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닷컴과 심야만화방의 추억

2010/02/09 17:37
언론사닷컴이 홍등가를 방불케한 건 이미 오래전 일이다. 각종 미끼 사진들과 사이드바 광고는 점점 그 도를 더해간다. 아무리 경영란이 심하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한다 싶다. 내 아무리 포르노 합법화를 지지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포르노는 포르노답고, 언론사는 언론사다워야지, 이건 무슨 술집 찌라시로 도배해 놓은 것 같다. 90년대 심야만화방의 삐리리 비디오 상영하는 복고적 향수마저 불러 일으킨다. 그걸 노린건가? ㅡ.ㅡ; 각종 언니들의 쭉쭉빵빵 화보, 연예인 하품하고, 똥트림하는 것까지 기사화하고(주로 화보 기사들을 가장한 광고들), 성형외과, 비뇨기과, 치과, 그리고 킹카 오빠&퀸카 언니들을 위한 미팅, 중매 사이트들의 광고들까지... 내가 지금 기사 읽으러 왔는지, 광고/화보 보러 왔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굳이 여기서 안보여줘도 볼 때 많다. 너무 배려하지 말아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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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과 한겨레, 경향의 쭉방녀 화보 및 광고
사이드바 '연재만화'는 정말 해당 언론사 연재만화가 아니라 그냥 '광고'다. ㅡ.ㅡ;
출처 : http://img113.yfrog.com/img113/1030/am4.jpg
제공 : @ikechoi

이런 언론사닷컴의 관극틀은 독자들의 시간낭비를 필연적으로 초래하고, 불필요한 시선 분산을 아주 아주 적극적으로 유도해 가독성을 최악으로 만드는 시스템이다. 네이버 욕할 거 하나도 없다. 네이버보다 더하면 더하지 덜할지 않다. 상업화를 추구하더라도, 수익모델을 창출하더도 이런 90년대 심야만화방의 삐리리 비디오 상영 같은 '오빠빠빠~~ 잠깐 놀다가~~'방식은 곤란하지 않겠나? 다시 말하지만 언론사닷컴에 가지 않더라도 볼 때 많다. 애써주지 않아도 된다.

뭣 좀 방법 없을까?
최소한 야구장 담벼락 같이 해주면 좋겠다. 언니들 화보로 미끼질하는 것까지는 그렇다치고, 제발 광고 꼬락서니나마 좀 덜 자극적으로, 깔끔하게 다듬어 주면 좋겠다. 야구장 광고들 예전엔 정말 눈 아팠는데, 지금은 깔끔하니 보기 좋더만. 물론 주목도는 좀 떨어지겠지만. ㅡ.ㅡ; 언론사닷컴들 가운데 가독성에 있어 쾌적감을 느끼게 하는 사이트는 거의 없는 것 같고, 짜증 지대루다 싶은 사이트들은 수두룩 빽빽이다. 아무리 지금 당장의 수익구조가 최악이더라도 조금씩이나마 개선노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추.
이런 눈에 노골적으로 보이는 문제 외에 정말 심각한 문제는 기사처럼 보이는 광고기사(이른바 스폰서 기사)의 문제이긴 하다. 물론 이것도 이제는 거의 노골적이더라. 언론사의 경영란을 방증하면서, 또 동시에 언론 신뢰성에 대해 그 근원에서 질문을 던지는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웃백 런치세트 / w호텔 숙박권까지!  T world에서 킹카&퀸카의 연애를 따라잡자~
한 통신사 홍보 메일 제목이다.

연애에 대한 상상력이 아우슈비츠의 앙상한 나신처럼 발가벗겨지고 있다. 점점 더 연애는 패밀리 레스토랑과 W호텔로 치환된다. 그게 킹카/퀸가를 따라잡아야 하는 우리시대의 표준답안이다. 이제 가장 감미로운 사랑의 밀어는 홍보문구와 서로 몸을 바꾼다.  연애는 붕어빵 기계의 뚜껑 뒤집기 같은 것이 되고, 통신사 홍보문구가 되며, 연예인 뒷담화로 피어나는 관음적 상상력이 된다. 이런 붕어빵 같은 시대가 숨막힌다. 그러다가 문득....

너는?
금자씨 뛰쳐 나오시고, 나즈막히 대사 한방 날리시면...

나나 잘할게요, 쓰미마셍.
몇년째 연애도 못하고 있으면서 무슨... 

W호텔에서 붕가붕가하는게 발렌타인데이 킹카&퀸카의 최대 목적인거임? 그런거임?
아, 동의함! 아리가또!!


추.
가즈랑 2010/02/08 18:07
전 돈 있고 능력있는 사람들이 호텔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는 건 솔직히 부럽습니다.^^ 나중에 여유가 된다면 저도 호텔에서 느긋하게 시간 보내보고도 싶고요. 민노씨가 화내는 것은 아마도 저같은 사람의 욕망을 비판한 건 아닐껍니다. 그런 욕망을 부추기는 사회를 가리킨 거겠죠? ㅎㅎ 전 저런 제목가진 메일오면 그냥 스팸인가보다 하는데 이렇게 글로도 적어보셨네요.

저도 애인이 있고, 돈이 넘치면 호텔에서 우아하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죠.^ ^; 혹은 특별한 날이라면 호텔에서 낭만적인 영화 속 한장면을 재현(?)하고픈게 평범한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이상한 감수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화난(?) 이유는 이렇습니다. ^ ^; 솔직히 화가 난 건 아니고, 좀 어처구니가 없달까, 짜증이 난달까..

우선은 연애라는게 무슨 1. 햄버거집 2. 패밀리 레스토랑 3. 호텔... 이런 계단식 신분상승으로 규격화되는 듯한 저 촌스런 광고문구(와 그 내용..을 보면 단계별이네요... 제가 가끔 이런 이멜도 훑어보기도 합니다... ;;;)에 짜증이 났고요. 특히나 "킹과&퀸카의 연애를 따라잡자"는 문구에는 그 짜증이 치솟았더랍니다. 이노무 나라에선 연애도 무슨 누구 따라잡고, 흉내내는건가... 싶은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연애라는 사회현상(?)에 모방심리가 잠재되어 있다는 건 충분히 인정하지만, 킹카/퀸카라는 이 저렴한 상징조작의 대상이 되는 느낌이랄까... 좀더 인간적인 드라마(?)를 상상해내지 못하고, 이 시대의 욕망에 그저 기계적으로 충실한 저 문구들이 소름끼친달까... 뭐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울중앙지법(형사14단독 박창제 판사)에서 진중권의 모욕혐의를 인정해 벌금 300만원을 선고했다고 한다. 좀더 자세한 내용은 아래 기사를 참조하면 좋겠다. 이하 아주 짧은 단평.

"변희재 듣보잡" 진중권씨 벌금 300만원 선고 (프레시안)

1. 나는 '듣보잡'이란 표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유머러스한 자기 겸손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경우를 빼곤 아주 싫어하는 편이다. 이건 인격을 비하하는 경멸적인 표현이 맞다. 이건 유명 숭배, 파워 숭배가 아주 일상화된 대한민국의 반인격적 풍경을 반영한다. 유명하지 않으면 짜져주셈! 되시겠다. ㅡ.ㅡ;

그러니 연예인과 일반인이라는 코믹한 구별처럼, 그러니까 연예인을 기준으로 하면 연예인과 비연예인이지 뭔놈의 일반인? 그럼 연예인은 특별인? 그리고 이걸 당연하다고 써재끼는 개념없는 기자들처럼, 듣보잡도 사람을 명망도 여부로 평가하는 저질스런 관점이 맞다.

2. 그럼에도 대한민국 일등신문 조선일보에 칼럼을 기고'했'던 변희재 대표께서 일개 블로거 진중권에게(진중권의 혐의는 진보신당 당원 게시판에 썼던 글, 그리고 자신의 블로그에 썼던 글, '비욘 드보르잡'이 문제되었다고 하더라) 모욕죄를 씌어 고소를 하고, 이걸 떡... 아니 정의의 수호자 검찰께서 친히 공소제기하시야, 결국 법원은 벌금형을 선고하는 이 풍경은... 뭐랄까, 좀 코믹하달까? 좀 병맛스럽달까? 참 시간 남아도는구나 싶다.

3. 공인과 유명인은 좀 거칠게 표현하면, 까여도 된다. 개인의 인격권 존중과는 좀 다른 영역에서 공인과 이에 준하는 유명인들은, 그들이 갖는 상징은 공공재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그들의 사회적 가치다. 그 상징 때문에 권력도 휘두르고, 또 공무도 수행하고, 돈도 그렇게 많이 처버는거다. 그런데 나를 까지 마세요? 좀 까여도 된다. 물론 그 한계는 존재하지만, 이들에게 우리 일반인과 같은 기준을 부여해서는 안된다. 연예인과 일반인이라면서? ㅎㅎ. 농담이다. 이거랑 그거랑은 또 다른 문제다. 암튼 좀 까여도 된다.

4. 이 사건은 변희재에게 굉장히 자충수라고 생각되는게 뭐냐면, 이 친구는 유명인 컴플렉스라고 할 수 있는 행동들을 많이 보여줬는데, 그러니까 스스로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망을 맘껏 분출하였더랬는데, 그렇게 (준)유명인이 되어 진중권씩이나 되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논객에게 까임을 당하였다면, 아, 이건 기쁜 일이 아닌가?(나라면 기쁘겠다, 까임을 당하더라도...;;;) 진중권이 시간 남아도나? 진중권이 아무나 까나? 그래도 거의 유명인에 근접했으니까 까는거다. ㅡ.ㅡ;

5. 한줄 정리. 변희재는 이제 '듣보잡'이라는 사회적 명칭을 법원 판결을 통해 공식적으로 확보하셨다. 축하드림. : )


추.
진중권이 항소는 귀찮아서 별 생각 없지만, 변희재에 대한 형사고소를 생각한다고 하던데...
개인적으론 말았으면 한다. 같은 수준으로 투신할 필요는 없잖오.



정지민의 지적 된장질, 혹은 원문드립질

2010/02/03 11:18
피디수첩 형사사건 일심판결문 : 극단적 요약 버전에서 이어지는 번외 버전(이라기 보다는 농담 버전..이랄까).


1. 어떤 싸움의 풍경
진중권과 정지민(피디수첩은 구라쟁이~!! 이랬던 번역쟁이)이 한판 붙었나보다. 정지민이 진중권을 비난하는 그 정반대의 의미에서, 그러니 찬사의 의미로다가, 진중권은 역시나 킹왕짱의 쇼맨쉽을 타고난 것 같다. 검증된 대중적 관극틀은 토론(이라기라기 보다는 '뻘밭 개싸움'...)의 관극틀이다. ㅡ.ㅡ;;

2. 정지민이 했다는 이야기는 이렇다.
"나는 천상 인문학도다. 진중권 같은 연예인을 지망하는 사이비 석사가 아리스토텔레스를 허술하게 인용해서, 교양에 목마른 무지한 어린아이들을 낚을 때, 나는- 비록 PDF파일일지라도- 아리스토텔레스 원문을 혼자 공부했다. (중략) 이것이 내가, 그가 보기에 “잘났다고 생각”할만한 이유다. 소신이 있고 의지가 강하다는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정지민, 진중권 글에서 재인용. 아래 발아점 참조)
내가 보기엔 좀 똘끼충만인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원문 혼자 공부하면 "'잘났다고 생각'할만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내 보기에, 정상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공부가 "소신있고 의지가 강하다"와 어떤 논리적인 인과를 맺는건지, 아무리 노려봐도 답이 안보인다. 이건 '너 왜 거짓말하고 지랄이니?'라는 질문에 , '니가 대충 아리스토텔레스로 헛지랄할 때, 나는 그거 원문으로 독학했어' 이런 대답같다. 병맛도 이런 병맛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건 아리스토할애비건 그거랑 거짓말이랑 무슨 상관인지 모를 일이다.

3. "아리스토텔레스 원문"?
무슨 원문? 우선 궁금한 거. 아리스토텔레스의 모국어는 뭐지? 어느 나라 말이길래... 그리스어? 그리스어라고 치고, 그럼 그리스어를 공부해서 읽었단 소린가? 얼핏 생각해봐도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원문"이란 건 무슨 원문을 이야기하는건지 모르겠다. 보다 본질적인 관점으로 이야기해보자. 그러니까, 정지민이 그리스어를 공부해서 "아리스토텔레스 원문"을 "독학"해서 읽었다 치자. 어떤 텍스트의 원전이 본래 쓰여진 언어(가령 도스트예프스키의 러시아어나, 괴테의 독일어, 세익스피어의 영어),그러니까 어떤 작가의 사상이 어쩔 수 없이 빚지고 있는 그 작자의 모국어로 그 원전을 읽으면 그거야 참 좋겠다만, 그리고 그런 노력에 대해선 당연히 상찬해야 마땅하겠으나, 그것만으로 그 원전에 대한 해석이 권위를 갖게 되는 건 전혀 아니다. 더욱이 '원문 읽었어효!'라는 천박하기 그지 없는, 이 초딩스런 지적 된장질, 원문드립질로 무슨 "소신과 강한 의지"가 증명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런 생코미디는 또 오랜만이다.


추.
나는 진중권에게 기본적으로 대단히 호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좀 벙찌는 면이 없지 않다 싶지만, 정지민의 아리스토텔레스 드립질은 그저 황당무계할 뿐이다.


* 발아점
login댓글을 통해 알려준 소식.
사과를 하랬더니... (진중권)
http://blog.daum.net/miraculix/18263830 추천유보.
대충 정지민이 헛소리하네.. 정도의 글..이라고 나는 이해. 그냥 낙서 같은 글이라서, 물론 흥미요소가 강하긴 하지만, 굳이 읽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긴 하다.


* 보충 : sianzu의 아주 상식적이고, 적절한 논평.
영어도 오역하시는 분께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원문"으로 읽었다는데 이 분이 "원문"의 의미를 혼자서 잘못 알고 계신 모양입니다. 아리스님의 원전을 원문으로 읽었다는 것은 통상 고전그리스어로 읽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정지민씨는 그리스고전어를 10년 이상 공부하신 훌륭한 인문학도 이시네요. 15살 정도부터 그리스 고전어를 공부하신.. 정지민씨군요.

a77ila(아틸라)의 보충 논평 (2010/02/03 15:47)
제가 알기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문(그리스어) 가운데 살아있는 것은 많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를 서양에서 "재발견"한 것은 이슬람권(아랍어)에서 가지고 있던 것들인데, 이걸 아베로에스나 기타 중세말기 사람들이 라틴어로 번역한 거라고 알고 있다능... 따라서 이거 제대로 원문 공부하려면 그리스어, 라틴어 뿐 아니라 아랍어 같은 이슬람권의 언어도 상당히 알아야 한다능... (난 철학과 나온 남자라능...)

* 보충. 정지민과 전여옥
좀더 부연하면 어떤 정당한 비판, 도덕적 비난도 그녀의 "자긍심"을 침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본은 없다'가 생표절인 것으로 밝혀진 뒤에도 여전히 드높은 "자긍심"을 간직한 전욬과 아주 흡사한 느낌이다. 많은 이들이 양자의 공통적 속성들을 이미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 하다. 잘못했다, 미안하다, 이 말이 불가능한 사람들이 있기는 있나보다. 이건 자긍심이 아니라 광적인 자기 집착이다. 끔찍하다.



비판에 대한 피로감

2010/02/03 09:52
내가 마음 속으로 꽤 좋아하는 두 필자가 있다. 깐깐하고 고지식한 느낌의 기자와 존경스러울만큼 성실하고 정직한 철학자다. 이 글은 이 두 명의 실존적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은 아니다. 그러니 이 두 명을 당신이 생각하는 어떤 유형의 언어, 그런 담론의 풍경이라고 바꿔 생각하길 바란다. 이 두 사람은 세상의 부조리한 가치를 비판하고, 일갈한다. 그 말들이 모두 옳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대개는 숙고해야 마땅한,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좋은 영양가 만점 충고들이다. 

하지만 뭐랄까, 피로감이 쌓인다. 그것이 옳은 줄 알면서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쌓인다. 그래서 결국 외면한다.  다시 돌아가서 그 쓴 말들을 경청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렇다. 왜 그럴까? 이 글은 그 마음을 돌아보는 글이다.

김현은 문학의 가치를 '안락함'이 아닌 '불편함'이라고 이야기한다. (정확한 출처는 기억나지 않는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한국문학의 위상]인 것 같기는 하다) 문학은, 널리 보면 예술은, 당대를 지배하는 질서를 교란시킨다. 시스템의 포로인채로 안락한 시스템의 구심력 속에서 존재적 회의의 감각을 잊고 있던 독자들에게 그 시스템의 혈관을, 속살을, 그 안에서 흐르는 피를 드러낸다. 그건 안락하지도 않고, 평온하지도 않다. 우리가 꿈꾸는 어떤 소박한 바람, 그런 희망까지도, 어쩌면 권력이 만들어낸 환상일지 모른다고, 진실한 문학은, 예술은 고발한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왜 '두 필자의 이야기'가 불편한 걸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건 격리의 감정이라고 부를만한 심리적 소외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비판은 옳지만, 그 비판의 방법은 내가 그들과 함께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내지 않는다. 어떤 부조리한 사회현상을 비판하는 그 내용은 옳지만, 그 내용을 감싸는 언어가 고립된 지사의 풍모랄까, 무결점의 독선적 느낌이랄까, '너희들이 뭘 알아?' 이런 자기들만의 성채를 쌓는듯한... 그런 벽 같은 거.. 그런게 느껴진다.

비판은 절망으로부터 비롯한다. 그 절망의 짝은 바람이고, 소망이다. 무엇인가를 원한다. 그래서 이야기한다.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절망한다. 그리고 비판한다. 그런데 가끔은 비판을 만들어낸 그 절망이, 그 절망의 짝인 소망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게 보이지 않을 때, 내 마음은 이렇게 반응한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건데?' '참 잘나셨습니다' 이렇게 아이처럼 외면하게 된다. 나는 항상 내용과 형식, 마음과 몸은 서로 하나라고 생각한다. 내용이 그 소망에 어울리는 형식을 만나지 못하거나, 마음이 그 마음을 온전하게 드러낼 몸을 만나지 못하면, 그 마음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을 전적으로 내 부덕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으리라. 이건 내가 내 마음, 그 마음의 옷인 내 글을 통해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 나솔의 댓글
nassol 2010/02/03 16:33

저도 소망이 감지되는 비판이 좋아요. 물론 비판이 신랄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비판할 점이 있다면, 소망하는 바와 현실 사이의 현저한 차이를 꼬집으려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통쾌하기도 하고 그리고 충격효과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소망이 감지되지 않으면 무력감이 느껴져요. 비판하는 것 만으로는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니까요. 소망이 없는 비판은 존재 이유가 없는 듯 하고요. 바라는 상태가 없는데 무슨 괴리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소망의 존재가 감지되지 않으면, 마치 비판하는 능력이 뛰어난 그 사람 조차도 소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무력한 존재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비판하는 능력도 안 뛰어난 저는 더욱 무력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요. 비판하는 분이, 반드시 '대안을 제시하세요, 행동으로 보여주세요'라고 독자가 강요할 수는 없는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소망을 보여주지 않을 때 독자가 느끼는 무력감에 대해서 인지하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 제목 수정 : 시퍼렁어님 감사 : ) 
- 옳바른 비판에 대한 피로감 -> 비판에 대한 피로감.
- 옳다/올바르다..를 순간 헷갈려서 올바른, 혹은 옳은 이라고 써야 하는데, 옳바른...이라고 썼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