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아점
109. 소셜시대, 블로그를 돌아본다 (Sadgag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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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말하는 팟캐스팅. Forget the Radio

새드개그맨의 팟캐스트를 듣고 생각나는대로 적어보는 '잡감'

0. 언젠가, 아주 오래 전, 아거의 글에서 처음 접한 매슬로(Maslow)라는 학자의 욕구 5단계설.
1) 가장 낮은 단계로서 생존 욕구, 2) 외부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고자하는 안전욕구, 3) 어딘가에 소속되어 안전과 애정을 충족하고자 하는 소속감 욕구, 4)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 자존심욕구, 5) 그리고 궁극적인 자아를  실현하고자 하는 존재욕구.


매슬로의 욕구위계설에 대해 나는 눈꼽만한 식견도 없고, 큰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가설들은 그 자체의 진실성이 중요하기도 하겠지만, 나로선 세상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관점을 부여한다는 것으로 족하다. 매슬로의 욕구 위계설은 웹을 둘러싼 거대한 전쟁, 그 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전투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1. 평평한 대지, 웹의 탄생
내가 가장 좋아하는 웹에 대한 비유는 '평평한 대지'다. 이 표현이 관용적으로 널리 쓰였었는지도 난 잘 모른다. 암튼 팀 버너스-리가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에서 고안한 아이디어는 정보 교환과 접근성, 그리고 연결성인데, <월드 와이드 웹>(한국경제신문, 2001. 원제 :  Weaving the Web)에서 팀 버너스-리는 이렇게 말한다.
컴퓨터는 도식적인 계층구조와 행렬로 짜인 정보는 대체로 잘 관리하지만, 인간정신은 어떤 데이터 조작이라도 연관시킬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때로 쓰고도 강렬한 커피 향을 맡으면 옥스퍼드 시절 커피 가게 건너편의 작은 방에서 공부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나의 뇌가 연관작용을 일으켜, 순간적으로 나를 그때 그곳으로 데려다 주는 것이다. (22)

198년 나는 제네바에 있는 저명한 유럽입자물리학연구소인 CERN에서 단기 소프트웨어 컨설팅 작업을 맡게 되었다. (.... ) 나는 이렇게 생각해보았다. 컴퓨터가 어디에 있든 그 곳에 저장된 모든 정보를 연결시킬 방법이 없을까. 또 무엇이든 서로 연결되는 공간을 내 컴퓨터에 마련할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할 수는 없을까. 이것만 실현되면 CERN과 지구상의 컴퓨터 하나하나가 담고 있는 모든 정보를 누구라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 규모의 단일한 정보공간이 생겨나는 셈이다. (23)

앞 문장이 인간정신이 갖는 특이성, 즉, 연상할 수 있는 능력, 하나의 정보가 다른 정보들로 연결되어 퍼져나가고, 다시 그 정보들은 다른 정보들로 연결되는 속성을 지적한 것이라면, 뒤에 있는 문장은 그런 인간정신의 특이성을 컴퓨터로 구현해보자는 원대한 포부를 표현해주고 있다.

2. 웹은 어디로 가는가
현대 가장 대중적인 인터넷인 월드 와이드 웹은 인간정신의 특이성을 컴퓨터와 컴퓨터의 연결된 네트워크로 구현하고자 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원래 인터넷은 핵 전쟁 위협이 상존하던 냉전시대의 산물이다. 미국 국방성이 주도한 최초 인터넷 프로젝트인 '알파넷(ARPANET)'은 소련의 핵미사일 공격에도 견딜 수 있는 테이터베이스 구축이 목적이었다.

소박한 문외한의 입장에서 거칠게 서술하면, 냉전의 산물인 국사적 목적의 인터넷은 팀 버너스-리를 만나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형식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 웹은 20세기 말, 21세기 초 전혀 새로운 산업과 문화, 제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 눈부신 변혁의 과정에서 PC를 사유화한 MS의 극악한 정책(특히 웹 브라우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윈도우즈에 끼워파는 행태. 이로 인해 초기 웹브라우저의 강자였던 넷스케이프는 몰락하고, 넷스케이프의 유산은 모질라 재단으로 흡수된다. 그리고 모질라에서 파이어폭스(FF)라는 오픈소스에 기반한 브라우저를 만들어내기에 이른다)이 있었고, 이를 촘스키는 맹렬하게 비난한다.

IT저술가 팀 오라일리라는 20세기 말 '닷컴 버블'로 붕괴된 IT산업, 그 지옥에서 살아남은 새로운 기업군의 비즈니스 속성, 매커니즘을 추출해 '웹 2.0'이라는 매력적인 신조어로 만들어 퍼뜨리는게 크게 공헌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태어난 블로그는 웹 2.0의 총아로 위키백과의 성공과 함께 널리 회자된다. 그리고 트위터가 생겨나고, 페이스북이 생겨난다. 팀 버너스-리는 페이스북이 닫힌 성을 쌓고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기에 이른다.... 어째 글이 좀 산으로 가는 기분도 들고, 이런 표피적 약사가 무슨 의밀까 싶기도 해서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자. 그 이야기는 물론 내 이야기고, 나를 둘러싼 우리들의 이야기일테다.

3. 웹 2.0 혹은 집단지성 삥뜯기
대부분의 서비스들은 집단지성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내세워 집단지성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그 참여자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채로 삥듣기할 수 있는지에 몰두한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서비스 제공자는 '집단지성' '웹2.0' '참여, 개방, 공유'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폼나게 포장해서 좋고, 사용자들은 그 안에서 열심히 자신의 지적 노고를 삥뜯기더라도 그 반대급부로서 보람과 즐거움을 누리면 족하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하지만 말이 갖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집단지성'은 이렇듯 마케팅 표어에 불과한 것이었음이 판명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한국형 집단지성 '지식IN'을 보라. 정보 제공자들이 얻은 건 약간의 보람이고, 네이버가 얻은 건 막대한 이윤이다. 위키백과와 같은 기념비적인 성과를 제외하고, 웹2.0의 집단지성이 어떤 성취와 지속을 이끌어냈는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여기엔 블로그의 우울한 운명이 함께 하고 있다.

4. 트위터, 페이스북, 그리고 블로그 : 해방구 혹은 식민지
새드개그맨의 이야기처럼 모바일과 결합한 SNS은 새로운 시대를 반영한다. 그것은 PC에 기반한 상대적인 장문 텍스트 중심의 콘텐츠 생산 시스템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같다. 그럼에도 껍데기 웹 2.0이라고 하더라도 블로그의 짧은 전성기 동안 우리는 웹이 우리의 해방구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해방구가 새로운 유행과 새로운 상업세력에 그 빛을 잃어, 우리들의 또 다른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한다.

물론 과장이다. 세상을 이런 양극단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일은 대단히 편리한 일이긴 하지만, 그만큼 무의미하다. 그 편향은 독선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독선과 편향이 어쩌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식자층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기득권은 이미 자신의 확고한 성을 쌓았다. 오프라인은 그들의 것이다. 그리고 온라인은 이제 새로운, 전혀 새로운 '수동성'을 많은 시민들에게 학습시킨다. 페이스북과 트위터의 규격화된 '틀' 속에서, MB시대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효율성과 속도, 그리고 나 좀 알아달라는 '인정욕구'의 화신이 되어 우리는 웹이라는 평평한 대지를 여행하며 꿈꿨던 그 모든 꿈, 스스로가 스스로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유의지를 잃어간다.

우리를 둘러싼 서비스들, 모바일과 SNS은 우리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의 세계로 이끌어준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회로들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자유의지를 박탈당한다. 무엇인가에 항상 노출되고, 이끌린 채 나도 뭔가 보여줘야 할 것은 강박이 서서히 우리를 파고든다. 그 안에서 열심히 열심히 세상 소식들을 퍼나르고, 140자 혁명 선언문이라도 낭독하듯 비장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명품 사진을 올리며 된장질도 하고, 페이스북 어플을 통해 실시간으로 세상의 풍경을 찍어 전송한다. 하지만 그 보이지 않는 회로들, 운동의 매커니즘은 내가 나를 결정하는 행위의 가능성을 높여주기 보다는 그 '틀'과 '회로' 속에서 내가 마치 능동적으로 이 소비사회의 최첨단, 이 커뮤니케이션이 최첨단을 구현하고 있다는 착시적 포만감을 안겨즐 뿐이다. 거기에 있는 건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은 소비하면서 생산하는 자가 아니라, 소비를 위해 생산하는 자가 된다. 그게 지적인 콘텐츠 상품이든, 물적 상품이든 마찬가지다. SNS은 궁극적으로 개별화된 이야기가 배제된 커뮤니케이션을 추구하고, 그것을 구조화해서 소비성향의 완전한 알고리즘을 파악하는 걸 목적으로 삼는 것 같다. 이제 개성은 상품 선택에 의해 '부여'되고, 그렇게 이식된 착시효과로서의 개성이 세상을 채우며, 우리는 다시 개성있는 실존으로 스스로 착각하는 마케팅 타켓이 된다. 우린 다시 숫자로 수렴하고, 평균화하며, 객체화된다.  

* 추.
뭔가 급 엉터리로 마무리...;;;
어차피 잡감이니까, 뭐. 지금 공개하지 않으면 또 몇 달은 묵히다가 까먹을 것 같아서 그냥 공개.  

* 또 다른 발아점
새드개그맨의 팟캐스트도 그렇고, 이 글도 그렇고, 인터넷 주인찾기 세 번째 컨퍼런스 '소셜 시대, 블로그의 재발견'이 그 발아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인주찾기(인터넷주인찾기) 동인이다.

그게 내 자부심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내 자부심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인주찾기 동인들은 블로거라는 정체성으로 만났다. 당신과 나는 평등하고, 당신과 나는 이 세상이 잘못됐다고 생각해. 당신과 나는 그 세상을 우리 방식으로 변화시키고 싶어. 그것으로 족했다. 어떤 말할 수 없음에 대한 말하고 싶음의 열망, 그걸로 만났다. 다른 사정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세 번째 컨퍼런스를 준비하면서 숱하게 토론하고, 대화했다. 이메일 글타래의 그 긴 레일들, 마치 기차를 타고 먼 바다로 가는 그런 기분이 들기도 하더라. 물론 준비가 항상 즐거울 순 없다. 준비과정 자체는 때론 아주 지루한 마라톤 같은 느낌도 든다. 어느 것 하나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 막연하고, 불안한 미로를 헤메는 그런 느낌... 특히 이번 컨퍼런스 준비는 더 그랬다. 원래는 포털을 원없이 한번 까보자, 그랬었다. 웹의 포식자. '웹 갈라파고스'라는 대한민국 인터넷 별칭을 안겨준 포털(과 이와 연계된 각종의 억압적 제도들)에 대해 한번 짚고 넘어가자, 그렇게 준비모임을 시작했다. 하지만 흘러 흘러 'SNS와 블로그'로 귀결됐다. 우리도 유행(ㅎㅎ)에서 자유로울 순 없으니까. 불만은 없다. 어차피 결국 하고 싶은 이야기는 블로그였으니까. 아니 블로그로 상징되는 어떤 자유, 어떤 소박한 저항, 아니 어떤 상식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이었으니까. 그걸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라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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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을 통한 논의 : )
익명성을 위해(대외적으로 인주동인임을 공표한 경우를 빼고) 일부 모자이크 처리 ^ ^;
이메일을 통해 주로 논의하고, 주요 안건이 생기면 오프라인(주로 정동 비스.BIS)에서 모여 회의한다.

인주찾기에선 어떻게 논의가 진행되는지 궁금해하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없어도 쓸거다. 동인들은 누구나 평등하게 논의에 참여할 기회를 얻는다. 그래서? 논의에 참여하면 된다. 누구 하나 발언권이 더 두텁게 보호되거나 더 커다란 권한을 얻거나, 그런 건 없다. 물론 아무리 평등한 조직이라도 자연스럽게 암묵적인 리더 그룹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더불어 눈팅 멤버가 생겨나고, 동인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멤버들이 생겨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언제든지 열정만 있다면 참여할 수 있다. 나는 그게 좋다. 싫으면 안하면 되고, 좋으면 참여하면 된다. 불만 있으면 말하고, 토론하면 되고, 부족한 건 나누면 된다. 그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상호 신뢰가 쌓인다. 그게 인주찾기 동인으로서 내가 갖는 자부심의 요체다.

나이가 어리거나 혹은 나처럼 돈이 없거나 또 나처럼 지식이 다소 부족해도 얼마든지 우리는 동인으로 만나 상의하고, 또 일을 함께 준비한다. 내가 주로 모임을 꾸리고, 회의를 정리하는 '잡일'(써머즈님은 중요한 일, 나는 잡일)을 담당하는데, 그런 나를 위해 인주 동인들은 활동비(?!)까지 자발적으로 내더라. 금액이 중요한게 아니라 그런 마음이, 그런 자연스런(??) 움직임이 생겨났다는 게 참 훈훈하고 좋다. 물론 "돈만 아는 저질" 사회에서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시간 뺏겨, 무슨 대단한 영광이 생기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무슨 돈이 나오길 해, 그런데 자기 시간 뺏기면서, 자기 돈까지 써가면서 이런 '이상한' 모임에 계속 참석하고, 계획을 세우며, 이야기를 나눈다. MB 시대 기준으로 보면 뭔가 이상한 집단인게 확실하다.

언젠가 써머즈님과 맥주를 마시면서 소개받은 인상적인 TED 발제 영상이 있다. Derek Sivers란 마음씨 좋게 생긴 아저씨(이 사람 뭐하는 사람인지 난 모른다)가 발표한 'How to start a movement'란 발제 영상이다. 한 남자가 동산에서 미친 듯 막춤을 춘다. 친구인지 누군지 모를 사람이 그 미친 막춤을 따라 춘다. 미친 놈이라고 비웃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함께 춤춘다. 그리고 그 사람이 셋이 되고, 넷, 다섯이 되고, 열이 되고, 스물이 된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 대열에 빠지지 않기 위해 달려오기 시작한다. 그렇게 사회운동이 시작된다.

자막단추(실행단추 옆 '50 languages')에 한국어 설정하면 친절한 자막이 나온다.


앞서 약간 과장했지만, 인주찾기 동인들은 무슨 대단한 사명감으로 모인 투지에 넘치는 투사들은 아니다. 나만 빼고는 모두들 바쁘고, 일에 치여 인주찾기 회의에 참석할 시간 내기도 빠듯한, 그런 평범한 직장인들이다. 하지만 "돈만 아는 저질"(야마가타 트윅스터)이 판치는 MB 시대의 관점으로 보면 인주찾기 동인들은 약간 이상한 사람들인 건 맞다. 우리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걸 믿는다(돈이 안 중요하다는게 아니라 덜 중요하다는 거다. ㅎㅎ) . 그 미친 사람들이 미친 짓을 할 때, 그런데 그 미친 짓이 '등신 같지만 (약간은) 멋질 때' 그들과 함께 미친 짓을 하는 사람들, 두 번째로 춤추는 그런 사람들이 정말 필요하다.

나는 당신이 두 번째로 춤추는 사람이길 원한다.
위 링크 한방 시원하게 눌러보자!
위 링크 공간은 임시거처다. XE, 이놈! ㅜ.ㅜ;


추.
1. 지금 인주찾기 동인으로 활동하는 멤버들 가운데는 관객(이걸 바꿀 다른 용어가 있으면 참 좋을텐데... 나는 이 용어가 참 싫다)으로 참여한 분들도 참 많다. : )
2. 루습히님께선 "인주찾기"가 "주인찾기"의 오타가 아니냐는 재밌는 질문을 주셨는데, 아항!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주인과 객이 전도된 한국 인터넷 생태계에서 '인주'가 '주인'을 찾는다니 그것도 묘한 느낌.
2. 원래는 "인주찾기 컨퍼런스에서 만나고 싶은 블로거" 정도로 글을 써야 하는데, 내일이나 모레 써야겠다. 앞으로 일주일간은 인주찾기 컨퍼런스 관련글을 매일 하나씩 쓰는 걸 목적으로!!




길 혹은 벽 : 블로그와 페이스북

2011/06/14 04:44
길은 이야기다
나는 길이 속삭이는 영겁의 시간 속으로 들어 간다
길은 길과 연애하고 길과 애무하며 길을 낳는다
길과 길은 쌍둥이, 부모고 친구며 형제다
길은 전부 품어 안는다
모든 것을 이어주고 그들 속으로 흐른다

그러던 어느날 벽이 만들어졌다
벽은 묻는다
너는 나의 신민인가?
우리는 벽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발적으로 벽의 신민이 된다
벽 안의 사람들은 다시 묻는다
너는 나를 쫒는가?
그를 쫒아야만 이야기할 수 있다
관계는 숫자가 되고, 수많은 정겨운 오솔길들은 결국 미로가 된다
벽 밖의 길은 폐허가 되고
벽 안의 길은 낭떨어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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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의 기술 / De schilderijen van / Art of Conversation, 1950 (65 x 81 cm)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1898 -1967)
(관련 추천글 : 1987년과 기억투쟁)

* 며칠 전, 한참 길을 걷다가 골목들로 들어가기도 하고, 괜히 아는 길도 돌아서 가고 그랬는데, 그러다가 괜한 감상에 빠져서 아이폰 메모장에 쓴 단상. 쓸 땐 뭔가 있어보였는데, 왜냐면 한참 걸어서 피곤한 듯 몽롱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쓰고 나니 초등학교 백일장 같은 느낌이랄까....;;;  







페이스북 서버에서 자라는 혁명

2011/06/13 17:45
- 에브게니 모로조프(Evgeny Morozov), 월스트리트저널 2011년 2월 19일
- 번역 : zninldn 블로그, 트위터 아이디 @ntolls

0. 이집트 민중봉기과 SNS에 관한 칼럼. 모로조프의 "(소셜미디어에 대한 독재적 국가권력의) 역이용 가능성"은 말콤 그래드웰의 회의론(소위 '혁명은 트윗될 수 없다.')과는 다른 지점에서 SNS와 튜니지, 이집트 시민봉기의 관계를 바라보는 의미있는 관점들 중 하나인 것 같다.(아거의 트윗).

1. 모로조프의 글은 소셜미디어, 특히 페이스북과 트위터에 대한 낭만적 혁명의 기대감을 국가 대 시민사회간 실질적인 권력 역학, 국가권력이 활용가능한 자원과 전략 등을 예시하면서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이하 생각나는대로의 단상들.

2. 우리나라 상황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네이버와 다음, 그리고 네이트가 지배하는 웹 구조 하에서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혁명, 사회적 개혁의 근거지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아주 거칠지만 도식적인 질문도 가능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말이 되는 질문인지 아니면 억지스런 끼워맞추기인지, 쓰면서도 갸우뚱하다. 주신부님 자주 쓰는 표현처럼, 지금 내가 쓰는 글이란게 그저 '잡감'이니 계속 생각나는대로 써보자.

국내 포털은 이미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혹은 방통위법, 그것도 아니면 저작권법, 형법, 하다못해 전기통신법의 그런 조항이 다 있어? 하는 그 온갖 제도적 족쇄들로 저항의 잠재력을 '무장 해제' 당한지 오래다. 그게 밖에 있는 제도라면, 안에 있는 시스템 얼개는 어떤가? 일말의 체제 저항적 시도들, 그 전복적 감수성은 '실시간 인기 검색어'에 완벽하게 무력화되고, 달콤한 순응형이 된다. 네이버 블로그나 다음 카페에서 혁명의 감수성이 자라날 가능성? 소녀시대가 콘서트에서 '철의 노동자'를 부를 가능성이 차라리 높겠다.

2-1. 트위터.
그럼 트위터는? 페북은 잘 모르겠고(나는 이 서비스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트위터는 글쎄, 적어도 체험적으로 트위터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아주 지엽적인 차원에서의 시민운동 혹은 사회운동은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지속적인 체제 변혁의 동력으로 트위터가 기능할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나 싶다. 트위터의 잡담들이 혁명에 관한 일반 민중의 감수성을 일깨울 가능성? 무슨 그런 농담을...

거칠게나마 일단 표현하면, 트위터의 압도적 노이즈는 포털의 '실시간 인기 검색어' 역할을 한다. 그리고 그 노이즈가 그 나름으로 대단히 의미있는 정서적인 '농담' '잡담'이더라도 하나의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변혁이나 혁명의 가능성은, 뭐랄까, 그런 혁명, 변혁, 반항까지를 '잡담화'한달까, 그런 느낌이 든다. 혁명이 농담으로 가능할 수 있다면, 고압적인 선동이나, 피를 끓게 하는 공포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 그 극한의 감정들이 아니라, 시트콤의 감수성으로, 때론 멜러드라마의 감수성으로 가능하다고 한다면, 그 혁명은 정말 근본적으로 새로운 혁명이긴 하겠다. 하지만 글쎄.... 트위터를 체제 순응적인 기제라고 단정하는 것도 웃기지만, 트위터를 체제 변혁 도구라고 말하는 것도 과하다. 그렇다고 트위터가 가진 긍정적 속성, 가능성, 이런 걸 무시하는 건 아니다. 트위터는 그냥 트위터다. 있으면 덜 심심하지만, 없어도 크게 아쉬울 것 같진 않다. 이런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까, 열심히 트윗하는 당신! 열심히 트윗하는 만큼 비판적 사회의식, 도전적 인식들이 당신 안에 스며들고 있는 것 같습니까? 나는 전혀 아닌데, 그렇다고 할 사람 많다면, 나는 아주 환영이다. 아주 아주 환영!

3. 뭔가 석연찮은 부분이 있는데, 생각나는대로 나열하면 이렇다. 기본적으로 튀니지나 이집트 사례를 소셜미디어 혁명으로 이야기하는 관점을 나는 다소 비판적으로 바라보는데, 그건 마치 프랑스 혁명이 마리 앙트와네트를 소재로 한 포르노그래피를 통해서 이뤄졌다는 주장 만큼 과장이라고 생각해서다. 그렇다고 그 의미를 폄하할 생각은 없다.

거대 IT 기업의 서비스를 인터넷으로 동일시하는 관점은 좀 아쉽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네티즌들에게 네이버나 다음이 인터넷 그 자체이듯, 이제는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마치 인터넷 그 자체인 것 같다. 미국의 거대 소셜미디어 서비스가 인적 구심점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다는 모로조프의 '현실론'은 당연히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그런 거대 서비스를 중심으로 소위 '거기의 혁명'을 서구/미국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객체화시키는 관점은, 뭐랄까, 철저하게 오리엔탈리즘 관점에 서 있는 느낌이다.

6. 웹은 이제 '독립적 개체들의 분산화된 네트워크의 총합'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서비스 안에서 이뤄지는 '약관에 동의한 서비스 회원의 총합'인 것 같다. 이집트의 민중봉기, 그 시민혁명에 대해 말하면, 본질적인 관점에서 민중의 오랜 고통 속에서 혁명은 발아하고, 그렇게 싹 틔어진 혁명은 '사건'(상징)을 만나 폭발한다. 여기서 그 기폭제 혹은 촉진제 역할을 소셜미디어가 했다거나 혹은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나는 거부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혁명이 거대 기업의 서버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라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을 혁명의 인큐베이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거가 지적한 것처럼 당대의 정치적 변혁을 상징하는 미디어들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것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관점, 시민들의 혁명적 잠재력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미국의 특정 기업의 토양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는 대단히 낭만적이고, 위험을 잠재한, 결국은 현실에 순응하는 패배적 관점이다.

구글이 중국검열 정책에 굴복했던 것처럼 페이스북이 이집트 정부에 굴복했더라면?(물론 이집트는 중국처럼 큰 시장이 아니지만) 모로조프의 지적처럼 이집트 정부가 "인터넷을 잘 알기 때문에" 이에 대한 효과적인 억압 전략을 가져갔다면? 자명한 사실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는 독재권력 타도하는 시민혁명을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시장의 현실적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처음엔 버티는 척(?) 하다 결국 방통위에 우호적인 메시지를 보낸 페이스북 처럼, 기업은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듯 혁명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이 고답적인 명제가 깨지길 누구보다 원한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 이제 기업이 아닌 세력은 그 존재 자체가 티끌처럼 미미해져가고 있으니까.

까지 썼다가 다시 이어서... 유지하지 않고 갱신할 예정.

49. 최근 신비와의 대화에서도 잠깐 썼지만, 나는 김여진씨나 날라리 외부세력, 아주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런 움직임들이 아주 아주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해. 하지만 여전히 그 멋진 움직임들을 나는 '구경'한다. 나는 관객이 다. 내가 수줍음이 많아서 그럴수도 있고, 내 자폐적인 선입견이 강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관객이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은 걸.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이 되기 보다는 블로거들 속에서 블로거들의 정다운 이웃, 민노씨가 되고 싶고, 인터넷 주인찾기라는 모임에서 민노씨를 하고 싶다.

625. 인터넷 주인찾기가 세 번째 컨퍼런스를 연다. 홈페이지는 바이러스로 마비 상태고, 발제안은 회의에 회의를 장장 3주 동안 거듭했음에도 여전히 미완이다. 타이틀도 정해진 바 없다. 오늘 오프라인 회의를 통해 급한 것들을 결정해야 한다. 이게 정말 '인터넷 주인'을 되찾기 위한 작지만 위대한 걸음인지, 아니면 컨퍼런스를 해야 하니까 하는건지 헷갈릴 지경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놀랄만큼 복잡한 테이터들이, 마치 진화된 유기물처럼, 거대하게 살아 숨쉬는 페이스북 서버의 질서정연한 코드들, 그 거대한 제국의 심장보다 바이러스로 마비된 인주찾기 서버의 엉켜진 코드, 그 안에서 내는 생채기들 속에 우리의 작은 혁명은 그 씨앗들을 뿌리 내리고 있다고. 이것이 초라하고 순진한 감상주의에 불과할지라도 우리는 누군가 걸어야 하는 이 '등신 같지만 멋진' 일을 함께 해내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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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현실창조공간이 아니라 민노씨.네..;;;



* 관련글
당신에게 블로그는 무엇이었나요? 에 묶으려다가 따로 공개.
반쯤 닫힌 웹의 월드 가든에서 아이폰 들고 블로깅 하기 여기 썼던 내용의 중언부언 같기도 하고..;;;




신비와의 대화 2 : 친구와 관객

2011/06/11 06:44
* 관련글 : 신비와의 대화 : 감성의 발견, 혹은 시민운동의 미래 

신비님, 안식년이셔서 그런지 블로깅이 더 활발해지신 듯. : )
신비님 글 댓글창에서 있었던 짧은 대화 옮김.
* 일시 : 2011. 6. 11. 새벽
* 장소 : 각자의 집. 신비의 글 댓글창.

민노씨 : 테드 동영상은 처음에는 잠깐 보고 끊어야지(라는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궁금해서 끝까지 봤네요. 보면서 '촛불 문제' 같은 경우엔 뭔 소리인지 직관적으로 와닿지 않았는데, 다 보고 나서도 그 '촛불문제'는 뚜렷한 이미지를 남기지는 못하네요.

미국적 상황에선 '외적 인센티브'가 '내심의 동기'(자율성)보다 열등한(?) 효율성을 낼 수도 있겠다 싶은데, 우리나라에서도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것인지, 발제자는 40년 이상 사회과학의 검증으로 통해서 그 효율성의 격차가 증명되었다고 하지만, 뭐랄까 아주 다양한 조건과 변수들을 고려해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그럼에도 신비님께서 강조하시는 취지에 대해선 충분히 공감합니다. 다만 저로선 그 동기가 외적 인센티브냐 자율적인 내심의 자발성이냐, 이 두 가지의 조건은 양자택일이라기 보다는 좀더 복잡한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여진과 날라리 외부세력, 아주 멋지지만, 뭐랄까 김여진이라는 상징에 기대어야 하는 측면, 어떤 영웅적 전범(상징)이 굳이 '날라리 외부세력'을 대표로서 표상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선 약간 생각이 복잡해지네요.

신비 : 촛불 문제는, 조금 헷갈릴 수 있게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긴 해요. 두가지 실험결과가 나오는데, 한 그룹에겐 단순히 문제를 푸는 평균시간을 재겠다고 하고 다른 그룹에겐 빨리 푸는 이에게 금전적 보상을 하겠다고 한 것은 동일해요. 차이는 문제의 난이도에 있었어요. 첫번째 실험. 압정이 가득 담긴 상자가 놓여있을때는 한눈에 그 상자를 활용하겠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죠. 고정관념을 깨고 시야를 넓히려면 시간이 필요한데, 금전적 보상이라는 인센티브가 제시된 그룹은 인센티브에 대한 기대 때문에 오히려 시야가 좁아져서 문제를 푸는 데에 더 오래 걸렸구요. 두번째 실험은 상자가 비어있으니 곧바로 상자를 도구로 인식할 수 있어 문제풀이가 훨씬 간단한 상황이에요. 이처럼 문제가 단순해졌을때는 금전적 보상의 인센티브가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이구요.

이것이 전하는 인사이트는 인센티브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일에 한해서 가능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인센티브가 오히려 장애가 되며, 문제 해결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자극될 때,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때 더욱 창조적이며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일거에요.

미국적 상황에 대해서는 저와는 반대로 느끼셨네요. 저는 기브 앤 테이크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자본주의/소비주의가 심화된 미국에서 내적 동기가 힘을 발휘하는 결과를 얻는 게 더 어려운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우리 사회에선 어떤 변수들이 영향을 끼치게 될지는 더 이야기해보면 좋을 듯 해요. 한국 사회는 관계와 인정에 좌우되는 경향이 더 큰 편이니 내적 동기가 자극되기 더 쉽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미 한국도 소비주의에 찌들어서 안돼! 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민노씨 : "인센티브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매우 단순한 일에 한해서 가능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인센티브가 오히려 장애가 되며, 문제 해결 자체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자극될 때,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할때 더욱 창조적이며 효과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이렇게 정리해주시니 좀더 구체적으로 다가오기는 합니다. : )

한국 상황이라고 함은 말씀해주신 미국 상황(기브 앤 테이크 문화)이 여전히 문화 그 자체로는 흡수되지 않은 사회랄까, 특히 저나 신비님이나 함께 고민을 공유하는 '시민운동'의 영역 내에선 미국식 '계약 문화'랄까, 기브 앤 테이크 문화랄까, 그런게 거의 없지 않나요? 기브 앤 테이크는 '소비주의'와 연계하는 문제라기 보다는 '계약법' '계약문화'와 연계하는 것 같아요. 일정한 조건으로 계약을 맺을 때 생기는 권리의무 관계가 여전히 우리나라에선 대단히 모호하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시민운동의 영역에선 특히요).

물론 이것은 제 지극히 제한적인 체험에 바탕한 이야기인데, 가령 그저께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 심포지엄 토론회만 해도, 이런 자리인줄 알았으면 안갔을 거에요. 6시부터 있는 후원행사를 위한 사전 요식행위에 가깝다는 점은 차지하고, 제 시간과 노고를 빌려주는 자리인데 이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 점은 무척 아쉽습니다. ㄱ. 저는 자리 그 자체가 주는 기회가 굉장히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 참석비(?)는 크게 고려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시민단체들에서 시간을 빌려달라는 자리에선 주면 좋고, 안줘도 이해하는 편이죠. 그런데 이에 대한 설명이 아예 없는 건 아쉽더라고요. ㄴ. 발제/토론회에 참여하신 분들 또 준비하신 분들께서 얼마나 고생하셨을까는 별론으로, 그 행사 자체는 정말 이렇게까지 건성으로 할 거면 왜하나...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더만요. 저로선 오히려 준우씨와 함께 한 뒷풀이 시간(연대회의와는 전혀 상관없는)이 없었다면 정말 시간낭비했구나 하는 마음만 들었을 자리였어요. 그 뒷풀이 자리에서 환경정의 연재씨, 진희씨와 주로 이야기를 했는데, 그 대화가 토론회의 대화보다 훨씬 더 재밌고, 의미있었죠. '인주찾기'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자리였는데요.

결론적으로 다시 말하면 한국 상황과 미국 상황의 차이를 논함에 있어서 주된 상수와 변수는 '계약'(기브 앤 테이크)에 관한 관념과 관습, 그리고 어떻게 그 계약 참여자로 하여금 확실하게 '테이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을까가 아닐까 싶습니다. 미국식 참여란 그 계약 관계에서 출발하면, 그 테이크의 질과 양이 확장할 수 있는 유인책이 다만 물질은 아니고, 거기에 '더해서' 자율성과 자기만족, 자유 등등이라는 이야기인데, 우린 아직 '기브'만 강조하는 문화이지 않나 싶은 거죠.

신비 : 김여진 님의 존재가 말씀하신 '영웅적 전범' 또는 '상징'으로 역할을 한다는데에 대해서는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 효과의 내용은 다르다고 봐요. 포인트가 위대한, 유명한, 특별한 어떤 사람에 있다기보다는 그를 통해 경험하게 되는 인간적 매력, 재미에 있는 것 같아요. 사회적이고 공익적인 성격을 띠는 팬덤이랄까요. 그는 김여진이어도 되고, 조국이어도 되고, 고은태여도 되고, 민노씨여도 되는 거지요. 그 매력이 계기가 되고, 계기를 통해 스스로 경험하고 느끼는 부분이 커지고 나면 애초의 계기가 더이상 그렇게 중요한 요인으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아요. 실제 날라리 외부세력에 참여하는 분들이 김여진 님을 자신들을 표상하는 대표로 생각하는지 어떤지 확인해볼 수도 있겠죠.

+ 하나 찾았는데, 홍대 청소노동자 지지 바자회 기획에 참여했던 분이 썼다는 후기를 보면 김여진 개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없어요. http://kimyeojin.tistory.com/27 ... 덧글에는 무지 많이 보입니다만.. :)


민노씨 : 마침 새벽에 일어나서 답글 쓰고 있었는데, 신비님께서도 깨어계신가 봅니다. : )

저는 상징은 대해선 아주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게 사람인 경우엔 생각이 좀 복잡해지죠. 어떤 시스템 자체, 어떤 운동의 경향성 자체에 상징성이 부여되고, 그 구체적인 운동(방식)이 다양한 상징의 자양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새로운 상징으로서 그 운동 안에서 전범적 인간형이 다양하게 태어나는 경우라면 아주 좋겠지만, 기성 상징(유명인? 이름값?)이 이입(이식)되는 경우는 위험성도 없지 않아 보입니다. 그게 단순히 나쁜다, 피해야한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고, 그런 상징인들이 갖게 되는 운동의 피동성에 관한 문제인데, 이게 솔직히 제 관념적인 추론에 불과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김여진씨에 대해선 아주 호감을 갖고 있지만, 조국에 대해선 비교적 실망감이 누적되고 있고, 그 밖에 문성근씨나 기타등등(김제동, 정혜신 등등)에 대해선 그 역할을 아주 긍정하고, '관객'으로서 지지하는 입장이긴 하지만, 그들의 어떤 액션에 적극적인 '동지/친구'로서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아요. 제가 의심이 많아서 혹은 삐뚤어진 인간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겠지만요...ㅎㅎ(슬프지만 진실)

아 지금 막 괜찮은 비유가 생각났는데, '친구'로서의 전범과 '관객'으로서의 전범은 확실히 다르지 않을까요? 김여진씨나 김제동씨나 조국씨나 암튼 그 유사의 경우에들에 있어서는 시민들이 여전히 '관객'으로서 스스로를 피동적인 위치로 포지셔닝하는, 자신을 '관객'으로 한정하고 (바라보는) 전범들에 훨씬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함께 하면서 생겨나는 '친구'로서의 전범들이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처음 생각했을 땐 괜찮은 비유인줄 알았는데, 써놓고 보니 다소 모호하네요. (+) 물론 김여진은 조국이나 문성근 등과 비교하면 훨씬 더 '친구'로서의 전범에 가깝기는 하겠네요.

곰탱(박준우) : 그 '친구' 이야기.. 언제 한 번 정리하려고 했는데 민노씨가 말을 꺼내주셨네요. 소위 386이 주도하던, 시민운동이 잘 나가던 시기에, 시민운동의 동력이 되어준 '회원'들, 그리고 시민들(특히 젊은 화이트칼라들)은 대개 활동가들의 (문자 그대로) '친구'들이었죠. 이미 동질감을 느끼고 있고 공감하는 친구가 던지는 메시지는 비록 그 방식이나 내용이 권위적이거나 배제적이거나 폐쇄적이거나 엘리트주의적이거나 하더라도 큰 문제가 안 되었던 거죠.

그러나 그 이후 세대로 넘어오면서, 활동가들의 '친구'의 범위는 대단히 협소해졌고 '회원'들은 (민노씨 표현을 빌면) 좀 더 '관객'의 위치로 이동하게 되죠. 관객의 입장에서는 메시지를 던지는 메신저가 매우 매력적이어야 하는데.. 그러나 기존 운동사회의 활동가들은 별로 매력적이지 않고.. 심지어 이런저런 사고도 터지고.. 그런 상황에서 훨씬 매력적인 메신저들이 나타난다면 관객들은 그 메신저들과의 소통을 더 선호하게 되겠죠.

물론 민노씨 말대로 '관객'으로서 갖는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단순히 매력적인 메신저로서의 존재를 넘어 친구가 되어가고, 친구를 만들어가고 있는 김여진, 박혜경, 김남훈 같은 분들은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기존 활동가들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참 어려운 문제인 것 같아요. '친구'의 범위는 협소하고 '관객'을 모으기는 매력이 없고.. 어느 쪽, 하나를 택해서 개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른 쪽의 문제가 발목을 잡는 악순환에 빠지기도 하고..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는 알렉산더의 칼처럼 뭔가 필요한 것 같긴 한데...



(대화가 이어지면 업데이트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