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하문트, http://bahamund.wordpress.com/2009/02/11/statistics/
펄, http://pariscom.info/259


이  글은 펄님 글에 썼던 댓글을 바탕으로 재활용하는 글인데요.
저 역시 꽤 공감하는 내용이 있던 글인데 펄님께서 인용하셨더군요.
저에게 인상적인 부분은 특히 아래와 같은 부분입니다.

글이라는 것이 그저 일기처럼 끄적이는 것이라 하더라도 일종의 자식과도 같다. 그렇다면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의 수준도 일정 수준을 유지했으면 하는 바램이 없을 수가 없다. 자식이 밖에 나가서 선생님에게 훈육을 받고 친구들과 뛰어놀고 동네 어른들에게 배우는 것은 바라지만 동네 건달들에게 두들겨 맞고 모멸을 당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심리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트래픽 폭탄’을 타고 오는 방문객들은 수준 미달이든지, 수준이 되더라도 글을 읽을 자세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이 대부분이다.
- 바하문트, http://bahamund.wordpress.com/2009/02/11/statistics/

다만 이런 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1. 글을 지나치게 인격화하는 것도 블로깅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글은 물론 인격과 지식과 그 사람을 가장 잘 반영하는 수단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너무 인격화시키면 뭐랄까... 너무 피곤해질 것 같기도 하고요..;;

2. 관계지향이라는 관점에선 공감하게 되는데요. 다만 영향력 지향이라는 관점에서는(그게 단지 광고수익과 연계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말이죠) 독자들을 너무 구별 짓는 것도 안좋지 싶고요. 물론 관계지향의 모델이 그저 조금씩(일종의 피라밋 모델처럼, 블로그 피라밋..ㅎㅎ) 퍼져나가서 영향력을 갖게 되는, 그래서 양자가 조화를 이룬다면 좋겠지만요.

3. 나쁜 아이들과도 사귀면서 맷집을 키울 수도 있고, 또 나쁜 아이들을 선도(?별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할 수 있는 가능성도 아주 조금은 있지 않나 싶어서요. 그 긍정적인 가능성, 능동적인 가능성을 너무 소극적으로 한정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좀 딴 이야기일 수 있는데, 저는 블로깅 스타일을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바라봅니다.

1. 관계 지향 (사이)
2. 영향력 지향 (밖)
3. 독고다이 (안)

이 세 가지는 서로 흔히 혼재된 형태로, 때로는 어느 하나가 두드러지게 강조되곤 할텐데요.
저로선 역시나 관계 지향형 블로깅이 '나'에게도, '(관계하는) 당신'에게도, 그리고 결국은 이를 바라보는 독자에게도 가장 남을 수 있는 모델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블로그로 '정치'하라는 의미는 전혀 아닙니다. ㅎ
블로깅의 원형에도 가장 가깝다고 판단하구요.

다만 이 관계 모델이 자연스럽게 '미디어적 가능성'(영향력 지향의 관점에서)을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데요. 그럴 수 있으려면 독자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즉 그렇게 관계하는 '나와 당신'이 일종의 '배우(?)'가 된다는 가정하고, 이를 관람(구독)하는 전문독자(직접 블로깅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들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거죠. 물론 블로거는 서로에게 가장 먼저 독자이기도 하지만요.

이 블로깅 관극틀이 저로선 블로그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식이 아닐까 싶어요.
관객(독자)의 입장에서도 블로그를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가장 바람직한 '관극(구독) 모델'이기도 하고요.
뭐, 써 놓고 보니 너무 뻔한 글이고만요...;;;;


추.1. 현 블로거뉴스의 대박 트래픽에 대해선... 
물론 현 블로거뉴스 시스템(물론 꽤 개선이 된 점은 환영하지만요)은 그 자체로 꽤나 문제이기 때문에...
위 글은 그저 인정할 수 있는 수준의 '메타사이트' 를 전제로 쓴 글입니다..
저는 현 다음 블로거뉴스의 '트래픽대박'은 적어도 '블로그 미디어'라는 입장에서는 거의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도 가능성을 만들어갈 수 있는 방법론은 모색해볼 수 있겠지만요.
가령, 트래픽 폭탄 맞는 글들이 다른 동료 블로거들의 관련글들을 링크하고 있다면 꽤 좋은 파급효과-나름 롱테일-을 만들어낼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더만요. 그런데 주로 폭탄 맞는 분들은 다른 블로거들의 링크에 인색한 것 같기도 하고요...물론 관찰체험치가 있는 것은 아니고, 언젠가 다음 블로거뉴스 편집자 블로그?에서 트래픽 대박 순으로 모아놓은 글들을 잠깐 살펴봤더니...


추.2.
제 블로그 하위 카테고리 중에 '댓글'이란게 있는데요.
이걸 '독자'로 바꾸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문득 들기도 하네요... : )


* 발아점
바하문트, http://bahamund.wordpress.com/2009/02/11/statistics/
펄, http://pariscom.info/259



"좌파 수구세력" : 말이 말 아닌 시대

2009/02/12 19:04

[사설] ‘미디어 칸막이’ 걷어내야 민주화 완성된다 (2009-02-12)  
http://www.donga.com/fbin/output?rss=1&n=200902120092
[....] 세계에서 가장 앞선 디지털미디어 기술을 가진 우리나라가 시대착오적 아날로그 시대의 법을 고집하는 좌파 수구세력에 발목 잡혀 있다.


0. 좌파 수구세력이라...  민주화의 완성이라...

'MB 언론 악법'(그들은 '미디어 관련법'이라고 부르는)을 반대하는, 가령 민주당 같은 (대단히 보수적인 우파)정당을 '좌파 수구세력'이라고 선언해버리는 사설이다. 그냥 우선 좀 골 때린다. 근거는 조중동류에서 사랑해마지 않는 '선진국'들에서 하니까 우리도 해야 하는데, 그걸 막으니까 수구세력이다.

아날로그/디지털이라는 기술적인 중립성은 허구인데, 왜냐하면 과학기술에도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는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백보 양보해서 이걸 중립적인 과학시술의 '진보'라고 하고, 그래서 이게 이른바 미디어 컨버전스(융합, 융복합)가 대세인데, 이걸 반대한다면 그건 '수구세력'이다....라고 치자.

과학기술이 한 축에서 그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상징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건 그 사회의 경제적 진보, 정치적 진보, 사회적 진보, 그리고 문화적인 진보라는 '총체적인 진보'의 일부일 수 있을지언정, 그것 자체가 절대선으로서의 '진보'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그 과학기술, 혹은 경제적인 진화의 방향, 전세계 선진국들의 동향 따위가 미디어 융합을 지지하는, 그런 방향이라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제 사회의 영역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가령 그 미디어 융합이 과연 경제, 정치, 사회,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모두 물어 본 뒤에야 그 기술발전의 방향을 지지하는 것이 '진보'인지 '수구'인지가 결정되는 거다.

디지털미디어 기술을 가진 나라라고 해서 그걸 무조건 제도화해야 하고, 온갖 미디어들을 짬뽕해야 한다는 논리는, 쉽게 말해서 '초딩'적인 단세포적 사고를 유감없이 드러낸 무지의 소지라고 이야기할 수 밖에는 없겠다.

이하는 좀더 이어지는 단상들...


1. '수구[守舊]'

사전 의미로만 보면 "옛 제도나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따름"이라고 한다. 부정적인 느낌은 강하지 않다. 그러니 사전 의미로만 보면 '보수[保守]'("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와 같거나 유사하다. 하지만 21세기 초 대한민국 정치 비평(?) 언어로서 '수구'는 명백하게 '보수'라는 표현보다 강한 공격성과 경멸을 담고 있는 것 같다.

2. 왜냐하면

말은 태어나고, 자라고, 죽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걸 언어의 역사성이라고 배웠다. 언어를 자라게 하는 건 물론 욕망이다. 거기에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권력이 개입한다. 그건 언어의 정치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어의 취사선택'은 매우 정치적인 행위다(foog).  

박노해가 지적했던 것처럼 '노동자'라는 말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피를 뿌렸나, 그리고 근로자라는 말은 얼마나 사용자스러운가? 근로자라는 말도, 사용자라는 말도 노동과 자본의 적대적 관계를 의도적으로 지우기 위한 정치 수사학이다. 

3. 그런 의미에서

어떤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있는 구체적인 언어, 말, 단어, 표현에는 그 말을 쓰는 자의 정치경제적 이해가 깊이 베어 있다. 어떤 놈은 'A'라는 말만 죽어라 쓰고, 어떤 놈은 'B'라는 말만 죽어라 쓴다. 그래서 언어는 어떤 '놈들'(세력)의 전유물과 같은 것이 된다.

꼴통, 정당, 신문 등과 함께 즐겨 쓰였던 '수구'를 한겨레나 경향, 오마이나 프레시안에서 읽는다면 별로 이상할게 없다. 하지만 그 표현을 동아에서 발견하면, '어, 이게 뭐지?' 하게 되는거다. 그 말은 '동아'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되는 말인데 사용하네? 이렇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4. 그런데 우리나라에 정치노선이란게 있나?

진보/수구(보수) 노선이 과거에는 명백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자코뱅과 지롱드의 대립이 그런 대표적인 예다. 같은 공화파이긴 했지만, 농민과 수공업자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코뱅과 지주와 상공업자의 지지를 받았더 지롱드는 당연히 루이16세의 처형을 두고 다툴 수 밖에 없는 정치경제적인 이해의 대립을 형성했다. 자코뱅은 당근 목을 쳐야 마땅하고, 지롱드는 그건 너무 심하지, 이럴 수 밖에 없는거다.

그런데 우리나라엔 그게 없거나 희미하다.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방구나 뽕이나.
뭐 그런 거.

그럼에도 동아일보에서 민주당을 수구세력이라고 몰아붙이는 건 좀 (많이) 웃긴 일이다. 

5. 대한민국에서  

수구는 정치세력과 긴밀한 담합관계를 형성하는 '권-언-(자) 복합체'를 비판하기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지, 너희가 그 말을 빼앗아 '우리'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하면, 쉽게 말하자, 벙찌는거다. 물론 민주당이 나에게 '우리'인지는 모르겠다. 솔직하게 말하면 한나라당, 조중동과 뭐 그리 다른가... 싶은 생각 없지 않지만 암튼 한나라당 입장에 선 정치적 당파로서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건 분명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정말 말은 말 아닌게 되어 버린다.

6. 말이 말이 아닌 시대

언어가 가져야 하는 투명성이 사라지고 있다. http://fairdream.net/288 언어는 관계와 그 관계 사이에 엉킨 욕망을 가급적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제 언어는 그 관계가 만들어놓은 욕망의 그물 속에 갇혀 버린다. 언어는 그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를 배반한다. 신문마저, 아니 신문이야말로 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좌파 수구세력'는 그 한 예다. 이런 어처구니를 우리는 2006년 '좌파 신자유주의'(노무현)이라는 표현으로 이미 강렬하게 접한 바 있다. (이에 대한 상식적인 홍세화의 비판. via 류동협의 글 )  

최근에 말을 말 아닌 것으로 몰고 가는 현상을 우리는 신해철의 "CF는 아티스트 표현의 일종"이라는 말 아닌 말에서 확인한 바 있다.

7. 다시 돌아가서... 진보/수구...

수구/진보는 단순히 어떤 기술과학의 성취가 얼마나 있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나, 그것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경제적인 시스템으로 사회 정치 문화적인 시스템으로 수용하느냐에 따라 나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보/수구는 그 기술과학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특정한 세력의 이해에 부합하는 것인지를 기준으로 논의되어야 마땅하다.

다소 경직된 마르크스 교조주의를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난 동독에서 출간된 철학사전(우리나라에서는 동녘에서 출판된)에서 '진보'를 설명하는 이런 문장이 있다.
발전된 사회주의 사회를 이룩하는 데 기본적인 과제는 경제적 진보와 과학-기술의 진보 그리고 사회적 진보를 올바르게 서로 결합하는 데 있다.

- 철학소사전, 표제어 '진보', p.355. 동녘. 1990.

그리고 개인적으론 꽤 좋아하는 다른 '철학사전'(도서출판 친구. 1987. 물론 절판..)에서는 '진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고 다소 교조적인 서술 부분까지를 모두 좋아하는 건 아니고(이건 아마도 동유럽 마르크스 철학 사전을 참조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
낮은 것에서 보다 높은 것으로, 단순한 것에서 보다 복잡한 것으로서의 전진운동. [....] 인류사는 이러한 진보의 실현과정이다. 계급사회의 이행 속에서도 인간은 보다 나은 생활을 실현해 왔는데, 가령 노예제 하에서 노예주의 완전한 종속물에 불과했던 노예의 상태보다도 봉건제하의 농노의 생활은 더욱 개선된 것이었고, 농노보다는 자본주의하의 노동자의 생활은 보다 큰 인격적 독립을 획득한 것이다.

계급사회에 있어서 진보는 극히 모순적으로 이루어져지지만(예컨대 원자력이 인간의 살육에 이뇽되는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자본주의하의 과학의 진보는 지배계급의 이익에만 봉사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전체의 진보를 가로막는 결과를 자아낸다)[....]

- 철학사전, '진보', p.90, 도서출판 친구. 1987.

동아일보에서 주장하는 '디지털시대'에 대한 그 애정과 열정이 추구하는 미래상이 '사이버 모욕죄'가 입법되고, 용산 참사와 같은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를 신문과 방송에서도 동시에 스테레오로 찬양하는 이명박식 '왕정복고'(행인)라면... 그건 진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아무런 관계가 없을 뿐더러, 우리는 그런 걸 흔히 '역사의 후퇴'라고 부른다.





2009년 02월 10일, 11일자.
용산참사 검찰결과 발표 및 김석기 사퇴 관련 사설


1. 단평

[동아] 경찰총수가 언제까지 불법폭력의 제물(祭物) 돼야 하나
http://www.donga.com/fbin/output?rss=1&n=200902110104
: 논평하기도 뭔가 삐리리한 저질 사설. 메시지는 제목에서 말하는 게 전부다.


[중앙] 김석기, ‘원칙 사회’를 위한 거름 돼야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488520&cloc=rss|news|column
검찰 수사결과 용산사건에 있어 김 후보자나 경찰의 책임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 그렇다면 김 후보자의 임명과 인사청문은 그대로 유지되는 게 정도(正道)다. [....] 자진사퇴라고 하지만 이는 사실상 대통령과 정권이 결정한 일이다. 청와대는 김 후보자에게 법적인 책임은 없지만 사건의 충격으로 볼 때 도의적·정치적 책임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 이명박 대통령은 사태 초기부터 선 진상규명이라는 원칙을 지켜 왔다. 노무현 대통령 [....] 에 비하면 괄목할 만한 진전이기도 하다.
: "...드러났다."라는 건 뭔가 의혹과 앙금이 해소되었다는 뉘앙스가 강한 표현인데, 최소한 상식이 있는 자, 검찰 수사결과로 김석기와 경찰에 책임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라는 표현을 쓰지는 못할 터다. 사설은 그 당대의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를 개별 언론의 자유로운 입장에서 고민해야 한다. 사설은 무엇보다 가치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가치판단하기 위해 판단의 전제, 그 재료에 고민해야 한다. 중앙일보에는 이게 없다. 검찰 발표가 마치 전지전능한 신의 계시인 것처럼 무조건 옳다고 전제하고 있다. 사설로서는 빵점이다.

그 저질스러움은 동아와 흡사하지만, 하지만 뭔가 더 저질스럽고, 어처구니없다 싶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건 이런 이유다. 거기에 더해 "정도(正道)"라는 둥, "(노무현과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진전"이라는 둥의 기도 안차는 평가들을 무슨 대단한 객관적인 사안 분석의 결과인양 읊조이고 있는 건 놀라운 자기 기만이다. 중앙일보도 이게 아니라는 건 알거다. 하지만 자신의 정파적 당파, 아니 이런 폼나는 표현을 쓰기도 어려운, 그냥 이익을 위해서 그걸 눈감는다. 

참고. 의인 김석기 뎐(傳)과 그 해제(解題) (완군, 미디어스)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40
: 위 중앙의 보도태도를 풍자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글.


[한겨레] 김석기 사퇴로 끝낼 일 아니다
http://www.hani.co.kr/arti/opinion/editorial/338027.html
특 별검사제 도입을 통한 재수사는 불가피하다. 또, 개발 논리만 앞세운 겨울철 졸속 철거나 ‘법과 원칙’을 앞세운 조기 과잉진압은 이명박 정부의 불도저식 국정운영에서 그 근본 원인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이 용산 참사에 대해 사과해야 마땅하다.
: 좀 뻔하고, 식상하다는 느낌이 강하다. 이왕 좀 강하게 어필하고 싶다면 곽병찬처럼 강하게 나가는 것도 좋지 않나 싶다(곽병찬은 칼럼에서 '이명박은 사이코패스'라고 매우 강한 어조로 성토). 한겨레 사설은 좀  뭐랄까, 대개 밍숭밍숭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다.


[경향]‘용산 참사’ 수사 결과, 기만이고 야만이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2100311025&code=990101
이명박 정권이 기회 있을 때마다 외쳐온 ‘법치’는 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게 한다. 우리는 이번 수사가 국민 기만이고, 야만의 극치라고 본다.  무고한 5명의 생명을 앗아가고도 책임질 사람은 물론 사인도 없다니 절망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 [....] 성장제일주의 재개발 정책으로 생존권마저 박탈당한 채 망루에 올라야 했던 철거민들을 죽음으로 내몬 참사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는 한 제도적 보완책이 제대로 나올까 싶다. [....] 국회 국정조사나 특별검사제 도입이 불가피해진 까닭이다.
: 위 한겨레 사설과 비교한다면 그 메시지라는 차원에서는 대동소이 하지만 그 문장이 갖는 힘(가치중립적인 그 수사의 표현력으로만 평가해서 '선동성')은 훨씬 뛰어나지 않나 싶다.


[미디어오늘] 용산참사와 권력, 그리고 수구언론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7178
서 울 용산 참사에 대한 검찰 수사는 권력층의 모순구조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명박 정권의 법치를 앞세운 반인권적 통치, 생존권 주장을 테러로 몰고 간 수구언론의 반사회성이 검찰 수사에 100% 반영되었다. [....] 용산참사에서 경찰력 투입은 정당했고,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도 아무런 흠이 없지만 김석기 본인이 사퇴하니 이번 일의 종지부를 찍겠다하는 식이다. 눈가리고 아웅 하는 짓이다. 국민을 바지저고리로 여기는 권력의 오만한 태도다.
: 미디어오늘에서도 사설이 종종 나오는구나... : )

2. 최고의 사설 : 한국일보

[한국] 김석기 후보자 사퇴는 사필귀정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902/h2009021002313476070.htm
검찰이 9일 용산 철거민 진압 참사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예상대로 김석기 경찰청장 후보자 등 진압 작전 지휘선상에 있던 경찰은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  발화자를 찾지 못했으면서도 농성자들을 최고 무기징역까지 가능한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죄의 공동정범으로 기소 [....] 진압 경찰관 1명이 사망한 책임을 물어 농성자 3명을 단죄하면서, 농성자 5명이 숨진 데 대해서는 아무도 처벌하지 않는 이런 수사결과로 국민의 이해를 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 가장 균형감 있는 사설이 아닌가 싶다. 특히 '농성자들'과 '경찰'에 대한 검찰의 편향을 지적하면서, 농성자들의 기소 내용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은 다른 사설들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매우 적절한 언급이라고 판단한다.

거의 안 읽었던(고종석 칼럼 빼고) 한국일보, 최근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조중동과 한경보다는 그 어조나 입장이 부드럽다. 정치적 당파도 조중동과 한경의 가운데 쯤인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닐테지만 담백한 느낌이 강하다. 좀 덜 피로하다달까, 뭐, 그런.

솔직히 한국일보는 한물 가지 않았나 싶기도 했고, 워낙에 온라인 '아이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아서(그림 장사) 제껴 놓고 있었는데, 최근 용산이나 강호순 관련한 사설들을 읽으면서 꽤 호감으로 변화했다.


3. 최악의 사설 : 조선일보

[조선] '용산' 책임은 철거민·경찰보다 정부·국회에 물어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09/2009020901805.html
재개발을 둘러싼 격렬한 충돌은 매년 되풀이됐다. 전철연이 개입한 굵직한 망루 농성만 꼽아도 1995년 용인 수지, 1997년 동대문 전농동, 1999년 수원 권선구, 2002년 노량진 상도동, 2003년 고양 풍동, 2005년 오산 세교 등에서 있었다. 그때마다 화염병·골프공 새총·사제(私製) 총·사제 박격포·LP가스통·불화살 같은 것이 난무했다. 용산4구역도 2006년 4월 재개발구역 결정고시가 난 후로 끊임없이 철거민 농성과 집회가 이어졌다. 야당은 정부를 규탄하기 앞서 자기들 집권(執權) 10년 동안 재개발 문제 해결을 위해 뭘 했던가 반성부터 해야 한다.

정부나 국회, 지자체 등이 나서 재개발조합과 세입자들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해주는 절차나 제도를 만들었다면 이번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철거용역업체가 "너는 목이 철로 됐냐"며 세입자 점포 앞에 썩은 생선을 뿌리고 세입자 상인은 화염병을 던져 맞서는 일이 되풀이된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지금까지 곳곳에서 철거용역업체와 세입자가 충돌하는 것을 '사인(私人)끼리 일'이라며 구경만 해왔다.

불법 농성에 나선 철거민들, 그리고 그 불법을 진압할 수밖에 없었던 경찰은 이런 정부와 정치인들의 직무유기 때문에 피할 수도 있었을 갈등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는 점에서는 같은 피해자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의 진짜 책임은 정부와 국회에 물어야 하는 것이다.


참조. [조선] "너는 목이 철로 됐냐"고 세입자 위협한 철거업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2/08/2009020800640.html
KBS가 7일 '뉴스 9'에서 용산4재개발구역의 철거용역업체 직원들이 세입자들을 상대로 휘둘러온 행패와 폭력을 보도했다. 작년 8월 촬영된 영상을 보면 [....] 식당 주인에게 "너는 목이 철로 됐냐"고 위협하는 장면도 있었다. 주민들이 신고를 해도 출동한 경찰은 용역업체를 감싸주기만 하더라는 것이다.

1. 조선일보 위 사설들은 중앙이나 동아에서 보여주는 노골적인 어조를 최대한 숨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동아나 중앙보다 그 선동 수준에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그 언어적인 조작 능력이랄까, 노하우랄까.. 위 동아나 중앙 사설들보다는 훨씬 뛰어난(?) 사설들이다.

2. 다만 그렇기 때문에 더 악질적이기도 하다. 이 사설들은 일견  부분적으로 상식적인 의견들, 주장들을 펼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상식은 오로지 '지금/여기'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성(정말 며칠의 간격을 둔 것에 불과하지만)이라는 '맥락'을 의도적으로 지운다. 이 점에서 동아나 중앙의 '무식한' 칼럼보다 교활하게 악질적이다.

만약에 위 조선 사설이 용산 참사 직후에 나왔더라면 매우 뛰어난, 평가할 만한 입장이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위 사설들은 공히 '그 시간'이라는 맥락에서 가장 중요한 '논점'들을 지우기 위해 그 사실들, 혹은 일견 합리적으로 판단되는 주장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형적이고, 정말 정교하게 다듬어진(이라기 보다는 그렇게 본능적으로 '타이밍'을 조절하는) 물타기 사설들이다.

가령 죽음에 대한 일말의 경건함을 보여줘야 하는 순간에는 법질서 타령하면서 전철연과 농성자들의 과격시위에 촛점을 맞추고, KBS의 보도 태도가 좀 이상해보인다 싶다는 말이 나오니 KBS가 뭔가 한 건 한 것 같은 것처럼 사설에 살짝 얹저 놓는다(MBC PD 수첩을 언급하는게 훨씬 상식적인 선택이었을텐데 말이지). 그리고 검찰 수사 결과 발표가 나오니, 그 자체에 대해선 논평하지 않고, 다시 원칙론으로 돌아서서 추상론을 읊조린다. 이 '타이밍'은 정말 의도적으로, 아주 정교하게 엇박자들이다.

이 점에서 이 사설들은 그저 단순히 무식하기만 하고, 노골적으로 이명박의 편에서서 '가카 쵝오'라고 아부하는 동아와 중앙의 사설들 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 참고.
시그노이즈. http://minoci.net/661  




신해철과 용산 퍼포먼스

2009/02/11 21:59

말들이 많은 것 같다.
별로 쓰고 싶은 주제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생각이 바뀐다.
나도 한 마디 더해본다.

1. 분유값? 밥벌이의 지겨움? 김훈?

밥먹고 산다는 거, 생존한다는 거, 이 빌어먹을 잔인한 정글에서 그게 무엇보다 우선하는 가치 이전의 가치라는 거, 여기에 동의한다고 치자.  (Y양과 신해철 얘기하면서 그녀가 표현한 것처럼) '품위 유지'를 위해 이런 뻘짓을 감행하는 것과는 생존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문제다. 써머즈가 쓰고 있는 것처럼 "한 2-3년 조용하다가 이런 광고를 찍으면 그동안 정말 힘들었겠구나 싶기도 할텐데, 계속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질타하는 독설로 먹고 살던 사람이 저러니" 어쩌라는건지.. 모르겠다.

이건 뭐, 분유값이니 김훈의 밥철학이니  그런 걸 꺼내들 사안이 아니다. 그냥 신해철이 뻘짓한 거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냥 뻘짓이다. 신해철이 위악적으로 '광고 대박'이니 '명박형님'이니 '각하 용돈'이니 하는 그 순간 신해철은 육갑팔색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게 되었다. 살다 살다 이런 병맛스런 궤변은 오랜만이다. 그에게 부여된 긍정적인 상징권력은 대한민국이 그동안 전통으로 축적한 참담한 이율배반의 표본들 가운데 꽤 이채로운 하나가 되었다. 그 뿐이다.

2. 퍼포먼스 혹은 궤변

신해철에게 이건 자기희생에 바탕한 역설적인 퍼포먼스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기 교육 철학의 연장이라는 둥, "CF 역시 아티스트에겐 표현의 일종"(오~!)이라는 둥의 나름 신해철식 궤변을 늘어놓는 것도 같긴 하다.

나를 희생양 삼아  악질적인 대한민국 교육의 모순구조를 극복해달라~~!! (대단하삼!)
ㅡ..ㅡ;;;

신해철이 언젠가 불법 다운로드 하는 네티즌에게 친히, 이건 엄연한 표준말이라고 하면서, 한 말씀하셨던 걸 기억한다.
그걸 신해철에게 돌려줄 차례다.

입 닥치셈!

친일파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악질적인 실상을 고발하기 위해서 자기희생 했고만.
조중동은 대한민국의 기만적인 구조를 증명하기 위해 그렇게 말도 안되는 억지소리만 늘어놓는고만.
역사적인 반동, 사회의 모든 부조리는 그럼 다 '퍼포먼스'고 '예술'이게?


3. 용산이라는 퍼포먼스

아, 그러고 보니 용산참사도 멋진 퍼포먼스다.
대한민국의 야만을 고발하기 위한 멋진 퍼포먼스였거다!
철거민도, 경찰도, 용업업체도, 조중동과 피디수첩도, 그리고 '똑똑하신' 검찰도 모두 아티스트였던거야!!!
그런데 이 멋지 퍼포먼스의 대차대조표는 도대체 어떻게 되는건가?
이 알흠다운 퍼포먼스들이 끝나면 대충 셈이 이렇다.

신해철이 아티스트로서 퍼포먼스 마치고 광고료 챙기는 사이에 용산 아티스트는 대충 이렇다.
경찰, 용역업체는 검찰 덕분에 어찌어찌 넘어간다.
그런데 여기 주연 하나 더 있지, 철거민 농성자들, 전철연 빨갱이새끼들.
얘네들은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사죄
(최고형 무기징역)의 공동정범으로 기소된다.

'명박형님 용돈' 타령하면서 "CF를 아티스트의 표현"으로 승화시킨 위대하신 신해철 형님의 놀라운 업적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은 그렇게 그렇게 말랑말랑하고, 낭만적인 곳 아니다.

4. 아티스트

아이러니와 역설이 예술이 되려면 그 아이러니와 역설은 진실에 의해 지배되어야 한다.
진실이 아이러니와 궤변에 의해 지배되면 그건 개소리거나, 뻘짓이 된다.
좀더 노골적으로 지적하면 현실에 대한 가치판단을 지워버리는 기만의 화장술이 된다.

그건 예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아티스트"가 추구해야 하는 진실의 반대편에 서 있다.


* 경과
신해철이 광고 출연한 학원 하이스트 "매출상승 NO" - 사교육을 말아먹는 걸로 본인 소신을 증명한 신해철씨
: 노이즈마케팅의 부작용(?) 사례로 기억할 민한 사건일 듯.


* 관련
http://blog.summerz.pe.kr/1364 (써머즈)

 
* 이 글은 최근 꽤 바람직한 변화 모습을 보여준(진심으로 환영할만한), '유사 저널리즘 유통망'에 예외적으로 송고합니다.




왕가위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잔상은 실연하고 난 뒤에 뭔가를 입 안으로 넣는 여자들이다.
그녀들은 국수를 먹거나(타락천사),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그녀들은 이제 세상이 끔찍하게 싫어졌고, 정내미 떨어졌다.   
그는 떠났다.
이제 그 웃음도 그 따뜻한 공기들 사이를 떠돌던 봄날 햇빛 같은 음악도 그녀들 곁에는 없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뭘 그렇게 꾸역꾸역 먹는걸까.
그건 희망인걸까, 아니면 환멸인건가, 아니면 그냥..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던걸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실연은 스물살, 혹은 열아홉에 찾아왔다.
너무 오래 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그건 고등학교 3학년을 자퇴하고, 한 일이 년 사이에 생긴 일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설렘의 기억은 그 아이, 투명하게 노랗고, 푸른 햇빛, 파란 대문....
아무튼 내 쪽에서는 사랑이지만, 그 아이 쪽에서는 우정인 관계가 끝난 뒤에 나는 한동안 밥을 먹지 못했다. 그 때는 정말 밥맛이 없었다. 밥이란게 뭐지... 세상에 그런 것도 있나? 세상에 아무 것도 없었다. 지금은 생각나지 않지만, 그 때 어떻게 화장실에는 갔던거지? 숨은 쉬었던건가? 그런 궁금증이 생긴다. 아무튼 작은 골방, 그 어둠이 며칠인지 모르게 나를 위로할 뿐이었다.

다시 돌아가면, 그 뒤로는 실연, 혹은 그 비슷한 무엇을 하더라도, 밥 잘 먹는다...
물론 아주 가끔은 안 그럴 때도 있었다.
한 번, 혹은 두 번쯤.

사는게 점점더 재미가 없다.
왕가위 영화의 여인들은 여전히 사랑스럽지만, 그녀들은 여전히 실연한 뒤에 참 우아하게도, 사랑스럽게도 뭘 그렇게 꾸역꾸역 먹고 있지만.... 그게 이제는 별다른 감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왕가위를, 아니 그 이미지들을 정말, 그 날, 그 시간의 햇빛들처럼 애착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런 건 별로 남아 있지 않은건지... 아무튼 왕가위의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를 벌써 세 번째 끊어서 보고 있다. 그 다음을 넘기기가 너무 아쉬워서가 아니라, 보기는 봐야겠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공허와 무기력과 지루함 때문에 이제 겨우 이십 몇분쯤을 봤을 뿐이다.

이 영화는 아무래도...
한 한 달에 걸쳐서, 혹은 그 이상으로 시간을 두고 보게 될 것 같다.
물론 아예 보다가 말지도 모르겠지만...

참 식상하고, 지루하며, 문득 환멸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