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보용] 이경숙송 옹헤야 (오해야)

2008/02/16 20:36
살타첼로(Saltacello)의 연주곡

* 학습목표

메기고 받는 소리를 이해하고 이를 잘 살려 부를 수 있다.
단모리의 기본 장단과 변화되는 장단을 익숙하게 칠 수 있다.
경숙리의 발음과 억양, 강세의 특징을 이해한다.

* 곡의 특징
'오해야'는 2008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요로 '삽질하는 소리'라고도 불린다.
단모리 장단의 빠르고 경쾌한 리듬에 거의 비슷한 삽질이 반복되고 있다.




오해야 오해야 어절시구 오해야 저절시구 오해야 삽질일세 오해야


숭례문모금 오해야 조직개편안 오해야 언론통제 오해야 코드인사
오해야

친기업은 오해야 밀어붙이기 오해야 대장성언급 오해야 인수위과욕 오해야

盧대통령 오해야 몰입교육
오해야 영어교육 오해야 조급한것 오해야

학부모불안 오해야
사교육만세
오해야 테솔문제 오해야 대운하는 오해야

에헤 에헤 오해야 어절씨구 오해야 저절시구 오해야 삽질일세 오해야





* 제대로 된 옹헤야 (가사)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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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화학습
이경숙 위원장의 오해 시리즈


* 발아점 (이경숙송 처음 들은 곳)


추.
기분도 꿀꿀하고, 겸사겸사.. ㅡ.ㅡ;
음원은 언제 끊어질지 모르겠다.
지금은 꽤 잘 들리는데..


덧.
몰입 학습!
펌질 권장!





대법원 2007도8155 정보통신망이용촉진및정보보호등에관한법률위반 (명예훼손) (2008. 2. 14.)

피고인 : 허##
상고인 : 검사
원심 : 의정부지방법원 2007. 8. 30. 선고. 2007노579 판결
판결선고 : 2008. 2. 14.


이하 위 대법원 판결을 편의상 재구성한 글입니다.
사실 - 원심 판단 - 대법원 판단으로 나눴구요.
대법원 판결문에 나타난 구체적인 사실관계 부분이 너무 빈약해서, 원심 판결문을 구해보려는데(대법원사이트 > 사건검색 > 나의 사건), 당사자 입력란이 있더라구요. 저야 당사자가 아닌데 알 수 없는 노릇이죠. 이게 사건 성격(명예훼손)에 관한 사건이라서 그런것인지 어쩐것인지.. ㅡ.ㅡ; 원심 판결문도 웹상에서 충분히 구해서 읽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암튼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죠. 

덧. 나의 사건 검색 열어봐도(임시필명)님께서 다음과 같은 보충 논평을 주셨네요. 판례에 대한 일반의 접근성을 '방해'하는 이유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일독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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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 :
원심 파기(의정부지법 본원 합의부로)환송

사실 :
1. (적법하게 얻어진 증거로서 원심이 판시한) 일대일 비밀대화란 피고인이 인터넷 블로그의 비공개 대화방에서 ##과 사이에 일대일로 대화하면서 그로부터 비밀을 지키겠다는 말을 듣고 한 대화(이다)
2. 위 대화가 인터넷을 통하여 일대일로 이루어졌다는 사정

원심의 판단 : 명예훼손 성립하지 않는다.
피고인이 ##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자(이하 ##)와 사이에 나눈 공소사실과 같은 대화는 피고인의 인터넷 블로그에서 이루어진 일대일 비밀대화로서 공연성이 없으므로,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상의 정보통신망을 통하여 공연히 허위의 사실을 적시하여 타인의 명예를 훼손한 경우에 해당하지 아니한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 판단 : 명예훼손이다.
1. 그 대화 상대방이 대화내용을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2. 또 ##이 비밀을 지키겠다고 말하였다고 하여 그가 당연히 대화내용을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할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3. 결국 원심이 판시한 위와 같은 사정만으로는 '공연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4. 원심은 피고인과 ##이 위 대화를 하게 된
ㄱ. 경위
ㄴ. ##과 피고인 및 피해자 사이의 관계
ㄷ. 그 대화 당시의 상황
ㄹ. 위 대화 이후 ##의 태도 등 제반사정에 관하여 심리한 다음
과연 ##이 피고인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할 가능성이 있는지 여부에 대하여 검토하여 공연성의 존부를 판단하였어야 할 것이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심은 위와 같은 조치를 취하지 아니한 채 피고인의 공소사실과 같은 대화가 인터넷 블로그에서 이루어진 일대일 비밀대화라는 이유만으로 공연성이 없다고 판단하였는바, 원심의 위와 같은 판단에는 공연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여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다고 할 것이다.

명예훼손죄의 구성요건인 공연성은 불특정 또는 다수인의 인식할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하므로 비록 개별적으로 한 사람에 대하여 사실을 유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로붜 불특정 또는 다수인에게 전파될 가능성이 있다면 공연성의 요건을 충족한다고 할 것이다(대법원 1985. 4. 23. 선고 85도431. 대법원 1990. 7. 24. 90도1167)

대법관 전수안 고현철 양승태 김지형

- 이상 대법원 판결문 재구성.


1. 대법원의 확고한 판례법리인 '전파성 이론'에 대해서는 다수 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이번 판례 역시 공연성 판단표준으로 '전파성 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결과인 것 같네요. 좀더 구체적인 사실관계가 궁금하기도 하지만, 원심판결이 좀더 합리적일 것으로 추정합니다.

2. 공연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전파성 이론'을 과도하게 수용하는 경우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깁니다.
ㄱ. 표현의 자유를 과도하게 억압하게 되고
ㄴ. 범죄 성부가 행위자가 아닌 상대방에 의해 좌우되며
ㄷ. 가벌성 범위를 지나치게 확대하게 되고
ㄹ. '전파성'이라는 모호한 기준으로 명예훼손 성부를 판단하는 것은 형법상 죄형법정주의의 '명확성 원칙'에도 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전파성 이론에 의해 공연성을 판단하는 판례 입장은 거듭 비판받아 마땅하리라 봅니다.

3. 공연성이란 "불특정 또는 다수인이 '직접으로' 인식할 있는 상태"(이재상)를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해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이번 대법원 판결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합니다.





어느 블로거의 기도

2008/02/16 09:49
“아버지 저들은 자신의 죄를 모르는 자들입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마음에도 자신들의 사익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밀알만큼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해 주옵소서.”
“최악의 경우에 저들이 이 나라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만큼만 망치게 해 주시옵소서”

- 어느 블로거의 기도 중

아멘... 



추.
내 영세(세례)명은 베드로다. 물론 나는 거의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 아주 가끔씩 내 동생과 내 누이와 내 어머님과 친구들과 그리고 커피캬라멜 향기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이 나라와 이 나라에서 어쨌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일 매일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다.


함께.
대운하 반대 100일 순례 - 최상석 신부님께 (주낙현 신부님)
종교인 16명 “대운하 반대” 100일 순례 (한겨레)



쓰려다 만 글인데 간단히 씁니다.
제가 종종 방문해서 좋은 글 읽고 있는 이택광 블로그에서 다음 글을 읽어서 굳이 쓰는 겁니다.

김대중 고문의 '멋진' 칼럼 (이택광)
http://wallflower.egloos.com/1712078

이 글은 위 글에 트랙백 보냅니다.


김대중 칼럼 (솔직히 링크 거는거 굉장히 짜증나고, 아깝습니다. 읽지 않을 것을 권합니다.)


칼럼 읽고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이건 뭐 논리고 뭐고가 없는 글입니다.
극도로 피상적인 감정적인 편견와 음악 자체에 대한 몰이해, 그리고 천박하기 그지 없는 숭미적 사고방식, 또 철학의 빈곤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글입니다.

하지만 그 칼럼이 갖는 선동성에 대해선 혀를 내둘렀습니다.
그 선동성만을 표준으로 판단한다면, 이 칼럼은 정말 훌륭(?)합니다.

가령 최근에 통과된 '군 가산점 부활' 법안에 대한 한겨레 칼럼은 정말 여기에 대면 발끝도 못따라갑니다. 이건 농담이 아닙니다.


잘못된 길로 돌아가는 군 가산점 부활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269632.html

전원책에 환호하는 군필자들에게 이런 밍밍한 칼럼은 씨알도 안 먹힙니다. 물론 저는 한겨레 칼럼 입장에 찬성합니다. 그럼에도 전원책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제가 이상한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성적으론 이렇게 판단합니다. 아무리 위헌성을 피했다고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 법안은 위헌이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헌재의 위헌 판결을 개무시하는 국회가 정말 제정신인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사람 마음 움직이는 건 머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가슴을 통해서입니다.

다시 돌아가죠.
비교와 경쟁의 살벌한 시스템 속에서 일류대학, 미국 유학, 대기업... 이런 구체적이면서(그 표지 자체로는), 하지만 동시에 피상적인(그 공허한 철학의 차원에선) 삶의 원칙을 강요하는 온갖 기만적 담론구조들, 문화적인 패턴들이 지배하는 대한민국에서 '아무개'가 한겨레 칼럼과 김대중 칼럼을 읽는다고 칩시다. 그 아무개는 평균적인 대한민국 시민이라고 가정하자는 겁니다. 물론 그 아무개는 투표권을 갖고 있습니다.

누가 이깁니까?
김대중 칼럼이 이깁니다.
저는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고딩만 되도 이런 후진 칼럼은 안쓰겠다, 쯧쯧쯔..."
이런 '이성적인' 생각을 갖는 분들이 많으시겠지만.

"어, 그래? 아, 그렇구나!"
이런 판단, 이라기 보다는 그 '어떤' 메시지를 강요당할, 독자들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김대중 고문도 그런 정도의 전략적인 판단은 했겠지요.
그러니 이 '멍청한' 칼럼은 정말 소름돋게 똑똑한 칼럼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김훈이 조선일보 사설 보면 너무 잘써서 소름돋는다고 했던게 바로 이런 취지일 것으로 저는 추론해봅니다(물론 김훈 같은 마초 우파가 김대중류의 글을 좋아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김대중의 야만적인 인식과 세계관은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야만이라서 문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 칼럼에서 아무런 논리적 하자를 발견하지 못하는 분들이 <조선일보> 애독자들이겠지. 여하튼, 이렇게 머리 나쁜 이들이 우파를 하는 법이다. 그게 왜 그럴까? 그 답을 이미 알고 있다면 자기 자신을 좌파라고 보면 되겠다.

- 위 이택광의 글 중에서

저는 이택광님께서 내린 결론에 대해 오히려 아연실색하게 됩니다.
이렇게 조선일보 독자들을 무시한다고 해서, 김대중 칼럼의 논리적 흠결을 발견하지 못하는 게 조선일보 독자이고, 그런 사람들이 우파라고 단정한다고 해서... 그러니 우파는 무식하고, 좌파는 똑똑하다는, 다소 저로선 허황되게 느껴지는 판단, 그 근거를 '김대중 칼럼'에서 도출해낸다고 해서... 무엇이 바뀌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좀 유치한 자뻑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그렇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택광님께서 말씀하시는 '우파' 혹은 '좌파'가 도무지 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사고방식이라면 (이택광님의 결론에 따라 추론건대) 우리나라 좌파(물론 이건 이택광님께서 말씀하시는, 저는 잘 모르겠는 '좌파'입니다만)에게 희망은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김대중 고문이, 조선일보가 우파입니까?
이들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극단적 이익집단일 뿐입니다.
그저 기득권이며, 정치권력에 빌붙어 먹는 기만적 담론집단일 뿐입니다.
이들은 우파가 아닙니다.




추.
평소 이택광님 글을, 자주는 아니지만, 종종 고맙게 읽는 독자로서 아쉬운 마음에 적어봤습니다.
제 비판에 대해서는 언제든 반론을 환영합니다.
다만 제 글이 갖는 표현의 부족함에 대해선 너그러운 이해를 바랍니다.





때 아닌 미투데이의 뚱뚱은 죄인가? 논쟁. 이걸 논쟁이라고 할 수 있겠냐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가적인 반응이 생겨난다. ... 그리고 결국 드는 생각. 그럼 나 죄인이야? (ㅎㅎ. 물론, 농담이다. ㅡ..ㅡ; )


1. 일단 이런 무개념을 봤나.. 라는 쪽에선 '죄'라는 표현을 굉장히 무겁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일상적인 어법에서 '죄'가 그렇게 무거운 건가.. 생각해보면... 때론 무겁기도 하고, 때론 가볍기(?)도 한 것 같다. "뚱뚱한 건 죄다"라는 6음절의 문장은 거기에서 '표정'과 '뉘앙스'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맥이 중요할 수도 있겠는데... 물론 이건 (상식적으로) 굉장히 개념없는 발언에 속한다. 그러니까 이건 논리 이전에, 그러니 논리를 따지는 논쟁이 성립하기 어려운 지경인 '무개념'일 '확률'이 꽤 높다.



2. 그렇다고 "이런 가식적인 인간들을 봤나"라는 쪽의 '솔직함'(?)에 공감되지 않는 바 아니다. 이쁜 여자, 멋진 남자... 다 좋아하잖아? 이게 '플러스 알파'가 아니라, 그저 장점이 아니라, 어떤 인간적인 관계, 특히나 이성관계에서는 그 출발점이자 종착역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나는 느낀다. '몸'이 그 자체로 출발점이자 그 종착역인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몸은 이미 상품이고, 자본주의적 실존의 가장 극명한 표상이며, 또 그 몸으로부터 그 모든 고통과 기쁨과 희망과 쾌락과 소망은 피어난다. 이건 부정할 수 없겠다. (써놓고 보니 헛소리다. 이 사안과는 상관 별로 없거나, 좀 멀리 있는 거 같다.)


3. 솔직히 "뚱뚱한 건 죄야"라고 말하는 게 "파시스트의 커밍아웃(도롱뇽님. 도롱뇽님 글을 통해서 뚱뚱논쟁에 접근)"이거나, "폐륜"(도롱뇽)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좀 위험하고 극단적인 사고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없지 않다. 1.에서 썼듯이 그 '말'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 '말'이 유통되는 서로에게 작용하는 '상황'도 못지 않게 중요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이런 시츄에이숑을 생각해보자. 자신이 굉장히 사랑하는 어떤 여자/혹은 남자가 비만 때문에 갔다고(좀 극단적인 가정이긴 하지만) 해보자. 남겨진 남자/혹은 여자는 너무도 서럽고, 너무도 가슴이 아프기 때문에 "뚱뚱한 건 죄야" 이럴 수도 있지 않나? (너무 비약인가?) (어, 비약이다)


4. 난 개인적으로 뚱뚱하든 말랐든... 이쁜 여자가 좋다. 이건 부정할 수 없다. 미학적인 관점에서 획일성의 강요는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시선들을 만들어내고, 나는 그게 사회의 야만성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표준이라고 개인적으론 생각한다. 왜 뚱뚱하면 안되나? 왜 뚱뚱하면 이쁠 수 없다고 생각하나? 상상력의 빈곤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살짝 찔리는 게 없지 않다. 내 상상력은 왜 이리 빈곤한가?)

우리가 이쁜 걸 탐하는 건 본능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매혹이며, (대개는)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다. 다만... 뚱뚱하다와 아름답다가 서로 반대말은 아니잖나? 물론 되도 않는 '아름다움이란 건 말야, 마음 속에 있는거야'라는 말 씨부릴 생각은 전혀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몸이 서로 별개는 아닐테다).

하지만
'뚱뚱'이 아름다움과 전혀 상관이 없다거나, 혹은 어떤 예외적인 감수성에서, 어떤 예외적인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면...
뚱뚱한 건 죄야. 이렇게 말하는 '솔직함'은 아무리 생각해도 야만의 감수성과 좀더 가깝거나, 혹은 그 자체로 야만이다.

솔직한 것과 야만스러운 것은 다르고, 원시의 야생적 사고는 그게 야만적이기 때문에 문명의 반대말이 아니라, 문명이 획일적인 야만의 시선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야만적이다(레비스트로스..의 취지가 이런 것 같다). 뚱뚱이 죄다..라고 말하는 시선과 미학적인 관점은 야만성, 자본주의 문명의 빛나는 타락과 닿아 있다.

그건 욕망을 위해 살인과 도둑질 벌이며, 그걸 방조하는 야만성이다(이건 물론 비유다). 그 욕망의 뿌리에는 그 도저한, 배타적인 지배욕과 순응적인 자기 기만이 숨겨져 있는 거디었던 거디닷. (이건 내가 써놓고도 뭘 썼는지 모르겠다)(뭐, 세상이 그렇지.. ㅡ.ㅡ; )


5. 그러니까 위 문명과 야만의 적대적 사고방식에 대해 좀더 쓰면... 야생의 사고가 갖는 '법칙성'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 구조들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고, 자신의 피상적이며, 문화적인, 그래서 역사적 일시성, 파편성에 불과한 '어떤' 표준들로 야생을 야만이라고 부르는 그 모든 행위, 그 모든 문명의 행위가 오히려 야만이다. "뚱뚱이 죄다"도 '확률'적으로 이 범주에 속한 사고(방식)일 가능성이 높겠다.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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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대한 빨간도롱뇽님의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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