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는 자기정당성을 자기에서 찾는다. 독재는 자기정당성을 스스로 무한반복하는 성찰없는 운동성이다. 그 독재에는 '타인'이라는 게 없다. 그래서, 최근 펄이 인상깊게 봤다는 영화 [더 웨이브]에서 주인공 교사가 '독재'란 수업주제를 강의하는 첫 마디가 바로 이 'auto'다. 독일어 '독재'에도 그 'auto'라는게 붙어 있더라. 독재는 오직 스스로에게 다시 돌아와 묻는다. 내가 원하는 것인가. 그것은 내가 옳은가를 질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옳으니까.

독재에는 또 '역지사지'라는 게 없다. 요즘 개봉중인 영화 [공자]에는 당시 순장제도(주인이 죽으면 종들까지 함께 파묻어버리는) 희생당할 위기에 처한 한 아이를 구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서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당신이 원하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요구해서는 안된다. 어제 법정 스님이 입적하고, 청와대는 한마디 했다고 하더라. 법정의 "중도"가 MB의 정치 노선과 닮았다나 뭐라나. 세상을 오직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고, 역지사지란 개념이 아예 존재한 적도 없을 때에야 나올 수 있는 소리다. 이런 이건 정말 가신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많은 시민들이 안타깝게 바라보는 한 노스님의 죽음도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이명박의 독도 발언.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008년 7월 한일 정상회담에서 일본 후쿠다 총리가 “교과서 해설서에 독도를 다케시마로 쓰지 않을 수 없다”고 한 데 대해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 경향, 언론연대 "MB의 독도발언, 공포와 괴기의 스펙터클"

MB의 오토매틱스러운 자기 중심적 철학은 언론이 보여주고 있는 침묵의 카르텔 속에서 기이한 광채를 뿜어낸다. 독재는 자기말만 하는 사람이다. 그 정당성은 자기말만 하는 자기반복의 메커니즘에서 생겨난다. 그런 자기 반복 속에서 독재는 항상 스스로 옳은 것이 된다. 그리고 언론이 침묵하고, 그 침묵을 시민사회에 강요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실체로서의 독재는 완성된다.

우리마저 입을 다물면, 그렇게 되면, 그 때는 드디어, 우리가 MB다.


* 추천
각 사 편집 책임자에게 물어봤다 "왜 보도 않으냐"고
"그게 주요 뉴스인가?"…"요미우리 일방 주장일 뿐"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561

"방송사, 요미우리·MB에 포로가 됐나"
언론개혁시민연대, 지상파 방송의 침묵에 '호된' 질타 (미디어오늘)
http://www.media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86569

* 강추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사업으로 은밀히 추진되고 있는 한반도 대운하 계획은 이 땅의 무수한 생명체로 이루어진 생태계를 크게 위협하고 파괴하려는 끔찍한 재앙이다. [....] 대통령 공약사업 홍보물의 그럴듯한 그림으로 지역주민들을 속여 엉뚱한 환상을 불어 일으키고 있다. 개발 욕구에 불을 붙여 국론을 분열시키면서 이 사업을 추진하려는 것은 지극히 부도덕한 처사이다. 일찍이 없었던 이런 무모한 국책사업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커다란 재앙이 될 것이다. 이런 일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다면 우리는 이 정권과 함께 우리 국토에 대해서 씻을 수 없는 범죄자가 될 것이다.
- 법정스님, 한반도 대운하 안된다.

법정 스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한반도 대운하, 즉 4대강 죽이기 사업은 이 땅의 생태계를 파괴하는 끔찍한 재앙이고, 지극히 부도덕한 처사이며, 이것을 막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라고. 온 국민의 80%가 반대하는 사업을 눈 하나 꿈쩍 하지 않고 진행하는 자들이 법정 스님과 철학이 비슷하다고? 그것도 아직 장례를 치르지 않은 스님의 법구 앞에서 할 말인가? 그러고도 당신들이 과연 인간의 탈을 썼다고 할 수 있는가? 망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여, 이제 더 이상 법정 스님의 맑은 정신을 욕보이지 마라.
- 소요유, 망자를 쉽게 욕보이는 방법 중에서




내가 흔히 온라인 실존이라고 이야기하는 블로거 페르소나(persona)는 똥을 누거나 포르노를 보며 자위 하지 않는다.  페르소나는 실존과 당연히 겹치지만, 그 양자는 서로 다르다.  블로거 '민노씨'라는 페르소나는 오프라인의 나와 같지 않고, 한 철학자의 어투를 빌면, 그저 가족 유사성을 띨 뿐이다. 나는 나라는 역할, 페르소나를 연기한다. 타인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나라는 역할을 연기한다는 점에서 그 페르소나는 나지만, 그 페르소나를 결정하는 것은 나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페르소나는 나에게 온전히 속해 있지 않다.

페르소나와 실존, 양자는 같은 존재이지만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존재라서 다른 존재다. 말장난이 아니다. '같지만 다르다'가 아니라, '같아서 다르다'는 게 중요하다. 자아는 분열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단일한 자아란 허구이기 때문에, 자아는 서로 다른 맥락, 관계 속에서 확장한다. 그 확장하는 여러 개의 자아들이 우연과 필연으로 결합해, 마치 실루엣처럼, '나'라는 위태로운 형상으로 구성될 뿐이다. 나라는 존재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심연이 가로 놓여 있다. 이것은 본질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동시에 실존적이다.

이 글을 쓰게 한 동기인 한 블로거의 페르소나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블로거 아거의 페르소나는 몇 가지 핵심적인 키워드들을 품고 있다. 블로기즘. 대공중관계, 에피소딕 기억. 인지적 활동가. 관계적 스키마. 이노베이션. 심리학. 행동경제학... 이런 딱딱한 용어/표현들 가운데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상징은 '관객모독'이다. 블로거 아거에게 블로그란 무대이며, 블로거란 무대에 선 배우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일인극이며, 누구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아거의 말을 들어보자.
민노씨(@minoci)'누구나 쓰기만 하는 블로깅을 하려고 하고, 읽으려는 블로깅을 하지 않는다'고 개탄했는데, 블로그나 트위터나 모두 이기적 글쓰기다. 시간의 흐름속에서 자신을 표현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공인이 아닌 사람들이 블로그/트위터는 소통의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고독이건 나르시시즘이건 폐인이건 중독이건 홍보건, 그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을 중심으로 무대를 짜고 관객을 초청하고 싶어할 뿐이다. 그래서 남의 블로그/트위터를 읽지 않는 것을 개탄할 필요는 없다. 내가 블로그/트위터를 쓰지 않는다면 그곳은 이미 버려진 황무지일 따름이다. 그래서 블로그/트위터가 영원할 것인가를 논하는 것조차 의미없다. 아무리 문전성시고 불야성을 이루는 공간일 지라도 내가 무대에 오르지 않는 순간 그곳은 영원히 죽은 공간이 된다.

- 아거 @gatorlog,
~
"관객모독 공연이 길어지더라도 붙박이처럼 붙어서 끊임없이 뭔가를 말하고 있는 그런 배우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는 이름모를 관객들이 있다." [관객모독]
@royalwine 고마워요, 관객님.
 


- 아거 @gatorlog
,
담담한 듯, 숨가쁜 아거의 독백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한 연극의 한 장면 같다. 그는 배우이며, 고독하다. 그가 그 고독을 부정하더라도 블로거 아거의 페르소나는 고독한 일인극의 주인공이다. 관계를 통해 의미가 생기고, 그래서 맥락이 만들어지고, 관계들의 '사이'가 발생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공간 역시 각자에게 존재하는 '간주관성'의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가 "무대에 오르지 않는 순간 그곳은 영원히 죽은 공간이 된다." 황지우는 이렇게 말한다. "이기심은 이타심은 아니다. 하지만 이타심은 이기심이다."

홀로 연기하는 나는 이기적이지만, 그래서 내가 떠난 뒤에 그 무대는 텅 비어 버리겠지만, 아거가 말하는 쓸쓸하고, 때로는 한없이 정겨우며,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이 흘러가는 그 모든 무대들에는 관객이 존재한다. 그 관객들은 모노드라마의 관객처럼 어두운 객석에 숨어 있기도 하고, 마당극의 관객처럼 무대 위로 뛰어 오르기도 한다. 나는 늘 관객들에게 당신과 나는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마당극의 주인공들이라고 이야기해왔다. 그건 일종의 바람이지만, 나 역시도 나를 연기하는 배우일 뿐이다. 나는 온전하게 나만을 연기할 수 있을 뿐이고, 그나마도 그 나는 나에게 온전히 속해 있지도 않다. 그건 참 쓸쓸하다. 우리는 어쩌면 그 쓸쓸함을 연기(延期)하기 위해 이 쓸쓸한 모노드라마를 연기(演技)하는지도 모르겠다.

블루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가짜집시는 이렇게 멋스럽게 변주해서 이야기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 이야기는 어떤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문득 떠올려본다. 나는 블로그라는 일인극 속에서 적으면 적고, 많으면 많은 관객들과 함께 나의 드라마를 만들어간다. 그 드라마는 지금 어디로 나아가고 있나. 내 소망과 원망과 쓸쓸함과 외로움의 체현인 이 작은 블로그, '민노씨.네'엔 어떤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는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이건 아주 재미없는 드라마다. 치기 어린 계몽극일 뿐이다. 허망한 푸념이 떠다닌다. 하지만 내가 꿈꿨던 건 아주 멋진 마당극이었다. 그 마당이 광장이 되고, 또 때론 까페의 작은 탁자 위에 켜진 촛불이길 바랐다. 봄이면 함께 손잡고 산책하는 호수가 되고, 겨울이면 벽난로가 있는 오두막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원망과 자조와 한숨 뿐이다. 아, 이것도 참 과장이긴 하다. 블로거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과장한다.

더불어,  대개 공감하리라, 블로거의 페르소나는 '이상화된 자아'를 추구한다. 왜냐하면 그에게 블로거란 스스로 체현하는 실존이면서, 동시에 관객에게 비치는 '페르소나'이기 때문이다. 현실은 블로그에 비해 훨씬 더 더럽고, 끈적끈적하며, 관습적인 권력의 세계다. 블로그는 현실을 연장하고, 확장한다기 보다는 현실을 대리한다. 그 대리되는 현실로서의 블로그는 속(俗)에서 잉태한 자아가 쌓아가는 자신만의 성(聖 혹은 城)이며,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필연적인 이율배반이다.

그 드라마를 나는 온전하게 끝낼 수 있을까. 나는 내 역할을 덜 후회스럽게 마칠 수 있을까. 그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 내가 무대에서 내려가는 순간, 나와 함께 한 관객들에겐 어떤 잔상이 남겨지게 될까. 그런 상념들은 내 재미없고 메마른 글에도 가득 담겨 있다. 매순간 그 소망과 갈망, 쓸쓸함과 아쉬움은 블로그를 가득 채운다.

블로거들은 실존의 자아를 때로는 부정하고, 때로는 보완하면서 스스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끝날 수 없는 드라마를 조금씩 완성해간다. 블로그가 전적으로 목적론적 세계는 아니지만, 그리고 블루문과 가짜집시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나의 기록이 콘텐츠가 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기록은 나를 미화한다. 그렇게 나를 발가벗기는 부끄러움의 고백조차도 우리들은 미화한다. 그 미화는 하지만 이상화된 자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도덕적이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이제 현실과 블로그는 서로 한몸이 되어간다. 그건 당연하다. 하지만 양자의 역학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듯 하다. 블로그가 현실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그러니 이상화된 자아가 관습적인 세속의 자아를 자극하고, 일깨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 반대 방향으로, 현실 속 관습화된 자아가 블로거 페르소나를 해체하고, 거기에 현실의 권력과 관습을 이식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자기만의 드라마를 만들어가던 블로거들은 하나 둘 사라져간다. 이제 그들은 현실 그 자체가 되어버린 블로그에 적응하지 못한다. 현실이 블로그의 이율배반 속에서 축적되는 존재의 성찰들을 흉내내지 않고, 블로그가 현실의 관습과 욕망을 강박적으로 흉내낸다. 점점 더 블로그엔 블로그에만 있던 드라마들이 사라져간다. 이제 현실이 블로그를 접수한다. 이것이 지금 블로그가 도달한 슬픔이다.


추.
블로그는 "당신을 위한 콘텐츠"가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의미에서의 콘텐츠다. 그 콘텐츠는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물어보는 콘텐츠이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론적이다. 블로그의 관계적 육체는 블로거의 독백을 관계적으로 만듦으로써, 그렇게 그 독백을 대상으로 만들지 않고 상호 침투하게 만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블로그는 '배우'와 '관객'의 이분법을 점진적으로 해체시킨다.


* 이 글은 컴퓨터가 고장나기 전에 쓰던 글인데, 지금 새로 컴퓨터를 구입하고 나서 이어 쓴다. 도무지 마무리가 될 것 같지 않다. 실은 나는 왜 이런 이상한 글을 쓰는지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올린다.



블로그, 대학에 가다

2010/02/24 17:37
요즘 대학 미디어 교양강좌 교재가 뭔지 모른다. 강사마다 다르겠지. 내 기억을 떠올려보면 두껍고, 지루하며, 한 가격하는 개론서들을 열심히 겉핥었던 잔상같은 풍경이 떠오른다. 블로거 강정수가 이번에 모 대학에서 미디어 관련 강의를 하나 맡았나보다. 강의 제목은 그 이름도 (고색)찬란한 '매스컴과 현대사회'다. 어, 익숙한 타이틀이네? 이럴 분들 많으리라. 하지만 강정수의 강의계획서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각 소주제별 읽을거리를 여러분들의- 저의 소수 블로그 벗들- 도움으로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 읽을 거리는, 1. 먼저 한국어로 쓰여진 것, 없을 경우 영어로 쓰여진 것 순입니다. 2. 출처는 '블로그 글', '웹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글' 순서이고 3. 다음으로는 종이에 인쇄된 글입니다. 책을 제가 기피하는 것은 아니고요, 학생들에게 경제적 부담 주기 싫어서 입니다^^. '읽을거리'는 학생용입니다.

- 강정수, 매스컴과 현대사회 강의용 읽을거리 구해요 중에서
http://npool.ktpage.net/entry/mediaSociety . 강추!

이하 강정수의 강의 계획을 좀더 읽히 편하게 요약 발췌한 개요다. 모쪼록 많은 블로거들이 자기 글이든, 자신이 탐독하는 다른 블로그 글이든, 강의 주제에 적당하다 생각하는 포스트들을 추천해주길 바란다. 블로거가 좋다는게 뭔가! : )

1. 정보: 과잉과 희소성
2.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3. 미디어와 조직

4. 전통 미디어 1: 신문, 출판
5. 전통 미디어 2: 방송, 음악, 영화

6. Social Media: 커뮤니케이션과 커뮤니티
7. 미디어와 공론장
8. 공론장과 여론
9. 사생활 보호

10. 저널리즘의 미래 1: 온라인 저널리즘
11. 저널리즘의 미래 2: 누가 지불할 것인가?
12. 링크의 자유
13. 저작권 2.0

14. 웹과 선거: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변동
15. 선거법과 표현의 자유

16. iPhone 현상
17. 모바일 커뮤니티, 모바일 커뮤니케이션
18. 망중립성
19. Media Literacy

20. 검열과 free net/web
21. 디지털 피로현상
22. Nerds
23. You are a Reporter! : the future of reportage


각주제 번호(내용까지 적어도 상관없고)와 추천글 링크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정말 땡큐베뤼감솨하시겠다~~~!



* 예제
10. 저널리즘의 미래 : 온라인 저널리즘
아거, 블로기즘과 저널리즘 1. http://gatorlog.com/mt/archives/001771.html
아거, 블로기즘과 저널리즘 2. http://gatorlog.com/mt/archives/002340.html

11. 저널리즘의 미래 : 누가 지불할 것인가
최진순 인터뷰(인터뷰어 강정수^^) : http://www.mpool.tv/archives/3 (동영상 중 일부)

15. 선거법과 표현의 자유
이정환, 표현자유 선거법이 제한할수있나 http://www.leejeonghwan.com/media/archives/000841.html
민노씨, 선거법 93조 1항 합헌결정 유감 http://www.minoci.net/936

18. 망중립성
미닉스, 망중립성을 엿바꿔 먹은 한국적 네트워크 http://minix.tistory.com/190

19. 미디어 리터러시
아거, 이누엔도 1.
http://bit.ly/d2WofU  2. http://bit.ly/cR19Wv
나솔. 이누엔도 관련글들.
http://nassol.textcube.com/196 http://nassol.textcube.com/197
http://nassol.textcube.com/198


추.
아참, 실천가 강정수에게 박수를~!! 


* 확장점
203호 추천글
8. 공론장과 여론
한윤형, 쇼트트랙, 그리고 '사이버 민중주의'
http://yhhan.tistory.com/1150

nassol 추천글
16. 아이폰 현상
아거, 아이폰과 침묵의 소용돌이 http://gatorlog.com/?p=1950

마하반야 추천 목록
마하반야, "매스컴과 현대사회"와 관련해서 쓴 글이 얼마나 있을라나? http://mahabanya.com/700



조선일보식 나라망신과 오션스 일레븐

2010/02/24 13:20
"힐튼 집 턴 한국여성, 나라망신" (네이버 뉴스캐스트 송고제목) 
원제목 : "한국여성, 할리우드 스타 전문절도단 주범 혐의 재판 중" (조선, 윤희영) 

'나라망신'이라는 관극틀도 저질이지만, 도둑이 한국인이라 나라망신이라니 논리도 병맛이다. '나라망신'은 헐리웃 스타 주택을 털었다는 절도범 국적에 붙일 수 있는게 아니다. 절도범에게 그들의 국적을 들어 나라망신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문화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오션스 일레븐 류 영화가 관객들에게 환호를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물론 헐리웃 일급 배우들이 연기하는 낭만적인 절도범들과 그들의 기기묘묘한 절도수법이라는 볼거리 외에 '돈을 갖고 튀어라'는 고고하게 이어져내려오는 자본주의적 전통에 기반한다. 이것은 자본주의 신민들의 판타지다. 국적이고 나발이고, 병맛 자본주의의 문화적 감수성의 근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도둑님들은 자본주의 시대의 꽃이다. 멋진 상징이시다! :D

농담은 이쯤하고, 정말 나라망신을 언급하려면 이정도는 언급해야 하지 않겠나. 이건희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이 그 무거운 혐의에도 불구하고, 그저 돈 많고, 권력 크다는 이유로 특별사면되는 게 나라망신이다. 유엔 인권위의 기본적인 권고사항인 겨울철 주택철거 사항을 개똥 취급하고, 물대포로 용산 불기둥을 만들어낸 그 야만적인 공권력 행사가 나라망신이다. 조선일보는 이런 나라망신에 대해선 오히려 재벌 편들기에 바쁘고, 정부 옹호하기에 분주하며, 그 농성 철거민들의 비도덕을 욕하기에 숨넘어간다.

하나만 더.
이렇게 나라망신이라는 극히 자극적이고, 위험한 관극틀을 미끼질로 써먹는 조선일보식 나라망신 드립질이 정말 나라망신이다. 스스로 일등신문이라고 자부한다면 이런 식의 나라망신은 자제하길 바란다. 미끼질에도 지켜야 하는 최소한이라는게 있는거다.


* 일전에 쓰다만 글 마저 쓰기 차원.



이누엔도와 거짓을 숨기기 위한 진실

2010/02/09 18:14

비판에 대한 피로감, 좀더 정확히는 거기에 남긴 나솔의 댓글(들)에서 이어지는 글.


1. 이누엔도 (Innuendo)

속임, 기만이라는 주제는 매혹적인 주제다. 그건 말과 글이 존재하는 한, 그 말과 글을 통해 권력을 추구하는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러니 아마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주제이기도 하다.

이누엔도(Innuendo) 1. (@gatorlog) http://bit.ly/d2WofU 
발화자의 부정적 편견을 우회적으로 은연중 독자/청자에게 내면화시키는 지적(수사적) 조작.
"선장은 오늘 하루 술에 취해 있지 않았다"

이누엔도(Innuendo) 2. (@gatorlog) http://bit.ly/cR19Wv
1. "의미의 단언적 전달을 제한하는 척하면서 애초 의도한 의미를 그대로 전달"
2. "사람을 간접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직접적인 공격만큼 효과가 있다"

암시적인 의식조작? 우회적인 의식조작? 적당한 우리말 표현이 생각나지는 않는다. 각설하고, 아거의 우려처럼 이누엔도는 여러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 ㄱ. 우선 수용자(독자/청자)를 피동화된 선동과 조작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ㄴ. 발화자가 의도한 편견을 확대하기 위한 기만적인 언술장치이며, ㄷ. 주로 인신공격을 위해 사용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누엔도는 투명한 언어가 아니라, 구정물의 언어다. 이누엔도가 판치는 세계는 점점 더 탁해질 수 밖에 없다.


2. 거짓을 숨기기 위한 진실
이누엔도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황지우의 오래된 문장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기억의 변주가 있었을 수 있으나, 대충 기억하기엔 이런 문장이다. "범죄자는 거짓을 숨기기 위해 진실을 말한다. 그 때의 진실이 중요하다." 일견 진실이 갖는 상대성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 이 문장은 이중적이다. 진실은 그 자체로 거짓을 위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 그것이 첫번째다. 동시에 그렇게 거짓을 위해 동원되고, 수단화된 진실을 그렇다면 어떻게 받아들어야 하는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 문제다. 거짓을 위해 동원된 진실을 그저 폐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 진실을 그 거짓을 깨뜨리기 위한 도구로 다시 재도구화할 것인가? 도구화된 진실은 어디까지가 수단이고, 또 어디까지가 목적인가? 그 양자는 어떻게 구별가능한가?

nassol  2010/02/03 16:33

저도 소망이 감지되는 비판이 좋아요. 물론 비판이 신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비판할 점이 있다면, 소망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꼬집으려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통쾌하기도 하고 그리고 충격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소망이 감지되지 않으면 무력감이 느껴져요. 비판하는 것 만으로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소망이 없는 비판은 존재 이유가 없는 듯 하고요. 바라는 상태가 없는데 무슨 괴리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소망의 존재가 감지되지 않으면, 마치 비판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 사람 조차도 소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무력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비판하는 능력도 안 뛰어난 저는 더욱 무력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요. 비판하는 분이,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세요, 행동으로 보여주세요'라고 독자가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소망을 보여주지 않을 때 독자가 느끼는 무력감에 대해서 인지하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이누엔도가 기만과 조작을 위한 권력적 언술의 기술적인 방법론을 이야기한다면, '거짓을 숨기기 위한 진실'의 문제는 권력적 언술의 자기 해체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기만을 위해 종사하는 진실은 어떻게 스스로의 회로 속에 들어가 그 진실로 위장된 기만의 성채를 깨뜨릴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그 정교한 회로를 해체시킬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여기에 쉬운 길, 쉬운 답은 없다. 우리는 그저 각자의 소망을 대화를 서로에게 투사해볼 뿐이다. 이것은 진실과 기만의 게임이면서, 또 자기를 던져야 하는 게임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저 게임만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