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긴 글.

2010.2.2.일자 위클리경향 커버스토리(오, 가문의 영광 :p)의 인터뷰 후기 겸 이 특집기사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다. 인터뷰는 대략 3시간 동안 경향신문 사옥 앞 다방(무슨 유서 깊은 다방이라는데)에서 진행됐다. 이 글은 특히 "주제와 관련된 좀 더 자세한 뒷이야기를 블로깅으로 들려주면 좋겠"다고 요청한, 내가 무척 존경하는 한 블로거벗을 위해 쓰는 글이다.  

0. 포르노를 좋아하는 블로거
“저는 저 스스로 속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든 사회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속물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요. 저는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에요. 포르노를 즐겨 봅니다. 그래서 포르노 합법화를 지지합니다. 그렇다고 노골적으로 상업적 이득을 취하거나 반인격적 태도를 취하는 경우는 경종을 울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흑백을 가리면서 먼저 어떤 사람의 의견을 재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전적으로 한쪽의 입장만 옳은 이슈나 쟁점을 본 적이 없습니다. 회색의 지점에서 고민하고 성찰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진보의 이상 아닐까요.”(나)

- 정용인 등, 위클리경향 [커버스토리] 왜 우리는 새로운 진보를 꿈꾸는가' 중에서

종이 매체 속성상 온라인처럼 넉넉한 공간을 갖고 있지 않아서 함축이 꽤 심한 편이긴 하다. 그럼에도 이정도라면 꽤 훌륭하게 정리한 것 같다. 다만 위 인터뷰 기사 말미 문단에서 "포르노를 즐겨 본다"와 "포르노 합법화를 지지한다"는 인과관계("그래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포르노를 즐겨 봐서 합법화를 지지하는 건 전혀 아니고, 양자는 따로 따로다. 포르노를 즐겨보지 않았더라도, 포르노 합법화는 지지했을거다. 사소한(?) 의미 확정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이별을 해서 포로노를 즐겨보게 된 좌파 아자씨?"(너바나나)라거나  "포르노 부분이 자칫 새로운 진보라는 컨셉에 잘못된 선입견을 줄 지도 모른다는"(아거) 애정어린 우려에 공감한다. 하지만 나는 포르노를 좋아하는 블로거가 맞는 걸 뭐. 내가 진보인지 아닌지는 대단히 불확실하지만, 내가 포르노를 좋아한다는 건 아주 확실하다. 나는 포르노 합법화를 지지한다. 내가 좋아하는 포르노 배우들의 얼굴을 나는 열명 이상 즉각적으로 떠올릴 수 있고, 선호하는 메이커를 이야기할 수도 있으며(가령 marc dorcel이나 digital playground), 특별히 좋아하는 작품(!)들도 있다.

물론 그 작품들을 [토토의 천국]이나 [열혈남아] 혹은 [브레이킹 더 웨이브]와 나란히 놓을 수는 없을테다. 그게 내 지적 속물근성이다. 하지만 제목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포르노물들과 내가 감동해마지 않았던 그 위대한 걸작 영화들을 놓고 내기를 하면, 가령, 너 무인도에서 죽을때까지 영화 하나 밖에 못봐, 뭐볼래? 이런다면, 이 질문은 언젠가 영화잡지 '키노'에서 김창기 혹은 김창남 교수에게 한 질문이었는데, 김교수는 '당연히 포르노'라고 답했다, 물론 내 대답도 같다, 당연히 포르노다. 내가 혼자서 죽을 때까지 붙들 수 있는 건 [열혈남아]나 [토토의 천국]이 아닐 것 같다. 아무리 기적같은 연기를 보여준다고 해도 에밀리 왓슨을 죽을 때까지 반복해야 봐야한다는 건 축복이 아니라 고문이다. 나는 아마도 'Story of Sophia'를 선택할거다. 이 작품은 포르노그래피의 걸작 'Story of O'를 나름 모티브로 한 marc dorcel의 작품이다.

포르노는 아주 강력한 정치경제적 함의를 갖는 기호다. 그것은 대한민국의 이율배반을 상징한다. 대한민국은 포르노를 가장 사랑하면서, 또 대외적으론 엄청나게 증오한다. 포르노는 아예 제도 바깥에 있고, 법 바깥에 있다. 포르노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이 순결하고, 고결한 사회는 그 포르노가 불법인 사회다. 정신분열증이다. 다른 설명은 불가능하다. 그 정신분열증인 대한민국에서 온갖 고위층, 권력층이 또 좋아하는게 룸살롱이고, 붕가붕가다. 이른바 텐프로라는 말은 대한민국의 정신분열증을 희극적으로 상징한다. 이건 성에 대한 계급적 결계다. 성공의 지표다. 포르노는 그렇게 계급화된 섹스 피라미드 맨 밑바닥에 있다. 이건 '접촉'이라는 본능의 문제, (대부분의 남자동물들에겐) '심리적 접근성'의 문제다. 포르노가 상징을 심리적으로 모방하는 행위라면, 룸살롱은 그 상징을 실현하는 공간이다. 양자는 정말 엄청나게 다르다. 그리고 물론 나는 룸살롱이(적어도 남자동물들에게) 대한민국에서 가장 매혹적인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심지어 좌파? 교수님들도 좋아한다는 이 환상특급의 공간)에 별다른 이의를 달고 싶지 않지만, 룸살롱을 가느니 차라리 포르노를 보겠다. 그게 내 나름의 (섹스) 철학이다.

좀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섹스는 공짜라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다. 섹스 유사의 '상징'(바로 포르노!) 을 문화적으로 소비할 수는 있지만, 섹스를 돈 주고 사는 일에 대해 나는 여전히 거부감을 갖는다. 물론 주변 남자동물들의 관습적 코드들을 무슨 질색하면서 유난을 떨거나 그러진 않는다.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섹스는 공짜가 아니다. 점점더 공짜가 아닌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내가 '미수다'를 싫어하는 이유는 '섹스는 공짜다'라는 내 신념에 반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의 연예프로그램들이 '섹스는 공짜다'라는 고전적인 명제를 적극적으로 비웃는 대단히 위험한 문화적 코드들을 형성해가고 있기는 하다. 이건 정말 위험한 코드다. 이 코드는 나같은 도시빈민이 아니라, 기득권측에게 오히려 위험한 문화 코드다. 왜냐하면 기득권층의 욕망을 흉내낼 수 있는 가능성이 점점 더 축소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득권은 적당히 자신들의 것을 지키면서, 사회가 아주 극단적으로 폭발하는 건 또 막아야 하는데, 그 격차가 지나치게 커지고 있다. 남자든 여자든 섹스에 대한 낭만적 관극틀이 야수화되고, 성에 대한 실질적 접근성이 체계적으로 양극화되고 있다. 한겨레 21에서 적절하게 다룬 '88만원 세대의 사랑과 섹스'라는 주제는 이런 위기의 상징이다. 이유는 다른게 아니다. 돈이다. 혹은 돈과 등가로 놓여 질 수 있는 유사의 대리물들이다. 학력, 직업,  육체, 부동산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다른 이유를 알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나도 궁금하다, 알려달라). 섹스가 돈으로 곧바로 교환되는 문화적 코드는 대단히 위험한 코드다. 결핍이 필연적으로 불러오는 욕구불만이 그 임계점을 넘어서 폭발하면, 체제는 위험에 빠진다(이건 무슨 사이비 섹스 음모론 같다). 그런 점에서 대딸방과 키스방은 체제수호기제다. 포르노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룸살롱과의 간극과 심연은 점점 더 깊어진다.

그렇다.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 그러니 나 같은 사람들이 이 빌어먹을 시스템에 순응하는 가장 큰 이유가 나는 안정적인 섹스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만은 아니겠으나, 안전한 섹스를 확보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다. 그 섹스를 통해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을 내 씨앗에게 배타적으로 물려줘야 한다는 엥겔스스러운 관점을 떠나서, 남자든 여자든 안정적인 섹스가 가능할 수 있는 주류적 문화 코드를 거의 본능적으로 내면화시키기 때문이다. 섹스는 결혼이라는 낭만적인 각본으로 포장된다. 그게 정치경제적인 시스템의 회로이든 아니든 간에 그렇다. 대한민국에서 섹스 혹은 그 공식적 제도로서의 결혼을 성립시키는 코드는 안정된 직장이고, 부동산이다. 부동산을 위해 한 몸 받쳐진 그 직장에서 정치적, 문화적 상상력을 끊임없이 거세당하면서, 이중적인 성적 접근성을 확대하려는 본능적 욕구를 이율배반적으로 강화시키며, 자식과 마눌님, 서방님을 위해 하루 하루 살아가는거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나는 보수주의자다. 체제를 걱정하고 있잖아. 섹스는 욕구의 가장 순수한 발현이고, 어떤 점에선 궁극적 발현이다. 가장 위대한 예술들은 어쨌든 섹스와 밀접한 관련을 맺곤 한다. 그런데 섹스에는 위험한 코드들이 숨겨져 있다. 그것이 본능이기 때문이다. 본능은 파괴적이다. 나는 성악설 신봉자인데, 왜냐하면 본능은 생존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생존은 선택과 배제의 게임이다. 잘난 놈만 사는거다. 그건 당연히 파괴적이다. 그 파괴의 날선 칼날들을 숨기고,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게 마모시키기 위해 제도와 문화가 거기에 개입한다. 이런 저런 제도와 법률, 그리고 관습적 문화 코드들이 그 본능적 욕구 속에 심어진다. 과거에 그 문화적 각본들이 본능에 저항하는 스토리를 갖고 있었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그 본능을 정치경제적으로 정당화하는 스토리를 갖는다. 역사를 통해 그 코드는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진보가 아니라 진화다. 인간은 좀더 고등한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 진화하고 있다. 인간은 좀더 고등한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 진화하고 있다. 20세기 섹스의 문화 코드가 '낭만적 연애 혹은 결혼이라는 각본'이었다면, 현재의 지배적인 문화 코드는 '돈'으로 교환 가능한 '육체'다.

점점 더 무시무시하게 그 껍질을 벗고 있다. 과거에는 돈과 육체가 서로 별개였다. 인격의 물적 근거로서 육체를 금전적인 가치로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적어도 겉으론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돈과 육체가 유사어에서 동의어로 이행하는 단계다. 육체는 자랑스러운 금전적 가치를 통해 이야기된다. 그리고 공짜 섹스는 점점더 사라져간다. 과시적인 섹스 접근권이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특권적 표지가 마치 성공 지표인 것처럼 사회에 만연해 있다. 오랜만에 대학동기들을 만나 하는 자랑이 '룸살롱'인 사회. 이건 정말 위험한 징후다.

이런 유사 사회심리학적인 관점이 아니라, 그저 땡기는대로 이야기해보자. 미수다가 역겨운 이유는 스스로 포르노라는 걸 숨기는 포르노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변장에는 이유가 있다. 그게 맨얼굴을 드러내면, 노골적 폭력성이 전면에 그 야만의 얼굴을 드러내면, 그 사회에는 이제 파괴만이 남는다. 미수다가 역겨운 이유는 스스로 포르노이면서 포르노를 조롱하고, 그걸 부정하는 포르노이기 때문이다. 즉, 그런 자기 기만을 통해 이제 미수다와 같은 외적 교양 표지는 육체적인 표지와 구별불가능하게 잡종교배한다. 물론 그것은 유치한 기만이다. 추상적인 이미지 수준에서만 적당히 자신을 위장한다. 결국은 교양이라는 표지는 자기기만의 꼼수일 뿐, 결국은 발가벗은 육체가 전적으로 승리하고, 지배적인 룰로 고착한다. 우리는 교양으로 둔갑한 아주 아주 폭력적인 포르노들을, 미수다뿐만 아니라, 매일매일 시청한다.

물론 섹스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적 코드에 공통적으로 내재된 핵심적 원형이다. 나는 정치가 섹스보다 고귀하다거나, 종교가 섹스보다 성스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역도 성립한다. 성스러운 섹스가 있고, 천박한 섹스가 있다. 그 형식을 채우는 인간의 실존이 그걸 결정한다. 종교도, 정치도, 사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그저 다른 영역의 형식일 뿐이다. 과거 사회주의의 형식적 도덕이 붕괴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에서는 포르노산업이 부흥한다. 인간이란게 원래 이런 동물이다. 이제 포르노는 인터넷을 부흥시킨 원동력이면서, 또 소위 진보의 금기로써 존재한다. 나는 포르노를 즐겨본다. 그게 나를 설명하나? 아, 그런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공짜 섹스주의자다. 이것들은 내가 욕구하고, 애착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 가운데 한가지일 뿐이다. 그것은 나라는 중층적 욕망을 아주 간결하게 설명하는 핵심 코드다.  그것은 이상와 현실의 간극, 욕망과 초자아의 심연 사이에 놓여진 위태로운 외줄이다. 나는 거기에 서 있다. 나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하다. 그게 나다. 하지만 내가 그것은 아니다.


* 관련
강남좌파
강남좌파와 시골우파
강남좌파와 선거혁명 에서 이어지는 글이라고도 볼 수 있을 듯... 

위클리경향 커버스토리 뒷이야기 (미디어토크. 팟캐스트. 22분)

* 이 글은 서설에 해당하고, 좀더 이어질 예정(물론 예정일 뿐...;;)입니다.



* 트윗 자료 재활용 차원. 트위터에 남겼던 글들을 재취합 및 보충. 1차 자료 접근성 확대 차원에서 올려본다.

0. 피디수첩 형사사건(명예훼손/업무방해) 판결.
판결문은 크게 ㄱ. 공소사실 . ㄴ.명예훼손 판단(대부분이 이 부분) ㄷ.업무방해 ㄹ.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 글은 ㄴ.의 다섯개 쟁점을 중심으로 요약 정리하도록 한다.
서 울 중 앙 지 방 법 원
사 건 2009고단3458 가. 명예훼손 나. 업무방해 (판결선고 2010.1.20)

피 고 인 : 피디4인, 작가1인.
조00 (61-1), 송00 (58-1), 김A (78-2), 이00 (76-1). 이상 프로듀서. 김B (72-2) MBC 작가

변 호 인 : 법무법인 덕수 담당 변호사 김형태, 김진영
검 사 : 전현준, 박길배, 김경수, 송경호

1. 사건 개요  : 공소사실
피디수첩 vs. 농림수산부 민동석 정운천 : 명예훼손
피디수첩 vs. 미국소 수입업자들 : 업무방해

피디수첩 혼내달라하고, 위 민동석, 정운천 등과 미국소 수입업자들이 각각 명예훼손, 업무방해로 피디수첩을 고소, 이를 검찰이 받아 공소 제기. 그런데 (믿었던?) 법원이 놀고있네(무죄판결), 이런 사건이다. 형사사건이란 점에서 판결에 적극적으로 찬동한다.
공중파 방송사인 주식회사 문화방송(이하, 'MBC'라고 한다)은 2008. 4. 29. 23:00경부터 24:00경까지 'PD수첩' 프로그램에서, '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라는 제목의 방송(이하, '이 사건 방송' 이라고 한다)을 함으로써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2. 명예훼손 판단
개요
판결문 대부분 차지. 쟁점은 1) 다우너 소 2) 아레사 빈슨 3) MM형 유전자 4) SRM 5) 협상단 실태 파악 등 다섯이다. 특히 아레사 빈슨 부분에 '정지민' 부분이 따로 언급돼 있다.

쟁점 1. 다우너 소 부분
영상 속 다우너소들이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 따라서 ‘광우병 의심소’라고 보도한 걸 허위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소가 주저앉는 이유는 수십 가지가 있고 미국이 1997년 사료금지조치를 취한 이후에 태어난 소에서는 광우병에 걸린 소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는 이 사건 동영상 속에 등장하는 다우너 소들이 광우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단정할 수 없고, 따라서 피고인들이 위 동영상 속에 등장하는 다우너 소들을 ‘광우병 의심소’라고 보도하였다고 하여 이를 허위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쟁점2. 아레사 빈슨

MRI 결과 인간광우병(vCJD) 의심진단을 받고 사망 하였고 방송당시는 사인 불분명했다. 사건방송 이후 실제사인이 급성베르니케 뇌병변으로 밝혀졌다고 해도, 보도 내용을 허위라고 볼 수 없다.    
아레사 빈슨이 MRI 결과 인간광우병(vCJD) 의심진단을 받고 사망하였고 이 사건 방송 당시까지는 그에 대한 사인이 밝혀져 있지 않았으므로, 이 사건 방송 이후에 실제 사인이 급성 베르니케 뇌병변으로 밝혀졌다고 하여, 이 부분 보도 내용을 허위라고 볼 수 없다.          

쟁점2-1. 아레사빈슨 > 정지민 부분 > 정지민 진술의 신빙성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것을 직접 경험한 것처럼 주장하거나, 검찰조사 당시 진술을 납득할 이유 없이 이 법정에 번복하고 있는 점 등..믿기 어렵다.

정지민의 진술은 아래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자신이 경험하지 않을 것을 직접 경험한 것처럼 주장하거나, 검찰 조사 당시 했던 진술을 납득할 만한 이유 없이 이 법정에 이르러 번복하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그대로 믿기 어렵다.

정지민은 프리랜서 번역가로서 피고인들이 취재한 영어 취재물 중 일부분을 번역하고 실제 방영된 프로그램의 영상 속 영어 부분과 이를 위해 준비한 자막의뢰서상이 번역 자막이 서로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영어 감수를 하였을 뿐 이 사건 방송의 제작 과정에 참여한 바 없고 보조 작가 외에 제작진을 만난 적이 없어 이 사건 방송의 제작의도, 제작과정, 취재 내용 등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정지민은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 또는 인터넷 카페 게시글에서, 자신이 번역한 로빈 빈슨의 인터뷰 테입에는 아레사 빈슨이 위 절제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거나 비타민 처방을 받았다는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데도 피고인들이 이를 고의적으로 빼고 방송한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지민이 번역한 로빈 빈슨의 인터뷰 테입은 물론 번역하지 아니한 인터뷰 테입 어디에도 아레사 빈슨이 위 절제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거나 비타민 처방을 받았다는 부분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찾아볼 수 없다.


쟁점3. MM형 유전자
중간 ‘한국인이 광우병쇠고기 먹으면 발병 확률이 약 94% 가량 된다’는 내용이 들어있으나. 이는 과장, 잘못된 이해 표현, 전체 이 부분은 보도는 중요 부분에 객관사실과 합치돼 허위라 볼 수 없다.

위 인정사실에 의하면, 국내 정상인이 프리온 유전자의 코돈 129번 유전자형이 MM형이어서 다른 나라에 비해 인간광우병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아 유전적으로 취약하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명예훼손에 있어서 적시된 사실의 내용 전체의 취지를 살펴보아 중요한 부분이 객관적인 사실과 합치되는 경우에는 그 세부에 있어 진실과 약간 차이가 나거나 다소 과장된 표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허위의 사실이라 볼 수 없다 할 것인바, 앞서 인정한 바와 같이 이 부분 보도내용 전체의 취지는 한국인이 유전적으로 인간광우병에 취약하다는 것이어서 비록 그 보도내용 중간에 ‘한국인이 광우병에 걸린 쇠고기를 섭취할 경우 인간광우병이 발병할 확률이 약 94% 가량 된다’는 내용이 들어 있기는 하나, 이는 전ㆍ후 문맥에 비추어 과장되거나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보이므로, 이 부분 보도내용은 중요한 부분에 있어 객관적인 사실과 합치되어 허위라 볼 수 없다.


쟁점4. SRM 부분
특정위험물질(SRM)이 모두 7가지라 보도한 것은 우리정부 종전분류기준에 따른 것, 30개월미만 경우 편도와 회장원위부만 제거하고 남은 다섯가지는 들어온다 보도하였으므로, 내용을 허위라 볼수없다.

소의 특정위험물질을 분류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기보다는 나라 또는 분류기준에 따라 다양한데, 소의 특정위험물질이 모두 7가지라고 보도한 것은 우리 정부의 종전 분류기준에 따른 것이었다고 볼 것이고, 30개월 미만의 경우 편도와 회장원위부만 제거하고 남은 다섯가지는 들어오게 된다고 보도하였으므로, 이 부분 SRM 관련 보도 내용을 곧 허위라고 볼 수 없다.



쟁점5. 협상단 실태 파악 관련
인간광우병 의심진단 받고 사망한 미국여성 최종사인 밝혀지지 않은 상황서 정부가 수입 협상 체결한 것에 대해, 미국소 안전성과 도축시스템 실태파악에 소홀하였다 평가하였다고 허위라 볼수없다.
우리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쇠고기 수입위생조건 개정을 요구받고 현지 실태 조사를 하여 소 도축시스템을 파악, 점검하고 전문가회의, 가축방역협의회 등 관련 당사자들의 의견을 구하는 등 이 사건 쇠고기 수입협상 체결 전에 독자적인 수입위험분석 절차를 거치기는 하였으나, 그러한 절차를 거친 뒤 미국의 도축시스템의 제도적 문제를 엿볼 수 있는 다우너 동영상이 공개되고 그에 이어 미국 사상 최대 규모의 쇠고기 리콜사태가 있었고, 되고 그에 문제가 있는 사료금지조치, 잦은 SRM 규제위반사례, 오류가능성이 있는 치아감별법에 의존한 SRM 여부 판정 등 현재 미국이 실시하고 있는 광우병위험통제 정책만으로는 미국산 쇠고기에 광우병 위험성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어렵다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 내 첫 감염 사례가 될 수 있는 미국 거주 젊은 여성이 인간광우병 의심진단을 받고 사망한 사실이 발생하였다면, 이는 미국산 쇠고기에 안전성에 관하여 의구심을 가질 만한 사정 변경이 있었다고 볼 것인데, 인간광우병 의심진단을 받고 사망한 미국 여성의 최종 사인이 밝혀지지 아니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를 수입하기로 협상을 체결한 것에 대해, 피고인들이 정부가 광우병으로부터의 미국산 쇠고기의 안전성과 미국의 소 도축시스템 실태를 파악하는데 소홀히 하였다는 취지로 평가하였다고 하여 허위라고 볼 수 없다.

명예훼손 전체에 대한 판단

1.) "감시와 비판행위는 언론자유의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인 보도의 자유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가 저하될 수 있다고 하여 바로 공직자에 대한 명예훼손이 된다고 할 수 없다."      
2.) "명예훼손 혹은 그런 고의 있었다 볼수없다. 피디수첩이 피해자의 사회적 평가 저하시킬 구체적인 사실을 적시한 바 없다." / 명예훼손 사실 자체를 불인정 / 즉, 사실인정 후 위법성조각 아님.

3. 업무방해 부분에 대한 판단

중요부분이 객관적 사실과 합치되어 허위라고 볼 수 없다. 피디수첩 보도는 허위사실유포에 해당하지 않는다. 수입협상 문제점을 비판한거지 수입업자 업무방해 고의 없다. 업무방해 전제사실 자체를 불인정.

4. 결론
피고인들에 대한 이 사건 공소사실은 모두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하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후단에 의하여 피고인들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다.



* 판결문 다운로드 안내
http://bit.ly/4SAvMV (다음카페, 한마법우회) : 나는 여기서 다운 받았다.


* 보유 : 정지민의 공개질의서
"...무죄 결론을 떠나서, 그야말로 수준이하입니다. 평균 수준의 지능과 편파적이지 않은 심성..."
정지민, 피디수첩 무죄판결 문성관판사에 대한 공개질의서 중에서
- http://3.ly/jAbn // via @pariscom
좀 전여옥스럽다. 정지민씨가 "수준 이하"라고 "영문, 국문 독해능력" 운운하며 피디수첩 무죄판결 문판사를 비판하면서 남긴 질문이 무려 67개다. 중언부언과 신경질적 표현에 있어 참으로 수준높은 국문능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제시카의 얼짱각도

2010/02/02 11:47
약 1분전. 트윗팅을 하다가 접한 어떤 사진.
@lovedweb의 트윗픽.

1. 이거슨 다년간 훈련된 이른바 얼짱각도인 것 같다.
2. 그게 왜 문득 묘한 쓸쓸함으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3. 가장 아름다운 각도를 위해 훈련된 그 반복과 연습이 무슨 영화 속 발랄깜찍한 주인공의 쓸쓸한 과거 회상씬을  보는 듯한 묘한 느낌을 안겨주는 거디었던 거디다.
4. 그런데 이런 개똥스런 감상도 감정과잉인가 싶다.
5. 나는 사진을 꽤 싫어하는데, 별다른 이유 없다. 못생겼기 때문이다.
6. 잘 생겼다면 사진을 꽤 좋아했을 것 같은가? 어. 그랬을 것 같어. ㅎㅎ.
7. 자기 얼굴에 자신을 갖는다는 건 참 나에겐 멀고 먼 붙잡을 수 없는 환상 속의 이야기다.
8. 이게 전적으로 사회가 강요하는 비교강박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지 않지만, 조금은 그럴테다. 
9. 오늘 제시카라는 가수의 이름과 얼굴을 처음으로 응시했다. 아, 얘가 제시카란 아이로구나...
0. 아름다움이라는건 불가피하게 매혹적이고, 또 폭력적이다.


* 꽤 오랜 기간 동안 묵혔던 글이고, 쓰다말다를 반복한 글인데, 이왕에 쓴거 부족하나마 공개하자는 무대뽀 심리로 공개한다.

 '트위터의 과장된 이미지'란 글을 썼다. 모처럼 댓글 풍년. 자신의 아이폰 구매기념으로 댓글 테스트 및 블로그 모니터링을 해준 경우도 있었고(Dalky), 요즘 거의 매번 히로시마원폭급 댓글로 블로깅 보람을 일깨우는 이슬뤼(icelui)의 댓글도 빠지지 않았다. 말미에 레오포드(leopord)의 댓글이 도착했다. 발췌해보면 이런 내용이다(이 글 주제에 어울리는 어조를 위해 서술어 부분을 사소하게 평서문체로 수정했다. 이 점은 레오포드의 양해를 구한다.).

트위터의 유저 코드가 30대-남성-IT로 정리된다는 건 그만큼 기술의 변화에 빠르게 반응하는 건 20대가 아니라 오히려 30대라는 얘기다. 즉, 광파리의 전제("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걸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계층이 대학생인데 왜 트위터만은 받아들이지 않는 걸까요?")가 그닥 현실에 들어맞지는 않는다.

(트위터는) 심적으로나 물적으로나 접속하기 편한 매체는 아니다. 그런 점에서 "네이버 메인 +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 네이트온 메신저"라는 조합이 20대(더 코드를 세분화하자면 20대-여성-대학생)에게 더 친숙하다는 (써머즈의) 지적은 전적으로 옳다. 세 가지가 있는데 굳이 다른 매체를 찾을 동기가 없다. 다만 아이폰이 상용화되면서 웹 애플리케이션과 SNS 연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트위터에 대한 진입장벽도 이전에 비해 훨씬 낮아지지 않을까 추측해볼 뿐(물론 아이폰 가격이 점점 낮아지고, 공짜폰으로도 나온다는 걸 전제로 한 추측.).

덧붙여, 대학생(혹은 20대)가 트위터에 접속하는데 있어 지적인 면에서 주눅이 든다거나, 개방/공유/협력이 현재의 대세라는 지적은 IT 업계라면 몰라도 대학생들에게는 그닥 와닿지 않는 이야기다. 트위터에 전문가들이 더 많은 건 사실이지만, 지적 레벨의 격차가 엄청난 진입장벽으로 다가오진 않고, 민노씨도 공감했듯이 "아저씨가 많아서"가 세속적으로는 훨씬 설득력 있다. 개방/공유/협력이 대세라는 건... 좀 업계에 국한된 인식인 것 같고. 물론 이 세 가지 요소가 웹을 발전시켜왔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시킬 거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광파리도 언급했듯 경쟁사회에 너무 익숙해진 20대가 이 세 덕목(?)을 얼마만큼 소화할 수 있을지 좀 의문(물론 그것이 돈이 된다는 경영학적 마인드로 접근한다면 이미 대학생들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지도.).
- 레오포드(leopord)의 논평  

종종 오프에서 이야기하곤 하는 것. 웹과 친한 사회계층이 분명히 존재한다. IT업계 종사자, 교수/교사, 기자 등 미디어업계 종사자, 대학생,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다양한 유형의 백수다(^^). 예시에서 생략한 가장 중요한 (잠재)세력을 나는 '(특히 전업)주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계층은 거의 전적으로 '요리/인테리어/여행/여가'로 몰려 있다. 아쉽다. 불필요해서가 아니다. 대중적이고, 매우 필요한 영역이다. 하지만 그 영역에 전체 관심이 몰빵되어 있는 현상은 이상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쉽게 말하면 네이버의 풍경이다. 네이버는 드라마와 연예프로그램 뒷담화, 요리와 인테리어, 그리고 여행과 취미활동이 세상의 전부라고 믿게 하는데 거의 성공한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네이버는 인터넷 그 자체다. 그런데 네이버에는 정치경제가 없다. 그것이 네이버의 정치경제학이다.

다음(daum) 역시 이제는 (정치경제학적 관점에서) 미디어를 강조하지 않는다. 웹과 블로그에 대한 가장 강력한 진입장벽인 '시간'(강정수)에서 상대적으로 가장 큰 부피의 잠재력을 갖는 '전업주부'들과 친한 영역, 즉 일상과 여행, 요리, 인테리어 등을 강조하는 것 같다(일상/연예/연애의 전진배치, 그리고 정치/시사의 후퇴로 요약되는 최근 다음뷰 개편도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더불어 모바일과 연동한 실용적 도구들(다음맵 따위) 개발에 매진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현 정치경제 시스템에 훨씬 더 부합하는 손쉬운 길은 정치경제적 이슈를 따분하게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엔테테인먼트를 재생산하고, 소비하는 일이다. 이렇게 고전적 저널리즘의 주요 주제는 대중적인 관심권 밖으로 점점 더 멀어진다.

시스템의 정치경제학은 유저코드를 만들어낸다. 그 코드의 핵심은 당대의 정치적 경제적 권력의 의지다. 좀더 수월하게 자신의 자본이 의식적 하부기제라 평할 수 있는 웹의 담론 기제들을 통해 흘러가도록 그 정치경제적 권력은 직간접으로 그 유통의 풍경을 조율한다. 물론 그들만 게임 참여자는 아니지만,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 그 극단적 소수들은 게임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정치경제학적 상상력을 거세당한 유저 코드가 아니라, 그 안에 새로운 혁신과 정치적 상상력을 발아시킬 수 있는 유저 코드. 새로운 유저코드, 이것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정치경제가 없는 무서운 정치경제학이 웹을 지배하리라.

한편, 그 유저코드의 핵심에는 물론 지식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쉽게 말해서 가방끈 긴 자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물론 안내자 역할을 한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이런 극소수의 가방끈들이 아니다. 여전히 가장 중요한 건 전업주부이며, 낮은 임금노동계급이다. 그리고 가방끈들은 자신들의 장기자랑이 아니라, 그 장기자랑을 확장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전업주부와 노동계층이 그들만의 코드를 창조할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 이들이 웹으로 들어와야 한다. 이들이 웹에 눈떠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웹을 매개로 진화하고 있는 커뮤니케이션 기제들은 여전히 일부 화이트칼라의 전유물에 가깝다. 웹은 아직도, 그리고 당분간은 여전히,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장벽 없는 공간이 전혀 아니다.

내가 블로그에 애착하는 이유는 여전히 내가 생각하기에 웹에서의 가장 낮은 진입장벽에 블로그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낮은 문턱이 이제 점점 더 높아지는 것 같다. 이건 블로그를 통해 발현될 수 있는 광범위한 가능성들, 그 중에서도 소박한 보통 시민의 웹 근거지로서의 블로그의 가능성이 소실된다는 점에서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블로그 문화를 지배하는 유치한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장기자랑' 문화, 관계에 대한 전망의 부재, 그리고 무엇보다 비평, 독자권력의 미성숙은 이런 위기를 키운다. 누구나 쓰기만 하는 블로깅을 하려고 하고, 읽으려는 블로깅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태의 핵심이다. 블로그 역시 화이트 칼라와 웹과 친한 계층이 끼리끼리의 폐쇄적 문화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제 한국의 노동 환경 속에서 시간이라는 근본적인 진입장벽 외에 '언어적/심리적 위계'라는 진입장벽이 존재한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싶어서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는데, 별 거 없는 것 같다. 여전히 쉽게 쓴다, 독자의 눈높이를 배려한다, 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데, 중요한 건 자신의 스타일을 죽이면서 구태여 쉽게 쓴다거나, 독자의 눈높이를 배려한다거나 이런 게 아니다. 이건 본질적으로 언어(습관)의 속성상 반영되기 어렵다고 본다. 결국은 블로그, 트위터 따위의 SNS가 엔터테인먼트의 가능성을 확보하는 방식이 필요한데, 그게 현재의 방식으로는 대단히 회의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시간도 없고, 거기에 언어적, 심리적 위계라는 보이지 않는 높은 진입장벽이 존재한다. 또 그걸 한다고 무슨 대단한 물질적인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다(대부분은 이런 보상은 없다고 봐야겠다). 물론 기꺼이 마케팅 이중대가 되어 자신의 블로깅 철학을 종속적 마케팅의 담보로 지불한 소위 '빠워 블로거'는 예외다. 아니 이들이야말로 블로그 영웅들로 이명박 시대의 성공이미지를 구현한다. 이것 역시 사태의 핵심이다.  

그러니 나는 정답이 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뭔가 시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어떤게 되어야할진 여전히 암흑이다. 그냥 저마다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지가 흘러가는대로 블로깅하는 고립적인 개별자들의 미약한 목소리만이 남겨진 것인가?

함께 공부하는 블로깅. 블로깅이 일방적인 계몽과 발표의 공간이 아니라 협업적인 학습의 공간, 그것도 대단히 유용한 공부방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야말로 전술한 모든 난제들을 효과적으로 깨뜨릴 수 있는 강력한 매력이다. 나는 매주 월요일 밤마다 한겨레블로그를 통해 만난, 지금은 거의 가족같은 벗들과 이야기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그저 한주일의 에피소드들을 나누고, 사적이거나 공적인 관심사들을 나눈다. 이 모임을 스카이프를 통해 진행한다. 일주일에 두 시간을 이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이런 모임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이런 시도는 마치 지난날의 '야학'을 떠올리기도 한다. 야학에는 선생님과 학생이 따로 없다. 선생님은 가르치며 배우고(강학), 학생은 배우면서 가르친다(학강). 블로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세상의 앎과 배움이 궁극적으론 모두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런 작은 시도들이 블로그 문화의 한 일상적인 풍경으로 정착한다면 유저코드에 따른 폐쇄적 단절은 상당부분 극복될 수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아, 함께 공부하는 블로깅, 자신의 앎과 경험을 나누는 블로깅을 하는 멋진 블로거는 생각보다 많다. 내가 학생으로 참여하는 아주 작은 모임이 하나 더 있는데, 내 블로그 영어 과외 선생님인 나솔이 진행하는 나솔영어교실이다.


추.
글이 어째 전혀 정리되지 않은 느낌이다...;;;; 그것도 블로깅의 묘미(?)라고 우겨본다.


* 발아점 
레오포드(leopord)의 댓글 논평



* 좀 지엽적이고, 식상한 이야기 같아서... 공개할까 말까 하다가.. 이왕 쓴거 공개하자... 싶어 공개하는 글.

사건은 간단하다. 네이버에서 새롭게 발표한 서비스('레시피 스마트파인더')에 대한 착오로 부터 비롯된 오해, 내 아이디어(소스)를 훔칠 줄 알았더니 네이버에서 먼저 준비한 서비스였다, 뭐 이런 사건(해프닝?)이다. 특허는 말할 것도 없고, 저작권 등이 경제적인 이익과 밀접하게 결부한 민감한 사안일수록 그 문제제기는 좀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당연한 교훈을 주는 사건이라고 하겠다. 이하 간략한 단상.

http://blog.naver.com/naver_search?Redirect=Log&logNo=20098801468  : 해당 서비스 웹페이지
http://xguru.net/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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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witter.com/xguru/status/8272050930
http://twitter.com/xguru/status/8271469956

http://twitter.com/xguru/status/8271016333


xguru (이하 '구루')의 문제제기와 이로 인해 이슈확산에 동참한 블로거, 트위터러들의 착오는 비교적 그 사정을 참작할 수 있는 착오라는 점에서 그 과실이 아주 무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이런 민감한 사안에선 그 문제제기가 좀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나, 즉 구루가 먼저 NHN쪽에 문의하고, 확인해보는 절차를 거쳤어야 하지 않나 싶은 아쉬움이 당연히 남는다(라고 말하면서도... 실은 이런 당연한 '절차'란 또 얼마나 귀찮고, 성가신 것인가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그게 '마땅한 순서'라는 점은 명백하다).  

사건에 대한 논평은 이쯤하고, 착오에 의한 오류 정보가 그 정보 대상자의 명예나 신뢰를 손상하는 아주 민감한 정보인 경우, 그 오류 정보의 자율적 정화(치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트위터의 빠른 정보 확산에 열광하지만, 오류 정보의 치유나 검증 시스템에 대해선 상대적으로 이야기가 적은 것 같다. 트위터의 빠른 정보 확산 속도에 反회고적 정보유통 속성(스트리밍)이 개입되면, 그리고 무엇보다 정서적인 편향성(약자 응원심리)이 개입되면, 트위터는 마녀사냥하기에 참 좋은(?) 도구 같다는 생각도 든다.

트위터와 같은 실시간 정보 흐름 매개를 통해 정보생산과 유통, 소비는 점점 더 가속도를 더해간다. 그렇다면 이런 속도의 진화와 더불어 정보 신뢰도를 검증할 수 있는 시스템, 오류 정보를 수정할 수 있는 시스템, 무엇보다 정보 참여자의 자율적 정화시스템은 진보하고 있나? 물론 사정은 그렇지는 못한 것 같다. 최근 유시민 대리트윗 해프닝도 그 일례라는 생각이 든다(써머즈, 온라인 상의 정체성? 정치성?  필로스, 법인 트위터의 실존적 정체성 참조). 고재열과 같은 헤비유저가 이 문제를 '안티의 소행'으로 몰고가면, 그 와중에 중립적인(?) 문제제기를 한 트위터러들은 뻘쭘해지고, 이 주제애 대한 생산적 토론은 감정적 편가름에 의해 소멸되어 버린다.

그 속도가 아무리 광속이라 한들, 정보 자체의 신뢰를 담보하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속도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뛰어난 시스템과 그 시스템의 매커니즘도 그 시스템에서 유통되는 정보신뢰도를 높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가장 중요한 건 시스템 참여자들의 '문화'다. 역시나 결론은 사람... 이라는 아주 식상한 결론에 이르렀는데, 그게 식상하더라도 중요한 건 중요한거다. ㅡ.ㅡ;


* 본문 내 추천링크
아거, 약자 응원심리
써머즈, 온라인 상의 정체성? 정치성? 
필로스, 법인 트위터의 실존적 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