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상파에서 방영된 인기 시트콤이라는 특성상 스포일러의 불안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연예저널들에서 이미 독후감식 기사들이 많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살펴보지는 않았지만, 안봐도 비디오라서리...). 스포일러의 불안을 느끼시는 분들은 이 글을 피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예술의 종국에는 선이 악에 대해 승리한다고 약속한다면, 그러한 약속은 역사적 진실에 의해 반박될 것이다. 현실에 있어 승리하는 것은 악이고, 그곳에는 단지 어떤 사람이 잠시 동안만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선의 외로운 섬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예술작품은 이것을 감지하고 있다. 그들은 너무 쉽게 만든 약속을 거부한다. 그들은 헤피엔드를 거절한다.(52)
비극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고, 비극의 신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있다. 기쁨은 슬픔보다는 빠르게 사라진다. (60)
- H. 마르쿠제, [미학의 차원]('The Aesthetic Dimension', Beacon Press : Boston, 1978), 청하 : 서울, 1983. 중에서
1. "김병욱 미친거 아냐?"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은 슬픔으로 마무리된다. 여느 멜러드라마의 결론이라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는 이 엔딩은, 그동안 지붕킥을 꾸준히 시청했을 시청자들에게는, 그리고 김병욱PD의 전력을 고려하더라도, 파격적인 결론이다. 지붕킥은 수목 멜러드라마가 아니니까. 이것은 일일시트콤이다. 매일 저녁을 먹고 나서, 혹은 늦은 저녁을 먹으며 그저 하루의 피곤을 웃음과 함께 날려보내는, 가족들과 함께 보는 지상파 시추에이션 코미디다. 지붕킥은 그런 시청자들의 관습적 기대를, 시트콤이 갖는 현실의 수면제로서의 정치적 역할을 적극적으로 배반한다. 이 결론은 확실히 불편하다.
이 글은 지붕킥의 결론, 그 적극적인 배반의 의미를 생각해보는 글이다.
2. 비참한 현실 지붕킥은 세경과 지훈의 마지막 대화로 마무리된다. 좀더 정확히는 세경의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세경은 그 고백을 통해 대한민국 현존 질서에 대한 깊은 좌절과 슬픔을 토로한다. 이것은 그동안 김병욱 피디가 보여준 변칙적인 내러티브, 가령 등장인물들의 예기치 못한 죽음,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민영의 죽음 따위를 떠올려보더라도 대단히 이질적인 풍경이다. 세경의 마지막 고백은 진보적 미디어들의 사회비평 칼럼에서나 읽을 수 있을만한 언어들이다. 그것이 낭만적이고, 슬픈 연애담의 형식으로 포장되고 있더라도, 이것은 시트콤에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다. 세경의 고백을 통해 지붕킥의 마지막을 다시 되돌려보자.
#. 공항으로 향하는 지훈의 차 안. 밖에는 비가 거세게 내린다.
세경 : 시간 가기 전에 아저씨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뤄져서 너무 좋아요.
지훈 : 이민갈 이유, 안갈 이유가 반반이었다 그랬지? 가기로 결심한 이유는 뭐야? 아빠랑 셋이 사는거?
세경 : 네. 그리고 신애한테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서.
지훈 : (의외라는 듯, 세경에게 반문하며) 신애?
세경 : 언젠가부터 신애가 자꾸 저처럼 쪼그라드는 것 같아서요. 식탐 많던 애가 먹을 것 눈치를 보고, 아파도 병원갈 돈이 없을까봐 걱정하고, 그게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서 가난해도 신애가 마음놓고 뛰어놀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 공항에서 세경을 기다리는 신애와 아빠의 모습이 공항 로비 창가로 보인다.
지훈 : 안가고 싶었던 이유는?
세경 : 검정고시 꼭 보고 싶어서요. 그래서 대학도 가고. 아저씨 말대로 신분의 사다리를 한 칸이라도 올라가고 싶었어요. 그런데 언젠가 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그 사다리를 죽기 살기로 올라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밑에 있겠구나. 결국 못 올라간 사람의 변명이지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가기 싫었던 이유는, 아저씨였어요. 아저씨를 좋아했거든요. 너무 많이. 처음이었어요. 그런 감정.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설레고, 밥을 해도, 빨래를 해도, 걸레질을 해도. 그러다 문득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됐고, 부끄럽고, 비참했어요.
지훈 : 미안하다. 내가 한 말들 때문에. 그게 상처줄려고 한게 아니었는데.
세경 : 아니에요. 다 지난 일이고. 저는 괜찮아요. (...) 그 동안 제가 좀 컸어요.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의 끝이 꼭 그 사람과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는 거, 이제는 깨달았고. 그래도, 떠나기로 하고 좀, 힘이 들긴 들었어요. 아저씨랑 막상 헤어지면, 보고 싶어서 못 견딜 것 같아서.
그래도 마지막에 이런 순간이 오네요. 아저씨에게 그동안 마음에 담아둔 말들, 꼭 한번 마음껏 하고 싶었는데. 이루어져서 행복해요. 앞으로 어떤 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늘 지금 이 순간처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애써 웃음을 짓는다. 차 앞 창을 바라보며) 다 와 가나요?
지훈 : 어.
세경 : 아쉽네요.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어요.
지훈 : 뭐? (눈가에 눈물이 고여있다)
세경 : 시간이, 잠시 멈췄으면 좋겠어요.
- 지훈이 세경을 바라보며, 흑백톤으로 화면이 멈춘다.
- [지붕 뚫고 하이킥] 126회 중에서
3. 김병욱 시트콤김병욱은 그동안 대한민국 시트콤의 역사라고 할만한 작품들을 연출해왔다. <순풍산부인과>(1998년)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2000년) <똑바로 살아라>(2002년) <귀엽거나 미치거나>(2005년) <거침없이 하이킥>(2006년) 이 그것들이다.
지붕킥의 내러티브는 '순풍 산부인과'나 '똑바로 살아라' 혹은 '거침없이 하이킥'의 공식을 그대로 확대변주하는 것처럼 보였다. 김병욱 PD가 그동안 연출했던 시트콤에는 몇 가지 공식이 있었다. 우선 이야기의 중심축에는 중산층의 계급적 허위의식을 대변하는 선망적 표지가 등장한다. 산부인과 의사인 오지명(순풍산부인과), 한의사 이순재(거침없이 하이킥), 성공한 중견 연기자 노주현(똑바로 살아라) 등이 그들이다. 이 공식은 지붕킥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데, 지붕킥에서 에피소드의 중심 공간은 음식가공업체 사장인 이순재의 가정이다. 부촌의 상징인 성북동 럭셔리 하우스는 김자옥의 한옥집과 함께 지붕킥의 공간적인 무대가 된다.
더불어 김병욱 시트콤에선 중산층 가정의 허위의식들을 내부 구성원들에 의해 드러내는 구도를 취하곤 했다. 가부장적 권력자들(이순재, 노주현)은 형식적인 권위만을 인정받고, 실은 가정 구성원에게 철저히 따돌림 당하거나, 무시받는 가짜 권위의 상징으로 표출되곤 했다. 그들은 실력없이 너무 많은 것들을 가진 자들('하이킥'의 이순재와 '똑바로 살아라'의 노주현)이거나, 내면의 독백으로 자신의 부도덕을 그저 감상적으로 치유하곤 하는 탐욕스런 자린고비('지붕킥'의 이순재)였다. 물론 그들은 드라마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용서받고, 충분히 이해할만한 인물들로 그려지긴 했다.
이들 가짜 권위의 짝패로는 흥미롭게도 당찬 여성형이 등장하곤 했는데. 그들은 마치 구시대의 권위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거나, 그 자리를 대신할 존재처럼 묘사되었다. '하이킥'에서는
나박해미가 그랬고, '지붕킥'에서 오현경이 그렇다. 다만 하이킥의
나박해미가 성취지향적 여성형의 밝은 모습들을 긍정적인 이미지로 구현했다면, 2009년 지붕킥의 오현경은 MB시대의 자장권 아래서 세속화된 주부의 면모를 온몸으로 드러낸다. [지붕킥]의 거의 모든 인물이 어느 정도는 자신들의 감상적 에피소드들을 통해 구원받는데 비해, 상대적으로 오현경(극중 '이현경')은 끝까지 현실 속의 비정한 리얼리즘을 대변한다.
그녀는 아이에게 자신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투사하고('해리 예능 과외' 에피소드), 학벌주의를 절대적으로 숭상하며('서운대' 에피소드), 남편의 출세를 위해서는 자존심을 팽개치고, 뇌물을 서슴치 않는다(박경림이 등장하는 '내조' 에피소드). 그런 그녀는 극중에서 한번도 반성의 기회를 얻지 못한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정보석과 함께 밝은 미래를 꿈꾸며 춤을 추는 그녀의 모습은 MB시대의 판타지다. 낭만적인 결혼 스토리를 통해 그녀의 감상적인 소녀적 취향이 작은 알리바이처럼 제공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세속적 성공의 판타지일 뿐이다.
김병욱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처음에는 해리를 미워하는 시청자가 많았는데 어느 순간부터 돈도 없으면서 신애에게 짜증을 내는 사람이 많다는 걸 발견했다. 지금은 누구 편이 많은지 모르겠다. 신애가 분식집에 돈 없어서 잡혀 있는 동안 추가로 순대를 먹는다거나 하는 걸 보며 없는 처지에 주제넘게 뭘 그리 먹느냐고 화를 낸다. 약자에 대한 이지메일 수도 있고 우리 내면의 강퍅함일 수도 있다. 구질구질하게 살면서도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어 하는 근성을 못 참아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지붕킥>은 1980년대적인 이야기다. 80년대는 물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폭력의 시대였다. 우리는 많이 진보한 줄 알았는데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 게 아닌가 싶다. 경제적인 생존 위기를 피부로 느끼는 사람도 많고 문화적으로도 그렇다. "
- 씨네21, [김병욱] “<지붕킥>은 1980년대적인 이야기”
"계급 갈등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사회인이니까 가질 수 있는 생각들을 풀어놓는다. <순풍산부인과> 때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가 신애의 ‘장래희망’ 에피소드에 들어있다. 우리 사회는 열린 사회라지만 열린 사회가 아니다. 언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신애가 세경이처럼 될 가능성이 더 크지 않나. 가진 자(이순재)가 없는 자(세경)에게 절약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도 우리 사회 지도층의 이야기일 수 있다. 내가 희망적이지 않은 세계관을 가져서 그런지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게 <똑바로 살아라>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보다 더 좋다."
- 한겨레21, 지붕 뚫고 본 세상, 인생은 빵꾸똥꾸
4. 사회비판지붕킥은 대한민국 드라마의 계보 속에서 실종되고, 단절된 사회비판 멜러드라마의 전통을 다시 건져 올린다. 주체적인 공장 노동자(음정희)가 회사 홍보팀과 옥씬각씬하는, 지금으로선 정말 상상하기도 어려운 컨셉의 드라마 [도시인](이윤택 각본, 최수종, 배종옥, 음정희 주연)이나, 황인뢰(연출), 주찬옥(각본) 컴비에 의해 시도되었던 여성 중심의 사회비판적 멜러드라마들, 그리고 무엇보다 김운경('서울의 달' '서울 뚝배기' '형' '파랑새는 있다' 등의 각본)이 줄기차게 시도했던, 소외된 도시 빈민들의 생생한 삶과 사랑의 이야기들은 소위 막장 드라마의 득세와 판타지 멜러라고 부를 수 있을만한 가식적인 드라마들의 팽창과 함께 주변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막장 복수극과 신데렐라 판타지, 그리고 꽃남류의 노골적인 무뇌아 드라마들이 채워나갔다.
지붕킥의 엔딩은 그저 이뤄질 수 없는 연인들의 관습적인 슬픔이 아니다. 지붕킥의 엔딩은 중층적이다. 그것은 시트콤이 갖는 현재성,
지금/여기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적인 슬픔과 절망의 파편들을 불러온다. 그것은 많은 저널들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88만원 세대의
좌절만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트콤이 갖는 현실의 마취제 역할을 하는 판타지에 대한 자기 고백의 형식인 것이다. 그래서
지붕킥은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노래'를 어쩔 수 없이 떠올린다. 예술은 그 당대를 반영한다. 그리고 그것은 희망을 위해서라도, 그
좌절과 슬픔을, 그 야만을 고발하는 것이다.
김병욱 시트콤이 많은 한계와 약점을 갖고 있더라도, 지붕킥의 엔딩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2010년 대한민국에서 지상파 시트콤을 소비한다는 행위의 정체에 대해 질문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지금 소비하는 것은 계급적인 자기 기만이 아닌가'라고 김병욱은 노골적으로 질문한다. 그리고 극을 마무리하면서 그것이 자기 기만이었다는 걸,
"부끄럽고, 비참한" 현실이었다는 걸, 세경이를 통해 이야기한다. 이건 정말 슬프지만, 정확하고, 냉정한 현실에 대한 자기 고백이다.
5. 해리를 위하여 이제 드라마가 재현한 멜러나 코믹한 판타지가 아니라, 그 재현의 질료인 잔인한 현실로 다시 돌아오면, 남는 건 정음과 준혁이 아니라, 오히려 해리다. 해리는 성북동의 텅빈 고급 주택 속에 갇힌다. 해리를 구원할 누구도 남아 있지 않다. 오현경은 해리를 탐욕스런 MB 시대의 아이로 키울 것이 뻔하고, 그렇게 서울대로 보내지는 것만이 일생일대의 목적으로 해리에게는 남겨질 것이다. 그렇게 해리에게는, 이 시대의 야만이 화려한 교양으로, 성공 지표로 치장된 숨막히는 위선만이 철저하게 강요될 것이다.
신애는 타히티로 떠났고, 어리숙한 아버지는 부자가 되기만을 꿈꾸고 있으며, 세속의 질서에 누구보다 충실한 어머니 현경은 해리에게 더 이상 세경 자매가 주었던 교훈을 되새겨 주지 않을 것이다. 새 할머니 김자옥은 권위적 훈육으로 해리를 통제할 것이며('훈련병 에피소드'), 할아버지 이순재는 처음부터 해리에겐 관심도 없다. 해리는 빵꾸똥꾸들과의 추억들을 잊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텅빈 성북동의 고급 주택. 대한민국의 세속적 욕망을 상징하는 공간 속에 해리가 갇힌다.
그리고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
텅빈 거실 한 가운데서 울부짖는다.
"잘가, 이 빵꾸똥꾸야~"
이제 해리는 이 무시무시한 시트콤의 영원한 고아로 남겨진다.
그건 정말 슬픈 엔딩이다.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두 점을 치는 소리
방범대원의 호각소리 메밀묵 사려 소리에
눈을 뜨면 멀리 육중한 기계 굴러가는 소리.
가난하다고 해서 그리움을 버렸겠는가
어머님 보고 싶소 수없이 뇌어보지만
집 뒤 감나무에 까치밥으로 하나 남았을
새빨간 감 바람소리도 그려보지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
돌아서는 내 등뒤에 터지던 네 울음.
가난하다고 해서 왜 모르겠는가
가난하기 때문에 이것들을
이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댓글
댓글창으로 순간 이동!MB와 찍은 사진들이 건물 위로 나부끼는 것을 보며 선거철임을 깨닫습니다. 안 그래도 공약도 좀 살펴보고 해야겠다 싶었는데, 도지사 후보군 중 가장 선호하는 김 지사에 관련된 링크에 눈길이 머무네요. 한가할 때 천천히 읽어봐야겠습니다.
이번 선거에선, 되도록 현실감각이 살아있으면서 중도적인 공약을 내세운 사람을 찾아봐야겠습니다. 이른바 좌우에 두루두루 표를 쥐어줬더니만, 번번이 실수만 한 느낌이라. ㅇ_ㅇ;
오, 벌써 건물 위로 현수막이 나부끼나 보죠?
이번 지방선거에서는 정말 블로거들이라도 나서서 정책과 공약을 검증하고, 소개하는 운동을 벌였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너무 선거공학(이라고 표현하기도 뭣한 땅따먹기식 산수놀이)만 앞서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좋네요.
글머리에 인용 글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인식을 가진 사람이 꽤나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도요.
도대체 언제쯤이면 '비지(혹은 유사상표)'의 망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답답하군요.
그 답답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참 답답하네요...;;;
MB집단이 대한민국의 정신과 국토와 시스템과 민주주의에 미치는 무지막지한 해악에 대해 아직 참을만하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군요... 이대로라면 지방선거에서는 또다시 MB의 똘마니들이 압승할 거고, MB는 더더욱 기고만장하여 그의 만행을 극한으로 밀어붙일 거고, 설사 향후 20년 안에 최소한의 양심을 갖춘 권력집단이 집권을 하게 되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신의 은총으로 대한민국에 다시 주어진다고 해도, 그때는 이미 한반도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건 영영 물건너간 스토리가 된 이후일 겁니다. 제 위기의식이 너무 과장된 것인지요...?
왜 제가 MB 정권의 해악에 대해 무감각하다는 취지의 논평을 접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군요. 저는 선거연대나 후보단일화를 위한 노력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당장 선거연대나 후보단일화의 피상적인 이미지들을 좀더 명확한 근거를 확보해 선탠지 안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저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그 표피적 형태가 아닌 내용으로서 접근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떤 정권의 비민주성의 해악을 극복하기 위해선 그저 단순한 반대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왜 해악인 것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문화로서의 정치적 학습이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선거가 오로지 어떤 특정 정당, 특정 정권에 대한 반대에 올인한다고 현재의 국면이 타계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제 취지가 잘못 전달되었다면, 그것은 제 글 표현이 부족해 모호한 탓이거나, 혹은 빈센트님께서 제 취지를 다소 과장해서 받아들이신 것이나... 또는 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 차제가 다르거나 일 것 같습니다.
무감각하다는 취지는 아닙니다. 다만 MB정권의 해악에 대해 공감을 하더라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요. 제가 쓴 "참을만하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은 그런 의미였구요. 저는 이 해악이 너무나 심각해서 가급적이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고, 그러는 것이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나라로 바로 서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것이 왜 해악인 것인지를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는 문화로서의 정치적 학습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말씀에는 공감하지만, MB 정권은 대한민국 유권자들이 그런 정치적 학습을 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통제하고 있으니까요. 일단 최소한의 상식과 양심은 갖춘 정권하에서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 차제가 다르거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그건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민주주의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그것에 대해 상호 비판하고 토론하는 것은 보다 나은 지향점을 찾기 위한 과정이니까요. 하지만 MB 정권은 국민들이 그러한 생각을 갖는 것 자체를 차단하기 위해 온갖 흉악한 짓들을 해대고 있지 않나요.
결국 민노씨 님과 저의 관점 차이라면 "스스로의 정치철학에 의거해 이성적으로 비판", "국민들에게 필요한 건 좀더 냉정한 판단을 도와줄 수 있는 이성의 재료들" 이런 부분에 있을텐데, 저의 관점은 현재로서는 이런 것들이 유권자들의 선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기제가 작동할 수 있는 환경이 전혀 안되고 있다, 그러니 그런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추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는 거라고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MB 지지율이 50%가 넘게 나오는 나라에서 저런 바람직한 표현들은 수사에 그친다, 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선 제 답글에 오타가 너무 많네요.. ^^;; 지송.
빈센트님께서 말씀하신 취지야 제가 왜 이해를 못하겠습니까...
다만 그 방법론에 있어서 지금까지 그 많은 선거에서 너무 '적(?)'만을 의식하는 투표행태가 고착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래왔고요. 좀 더디더라도 정공법으로 그 기본과 원칙을 생각할 수 있는 최소한이 필요한 시기이지 않나 싶은 마음이 강합니다.
무척 공감이 가는 글이었습니다! 댓글을 쓰다가 길어져서 제 블로그에 올리고 트랙백으로 쏴 드립니다~
트랙백 감솨~!
뭐 저도 유창선의 저 말 투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지 않습니까. 가장 좋은것은 할 수 없는 확률이 99%. 마음에 안들지만 어쨋거나 일은 되게 하는게 좋다고 생각하므로 씁쓸 하지만 받아들여야죠. 뭐 원래 전 유창선따위는 신경 안쓰지만요. ㅋ
평론가란 사람이 백명이고 그들이 천마디의 말을 쏟아낸다면, 게 중에 두 어 사람의 열마디 정도 쓸만한 소리만 있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완벽할 수 없으니깐요 ㅋㅋㅋ. 딱히 대책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저는 딴류(?)를 빼고 이른바 야5당 중에는 민주당을 제일 싫어합니다. 나머지는 좋게 보는데 진보신당은 좀 답답한 분들이라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고요.
할 수만 있다면 민주당도 좀 스윽~ 해버렸으면 좋겠네요. 민주당에 계신분들 중에도 좋은 분이 많지만, 이상하게도 그 당 안에서 항상 악당(?)이 힘을 얻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서 딴류가 사라져서
진보당-노동당-참여당-창조당-민주당
이렇게 싸우는 시절이 오면 좋겠습니다.
그나저나 이번 유시민 경기지사 출마 기자회견 할 때 국회에서 할 수 있도록 해 준것이 민주노동당이라고 하는데 정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당장이 아니라, 좀더 넓고 멀리 보면 항상 미지근한 상태로 '다음에, 다음에'라는 패배주의에 젖는 것보다는, 미래를 좀더 확실하게 준비할 수 있는 문화의 바탕을 마련하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단일화도 좋고(이건 정말 꼭 필요한 과정을 거쳐서 단일화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선거연대도 좋은데... 그 과정이 생략되고, 기반 문화의 정치적 정보/토론 인프라가 너무 부실한 것 같아서 무척 아쉽습니다..
추.
유시민씨 경기도 출마는 물론 피선거권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디에서나 출마할 수 있는게 원칙이긴 하지만... "대구에서 뼈를 묻겠다"는 취지로 말씀하신 분이 뜬금없이 경기도에 출마하니 좀 벙찌는 측면이 많습니다. ㅡ.ㅡ;
음.. 유시민은 대구에서 뼈를 묻겠다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런거 함부로 믿지 마세요. ㅡ,.ㅡ. 유시민이 아니라 누구든 이런걸로 까는건 좀 안좋습니다. '취지'라고 하셨는데 그런식으로 규정해버리면 노회찬이든 심상정이든 강기갑이든 누구든 자유롭지 못하거든요. '취지'라고 써놓고 내용은 글쓴사람 마음대로 해석하는거니깐요. 정치판을 좀 좋은 마음으로 바라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내가 정치인이 된다면 그동안 정치 비판하면서 주장한 내용은 커녕 저사람들 하던거의 반의 반도 못할거니깐요. 당사자들의 절박한(?) 마음을 이해하는게 중요한거같아요. 연대는 성공하리라고 믿습니다. 민주당도 바보 아니니깐.
1. 진중권 "유시민, 대구에 뼈 묻겠다더니" (미디어오늘. 10.3.11)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519
2. 유시민 "대구에 뼈 묻겠다고 한 적 없다" (뷰스앤뉴스. 10-03-12 )
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60639
제가 일전에 본 기사는 1.이었고, 그 기사에 바탕해서 답변한 것입니다. 제가 추상적 '취지'를 방패삼아 왜곡/과장하려는 의도로 답변한 것은 아니고요. 그런데, 닭장군님 말씀 듣고 찾아보니 2. 같은 기사도 있네요. 둘다 다른 매체보다는 상대적으로 신뢰하는 미디어인데요... 헷갈리는군요.
위 발언이 정말 있었는지, 그 취지가 정말 '노무현 정신'을 언급하는 것이었는지는 그 진위 확인이, 적어도 검색을 통한 언론기사 확인만으로는 어렵네요. 확실한 근거를 갖고 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제 블로그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유시민 연설을 챙겨볼려고 노력합니다. 나중에 여력이 되면 강기갑이나 노회찬 이해찬 이런사람들로도 영역을 넓히려고 생각 중인데요. 어쨋든 유시민이 대구에 뼈를묻겠다고 한걸 지금까지 제가 본 적이 없습니다. 있는데 못찾는 것인지, 보고도 기억을 못하는건지 모르지만, 하여튼 저는 본 기억이 없고, 지금 찾아봐도 안보입니다. 그런데 최근에 진중권이나 민주당이 유시민이 저랬다고 주장하면서 유시민이 그랬다~ 라는 소리가 나온거죠. 그런데 제가 본 기억이 없고, 유시민도 그런적 없다고 하고, 증거도 안보입니다. 그래서 유시민은 저런 말을 한 적이 없는것이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제가 본 유시민은 자기의 앞으로의 진로를 못박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 말대로 싸가지없고 영악하니깐요. 혹시 모르니 뼈를 묻겠다고 한 증거를 더 찾아보겠습니다.
닭장군님 블로그는 물론 이왕에 찬찬히 둘러봤습니다. :)
그래서 닭장군님께서 해오신 모니터링은 잘 알고 있고요.
다만 아직 어느 쪽도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라서.. ^^
혹시라도 근거를 확인하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단지 반MB만이 시대의 요구인 것처럼, 거기 호응하지 않는 것은 역적인 것처럼 몰아가는 사람들도 있더군요. 단지 무엇을 반대한다는 것이 어떻게 지향점이 될 수 있는지...
반엠비가 현실적인 귀착점일 수밖에 없더라도, 그 과정에서는 좀더 냉정하고, 또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마저 생략하자고 하면... 비르투님 말씀처럼 그건 그 무엇을 위한 지향점도 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관리자만 볼 수 있는 댓글입니다.
별말씀을요. :)
말씀 잘 들었고, 또 제기하신 문제의식에도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가끔씩 재밌는 토론이 있기를 바라봅니다.
지적하신 오타는 수정했고, 글 말미에 확장점으로 글 소개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확장점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은 왜 제시하지 못하는가? (bonafider)
http://theacro.com/zbxe/?document_srl=150607
پیچ به انگلیس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