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이 승리한 시대
자본이 인간에게 완전히 승리한 사회. 자본이 인간의 얼굴을 지워내고, 그렇게 지워진 인간의 얼굴에 스펙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자발적인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몰고 있는 사회. 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최소한의 도덕성을 포기하고, 성공이라는 이미지로 치장된 화려한 타락을 선택했다. MB는 그 상징이다. 우리는 교육과 학문을 포기하고 직업양성소에서 차곡차곡 쌓여가는 폼나는 스펙을 선택했다. 박용성은 그 시대정신을 선구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지방의 한 대학이 놓여 있다. 상지대라는 이름을 가진 대학. 근 20년에 가까운 대학 민주화의 빛나는 성취를 상징하던 대학. 시민대학의 꿈을 학생과 교수 교직원이 재단도 없이 가꿔오던 대학. 2010년 대한민국은 그 대학을 '사학비리 대명사'로 불리던 집단에게 기어코 넘겨준다. 그 상지대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인간과 자본이 서로 한 몸 되고, 대학과 스펙이 서로 살을 비빈다. 그렇게 성공을 향한 비교 강박의 배타적 욕망은 우리 안을 흐르는 피가 되고, 우리를 지탱하는 뼈가 되며, 우리를 감싸는 살이 된다.
먼저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다. 나는 이 야만에 기꺼이 참여했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는 말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악이 승리하는 이 모든 현재진행형의 역사에 침묵과 방관으로 참여했다. 변명은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구조를 이야기하고, 폼 나는 외국 석학들의 멋진 용어들을 빛나는 장신구 삼아 온 몸에 주렁주렁 메달아도 결론은 하나다. 우리는 악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 뿐이다.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악은 진부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으니까.' 우리의 세련된 무관심과 익숙한 방관이 그 악의 정체다. 우리는 악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실은 그 악의 공범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가 그 악이다.
그러니 아주 작은 정의, 아주 작은 상식도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정체를 바라보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아프더라도 우리는 자기를 바라보는 그 일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침묵하는 선한 사람들의 시대, 그렇게 자기 마취적인 위로를 위한 휴머니즘이 만발한 우리시대의 정체가 사실은 악의 꽃들이 만발한 악의 정원이고, 정치적인 무관심이 마치 쿨한 최신 유행처럼 유통되는 이 사회는 그저 황무지였을 뿐임을 아프게 인식하는 일, 그 바라봄이 출발이다. 우리는 이 달콤한 신세계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아픔도 없이 통과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그 온갖 고통과 저항들이 조롱받는 시대다. 쿨하지 못하게시리...쯧쯧. 촌스럽게 왜 그래? 심지어 우리들은 우리에게 빵부스러기 처럼 남겨진 도덕심, 그 양심을 자극하는 행동들을 힐난한다.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 쿨하지 못하고, 촌스럽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우리 시대의 몰상식과 야만, 우리시대의 악은 무럭무럭 자란다. 우리는 고백해야 한다. 악은 우리와 동떨어진 괴물들에게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악의 숙주다.
2. 상지대 사태
상지대는 원주에 있는, 우리 시대의 세련된 표현을 빌면, '지잡대'(지방에 있는 잡스런 대학)다. 그 지잡대가 17년을 싸워왔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의 사학비리 사정에 기대어 비리재단을 몰아낸 게 아니다. 300일이 넘는 학생, 교수, 교직원의 학원민주화 투쟁으로 비리재단을, 반교육의 상징을 몰아냈다. 그렇게 함께 용역깡패에게 매 맞아 가며, 함께 단식투쟁해 가며, 비리사학 대명사처럼 불리던 ‘김문기’(전 상지학원 이사장)와 그 일당들을 몰아냈다. 김영삼 정부는, 어떤 영화배우의 표현을 빌자면, 그저 ‘숟가락’만 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지금, 상지대 학생들과 교수, 교직원들은 다시 400일이 가까워 오는 농성을 벌이며, 국가가 법과 제도라는 기득권의 합리적 기만장치로 다시 불러온 비리 구재단의 망령과 싸우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마르크스). 지금 반복되고 있는 역사는 희극이다. 하지만 그 희극은 너무도 슬퍼서 펑펑 울고 싶은 희극이다. 그 희극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들이고, 우리들의 자녀들이고, 우리들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후배들에겐 비리재단이 다시 군림하는 반교육적이고, 치욕적인 학교를 물려주지 않겠다.” 그 소박하지만 굳은 결심이 망각 속에서 먼지처럼 지워지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과거 비리재단 컴백 쇼.쇼.쇼.
그 일을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산하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가 수행하고 있다. 상지대만이 아니다. 광운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대구대... 비리재단 복귀 반대 투쟁의 선봉이자 상징인 상지대가 넘어가면, 나머지 학교들의 운명은 안 봐도 비디오다. 하지만 현재 스코어, 교과부와 사분위는 상지대의 새로운 이사진 구성에 관한 공식적인 절차를 모두 마쳤다. 과거 비리재단(흔히 ‘비리 구(舊)재단’으로 통칭)의 망령들을 제대로 다시 살려내고 있다. 좀비다. 죽어도 죽지 않은 존재들. 교육의 가치를 땅에 쳐 박았지만 다시 화려하게 복귀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히어로들. MB시대는 소위 '잃어버린 10년' 동안 절치부심했던 좀비들에게 인간의 피와 살을 떼어주는 놀라운 마법의 시대다. ‘새로운 중세’. 그게 MB시대고, 그게 상지대 사태다. 남의 일이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의 학교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깔로 이런 일은 대한민국 사립대학들에서 벌어지고 있다. 당신이 다니고 있는 중앙대 이야기를 해보자.
3. 사학오너님의 대학주식회사
상지대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사학비리재단 복귀에만 있지 않다. 이 중대한 역사의 퇴보를 그저 ‘반교육적’이고, ‘몰상식’하다는 단순한 선/악 구도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 이 사태의 근저에는 ‘사립대학’을 ‘주식회사’로 변모시킨 사회성원들의 적극적인 공범자 의식과 그 공범자 의식이 만들어낸 이른바 제도와 문화가 존재한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 밖에 있으며, 그 이율배반이 실은 우리다. 정글 같은 대한민국의 양육강식 시스템에서 스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변모한다. 연약한 짐승을 잡아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우리는 교육(!)받는다. 아무리 고결한 도덕교과서로 위장하더라도, 대한민국 교육의 내재된 원리는 짐승의 본능이다. 더 많은 먹이를 잡아먹을 수 있는 사나운 짐승의 이빨, 짐승의 거친 본능. 우리는 인간으로 교육받지 않고, 세련된 짐승으로, 멋진 명품들 속으로 피를 질질 흘리는 그 탐욕스런 이빨을 숨길 수 있는 처세를 배운다. 아, 스펙! 스펙! 스펙! 그게 우리들이 간절히 갈구하는 짐승의 이빨이다. 우리들의 영광스런 이빨. 이 이빨이 물어뜯고 있는 어떤 먹이들, 우리가 한 때나마 함께 했던 학우들을 보자. “사학 오너”(조선일보 관련기사의 표현)는 어떻게 먹이를 물어뜯고 있는지, 그 숙달된 조교의 시범을 보자.
“박용성스럽다.” 최근 학과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진통 중인 중앙대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중앙대 이사장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은 직선적 성격답게 정면 돌파를 택했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던 김주식(26·철학과 휴학 중)씨에게 학생에겐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퇴학 처분을 내렸다. 시위를 벌인 다른 3명의 학생에게도 징계와 명예훼손 혐의 고소, 공사 지연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제기를 검토 중이다.
- 곽정수, [중앙대 사태, ‘기업사회’의 묵시록], 한겨레 21, 2010.05.07 제809호.
우리는 좀 더 고양된 인격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 그래서 서로 함께 나누고, 향유하며, 서로를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그런 동화 같은 풍경들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런 배부른 소리는 달나라에나 가서 하시고... 우리는 그저 우리 안에서 내면화된 짐승의 논리, 그 사나운 이빨이 우리 자신을 잡아먹지 않을까 소심하게 염려할 뿐이다. 그런 소심한 염려가 우리시대에 남아 있는 양심의 정체다. 나에게 남은 양심의 정체다. 우리가 정말 고민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거대한 이빨들의 울부짖음에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귀를 막고,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그 짐승의 논리에 어떻게 하면 그럴듯한 면죄부를 씌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양심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속일 수 있을까, 우리들은 부지불식간에 자발적인 노예가 된다. 좀 더 비싼 노예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싸우고, 짐승으로 살아남기 위해 오너님의 영광어린 빛에 스스로 눈먼다.
그리고 나 같이 소심한 염려를 기어이 버리지 못한 자들은 어느 날 문득 경찰서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 거다. “전화 받으시는 분 민노씨 맞나요?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셨습니다.” 아, 씨바 참 가지가지 한다. 소심하게 머리 속으로 읊조리며, 블로그엔 이렇게 쓰는 거다. "김문기씨, 고소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그게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자부심이니까. 그게 영광이 아니라면 너무 너무 속상하고, 너무 너무 슬플 것 같으니까...
4. 방관자의 알리바이
소송법상 용어 중에 당사자주의라는 말이 있다. 소송당사자에게 소송의 주도적 지위를 부여해 당사자 상호간 공격, 방어를 통해 소송이 진행되고, 법원은 제3자 입장에서 당사자의 입증을 판단하는 방식, 그걸 당사자주의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는 참 많은 싸움들이 있는데, 당연히 그 싸움 모두를 법원이라는 심판관이 지켜보지 않고, 혹 지켜보더라도 반드시 옳은 결정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개입되어야 하는 싸움. 하다못해 응원 한마디라도 보태고, 욕이라도 한 사발 내질러야 하는 싸움. 그런 싸움들이 우리 주변에는 참 많다. 그런데 종종 이 ‘당사자주의’가 그럴듯한 무기처럼 등장한다. ‘이봐, 너는 당사자도 아니잖아. 함부로 나서지 말라구!’ 가령 작은 용산으로 불리는 ‘두리반’ 같은 초라하고, 외롭지만, 지켜야 하는 싸움들. 그리고 그런 싸움은 온갖 피와 살을 길바닥에 뿌린 뒤에야 작은 전리품을 우리에게 안긴다. 가령, 며칠 전 타결된, 1895일 동안 싸워서 겨우 겨우 절반의 승리를 일궈낸 기륭전자 노조의 싸움 같은 거...
‘당사자’라는 말이 우리의 싸움에 우리가 나서는 일을 막는 장애물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책무를 떠넘기는 방관자의 알리바이가 되면 안 된다. ‘당사자’라는 말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인간답게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회적인 상상력, 정치적인 상상력을 메마른 이성의 이름으로 제약해선 안 되는 거다.
물론 대개의 싸움이 그렇듯, 어느 한 쪽이 전적으로 선(善)이고, 다른 한 쪽이 전적으로 악(惡)인 경우는 드물다. 상지대 사태도 마찬가지다. 한 쪽에선 “사학 오너의 재산권”이라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욕망을 ‘사학의 자주성’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 또 다른 한 쪽에선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비리재단 관계자들은 다시는 학교에 발을 붙여선 안 된다고 말한다. 자주성과 공공성은 모두 소중한 가치다. ‘사학의 자주성’이 숨기고 있는 의미가 지금/여기에서는 ‘사학 오너의 재산권’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조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말 역시 국가권력이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무기로 언제든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예민하게 비판하되,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의 조화를 모색하고, 거듭 다시 경계로 나와 살아서 꿈틀대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선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숨 쉬는 맥락 속에서 우리들의 고민과 선택을 담아내야 한다. 물론 지금/여기에서 나의 선택은 단순하다. 학교는 학교로서, 학생과 교수와 교직원, 그리고 지역사회의 공적 자산으로서 지켜져야 하며, 이미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야 하는 비리재단의 사리사욕으로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것. 상지대는 원주의 ‘시민대학’으로 지켜져야지, 김문기로 대표되는 비리 구재단의 ‘사유재산’으로 환원되어선 안 된다. 이것마저 포기하자고? 그래, 그럼 우리 앞으로 ‘교육’이라는 말은 우리 머리와 가슴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리자.
5. 다시 부끄러운 고백
언젠가 블로그에 썼던 것처럼 나는 대단한 도덕심으로 무슨 투철한 정의감으로 상지대 싸움에 참여한 게 아니다. 존경하는 장애인 활동가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민노씨가 상지대 좀 도와줘야겠다.” 그 말로 나는 상지대 싸움이 뛰어들었다.
그렇게 넉 달이 지났다. 아이들(주로 상지대 학생회 간부들과 단과대 학생회장들)과도 무척 친해졌다. 그게 내가 이 싸움에 얻는 가장 즐겁고, 소중한 체험이다. 그 어린 친구들은 두 달 여의 서울 원정 농성을 마치고, 지금은 원주로 돌아갔다. 그 상지대 아이들은 매일 밤 학생회 사무실에서 끝나지 않을 회의를 이어가고, 또 혹시라도 구재단 인사들이 들어오지는 않을까 이사장실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이 든다. 그런 젊은 친구들과 함께 싸우는 일은 자체로 나에겐 멋진 드라마다. 이기면 모두 얻고, 지면 모두를 잃는 싸움은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든다. 때론 정말 정색하고 진지할 필요가 있지만 괜히 심각해질 필요 없다. 지더라도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우리에게 진실하고 소중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고, 먼 훗날 그렇게 스스로에게 고백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히 값지다.
하지만 이것은 싸움이고, 싸움은 항상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 대한민국에서 사학은 보이지 않는 제국의 거대한 동맹이다. 어마어마하게 견고한 권력이고,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기득권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도 졌던 싸움을 지방의 초라한 대학, 하지만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에겐 그 어떤 대학보다 자랑스러운 대학, 상지대가 하고 있다. 나는 블로거로서 상지대 학생들과 블로그를 만들었고(상지대 구출 대작전), 블로거 벗들의 연대를 요청했다. 상지대 학생들과 현장의 살아 있는 표정들을 담기 위해 'The 나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이폰과 유튜브를 이용한 동영상 작업도 시도했다. 블로거 원정대와 함께 원주에 내려가 현지를 답사하고(상지 블로거 원정대), 블로거 기자회견도 함께 했다.
그 밖에 대형집회로서 시민문화제는 두 번이나 열렸고, 지상파인 KBS 2TV [추적60 : 벼랑에 선 상지대, 과거로 돌아가나](2010.8.11. 방송)에 선 상지대 사태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문제를 본격 조명하기도 했다. 시민단체(상지대 지키기 긴급행동)에서도 두터운 연대를 견지했다. 상지대처럼 사분위 결정을 앞둔 광운대, 덕성여대, 동덕여대, 대구대 등이 서로 힘을 모아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시민단체들과 상지대 비대위 등과도 연대해 ‘범대위’를 구성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이런 싸움은 두 달을 넘기 어렵다. 특히나 대한민국의 진화한 ‘망각시스템’ 속에서 이런 공적 이슈에 계속 시선을 붙잡는 건 너무 힘들다. 아주 아주 부끄러운 고백. 나는 상지대 학생들과 가끔씩 통화를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그 뿐이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상지대 학생들)은 아이들대로, 또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각자의 영역으로 되돌아 간 기분이 든다. 우리들이 그저 이따금씩 떠올리는 그 마음들, 함께 했던 시간들, 그런 소박한 꿈들이 만들어내는 끈들은 내내 이어지겠지만, 사실 좀 무기력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아니 끝날 수 없고, 그 싸움이 끝나는 날이 내가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놓아버리고, 나 역시도 짐승의 길로 나아가는 순간이라는 걸 나는 안다.
6. 달콤한 망각, 뒤틀리는 대학
상지대 사태는 대한민국의 교육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질문한다. ‘부정편입학’과 같은 학사행정의 초석에 관한 범죄행위가 이해할 수 있는,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에 충분히 치유 가능한 ‘사소한 잘못’이 된다. 아, 관대 하여라, 아, 대범 하여라,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여! 학교는 ‘사학오너’의 재산이므로 다시 되돌려줘야 한다! 국가는 오너님이 잠든 사이에 그 학교를 나랏돈으로 대신 관리해준다! 아,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그렇다. ‘김문기’로 대표되는 상지대 구재단과 교과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 권력과 자본과 제도로 치장된 합리적 야만의 제왕적 카르텔, 우리가 내심 이끌리는 우리 욕망의 종착지.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어찌 반항할 수 있겠는가!
사학왕국을 축복하라!
사학왕국을 찬미하라!
그럼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그 소심한 마음 속 무언가가 꿈틀대며 속삭인다. 학교는 우리 모두의 것이야, 사학오너님의 사유재산이 아니라고! 배우는 학생과 가르치는 교사의 것이라고, 일하는 직원과 지역사회의 자산이라고. 그 작은 속삭임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한, 소심한 우리들을 가끔은 아프게 찌르고, 또 어떤 때는 봄날 바람처럼 우리를 간지럼 태우는 한, 이 싸움은 계속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이 싸움에, 이 거대한 싸움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슬프고, 무시무시한 이 전장의 한 가운데 이미 내던져 있다. 알몸으로, 어떤 무기도 없이. 우리에겐 우리밖에 없다. 그리하여 ‘방관자’는 없다. 모두가 당사자다. 우리는 당사자로서, 우리를 일으키는 신념과 철학으로, 아니 그런 거창한 말들 모두 필요 없이, 그저 우리가 쪽팔리지 않기 위해, 아니 덜 부끄럽기 위해 이 싸움에 뛰어 들어야 한다. 때론 소심하게, 때론 담대하게. 그저 이 싸움을 멈춰선 안 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사립대학이 살아남는 길은 ‘사립대학 주식회사’가 되는 길인지, 아니면 그저 ‘학교는 학교’로 남아야 하는 것인지 우리는 그 싸움을 붙잡고 있는 긴 전쟁의 여로 동안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질문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짐승이 되어버리니까.
지금 대한민국 교육은, 대한민국 대학은 도덕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 위기는 학교는 ‘배우는 학생들의 것’ ‘가르치는 교사의 것’ ‘일하는 교직원의 것’이라는 소박한 소망을 영원히 농담으로 만들어버릴 결정적인 위기다. 대학은 ‘사학 오너님’의 것이니까. 아무리 별별 더러운 짓을 해도 국가에서 잠시 동안 ‘관리’(임시이사제도)해주고, 다시 돌려줘야 하는 것이니까. 대학생인 당신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 형제자매의 문제. 우리 자식의 문제다. 그러니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모두 당사자다.
답하라.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존 F. 케네디)
- (주: 사실 이 유명한
문장은 존 F. 케네디의 잘못된 인용에서 연유한다. 케네디는 1959년 9월 16일 오클라호마주의 털사에서 이 문장이 포함된
연설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문장을 인용한 출처로 ‘단테’-신곡-를 언급한다. "Dante once said that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a period of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 하지만 이는 착오 혹은 기억의 변주인 것으로 보인다. 참조 : 피타고라스, 백투더소스_스프링노트 )
참고. 2007년 대법원 판결과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중심으로 살펴본 상지대 사태
상지대 사태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가 자신들의 결정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200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07. 5. 17. 선고, 2006다19054 이하 '상지대 판결')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하 간략히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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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지대 판결의 골자대법원 전원합의체가 구성되어 13인 재판관이 8:5로 서로 팽팽하게 대립한 판결이다. 의견 대립의 정도를 방증하는 소수의견의 다수의견 비판을 잠깐 들어보자.
" 정식이사의 선임에 관한 규정도 아닌 구 사립학교법 제25조의 내용을 근거로 임시이사의 정식이사 선임에 등 권한을 제한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다수의견은 사립학교법의 해석 또는 법률의 적용에 있어서 입법행위에 버금가는 월권행위를 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 다수의견에 대한 김영란, 박시환, 김지형, 이홍훈, 전수안 대법관의 반대의견 중에서
상지대 판결의 의미는 크게 둘이다. 1) 대법원은 '종전이사'의 개념을 창안, 과거 비리재단 관계자들의 원고 적격 인정했다. 재판청구를 위해선 당사자로서 일정한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 때가 있다. 즉 원고로서 재판을 청구할 법률적 이익이 존재해야 하는데 이를 '소의 이익', 혹은 다른 관점으론 '청구적격' '원고적격'이라고 한다. 상지대 판결은 특히 김문기로 상징되는 과거 비리재단 관계자에게 ‘종전이사’라는 기상천외한 개념을 창안하여 원고적격을 인정한다. 2) '임시이사는 정식이사를 선임할 수 없다'. 과거 퇴출된 비리재단 관계자가 주장하는 청구내용은 '임시이사는 정식이사를 선임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고, 대법원은 원고의 손을 들어준다. 이는 1970년 대법원 판결을 뒤집은 것이다(판례 변경).
2. 상지대 판결의 파장
상지대 판결은 판결 전에도 관심을 집중시켰고(좌파가 강탈한 ‘사유재산’ 상지대?, 한겨레21. 2007.02.02 제646호), 판결 후에는 말할 것도 없이 엄청난 논란과 파장을 불러왔다.(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관련논평). 과거 비리재단측은 판결의 의미를 확대해석하여 왜곡했고, 2기 사분위는 이를 적극 수용했다. 여기에서 사분위의 성격에 대해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3. 1기 사분위와 2기 사분위
상지대 판결을 기화로 사립학교법에 사분위 관한 규정이 신설된다(2007년 12월. 사립학교법 24조의 2이하). 이를 근거로 교과부 산하의 국가위원회로 사분위가 구성되며, 이를 편의상 1기 사분위로 통칭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장이 각각 3명씩, 그리고 대법원장이 5명을 사실상 선임하는 사분위원은 총 11인으로 구성되고, 임기는 2년이다. 1기 사분위는 진보:보수의 비율이 5:6, 6:5 정도라고 평가된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분위의 인적 구성이 개편된다. 이를 2기 사분위로 부른다. 2기 사분위의 인적 구성은 균형감을 현저히 상실했다. 이우근 위원장은 최근까지 사학법인측 변호를 담당했고, 고영주 위원는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 상임지도위원 활동 및 친북인명사전’발간(올해 3월)했으며, 강민구 위원은 상지영서대 교수의 양심선언으로 구재단 밀착의혹을 받고 있으며, 김성영 위원은 사립학교법이 개정된 2005년 당시‘한기총 사학수호국민운동본부’ 초대 본부장 역임하며 대형 십자가를 어깨에 매고 사학법 개정 반대 운동을 주도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정재량 위원은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뉴라이트학부모연합’ 공동대표로서 좌편향 교과서 채택 학교 명단공개, 금성출판사 불매운동 등을 전개한 바 있다. 상지대 판결 직후 과거 비리재단측은 '의도적인 보이콧'으로 1기 사분위 결정을 지연시켰고(상지대 시곗바늘을 꺾으려는가, 한겨레21. 2008.12.05 제738호. [이슈추적] 복귀 노리는 김문기 전 이사장 등 옛 비리 재단들, 결단 못내리는 사학분쟁조정위) 2기 사분위가 8월 9일 몇 번의 결정 지연 끝에 상지대 결정을 내리며 과거 비리재단 복귀의 물고를 텄다. 이제는 광운대, 대구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등을 비롯한 다수 사학의 이사진 구성에 관한 결정을 남겨두고 있다.
4. 사분위의 상지대 판결 왜곡
사분위에서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논거로 삼고 있는 상지대 판결은 임시이사의 정이사 선임권한에 관한 판단이지, 과거 비리재단 관계자들이 '정이사'가 되거나, 혹은 '정이사를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문제와는 전혀 별개다. 이는 상지대 판결의 다수의견에도 분명하게 명시되고 있다("자신-종전이사, 대법원에서 인정한 과거 비리재단 관계자-이 정식이사로서의 지위를 회복하는지 여부 또는 스스로 새로운 정식이사를 선임할 권한이 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더욱이 사분위는 스스로 마련한 '정이사 선임원칙'에서 정이사 추천권자의 자격에 관하여 "사회상규와 국민의 법감정"에 비춰 적당하지 않은 자는 배제한다는 기준을 세운 바 있다. 사학비리 대명사로 불리는 김문기 전 상지학원 이사장이 이런 '예외조항'이 아니라면 누가 예외조항이란 말인가. 이는 지난 7월 6일 국회 청문회에서 김상희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대해 전임 안병만 장관 역시 인정한 바 있다. 그런데 안병만 전임 장관은 사분위 결정을 법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권한을 가진 자임에도 불구하고(재심청구권), 이주호 장관으로 교체되는 이취임 직전에 사분위 결정을 승인하고, 도망치듯 달아나버렸다(사분위 결정 최종 승인). 이주호 장관은 사분위 결정에 대한 '직권취소권'을 가졌지만, 이를 행사하지 않고 있다.
5. 사분위의 '회의록 폐기'
국회 상지대 관련 긴급현안 질의과정에서 사분위가 일방적으로 상지대 결정과정을 담은 51차, 52차 회의 속기록을 폐기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7인의 야당 국회의원이 회의록 열람 요청에 대한 사분위의 답변서를 통해 드러났는데, 사분위라는 괴물 권력이 얼마나 국민들을, 더욱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를 깔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한겨레신문 [사설] 제 결정에 책임도 못 지는 사분위, 존재할 이유 있나. 2010년 9월 10일자)
6. 김문기 전 이사장은 상지학원의 설립자가 아니다.
김문기는 종전이사에 해당하지 않으며, 설립자도 아니다. 2004년 대법원 판례(대법원 2004. 10. 28. 선고 2002두10766)에서 판단한 것처럼 상지학원의 설립자는 원홍묵이고, 김문기는 설립자가 아니다.
7. 김황식 국무총리
최근 국무총리로 취임한 김황식은 상지대 판결에서 '주심' 역할을 하며, 다수의견에 더해 비리재단 복귀에 길을 터준 '보충의견'을 남긴바 있다. 그리고 인사청문회에서 논란이 된 것처럼 김황식의 누나는 동신대 전 이사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총장이다.
* 이 글은 중앙대 교지 <중앙문화>에 보낸 글입니다.
* 이왕에 고려대 교지 <고대문화>에도 거의 동일한 주제로 글을 보냈고, 또 블로그에도 올렸는데요. 때문에, 중대교지 편집진에게도 양해를 구했습니다만, 글 일부가 고대교지에 보낸 글과 겹칩니다. 다른 관점으로 쓰려고 노력했지만, 맥락상 겹치는 부분을 아예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블로거벗들과 독자들께도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추2. 보충. ㅡ.ㅜ;
추3. 보충 ^.ㅜ
지나치게 무미건조한 포스팅때문에 민노씨가 자칭 컴맹임을 알았습니다. 자칭! 별로 그렇지는 않아보입니다만.
저 봉쥬르인가는 얼마전에 윈도우7에서 인터넷 연결문제가 있어 검색해봤더니 모든 문제의 시작이며 어머니더군요. 그리고 V3도 좋은 평은 못 받는 듯 하니 이번 기회에 청소도 잘 하신 듯 합니다. 윈도7 석달 가까이 쓰다가 다시 XP로 돌아왔습니다. 7이 좋기는 한데 아직 안정화나 지원은 첫번째 서비스팩이 나온 뒤에나 확실할 듯 합니다.
한국에는 눈이 많이 온다던데 눈길 조심하시고, 새해에도 하시는 일들이 다 잘 되시길 빕니다.
와우, 보보님! :)
참 오랜만입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렇게 짧게나마 댓글창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어 참 고맙고, 반갑네요.
보보님께서 계신 곳은 여전히 좀 덥겠죠? ^ ^;
여기는 말씀처럼 눈이 참 많이도 왔습니다.
근래는 좀 많이 춥기도 했구요.
모쪼록 보보님께서도 올 한해 마무리 잘하시고, 씩씩하고, 기운 넘치는 새해를 준비하시길!
현재 V3Lite 사용중입니다...
ATI에서 드라이버가 AMD로 넘어가면서 ATI버전에서는 나타나지 않는증상이
나타나고 있는걸로 판단됩니다... 10.9버전에서는 V3설치상태에서
ATI2dvag블루스크린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AMD버전으로 변경된
10.11, 10.12버전에서 문제가 발생되고 있는것으로 확인됬습니다...
되도록이면 ATI아이콘이 붙어있는 10.10버전 사용바랍니다
AMD공식홈페이지에서 AMD아이콘으로 10.10버전이 나올경우 되도록 심파일같은 공개자료실에서 받아가시기 바랍니다
앞으로 나오는 드라이버에 문제해결이 안된다면 아쉽지만 ATI와의 이별을 준비해야할거같군요...
오, 친절한 설명 고맙습니다.
본문에 옮겨야겠네요. :)
아 이 문제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심파일에서 아주 오래 묵혀둔 계정을 꺼내서 10.10으로 재설치. 아마도 잘 될거 같습니다.
V3 풍문 말입니다만, 단지 국내 대부분이 V3 사용자라서 단순한 우연이 아닐지; 전 아베스트 쓰는데 말입죠;
블로그에 링크첨부로 그냥 경험담을 써도 될런지요.
아마 이거 보셨을 땐 이미 썼을거 같지만;
글 쓴 보람이네요.
링크는 당연히 공짜입니다. : )
굳이 허락을 받을 필요가 전혀 없죠.
오히려 반갑고,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http://www.minoci.net/94
물론 제 글보다는 제 글에 고맙게 댓글을 주신 위 ATI10.10(임시필명)s님께서 결정적인 도움을 드린 것으로 보이지만요. ㅎㅎ
저는 지금까지는 별 이상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 ^
추.
반가운 마음에 블로그에 들려서 댓글을 남기려고 했는데..
네이버 로긴 후 댓글 설정을 하셔서 아쉽게도 남기지 못하고 돌아섰네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