물론이겠지만요.

저는 '관계형 블로그'를 이상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개성이 강한 블로그, 그 블로그에서만 읽을 수 있는 자기 만의 색깔을 가진 블로그를 당연히 좋아합니다. 또 낯선 독자께도 진심을 다해 대화할 줄 아는, 존중에 바탕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격식적이고 형식적인 예의만 보이는 블로그가 아닌, 자신감에 넘치는 블로그가 좋습니다. 우리는 모두 평등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쥐똥만큼 더 알고 있다고 해서 자만하거나, 혹은 자신이 좀더 명망이 있다고 해서 거만하거나 하는 그런 블로그는 딱 질색입니다. 속으로 종종 그럽니다. '참 놀고 있다...'(제가 원래 그런 놈입니다. 쥐뿔도 없으면서 말이죠. ㅡ.ㅡ;; )

글이 역시나 점점 더 길어지고 있군요.
원래 이 글에 담으려고 했던 가벼운 단상들로 마무리 할까 싶습니다.


* 내 블로그 개별글 중 가운데 가장 높은 페이지랭크 값

추성훈, 하바츠, 하나의 사랑, 그리고 네이버블로그

이 글은, 제가 모든 제 글을 따로 하나 하나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제가 우연히 확인한 페이지랭크 값으로는 최고입니다. 페이지랭크 값 4네요. 굳이 이 이야기를 하는 까닭을 아시겠는지요? 이 글은 정말 성의 없이(그렇다고 그 글에 담겨진 제 마음이 성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쓴 글에 속하는 글입니다. 글을 쓰는데 채 30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비교적 짧게 쓴 글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좀더 퍼뜨리고 싶은, 함께 공유하고 싶은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하게 담겨 있는 글도 아니고(물론 그런 요소가 없지 않지만요), 제 실존적인 투사가 강하게 스며든 글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함이 많은 글입니다. 스스로 그다지 만족스럽거나, 자랑스럽게 독자들에게 읽어주시길 권하고 싶은 그런 글이 전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댓글도 단 하나 뿐입니다. ㅡ.ㅡ;

그런데도 제가 발견한 개별 글에 대한 페이지 랭크 값들 가운데서는 가장 높은 값을 갖고 있는 글이네요. 좀 엉뚱합니다. 페이지랭크에 대한 신뢰가 점점 하락하는 이유이기도 하죠. 자기 글에 대한 최고 권위자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자신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테니까요. 물론 정반대인 경우도 많습니다만...


* 팔글 블로그 이삼구님의 페이지랭크에 대한 글에 대해

'페이지랭크'로 구글링하면 가장 먼저 뜨는 글입니다. : )
팔글 블로그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구글에 관한 가장 정통한 블로그로 알려져 있는 블로그이고, 최근에는 활동을 하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구글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는 블로그죠. 다만 페이지랭크에 대해 쓰신 이삼구님의 글에 대해선 몇 가지 이견이 있습니다. 다음은 이삼구님께서 페이지랭크와 SEO(검색엔진 최적화)에 대해 쓴 내용의 일부입니다. 특히 페이지랭크에 대한 오해에 대해 적고 계신데요. 너무 많은 인용은 그 해당글로의 접근을 오히려 방해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간략하게 제가 제 부족한 견해나마 보태고 싶은 그 부분만을 발췌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기호(ㄱ. ㄴ. 등의)는 제가 임의로 편의상 붙인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페이지랭크에 대한 오해를 몇가지 알려드립니다.
정작 나름대로의 SEO를 시도했는데 페이지랭크 값은 오히려 떨어진다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ㄱ. 상호 링크 교환은 페이지랭크 값을 올리는 좋은 수단이다
이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만약 상호 링크된 페이지의 랭크가 같다면, 상호 링크 교환은 안한 것과 마찬가지의 효과를 갖습니다.

ㄴ. 다른 곳으로의 링크는 손해 없이 상대방의 랭크 값을 올려준다.
다른 곳으로의 외부 링크는 자신의 페이지 랭크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줍니다. 특히, 상호 링크의 경우 그렇습니다. 크게 보면 나와, 다른 웹사이트 제작자의 외부 링크를 함으로서 상대방의 웹사이트 랭크 값이 올라가고, 상대방에서 나에게 링크를 해 주면 나의 웹사이트 랭킹도 올라가게 됩니다. 이런 선순환도 가능하지만, 링크를 받지 못하는 웹사이트는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게 됩니다. 이것도 공정하지 못한 처사인 것 같지만, 악의적인 링크를 막는 면에서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ㄷ. 백링크가 많을 수록 좋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지만, 백링크의 질도 매우 중요합니다. 즉, 나에게 링크를 걸어주는 페이지의 랭크 값이 0이라면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 구글 페이지랭크에 대한 상식 중에서

특히 '다른 곳으로의 링크(외부링크)'에 대해 쓰신 부분에 대해선 읽기에 따라 매우 오해가능성이 높은 문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글에서는 여기에 대해서만 짧게 쓰는 것으로 이 글 전체의 결어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물론 삼구님께서는 가치중립적으로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바탕해서 객관적으로 페이지랭크에 대한 오해들에 대한 자문자답형식의 글을 작성하신 것 일겁니다.

하지만 저는 무엇보다 먼저 저를 포함해서 많은 블로거들, 특히나 페이지랭크에 어느 정도는 의미를 부여하는 블로거들 모두가 속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속물이니까요. ㅡ.ㅡ; 하지만 속물로서의 당연한 속물근성을 불필요하게, 어떤 실존적인 고민이 거세된 형식으로 자극하는 것은 지양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애드센스 수입에 대한 포스팅은, 그것이 블로깅을 긍정적으로 자극하고, 애드센스의 순기능을 고양하는 포스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대체로 비판적입니다. 이런 종류의 뿌듯함에 대해선 그냥 가까운 지인들끼리 나눠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위 삼구님의 글로 다시 돌아오면, 제 부족한 경험으로 본다면 외부링크는 페이지랭크 값을 높여줄 가능성이 훨씬 더 높습니다. 왜냐하면 열혈블로거들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리퍼러(물론 리퍼러가 제공되는 블로그툴은 제한적이긴 하지만요)를 확인하고, 그 가운데 자신을 링크한 블로그를 좀더 주목해서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심리적 반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혈블로거들은 페이지랭크 값이 높은 블로거일 확률이 높고, 좀더 주목해서 자신이 링크된 글 혹은 웹사이트를 읽게 된다면, 더불어 그 백링크(링크를 건 쪽의 관점에서는 '외부링크')가 있는 블로그를 자신의 글에서 링크할 확률도 높아집니다.

그리고 이것 저것 떠나서 아무리 페이지랭크가 '객관적으로' 중요하고, 우리나라 웹환경이 '상식적으로 개선되어' 실질적으로도(경제적으로나 대외적인 권위에 있어서나) 중요해진다고 해도, 그저 자유롭게 서로의 관심사와 관점과 사유들을 교환하고, 그 매개로써 링크를 통해 서로 이어지는 블로그계를 구현하는 그 원초적인 블로깅의 즐거움이 페이지랭크 값에 대한 집착, 혹은 그 유불리에 의해 인위적으로 방해받는다면 이는 구글에서 페이지랭크를 최초에 만든 그 취지에 반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즉, 그 본래적 목적을 그 목적 실현 수단이 방해하는 꼴이죠.

우리들은 페이지랭크 값을 올리기 위해 블로깅하지 않고, 그저 블로깅하기 위해 블로깅합니다. : )

블로깅은 그 수단이자 목적이고, 그것은 본질적으로 즐거움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 즐거움의 풍경은 저마다 다르겠죠. 저는 그 즐거움이 그저 피상적인 유희 가치가 아닌, 본능적인 자기 과시로서의 가치만은 아닌, 실존적인 고민가치와 원초적 바람으로서의 공동체 가치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총체적 인격의 만남을 위한 '관계적 형성 가치'라면 좋겠습니다(이런 급조된 조어들이 의미전달에 유용할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우리가 우리들의 진심을 블로그에 담는다면, 블로그는 페이지랭크로 획일적으로 평가되기에는 그 하나 하나의 진심들은 너무도 가치있고, 너무도 다채로운 풍경들과 향기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풍경과 향기들을 세상 속에 퍼져나가게 하는 것은, 좀 귀찮을 수 있겠지만, 우리들이 상대방을 존중하고, 그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바람을 담으며, 우리들이 쓰는 글 위에 남기는 작은 링크들입니다.  

이상입니다.
역시나 짧게 쓴다는 것이 너무 너무 길어졌군요... ㅡ.ㅡ;




* 발아점
페이지랭크 상승, 블로그와 블로깅 (레이니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