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프로젝트 시즌1. 상지대 구출 대작전


<개요> 인터뷰 와 브리핑, 현장 리포트
  3. 상지대 브리핑
  4. 농성장 인터뷰
  6. 현장 속보



<더나은의 소회>
저는 사실 그 당시에 무척 힘들었습니다. 물론 제 이름을 더나은이라고 명명했지만, 더 나은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사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하루하루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 당시, 더 나은 프로젝트를 통해 저 자신을 치유하고 싶었습니다. 저 보다 힘든 상황에 있는 아이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그 친구들에게 위안을 얻었습니다. 누군가에겐 제 동영상이 웃음과 추억을, 행복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에 열심히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민노씨에게 미안합니다. 그 당시 감정이 심각한 상태여서 본의 아니게 안하겠다고 말한 것도 수차례...

누군가에게 웃음을 주었다면, 어려운 문제를 가볍게 다가갈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도왔다면 만족합니다. 저는 방송인도 아니고, 방송인을 꿈꾸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제 목소리가, 제 이야기 세상을 움직이는데,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나마 기여했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동영상을 통해 저를 지켜보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혹시 제 동영상을 보았을 가족들, 특히 부모님, 당신들께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냥, 저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영상 속의 날 당신들께서 봐준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열심히 웃는 모습을 보면 저를 걱정하는 마음이 좀 덜어지지 않을까, 그런 마음에 더 열심히 웃으려고 노력했고 더 발랄한 모습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동영상을 찍는 내내 누군가 때문에 울고 또 울었지만 그 모습을 보여주면 싫어할 것 같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더 나은 프로젝트는 계속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 본업이 그것이 아니기에 아마 예전처럼 지속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더 나은 세상은 항상 꿈꿔야 하기에 제가 필요한 곳에 제 상황이 허락한다면 함께 할 것입니다.


1. 계기

더 나은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된 데는 민노씨 영향이 컸습니다. 물론 사진 찍히길 좋아하고 예쁘게 나오는 것을 좋아하는 저와 잘 맞는 프로젝트를 원했던 까닭도 있었습니다. 시작은 단순한 재미삼아 찍는 동영상이었습니다. 그냥 장난치듯 찍는 동영상이었지만 사람들은 슬픔보단 재미를 추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 도구로 삼아 상지대를 알려보고자 했습니다. 웃고 즐기는 동영상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항상 사회운동, 개혁에는 진지함이 존재합니다. 그런 진지함에 가끔 저 스스로도 질식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러면 그게 중요한지 뻔히 알면서도 방관하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계속 관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됩니다. 텔레비젼 예능프로를 보듯 그런 동영상을 통해 사회에 관심을 갖게 하고 싶었습니다.


2. 더 나은 프로젝트  

내용을 정함에 있어 진지함보다는 재미를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회운동과 다이어트, 사회운동과 연애 등등, 이런 것들엔 연관성은 없어보이지만 사람의 욕구를 부정하고서 어떻게 사회운동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사랑을 추구하는데, 그것을 뺀 사회운동은 진심이 담긴 것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특히 저는 무척 가슴이 아픈 사랑을 하고 있었는데(현재진행형 현재완료), 그것들을 모두 담아낼 수 있다면, 그 진심이 전해진다면, 모두의 마음을 울릴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한 '상지대 다이어트 워' 같은 말도 안되는 프로젝트는 사실 상지대 소셜미디어팀 친구들의 강점을 적극 활용하고자 한 기획이었습니다. 친구들은 SNS 활용을 처음 접하는 터라 자신감도 없었고, 장기간 상지대 투쟁으로 활력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에겐 활기가 필요했습니다. 자신의 강점을 살리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다이어트 워, 다이어트 킹 같은 프로그램의 유명도에 기대고 싶은 생각도 있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즐기면서 사회운동을 할 수 있도록, 죄책감이 아닌 그저 즐기면서 사회운동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트위터에서 우리들은 단순한 RT 한방이면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착각합니다. 실제 조회수나 반응과는 좀 괴리가 있을 때도 많습니다. 기존 사회운동은 어떻게 보면 그저 인간 내면의 양심에만 기대어 호소하는 수준에 그쳤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사건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죄를 짓는 거라는 수준, 혹은 촛불집회에 당장 나와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방관자다 라는 등의 논리로 사람들에게 부담감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동영상을 다른 이들에게 소개하는 것도 사회운동에 일환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단순한 RT와는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순한 RT는 내가 동영상을 보지도 않고 감동도 느끼지 않은 채 하는 것이지만 직접 보고 주변인들에게 소개하는 것은 적극적 지지자가 될 가능성이 높고 재미를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3. 한계

물론 한계는 존재했습니다. 특히 제 네트워크(주로 트위터)만을 이용해 홍보에 나선 것은 큰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다른 유통경로가 존재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노와 나의 네트워크만으로 홍보를 하려니 무척 힘들었습니다. 제 적극적 지지자들도 한 두 번은 RT 해주었지만 부탁하지 않으면 RT하지 않는 순간이 왔습니다. 이 점은 앞으로 프로젝트를 추구함에 있어 더욱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4. 무대뽀, 그리고 감성과 이성  

저는 무대뽀입니다.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자주 감정과 감각에 의존했습니다. 제가 너무 감정과 순발력에만 의존하면 민노씨의 이성과 지성이 저를 뒷받침 했습니다. 제가 감각적이기 때문에 그만큼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데, 그 감정 상태를 인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인내심으로 배려해준 민노씨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무거운 주제지만 일부러 그러한 무거운 동영상은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더 이상 슬픈 일이 아니다!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재미 없고, 판에 박힌 듯한 방식은 거절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깊이가 없어보인다는 평가도 많이 들었습니다. 처음 상지대 친구들, 교수님들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사회문제를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공감대를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인간에겐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픈 일을  피하고 싶고, 타인의 고통에 들어가는 순간 자기도 빨려들어가 헤어나오지 못할 것 같다는 그런 느낌... 그런 느낌을 주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누구나 즐겁게 동참할 수 있는 일이길 바랐습니다.



<민노씨의 소회>
고통과 쾌락 사이.
놀이와 계몽 사이.
즐거움과 죄의식 사이.
답이 보이지 않지만,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BEST 7 : 더 나은 선정>


<BEST 10 : 민노씨 선정>




0. 언어, 투명한 감옥
주낙현과 이야기하는 주된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진실이 전해지고, 교감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즉 언어의 문제, 특히 지식인 언어의 배타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종종 한다(주낙현 인터뷰, 우리가 초대해야 할 사람).  왜 언어가 서로를 이해하는 매개가 되지 못하고, 서로를 고립시키는 벽이 되고 있나. 왜 마땅히 고민해야 하는 의미들은 우리들에게 끝내 전해지지 못하는가. 왜 지식인들이 떠드는 저 숱한 해외 석학의 이름들은 우리 삶에 아무런 영감과 자극이 되지 못하나. 왜 우리 대다수는 왜 네팔에 있는 신정환과 스탠포드의 타블로만을 그토록 열심히 뒤쫓고 있나.

그리하여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질문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삶을 표현하는, 우리 삶을 들뜨게 고양시키는 그 우리만의 언어를 갖고 있긴 한걸까. 조혜정은 [탈식민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를 통해 지식인 언어의 식민성을 고찰한다. 그 책이 나온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지식인 언어는 높은 벽을 쌓고, 대중과 교감하지 않는다. 대학 강단이라는 폐쇄적인 상아탑에 갇힌 채, 지식인 언어는 사회성원들을 교감하게 만들어주는 끈으로, 시민대중이 섞여 어울릴 수 있는 용광로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 언어는 지식계급의 고결한 성채를 지키는 두터운 철벽으로 기능한다. 간극은 깊어지고, 벽은 점점 더 높아진다. 언어는 해방의 광장이 아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가두는 투명한 감옥이 되어간다.

언어로 조직된 지식과 예술이 인간과 세계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 못하고, 인간과 인간을 나누고, 인간과 세계를 나누는 계급적인 표지가 되어가는 현실을 우리는 무관심하게 바라본다. 계급을 지키는 방패로서의 지식은, 계급적 위계를 고착시키기 위한 야만적 권력 작용을 통해, '합리성'과 '객관성'이라는 그럴듯한 옷을 입고, 그 권력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이 생겨나고, 언어가 권력을 위해 복무하며, 그 권력과 언어(지식)가 한 몸이 되어 만들어낸 시스템 위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가령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시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낸, 동양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은 이 언어와 권력의 문제가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1. 인간은 언어다.
언어는 도구이자 그 자체로 목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든 행위들의 바닥에 언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언어는 한 몸뚱이다. 이것은 문맹이거나, 벙어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언어적'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감정과 정보를 '언어적'으로 밖에는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언어적인 형태로서의 맹아들로밖에 인간은 그 '존재'를 세울 수 없었기에, 비유하자면, 인간은 곧 언어다.

2. 두 개의 언어. 
언어는 인간 안에 스며들어 그 인간을 규정하고, 세우며, 형성시키지만, 더불어 객관적인 실체로서 인간 바깥에도 존재한다. 인간 안에 있는 언어는 인간 바깥에 있는 언어를 깨뜨리는 잠재력을 갖는 언어, 즉, 세계와 나를 이어주고, 또 매개하는 관계적 언어다. 즉, 권력과 계급을 지탱하는 벽과 감옥으로서의 언어적 구조물을 깨뜨릴 수 있는 건 역시 언어 뿐인데, 그 언어는 객관적인 외적 실체로서의 언어가 아니가 인간 안에 스며들어, 그 존재와 세계를 교감하게 이어주는 간주적인 언어, '관계적 언어'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로 구축된 세계를 다시 해석하기 위한 언어인 메타언어와는 다른 의미의 유동적 실존의 언어다.

3. 관계적 언어가 재현하는 진실
진실을 재현하는 것이 사명인 자, 흔히 지식인과 예술가로 칭해지는 자는 자신의 말과 글, 작품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 세계는 앞서 이야기했듯 권력과 욕망으로 복잡하게 엉켜진 실타래와 같은 세계다. 그들은 세계를 자신에게 통과시키고, 그렇게 자기 안에서 언어적으로 재구성된 세계라는 재료를 통해 자기의 형태를 찾아간다. 이것은 거대한 미로 속에서 여행하는 낯선 체험이다. "미로의 공간은 신비롭다. 그러다가 그곳에 간 뒤에는 시간이 신비롭게 느껴진다."(정현종). 그 낯선 공간적, 시간적 체험을 통해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통해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또 세계의 일부를 깨뜨리는 것이다.

4. 자명한 진실, 소녀가 처음 만나는 사랑  
한 인간에게 깃든 관계적 언어가 인간을 세우고, 또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재현하는 도구라면, 그 인간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때론 선명한 하나의 언어적 우주가 창조되기도 한다. 그 우주는 대부분 시(詩)적 은유로서의 공간을 구성하고, 우리를 그 안으로 초대한다. 그 우주는 "단 한 줄일 수도 있다."(기형도).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과 단 한번도 떨어진 적 없는 권력과 그 권력을 위해 늘 성실하게 복무하는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언어적 집합들(지식)로 구축된 세계는 마치 사춘기 소녀의 꿈처럼 뒤틀리고, 위장된 채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세계의 진실을 재현하는 언어 역시 그 소녀가 처음 만나는 첫사랑의 감정처럼 때론 복잡하고 어려울 수 밖에는 없다.  


* 떠올린 글
예술의 영원한 기원은 한 형태가 어떤 사람에게 다가와 그를 통하여 작품이 되기를 원한다는데 있다. 그 형태는 그 사람의 혼의 소산이 아니며, 그의 혼에 다가와서 그의 작용하는 힘을 요구하는 나타남이다. 그것은 사람의 본질행위에 좌우된다. 사람이 그의 본질 행위를 다하고 그의 앞에 나타나는 형태에 자기의 온 존재를 기울여 근원어를 말한다면, 그때에 저 작용하는 힘이 용솟음쳐 나오고 작품이 형성되는 것이다.
- 마르틴 부버, '나와.너', pp.18,19 표재명 역, 서울:문예출판사, 1995.
 

* 발아점
가독성의 신화는 달콤한 유혹이다. 글은 누구나에게 매끄럽고 편하게 읽혀야 한다는 것은 '쉬운 소통'이라는 가면을 쓴 집단주의의 늪이다. 글은 복수의 음역을 넘나드는 것. 평평한 외벽에 막혀 소통할 수 없던 것을 맑은 눈물로 발산하고 교감하는 상상이다. (Deframing) via @gator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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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옥토님과 함께 국립현대 미술관에서 열리는 [아시아 리얼리즘] 전시회(마지막 날)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목요일(7일) '씽크카페 @정치의 미래'에 잠깐 트윗중계를 도와주러 갔는데, 발제자 중 한분이셨던 세.바.여(세상을 바꾸는 여자들) 박안나님께서 전시회 초대장을 주셔서, 부랴부랴 다녀왔네요. 이 글은 전시회 감상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박안나님께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서 간단히, 정말 간단히(ㅡ.ㅡ;) 쓰는 글입니다. 사진 촬영이 허용된 전시회 안내실의 안내 그림과 간단한 소개글을 찍어왔는데요. 그거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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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블로 해프닝과 저널리즘의 무능

2010/10/09 10:55
타블로 사건(?)이 이토록 장기간 롱런한 가장 주된 이유는 '타진요'의 용맹무식한 끈기 때문이 아니라 대한민국 저널리즘의 의도적인 무능력(사실 너희들이 부추기고 즐겼잖오. ㅡ.ㅡ;)과 축적된 신뢰 상실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게 대한민국 언론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모든 사회적인 낭비(MBC 스페셜의 공적 자산으로서의 전파가 이런 해프닝에 소모될 수 밖에 없는 현실)는 기성 거대 언론사들과 그 위성 찌라시들에게 가장 무거운 책임을 돌려야 마땅하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언론작용, 신뢰와 권위를 갖춘 언론 버티고 있었다면, 그런 중추적 언론기관을 중심으로 의미유통이 원활하게 물 흐르듯 흘러가는 사회였다면,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수개월 동안 '루머'로 유통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제 와서 타블로 학력 해프닝과 광우병 괴담을 엮어 '인터넷 개구라쟁이들'이라고 드립질하는 조선일보는 스스로가 얼마나 이 '불신 사회'에 기여했는지 반성할 일이다. 대한민국 일등신문이라며? ㅡ.ㅡ;

한편, 연예인들과 관련한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은 적어도 온라인에선 (적어도 그 부피에 있어선) '주류 담론'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지 이미 오래다. 어떤 사회이든 연예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주요한 뉴스지만, 우리나라는 모든 분야를 앞도하는 지배력을 확보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왜곡된 의미유통 시스템에 기여하고 있는 세력은 1위. 포털(특히 카페 시스템과 실시간 검색어 시스템), 2위. 각종 온라인 찌라시들(특히 연예 찌라시들, 여기엔 한겨레, 경향의 일부 온라인 영역도 포함), 3위. 트래픽에 환장한 각종 광고판 블로그, 4위. 정치적 환멸/무관심을 거의 '강요'하다시피하는 무력한 정치권, 5위. 지지부진한 시민사회의 담론유통 역량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관장하는, 이 모든 것들 사이로 흐르는 공기와도 같은 '강박적 비교 문화'는 그 파편으로 '남 잘되는 꼴 못본다' 혹은 '잘 나가는 놈들 다 뒤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체제 순응적 공격성을 내면화시킨다. 그도 그럴게 우리사회에서 잘 나간다는 진상들은 가카께서 주창하시는 '공정사회'의 적들이기 때문이다. 도무지 합리적인 기준이 존재하는 것 같질 않다. 도무지 자격을 갖춘 자가 공직에 있는 것 같지도 않고, 능력으로 성공하는 사회도 아닌 것 같다. 어떤 지원서엔 "이재오 조카"가 기입되어 101:1의 경쟁률을 가뿐하게 넘어서고, 청와대는 '양배추' 드립으로 서민들 엿먹인다. 사학비리 대명사로 불리던 세력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시 학교 접수하려 나서고, 국가에선 이런 몰상식을 아주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니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들, 조금이라도 더 행세하는 자들에 대해 (무의식적이나마) 적개심을 내면화시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이치.

글이 길어졌는데 골자는 이거다.
조선일보의 "지랄"은 자기 얼굴에 침뱉기라는 거다. 일제시대 친일행적이니, 전두환 쿠데타와 광주항쟁 이야기까지 꺼낼 필요도 없다. 황우석 파동에서 보여준 그 변화무쌍한 둔갑술을 떠올려보시라. 누가 누구에게 괴담을 운운하며 훈계하나. 인터넷 찌라시들이 기생적 수익구조(비뇨기과 광고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할 것 같은 이 현실!)에 바탕해 온갖 무의미한 자극적인 휘발성 기사들을 곰탕처럼 거듭 울궈 먹는 이 루머/낚시 천국의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존재로서 누려야 하는 최소한의 고민을 아주 공격적으로 '강탈' 당하고 있다.


* 발아점 : 약간 이견이 있지만, 자극받은 단상..
역시나 조선일보가 타블로 사건에 대해 한면을 털어서 "광우병 같은 괴담이 인터넷에 횡횡하고 있다"고 지랄을 했다. 타블로사건이 보여주는 건 오히려 사이버스페이스의 허약함과 공신력 있는 언론/기관(MBC)의 파워 아니던가? 지들이 못난걸 왜 다른데 똥칠해 (coldera)


* 타블로 해프닝에 기울일 관심의 1/00만이라도 이런 재밌고, 유익한 일에 보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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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상지대 사태와 관련한 김문기 측 명예훼손 고발건과 관련한 경찰수사 및 인터넷 주인찾기 시즌2. '저작권, 창작의 무덤' 준비 때문에 나름 바빠서리...;;  쓸까말까 하다가 'DNA 렌즈'카카오톡 관련 글이 인기글로 올라왔길래 삘 받아서 간단히 쓴다. 간단한 의문, 질문들.


1. 일방적인 약관변경?
트위터에서 카카오톡이 일방적으로 약관을 변경하고 이를 사전에 사용자(회원)에게 통보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많더라. 이 점 확인해주기 바란다.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기업윤리 차원에선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관련 새드그개맨의 논평
법으로 강제되는 것은 아니고 전자상거래 표준약관에서 통상적인 약관 개정은 변경 7일 전, 이용자에게 불리한 내용의 개정인 경우는 변경 30일 전부터 고지하도록 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새드개그맨)


2. "제3자의 전화번호"  : 알았더라면 절대 가입하지 않았을 약관조항
위 약관의 일방적인 변경 논란과 관련해서 카카오톡 약관을 살펴봤다. 그러다 "이용자의 전화기 주소록내에 저장된 제3자의 전화번호"를 카카오톡에서 '마음 놓고' 수집한다는 걸 처음 알았다. ㅡ..ㅡ; 염병. 정말 기분 급 불쾌했다능. 이게 이번 약관변경을 통해 처음 도입된 조항인지, 원래부터 있었던 조항인지 궁금하다. 어쨌든 나는 몹시 많이 불쾌해져서 카카오톡 '계정 삭제'하고 아이폰 첫 화면에 있던 카카오톡 앱도 깨끗히 지웠다.

* 계정 삭제 및 어플 삭제 방법
아이폰상 어플만 삭제하면 곤란하고, '계정 삭제 -> 어플 삭제' 순으로 해야 깔끔할 듯. 계정삭제는 어플을 켠 뒤에 하단 메뉴줄에서 '설정'을 누르고, 열린 창의 최하단으로 가면 '계정 삭제'단추가 있다.


관련 새드개그맨의 논평
"이용자의 전화기 주소록내에 저장된 제3자의 전화번호"는 제3자의 개인정보이므로 수집 동의의 대상은 이용자가 아니라 제3자가 되어야 합니다. 제 휴대폰 안의 민노씨 이름과 전화번호를 민노씨의 허락도 없이 카카오톡이 가져가는 것. 문제죠. (새드개그맨)

"계정삭제(즉 탈퇴)하면 카카오톡에 수집된 개인정보 또한 모두 삭제하는 것이 원칙. 과연 지켜지고 있는지 의문."(새드개그맨)


3. 관련 문제들 : 역시 새드개그맨의 논평을 중심으로
사실 앱상에서 위치정보 개인정보 준수사항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앱이 얼마나 되나 개인적으로는 의심이 됩니다. 적용 법규가 존재함에 도 불구하고 준수하지 않습니다. 애플의 영향이죠.  현재 앱스토어문화는 아이튠스 앱스토어에서 온거죠. 한국에서는 정통망법, 위치정보법 등 지켜야할 법이 많은데 (사전 동의 고지 등) 필요한 사항이 많은데 애플 앱스토어는 한국법제에 맞는 시스템이 반영되지 않았죠.

한국법에선 개인정보 수집이나 위치정보 수집시 정보 주체의 명시적인 동의를 얻어야 하고 개인정보 취급방침도 고지해야 하고 미성년자에 대해선 법정대리인 동의도 받아야합니다. 동의시 고지 내용도 정해져있습니다. 그런거 안지키죠. (새드개그맨)


4. 소결 : 나 정통망법으로 고발까지 당했다. 하지만...   ㅡ..ㅡ;;
나는 정통망법 등의 법률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다. 정통망법상 조항에 근거해 고발까지 당했다(상지대 문제와 관련해서 내가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한 근거조항은 '협의의 형법'이 아니라, '광의의 형법' 정통망법 상의 명예훼손 관련 규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망법 혹은 위치정보법 등이 보호하는 개인의 정보와 프라이버시 규정들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마땅하다.



추.
카카오톡과는 인연이 없지 않다. 처음 웹상의 '카카오'가 만들어졌을 때 간담회에도 참석했고, 모기업?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검색엔진 '큐로보'에도 초기 큰 호의를 갖고 있었다. 카카오톡에 무슨 악감정이 있어서 이런 글 쓰는거 아니고, 시간 남아돌아서 이런 글 쓰는거 아니다. 모쪼록 카카오톡을  '글로벌 서비스'로 키우고 싶다면 이런 최소한의 의문과 질문에 당당하고, 명쾌한 답을 주길 바란다.



* 발아점


* 관련 추천
라쿤의 글 : http://rakooon.tistory.com/523 
: 이런 좋은 글이 이미 있었근영. 아쉬운게 있다면 블로그의 우클릭 제한과 제목의 플래시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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