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언어, 투명한 감옥
주낙현과 이야기하는 주된 주제들 가운데 하나는 진실이 전해지고, 교감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즉 언어의 문제, 특히 지식인 언어의 배타성에 관한 이야기들을 종종 한다(주낙현 인터뷰, 우리가 초대해야 할 사람).  왜 언어가 서로를 이해하는 매개가 되지 못하고, 서로를 고립시키는 벽이 되고 있나. 왜 마땅히 고민해야 하는 의미들은 우리들에게 끝내 전해지지 못하는가. 왜 지식인들이 떠드는 저 숱한 해외 석학의 이름들은 우리 삶에 아무런 영감과 자극이 되지 못하나. 왜 우리 대다수는 왜 네팔에 있는 신정환과 스탠포드의 타블로만을 그토록 열심히 뒤쫓고 있나.

그리하여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질문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삶을 표현하는, 우리 삶을 들뜨게 고양시키는 그 우리만의 언어를 갖고 있긴 한걸까. 조혜정은 [탈식민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를 통해 지식인 언어의 식민성을 고찰한다. 그 책이 나온지 1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지식인 언어는 높은 벽을 쌓고, 대중과 교감하지 않는다. 대학 강단이라는 폐쇄적인 상아탑에 갇힌 채, 지식인 언어는 사회성원들을 교감하게 만들어주는 끈으로, 시민대중이 섞여 어울릴 수 있는 용광로로 기능하지 못한다. 그 언어는 지식계급의 고결한 성채를 지키는 두터운 철벽으로 기능한다. 간극은 깊어지고, 벽은 점점 더 높아진다. 언어는 해방의 광장이 아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가두는 투명한 감옥이 되어간다.

언어로 조직된 지식과 예술이 인간과 세계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지 못하고, 인간과 인간을 나누고, 인간과 세계를 나누는 계급적인 표지가 되어가는 현실을 우리는 무관심하게 바라본다. 계급을 지키는 방패로서의 지식은, 계급적 위계를 고착시키기 위한 야만적 권력 작용을 통해, '합리성'과 '객관성'이라는 그럴듯한 옷을 입고, 그 권력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권력이 생겨나고, 언어가 권력을 위해 복무하며, 그 권력과 언어(지식)가 한 몸이 되어 만들어낸 시스템 위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가령 서양이 동양을 타자화시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낸, 동양과는 전혀 상관없는, '오리엔탈리즘'(에드워드 사이드)은 이 언어와 권력의 문제가 유구한 전통을 갖고 있음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1. 인간은 언어다.
언어는 도구이자 그 자체로 목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간으로 살아가는 모든 행위들의 바닥에 언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언어는 한 몸뚱이다. 이것은 문맹이거나, 벙어리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언어적'으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은 감정과 정보를 '언어적'으로 밖에는 수용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언어적인 형태로서의 맹아들로밖에 인간은 그 '존재'를 세울 수 없었기에, 비유하자면, 인간은 곧 언어다.

2. 두 개의 언어. 
언어는 인간 안에 스며들어 그 인간을 규정하고, 세우며, 형성시키지만, 더불어 객관적인 실체로서 인간 바깥에도 존재한다. 인간 안에 있는 언어는 인간 바깥에 있는 언어를 깨뜨리는 잠재력을 갖는 언어, 즉, 세계와 나를 이어주고, 또 매개하는 관계적 언어다. 즉, 권력과 계급을 지탱하는 벽과 감옥으로서의 언어적 구조물을 깨뜨릴 수 있는 건 역시 언어 뿐인데, 그 언어는 객관적인 외적 실체로서의 언어가 아니가 인간 안에 스며들어, 그 존재와 세계를 교감하게 이어주는 간주적인 언어, '관계적 언어'다. 이것은 단순히 언어로 구축된 세계를 다시 해석하기 위한 언어인 메타언어와는 다른 의미의 유동적 실존의 언어다.

3. 관계적 언어가 재현하는 진실
진실을 재현하는 것이 사명인 자, 흔히 지식인과 예술가로 칭해지는 자는 자신의 말과 글, 작품을 통해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 세계는 앞서 이야기했듯 권력과 욕망으로 복잡하게 엉켜진 실타래와 같은 세계다. 그들은 세계를 자신에게 통과시키고, 그렇게 자기 안에서 언어적으로 재구성된 세계라는 재료를 통해 자기의 형태를 찾아간다. 이것은 거대한 미로 속에서 여행하는 낯선 체험이다. "미로의 공간은 신비롭다. 그러다가 그곳에 간 뒤에는 시간이 신비롭게 느껴진다."(정현종). 그 낯선 공간적, 시간적 체험을 통해 인간은 자기의 존재를 통해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또 세계의 일부를 깨뜨리는 것이다.

4. 자명한 진실, 소녀가 처음 만나는 사랑  
한 인간에게 깃든 관계적 언어가 인간을 세우고, 또 인간과 세계의 진실을 재현하는 도구라면, 그 인간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때론 선명한 하나의 언어적 우주가 창조되기도 한다. 그 우주는 대부분 시(詩)적 은유로서의 공간을 구성하고, 우리를 그 안으로 초대한다. 그 우주는 "단 한 줄일 수도 있다."(기형도).

하지만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과 단 한번도 떨어진 적 없는 권력과 그 권력을 위해 늘 성실하게 복무하는 객관적인 실체로서의 언어적 집합들(지식)로 구축된 세계는 마치 사춘기 소녀의 꿈처럼 뒤틀리고, 위장된 채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세계의 진실을 재현하는 언어 역시 그 소녀가 처음 만나는 첫사랑의 감정처럼 때론 복잡하고 어려울 수 밖에는 없다.  


* 떠올린 글
예술의 영원한 기원은 한 형태가 어떤 사람에게 다가와 그를 통하여 작품이 되기를 원한다는데 있다. 그 형태는 그 사람의 혼의 소산이 아니며, 그의 혼에 다가와서 그의 작용하는 힘을 요구하는 나타남이다. 그것은 사람의 본질행위에 좌우된다. 사람이 그의 본질 행위를 다하고 그의 앞에 나타나는 형태에 자기의 온 존재를 기울여 근원어를 말한다면, 그때에 저 작용하는 힘이 용솟음쳐 나오고 작품이 형성되는 것이다.
- 마르틴 부버, '나와.너', pp.18,19 표재명 역, 서울:문예출판사, 1995.
 

* 발아점
가독성의 신화는 달콤한 유혹이다. 글은 누구나에게 매끄럽고 편하게 읽혀야 한다는 것은 '쉬운 소통'이라는 가면을 쓴 집단주의의 늪이다. 글은 복수의 음역을 넘나드는 것. 평평한 외벽에 막혀 소통할 수 없던 것을 맑은 눈물로 발산하고 교감하는 상상이다. (Deframing) via @gator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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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 글 쉽게 쓰기 vs. 알아서 읽으라고 배 째기

    Tracked from 바그네리안 김원철의 음악 이야기 2010/10/11 11:07 del.

    이택광 블로그에서 내 댓글에 반박이 달려서 또 댓글 달았는데, 링크 때문인지 스팸으로 분류됨. -_-; 그래서 트랙백 날림. 그러니까 이 글은 아래 링크한 원문과 댓글을 읽고 나서 읽으시라: ☞ 이택광, 〈냉소주의 시대의 인문학자〉 아열대님 댓글은 제 댓글을 그냥 쉽게 쓰라는 무책임한 요구로 뭉뚱그려 받아들이신 듯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옛날에 쓴 글 트랙백 날릴 테니 읽어보시면 오해가 풀릴지 모르겠습니다. ☞ 글 쉽게 쓰기 제가 쉽게 쓰라고 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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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Raylene 2010/10/11 09:42

    악 이렇게 저의 변비환자 인증을 만천하에 시켜버리시다닠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ㅇ<-< 전 제 코멘트가 들어간 RT가 링크된 줄 알았다구요ㅠㅠ

    여튼, 좋은 글 잘읽었어요. 생각한 바가 있어서 끄적거리고 있었는데 민노님께서 포스팅을 해주셨네요.

    저는 민노님께서 처음 RT해주신 트윗을 보고, 포스팅하신 두 가지의 글 중 하나만을 언급한 것이 아닌, 하나의 글이 다른 하나의 글을 종속하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어요. 굳이 표현하자면 제 트윗의 '선민의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쉬운 소통이 필요한 종류의 글도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렇지 않은 글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뉘앙스가 풍겼거든요.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는 무엇이든 시도가 가능하고 자유로운 만큼 얼마든지 어렵게 꼬아댈 수 있고 (엌ㅋㅋ 무식한 저한테는 이렇게 보인다능)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요. 그러나 글의 갈래에 예술만이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고 각각의 글에는 목적이 있고, 타겟이 있지 않겠어요? 처음 그 트윗을 해주신 분은 가독성/쉽게 읽히는 글이 글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오는 것 같아 불만이실 수 있겠지만 그런 글의 존재도 분명히 필요하다는 걸 전 말하고 싶었어요.

    어 이거...난독쩌는 댓글인가 헝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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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0/10/11 10:00

      십분 그 취지에 공감합니다. :)
      아, 그리고 말씀하신 RT 코멘트 트윗도 링크로 보충했어요. ^ ^;;

  2. 민노씨 2010/10/11 09:59

    * 링크 보충.
    레일린님의 트윗'들' 중에서 '들'

    http://twitter.com/hRyln/statuses/26958966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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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The나은 2010/10/11 16:02

    정말 멋진 글입니다. 감동이 너무 커서 안구에 쓰나미가 몰려오는군요.
    정말. 민노씨는 가끔 천재같단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글을 이렇게 잘 쓸 수 있나요?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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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노씨 2010/10/11 16:45

      제가 사모님으로 모실테니
      제발 그만 좀 하산하도록 하십시오.

  4. 민노씨 2010/10/11 17:36

    * 링크 보충
    주낙현 인터뷰 : '우리가 초대해야 하는 사람'
    http://minoci.net/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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