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비슷한 문제를 갖고 있는 블로거벗들이 있을까 싶어 간단한 메모.

문제는 ati2dvag 오류 (구글검색)
좀더 정확히는 "STOP 0x000000EA THREAD_STUCK_IN_DEVICE_DRIVER" 에러 (MS 관련 해설 페이지)
Windows XP의 오류 메시지인데, 이거 때문에 며칠 고생했다.
예상되는 문제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1. V3 lite와 ATI는 안좋은 궁합?
이것 저것 검색해보니 이런 '풍문'(?)이 있는 것 같다.
잘 아시는 분 계시면 확인 부탁.
암튼 나는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 싶어 V3 lite 제거.

2. 봉쥬르 문제?
옥토님 조언으로 제어판 - 관리도구 - 이벤트뷰어에서 위 'ati2dvag' 오류 직후 응용프로그램 확인해보니 다음과 같은 그림이 뜬다. ㅡ.ㅡ;
사용자 삽입 이미지
봉쥬르로 비롯된 오류가 그야말로 끝없는 붉은 꽃들을 매달고 있다. ㅡ..ㅡ;

봉쥬르와 기타 쓸데없이 자원 잡아먹는 구성요소를 빼고 아이튠즈 다시 설치했다.
최종적으로 도움 받은 페이지 : 아이폰 아이튠즈 가볍게 설치하기 (아르)
윗 글이 도움 받은 페이지(아마도) : 군살 많은 아이튠즈 가볍게 설치하기 (조준성) : 강추.

3. 카탈리스트 문제?
봉쥬르 제거하고 아이튠즈 재설치 뒤에 메인보드 드라이버를 다시 깔았는데, 해상도가 4비트로 구현. 아무리 디스플레이를 재설정해 계속 4비트로 구현...;;; 카탈리스트 어쩌구 저쩌구가 뜨길래... 이것 저것 검색해보다가 카탈리스트 제거(안전모드로 들어가서 제거해야 깨끗이 제거된다고 하는데, 내가 워낙에 컴퓨터를 잘 몰라서 그냥 제어판에서 제거). 다시 기본 메인보드 드라이브 까니 제대로 해상도가 구현된다.

4. 정리.

발원지 : ati2dvag 무한루프 에러 (블루스크린)
문제해결(?) : ㄱ. 봉쥬르 제거 ㄴ. V3lite 제거 ㄷ. 카탈리스트 제거.
이게 현재 완전히 문제를 해결한 건지는 좀더 지켜봐얄 듯...;;;


* 추.
간만의 포스팅인데 지나치게 무미건조하구먼...;;;


*추2. 
망했다! ㅜ.ㅜ;
KMP 실행해보니 화면이 알아볼 수 없는 초등학생 종이 모자이크..;;; (소리는 들림)
조언 부탁!

*추3.
어쨌든 컴살때 갖고 있던 메인보드 드라이브를 다시 깔아보니 KMP가 제대로 실행된다.
휴, (일단) 살았다.


<보충>
위 추3. 이후 별다른 이상 증세는 보이지 않는다.
아래는 댓글을 통해 설명주신 임시필명님

현재 V3Lite 사용중입니다...
ATI에서 드라이버가 AMD로 넘어가면서 ATI버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증상이
나타나고 있는걸로 판단됩니다... 10.9버전에서는 V3설치상태에서
ATI2dvag블루스크린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AMD버전으로 변경된
10.11, 10.12버전에서 문제가 발생되고 있는것으로 확인됬습니다...
되도록이면 ATI아이콘이 붙어있는 10.10버전 사용바랍니다

AMD공식홈페이지에서 AMD아이콘으로 10.10버전이 나올경우 되도록 심파일같은 공개자료실에서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나오는 드라이버에 문제해결이 안된다면 아쉽지만 ATI와의 이별을 준비해야할거같군요...



1. 악이 승리한 시대
자본이 인간에게 완전히 승리한 사회. 자본이 인간의 얼굴을 지워내고, 그렇게 지워진 인간의 얼굴에 스펙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자발적인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몰고 있는 사회. 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최소한의 도덕성을 포기하고, 성공이라는 이미지로 치장된 화려한 타락을 선택했다. MB는 그 상징이다. 우리는 교육과 학문을 포기하고 직업양성소에서 차곡차곡 쌓여가는 폼나는 스펙을 선택했다. 박용성은 그 시대정신을 선구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지방의 한 대학이 놓여 있다. 상지대라는 이름을 가진 대학. 근 20년에 가까운 대학 민주화의 빛나는 성취를 상징하던 대학. 시민대학의 꿈을 학생과 교수 교직원이 재단도 없이 가꿔오던 대학. 2010년 대한민국은 그 대학을 '사학비리 대명사'로 불리던 집단에게 기어코 넘겨준다. 그 상지대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인간과 자본이 서로 한 몸 되고, 대학과 스펙이 서로 살을 비빈다. 그렇게 성공을 향한 비교 강박의 배타적 욕망은 우리 안을 흐르는 피가 되고, 우리를 지탱하는 뼈가 되며, 우리를 감싸는 살이 된다.

먼저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다. 나는 이 야만에 기꺼이 참여했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는 말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악이 승리하는 이 모든 현재진행형의 역사에 침묵과 방관으로 참여했다. 변명은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구조를 이야기하고, 폼 나는 외국 석학들의 멋진 용어들을 빛나는 장신구 삼아 온 몸에 주렁주렁 메달아도 결론은 하나다. 우리는 악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 뿐이다.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악은 진부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으니까.' 우리의 세련된 무관심과 익숙한 방관이 그 악의 정체다. 우리는 악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실은 그 악의 공범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가 그 악이다.

그러니 아주 작은 정의, 아주 작은 상식도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정체를 바라보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아프더라도 우리는 자기를 바라보는 그 일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침묵하는 선한 사람들의 시대, 그렇게 자기 마취적인 위로를 위한 휴머니즘이 만발한 우리시대의 정체가 사실은 악의 꽃들이 만발한 악의 정원이고, 정치적인 무관심이 마치 쿨한 최신 유행처럼 유통되는 이 사회는 그저 황무지였을 뿐임을 아프게 인식하는 일, 그 바라봄이 출발이다. 우리는 이 달콤한 신세계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아픔도 없이 통과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그 온갖 고통과 저항들이 조롱받는 시대다. 쿨하지 못하게시리...쯧쯧. 촌스럽게 왜 그래? 심지어 우리들은 우리에게 빵부스러기 처럼 남겨진 도덕심, 그 양심을 자극하는 행동들을 힐난한다.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 쿨하지 못하고, 촌스럽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우리 시대의 몰상식과 야만, 우리시대의 악은 무럭무럭 자란다. 우리는 고백해야 한다. 악은 우리와 동떨어진 괴물들에게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악의 숙주다.

2. 상지대 사태
상지대는 원주에 있는, 우리 시대의 세련된 표현을 빌면, '지잡대'(지방에 있는 잡스런 대학)다. 그 지잡대가 17년을 싸워왔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의 사학비리 사정에 기대어 비리재단을 몰아낸 게 아니다. 300일이 넘는 학생, 교수, 교직원의 학원민주화 투쟁으로 비리재단을, 반교육의 상징을 몰아냈다. 그렇게 함께 용역깡패에게 매 맞아 가며, 함께 단식투쟁해 가며, 비리사학 대명사처럼 불리던 ‘김문기’(전 상지학원 이사장)와 그 일당들을 몰아냈다. 김영삼 정부는, 어떤 영화배우의 표현을 빌자면, 그저 ‘숟가락’만 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지금, 상지대 학생들과 교수, 교직원들은 다시 400일이 가까워 오는 농성을 벌이며, 국가가 법과 제도라는 기득권의 합리적 기만장치로 다시 불러온 비리 구재단의 망령과 싸우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마르크스). 지금 반복되고 있는 역사는 희극이다. 하지만 그 희극은 너무도 슬퍼서 펑펑 울고 싶은 희극이다. 그 희극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들이고, 우리들의 자녀들이고, 우리들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후배들에겐 비리재단이 다시 군림하는 반교육적이고, 치욕적인 학교를 물려주지 않겠다.” 그 소박하지만 굳은 결심이 망각 속에서 먼지처럼 지워지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과거 비리재단 컴백 쇼.쇼.쇼.

그 일을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산하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가 수행하고 있다. 상지대만이 아니다. 광운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대구대... 비리재단 복귀 반대 투쟁의 선봉이자 상징인 상지대가 넘어가면, 나머지 학교들의 운명은 안 봐도 비디오다. 하지만 현재 스코어, 교과부와 사분위는 상지대의 새로운 이사진 구성에 관한 공식적인 절차를 모두 마쳤다. 과거 비리재단(흔히 ‘비리 구(舊)재단’으로 통칭)의 망령들을 제대로 다시 살려내고 있다. 좀비다. 죽어도 죽지 않은 존재들. 교육의 가치를 땅에 쳐 박았지만 다시 화려하게 복귀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히어로들. MB시대는 소위 '잃어버린 10년' 동안 절치부심했던 좀비들에게 인간의 피와 살을 떼어주는 놀라운 마법의 시대다. ‘새로운 중세’. 그게 MB시대고, 그게 상지대 사태다. 남의 일이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의 학교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깔로 이런 일은 대한민국 사립대학들에서 벌어지고 있다. 당신이 다니고 있는 중앙대 이야기를 해보자.

3. 사학오너님의 대학주식회사
상지대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사학비리재단 복귀에만 있지 않다. 이 중대한 역사의 퇴보를 그저 ‘반교육적’이고, ‘몰상식’하다는 단순한 선/악 구도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 이 사태의 근저에는 ‘사립대학’을 ‘주식회사’로 변모시킨 사회성원들의 적극적인 공범자 의식과 그 공범자 의식이 만들어낸 이른바 제도와 문화가 존재한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 밖에 있으며, 그 이율배반이 실은 우리다. 정글 같은 대한민국의 양육강식 시스템에서 스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변모한다. 연약한 짐승을 잡아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우리는 교육(!)받는다. 아무리 고결한 도덕교과서로 위장하더라도, 대한민국 교육의 내재된 원리는 짐승의 본능이다. 더 많은 먹이를 잡아먹을 수 있는 사나운 짐승의 이빨, 짐승의 거친 본능. 우리는 인간으로 교육받지 않고, 세련된 짐승으로, 멋진 명품들 속으로 피를 질질 흘리는 그 탐욕스런 이빨을 숨길 수 있는 처세를 배운다. 아, 스펙! 스펙! 스펙! 그게 우리들이 간절히 갈구하는 짐승의 이빨이다. 우리들의 영광스런 이빨. 이 이빨이 물어뜯고 있는 어떤 먹이들, 우리가 한 때나마 함께 했던 학우들을 보자. “사학 오너”(조선일보 관련기사의 표현)는 어떻게 먹이를 물어뜯고 있는지, 그 숙달된 조교의 시범을 보자.

“박용성스럽다.” 최근 학과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진통 중인 중앙대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중앙대 이사장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은 직선적 성격답게 정면 돌파를 택했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던 김주식(26·철학과 휴학 중)씨에게 학생에겐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퇴학 처분을 내렸다. 시위를 벌인 다른 3명의 학생에게도 징계와 명예훼손 혐의 고소, 공사 지연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제기를 검토 중이다.
- 곽정수, [중앙대 사태, ‘기업사회’의 묵시록], 한겨레 21, 2010.05.07 제809호.

우리는 좀 더 고양된 인격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 그래서 서로 함께 나누고, 향유하며, 서로를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그런 동화 같은 풍경들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런 배부른 소리는 달나라에나 가서 하시고... 우리는 그저 우리 안에서 내면화된 짐승의 논리, 그 사나운 이빨이 우리 자신을 잡아먹지 않을까 소심하게 염려할 뿐이다. 그런 소심한 염려가 우리시대에 남아 있는 양심의 정체다. 나에게 남은 양심의 정체다. 우리가 정말 고민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거대한 이빨들의 울부짖음에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귀를 막고,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그 짐승의 논리에 어떻게 하면 그럴듯한 면죄부를 씌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양심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속일 수 있을까, 우리들은 부지불식간에 자발적인 노예가 된다. 좀 더 비싼 노예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싸우고, 짐승으로 살아남기 위해 오너님의 영광어린 빛에 스스로 눈먼다.

그리고 나 같이 소심한 염려를 기어이 버리지 못한 자들은 어느 날 문득 경찰서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 거다. “전화 받으시는 분 민노씨 맞나요?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셨습니다.” 아, 씨바 참 가지가지 한다. 소심하게 머리 속으로 읊조리며, 블로그엔 이렇게 쓰는 거다. "김문기씨, 고소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그게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자부심이니까. 그게 영광이 아니라면 너무 너무 속상하고, 너무 너무 슬플 것 같으니까...


4. 방관자의 알리바이

소송법상 용어 중에 당사자주의라는 말이 있다. 소송당사자에게 소송의 주도적 지위를 부여해 당사자 상호간 공격, 방어를 통해 소송이 진행되고, 법원은 제3자 입장에서 당사자의 입증을 판단하는 방식, 그걸 당사자주의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는 참 많은 싸움들이 있는데, 당연히 그 싸움 모두를 법원이라는 심판관이 지켜보지 않고, 혹 지켜보더라도 반드시 옳은 결정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개입되어야 하는 싸움. 하다못해 응원 한마디라도 보태고, 욕이라도 한 사발 내질러야 하는 싸움. 그런 싸움들이 우리 주변에는 참 많다. 그런데 종종 이 ‘당사자주의’가 그럴듯한 무기처럼 등장한다. ‘이봐, 너는 당사자도 아니잖아. 함부로 나서지 말라구!’ 가령 작은 용산으로 불리는 ‘두리반’ 같은 초라하고, 외롭지만, 지켜야 하는 싸움들. 그리고 그런 싸움은 온갖 피와 살을 길바닥에 뿌린 뒤에야 작은 전리품을 우리에게 안긴다. 가령, 며칠 전 타결된, 1895일 동안 싸워서 겨우 겨우 절반의 승리를 일궈낸 기륭전자 노조의 싸움 같은 거...

‘당사자’라는 말이 우리의 싸움에 우리가 나서는 일을 막는 장애물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책무를 떠넘기는 방관자의 알리바이가 되면 안 된다. ‘당사자’라는 말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인간답게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회적인 상상력, 정치적인 상상력을 메마른 이성의 이름으로 제약해선 안 되는 거다.

물론 대개의 싸움이 그렇듯, 어느 한 쪽이 전적으로 선(善)이고, 다른 한 쪽이 전적으로 악(惡)인 경우는 드물다. 상지대 사태도 마찬가지다. 한 쪽에선 “사학 오너의 재산권”이라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욕망을 ‘사학의 자주성’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 또 다른 한 쪽에선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비리재단 관계자들은 다시는 학교에 발을 붙여선 안 된다고 말한다. 자주성과 공공성은 모두 소중한 가치다. ‘사학의 자주성’이 숨기고 있는 의미가 지금/여기에서는 ‘사학 오너의 재산권’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조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말 역시 국가권력이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무기로 언제든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예민하게 비판하되,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의 조화를 모색하고, 거듭 다시 경계로 나와 살아서 꿈틀대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선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숨 쉬는 맥락 속에서 우리들의 고민과 선택을 담아내야 한다. 물론 지금/여기에서 나의 선택은 단순하다. 학교는 학교로서, 학생과 교수와 교직원, 그리고 지역사회의 공적 자산으로서 지켜져야 하며, 이미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야 하는 비리재단의 사리사욕으로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것. 상지대는 원주의 ‘시민대학’으로 지켜져야지, 김문기로 대표되는 비리 구재단의 ‘사유재산’으로 환원되어선 안 된다. 이것마저 포기하자고? 그래, 그럼 우리 앞으로 ‘교육’이라는 말은 우리 머리와 가슴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리자.


5. 다시 부끄러운 고백
언젠가 블로그에 썼던 것처럼 나는 대단한 도덕심으로 무슨 투철한 정의감으로 상지대 싸움에 참여한 게 아니다. 존경하는 장애인 활동가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민노씨가 상지대 좀 도와줘야겠다.” 그 말로 나는 상지대 싸움이 뛰어들었다.

그렇게 넉 달이 지났다. 아이들(주로 상지대 학생회 간부들과 단과대 학생회장들)과도 무척 친해졌다. 그게 내가 이 싸움에 얻는 가장 즐겁고, 소중한 체험이다. 그 어린 친구들은 두 달 여의 서울 원정 농성을 마치고, 지금은 원주로 돌아갔다. 그 상지대 아이들은 매일 밤 학생회 사무실에서 끝나지 않을 회의를 이어가고, 또 혹시라도 구재단 인사들이 들어오지는 않을까 이사장실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이 든다. 그런 젊은 친구들과 함께 싸우는 일은 자체로 나에겐 멋진 드라마다. 이기면 모두 얻고, 지면 모두를 잃는 싸움은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든다. 때론 정말 정색하고 진지할 필요가 있지만 괜히 심각해질 필요 없다. 지더라도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우리에게 진실하고 소중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고, 먼 훗날 그렇게 스스로에게 고백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히 값지다.

하지만 이것은 싸움이고, 싸움은 항상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 대한민국에서 사학은 보이지 않는 제국의 거대한 동맹이다. 어마어마하게 견고한 권력이고,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기득권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도 졌던 싸움을 지방의 초라한 대학, 하지만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에겐 그 어떤 대학보다 자랑스러운 대학, 상지대가 하고 있다. 나는 블로거로서 상지대 학생들과 블로그를 만들었고(상지대 구출 대작전), 블로거 벗들의 연대를 요청했다. 상지대 학생들과 현장의 살아 있는 표정들을 담기 위해 'The 나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이폰과 유튜브를 이용한 동영상 작업도 시도했다. 블로거 원정대와 함께 원주에 내려가 현지를 답사하고(상지 블로거 원정대), 블로거 기자회견도 함께 했다.

그 밖에 대형집회로서 시민문화제는 두 번이나 열렸고, 지상파인 KBS 2TV [추적60 : 벼랑에 선 상지대, 과거로 돌아가나](2010.8.11. 방송)에 선 상지대 사태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문제를 본격 조명하기도 했다. 시민단체(상지대 지키기 긴급행동)에서도 두터운 연대를 견지했다. 상지대처럼 사분위 결정을 앞둔 광운대, 덕성여대, 동덕여대, 대구대 등이 서로 힘을 모아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시민단체들과 상지대 비대위 등과도 연대해 ‘범대위’를 구성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이런 싸움은 두 달을 넘기 어렵다. 특히나 대한민국의 진화한 ‘망각시스템’ 속에서 이런 공적 이슈에 계속 시선을 붙잡는 건 너무 힘들다. 아주 아주 부끄러운 고백. 나는 상지대 학생들과 가끔씩 통화를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그 뿐이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상지대 학생들)은 아이들대로, 또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각자의 영역으로 되돌아 간 기분이 든다. 우리들이 그저 이따금씩 떠올리는 그 마음들, 함께 했던 시간들, 그런 소박한 꿈들이 만들어내는 끈들은 내내 이어지겠지만, 사실 좀 무기력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아니 끝날 수 없고, 그 싸움이 끝나는 날이 내가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놓아버리고, 나 역시도 짐승의 길로 나아가는 순간이라는 걸 나는 안다.

6. 달콤한 망각, 뒤틀리는 대학
상지대 사태는 대한민국의 교육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질문한다. ‘부정편입학’과 같은 학사행정의 초석에 관한 범죄행위가 이해할 수 있는,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에 충분히 치유 가능한 ‘사소한 잘못’이 된다. 아, 관대 하여라, 아, 대범 하여라,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여! 학교는 ‘사학오너’의 재산이므로 다시 되돌려줘야 한다! 국가는 오너님이 잠든 사이에 그 학교를 나랏돈으로 대신 관리해준다! 아,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그렇다. ‘김문기’로 대표되는 상지대 구재단과 교과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 권력과 자본과 제도로 치장된 합리적 야만의 제왕적 카르텔, 우리가 내심 이끌리는 우리 욕망의 종착지.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어찌 반항할 수 있겠는가!

사학왕국을 축복하라!
사학왕국을 찬미하라!

그럼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그 소심한 마음 속 무언가가 꿈틀대며 속삭인다. 학교는 우리 모두의 것이야, 사학오너님의 사유재산이 아니라고! 배우는 학생과 가르치는 교사의 것이라고, 일하는 직원과 지역사회의 자산이라고. 그 작은 속삭임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한, 소심한 우리들을 가끔은 아프게 찌르고, 또 어떤 때는 봄날 바람처럼 우리를 간지럼 태우는 한, 이 싸움은 계속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이 싸움에, 이 거대한 싸움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슬프고, 무시무시한 이 전장의 한 가운데 이미 내던져 있다. 알몸으로, 어떤 무기도 없이. 우리에겐 우리밖에 없다. 그리하여 ‘방관자’는 없다. 모두가 당사자다. 우리는 당사자로서, 우리를 일으키는 신념과 철학으로, 아니 그런 거창한 말들 모두 필요 없이, 그저 우리가 쪽팔리지 않기 위해, 아니 덜 부끄럽기 위해 이 싸움에 뛰어 들어야 한다. 때론 소심하게, 때론 담대하게. 그저 이 싸움을 멈춰선 안 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사립대학이 살아남는 길은 ‘사립대학 주식회사’가 되는 길인지, 아니면 그저 ‘학교는 학교’로 남아야 하는 것인지 우리는 그 싸움을 붙잡고 있는 긴 전쟁의 여로 동안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질문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짐승이 되어버리니까.

지금 대한민국 교육은, 대한민국 대학은 도덕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 위기는 학교는 ‘배우는 학생들의 것’ ‘가르치는 교사의 것’ ‘일하는 교직원의 것’이라는 소박한 소망을 영원히 농담으로 만들어버릴 결정적인 위기다. 대학은 ‘사학 오너님’의 것이니까. 아무리 별별 더러운 짓을 해도 국가에서 잠시 동안 ‘관리’(임시이사제도)해주고, 다시 돌려줘야 하는 것이니까. 대학생인 당신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 형제자매의 문제. 우리 자식의 문제다. 그러니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모두 당사자다.

답하라.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존 F. 케네디)


  • (주: 사실 이 유명한 문장은 존 F. 케네디의 잘못된 인용에서 연유한다. 케네디는 1959년 9월 16일 오클라호마주의 털사에서 이 문장이 포함된 연설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문장을 인용한 출처로 ‘단테’-신곡-를 언급한다. "Dante once said that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a period of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 하지만 이는 착오 혹은 기억의 변주인 것으로 보인다. 참조 : 피타고라스, 백투더소스_스프링노트 )


참고. 2007년 대법원 판결과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중심으로 살펴본 상지대 사태
상지대 사태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가 자신들의 결정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200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07. 5. 17. 선고, 2006다19054 이하 '상지대 판결')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하 간략히 서술한다.


more..


* 이 글은 중앙대 교지 <중앙문화>에 보낸 글입니다.
* 이왕에 고려대 교지 <고대문화>에도 거의 동일한 주제로 글을 보냈고, 또 블로그에도 올렸는데요. 때문에, 중대교지 편집진에게도 양해를 구했습니다만, 글 일부가 고대교지에 보낸 글과 겹칩니다. 다른 관점으로 쓰려고 노력했지만, 맥락상 겹치는 부분을 아예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블로거벗들과 독자들께도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어린시절 나한테 김치 냄새나는 녀석이라고 돌을 던진 건 모두 나처럼 가난한 집 애들이었어. 부잣집 아이들은 그 광경을 단지 웃으며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지.” - 만화 <에덴>중. 빠따질 거드는 직원들, 농성중 노조원 패는 지부장 등을 보며 생각난 대사
- @capcold, capcold.net

어떤 댓글이 인상적이다. 이 개만도 못한 놈. 개만도 못한 놈이라니... 그러면서 다음 생애에는 개보다 못한 쥐로 태어나라는 저주를 퍼붇는 글, 뭐랄까, 부질없는 저주, 부질없는 악담... 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왠지 슬퍼져서는 눈물이 나려고 한다. "이 짐승들아, 가슴을 친다고 그 못이 뽑"히니... 최근 대법원에서 승소한 한예종 전총장 황지우는 이미 오래전에 광주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구. 저주와 악담이 정당성을 갖는 이유들. 저주와 악담이 정당성을 가질 수 있어? 사랑해야 한다면서? 불우한 이웃을 사랑합시다. 우리 주원이처럼.

<악마를 보았다>의 이병헌이 된 기분으로 기사들을 추적해간다. 한겨레 기사들은 좀 허접하고, 미디어오늘 기사는 그래도 좀 읽을만하다. 어둠의 가장 환하고 깊은 곳, 조중동을 살펴보아야 하나? 궁금해서 조선닷컴에 들어가본다. 조선닷컴에서 자랑하는, 자랑할 것만 같은 조선 파워검색에 '최철원'을 타이핑한다. 고려대에 '10억을 기증'했다는 기사가 맨 꼭대기에 올라와 있을 뿐. 거룩하신 조선닷컴 사이드바 인기 검색어 순위 2위를 기록하고 있는 '최철원'은 조선닷컴에서 이렇듯 철저히 홀로 버려져 있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웃겠다. 대한민국 일등신문의 온라인은 "대한민국이 공격당했다"라는 아주 아주 멋진 벽지로 이쁘게 도배돼 있다. 아, 이게 당파성이라는건가? 아니지. 이건 당파성도 개뿔도 아니고, 제 식구 감싸기인건가... 그리고 명작 카피가 떠오르는 거다. '또 하나의 가족...'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엔 <시크릿가든>이라는 SBS 주말드라마를 봤다. 보고 싶어서 본 드라마는 아니고, 여차저차해서 봤는데, 아, 현빈 참 멋지구나. 저렇게 병신같은 상황에서 저렇게 병신같은 대사들을 하는데도 저렇게 멋질 수 있는거군. 사춘기 여고생에 최적화된 하이틴 로맨스의 알콩달콩한 신데렐라 에피소드들이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현빈의 목장/호수/초원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럭셔리 전원주택 위로 펼쳐진다. 이제 곧 스위치를 앞두고 있다는군! 아, 벌써 스위치했나? 4회까지만 봐서... "주원 앓이"라는 식으로 호들갑을 떨었던 어떤 연예기사가 잠시 스친다. 아, 대한민국의 만장한 여성동지들께서 "주원 앓이"를 하고 계시구나... 그 주원이의 미끈한 턱선으로 철원이의 야구 빠따가 겹쳐진다. 이것 봐! 일반화의 오류라구! 극히 일부 몰상식한 재벌2, 3세의 타락을 왜 우리 주원이, 아, 주원이가 누구냐면, <시크릿가든>의 주인공 현빈의 극중 이름, 에게 갖다 대는거지? 주원이는 무려 <문학과 지성>의 시집들을 읽는다구. 야구 빠따랑은 전혀 상관이 없단 말씀.

언젠가 읽었던 '새들은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그 시집이 꽂혀 있진 않지만, 그 시집을 쓴 황인숙의 어떤 시집을 주원이가 읽고 있다. 작가가 황인숙을 좋아하나? 아니면 연출이 황인숙을 좋아하나? 드라마에는 무려 황인숙의 시가 자막처리까지 되서 무슨 포토에세이처럼 흘러나온다. 거기에 심지어 <문학과 지성>의 시집들, 황동규 시집이 눈에 띄는데, 나머지는 좀 낯선 이름들이다, 그 시집들을 클로즈업까지 한다. 이게 무슨 ... 지적 알리바이? 속물근성... 그건 내가 가장 잘 아는 것들 가운데 하나지. 나는 속물근성 전문가라구. 왜냐구? 내가 참 더럽게 속물이거든. ㅋㅋㅋ.

이런 부정적 사고방식의 소유자 같으니라구. 부정적 사고방식의 소유자. ㅎㅎㅎ. 기형도가 그랬잖아, "미안하지만 나도 이젠 희망을 노래하련다." 아닌가? 정확한 시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래, 나도 미안하지만 이젠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가 되련다. 아니 그렇게 되려고 무지하게 애쓰고 있다구. 그건 좀 인정해주길 바래, 아니 바라지... 이건 개같은, 왜 바래는 틀린 말이고, 바라는 맞는 말인가.

상지대와 관련해서 중앙대 교지에 원고를 보냈다. '악의 숙주'. 내가 악의 근원이다. 아니 우리가 악의 근원이다. 우리는 숙주다. 뭔가 폼나는 느낌이 들어서. 개뿔. 부끄럽다. 언젠가 썼지만 부끄럽다는 고백조차도 우리는 미화한다. 정말 부끄러워서 부끄럽다고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왔으면 좋겠어. 마음 속으로는 마음 속으로는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나만 잘났어. 나만 정당하다구. 그런건가? 잘 모르겠다. 악은 정말 있는건가. 악은 어떻게 생겼니? 미끈한 스포츠카에 올라타 사슴피 마시며 진탕 섹스나 했으면 참 좋겠어. 그게 악이니? 아니 스포츠야. 이런 개새끼들. 내가 니 앱이다... ㅋㅋㅋ.


* 관련 기사
“재벌가 2세 폭행 보도하자 후속 요청 쇄도”
[인터뷰] MBC 2580 김재용 기자 “숨겨진 한국 자본과 노동 현실이 일부 드러난 것”
(미디어오늘)

재벌가 2세, 50대 남 야구방망이 폭행 논란
MBC 2580 “최철원 M&M 전 대표, 때리고 2천만원 매값 줘”
(미디어오늘)

민노·진보 "'폭행 후 맷값' 최철원씨, 즉각 구속하라"(공무원뉴스)
: "대한민국 최초 공직 언론사"란다... ㅡ.ㅡ; 뭐지?

피해자 유씨 "돈이면 다냐?"(SBS.인터뷰영상) : 뒷북에다 <2580>에 보도된 사진 이미지 활용하는 것 같은데 출처 표시도 없는 듯. 난 SBS에서 특종한 줄 알았네. ㅡ.ㅡ; 저작권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SBS... 좀 그렇다능.  

최철원 누구? (한겨레) : 최철원 병역 면제일 줄 알았는데 해병대 출신이었구나..;; 한겨레엔 이 기사 외에도 짜잘한 관련 기사들이 세네 개쯤 있는 것 같은데, 뭐랄까, 좀 성의없는 느낌. 그냥 하나로 묶어서 같이 내보내지, 이건 어차피 속보 경쟁할 성질도 아닌 것 같은데... <2580> 특종이니까 다른 관련 보도는 '트래픽' 유도를 위한 뒷북 기사일 뿐, 필요한 건 짜잘하게 밥숟가락 얹는 기사가 아니라 좀더 심층적으로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던가 그러면 좋겠는데 말이지.

더 문제는 출처도 밝히지 않는 기사들이다. 중앙일보가 대표적. 중앙일보는 기사 딱 하나 뿐인 것 같은데, <2580>을 언급하지도 않는다(내가 검색한 시점에선 그랬다). 최철원 폭행사건은 <MBC 시사매거진 2580>의 특종인데, <2580>을 아예 언급하지도 않고 기사를 쓰나... 뭐랄까 참 개념없어 보인다. 한겨레도 관련 최초기사는 <2580>을 언급하지만, 그 이후의 기사들은 생략하고 있다. 이것도 나로선 좀 갸우뚱하다.



부제 : "반쯤 닫힌 웹"의 "월드 가든"에서 블로깅한다는 것의 의미

어제 새벽, 아니 정확히는 오늘 새벽 리수령에게 전화가 왔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 그 대화를 발아점 삼아 이런저런 상념들을 정리해본다.

1. "반쯤 닫힌 웹" (크리스 앤더슨)  
[와이어드](Wired)의 크리스 앤더슨이 "웹은 죽었다"고 선언 하면서 했다는 소리. 예전에 관련글 몇 개를 읽긴 했는데, 크리스 앤더슨이 뭐라고 이야기했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내가 나를 둘러싼 웹의 공기들을 어떻게 느끼고, 판단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관련 추천글 : '웹 사망선언' 비판 )

"실시간 메시지 릴레이"(아거) 서비스는 '트위터'로 수렴된다. 오프라인을 온라인에 완전하게 '이식'하려는 '페이스북'은 전 지구를 집어 삼킬 기세로 의식과 연계된 거의 모든 상품시장 영역에 침투한다. 그리고 이제 블로그는 그 모든 잠재력들을 무기력하게 빼앗겨가고 있는 것 같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니, 생성하느냐, 소멸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2. 웹이라는 개방형 플랫폼에서 거대 서비스 매개 플랫폼으로 
1) 트위터, 감당할 수 없는 노이즈, 그리고 소통의 환상
개방적인 API 정책. 각종의 다양한 위성들(클라이언트 서비스)을 거느리며 거대한 트위터계를 구성한다. 하지만 검색은 취약하다. 이것은 의도적이다. 또 장단점이 있다. 떠오르는 단상들과 쏟아지는 뉴스들을 마치 나이아가라처럼 흘려보내는 트위터. 그 일상적 잡담과 예외적 통찰, 그리고 쏟아지는 뉴스의 흐름 속에서 트위터는 '회고적 기록매체'인 블로그와는 다르게 생동하는 삶의 편린들을 마치 길거리의 바람처럼 느끼는 매체다. 아거가, 굳이 거칠게 이분하여, 트위터를 '감성적 매체'라고 평가하고, 블로그를 '지적인 매체'로 평가하는 건 이런 의미다.

트위터는 파편화된 의식들이 모아진 거대한 조각들의 집합이고, 흐름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집합으로서의 흐름을 조율할 수 있는 조정자, 모더레이터(moderator)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보완할 트위터 검색엔진(Topsy) 혹은 트위터 콘텐츠 편집 클라이언트 서비스들(TweetMix 등)이 존재하지만, 여전히 걸음마 단계다. 그 흐름을 개개 사용자들이 스스로 조율할 수는 없다. 이건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한국적인 상황을 들여다보자. 세속화된 비교경쟁의 강박은 소위 '맞팔'이라는 병맛스런 유행을 파생시킨다. 이 병맛 문화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실질적인 커뮤니케이션 밀도가 급속하게 낮아진다. 그런 지배적 흐름 속에서 '배우'와 '관객'의 이분화된 관극틀(링크된 글의 추신 참조)이 강화된다.

개개의 인간이 갖는 지적 능력(관심)을 분배할 수 있는  한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상한선은 그렇게 높지 않다. 그 절대적인 숫자가 존재한다. 그 숫자는 아무리 뛰어난 뇌구조를 갖고, 아무리 '리스트' 기능을 잘 활용하더라도 대체로 100명을 넘지 못한다. 나머지는 허수다. 그 허수를 위해, 혹은 그런 허수가 되기 위해 재잘거린다. 아무도 당신의 트윗을 거들떠보지 않는 구조로, 그런 매커니즘으로 트위터는 '진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트위터에서 재잘거리는 의미는 뭐냐고? 대부분은 극소수 '배우'를 위해 존재하는 철저하게 수동화된 관객으로, 우리가 숭상하는 '숫자'들을 채우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당신은 트위터에서 "나 소통하러 왔으니 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 계속 말을 건다". 하지만 당신을 위해 귀를 기울여 줄 수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사라져간다. 왜냐구? 당신은 듣기 위해 오지 않고, 일방적으로 들어달라고, 보채기 위해 왔으니까.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질 수 밖에 없다. 노이즈가 점점 더 압도적으로 당신의 의식을 잠식하고, 교란하는 방향으로 트위터는 나아간다.  

"자신의 생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소통을 원하고 있는데도 본체만체 들은체 만체 계속 겉돌고만 있다. 그러면서 정작 초대받지 않은 트위터 같은 공간에는 어떻게든 끼어보겠다고 머리를 들이민다. 나 소통하러 왔으니 내 얘기좀 들어달라고 계속 말을 건다."
- 아거, 아이폰과 침묵의 소용돌이 중에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트위터에서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형들은 '시민'으로서의 '우리'가 아니다. 관습화된 기성세계의 명망가들, 자신의 온라인 진지를 구축한 블로거들, 바이럴 마케팅의 희망을 발견하기 위해 잔머리 굴리는 각종 마케터들, 사진 찍기 좋아하는 아리따운 여자들 뿐이다. 그러니 트위터는 웹 거주민의 잠재력, 그 생동하는 일상의 에너지들을 잠식하는 패턴을 쫓고 있다. 여기에 시민은 없다. 여기에 네티즌은 없다. 온통 나 좀 봐달라는 병맛 문화와 소통하고 있다는 착각들, 그런 제스처들만 만발한다.

이런 지배적인 패턴들, 통속적 문화 흐름 속에서 트위터의 긍정적인 가능성들은 사라진다. 작은 목소리들이 의미있는 관심들로 피어나고, 그 작은 목소리가 '집단지성' 필터링을 통해 전혀 새로운 아젠다 세팅 역량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점점 더 줄어든다. 트위터는 오히려 기성 미디어의 목소리를 단순하게 확대 유통해주는 공간, '이미 결정된' 아젠다 세팅을 확대 변주하는 공간으로 그 의미가 한정되고, 가능성이 축소된다.

"특정 분야의 전문 논객 역할을 하면서 빼곡한 텍스트 사이로 수많은 인라인 링크를 거는 블로거들과는 달리, 진입장벽이 낮고 전달할 수 있는 말이 제한된 트위터상에서 사용자들은 기본적으로 기존 매체에 대한 링크 의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당연히 논평보다는 링크가 생명이 된다. 링크도 한 트윗에 한 개가 기본이다. 매우 기존 매체 친화적인 시스템이다. 미국의 주요 매체들은 이제 트위터와 유튜브를 통한 컨텐츠 교차 홍보가 자신들의 트래픽의 젖줄이 되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파악했다."
- 아거, 누구의 튜브? 중에서


2) 가두리 양식장의 세계화 : "페이스북은 월드 가든"(팀 버너스-리)
"페이스북은 객체(주: 개체)로서 서로 통신하는 구조를 가진 인터넷을 잠식해가는 단일 플랫폼 서비스..."
- 써머즈, 짧게: 페이스북의 새로운 메시징 시스템 설명을 듣고

"페이스북은 '월드 가든'(Walled Garden)" 어제 인주찾기 회의에서 강정수가 전해준 이야기. 웹의 아버지 팀 버너스-리가 페이스북에 대해 쓴소리를 했단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페이스북은 가두리 양식장".


3) 아이폰 1년, 아이폰이 우리에 준 선물
강정수의 바람처럼 "제2, 제3의 The 나은 프로젝트가 시작되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1970년대 장 뤽 고다르는 자신의 모든 영화를 비디오 테이프로 배급하겠다고 선언했다. 누벨바그라는 거대한 프랑스 영화 사조를 이끈 이 혁신적인 감독은, 지금 식으로 이야기하면, 아이폰 내장 캠코더를 통해 영화를 찍고, 그 영화를 자신의 블로그나 아이튠즈, 혹은 유튜브나 블립, 비메오 등에 올려 직접 소비자에게 배급하겠다고 선언했던 셈이다.  물론 그 실험은 실패했다.

미셸 공드리의 [비 카인드 리와인드](Be Kind Rewind. 2009)는 거대 유통권력이 지배하는 저작권 체제 하에서 일상 속의 창작이 어떻게 무참하게 패배할 수 밖에 없는지를 동화적인 감수성으로 그려낸다. 온갖 기성영화들을 자기식으로 재해석해서 만드는 '비디오 가게 루저들'이 어떻게 그 엉성한 영화들로 마을 공동체에게 위로와 감동을 주는지, 그리고 그 공동체적인 가능성이 어떻게 거대 기업과 그 기업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저작권 시스템을 통해 초토화되는지를 한편으론 따뜻하게, 또 한편으론 가슴 아프게 그려낸다.

다시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는 지금 손바닥에 HD가 지원되는 캠코더를 하나씩 들고 다닌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정말 상전벽해의 변화다. 10년이라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스마트폰 내장 캠코더를 통해 고다르의 실험을 우리만의 방식으로 이어갈 수 있을까? 공드리 영화의 슬픈 엔딩을 해피 엔딩으로 바꿔낼 수 있을까? 기대할 수는 있지만 전망이 밝지는 않다. 강정수는 의도적으로 희망 섞인 이야기를 끌어내고 있지만, 아이폰과 안드로이드가 지배할 모바일 환경은 여전히 크리스 앤더슨이 이야기하는 "반쯤 닫힌 웹"의 조건 속에서, 단일 단말기와 그 단말기에 호응한 단일한 플랫폼(아이튠즈 등)에 의해 유통될 것이 뻔하다.

이것이 잘못이라는 게 아니다. 이것이 부정적인 파국을 예정하고 있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그 유통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콘텐츠는 [비 카인드 리와인드]에서 만들어내는 소박한 동영상, '더나은 프로젝트'에서 만들어내는 "기계치 민노씨"의 동영상일 확률보다는 거대 기성 콘텐츠 제작자들의 화려하고, 쌔끈한 콘텐츠일 확률이 훨씬 더 높다. 그리고 그 화려한 엔터테인먼트 상품들, 각종의 (소셜) 게임들은 압도적으로 새로운 유통시장을 채워갈 것이고, 절대 다수의 소비자들은 그 문화코드에 익숙해질 것이다.

의미 향유자들이 스스로 의미 생산자가 되지 못하면, 자신들의 독립적인 기반을 산업적 '토대'로서, 문화적 '토양'으로 만들어내지 못하면, 그러니 강정수가 이야기하는 "제2, 제3의 더나은 프로젝트"가 아니라,  수천, 수만의 '더나은 프로젝트'가 만들어지지 못하면, 의미 유통 시장의 문화적인 경향은 수동적인 상품소비를 구조화하는 방향으로, 좀더 자극적이고, 좀더 현란한 프로페셔널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다. 강정수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우리를 살찌우는" 그런 기술과 제도의 결합, 문화적인 토양을 만들어내지 못하면 새로운 방식의 문화 식민지가 펼쳐질 것이 뻔해 보인다.

그것은 아거가, 닐 포스트만을 인용하며 염려했던, 적극적인 자기 순응화를 통한 지배 매커니즘이다.

"헉슬리가 Brave New World Revisited 에서 언급했듯이, 오웰의 1984에서는 사람들이 지독한 고통에 의해 통제될 것이라고 보았지만, Brave New World에서는 지독스러운 쾌락에 의해 통제될 것으로 보았다. 간략히 말해, 오웰이 두려워 했던 것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들이 우리를 지배할 것을 두려워 한 반면, 헉슬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이 우리를 망칠 것을 두려워했다"
- 아거, 닐 포스트만의 타계에 부쳐


3. 다시 블로그로!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냐고? 다시 블로그로 돌아와야 한다. 강정수가 지적했듯, 트위터를 하건, 페이스북을 하건, 온라인 실존의 근거지로서 블로그를 갖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는 정말 다른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득세로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블로그가 남게 되더라도, 그렇게 외로운 웹의 베이스캠프로 남더라도, 자신의 독립적인 온라인 실존을 구축하려면, 당신은 결국 블로깅을 해야 한다.

왜냐구? 현재 블로그를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미를 생산하고, 유통하고, 소비하는 독립적인 온라인 실존의 기반으로서 블로그를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블로그를 대체할 수 없다. 아무리 초라하더라도, 블로그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자기 완결적 시스템이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이 아무리 진화하더라도, 아무리 커다란 즐거움을 주더라도, 그 공간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각 서비스사의 정책에 의해 결정되어질 공간이다.

가정해보자.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블로그를 '어쨌든' 대체하는 순간, 20세기 말에 시작된 웹 미디어 혁명은 완전히 종식된다. 그게 어떤 의미냐구? 인류가 이전까지 가져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창작 /소비/유통 시스템', 그 대화 시스템의 정치적, 문화적 잠재력이 완전히 소멸한다는 이야기다. 창작과 소비를 겸한 프로슈밍 공간으로서의 블로깅에 내재된  잠재력이 완전하게 '특정' 서비스에 편입되어, 다시 특정 소수의 머리 속에서 디자인 된다는 이야기다. 블로그에 기반한 지극히 평범하지만, 창조적인 실험이 종식되면 남는 건, 자신이 만들어내는 의미, 소비하는 의미가 어떤 의도에 의해 '디자인 되고' 있는지도 느낄 수 없는, 그렇게 평균화되고, 순응화된 개체들이다.


* 이 글은 어떤 공동 프로젝트에 넣을까 싶어 쓴 초안인데 역시나 정리가 안된다..(엉성, 난잡..;;;)
특히 페이스북은 체험치가 너무 낮아서...
너무 부정적인 어감으로 쓴 것 같기도 한데...
나중에 기회되면 대안과 가능성을 좀더 강조해서 이어 쓸까싶다...




[더나은 사람들] 노유리, "우리 모두 함께" (노들야학교사)
2010.11.17. '이음여행'에 자원봉사 나온 노유리를 만나 짧게 이야기를 나눴다... 


1. 장애인의 교육권
노유리 교사는 일단 접근권을 지적한다. 지체장애인들에게 학교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곳이다. 학교에 간다고 치자. 전문적인 장애인교육은 기대할 수 없다. 이것도 좋다. 어떻게든 중/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치자. 사회에서 장애인들을 받아들여주지 않는다. 나은이도 이야기한 것처럼 헌법에 보장된 국민들의 교육권은 적어도 장애인들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다.

2. 노유리가 야학교사 된 사연
스무살 때 알바로 장애인 활동보조를 했다고 한다. 그 때 장애인들의 모습을 처음 접하고, 야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어떤 정치적인, 사회적인 목적의식이 아니라 그저 우연하게 '그 분들 모습이 너무 좋아서' 참여하게 됐단다.

3. "노들 야학교사는 얼마나 받아요?" 
나은이가 물었다. 요즘 사회에서 인기 많은 선생님. 그래도 우리나라에선 대표적인 장애인 교육단체(?)인 노들야학 선생님들은 얼마나 받을까? 답은 '오히려 돈을 내고 가르친다'. 한달에 1만원씩 교사수당을 내면서 가르친단다.

예전에 야학에 참여한 적이 있다. 선생님을 '강학'이라고 부르고, 학생들을 '학강'이라고 부른다. '강학'은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의미고, '학강'은 '배우면서 가르친다'는 의미다. 노유리에게 야학은 기꺼이 자신의 작은 돈을 내면서도 '즐겁고, 기쁜 곳'이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곳이리라.

다만... 이런 좋은 단체에 많은 후원금들이 모여서 야학 선생님들도 '인기있는 직업'이 되었음 더 좋겠다. ^ ^

4. 끝으로 하고 싶은 말
"우리 함께 해요!"
노유리는 아주 소박하게 말했다.

나은이가 맞장구쳤다.
"아! 더 나은 세상이네요!"

우리가 함께 하면 더 나은 세상이 정말 온다. 올 수 있다. 오고야 만다! : )




* 관련글
이음여행 : 시설은 넘어 공동체로, 장애를 넘어 인간으로
이음여행 2 : "장애인도 자기 돈이 필요해요!" (발바닥 김정하)
이음여행 3 : 바자회를 여는 이유 (발바닥 이현경)
이음여행 4 : 박홍구, "우린 동물원의 동물이 아니잖아요"
이음여행 5 : 신지은, "연애를 하고 싶어요"
이음여행 6. 장애인 정책 문제가 뭐죠? (더나은이 간다 : 김정하)
이음여행 7. 이라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을 뿐" (더나은 사람들)
이음여행 8. 노들야학교사 노유리, "모두 함께" (더나은 사람들)


* 추천글
"음성 꽃동네, 나에겐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이정환닷컴) : 이정환은 '성광야학'에서 오랫동안 교사(강학)를 했다. 블로그를 하기 전에 거기에서 처음, 아주 잠깐이지만, 스쳤던 인연이 떠오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