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악이 승리한 시대
자본이 인간에게 완전히 승리한 사회. 자본이 인간의 얼굴을 지워내고, 그렇게 지워진 인간의 얼굴에 스펙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자발적인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몰고 있는 사회. 그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는 최소한의 도덕성을 포기하고, 성공이라는 이미지로 치장된 화려한 타락을 선택했다. MB는 그 상징이다. 우리는 교육과 학문을 포기하고 직업양성소에서 차곡차곡 쌓여가는 폼나는 스펙을 선택했다. 박용성은 그 시대정신을 선구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지방의 한 대학이 놓여 있다. 상지대라는 이름을 가진 대학. 근 20년에 가까운 대학 민주화의 빛나는 성취를 상징하던 대학. 시민대학의 꿈을 학생과 교수 교직원이 재단도 없이 가꿔오던 대학. 2010년 대한민국은 그 대학을 '사학비리 대명사'로 불리던 집단에게 기어코 넘겨준다. 그 상지대 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인간과 자본이 서로 한 몸 되고, 대학과 스펙이 서로 살을 비빈다. 그렇게 성공을 향한 비교 강박의 배타적 욕망은 우리 안을 흐르는 피가 되고, 우리를 지탱하는 뼈가 되며, 우리를 감싸는 살이 된다.

먼저 부끄러운 고백을 해야겠다. 나는 이 야만에 기꺼이 참여했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드먼드 버크는 말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기꺼이 악이 승리하는 이 모든 현재진행형의 역사에 침묵과 방관으로 참여했다. 변명은 없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구조를 이야기하고, 폼 나는 외국 석학들의 멋진 용어들을 빛나는 장신구 삼아 온 몸에 주렁주렁 메달아도 결론은 하나다. 우리는 악에 대해 무관심하다. 그 뿐이다.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악은 진부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으니까.' 우리의 세련된 무관심과 익숙한 방관이 그 악의 정체다. 우리는 악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실은 그 악의 공범들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가 그 악이다.

그러니 아주 작은 정의, 아주 작은 상식도 우리 안에 있는 악의 정체를 바라보는 일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것이 아프더라도 우리는 자기를 바라보는 그 일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침묵하는 선한 사람들의 시대, 그렇게 자기 마취적인 위로를 위한 휴머니즘이 만발한 우리시대의 정체가 사실은 악의 꽃들이 만발한 악의 정원이고, 정치적인 무관심이 마치 쿨한 최신 유행처럼 유통되는 이 사회는 그저 황무지였을 뿐임을 아프게 인식하는 일, 그 바라봄이 출발이다. 우리는 이 달콤한 신세계를 아무런 고민도 없이, 아픔도 없이 통과하고 있다. 우리 시대는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그 온갖 고통과 저항들이 조롱받는 시대다. 쿨하지 못하게시리...쯧쯧. 촌스럽게 왜 그래? 심지어 우리들은 우리에게 빵부스러기 처럼 남겨진 도덕심, 그 양심을 자극하는 행동들을 힐난한다. 너는 뭐가 그렇게 잘났어? 쿨하지 못하고, 촌스럽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의 침묵과 방관 속에서 우리 시대의 몰상식과 야만, 우리시대의 악은 무럭무럭 자란다. 우리는 고백해야 한다. 악은 우리와 동떨어진 괴물들에게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악의 숙주다.

2. 상지대 사태
상지대는 원주에 있는, 우리 시대의 세련된 표현을 빌면, '지잡대'(지방에 있는 잡스런 대학)다. 그 지잡대가 17년을 싸워왔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의 사학비리 사정에 기대어 비리재단을 몰아낸 게 아니다. 300일이 넘는 학생, 교수, 교직원의 학원민주화 투쟁으로 비리재단을, 반교육의 상징을 몰아냈다. 그렇게 함께 용역깡패에게 매 맞아 가며, 함께 단식투쟁해 가며, 비리사학 대명사처럼 불리던 ‘김문기’(전 상지학원 이사장)와 그 일당들을 몰아냈다. 김영삼 정부는, 어떤 영화배우의 표현을 빌자면, 그저 ‘숟가락’만 올렸을 뿐이다. 그리고 17년이 지난 지금, 상지대 학생들과 교수, 교직원들은 다시 400일이 가까워 오는 농성을 벌이며, 국가가 법과 제도라는 기득권의 합리적 기만장치로 다시 불러온 비리 구재단의 망령과 싸우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한 번은 희극으로’(마르크스). 지금 반복되고 있는 역사는 희극이다. 하지만 그 희극은 너무도 슬퍼서 펑펑 울고 싶은 희극이다. 그 희극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들이고, 우리들의 자녀들이고, 우리들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후배들에겐 비리재단이 다시 군림하는 반교육적이고, 치욕적인 학교를 물려주지 않겠다.” 그 소박하지만 굳은 결심이 망각 속에서 먼지처럼 지워지고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과거 비리재단 컴백 쇼.쇼.쇼.

그 일을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산하의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가 수행하고 있다. 상지대만이 아니다. 광운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대구대... 비리재단 복귀 반대 투쟁의 선봉이자 상징인 상지대가 넘어가면, 나머지 학교들의 운명은 안 봐도 비디오다. 하지만 현재 스코어, 교과부와 사분위는 상지대의 새로운 이사진 구성에 관한 공식적인 절차를 모두 마쳤다. 과거 비리재단(흔히 ‘비리 구(舊)재단’으로 통칭)의 망령들을 제대로 다시 살려내고 있다. 좀비다. 죽어도 죽지 않은 존재들. 교육의 가치를 땅에 쳐 박았지만 다시 화려하게 복귀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히어로들. MB시대는 소위 '잃어버린 10년' 동안 절치부심했던 좀비들에게 인간의 피와 살을 떼어주는 놀라운 마법의 시대다. ‘새로운 중세’. 그게 MB시대고, 그게 상지대 사태다. 남의 일이 아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의 학교에서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다른 모습으로, 다른 빛깔로 이런 일은 대한민국 사립대학들에서 벌어지고 있다. 당신이 다니고 있는 중앙대 이야기를 해보자.

3. 사학오너님의 대학주식회사
상지대 사태의 본질은 단순한 사학비리재단 복귀에만 있지 않다. 이 중대한 역사의 퇴보를 그저 ‘반교육적’이고, ‘몰상식’하다는 단순한 선/악 구도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 이 사태의 근저에는 ‘사립대학’을 ‘주식회사’로 변모시킨 사회성원들의 적극적인 공범자 의식과 그 공범자 의식이 만들어낸 이른바 제도와 문화가 존재한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있고, 또 우리 밖에 있으며, 그 이율배반이 실은 우리다. 정글 같은 대한민국의 양육강식 시스템에서 스펙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로 변모한다. 연약한 짐승을 잡아먹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우리는 교육(!)받는다. 아무리 고결한 도덕교과서로 위장하더라도, 대한민국 교육의 내재된 원리는 짐승의 본능이다. 더 많은 먹이를 잡아먹을 수 있는 사나운 짐승의 이빨, 짐승의 거친 본능. 우리는 인간으로 교육받지 않고, 세련된 짐승으로, 멋진 명품들 속으로 피를 질질 흘리는 그 탐욕스런 이빨을 숨길 수 있는 처세를 배운다. 아, 스펙! 스펙! 스펙! 그게 우리들이 간절히 갈구하는 짐승의 이빨이다. 우리들의 영광스런 이빨. 이 이빨이 물어뜯고 있는 어떤 먹이들, 우리가 한 때나마 함께 했던 학우들을 보자. “사학 오너”(조선일보 관련기사의 표현)는 어떻게 먹이를 물어뜯고 있는지, 그 숙달된 조교의 시범을 보자.

“박용성스럽다.” 최근 학과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진통 중인 중앙대를 보며 떠오른 생각이다. 중앙대 이사장인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은 직선적 성격답게 정면 돌파를 택했다. 구조조정에 반대하던 김주식(26·철학과 휴학 중)씨에게 학생에겐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퇴학 처분을 내렸다. 시위를 벌인 다른 3명의 학생에게도 징계와 명예훼손 혐의 고소, 공사 지연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제기를 검토 중이다.
- 곽정수, [중앙대 사태, ‘기업사회’의 묵시록], 한겨레 21, 2010.05.07 제809호.

우리는 좀 더 고양된 인격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 그래서 서로 함께 나누고, 향유하며, 서로를 아름답게 빛나게 하는 그런 동화 같은 풍경들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그런 배부른 소리는 달나라에나 가서 하시고... 우리는 그저 우리 안에서 내면화된 짐승의 논리, 그 사나운 이빨이 우리 자신을 잡아먹지 않을까 소심하게 염려할 뿐이다. 그런 소심한 염려가 우리시대에 남아 있는 양심의 정체다. 나에게 남은 양심의 정체다. 우리가 정말 고민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거대한 이빨들의 울부짖음에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귀를 막고, 모른 척 할 수 있을까, 그 짐승의 논리에 어떻게 하면 그럴듯한 면죄부를 씌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 양심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속일 수 있을까, 우리들은 부지불식간에 자발적인 노예가 된다. 좀 더 비싼 노예가 되기 위해 경쟁적으로 싸우고, 짐승으로 살아남기 위해 오너님의 영광어린 빛에 스스로 눈먼다.

그리고 나 같이 소심한 염려를 기어이 버리지 못한 자들은 어느 날 문득 경찰서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 거다. “전화 받으시는 분 민노씨 맞나요?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셨습니다.” 아, 씨바 참 가지가지 한다. 소심하게 머리 속으로 읊조리며, 블로그엔 이렇게 쓰는 거다. "김문기씨, 고소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그게 나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자부심이니까. 그게 영광이 아니라면 너무 너무 속상하고, 너무 너무 슬플 것 같으니까...


4. 방관자의 알리바이

소송법상 용어 중에 당사자주의라는 말이 있다. 소송당사자에게 소송의 주도적 지위를 부여해 당사자 상호간 공격, 방어를 통해 소송이 진행되고, 법원은 제3자 입장에서 당사자의 입증을 판단하는 방식, 그걸 당사자주의라고 한다. 우리 사회에는 참 많은 싸움들이 있는데, 당연히 그 싸움 모두를 법원이라는 심판관이 지켜보지 않고, 혹 지켜보더라도 반드시 옳은 결정을 하는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개입되어야 하는 싸움. 하다못해 응원 한마디라도 보태고, 욕이라도 한 사발 내질러야 하는 싸움. 그런 싸움들이 우리 주변에는 참 많다. 그런데 종종 이 ‘당사자주의’가 그럴듯한 무기처럼 등장한다. ‘이봐, 너는 당사자도 아니잖아. 함부로 나서지 말라구!’ 가령 작은 용산으로 불리는 ‘두리반’ 같은 초라하고, 외롭지만, 지켜야 하는 싸움들. 그리고 그런 싸움은 온갖 피와 살을 길바닥에 뿌린 뒤에야 작은 전리품을 우리에게 안긴다. 가령, 며칠 전 타결된, 1895일 동안 싸워서 겨우 겨우 절반의 승리를 일궈낸 기륭전자 노조의 싸움 같은 거...

‘당사자’라는 말이 우리의 싸움에 우리가 나서는 일을 막는 장애물이 되어선 안 된다. 우리가 마땅히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책무를 떠넘기는 방관자의 알리바이가 되면 안 된다. ‘당사자’라는 말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인간답게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사회적인 상상력, 정치적인 상상력을 메마른 이성의 이름으로 제약해선 안 되는 거다.

물론 대개의 싸움이 그렇듯, 어느 한 쪽이 전적으로 선(善)이고, 다른 한 쪽이 전적으로 악(惡)인 경우는 드물다. 상지대 사태도 마찬가지다. 한 쪽에선 “사학 오너의 재산권”이라는 한국식 자본주의의 욕망을 ‘사학의 자주성’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한다. 또 다른 한 쪽에선 ‘교육의 공공성’을 강조하며, 비리재단 관계자들은 다시는 학교에 발을 붙여선 안 된다고 말한다. 자주성과 공공성은 모두 소중한 가치다. ‘사학의 자주성’이 숨기고 있는 의미가 지금/여기에서는 ‘사학 오너의 재산권’이라고 하더라도, 그걸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조롱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교육의 공공성’이라는 말 역시 국가권력이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무기로 언제든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말 속에 숨겨진 의미를 예민하게 비판하되,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는 가치의 조화를 모색하고, 거듭 다시 경계로 나와 살아서 꿈틀대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선택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그 숨 쉬는 맥락 속에서 우리들의 고민과 선택을 담아내야 한다. 물론 지금/여기에서 나의 선택은 단순하다. 학교는 학교로서, 학생과 교수와 교직원, 그리고 지역사회의 공적 자산으로서 지켜져야 하며, 이미 박물관에 고이 모셔져야 하는 비리재단의 사리사욕으로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것. 상지대는 원주의 ‘시민대학’으로 지켜져야지, 김문기로 대표되는 비리 구재단의 ‘사유재산’으로 환원되어선 안 된다. 이것마저 포기하자고? 그래, 그럼 우리 앞으로 ‘교육’이라는 말은 우리 머리와 가슴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리자.


5. 다시 부끄러운 고백
언젠가 블로그에 썼던 것처럼 나는 대단한 도덕심으로 무슨 투철한 정의감으로 상지대 싸움에 참여한 게 아니다. 존경하는 장애인 활동가에게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민노씨가 상지대 좀 도와줘야겠다.” 그 말로 나는 상지대 싸움이 뛰어들었다.

그렇게 넉 달이 지났다. 아이들(주로 상지대 학생회 간부들과 단과대 학생회장들)과도 무척 친해졌다. 그게 내가 이 싸움에 얻는 가장 즐겁고, 소중한 체험이다. 그 어린 친구들은 두 달 여의 서울 원정 농성을 마치고, 지금은 원주로 돌아갔다. 그 상지대 아이들은 매일 밤 학생회 사무실에서 끝나지 않을 회의를 이어가고, 또 혹시라도 구재단 인사들이 들어오지는 않을까 이사장실에 매트리스를 깔고 잠이 든다. 그런 젊은 친구들과 함께 싸우는 일은 자체로 나에겐 멋진 드라마다. 이기면 모두 얻고, 지면 모두를 잃는 싸움은 스스로를 고독하게 만든다. 때론 정말 정색하고 진지할 필요가 있지만 괜히 심각해질 필요 없다. 지더라도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이 우리에게 진실하고 소중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우리가 함께 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고, 먼 훗날 그렇게 스스로에게 고백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히 값지다.

하지만 이것은 싸움이고, 싸움은 항상 승자와 패자를 만들어낸다. 대한민국에서 사학은 보이지 않는 제국의 거대한 동맹이다. 어마어마하게 견고한 권력이고,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기득권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도 졌던 싸움을 지방의 초라한 대학, 하지만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에겐 그 어떤 대학보다 자랑스러운 대학, 상지대가 하고 있다. 나는 블로거로서 상지대 학생들과 블로그를 만들었고(상지대 구출 대작전), 블로거 벗들의 연대를 요청했다. 상지대 학생들과 현장의 살아 있는 표정들을 담기 위해 'The 나은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아이폰과 유튜브를 이용한 동영상 작업도 시도했다. 블로거 원정대와 함께 원주에 내려가 현지를 답사하고(상지 블로거 원정대), 블로거 기자회견도 함께 했다.

그 밖에 대형집회로서 시민문화제는 두 번이나 열렸고, 지상파인 KBS 2TV [추적60 : 벼랑에 선 상지대, 과거로 돌아가나](2010.8.11. 방송)에 선 상지대 사태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문제를 본격 조명하기도 했다. 시민단체(상지대 지키기 긴급행동)에서도 두터운 연대를 견지했다. 상지대처럼 사분위 결정을 앞둔 광운대, 덕성여대, 동덕여대, 대구대 등이 서로 힘을 모아서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시민단체들과 상지대 비대위 등과도 연대해 ‘범대위’를 구성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처럼 이런 싸움은 두 달을 넘기 어렵다. 특히나 대한민국의 진화한 ‘망각시스템’ 속에서 이런 공적 이슈에 계속 시선을 붙잡는 건 너무 힘들다. 아주 아주 부끄러운 고백. 나는 상지대 학생들과 가끔씩 통화를 한다. 하지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그 뿐이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상지대 학생들)은 아이들대로, 또 교수들은 교수들대로 각자의 영역으로 되돌아 간 기분이 든다. 우리들이 그저 이따금씩 떠올리는 그 마음들, 함께 했던 시간들, 그런 소박한 꿈들이 만들어내는 끈들은 내내 이어지겠지만, 사실 좀 무기력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싸움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고, 아니 끝날 수 없고, 그 싸움이 끝나는 날이 내가 인간으로서의 부끄러움을 놓아버리고, 나 역시도 짐승의 길로 나아가는 순간이라는 걸 나는 안다.

6. 달콤한 망각, 뒤틀리는 대학
상지대 사태는 대한민국의 교육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질문한다. ‘부정편입학’과 같은 학사행정의 초석에 관한 범죄행위가 이해할 수 있는, 이미 시간이 오래 지났기 때문에 충분히 치유 가능한 ‘사소한 잘못’이 된다. 아, 관대 하여라, 아, 대범 하여라, 사학분쟁조정위원회여! 학교는 ‘사학오너’의 재산이므로 다시 되돌려줘야 한다! 국가는 오너님이 잠든 사이에 그 학교를 나랏돈으로 대신 관리해준다! 아, 참으로 멋지지 않은가!! 그렇다. ‘김문기’로 대표되는 상지대 구재단과 교과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 권력과 자본과 제도로 치장된 합리적 야만의 제왕적 카르텔, 우리가 내심 이끌리는 우리 욕망의 종착지. 어찌 거부할 수 있겠는가. 어찌 반항할 수 있겠는가!

사학왕국을 축복하라!
사학왕국을 찬미하라!

그럼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이건 아니지, 이건 아니지... 그 소심한 마음 속 무언가가 꿈틀대며 속삭인다. 학교는 우리 모두의 것이야, 사학오너님의 사유재산이 아니라고! 배우는 학생과 가르치는 교사의 것이라고, 일하는 직원과 지역사회의 자산이라고. 그 작은 속삭임이 우리에게 살아 있는 한, 소심한 우리들을 가끔은 아프게 찌르고, 또 어떤 때는 봄날 바람처럼 우리를 간지럼 태우는 한, 이 싸움은 계속된다. 우리가 알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이미 이 싸움에, 이 거대한 싸움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슬프고, 무시무시한 이 전장의 한 가운데 이미 내던져 있다. 알몸으로, 어떤 무기도 없이. 우리에겐 우리밖에 없다. 그리하여 ‘방관자’는 없다. 모두가 당사자다. 우리는 당사자로서, 우리를 일으키는 신념과 철학으로, 아니 그런 거창한 말들 모두 필요 없이, 그저 우리가 쪽팔리지 않기 위해, 아니 덜 부끄럽기 위해 이 싸움에 뛰어 들어야 한다. 때론 소심하게, 때론 담대하게. 그저 이 싸움을 멈춰선 안 된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사립대학이 살아남는 길은 ‘사립대학 주식회사’가 되는 길인지, 아니면 그저 ‘학교는 학교’로 남아야 하는 것인지 우리는 그 싸움을 붙잡고 있는 긴 전쟁의 여로 동안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해야 한다. 질문을 멈추는 순간 우리는 짐승이 되어버리니까.

지금 대한민국 교육은, 대한민국 대학은 도덕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그 위기는 학교는 ‘배우는 학생들의 것’ ‘가르치는 교사의 것’ ‘일하는 교직원의 것’이라는 소박한 소망을 영원히 농담으로 만들어버릴 결정적인 위기다. 대학은 ‘사학 오너님’의 것이니까. 아무리 별별 더러운 짓을 해도 국가에서 잠시 동안 ‘관리’(임시이사제도)해주고, 다시 돌려줘야 하는 것이니까. 대학생인 당신에게만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 형제자매의 문제. 우리 자식의 문제다. 그러니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모두 당사자다.

답하라.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은 도덕적 위기의 시대에 중립을 지킨 자들을 위해 예약되어 있다.”(존 F. 케네디)


  • (주: 사실 이 유명한 문장은 존 F. 케네디의 잘못된 인용에서 연유한다. 케네디는 1959년 9월 16일 오클라호마주의 털사에서 이 문장이 포함된 연설을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문장을 인용한 출처로 ‘단테’-신곡-를 언급한다. "Dante once said that the hottest places in hell are reserved for those who in a period of moral crisis maintain their neutrality." 하지만 이는 착오 혹은 기억의 변주인 것으로 보인다. 참조 : 피타고라스, 백투더소스_스프링노트 )


참고. 2007년 대법원 판결과 사학분쟁조정위원회를 중심으로 살펴본 상지대 사태
상지대 사태를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려면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가 자신들의 결정을 합리화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2007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2007. 5. 17. 선고, 2006다19054 이하 '상지대 판결')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하 간략히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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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중앙대 교지 <중앙문화>에 보낸 글입니다.
* 이왕에 고려대 교지 <고대문화>에도 거의 동일한 주제로 글을 보냈고, 또 블로그에도 올렸는데요. 때문에, 중대교지 편집진에게도 양해를 구했습니다만, 글 일부가 고대교지에 보낸 글과 겹칩니다. 다른 관점으로 쓰려고 노력했지만, 맥락상 겹치는 부분을 아예 피하지는 못했습니다. 블로거벗들과 독자들께도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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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투명한 성찰" 잡감 - 민노씨에 기대어

    Tracked from via media 2010/12/18 10:17 del.

    예의 상지대 사건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몸만 대주지 말고 민노씨도 좀 이기적이 되어 자신을 위해서 좀 살아보라'고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이런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악은 선의 부재일 뿐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한 사람이 이런 세련된 치장과 익숙한 변명 속에서, 선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편만한 '악의 정체'입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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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시퍼렁어 2010/12/15 12:33

    만약 대학의 일부가 비리로 얼룩져있고 그것들을 치유하면 정상화 될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몰라도... 저는 대학이 '지성' '행동'으로 작동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저 믿음이라는 부분은 사실 여러번 행동의 반복으로 얻어진 결론이랄까요 적어도 사법대학이라면 대다수의 대학생들이 우루루 몰려가서 울산의 정규직 싸움에 들어가 준법투쟁을해야 하는거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나름 법대생들이라면) 물론 대학과 '사회'가 유리 된지는 90년대초 부터 그러했던것 같기도 하고 (제가본 대학은 등록금 투쟁뿐이었고) 당사자 이던 아니던 먼저 손내밀수 있는 사람들은 손을 내밀어야 하겠죠 (뭐 이건 나의 욕망일뿐이라걸 얼마전 깨달았을 따름이고) 그 내미는 손마저 이제는 원하는 이들에게 마약같은 효과 뿐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울산도 그러하겠죠 조금조금의 손길이 마약처럼 그들을 지탱시키다 결국은 몸이 썩어들어가며 사그라들겠죠. (너무 잔인한가요?) 자본으로 이기던지 숫자로도 이기던지 해야 할텐데. 철저히 배운바대로 민주 자본 주의 시대 답게 다수로 이기고 자본으로 이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민주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행동하는것 뿐입니다. 저야뭐 이제 썩어 나동그라질 죽음을 향해 그냥 걸어가기로 했으니.. (남의 블로그에다 한탄이나 하고 갑니다. 죄송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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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0/12/22 22:29

      시퍼렁어님 댓글은 진즉 읽었는데, 역시나(?), 답글이 늦어지네요..;;;
      저야말로 이런 진지한 논평에 답글이 늦어져서 죄송합니다.
      여러번 읽었지만, 참 어려운 문제죠...
      다만 제가 저를 견디기 위해(실연한 다음...ㅡ.ㅡ;) 떠올리곤 했던 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곳에서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된다."(Arnold Geulincx)
      http://minoci.net/510

  2. The나은 2010/12/17 11:28

    정말 좋은 글이에요.
    항상 느끼는 거지만 민노씨의 글은 뭐랄까
    사람의 깊숙한 내면을 자극하네요.

    항상 고맙습니다.

    perm. |  mod/del. |  reply.
    • 민노씨 2010/12/22 22:29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나은냥. :)

  3. Jitae Jang(장지태) 2010/12/17 11:51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세상이 오더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은 개인 이기주의다.
    그것은 감기 바이러스와 같은 것이어서, 늘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전염시킨다.
    전염경로인 공기와 물을 없앨 수도 없다. 오직 마음을 개조시키는 정신혁명뿐이다.
    그것에 대한 인류 최고의 약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만능열쇠처럼 어떠한 것도 열 수 있다. < 체 게바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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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0/12/22 22:30

      멋진 통찰이네요. :)

  4. 풀잎소리 2010/12/17 12:29

    사람사는 곳엔 언제나 쓰레기가 있다!
    난 청소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라 쓰레기 치우는 걸 게을리 하지 않는다.
    악취가 진동하기 전에 치워야 덜 힘들지만 이미 악취가 진동하고 오염된 물이 뚝뚝 떨어진다고 해서 계속 방치해 둘 수는 없다. 그로인해 고통받는 건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여의도 말고도, 썩은내 진동하는 큰 쓰레기 연희동에 있는데....

    범죄자를 국민세금으로 국가가 경호 한다면 개가 웃을 일 아닌가? 하지만 이미 그런 일이 벌어져 있다.
    시급한 사회적 이슈들이 계속 생겨 난다고 해서 결코 소홀 하거나 잊어 버릴 수 없는 일이 그(!) 쓰레기 청소다.
    이 사실에 대해 여론을 조직하고 공감대를 형성케 하는것은, 80년대 이후의 한국 현대사를 정화하는 역사적인 과제이기에 나 개인에 있어서도 매우 의미있고 유익한 일이다.
    반드시 청소하고야 만다. 하루라도 빨리 그 악취로 부터 벗어나고 싶다.

    80년 5월의 피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 없는 내가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다!

    민노님의 능력과 노고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찬사와 격려를 보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하더라도 님의 열정과 노고에는 미치지 못할 듯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힘이 느껴집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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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0/12/22 22:31

      별말씀을요..;;;
      종종 이 누추한 곳에 방문해주시면 그것으로도 무척 고마울 것 같습니다. ^^;

  5. Jay 2010/12/17 14:57

    Ka, 민노씨가 남자분이 아니었나요?하하하 세상은 늘 엉뚱한 상상으로 뒤통수를 맞게 하죠. 내가 아는 것들보다 모르는게 너무나 많으니...ㅎㅎ
    세상에 알려진 아름다움이 꾸며진 가식의 아름다움이라면 그것처럼 나쁜것이 없다는데 솔직 당당함이 멋진 분! 화이팅!
    가만가만 생각해보면 참 이처럼 멋지고 훌륭한 말이 있을까 싶습니다.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이 문장 전체를 해석하고 해석해봐도 이렇게 절묘한 표현을 그 어디에서도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떻게 표현했을까요?
    -민주주의 마지막 불씨는 어둠속 공포를 이겨낸 뜨거운 함성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그 뜨거운 바람이 들녘에 깊이 잠든 깃발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다.-
    ^^하하 유쾌한 상상을 해봤슴다. 민노씨란 분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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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e나은 2010/12/17 15:15

      민노씨 남자분 맞으세요.
      저는 더나은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더나은이구요.
      더나은은 여자가 맞구요.
      민노씨는 남자에요.ㅋㅋㅋ

    • 민노씨 2010/12/22 22:31

      네, 나은씨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 ^;;

  6. 개 껍데기 2010/12/17 21:02

    민노씨께 여친이 (만약에)있다면 깜딱 놀라실.......뻔!
    졸지에 사랑스런 남친의 성이 전환되는 날벼락을 맞으실.......뻔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며 이 추운날 방황 할.........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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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0/12/22 22:31

      아쉽게도(?) 여친이 없어서요...ㅜ.ㅜ;;

  7. viamedia 2010/12/18 10:02

    눈물 나도록 아프고 고마운 글입니다.

    우리는 종종 비판이라는 이름으로 남의 허물을 짚어내고 손가락질하지만, 그 비판의 대상에 자신을 포함하기를 주저하는 듯합니다. 아니, 자신에게 편만한 욕심을 감추기 위해, 그 비판이 더 거세지고 목청만 높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찰이 없으니 그런 비판이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꿈꾸는 희망은 희망대로, 우리의 너절한 욕심과 욕망은 그것대로 드러내고 비추어 스스로 반성하는 일은 투명해서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며칠을 두고 다시 읽은 이 글에서 그런 자신에게 투명하고 정직하려는 민노씨의 몸부림과 호소를 듣습니다. 그 자리가 비판적인 성찰과 비판의 행동, 나아가 변화를 위한 행동으로 이어지는 첫 출발인 것을 봅니다. 민노씨의 부끄러움은 누구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읽은 이들이 자신을 비추어 자신 안에서 자신만의 부끄러움으로 발견하도록 돕습니다. 그리고 그 처지에 따라 어떤 행동이 가능한지도 보여줍니다. 그러니 민노씨는 찌르지 않는데, 나는 찔려서 아프고, 그러다가 나 자신의 처지를 되돌아보니 고마운 일입니다.

    미안했습니다. 예의 상지대 사건에 참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몸만 대주지 말고 민노씨도 좀 이기적이 되어 자신을 위해서 좀 살아보라'고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고, 이런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민노씨의 처지를 염려한다며 내 허튼 조언에 핑계를 붙였지만, 그 조언에 감사한다고 말한 뒤 상황을 설명하는 민노씨의 마음을 알아듣고 부끄러웠습니다. 돕지 못해서 미안했습니다. 멀리서 편하게 말만 해서 미안했습니다.

    나이들 수록, 경륜을 쌓을수록, 혹은 책 한 권 더 읽을수록, 종종 나는 내 무관심과 방관을 '세련된 것'으로 치장했고, 너무도 '익숙하여' 변화될 수 없는 세상이라 변명했습니다. 악은 선의 부재일 뿐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한 사람이 이런 세련된 치장과 익숙한 변명 속에서, 선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가지 않을 때, 그것이 바로 편만한 '악의 정체'입니다. 실은 "우리가 그 악의 공범들"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우리가 그 악"입니다. 우리 자신이 '악의 숙주'라고 말하는 것은 자학이 아닙니다. 더는 악의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는 가장 첫 깨달음이어야 합니다.

    상지대 사건과 더불어 사적인 경험을 통해서 '당사자주의'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는 점에서 더욱 얼굴이 달아올라 화끈거렸습니다. 세련된 '방관자의 알리바이'에 익숙한 처지가 되어서, 짐짓 혀를 차며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 사이 내 안의 감수성이 메말라 가는 것을 느끼지 못했고, '냉철한 체'하며, 내 안의 열정을 억누르고, 공중 부양한 양, 도통한 훈계 질이나 하려 했습니다. 그 유혹들이 너무나 '달콤'하여 피하기 어려웠습니다. 그 사이 변화를 위한 실천의 상상력은 간데없이, 온갖 도사인 척하는 허황한 판타지에 취해 스멀스멀 내 감수성이 좀 스는 것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래서 민노씨를 이렇게도 읽습니다. 모두가 한 생각일 필요는 없다고, 모두가 하나 된 투쟁의 대오에 줄 세우자는 게 아니라고. 다만, 누구나 자기 처지에서 그 투명하고 정직한 성찰을 시작할 수 있고, 그 성찰이 지시하는 비판과 실천을 잇대어야 한다고. 작은 고백과 성찰과 실천이라도, 그것이 우선은 내 안의 감수성을 유지하고, 선의 상상력을 지켜나가는 길이라고.

    그리고 민노씨와 상지대의 여러 친구, 그리고 "The나은"양과 함께 한 모든 일은 고통과 패배인 듯한 현실 속에서도, 고통으로만 남지 않고, 여전히 감당할 만큼 즐거운 삶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감사의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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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0/12/22 22:36

      일전에 스카이프로도 말씀 드렸듯, 이 글을 쓰는 일은 스스로에게 부끄럽고, 다만 그것이 저를 솔직하게 그대로 들여다보는 일이었긴 했지만, 스스로는, 마음이 흘러가는 소아적인 제스처에만 몰두하고, 너무 감수성만 앞세워서, 혹은 너무 추상적이기만 하지 않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신부님께서 많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시고, 또 동지이자 친구로서 격려와 더불어 애정어린 비판도 나눠주시길, 염치 불구하고 바라봅니다...

      늘 고맙습니다, 신부님. :)

  8. Playing 2010/12/20 14:36

    아놔.. 역시 민주주의란 또다른 신분제도인 거 같아요
    결코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지 않죠 ㅡ _ㅡ;;

    법 관련된 모든 종사자들에게 물어봐도 평등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그 평등하지 않는 걸 그나마 이 사회가 유지될만큼은 생각을 해서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거죠. 원래 법이란 그 법이 만들어진 취지에 맞게 해석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취지를 무시하고 '돈으로 질질 끌면서' 결국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라고 만드는 건 '법'으로 밥을 먹고, 다른 사람의 인생을 오락가락하게 하면 안되는 일이라는 거죠

    참 법조계분들이 웃긴게.. 잘못은 벌어졌는데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걸 아주 당연하다고 말하는 거죠~ 단지 "법에 따라서 행동했다. 그러므로 그 사건 판결 다음은 나는 모른다" 이러면 모든 게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죠


    일단 사법부(검찰 포함)와 언론이 자기들이 왜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 민주주의가 유지될 수 없어요.. 문제는 국내 현실이 그렇다는 거죠
    제 3차 또는 제 4차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야 해요.. (사법부와 언론이 그 대상) 지금까지 흘린 피의 값을 이렇게 모욕하다니 씁쓸합니다. 이제 우리가 흘리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은 더 많이 흘린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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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0/12/22 22:38

      그러게요...
      참 답답한 현실입니다...
      그 현실을 눈꼽만큼이라도 사람이 그저 사람으로 당당하게 서로 기대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텐데 말이죠.

  9. 민노씨 2011/04/25 09:21

    *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 관련
    글쓴이 '피타고라스'를 본문 및 태그로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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