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지방선거에서 야권 단일후보는 한나라당 후보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다면 5개 야당 가운데 어느 정당, 어느 인물이어도 상관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것이 김진표나 이종걸이면 어떠하고, 유시민이면 어떠하며, 또 심상정이면 어떠한가. 그들 사이에 적지않은 정체성의 차이가 있다 해도, 그것이 현정권과 야권세력간의 차이보다 크겠는가. 나는 그들 가운데 누가 야권 단일후보가 되더라도 야권 지지자들은 그를 지지하는 것이 후보단일화의 대전제라고 생각한다.

- 유창선, 민주당은 MB보다 유시민이 더 미운가
http://yuchangseon.com/275 . 비추.

대중적 글쓰기를 고려한 관용적 수사로 보더라도, 소위 정치평론가가 이런 글을 써서는 안된다. 정치적인 판단은 누가 더 이쁘고, 누가 더 밉다는 감정적인 판단이 아니다, 아니, 그런 판단이 아니어야 한다.  민주당은 MB와 유시민 누가 더 밉고/안 밉고를 저울질하는 초딩집단이 아니다. 아무리 민주당이 놀고 먹는, 실망 백배의 집단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본질을 지적해보자. 선거라는 것, 투표라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으로 자신이 판단하는 최선을 뽑는 무겁고, 냉정한 행위가 되어야 한다. 누가 더 밉기 때문에 내가 지지하는 누군가를 누락시키는 행위가 선거의 우선적 고려가 되어서는 안된다. 지금 당장의 선거공학적 계산보다 더 중요한 건 내가 왜 그 후보를 지지하는지, 혹은 내가 왜 그 후보를 지지하지 않는지에 대한 냉정한 판단이다. 지금 당장의 여론 지지율, 인지도라는 그 허망한 숫자놀음으로 내 판단을 그 숫자에 성급하게 의탁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 우리는 항상 구체적인 공약과 정책을 고민하기도 전에 최선보다 차선, 최악보다는 차악을 강요받는가?
'비판적 지지'의 망령에 사로잡혀 수십년동안 실종된 것, 그것은 내가 스스로 고민해 선택한 최선이다.

유창선의 글은 마치 정몽주 꼬시는 이성계이방원를 연상시킨다.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이명박만 아니면 장땡인 걸. 그게 대한민국이 그 숱한 피를 뿌리며 쟁취한 민주주의, 그리고 그토록 힘겹게 진전시켜 나간 진보의 귀착점인가? 그것이 당신이 생각하는 민주주의인가? 그래서 이명박만 아니면 만사 오케이인가? 내가 이명박이라는 정치적인 상징에 대해, 대한민국의 최고 권력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내가 지향하는 가치에 반하기 때문이지, 그가 단순히 이명박이라서가 아니다. 그저 단순한 이명박에 대한 거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경기도에서 MB 정부에 대한 반대를 표하려면, 그래서 김문수를 비판하려면 구체적인 근거를 갖고, 그 정치 행위만을 특정해서, 또 스스로의 정치철학에 의거해 이성적으로 비판해야 한다. 선거공학적인 숫자놀음과 땅따먹기식 장기놀음으로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김문수만 아니면 장땡이지' 이런 식의 반이성적인 주술, 그저 누가 이기든 MB만 아니면 장땡이라며 후보단일화와 같은 성급하기 짝이 없는 미명으로 그 미신 같은 주술을 포장해서는 안된다.

고민어린 판단들이 여러번 어긋나고, 또 서로 교차할 수 있는, 기나긴 마라톤의 출발점에 이제 막 국민들이 서있다. 그런 국민들에게 필요한 건 좀더 냉정한 판단을 도와줄 수 있는 이성의 재료들이다. 구체적인 공약과 정책이다. 또 상대 후보에 대한 근거를 갖춘 책임있는 비판이다. 선거공학적 잔머리즘에 몰두하기 전에, 김문수 도지사가 추진한다는  "평당 건축비가 표준건축비의 1.5배에 달하는 5천억 규모 호화 신청사 건설 사업의 실체"가 무엇인지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검토하고 난 뒤에야, 그리고 그것들을 거듭 숙고하고 난 뒤에야, 선거연대이든 나발이든을 고민할 것이다. 지금 정치, 지방선거를 이야기하는 그 많은 목소리들에 알맹이는 없고, 껍질만 유령처럼 떠다닌다.

* 확장점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은 왜 제시하지 못하는가? (bonafider)
http://theacro.com/zbxe/?document_srl=150607


* 발아점
연아 회피 동영상 고발에 맞서 다함께 프리허그를 (이정환)
http://www.leejeonghwan.com/media/archives/001719.html
원래는 민노씨가 제안하기로 한 거지만 민노씨가 요즘 바쁜 모양이라 내가 간단히 메모를 남긴다. 민노씨가 좀 더 구체적인 제안을 하고 직접 깃발을 들어도 좋고 다른 누가 나서도 좋고 트위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도 좋다. 얼마든지 더 좋은 아이디어가 많지 않을까.
저는 물론 바쁘지는 않고요...;;;

1. 플래쉬몹
정의
플래시 몹 (Flash Mob)이란 특정 웹사이트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는 현상을 뜻하는 '플래시 크라우드(flash crowd)'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집단인 '스마트 몹(smart mob)'의 합성어이다. 서로 모르는 불특정 다수가 인터넷과 이메일, 휴대전화 등의 연락을 통하여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장소에 모여, 짧은 시간 동안 주어진 놀이나 행동을 취하고는 금새 제각기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사례
대표적인 예로 2003년 6월 미국 뉴욕 맨해튼의 호텔 로비에 2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15초간 박수를 치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일이나, 같은 해 9월, 서울의 명동 한복판에서 30여명의 사람들이 "UFO가 나타났다!"고 외치고는 모두가 잠시 쓰러져 있다가 흩어진 일이 있다.

플래시 몹과 법
대한민국 법률상 '학문, 예술, 체육, 종교, 의식, 친목, 오락, 관혼상제 및 국경행사에 관한 집회(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제15조)'에 한하여 집시법 제6~12조가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플래시몹은 불법이 아니다. 다만 플래시몹을 가장하고 시위를 하려 한다면 당연히 집시법의 적용대상이 되며,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플래시몹이 아니다.(플래시 몹의 원칙 참고.)

플래시 몹의 원칙
  * 플래시 몹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참여한다.
  * 플래시 몹을 정치적, 상업적, 공익적 목적등 특별한 이익창출을 위해 이용하지 않는다. - 모든 플래시몹 단체는 유희를 제외한 무 목적성을 추구한다. 온라인상의 불특정 다수를 특정 목적에 이용하는 행위는 상당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수도 있다. (가장 잘 지켜지지 않는 원칙 중 하나)
    * 플래시 몹에 참여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상정보를 묻지 않는다. - 익명성의 원칙.
    * 플래시 몹 진행후. 해산시 무리지어 흩어지거나 뛰지 않는다. - 플래시 몹 종료후에는 행인을 가장하여 해산한다. 물론 뒤풀이도 없다. (때에 따라 있는 경우도 있다.)
    * 플래시 몹 현장에서 "플래시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 플래시 몹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 그리고 여러 Flash Mober들을 집회시위법등에서 보호하기 위해서, 현장에서 플래시 몹 단어의 언급, 또는 지시서를 현장에서 공개하는 행위, 지시서를 현장에서 버리는 행위를 자제한다.
    * 플래시 몹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지않는다. (이하 원칙 생략)

- 한국어 위키, '플래시 몹' 중에서

2. 강정수의 제안과 이정환의 발의 : )
말씀 드렸듯 바쁜 것은 전혀 아니고요. 그동안의 게으름 때문에 밀린 일들이 있어서요. 그렇다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어제 블로거벗들 몇 분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또 플래시몹이라는 놀이문화 대해서도 간단하게나마 살펴봤고요. 물론 부정할 수 없는 엄격한 룰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리고 이것이 생성과정에 있는 문화현상이니만큼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사상과 감정이 섞여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합니다만....

다만 그럼에도 그동안에 형성된 룰이 존재한다면 그것을 아주 무시하는 것도 현명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중에서 가장 걸리는 것은 정치적 목적의 배제라는 룰입니다. 다소 형식적인 룰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무시할 수는 없는 룰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그것이 '집회'와 '시위'를 플래쉬 몹과 구별하는 가장 현실적인 구별표지인 것도 확실한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행위를 이것은 정치적, 저것은 비정치적, 이렇게 자로 잰듯이 재단하는 것도 무척 불가사의한(?) 일일테지만요.

아무튼 우리들이 준비할 '플래시몹'이라는 '순수한 놀이'는 실정법을 헌법상 사상의 자유에 바탕해 비판하지만, 그 현실적 한계를 존중하면서, 그 집시법의 규제에서는 확실히 벗어날 수 있어야 하겠죠. 또 특정한 정치 목적성을 배제하되, 그저 인간이 하는 놀이의 순수성에 내재된 보편의 휴머니즘(ㅡ.ㅡ;)을 되살려, 모든 사회 속에 존재하는 인간행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는 궁극의 정치성을 되살리는 것이 되어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놀이의 감수성으로 그 특정의 정치성을 감싸 안아, 그 정치성을 해체시키고, 다시 재구성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실정법이 개떡 같으니 글도 함께 개떡 묵사발이 되는근영...;;; ).

3. 그렇다면...
이 플래시 몹은 굳이 유인촌이라는 특정의 정치인을 목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들이 사랑해마지 않는 김연아 해프닝(회피 연아)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저 한 여성이 급작스런 포옹 러쉬를 받았을 때의 표정을 미학적으로 탐구하는 놀이로서 시도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어떤 남자가 어떤 아리따운 여성을 포옹하려고 할 때 그 여성의 반응을 자연스럽게 재현해보는 것이죠. 그것도 아주 집단적으로, 공개된 광장에서요. 그렇게 포옹이라는 지극히 문화적이고, 또 동시에 동물적인 행위가 어떤 화학적인 반응들을 일으키는지를 그저 어떤 정치성도 거세한 채로, 아주 과학적으로, 또 그저 놀이로서 실험(?)해보는 것이라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유인촌 장관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행위를 그저 탐구하고, 궁극적으로는 유인촌 장관의 아픔(?)을 공유하기 위한 것입니다. ㅡ.ㅡ;

가령 참여한 여성들(^^)께서 일렬로 횡대하고, 거기에 남성들이 일렬로 횡대한 뒤에, 그 남성들이 여성에게 포옹을 시도하는 찰라, 그 순간!!! 그 여성들의 표정을 포착해서 동영상으로 제작해보면 어떨까 싶습니다. ㅡ.ㅡ;;; 그 다음에, 혹시라도(아마도 거의 모두?), 거절당한 남성들은 서로 위로의 포옹하고, 그걸 바라보는 여성들의 표정을 다시 포착하면, 뭐, 이것은 재현이라기 보다는 그 낯선 포옹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실험)이면서, 그저 놀이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불어 유인촌 장관의 아픔(?)을 공유하며 인간적 연대를 표하는 휴머니즘의 발현이 될 수도 있겠죠.


4. 끝으로...
"...다른 누가 나서도 좋고 트위터에서 사람들을 모아도 좋다. 얼마든지 더 좋은 아이디어가 많지 않을까." 느무느무 공감합니다. 아이디어 주십사와용!


추.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이 제안이 참여를 얻어, 그렇게 아이디어와 최소 운영진(그런데 이건 누가하나?)이 결정되면, 그 사항들은 비밀 지시서(?)에 담겨져서 놀이 당일날 참여한 분들께 일정한 조건에 따라 배포하고, 그 지시서에 따라 놀이가 끝나면, 뒷풀이는 뭐 "때에 따라 있는 경우도 있"다니 땡기시는 분들은 알아서 뒷풀이 하는 걸로 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해리를 위하여: 지붕킥 엔딩 단상

2010/03/22 15:36
#. 지상파에서 방영된 인기 시트콤이라는 특성상 스포일러의 불안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연예저널들에서 이미 독후감식 기사들이 많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안봐도 비디오라서리...). 스포일러의 불안을 느끼시는 분들은 이 글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예술의 종국에는 선이 악에 대해 승리한다고 약속한다면, 그러한 약속은 역사적 진실에 의해 반박될 것이다. 현실에 있어 승리하는 것은 악이고, 그곳에는 단지 어떤 사람이 잠시 동안만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선의 외로운 섬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이것을 감지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 쉽게 만든 약속을 거부한다. 그들은 헤피엔드를 거절한다.(52)

비극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고, 비극의 신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다. 기쁨은 슬픔보다는 빠르게 사라진다. (60)

- H. 마르쿠제, [미학의 차원]('The Aesthetic Dimension', Beacon Press : Boston, 1978), 청하 : 서울, 1983. 중에서


1. "김병욱 미친거 아냐?"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은 슬픔으로 마무리된다. 여느 멜러드라마의 결론이라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이 엔딩은, 그동안 지붕킥을 꾸준히 시청했을 시청자들에게는, 그리고 김병욱PD의 전력을 고려하더라도, 파격적인 결론이다. 지붕킥은 수목 멜러드라마가 아니니까. 이것은 일일시트콤이다. 매일 저녁을 먹고 나서, 혹은 늦은 저녁을 먹으며 그저 하루의 피곤을 웃음과 함께 날려보내는, 가족들과 함께 보는 지상파 시추에이션 코미디다. 지붕킥은 그런 시청자들의 관습적 기대를, 시트콤이 갖는 현실의 수면제로서의 정치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배반한다. 이 결론은 확실히 불편하다.

이 글은 지붕킥의 결론, 그 적극적인 배반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글이다.  

2. 비참한 현실
지붕킥은 세경과 지훈의 마지막 대화로 마무리된다. 좀더 정확히는 세경의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세경은 그 고백을 통해 대한민국 현존 질서에 대한 깊은 좌절과 슬픔을 토로한다. 이것은 그동안 김병욱 피디가 보여준 변칙적인 내러티브, 가령 등장인물들의 예기치 못한 죽음,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민영의 죽음 따위를 떠올려보더라도 대단히 이질적인 풍경이다. 세경의 마지막 고백은 진보적 미디어들의 사회비평 칼럼에서나 읽을 수 있을만한 언어들이다. 그것이 낭만적이고, 슬픈 연애담의 형식으로 포장되고 있더라도, 이것은 시트콤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다. 세경의 고백을 통해 지붕킥의 마지막을 다시 되돌려보자.

#. 공항으로 향하는 지훈의 차 안. 밖에는 비가 거세게 내린다.

세경 : 시간 가기 전에 아저씨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뤄져서 너무 좋아요.

지훈 : 이민갈 이유, 안갈 이유가 반반이었다 그랬지? 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뭐야? 아빠랑 셋이 사는거?

세경 : 네. 그리고 신애한테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지훈 : (의외라는 듯, 세경에게 반문하며) 신애?

세경 : 언젠가부터 신애가 자꾸 저처럼 쪼그라드는 것 같아서요. 식탐 많던 애가 먹을 것 눈치를 보고, 아파도 병원갈 돈이 없을까봐 걱정하고, 그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가난해도 신애가 마음놓고 뛰어놀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 공항에서 세경을 기다리는 신애와 아빠의 모습이 공항 로비 창가로 보인다.

지훈 : 안가고 싶었던 이유는?

세경 : 검정고시 꼭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대학도 가고. 아저씨 말대로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젠가 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 사다리를 죽기 살기로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결국 못 올라간 사람의 변명이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가기 싫었던 이유는, 아저씨였어요. 아저씨를 좋아했거든요. 너무 많이. 처음이었어요. 그런 감정.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설레고, 밥을 해도, 빨래를 해도, 걸레질을 해도. 그러다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 부끄럽고, 비참했어요.

지훈 : 미안하다. 내가 한 말들 때문에. 그게 상처줄려고 한게 아니었는데.

세경 : 아니에요. 다 지난 일이고. 저는 괜찮아요. (...) 그 동안 제가 좀 컸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의 끝이 꼭 그 사람과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는 거, 이제는 깨달았고. 그래도, 떠나기로 하고 좀, 힘이 들긴 들었어요. 아저씨랑 막상 헤어지면, 보고 싶어서 못 견딜 것 같아서.

그래도 마지막에 이런 순간이 오네요. 아저씨에게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말들, 꼭 한번 마음껏 하고 싶었는데. 이루어져서 행복해요. 앞으로 어떤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늘 지금 이 순간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애써 웃음을 짓는다. 차 앞 창을 바라보며) 다 와 가나요?

지훈 : 어.

세경 : 아쉽네요.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지훈 : 뭐?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다)

세경 :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 지훈이 세경을 바라보며, 흑백톤으로 화면이 멈춘다.

- [지붕 뚫고 하이킥] 126회 중에서

3. 김병욱 시트콤
김병욱은 그동안 대한민국 시트콤의 역사라고 할만한 작품들을 연출해왔다. <순풍산부인과>(1998년)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년) <똑바로 살아라>(2002년) <귀엽거나 미치거나>(2005년) <거침없이 하이킥>(2006년) 이 그것들이다.

지붕킥의 내러티브는 '순풍 산부인과'나 '똑바로 살아라' 혹은 '거침없이 하이킥'의 공식을 그대로 확대변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병욱 PD가 그동안 연출했던 시트콤에는 몇 가지 공식이 있었다. 우선 이야기의  중심축에는 중산층의 계급적 허위의식을 대변하는 선망적 표지가 등장한다. 산부인과 의사인 오지명(순풍산부인과), 한의사 이순재(거침없이 하이킥), 성공한 중견 연기자 노주현(똑바로 살아라) 등이 그들이다. 이 공식은 지붕킥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데, 지붕킥에서 에피소드의 중심 공간은 음식가공업체 사장인 이순재의 가정이다. 부촌의 상징인 성북동 럭셔리 하우스는 김자옥의 한옥집과 함께 지붕킥의 공간적인 무대가 된다.

더불어 김병욱 시트콤에선 중산층 가정의 허위의식들을 내부 구성원들에 의해 드러내는 구도를 취하곤 했다. 가부장적 권력자들(이순재, 노주현)은 형식적인 권위만을 인정받고, 실은 가정 구성원에게 철저히 따돌림 당하거나, 무시받는 가짜 권위의 상징으로 표출되곤 했다. 그들은 실력없이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진 자들('하이킥'의 이순재와 '똑바로 살아라'의 노주현)이거나, 내면의 독백으로 자신의 부도덕을 그저 감상적으로 치유하곤 하는 탐욕스런 자린고비('지붕킥'의 이순재)였다. 물론 그들은 드라마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용서받고, 충분히 이해할만한 인물들로 그려지긴 했다.

이들 가짜 권위의 짝패로는 흥미롭게도 당찬 여성형이 등장하곤 했는데. 그들은 마치 구시대의 권위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거나, 그 자리를 대신할 존재처럼 묘사되었다. '하이킥'에서는 박해미가 그랬고, '지붕킥'에서 오현경이 그렇다. 다만 하이킥의 박해미가 성취지향적 여성형의 밝은 모습들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구현했다면, 2009년 지붕킥의 오현경은 MB시대의 자장권 아래서 세속화된 주부의 면모를 온몸으로 드러낸다. [지붕킥]의 거의 모든 인물이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감상적 에피소드들을 통해 구원받는데 비해, 상대적으로 오현경(극중 '이현경')은 끝까지 현실 속의 비정한 리얼리즘을 대변한다.

그녀는 아이에게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투사하고('해리 예능 과외' 에피소드), 학벌주의를 절대적으로 숭상하며('서운대' 에피소드), 남편의 출세를 위해서는 자존심을 팽개치고, 뇌물을 서슴치 않는다(박경림이 등장하는 '내조' 에피소드). 그런 그녀는 극중에서 한번도 반성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정보석과 함께 밝은 미래를 꿈꾸며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MB시대의 판타지다. 낭만적인 결혼 스토리를 통해 그녀의 감상적인 소녀적 취향이 작은 알리바이처럼 제공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세속적 성공의 판타지일 뿐이다.
 
김병욱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해리를 미워하는 시청자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돈도 없으면서 신애에게 짜증을 내는 사람이 많다는 걸 발견했다. 지금은 누구 편이 많은지 모르겠다. 신애가 분식집에 돈 없어서 잡혀 있는 동안 추가로 순대를 먹는다거나 하는 걸 보며 없는 처지에 주제넘게 뭘 그리 먹느냐고 화를 낸다. 약자에 대한 이지메일 수도 있고 우리 내면의 강퍅함일 수도 있다. 구질구질하게 살면서도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어 하는 근성을 못 참아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지붕킥>은 1980년대적인 이야기다. 80년대는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폭력의 시대였다. 우리는 많이 진보한 줄 알았는데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게 아닌가 싶다. 경제적인 생존 위기를 피부로 느끼는 사람도 많고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
-  씨네21, [김병욱] “<지붕킥>은 1980년대적인 이야기”

"계급 갈등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인이니까 가질 수 있는 생각들을 풀어놓는다. <순풍산부인과> 때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신애의 ‘장래희망’ 에피소드에 들어있다. 우리 사회는 열린 사회라지만 열린 사회가 아니다. 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신애가 세경이처럼 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나. 가진 자(이순재)가 없는 자(세경)에게 절약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도 우리 사회 지도층의 이야기일 수 있다. 내가 희망적이지 않은 세계관을 가져서 그런지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게 <똑바로 살아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보다 더 좋다."
- 한겨레21, 지붕 뚫고 본 세상, 인생은 빵꾸똥꾸

4. 사회비판
지붕킥은 대한민국 드라마의 계보 속에서 실종되고, 단절된 사회비판 멜러드라마의 전통을 다시 건져 올린다. 주체적인 공장 노동자(음정희)가 회사 홍보팀과 옥씬각씬하는, 지금으로선 정말 상상하기도 어려운 컨셉의 드라마 [도시인](이윤택 각본, 최수종, 배종옥, 음정희 주연)이나, 황인뢰(연출), 주찬옥(각본) 컴비에 의해 시도되었던 여성 중심의 사회비판적 멜러드라마들, 그리고 무엇보다 김운경('서울의 달' '서울 뚝배기' '형' '파랑새는 있다' 등의 각본)이 줄기차게 시도했던, 소외된 도시 빈민들의 생생한 삶과 사랑의 이야기들은 소위 막장 드라마의 득세와 판타지 멜러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가식적인 드라마들의 팽창과 함께 주변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막장 복수극과 신데렐라 판타지, 그리고 꽃남류의 노골적인 무뇌아 드라마들이 채워나갔다.

지붕킥의 엔딩은 그저 이뤄질 수 없는 연인들의 관습적인 슬픔이 아니다. 지붕킥의 엔딩은 중층적이다. 그것은 시트콤이 갖는 현재성, 지금/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인 슬픔과 절망의 파편들을 불러온다. 그것은 많은 저널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88만원 세대의 좌절만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트콤이 갖는 현실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판타지에 대한 자기 고백의 형식인 것이다. 그래서 지붕킥은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린다. 예술은 그 당대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것은 희망을 위해서라도, 그 좌절과 슬픔을, 그 야만을 고발하는 것이다.

김병욱 시트콤이 많은 한계와 약점을 갖고 있더라도, 지붕킥의 엔딩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2010년 대한민국에서 지상파 시트콤을 소비한다는 행위의 정체에 대해 질문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지금 소비하는 것은 계급적인 자기 기만이 아닌가'라고 김병욱은 노골적으로 질문한다. 그리고 극을 마무리하면서 그것이 자기 기만이었다는 걸, "부끄럽고, 비참한" 현실이었다는 걸, 세경이를 통해 이야기한다. 이건 정말 슬프지만, 정확하고, 냉정한 현실에 대한 자기 고백이다.


5. 해리를 위하여
이제 드라마가 재현한 멜러나 코믹한 판타지가 아니라, 그 재현의 질료인 잔인한 현실로 다시 돌아오면, 남는 건 정음과 준혁이 아니라, 오히려 해리다. 해리는 성북동의 텅빈 고급 주택 속에 갇힌다. 해리를 구원할 누구도 남아 있지 않다. 오현경은 해리를 탐욕스런 MB 시대의 아이로 키울 것이 뻔하고, 그렇게 서울대로 보내지는 것만이 일생일대의 목적으로 해리에게는 남겨질 것이다. 그렇게 해리에게는, 이 시대의 야만이 화려한 교양으로, 성공 지표로 치장된 숨막히는 위선만이 철저하게 강요될 것이다.

신애는 타히티로 떠났고, 어리숙한 아버지는 부자가 되기만을 꿈꾸고 있으며, 세속의 질서에 누구보다 충실한 어머니 현경은 해리에게 더 이상 세경 자매가 주었던 교훈을 되새겨 주지 않을 것이다. 새 할머니 김자옥은 권위적 훈육으로 해리를 통제할 것이며('훈련병 에피소드'), 할아버지 이순재는 처음부터 해리에겐 관심도 없다. 해리는 빵꾸똥꾸들과의 추억들을 잊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텅빈 성북동의 고급 주택. 대한민국의 세속적 욕망을 상징하는 공간 속에 해리가 갇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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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 텅빈 거실 한 가운데서 울부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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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가, 이 빵꾸똥꾸야~"

이제 해리는 이 무시무시한 시트콤의 영원한 고아로 남겨진다.
그건 정말 슬픈 엔딩이다.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아거님께서 2003년 7월에 쓰신 글을 낭송합니다. 워낙에 목소리가 초딩스러워서, 그리고 톤도 꽤 높은 편이라, 듣기에 괴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도 읽어보고, 저 글도 읽어보고, 여기에서 낭송하는 글만 해도 한 열번은 다시 읽었는데, 역시나 목소리가 참 어색하고, 마음에 들지 않네요. 다만 나솔님과 써머즈님, 그리고 주낙현 신부님의 뽐뿌에 힘입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올립니다. 블로거벗들의 좋은 글들을 목소리를 통해 나누는 이런 작은 놀이가 좀더 멀리 퍼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또 자신의 글을 목소리로 독자에게 들려주는 일도 참 재밌고, 보람있는 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거,  Memory's fragile power (2003년 7월 27일) 
http://gatorlog.com/mt/archives/001065.html

포스트 제목을 '기억의 연약함'이라고 했는데요. 원제는 위에 보시는 것처럼 'Memory's fragile power'입니다. 처음에는 '기억의 미력'이라고 할까하다가 왠지 한자어투라서 이렇게 해봤습니다. 아거님의 너른 양해를 구합니다. 낭송은 3분 정도 분량입니다.

이 파일은 계속 유지됩니다.

more..






* 참조한 서비스
1. 녹음 및 편집 : WavePad (프리웨어)
2. 재생기 디자인 : http://flash-mp3-player.net/


* 발아점
주낙현 신부님의 글을 소리내어 읽기 (나솔)
http://nassol.textcube.com/201 (2010/03/09)

재밌는 (^^) 아이디어: 좋아하는 블로그 글을 읽어서 아카이빙하기 (써머즈)
http://blog.summerz.pe.kr/1521 (2010/03/10)

법정 스님의 "아름다운 마무리" 소리내어 읽기 (주낙현)
http://viamedia.or.kr/2010/03/11/855 (2010/03/11)





0.
캡콜드님께서 소개한 한 연설을 들었습니다.  
웹의 아버지로 불리는 팀 버너스-리가 TED에서 행한 짧은 연설이었죠.
그 연설을 들으니 어떤 기억이 떠오릅니다.


1. 아주 씁쓸한 기억
지지난 해인가요. 정보문화포럼(행안부 산하 관련기관 이사관급, 국립대학교수, 신문사닷컴 논설위원 혹은 국장급, 인터넷관련 산업 대표들이 그 상임위원?이더만요)에서 최진실 자살과 관련해 인터넷 댓글문화에 대한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저를 초대한 적 있습니다. 블로그계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이정환씨와 함께 초대했던 것이었는데요. 정환씨께서는 취재일정과 겹쳐 나오지 못하시고, 저만 이런 저런 질문에 의견을 전했죠.

제가 이왕에 관련글을 많이 썼기 때문에 질문에 따라 그저 제 소신껏 답하면 되는 자리였습니다. 솔직히 마음 속으론, 제 블로그를 읽으시면 다 나옵니다, 이렇게 답하고 싶은 생각이 얼핏 들기도 했지만, 맛난 음식도 주고(무슨 풀코스 요리더만요), 자문료도 생각보다 많이 챙겨주니 저 같은 가난한 블로거로선 대접받는 기분이었죠(ㅡ.ㅡ;). 솔직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예상보다 분위기도 꽤 화기애애했구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연말 행사에 초대받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내년 활동에 대해 건의를 받겠다 하길래, 온라인에 그동안의 연구실적과 데이터들을 공개하고, 관심있는 시민들이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온라인 접근권을 강화해주면 좋겠다. 또 온라인을 통한 의견 교환 소통이 활성화되면 좋겠다. 그리고 이벤트와 같은 것들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하면 어떻겠나, 이런 의견을 냈죠. 당시 사회(?)를 맡았던 모 언론사닷컴 이사께서 꼭 그러마 약속했습니다. 그 이후 몇 번 그 사이트에 들렀습니다. 그러곤 또 잊었죠.

그렇게 잊고 지내다가 가끔씩 스카이프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프랑스에서 저널리즘을 공부하는 한 블로거벗에게 그 정보문화포럼에 있는 자료들이 유익할 것 같더군요. 전반적으로 다소 이론적으로 집필된 자료이지만, 그래도 통계자료 등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그 친구에겐 꽤 좋은 참조가 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료 소개차 오랜만에 찾아봤습니다. 사이트가 이미 뽕빨난 뒤더군요. 이전에는 그래도 약간 검색이 엉망이긴 했지만 관련자료들의 한글파일이나 PDF 파일을 다운 받을 수 있었는데, 아예 사이트 자체가 폭격받은 것처럼 앙상하게 폐허로만 남겨져 있더랍니다. 온라인 정보를 연구한다는 '정보문화포럼'이라는 곳에서 정보를 취급하는 그 실체가, 그 실천이, 그 몰골이 이런 수준입니다.


2. 앗, 반전... ㅡ.ㅡ; 그나마 다행입니다.
혹시나 싶어서 '정보문화포럼'으로 구글링해봤습니다. 찾기가 어렵네요. 올해로 15회를 맞는 그래도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포럼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서 그토록 심혈을 기울인 연구자료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떻게 활용되고 있습니까? 위 기사 링크를 소개해준 국가지식포털의 다음 블로그에서 그나마 힌트를 주는 것 같아서 국가지식포털에서 물에 빠진 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검색해봤습니다. 앗, 반전. ㅡ.ㅡ; 검색이 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 다행입니다.

2008년 정보문화포럼 보고서들
성숙분과 (PDF 파일)  : 개인적으론 반가운 프라크 글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신뢰분과 (PDF 파일) : 민경배, 방대욱, 윤종수의 글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민주분과 (PDF 파일) :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은 글은 이희욱(블로터닷넷 아사달)의 글입니다.
평화분과 (PDF 파일) : 이 부분은 다소 보수적으로 집필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단, 위 지식포털 사이트에선 FF으로는 원문접근이 안되고, IE에서는 가능합니다(물론 위 파일들은 FF에서도 접근이 가능합니다.) 그래도 폭발되었던 줄 알았던 자료들이 회복되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더 검색하다 보니, 2008년 연구 보고서들 가운데, 제가 기존에 읽어보지 못했던 자료가 있네요. 한국 온라인 문화의 문제점과 올바른 토론 문화 조성방안이라는 보고서입니다. 그래서 얼렁뚱땅식으로 통독해봤습니다. 깜놀스럽게도(?) 제 의견이 각주 형태로 인용되어 있는데요. 좀 모호하게 인용된 것 같네요. 오히려 인용된 의견의 전후에 제 입장과 가까운 진술들이 많습니다.
- 온라인 최대 포털, 오프라인 언론사 등에서 선정하는 파워블로그 순위 경쟁으로 인해 블로거 본인의 진지한 관심과 의견을 피력한 내용보다는 일반 네티즌들이 관심이 집중될 수 있는 감성적 이슈를 올려 조회수를 높이는 일명 ‘호객행위’가 나타나고 있음. 또한 구글 ‘애드센스’와 같은 수익모델로 인해 이러한 현상이 더욱 심화되기도 함 (구글 애드센스로 7~8천만원 정도 수익을 내는 극소수의 블로거도 있음)16)  

16) 민노씨, 2008, 정보문화포럼 <온라인 토론문화 연구반> 4차 회의

- 한국 온라인 문화의 문제점과 올바른 토론 문화 조성방안 중에서
"애드센스로 7~8천만원 정도 수익을 내는 극소수 블로거"라는 말은 저로선 금시초문인데, 어디에서 접한 정보인지 제가 다 궁금합니다.

각설하고, 위 2009년 2월에 발행 자료를 통독해본 결과, 전반적으로 인터넷 여론에 대한 규제적 관리,  특히 포털의 각종 관련 정책을 대단히 보수적으로 옹호하는 입장에 선 것 같습니다. 다만 부분적으론 블로그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나 추상적인 차원에서나마 '평판 시스템'을 강조하는 점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공유지의 비극"에 대해선 최근 맥주 한잔 하면서, 우연히도 강정수씨께서 강조한 부분이라서 눈길을 끌었는데요. 정수씨께선 공유지의 비극은 극복된 이론이라고 강조하시더군요. 위 보고서에서도 공유지의 비극이 극복되어야 한다는 점을 부연적으로 언급하고 있기는 하지만, 너무 한국 인터넷 현실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근거로 차용되는 것 같아서 아쉽네요.


3. 정보는 국가의 시혜가 아니라 우리의 권리입니다.
캡콜드님께서 소개해주신 팀 버너스-리의 TED 연설을 듣고 오래된 기억이 떠올라 글을 쓰다가, 의외로 불행중 다행인 결과를 만나 글이 좀 길어졌네요. 캡콜드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대로, 지금 당장 오픈 데이터 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노동3권을 헌법에서 지웠으면 좋겠다' 불가사의한 주장을 하는 원장이 있던 노동연구원이 그나마도 해체 수준으로 공중분해되고 있다고 합니다. 정보사회에서 국가기관, 산하 연구단체의 자료는 사적인 것이 아니라, 국가의 자산이고, 국민들의 자산입니다. 시민들이 언제든 접근할 수 있는 시민의 것어야 합니다.

우리 블로거들이라도 목소리를 냅시다. 누가 대신 그 목소리 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작은 목소리라도 모아서 이런 공약을, 정책을 내거는 정치인을 주목하고, 그렇게 눈꼽만큼이라도 정보 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여론을, 공론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껍데기나마 '선거'라는 민주주의의 해방구가 존재합니다. 우리에겐 표가 있습니다. 기간정보의 축적과 이 정보의 체계적 관리, 그리고 그것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일은 인터넷 강국이라는 허망한 수사가 더 빛이 바래기 전에 더이상 늦춰서는 안되는 일입니다.

공적인 정보를 성실하게 축적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주십시오.
시민들이 온라인을 통해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당당한 요청입니다.
우리에겐 이를 주장할 권리가 있습니다.


* 발아점 : 초강추
오픈데이터가 세계에 퍼진 해 by 팀 버너스-리 [TED강연]
(캡콜드)
고용통계 ‘마비’… 팔짱 낀 정부 (미디어다음, 서울신문 송고. 2010.03.15)


* 확장점
최근 가버먼트2.0이라는 모임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런 운동이 확산되어 변화를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amy 또는 신비)

http://groups.google.com/group/gov20kr



* 수정

1. 위 '노동연구원이 공중분해 수준으로 해체..'부분의 링크를 기존 이글루스 스크랩글에서 서울신문 기사로 대체

2. 발아점 두번째 글 역시 위와 동일.

3. 수정 사유는 위 이글루스 글이 스크랩한 MLB 파크 불펜의 글(이하 '불펜글')과 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또 다른 이글루스의 글이 서로 다른 팩트를 주장하는 바, 불펜글에서 그 이글루스 주장에 대해 재반론을 부연하고 있지만, 나로선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4. 다만 서울신문 기사와 한겨레 기사(서울신문 쪽 기사가 좀더 넓은 범위의 사실을 적시하고 있기에 이를 링크로 소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은 넉넉하게 인정된다.

 ㄱ. 기존 노동연구원 원장이 문제있는 행태를 통해 구성원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농성이 벌어진 점.

 ㄴ. 현재 '노동패널 조사'가 차질을 겪고 있다는 점. 지난 2월로 예정되었던 2008년 통계치가 작성되지 못한 '사실'
 ㄷ. 한국노동연구원에 용역을 주던 노동부 용역이 뚝 끊겼다는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