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올로기적 (넌)센스

2011/02/18 12:04

유시민 "저 실제로는 안티 별로 없어요"
내가 그 안티다. 진지하게 이야기하건데 나는 이데올로기 시대가 끝난 지 오래인 마당에 여전히 진보와 보수 혹은 민주와 반공을 정치적 이유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신물이 났다. 유시민을 보면 진중권이 생각나고 둘 다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 가장 거대한 아스피린, 유시민 "저 실제로는 안티 별로 없어요"  

그냥, 늘 그랬듯, 짧은 단상.

0. 나는 '거대한 아스피린'에 신물이 나거나 할 어떤 이유도 없고, 그럴만큼 이 블로그를, 꽤 유명한 블로그라는 건 알지만, 잘 알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흔히 하는 말로, 까는 글, 씹는 글, 전혀 아니다. 그럴 시간도 없고, 그럴(만큼 관심을 둘만한) 사연도 없다. 혹시라도 있을 수 있는, 전혀 불필요한, 설왕설래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사족이 좀 길었다.

1. 아무튼 위 글은 이데올로기,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인 관심이 왜 여전히 필요한지 꽤 설득력 있게 방증한다. 민주와 '반(反)민주' 혹은 '비(非)민주'를 짝지우지 않고,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반공"을 짝지운 그 이데올로기적 (넌)센스는 박정희 시대의 관성일 확률이 대단히 높다. 그러니까 이 무의식적인 짝말의 감수성은, 우리 시대가, 이 땅이, 여전히 박정희 이데올로기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민주 혹은 반민주, 진보 혹은 보수라는 관점이 여전히 중요한 곳임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나 싶다.

2. 정치적 무관심은 전혀 쿨한 게 아니다. 그런 쿨한 척 하는, 정확히 표현하면, 자신의 정치적 무관심을 '표현'함으로써 쿨하다고 착각하는 것 같은, 자기기만적 제스처의 강조는 도덕적으로까지 비난받아 마땅하다, 나는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 한때 유행했던 '이데올로기의 종언', 그러니까 후쿠야마 투로 말하면, "역사적 최종단계로서의 자본주의"라는 망상은 정말 망상인데, 그게 적어도 이 땅에서 망상인 이유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혹은 잘 보이지 않지만 조금만 사회적 상상력을 발휘하면 인지할 수 있는, '반공' 자본주의에 뿌리한, 박정희 시대의 야만적인 유산들, 그 도저한 폭력들을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간다. 더 갈 것도 없다. 용산에서의 공권력이 재판부에서 어떻게 평가받았는지를 보면, 그 민주주의, 그 법치주의의 생생한 날 것의 모습을 보면, 답 나온다.  

3. 암튼 골자는 이거다. 민주는 반공의 반의어가 아니다. 그 무의식적 착각은, 여전히 우리 시대, 적어도 위에서 인용한 그 '화자'가, 박정희식 반공 자본주의의 관성에 사로 잡혀 있음을 증거한다. 그리고 그 '화자'가 인용된 블로거만은 아니리라. 우리는 여전히 이명박 시대로 변주된 '박정희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여기서 이데올로기는 일반적으로 관용화된 '허위 의식'이란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특정한 계급적 이익을 표현하고 인간의 사유, 감정, 행위에 영향을 미치며 또 이에 상응하는 행동규범, 입장, 가치평가 등을 포괄하는 사회적(정치적, 찰학적, 공교적, 예술적, 경제적, 법적) 견해의 체계"(마르크스 레닌주의 철학소사전, '이데올로기' 중에서)라는 의미로 쓴거다.  


트윗 대화 및 단상을 좀더 이어서

0. 맥루한의 고전적인 명제(인간의 확장으로서의 미디어)처럼 매체는 신체기관화하고, 크로넨버그의 최근 비전(폭력의 역사 2005, 혹은 이스턴 프로미시스 2008)처럼 그렇게 스스로가 매체인, 그래서 자신의 역사가 기록된 매체로서의 인간은 그 매체로서의 운명을 피하기 어렵다.    

1. 매체의 진화는 인간의 육체와 거기에 내재된 욕망을 기본으로 디자인된다. 책은 인간의 이성이라는 배타적인, 그러니까 인간과 인간 이외의 존재를 구별하는, 인격적 조건에 주로 작용하는 매체였다. 여전히 가장 고전적인 매체인 책, 거기에 쓰여진 언어들은 궁극의 매체다. 하지만 매체는 귀(라디오)에서 눈으로(영화, 텔레비전), 이제 촉감(애플의 '터치' 상품들)으로 이동한다. 물론 매체의 진화는 이전에 있었던 매체의 육체적인 감각들을 기본적으로 안고 간다.

2. 인간은 매체에 자신의 욕망, 주로 육체적인 욕망을 투사(project)하고,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매체는 그 쓰임에 따라서 내재화된 욕망을 인간에게 끊임없이, 그 자체로, 그것이 거기에 있고, 내가 거기에 접근할 수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인간에게 내사(introject)된다. 그러니까 욕망, 가령 이 욕망을, 저기 메간 폭스가 있다, 혹은 저기 현빈이 있다, 라고 예시해보자. 거기에 있는 욕망의 시각적 상징, 그것은 물론 성적인 접촉(touch)이라는 가장 본질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것인데, 저기 메간 폭스가 있고, 저기 현빈이 있다는 그것만으로도, 그것을 재현한 욕망의 시각화된 물질이 존재한다는 그것만으로도, 우리들의 욕망은 작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폰도 마찬가지이고, 트위터나 페이스북 따위의 총체적인 의미에서의 UI, 그리고 그 안에서 생산되는 '자율적인 의지를 갖는 인간의 대화'(라는 착각)도 마찬가지다.

2. 그러니까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변화는 점점 더 인간의 욕망을 투사하는 기계, 그리고 그 기계와 관계하는 인간의 욕망이 스스로에게 내사하는 상호 작용의 무한한 반복 패턴을 갖는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욕망은 파편화된 맥락들 속에서 즉각적인 동기들에 의해 조직된다. 지배적인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변화는 혁명의 피와 살이 아니라, 혁명의 자극적인 구호들에 최적화된다. 혁명은 파편화된 드라마가 된다. 물론 이것은 비유다.

3. 지배적 커뮤니케이션 매체의 변화는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신체적인 욕망(입/코/눈/귀/촉감)을 투사/실현할 수 있는 기제들을 보편적으로 확대하고 있는데, 그 욕망에 대한 성찰적 매개의 역할, 고전적인 인문학적 제어장치는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MB정권에서 역사와 사회를 '선택과목화'하는 거 같은 거. 혹은 <쉰들러의 명단>에 등장하는 이런 장면, 독일군인이 묻는다. "당신은 뭘 할 수 있지?" 초로의 유태인이 대답한다. "나는 역사교수요." 싸늘한 대답, "아무 짝에도 쓸모 없군." 인간을 망치나 낫(이건 소비에트에 대한 비유는 아니다)과 같은 '도구'로만 판단하는 독일군인처럼, 이제 지배적인 매체는 인간을 욕망으로 작동하는 기계, 혹은 기계/서비스 상품과 결합한 어떤 것으로 바라본다. 아주 거칠게 말하면, 그 결합된 욕망이 불러일으키는 경제적인 효과, 즉 지불 가능성(만)으로 판단한다. 그게 우리 시대의 소셜 네트워크적 비전이다.

4. 정치와 경제와 지식이 한몸으로 결합한 권력은 신체에 분리불가능한 방식으로 침투한 욕망을 그 시스템 자체로 만든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인간이 인간이라고 했던 명제들, 관념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방식으로 운동하고 있다. 푸코 투로 말하면, 인간이라는 발명된지 별로 안된 그 '개념'(말과 사물) 자체가 권력이 자기 발전적으로 만들어내는 욕망의 시스템에 의해 자기 자신이 지워진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채 지워지고 있다.

5. 화용론(話用論. 말하는 이, 듣는 이, 시간, 장소 따위로 구성되는 맥락과 관련하여 문장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려는 의미론의 한 분야)의 관점에서 보면, 트위터의 대화와 문장들, 그 언어들은, 좀 과장해서 표현하면, 체계적으로 분석 불가능한, 비유하면, 무너지는 거대한 건물 속에서, 거기가 보금자리라고 믿고 이런 저런 물건들로 자신의 방을 장식하는 부질없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늘 이렇게 부질없는 몸부림에 어떤 의미들을 부여하곤 하지만... 거기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아직, 잘 모르겠다.


* 발아점


어느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

2011/02/08 14:03
; 2011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어떤 죽음에 대해

이건 내 이야기다. 여기서 '내 이야기'라고 말하는 건 비유가 아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꼬라지를 보니 나도 언젠가는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다. 나는 정말 그런 생각을 한다. 이건 무슨 자기연민도 아니고, 그렇다고 배부른 동정도 아니다. 그냥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사회적 평균인으로서의 또 다른 자아는 나 자신에게 건조하게 속삭인다. 정신 차리지 않으면 저렇게 되는구나. 저렇게 비참하게 사회로부터, 시스템으로부터 처.단.당.하.는.구.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훌륭하다는 국립예술대학교를 졸업하고, 영화사로부터도 어느 정도는 능력을 인정받았던, 어느 젊은 시나리오 작가가 굶어 죽었다. 여기서 '굶주림'도 비유가 아니다. 그냥 현실 그 자체다. 이건 무슨 낭만적인 절망의 수사가 아니다. 그냥 현실이다. 그게 2011년 대한민국이다. 그 시대를 냉정하게 고발하는 죽음, 그 시대의 야만을 더없이 극명하게 상징하는 죽음. 용산의 죽음처럼, 노무현의 죽음처럼, 좀더 멀리는 박종철의 죽음처럼. 그런 시대의 죽음이다. 불타 죽고, 떨어져 죽고, 고문당해 죽는다. 그리고 이제 서글프게도, 굶어 죽는거다.

내가 죽음을 만날 때면 불어오는 문장이 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경건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김현) 죽음이 그저 슬프거나, 따뜻한 기억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산 자들의 부채가 되는 시대는 불행한 시대다. 우리 시대의 죽음은 산 자들의 부채가 되면서, 또, 무섭게도, 산자들의 공포가 된다. 그렇게 산 자들은 마음으로는 슬퍼하고, 때론 눈물 한방울 떨어뜨린다. 하지만 소름끼치도록 무섭게, 아, 정말 너무 너무 비정하게, 미친 주술사가 되어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나는 저렇게 죽지 않을거야, 저건 내 이야기가 아니야... 그렇게 그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고, 도망간다.

트위터에서 이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어떤 이는 이 죽음에 대해 "어떤 가난했던 한 영혼의 죽음에 복지 얘기하다가 결국 가카 욕하는 쌈마이들 다 언팔"이라고 선언한다. 나는 도무지 그 문장이 이해되지 않는다. 왜 가카를 욕하면 쌈마이가 되는건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언팔이 무슨 벼슬인양 선언하는 그 당당한 모습에 오히려 마음 한편에선 괜한 주눅이 든다. 왜 복지 이야기를 하다가 가카를 욕하면 안되는건데, 이 개새끼야, 주눅든 마음이 거친 입술을 불어온다. 왜 안되는건데... 왜...

'죽음에 대해 경건해야 한다'는 자명한 잠언은 죽음은 어떠한 경우에도 수단이 되어선 안된다고 말한다. '죽음은 모든 것을 허용한다'는 이 비정한 문장은 어떤 시대를 상징하는 죽음들, 그 죽음이 산자들의 정치적인 제의로, 굿으로, 춤판으로, 아수라장으로, 그 무대, 그 배우들의 소품이 되었던 역사를 늘 그렇게 확인해준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경건해야 하지만, 그 죽음을 우리의 굿판으로, 그 굿판의 제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역사의 비극이고, 상징으로서의 죽음이 갖는 비극이다. 그 죽음은 도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가난한 예술가의 죽음, 가난해서 굶어 죽은, 가난해서 치료받지 못한 채, 밀린 월세에 미안한 마음을 붙들고, 주인집 아주머니에게 "창피하지만 남는 밥이랑 김치 있으면 주세요"라고 문틈에 붙였던 그 쪽지, 그 쪽지를 써내려간 어느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그 절망의 시간과 공간이 우리 시대의 정체다. 그게 스티브 잡스 같은 인재를 키우겠다고 설레발 치는 위대한 대한민국의 정체다. 기본급 100만원으로는 이 조국에서 살기 어려워, 야근에 야근을 거듭해 하루 12시간 15시간 일하면서 우울증을 앓다가 투신하는 어느 노동자, 그런 초일류기업 삼성의 '가족'을 키우고, 또 죽이는 대한민국의 정체다.

이 죽음이 그저 소설이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문화적 상징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그저 현실 속에서 살아 숨쉬는, 삶 속에서 잉태하고 있는 죽음이라면, 그래서 그 죽음 뒤에 우리가 소설이나 영화에서 느낀 안도감처럼, 저런 상징적인 비극은 현실에선 있어선 안돼, 이렇게 안도하는게 아니라, 아, 현실이 영화였구나, 현실이 소설보다 더 끔찍하게 비극이었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다면, 그렇다면 나는, 우리는 "어떤 가난했던 한 영혼의 죽음에 복지 얘기"해야 한다. 그러다가 "결국 가카 욕하는 쌈마이들"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가카 이 개새끼야, 여기 사람이 죽었다, 이 개새끼들아, 여기 사람이 죽었다, 목이 찢어지게 욕지거리라도 해야 한다.

그렇게 그 죽음을 도구화함으로써 그 죽음을 경건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이 죽음을, 이 시대의 상징적인 죽음을, 예술가들이 맘껏 생명을 이야기하는 창작의 자궁으로 도구화시키고, 복지가 총선과 대선의 화두가 될 수 있도록 도구화시켜야 한다. 철저하게 이 두려움을 깨치고, 혼자서 굶어죽을 수 있다는 그 끔찍한 소외의 공포를 사회적인 상상력으로, 정치적인 상상력으로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그 죽음을 불러온 우리들의 야만, 그 끔찍한 실수들, 그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과 실천을 공동체의 가장 우선하는 의제로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이 생명을, 이 죽음을 가볍게 생각하는 그 온갖 기만적인 위정자들을 철저하게 심판해야 한다. 그건 이 빛나는 시궁창, 그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는 우리들이, 그 초라한 죽음을 경건하게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성 프란시스, 거룩한 사부여, 저를 위해 빌으소서.
성인께서는 주님께 다다르려 드리는 제 기도를 언제나 들어주시니,
제가 가난한 이들과 최대한 나눌 수 있도록 기도해 주소서.
그리하여 제가 굶는 만큼 다른 이들이 먹게 하시고,
그리하여 제가 고통당하는 만큼 다른 이들이 고통당하지 않게 하소서.
제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조롱을 당할 때라도
웃고 노래하게 하시며,
제가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미친놈, 바보, 재수 없는 놈이라 욕을 먹을 때라도
춤추며 즐기게 하소서.
아멘.”



지난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있었던 두리반의 (아마도) 가장 나이 어린 활동가인 경성수씨 인터뷰를 뒤늦게 편집했습니다. 원래는 그때 그때 편집해야 하는데, 이따금씩 두리반이 생각날 때, 아니 잊지 말아야지 문득 떠오를 때, 그때 편집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물론 게으름에 대한 핑계겠지만요. 나은냥의 두리반 한마디!(두리반 2.)도블로그에 소개하기로 해놓고 깜박했네요. 이건 나중에..;;;

아참! 오늘 저녁 7시 인권운동의 상징!(ㅎㅎ) 박래군 선생님께서 두리반에서 번개를 연다고 하시는데요. 두리반 이야기도 하고, 인권센터 이야기도 하는 정겨운 자리가 될 것 같습니다. 경수씨도 계시려나 모르겠네요. 아마도 계시겠죠? 저도 꼭 가고 싶었는데, 그래서 오늘은 가급적 일정을 잡지 않았는데, '인주찾기'에서 준비하고 있는 '표현의 자유' 워크샵 준비모임이 급하게 생겨버렸네요. 내일 수요일 최종 준비모임을 준비하기 위한 예비모임인데요(그러니까 준비준비모임..ㅡ.ㅡ;;), 두리반에 잠깐이라도 들렸다가 가고 싶은데, 약속 시각이 8시고, 장소가 교대라서 어렵지 않을까 싶네요... 이 글을 읽고 혹시라도 두리반에 한번쯤 가고 싶으셨던 독자, 블로거들이 계시면 한번 가보시면 좋겠어요.

오늘 10명 이상 모이면 박래군 선생님이 술 쏘신다고 합니다. : )

아무튼 경수씨께서 들려주는 두리반에 관한 짧지만 속 깊은 이야기.
더나은냥이 인터뷰했습니다.
(아, 나은냥은 오늘 두리반에 갑니다.)
 
촬영 : 아이폰4 . 편집 : 아이무비.
음악 : 아날로그소년의 '모여라!'인트로 부분 사용 (감솨~!)



* 인권센터 블로그
http://saram-fund.tistory.com/ 





이숙정 소동에 대한 소고

2011/02/08 00:15
이숙정(성남시의원)이 민주노동당을 '드디어'(?) 탈당했다.

이 소동을 묘사하는 언론들의 몇 가지 표현들.

1. 난동 (KBS, 한국경제)
2. 항의 (뉴시스)
3. 행패 물의 (아이뉴스)
4. 행패 (동아, 조선, MBC)
5. 폭행 (투데이코리아)
6. 소란 (파이낸셜뉴스)
7. 직원 행패 (프레시안)

일곱빛깔무지개.

이숙정이 민주노동당을 실질적으로 대표할만큼 비중 있는 정치인은 물론 아니겠으나, 그럼에도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시의원에 당선된 자가 이런 추태(나라면 제목으로 '추태'를 뽑을 것 같은데)를 부렸다는 점에선 일말의 관용도 낭비라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다만 이숙정이 민주노동당 정치인 전체의 경향을 대표하지 않고, 어떤 조직에나 있는 예외적인 미성숙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이 '추태'는 '소동'에 불과한 것이지, 조국 교수가 염려하는 것처럼 '진보정당 100만표 떨어져나간다' 운운할 만한 거리는 아니지 않나 판단한다(그런데 떨어져나갈 100만표라도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소동과 대비해서 한뭐시기당의 안뭐시기, 주뭐시기 등등은 그 조직의 '일정한 경향'을 반영하지 않나 싶다. 그런데도 잘 먹고 잘 산다. 참 뭐시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