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단상 - 1. 책 분류법 혹은 독서법

2008/03/31 02:54
0.
솔직히 이름 만으로 몇 번쯤 들었을 뿐이다. 조선일보 기고자라는 부정적 편견이 없지 않다. 암무튼 조경란이란 소설가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아름다움의 과학]이란 책에 대한 서평은 흥미롭다. 내 주된 관심사인 '자기 모순'을 실현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이 서평은 자기가 말하는 바를 스스로 배반하고 있는 글이다. (링크는 접근성 확보를 위한 것일 뿐, 클릭은 비추. 시간 낭비 난 책임 못진다.)

마치 조선일보가 '안중근' 타령하는 그것과 몹시 닮았다. 친일신문이 안중근 내세워 마케팅하면, 참 뭐랄까, 지하에 계신 안중근이 통곡할 일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조경란의 글이 굉장히 후졌다거나, 소설가가 왜 이따위로 쓰는가, 뭐 이런 비난을 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전혀 아니다. 그럭저럭 읽을만한 글이다. 그 글의 자기배반, 자기모순이 나에겐 흥미로웠을 뿐이다.

내가 쓰는 글이 평균적으로 길어서 이 글은 주제별로 나눠서 쓸까 싶다.
일단 흥미로웠던 건 책 분류법이다.


1. 조경란식 책 분류법

조경란은 개인적으로 책을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고 한다.
"친절한 책, 순진한 책, 도발적인 책, 논쟁적인 책, 까다로운 책, 무뚝뚝한 책, 흥미로운 책." (조경란)

ㅎㅎ. (갑자기 위 문장 옮겨 적다가 웃음 폭발. ㅡ.ㅡ;)
암튼 조경란은 그렇게 분류한단다. 뭐, 그렇게 분류하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물론 왜 저렇게 분류하나 궁금하긴 하다. 앞서 폭소가 터졌다고 말했듯, 약간 코믹하다는 생각이 들긴했지만, 그럼에도 왜 폭소가 터졌는지, 그게 왜 코믹한 느낌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암튼 어떻게 분류하건 그건 조경란 마음이긴 하다. 문득 나는 어떻게 책을 분류하나 싶어서 떠올려봤지만... 당장 생각나는건 없다. 조경란식으로 분류하지 않는 건 확실하다. 굳이 내가 책을 분류하는 방식을 적어보자면 이런거다.


2. 나는 책을 어떻게 분류하지?

ㄱ. 여러 번 읽어야 하는 책 / 그럴 필요 없는 책
후자는 끝까지 읽으면 오히려 시간 아까운 책. 또는 끝까지 읽어봤자 남는 게 전혀 없을 것 같은 책도 포함이다. 그러니까 후자의 책이 반드시 나쁘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나와 맞지 않거나, 내가 그 책을 소화하기에 아직은 많이 모자라거나.. 이런 경우까지 포함이다. 단 한번만 읽고 끝내기 위해 어떤 책을 읽는다면, 그 책은, 대체로, 아예 읽지 않는 편이 낫다. 물론 여기에서 소설은 제외다. 소설은 두번 이상 읽는 경우가, 나 역시 거의 드물다. 하지만 역시나 좋은 소설도 여러번 거듭 읽어야 마땅하다.

ㄴ. 상업적 목적과는 크게 상관이 없는 책 / 상업적인 목적이 가장 큰 책의 존재가치인 책
물론 이건 상대적인 개념이다. 출판사가 자선단체도 아니고, 모든 책들이 출간된 이유는 대박내려는 목적이 있다는 거 인정한다. 정지영이 바득바득 지가 번역했다고 우겼던 '마시멜로 이야기' 같은 책은 후자의 책이 아닐까 싶다.

ㄷ. 저자가 있는 책 / 저자가 없는 책 
전자는 '그 저자'가 아니라면 읽을 수 없는 책, 후자는 상대적으로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그래서 시간만 있다면 누구나(상대적으로 복수라는 의미에서) 쓸 수 있는, 그럴 가능성이 높은 그런 책이란 의미다. 물론 후자의 책보다는 전자의 책을 좀더 선호하게 된다. 유시민이 지적했듯("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인간"), 마르크스는 이런 분류 방법이라면, 가장 위대한 저자다.

ㄹ. 나에게 이야기하는 책 / 그렇지 않은 책
나에게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면, 글쎄, 대체로 그 책은 읽다가 포기하게 된다. 이건 그 책 내용 뿐만 아니라, 그 책이 만들어내는 목소리까지를 포함한 거다. 이런 분류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호밀밭의 파수꾼]이다. 홀든은 정말 나에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ㅁ. 가슴과 머리로 함께 이야기하는 책 / 머리로만 이야기하는 책 / 가슴으로만 이야기하는 책
이건 키에슬로프스키(십계.The Decalogue, Dekalog와 삼색 연작. 블루. 화이트. 레드로 유명한 폴란드 출신의 감독)가 이야기한 좋은 영화에 대한 비유와 정확히 겹친다. 어떤 영화 기자가 키에슬로프스키에게 물었다.

= 좋은 영화란 어떤 영화입니까?
- 좋은 영화는 가슴과 머리, 그 모두를 따뜻하게 해주는 영화입니다

이렇게 분류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그 책은 정말 가슴과 머리를 모두 함께 따뜻하게 해주는 책이다. 물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들은 거의 모두가 그런 책들이긴 하지만.


3. 내가 알고 있는 가장 멋진 책 분류법

ㄱ. 니체.
가장 멋진 분류법은 물론 니체가 어딘선가 했다는 말이다.
그걸 어떤 책에서 했는지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나는 옛날 버전, 그러니 청하 버전 니체 전집을 갖고 있기는 한데, 물론 그걸 다 읽지는 못했다.). 아무튼 니체가 그랬다고 한다.

"나는 오직 피로 쓴 책만을 읽는다"

그렇다고 니체가 호러를 좋아했다는 의미는 아니고. ㅎ (너무 썰렁했나? ㅡ.ㅡ; )

덧. 여형사님께서 댓글을 통해 알려주신 바에 의하면, 위 언급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등장하는 말이라고 하네요. : ) 제가 그래도 꽤 재밌게 읽은, 완독하고, 전체는 아니지만, 부분 부분 수회독한 거의 유일한 니체 책이 '짜라'인데 민망하네요. ㅡ.ㅡ; 나이가 들긴 든 모양입니다. ㅎ. 여형사님, 보충 논평 고맙습니다. ^ ^. 참고로 새로운 '짜라투스트' 버전인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에 대한 여형사님의 짧고, 간결하면서, 감각적인 서평을 참조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관련글 : 짜라두짜는 이렇게 말했지, 니체 (여형사)


덧2. 여형사님께서 직접 구글링하셔서 해당문장을 찾아주셨네요. 다시금 고마움을 전합니다.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글을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을 피워가며 책을 뒤적거리는 자들을 미워한다.
독자를 아는 자라면 독자를 위해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한심한 독자들의 시대가 한 세기 더 지속되기라도 한다면 넋조차도 악취를 풍기게 되리라.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배워 읽을 수 있게 되면, 시간이 흐르면서 쓰는 것은 물론 생각까지 부패하기 마련이다.
한때는 넋이 신이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사람이 되더니 지금은 심지어 친민이 되고 말았다.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저 읽히기를 바라지 않고 암송되기를 바란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ㄴ. 홀든 콜필드.
영원한 아이 홀든이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그런다. 어떤 책을 읽었을 때, 그 책의 저자에게 전화(편지인지 전화인지 헷갈린다. 암튼)를 걸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는, 언제라도 그렇게 대화를 해줄 것 같은 책. 물론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암튼 그 비스무리한 말을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내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나는 코울필드라고 쓰여진 문예사판을 읽었는데, 콜필드가 대세인가보다. ㅡ.ㅡ;)

ㄷ. 김현, 혹은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텍스트의 '단절'을 이야기하는 구절이 서설에 등장한다. 이것도 오래된 기억이라서 정확하진 않다. 번역자의 해설에서 등장하는 것 같기도 하다. ㅡ.ㅡ; 암튼 그 기억이 정확한가, 정확하지 않은가는 중요하지 않고, 그 메시지가 중요하다. 좋은 책은 독자에게 아부하지 않고, 그 독자를 괴롭힌다. 좋은 텍스트는 자기만의 '절벽'을 갖고 있어서 독자들을 괴롭히고, 그 독자들이 그저 그 책의 메시지와 의미에 빨려드는 걸 방해한다. 글읽기에 의식적인 단절과 불편함을 가져오는 것이다.

[한국문학의 위상]에선가(?) 김현도 이와 같은 취지로 이야기를 한다. 세상에 대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는 문학은 그 무능력함으로 인해 오히려 가치를 얻는다. 그 문학의 비실용성, 상대적인 자율성으로 세상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다. 근대문학은 자신이 '아부'해야 하는 일차적인 독자인 '파트롱'(patron. 보호자. 후원자. 정도의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듯)을 상실한다. 그것은 대혁명으로 상징되는 근본적인 환경의 변화다.

문학은 명시적인 파트롱을 잃음으로써 자율성을 확보하지만, 대신에 문학의 계급성(당파성)은 여전히 작용해서, 자신이 과연 누구를 위해서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시달리게 된다. 하지만 이제 '눈에 보이는 파트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암흑 상태에서 저자는 진실에 대해, 아픈 세상의 진실에 대해 쓸 것을, 그 세상을 문학 속에 반영할 것을 명령받는다. 그게 확률적으로, 아주 이기적으로 판단해도, 자신이 독자에게 가장 쉽게 호소하는 방식, 아부하는 방식이기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이 아픈데, 그 세상(의 진실)을 반영하는 문학이 행복하기만 하다면, 그것은 기만이거나 거짓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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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 VS 진보신당] 1탄. 우리에겐 "We Can"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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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올블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패자부활전을 관객들에게 제안한다.


무척 아쉽고, 안타까운 사건이다.
답답한 마음에 동종업계에 계신 ***님께 전화를 드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마음은 한가지였다.
아쉽고, 안타깝다는 것.

좀더 관망해보자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 아니다.
다만 부족하더라도 사건를 간략하게나마 검토할 필요를 느낀다.
이 부족한 글이 무엇보다도 합격이 취소된 희주님께, 이번 사건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혹은 당혹스런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는 다수 블로거들께, 그리고 끝으로 올블에 발전적인 대안 마련을 위한 아주 작은 보탬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1. 법률적 문제 : 채용 취소의 위법성 여부. 정신적 피해에 따른 위자료 문제.  
2. 올블의 대외적 커뮤니케이션 방법론에 대한 검토(올블의 위기관리능력과 커뮤니케이션의 딜레마)
3. 기업문화로서의 가족주의 : 올블의 가족주의 vs. 삼성의 가족주의, 또 하나의 가족?
4. 결 : 올블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패자부활전 제안


1. 법률적 문제 : 채용 취소의 위법성과 정신적 피해 부분.

일단 이것부터 간단히 검토하고 넘어가자.

1) 요약.
ㄱ. 채용 취소 그 자체로는 위법성을 인정하기 어렵다고 본다. 왜냐하면 합격 통보와 취소 통보 사이의 간격이 매우 짧고, 그에 따른 기회비용 박탈로 인한 법익침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ㄴ. 다만 채용 취소에 따른 정신적 피해(위자료)는 넉넉히 인정된다고 본다.

이하 유사사례 -
손해배상 청구소송(2007가단49744)

more..


ㄷ. 올블 경우
위 판례에 미뤄 판단건대, 위법성을 인정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다만 경솔한 채용결정 번복으로 희주님께 정신적인 피해를 끼친 점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지 않나 싶다. 그 합리적인 위자료 산정은 위 판결을 참조하면 좋을 듯 싶다. 물론 이번 사건의 본질은 이런 법리적인 것은 아닐테다. ㅡ.ㅡ; 

보충1. 위 법률적인 문제에서는 제가 오히려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래 가즈랑님 글을 참조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참조. 근로 계약의 요건? (민노씨의 의견에 덧붙임) (가즈랑)
ㄱ. 면접합격의 취소와 최종 합격의 취소는 서로 그 법률적인 효과가 다르고,
ㄴ. 제가 인용한 위 판결문의 사례는 '최종합격 통보'라기 보다는 '면접합격'의 취소라고 보아야 할 것 같네요. 제가 경솔하게 위 판결문의 사례를 '최종합격 통보'로 착각한 것 같습니다.
ㄷ. 다만 하늘님의 최종 입장(
이번 사건의 입장을 정리하며)를 읽어보면, 올블 건의 경우에, 이를 '면접합격'의 취소로 보아야 할지, '최종합격'의 취소로 보아야 할지는, 그 법률해석상 문제가 될 것도 같네요. 물론 가즈랑님께서 정리한 대법원의 입장을 통해 본다면, '최종합격'의 취소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이 역시 제 해석에 불과합니다)

ㄹ.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 최종면접합격통보와 취종합격통보는 그 성질이 다르고
b. 최종합격통보는 그 자체로 '근로계약의 체결'로 의제되며(대법원 2000다5147)
c. 다만 그 합격통보 이후에도 '정당한 요건'을 갖춘 합격취소(통보)는 인정되고,
d. 하지만 그로 인해 합격자가 물적인 손해(손해배상)과 정신적인 손해(손배소송상의 위자료)는 인정된다.


2. 올블의 대외적 커뮤니케이션의 난맥상 : 골빈해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다.

올블 사건에서 가장 큰 알맹이, 핵심 사실은 물론 '채용 번복(취소)'이다.
이것만으로도 올블은 스스로 어마어마한 대외적 비난가능성을 스스로 자초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자초한 위기, 그 이후의 위기대응에 있다.  
그걸 상징하는 건, 희주님과 올블 상담원간의 대화도 대화지만, 올블 부사장인 골빈해커님 글이다.

이것이 사건을 접하는 대다수 블로거들의 아쉬움이자, 안타까움일테다.
실은 안타까운 감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올블에 대한 커다란 실망과 분노로 번지는 느낌이다.


2-1. 지역색, 사수/부사수 발언.

채용 취소 그 자체에 대해선 앞서 다뤘으니 별론으로, 특히 문제는 취소 과정 중에 있었다는 지역색 발언, 사수/부사수 발언이다.
이건 올블 해당 담당자의 치명적인 실수다.
물론 나는 이 발언을 '실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게 고의적인 모욕이었다면 정말 더이상 할 말 없다.
그냥 그렇게 살다가 가라, 가급적 말은 하지 말고. ㅡ.ㅡ;

more..


이왕이면 희주님과 전화 통화한 올블 담당자 분께서는 커밍아웃해서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히길 권한다.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오해가 있다면 이에 대해 해명하고 말이지. 이게 그래도 올블을 올블답게했던 그 '아마추어 정신', '청년 정신' '블로거 마인드' 아닌가 싶다. 뒤로 숨는다고 해결되는건 없다.


2-2. 골빈해커,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다.

골빈해커님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런 민감한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글을, 이렇게 쉽게 본문 삭제할 수 있다는 점도, 개인적으론 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글 자체를 삭제한 게 아니라서 댓글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글 자체를 삭제했더라면, 그래서 댓글 전부를 '증발'시켜버렸다면, 정말 더 난감한 기분에 빠졌을 것 같다.

아무튼 내 경우엔
허지웅 블로그 관련글 댓글을 통해 골빈해커님 글을 읽었다.
읽은 소감은 한마디로 난감하다.
허지웅, 브레인카오스 등등을 비롯한 블로거들께서 당장 올블을 탈퇴하겠다는 그 마음이, 그리고 올블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내고 있는 이 분노와 성토의 물결이 그대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화가 난 상태에서 쓰는 글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그리고 해명은 아닙니다. 해명할 것도 없습니다. 마음에 안들었으니 안뽑는 것 뿐이니까요.
이 글은 인사관련 담당자로써 또 인생 선배로써 정희주님께 드리는 충고 글 입니다."  - 골빈해커

이 첫 세 줄로 상황종료다.
개인적으론, 나머지 본문은 읽을 필요가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이토록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이토록 즉흥적이고, 이토록 감정적인 대응을 했다는 점이 믿겨지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해, 올블 부사장이라는 위치에서, 자신의 개인 블로그를 통해, 이렇게 중대한 공적 의견을, 이토록 사적인 감정에 바탕해서, 피력한다는 것는, 정말 어마어마한 모험이다.

둘 중 하나다.
최악이거나, 최선이거나.
이번엔 최악이다.

엄청난 판단착오다.
사태가 얼마나 심각할 수 있는지를 오판한 듯 하다.
공적 커뮤니케이션 방법론으로는 정말 채택해서는 안되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이 이슈에 관심이 있는 거의 절대다수의 관객들은 진심어린 사과, 반성을 기대하고, 어떻게 나오나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거기에다 대고 건성으로 사과하고, 곧바로 충고 한거다.

시츄에이숑은 다음과 같다.
(객관적으로) 좀 야단 심하게 맞아야 마땅한 학생이 있다.
선생님이 그런다 "너 이제 반성했니?"  
(그런데 주관적으로 여전히 억울한) 그 학생이 그런다.
"선생님, 해명할 것 없이, 제가 충고 한마디만 하죠! 들어보세요!!"
이 시츄에이숑,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상황은, 유감스럽게도, 되돌릴 수도 없다.
이미지 실추는  한순간이다.
하지만 그걸 회복하는 건 정말 길고도 험한 길이다.
앞으로 남은 일은 거듭 거듭 진실로 반성하고, 또 자신의 실수를 겸허히 인정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며, 이를 실제로, 실천을 통해 보여주는 일 뿐이다.


2-3. 올블의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이율배반적 감정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볼 문제가 하나 더 있다.
골빈해커님께서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관객들(올블을 통해 활동했던 다수 블로거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건가?

일각에서는 이런 민감한 문제에 대해 사적인 블로그를 통해 대응하는 것 자체가 아마추어, 동아리 집단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 것이라고 비판하시는 글이 있던데, 글쎄, 반대로 생각해보자, 지금까지는 그 '아마추어 정신' 때문에 올블에 호감을 피력한 블로거도 상당수다. 올블에 대한 블로거들의 호의적인 정서, 그 바탕에는 올블운영자들, 그 스태프들 스스로가 블로거라는 점이 상당히 작용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대다수 블로거들이 여기에 공감을 표할 줄로 안다.

나 역시 그 아마추어 정신이 좋았고, 동아리 마인드가 좋았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 '블로거 마인드'가 좋았다. 아마추어 정신 그 자체가 문제인 것 같지는 않다. 아마추어 정신으로, 프로답게 일하면 그 뿐이지 않나. 문제는 아마추어 정신까지는 좋았는데, 그게 프로다운 모습을 기대하는 영역에서 아마추어로 답했다는 사실에 있을테다. 다수 블로거들께서도 그걸 비판하는 취지실테다.

그러니까 우리가 올블에 기대했던 모습 자체가 다소 이율배반적이다. 아마추어 정신을 구현하는 프로페셔널이랄까, 그런 걸 올블에 기대하는 것 같다. 올블이 맘에 들 땐 그런 동아리스러운 모습, 아마추어 같은 모습이 좋은데, 올블이 뻘짓하면, 그 대학생 동아리 같은 모습에 일제히 비난을 쏟아 붓는거다.

나는 올블 전체의 입장을 올블 사이트를 통해, 좀더 신중하고, 내부적인 절차를 거쳐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을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좀더 신중하게 올블 전체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혔다면 어땠을까 싶은 아쉬움, 내게도 물론 있다.

다만 골빈해커님께서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나름으로 '위기관리'를 시도했다는 그 자체가 비판 대상이 될 수는 없다고 본다. 지금까지도 올블에 대한 대외적 비판과 의견에 대해 올블은 '올블 스태프들 개개의 블로그'(가령 하늘님의 블로그나 골빈해커님의 블록, 최근에는 비트손님의 블로그, 김Su님의 블로그 등등)을 통해 커뮤니케이션하지 않았나?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자.
골빈해커님 글은 최선의 대응이 될 수도 있었을테다.
그런데 골빈해커님의 글은 '정반대'의 관점, 가장 위험한 관점으로 쓰여진 글이다.
그러니까 그 글 독자들을 과연 누구라고 생각했을지가 정말 의심스럽다.

그 글에서 가장 우선 배려해야 하는 독자들은 올블 내부 스태프들가 전혀 아니다.
희주님께서 쓰신 글의 정당한 문제제기에 대체로 찬동하고, 그 최소한의 팩트만으로도 올블에 실망한 관객들을 위해, 그 관객들에게 오해가 있었다면, 그 오해들을 친절히 해명하고, 자신의 실수가 있었다면 그 실수를 깨끗하게 인정하고, 그래서 이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희주님께 신경질 부리는 글을 썼다. ㅡ.ㅡ;

물론 강조되어야 하는 건 '해명'(물론 자신의 글은 해명도 아니라고 하셨으나)이 아니라, '실수'와 '반성'이다. 관객들은 겸허한 반성을 기대하고 글을 읽었는데, 거기에다 대고 '인생선배의 훈계'를 늘어놓았으니...

'우리 올블 가족은 그런 사람 아니란 말예요!!'라고 해봤자, 말 안통한다.
그러니 '사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지 말고, 철저히 희주님의 입장에서, 그리고 그 희주님의 입장에 선 다수의 관객들을 위한 '공적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했어야 한다. 그게 만에 하나 정말 억울하게 생각되더라도, 그렇게 했어야 한다. 그런 글을 읽기를 원하는 사람은 올블 가족 외에는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런 '불필요한' 인생선배의 훈계를 도대체 왜 하나?
 
이게 왜 그런고 하니, 아무리 생각해도 올블 '가족'을 우선 보호하거나, 혹은 그 올블 '가족의 일원'과 희주님 간의 커뮤니케이션의 난맥상에 대해 '항변' 혹은 '해명'하려는 솔직한 감정에 바탕했다고 하더라도, 가장 큰 핵심사실은 여전히 '채용 취소'라는 엄청난 몸통, 그 거대한 비난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일단 우리가 그건 잘못했습니다. 이제 사과는 다 했으니, 제 할 말 하겠습니다'.
이러면... ㅡ.ㅡ;


2-4. 커뮤니케이션의 딜레마와 관객들의 변덕

그런데 여기에는 개인적으론 흥미로운 블로그 커뮤니케이션의 딜레마가 있다.
앞서도 잠깐 지적했지만, 공적 커뮤니케이션을, 마치 사적인 커뮤니케이션인 것처럼 행했다는 점에 딜레마의 본질이 있다. 그리고 블로그상 커뮤니케이션은 이런 사적인(그래서 감정적인 영역이 강조되는) 영역과 공적인 (그래서 감정을 배제한 무미건조한 이성론, 나쁘게 말하면 격식적인) 영역이 혼재되는 경향을 갖고, 특히 전자의 경향, 사적인 감정이 공적인 메시지를 앞서게 되는 경향이 자주 일어난다.

이 감정적인, 정서적인 대화 시도는 가장 효과적일 수도, 최악의 역효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물론 가장 무난한 건, 때론 아주 가식적일 수 있는, 정돈되고 계산된 '대외적 입장'이다.
이게 좋기만 할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물론 골빈해커님 대응은 (그 결과나 내용에 있어선) 최악이었지만, 나는 그 '방식' 자체에 대해선 꽤나 참신하다고 보고, 그게 올블만의 독특한 대외적, 공적 커뮤니케이션 모델이었다고 판단한다. 속마음 따로, 대외적인 입장 따로인 그동안의 기업 커뮤니케이션 모델보다는 개인적으론 맘에 든다. 여전히 그게 최악이었다는 점에선 변함이 없지만 말이다.

가정해보자.
골빈해커님께서 자신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훈계조'로 터뜨리는 연설문을 쓰지 않고, 희주님과의 입장이 되어, 그러니 역지사지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그저 풀어놓고, 정말 인생선배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들려주는' 글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관객'들, 그러니 나와 같이 대체로 기존에 올블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었던 블로거들은 어떻게 판단했을까? 이토록 대대적으로 올블을 성토하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이토록 심대한 커뮤니케이션의 단절과 소통의 부재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감히 해보는 거다.

골빈해커님은 (전체로 보았을 때 올블은) 최악의 위기관리능력을 보여줬다.
적어도 지금까지로는 그렇다.
이 점에서 골빈해커님도 올블도 심각하게 스스로 반성해야 마땅하다는 점을 감히 조언드리고 싶다.

아직 이를 만회할 기회가 남겨져 있기를 바랄 뿐이고...
솔직히 이를 만회할 방법이 딱히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론 이 위기를 오히려 기회 삼아, 실천을 통해, 진지하고, 솔직한 대화를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 뼈를 깍는 자기 반성을 통해 극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솔직한 대화, 진지한 고민, 통렬한 자기반성... 다 좋다. 다 좋은데, 관객들은 그걸로 절대 만족하지 않을거다. 이 '정서적인 언술들'을 객관적 언어로, 좀더 가시적인 올블, 블로그칵테일의 '정책'으로 실현하는 일이 남아 있고, 이를 적극적으로 블로거들, 그러니 관객들, 좀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상품(올블)을 소비하는 소비자들에게 뭔가 '눈에 보이는' 실천을 약속해야 한다.


2-5. 문제 사원들 해고하라? : 올블 만의 독특한 커뮤니케이션 모델을 위한 제언

일각에서는 '지역색/사수부사수' 발언한 해당 담당자, 그리고 사태를 극적으로 증폭시킨 골빈해커님이 스스로 사직하던가, 아니면 블로그칵테일 차원에서 해직하라고 말씀하신다. 심정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바 아니다. 이게 지금 강호의 대체적인 분위기란 것도 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자, 이거 어디서 보던 풍경 아닌가? 이건 지극히 정치적인 해결방식이다. 그렇게 문제된 사원들 희생양으로 처단하면 이 문제는 해결되나? 우리는 정말 만족할 수 있나?

엄청난 실수라는 거 인정하고, 정말 어처구니 없는 사태라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누구나 실수는 하는 거고, 그 실수가 과연 용서될 수 있는 실수인가, 아니면 정말 용납할 수 없어서, 그 실수를 한 책임자를 '도려내야' 하는 실수인가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론 이 사태의 책임자 개인에 대한 책임을 묻는 방식은 사직이나 해고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블로거 여론몰이 하는 방식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유는 다음 두 가지다.

ㄱ. 아마추어라서 동아리라서 좋았다는 블로거들 지금은 어디계신가? 아마추어라서, 동아리 마인드라서 그 실수가 더 치명적이고, 그래서 더 배반감을 느꼈다는 거 충분히 안다. 하지만 그래서 아직 성숙하지 못했으니 기회 한번 더 주는 건 어떤가?

ㄴ.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판단건대, 그래도 올블만한 대외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했던, 그래도 블로거 마인드로 블로거들과 자신의 파트너로 삼아, 그 의견을 수렴하고, 피부에 밀착하는 대화를 시도했던 기업,  그런 기업, 특히나 소위 '웹2.0' 기업 있다면 나에게 알려달라.

다음이 그랬나? 네이버가 그랬나? SK가 그랬나? 다수의 블로거들에게 상찬받는 이글루스 역시도 다소간 관료적인 대외적인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느낀다. 그런 느낌을 강하게 각인시킨 사건은, 물론 이오공감 증발 사건과 레진블로그 폭파사건이다.
그런데 유야무야 넘어갔잖오. ㅡ.ㅡ;

다시 강조하자.
나는, 그리고 당신들은 올블의 아마추어리즘이 좋았던 블로거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아마추어리즘에 대해 이토록 커다란 증오와 비판(그 자체로는 물론 충분히 그럴만하다)만을 쏟아내면 그건 좀 아쉽다. 그동안의 애정이 아쉽고, 그동안 올블과 블로거들이 서로 나누었던 파트너쉽과 의미있는 스킨쉽의 문화가 아쉽다.

올블이 기존의 대기업들처럼, 세련된 대외적 커뮤니케이션 부서를 만들고, 사원들을 획일적으로 그런게 교육하고, 혹은 그런 내부 가이드라인을 갖추고, 그래서 정말 실수 없는 모습, 냉정하고 이성적인 모습만을 보여주면, 그게 좋기만 할까?

물론 그런 내부 가이드라인과 정책은 분명히 마련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게 기존의 대기업들이 흔히 보여주는 '감정 0%'의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정답' 커뮤니케이션이라면, 나는 그것 역시 별로 마음에 들 것 같기는 않다. 내가 기대하는 커뮤니케이션은 실존의 인간들이 정말 진실로 자신의 존재를 걸고, 기업의 철학을 갖고 대화하는 것이지, 교과서의 정답을 들려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 아마추어리즘에 내재된 청년정신, 블로거 마인드, 그 솔직함과 개방성의 장점을 살리면서, 이제는 블로그계의 중견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는 존재감에 어울리는 좀더 정돈되고, 세련된 절차적 커뮤니케이션 프로세싱을 보완하려는 '조화'의 필요를 오히려 블로그칵테일에 권하고 싶다.

그리고 지금은 몹시 배반감을 느끼고 계신, 분노하고 계신 블로거들께도 한번 더 재고하십사하는 말씀을 올리고 싶다. 물론 현재 강호의 분위기를 보면 이런 소리 내는 것도 좀 스스로 뜨악스럽고, 솔직히 괜히 나서서 또 욕 사서 먹는 거 아닌가 싶은 이기심이 발동하기도 하지만,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3. 기업문화로서의 가족주의 : 올블의 가족주의 vs. 삼성의 가족주의, 또 하나의 가족?

올블에서 말하는 가족주의란 도대체 뭔가?
무슨 주술 같은건가? 아니면 대외적인 마케팅용 수사인가?
이 질문은 이번 사태에서 올블에게는 가장 가슴 아픈 질문이자 비판일테다.

한 블로거께서는 올블 '가족주의'문화가 객관성과 합리성, 그리고 절차적 엄정함을 필수 요소로 하는 인사채용과정에서, 그것도 '특채'가 아닌 '공채' 형식의 채용과정에서 '공식적인 기준'으로(이를 명시적으로 골빈해커님과 상담을 담당했던 올블 관계자는 드러냈다고 봐야 할텐데), 무슨 대단한 합리적인 표준, 객관적인 표준인양 제기했다는 점을 비판하면서, 그 수사의 모호성에 대해 강도 높게 성토한다. 다수 기업들에서 행하고 있는 준고용과정(인턴 과정)은 무슨 폼으로 있는 그런게 아닐테다.

전적으로 옳은 지적이라고 본다.
'가족주의'라는 그 정체가 모호한 수사가, 설령 올블 내의 구성원들이 정말 그런 문화를 스스로 체감하고, 또 만들어가고 있다손 치더라도, 냉정하고, 객관적인 공개적 채용 과정에서 그 선택 표준으로 제시되었다는 점은 몹시 유감스럽다.

물론 '조직 내의 인화력과 친화력'을 평가 항목으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필수적인 검토항목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을 얼마나 객관적으로, 합리적으로 '산정'할 수 있을지, 계량화할 수 있을지는 정말 서로 엄격하게 구별되는 일이다. 골빈해커님의 대외적인 위기관리능력을 보건대, 이번 사태를 통해 드러난 감정적 대응을 보건대, 골빈해커님께서 말씀하셨던 그동안의 인사권자로서의 체험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그 채용과정 중에 발휘되었을지도 의심스럽다.

가족주의.
이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업이 있다.
누구나 예상했겠지만, 삼성이다.
"또 하나의 가족"을 "자랑스런 대한민국 브랜드"과 함께 대표적인 표어로 삼는 삼성은, 실은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가족주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기업이고, 대한민국이라는 민족적 정서 물씬 자극하는 풍경과도 그다지 상관없는 기업이다(삼성주식 갖고 있는 자들의 국적을 떠올려보자. 삼성이 무슨 대한민국기업인가, 대한민국사람이 '보스'로 있는, 다국적 기업이지).

삼성과 같은 초일류 다국적 기업이 가족주의와 대한민국이라는 민족주의를 은근히, 그래서 더더욱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점은 무엇을 말해주나. 이건 합리주의나 삼성식의 경쟁지상주의, 일등주의와도 정말 동떨어진 가치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자, 위장적 이미지이고, 대외적 이미지 마케팅의 일환일 뿐이지, 개뿔 가족주의의 그 따뜻한 풍경들은 전혀 상관없는거다.

가족주의 강조하면서 노동삼권을 개무시하는, 무노조 전통(이게 무려 전통이란다. ㅡ.ㅡ; ) 과시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일류 다국적기업이라는 삼성은 그대로 모순의 총체이고, 대한민국식으로 진화된(?) 자본주의의 한 정점을 상징한다.

다시 올블로 돌아오자.
올블의 가족주의, 그거 대체 뭔가?
블칵 구성원들이 서로 가족처럼 친하고, 형제처럼 서로 신뢰하는 그런 걸 말하는 것 같은데, 그게 자사 내의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문화라면 그것까지는 별론으로, 그걸 대외적으로, 무슨 대단한 가치인양 홍보하고, 더군다나 공개채용의 과정에서 그 채용의 공식적인 기준으로 이야기된다는 건...
뭐랄까, 정말 쪽팔린거다.

물론 올블 내의 기업문화가 삼성과 같은 기만적 이미지 메이킹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족주의 가치를 강조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만큼은 올블을 강하게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무슨 대단히 가치있고, 대단히 타인에게 자랑스럽게 강조하며, 올블, 블로그칵테일이라는 기업을 대외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아름다운 이름'이 될 수 없다. 그냥 구성원들 사이에 그런 가족주의적인 정서가 있다면, 그 구성원들에게나 내부적으로 '흐뭇'해하면 그만일 일이다.

가족처럼 블로그칵테일에 적응할 것 같지 않아서, 친화력을 가질 것 같지 않아서, 마치 도사라도 된 양 '예언'하고, 그래서 합격을 취소해버리는 행태는, 스스로 '나는 이런 비합리적인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우리 올블 식구들은 서로 가족처럼 화기애애하지요.' 이러는 거랑 쌤쌤이다.
그러니까 딱 바보선언이다.

올블 내의 '기업문화'로서 가족주의란게 있다면, 그래서 내부성원들이 그런 가족같은 유대감으로 서로 끈끈한 무엇가를, 좀더 창의적인 어떤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동력으로 그 가족주의적인 정서가 이바지한다면, 그거야 올블 내부 사정이니까 뭐라고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가족주의가 외부에 대한 배타성으로, 무슨 주술사의 마법처럼 사용된다면, 그래서 채용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성급한 '예언'의 근거로 활용된다면, 거듭 말하거니와, 딱 '우리는 덤 앤 더머들입니다', 이런 커밍아웃에 불과할 것이고, 조롱거리로 평가를 받을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바다.


4. 결 : 블로그 커뮤니케이션 모델에 대한 단상, 그리고 올블 아마추어리즘에 대한 패자부활전

이 역시나 너무 길어진 것 같다.
간단히 정리하자.

일단 하나 묻자.
올블을 전적으로 포기할텐가?
이건 그다지 심각한 질문이 아니다.
올블은 그저 웹서비스 업체일 뿐이다.
그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혹은 이용하지 않거나, 그건 소비자 마음이고, 여기에 대해 나는 감놔라, 배놔라 할 생각 전혀 없다. 그리고 지금 내가 어떻게 말한들 그게 씨알이나 먹히겠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동료 블로거로서 몇마디만 더 해보자.

그동안 올블을 나 나름으로는 줄기차게 비판해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애정에 바탕한 비판이라 스스로는 생각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야 그게 애정만으로 느껴지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로그를 통한 문제제기, 올블에 대한 비판에 대해 올블만큼 적극적으로 블로거 마인드에 바탕해서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한 업체는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다음 블로거뉴스가 그랬나? 블로거뉴스 비판하면, 그 누구 하나 거들떠나 봤나?그래도 말로는 개방과 참여를 외치고, 웹2.0을 외친다. 장사 잘한다. 장사 잘하고, 게다가 상까지 받는다. 이글루스는 어떤가? 이오공감 사태는 별론으로, 그 내부사정이야 이해되지 않는바 아니나, 이글루스 블로거들로부터 그토록 사랑받던 '레진 블로그'를 폭파시키는 테러에 대해 어떤 실질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나? 네이버? 말해봐야 입 아프다. 이건 생략하자. ㅡ.ㅡ;

올블, 블로그칵테일은 블로그 기업이다. 블로그를 다루는 기업이고, 블로거들을 상대해서 먹고 사는 기업이다. 이 본질은 변하지 않을테다. 그런 기업이 자사의 '홈페이지'를 통해서만 대외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한다고 말하거나, 혹은 그 내부 성원들의 블로그를 자사의 마케팅을 위해, 혹은 자사의 대내외 커뮤이케이션 수단으로 활용해서는 안되고, 그건 너무 아마추어같은 짓이라고 반문하는 건, 오히려 기존의 커뮤니케이션의 경직성, 그 피상적인 '정답'들에만 인식이 고정되어 있는 것일테다.

물론 문제의 본질은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적 틀이 아니라, 그 커뮤니케이션이 실질적으로 어떤 내용과 철학을 담고 있는가일테다. 하지만, 항상 강조하다시피, 내용과 형식, 그 몸과 마음은 서로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이번 올블 채용취소 사태를 통해서 올블의 내부성원들이 모두 블로그 폭파시키고, 좀더 합리적이고, 좀더 냉정한 올블 메인 페이지의 관리자 단추 속으로 숨어버리면,그 때는 만족할텐가?

그런데 이런 제안들은, 다시 말하지만, 올블을 계속 인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생략한 그 이후의 문제들이다. 올블에 대해 일체의 애정과 관점을 꺼버리면, 그러니 '올블? 그게 뭐예요?' 이렇게 결심했다면, 이 질문들, 내 나름의 제언들은 그냥 헛소리에 불과하다.

이번 사태를 통해 나 역시 순간적으론 그동안의 애정을 모두 철회하고, 이런 망조 서비스는 내 다시는 이용하지 않으리라, 생각하지 않은 거 아니다. 올블 피드 제거는 클릭질 몇번이면 끝난다. 다시는 올블 쪽은 쳐다도 않보리라 결심하고, 그 쪽으론 오줌도 안눌 수 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이렇게 성급하게 떠나기엔, 이렇게 가혹하고, 매정하게 비판만 하고, 그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시간 동안 올블에 기대하고, 실망하고, 서로 다투고, 서로 이야기했던 그 모든 추억들이 없던 걸로 하기엔 좀 너무 허무하다.

한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지 않나 싶은거다.
좀더 사건 추이를 지켜보고, 그 다음에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블로거들의 현명하고, 이성적인, 그리고 냉정한 판단을 당부드린다.



추.
1. 올블 하늘님의 공식사과글을 읽었다.
솔직히 너무 추상적이고, 너무 막연하다.
이에 대해선, 현재 하늘님의 무너지는 마음을 미뤄 짐작하지 못할 바 아니지만, 비판하지 않을 수 없겠다.
좀더 '명료한 해명'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불확실성의 제거다.
하지만 올블 사태(이건 정말 사태인데)에 대한 하늘님의 공개사과문은 어떤 불확실성도 제거하지 못하고 있다고 나는 평가한다. 어떤 구체적인 스케줄도 없고, 사후 방지책에 대한 최소한의 프로그램도 없으며, 관련 당사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에 대한 언급도 없다.

이에 대해선, 언젠가 올블을 비판하면서 인용했던 아거님의 글을 다시 인용해본다. 하늘님께서는 스티브 잡스가 위기를 어떻게 관리하는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고 있는지 참조하시면 좋겠다.

참조 : Steve Jobs: “A Greener Apple”(아거)


2. 올블 메인 어제의 추천글에 관련글이 뜨지 않는 문제.
이거 도대체 뭔가?
왜 어제의 추천글이 엉뚱한 글이 뜨나? (지난 정오쯤의 관찰)
당연히 희주님 글이 어제의 추천글 최상단에 떠야 정상인 거 아닌가?
여기에 올블의 의도적인 개입이 있었다면, 그래서 악의적인 필터렁이나 게이트키핑이 있었다면, 올블에게 기회를 한번 더 주자, 이런 발상은 인정주의에 불과할테다. 정말 악의적인 필터링이 있었다면 지금까지의 헛소리는 모두 철회다. 이건 올블이 올블이었던 지금까지의 자기정체성을 근본에서 부정하는 짓거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실시간 인기글에는 관련 글들이 계속 올라오는 것으로 보아, 이게 일시적인 기술적 문제(오비이락?)이기를 바란다.
이에 대한 올블 측의 해명을 기다려본다.

덧. 이에 대한 비트손님의 댓글 논평이 있었습니다.
어제의 가장 많이 추천받은글을 비롯 발굴왕,다독왕등이 반영이 되지 않고 이틀전에 결과가 반영이 된것은 어제 0시를 기준으로 너무 많은 트래픽의 유입으로 로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은 것을 개발팀에서 알려왔습니다. 진실을 왜곡하거나 숨기려 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평소에 방문하지 않던 사용자의 급증이 주요 원인임을 다시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현재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추천조작에 대한 부분은 어제 그글에 대한 특정세력(그 글을 과도하게 추천하고 싶은 세력)에 의한 부정추천현상이 발생하여 아이피를 바탕으로 한 부정추천분을 제거 해주는 과정에서 빚어진 오해라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3. 이하 골빈해커님의 문제 글.
이런 '역사적 기억'은 사라져서는 안된다. 오히려 그 문장들 속에 있는 오만과 오류들, 경솔함을 골빈해커님 스스로, 그리고 올블 구성원들 스스로가 거듭 거듭 복기해서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반성의 교재'로 삼아야 마땅할테다.

덧. 위 골빈해커님 글은 원래 제가 임의로 아래에 옮겨왔습니다만, 비밀글로 남겨주신 익명께서 말씀하신 취지에 공감하는 바 있어 삭제합니다.


4. 제 글 1.에서 서술한 법률적 부분에 대해선, 제가 너무 성급하게 판례를 경솔히 해석한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선 가즈랑님께서 쓰신 참조. 근로 계약의 요건? (민노씨의 의견에 덧붙임)  을 참조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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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올블로그예에서 회사의 경영진들이 보여준 커뮤니케이션은 100% 투명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문제있는 솔직한 목소리가 들리자 비분강개하게 된다. [.....] 블로그 PR의 본질인 투명성은 계속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상투적이고 정형화된 정답만을 내놓는 PR을 지양하면서 투명성을 지향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그리고 멋진 PR모델이 될 것이다. 하지만 결국 본질은 기업이 공중의 목소리를 충분히 듣고 심사숙고한 후 공중들과 눈높이를 맞추고 인식을 공유한 상태에서 조직의 생각과 행동이 먼저 바뀐 뒤에 투명함을 보여주는 것이 진짜 PR인 셈이다. 올블로그의 경영진들이 놓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공중들의 비판에 겸허하게 마음을 열지 않고 먼저 조직내의 목소리만 “투명”하게 보여주려 했다는 점이 문제인 셈이다. (글 중에서)




부제 : 저널미장센의 악질적 사례로서의 신경무 만평의 숨은 함의


강준만은 신문을 이미지 매체라고 했다.
정확히 어떤 칼럼, 혹은 어떤 책에서 이렇게 발언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그 지적이 정말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우리나라 신문들이 전달하는 그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사실들의 나열은 과연 신문 콘텐츠를 소비하는 행위가 갖는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그냥 '그것들'이 있고, '그것들'을 툭툭 던져줄 뿐이며, 그런데 그들이 선택한 '그것들'은 내 삶에서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특히나 우리나라 거대신문들은 더욱 그렇다.

칼럼은 다른가?
칼럼은 더더욱 무의미의 집적, 오만과 독선의 집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멍청한 편견들과 자신만이 옳다는 거만한 독선들은 과연 이 사람들의 글을 '논설'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근본에서 회의케 한다.

각설하고, 신문은,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사실들을 선택해서 취재한다. 그것들은 무의미의 집적에 가까운 것들이 대부분이고, 정말 의미가 생기는 부분은 오히려 편집 요소들을 통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거대신문들은 더욱 그렇다. 편집, 즉 단편적 사실들의 의미요소들을 배치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그 배치의 행간에 심는다. 그 편집적 요소는 오히려 매우 고도화된 지적, 의식적인 작업이다. 그건 마치 영화나 연극의 미장센처럼, 저널미장센으로 불러야 마땅할테다.


역시나 서설이 길어졌는데, 오늘 말하고 싶은 건 만평이다.
만평은 그것이 시각적인 이미지를 오히려 정면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더욱 신문매체의 이미지성을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형식이다. 그러니 시간이 부족할 때, 우리는 일면의 기사 제목과 사설 제목을 훑어보고, 그리고 무엇보다 만평을 확인하는 거다.

조선일보 오늘자(2007. 3. 27일자) 만평은, 지난 26일자 1면(돈다발 사진)과 4면에서 다뤘던 김택기 이슈를 교묘하게 재가공해서 사용하고 있다. 그 주된 메시지는, 표면적으론 친박탈당인사들에 대한 한나라 지도부의 비난과 탈당인사들의 재반박을 묘사하는 것이지만, 그 숨겨진 메시지는 돈다발로 공천취소된 김택기란 자 역시 '열링우리당 ->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긴 철새이며, 이 은근한 메시지는 오히려 좀더 독자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된다. 그 놈이 (알고보니) (바로) (열우당 출신인) 그 놈이라는 거지, 뭐.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출처 : 조선일보


차떼기의 추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말해주는 '강부자'당을 측면에서 은근히 지원하는, 그래서 친박탈당 이슈를 김택기 이슈의 본질과는 아무런 직접적 상관관계 없는 지엽적인 '열우당 철새' 이슈로 변질시키는, 물타기 저널리즘의 전형을 보여주기도 하는, 이 신경무의 만평은, 악질적인 저널미장센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찰나들.
신문이라는 가공할만한 기만매체들 속에 숨겨진 그 찰라의 이미지들을 놓치지 마시라.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이미 닭대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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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독자에 대한 단상

2008/03/26 09:57
0.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블로그이지만, 그 이후로 자주 방문하는 블로그가 있다.
처음으로 읽은 그 글은 '사용자 가치'를 강조하는 글이다. 참신했다. 그 참신하다는 느낌은 그게 무슨 굉장히 색다른 의견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이런 경우의 참신함은 오히려 그 생명력이 그다지 길지 않더라, 체험상), 오히려 상식주의에 바탕한, 근본적인 지적에 가깝기 때문에 그랬다.

그 글, 좀더 정확히는 그 '사용자 가치'에 대해선 물론 좀더 비판적으로 접근해볼 필요가 있기는 하다. 그 '사용자 가치'의 정체는 무엇인가? 일견 지극히 타당하지만, '사용자 가치'를 주목하자, 라고 해서 문제가 끝나는 건 아니다. 여기서 오히려 문제는 다시 시작하고, 그 과정에서 기존 문제들을 다시 불러올 개연성도 매우 높다.

이 블로그는 건강한 상식주의에 바탕해서 상식이 전도된, 혹은 비상식이 상식으로 군림하는 어떤 기이한 패턴, 경향에 대해 조화와 균형을 강조하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나는 이 블로그의 상식주의, 그 바탕에서 피력하는 담담한 의견들, 이런 것이 참 참신하게 느껴졌고, 또 매력적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내가 한 짧은 논평들은 그저 인상비평이고, 그게 그 블로그를 꾸준하고, 진지하게 바라보거나, 그래서 대화를 시도하거나, 혹은 전체로서의 방향들을 알기 위해 최소한의 필요적 체험들을 통과한, 그런 것은 전혀 아니고, 그냥 개별 글에 대한 단편적인 느낌들일 뿐이다.


1.
각설하고, 신선한 시각과 짧고, 간결한 의견개진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했던, 하지만 다시 강조하건대, 내가 안지는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그 블로그에서 며칠 전에 '블로그 독자 : 양과 질'이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글을 읽었다. 역시나 매우 짧고, 인상적인 글인데, 글 가운데 좀 갸우뚱하게 되는 문장을 만났다.

이 글은 거기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자, 뭐 이런 취지의 글이다.

많은 블로거들이 방문자 수에 연연하지만, 사실 정작 중요한 것은 방문자의 수보다는 "질"이다. 얼마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내 블로그에 들어오는가?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방문자수보다는 구독자 수나,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보내오는 사람의 수가 더 의미있을 수 있다. (중략) 또는 댓글이 많이 달리는 블로그, 댓글을 다는 사람들 중에서 새로운 사람의 비중이 높은 블로그, 북마크나 세이브가 많이 된 블로그... 등이 좀더 "질높은" 방문자를 가진 블로그라고 볼 수 있겠다.

- 블로그 독자 : 양과 질 중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중요한 건 방문자 '수'보다는 (방문자의) '질'이다.
2. 그 '질'은 독자의 영향력 유무와 관련이 깊다.
3. 영향력 판단 표준은 다음과 같다.
ㄱ. 구독자 수
ㄴ. 이메일(를 보낼 정도로 적극적인 구독자, 혹은 방문자)
ㄷ. 댓글 수
ㄹ. 댓글 다는 사람들 중 새로운 사람의 비중
ㅁ. 북마크(세이브) (여기서 세이브가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다)



2.
내가 주로 궁금해 한 부분은 1과 2와 3-ㄹ. 이다.
특히 2와 3-ㄹ. 이 두 가지다.
다른 건 끄덕끄덕했다.

처음에는 '영향력'이란 표현에 대해 묘한 이질감, 묘한 배반(까지야.. ) 심리까지 느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영향력'을 색안경 끼고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영향력'의 여러가지 풍경들을 떠올릴 수 있을테다.

비지니스 목적의 블로그라면 투자자들이 관심을 갖는, 그래서 투자자들이 이메일도 보내고, 댓글도 달고, 그래서 정말 투자 받는다면, 그 이상 바랄 것이 뭐있겠나? 천명 만명의 방문자 보다는 열명 아니 두 세명의 투자자가 오히려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독자일테다.

요리 블로그를 운영하는 순이 엄마에게 영향력 있는 독자는 과연 누구일까? 주로 우리 가정에서 요리를 전담하는 전업주부들일테지. 그들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서 서로 배우고, 요리법을 나눌 수 있다면, 박사, 교수, 재벌이 독자가 아니면 어떤가. 전업주부들, 혹은 요리사들이 가장 영향력 있는 독자일테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어떤가?
미디어성을 강조하는, 그래도 좀더 많은 독자들과 소통을 원하는 블로거에게 독자 수는 절대적으로 중요해진다. 물론 이 경우에도 그 '독자들의 질'('질'이라고 하면 좀 어감이 그런데, 소통의 크기, 깊이라고 이해하면 좋겠다)은 여전히 중요하다.

애드센스가 유일한 블로깅의 목적인 블로거엔?
독자들의 '질'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이 경우엔 여전히 독자들의 '수'가 유일무이한 '영향력'의 표준이 된다.

이처럼 다양한 블로깅의 목적과 다양한 블로그의 모습에 따라 그 독자들의 영향력은 달라지고, 또 그것을 어떤 식으로든 객관적으로 계량화하기란 정말 어렵지 않나 싶다. 그러니 '수'와 '질'이라는 일견 합리적인 이분법은 다양한 블로깅의 목적과 풍경 속에서 매우 확률적이고, 지엽적인 의미를 획득할 수 밖에는 없고, 그 취지에 찬동하더라도, 그것을 계량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3.
끝으로 정말 갸우뚱하게 되는 것은 "댓글 다는 사람들 중 새로운 사람의 비중" 이 높으면 '영향력' 지수가 높다는 의견이었는데, 이건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 이에 대해선 카미트리아님과 하늘빛 마야님께서 주신 댓글 논평을 접하니 그 취지에 고개가 끄적여진다. 특히 하늘빛마야님의 아쉬움에 대해선 깊이 공감하는 바다.

카미트리아
"댓글 다는 사람들 중 새로운 사람의 비중"
이라는 것은 블로그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있는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하늘빛 마야
이글루스를 하는 저로서는 "댓글 다는 사람들 중 새로운 사람의 비중"이 굉장히 와닿고 있습니다. 오가는 사람끼리만 보고 덧글 다는 사람끼리만 주고받으며 일정수의 블로거들끼리 폐쇄된 자체공동체를 형성하는 경우를 많이 봤거든요.

피차 교류하면서 친밀해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종종 그것을 넘어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치고 외부와 자신을 격리시키는 블로그들이 있는데, 나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말릴 생각도 없지만, 그런 블로그들이 "영향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대체적으로 다수의 블로거들은 자신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읽는 독자들이 좀더 높은 충성도를 갖고, 꾸준히 방문해주기를 원하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가령 내가 가장 많은 것을 배우는 '게이터로그'의 경우, 아거님께선 언젠가 이런 말까지 한 바 있다.

이 공간의 생명력은 바로 "관계"에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내 글을 몇 명이 읽냐"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지만, "내 글을 누가 관심있게 지속적으로 읽는가"는 제 블로깅 생활을 이끌었던 動因이었습니다. 이 관계적 스키마에 따라 많은 블로거들이 "블로깅을 하는 목표(goal)와 글의 방향"을 현저하게 보이는 관객들에게 맞춰 나가는 것 같습니다.

- 블로깅의 즐거움 중에서  (June 19, 2004)

독자의 영향력, 이 말을 상호 소통의 실제적 효용이라고 풀어보자, 이 효용의 크기도 그 관계의 지속성과 비례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불필요한 사족인 듯 하여 생략하고 싶었지만, 굳이 결어를 대신하여 강조하자면, 독자 관여를 고려하지 않는 블로깅은 '폭탄' 일 확률이 높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블로그들은 그저 '관계'과 '커뮤니케이션'의 원초적인 즐거움을 위해 블로깅한다.

나는 그것이 감히 블로깅의 본능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저 대화하고, 그 대화를 통해 서로 정서를 나누고, 또 때론 서로 다투고, 그렇게 서로 오해하면서, 또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것', 그 어떤 구체적인 목적이 없더라도, 대화 그 자체로의 블로깅은 그 자체로 즐겁고, 의미있다.





* 관련 추천글 (및 본문 링크)

블로그와 독자 관여 (February 24, 2005)

다른 관객들과의 상호작용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블로그로서 독자의 관여 (involvement)를 고려하지 않고 쓰는 블로그는 폭탄 블로그로 불릴 수 밖에 없다. 블로그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독자 관여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바로 "이슈 관여(issue involvement)"와 "자아 관여(ego involvement)" 이다.
- 위 글 중에서


관계... (September 24, 2003)

나는 내가 읽는 블로거의 신분 (identity) 문제에 초연하다. (중략) 나는 내가 읽는 블로거의 이름을 몰라도 되고, 하는 일을 몰라도 되고, 얼굴을 몰라도 괜찮다. 그런 것은 내게 전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냥 어떤 식의 관계로 시작 됐건 내가 읽는 블로거의 글을 통해 재미나 정서적 기쁨을 맛볼 수 있고, 때로는 어떤 일에 공분을 느낄 수 있고, 또 축하할 일이 있으면 축하해 줄 수 있고, 축하받을 일이 있으면 축하받을 수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의 폭을 넓힐 수가 있다면 그걸로 만족이니까....
- 위 글 중에서


블로깅의 즐거움 (June 19, 2004)



* 발아점
블로그 독자 : 양과 질 (CK)


* 확장점
블로깅의 본능과 블로깅의 즐거움 (점프컷)





통속에 휩싸이다 : 이영훈 세대에 바침

2008/03/26 01:53
나는 종종 오해받는다고 생각한다.
내 쪽에선 오해지만, 바라보는 사람의 입장에선 다 이유가 있는 그런 것들.
너무 진지하다거나, 너무 전투적이라거나, 혹은 너무 무겁다거나...

사람들은, 나도 물론 그럴테지만, 자신이 보고 싶은 바로 그것 만을 본다.
자신이 믿는 그대로를 믿고, 아무리 내가, 혹은 당신이 아니라고 해봤자, 그런 건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거다.
그건 선입견일 수도 있고, 각자가 직조한 감수성, 의식의 거푸집일수도 있을테지.
또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나..
나는, 늘, 이런 식이다.

얼마전에도 썼지만, 나는 '짝사랑' 같은 통속적인 주제들에 대해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게 내 내면 깊은 속에 있는 내 감수성인 것 같다.
감상주의와 낭만적인 통속.

아무리 지적인 척, 냉정한 척 해봤자.. 그게 내 바닥이다.
나는 그걸 안다.
하지만 그게 부끄럽진 않다.

그게 나인걸, 뭐.

사람들은, 인간은, 하지만 균형을 맞추고 싶은 내밀한 회로들이 작동해서...
통속적인 감수성, 세속적인 낭만주의, 이런 것들의 반대모습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나는 이영훈의 노래들을 좋아하지만, 메탈리카의 노래들도 좋아하고,
이성복의 시를 좋아하지만, 가장 투쟁적인 시기의 박노해 시나, 르포들, 혹은 시인지 산문인지 헷갈리는 정현종의 단상들도 무척 좋아한다.
물론 가장 좋아했던 건 황지우의 시와 산문들이었지만..

그게 의식적인 균형감각이 작용한 건지, 아니면 내 취향이 그런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암튼 그렇다.

몇 시간 전에 TV에서 'EBS 지식채널e - 작곡가 이영훈 편'을 봤다.
추억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지금 이문세의 3, 4, 5집을 듣고 있다.
특히 '밤이 머무는 곳에'를 계속 듣고 있는데..
한번 흥얼거려봤는데... 도저히 안되겠더라, 막 눈물이 난다.
그런데 웃긴 건, 그걸 끌 수가 없더라는 거지..

그냥 이영훈의 노래가 흘러나왔던 그 때에 대해 쓰고 싶었다.
내 추억의 한 때, 내 서툰 감정들이 온통 비극적인 감수성으로 막연하게 채워지고, 그 우스꽝스런, 하지만 항상 넘쳐나던 진심들이 어떤 길도 찾지 못하고, 하지만 세상은 너무도 평온하고, 동시에 너무도 숨막히고, 너무도 더럽고, 또 동시에 너무도 아름다웠던... 내 유년이 막  그 껍질을 벗고, 세상의 찬란한 빛, 그 빛 속에 꿈틀거리던 온갖 꿈과 욕망들... 죽음에, 그래서 삶에 가장 가까웠던 어떤 기억들...을 그냥 한번 불러오고 싶었다.

그 때, 이영훈의 노래들은 늘 함께있었던 것 같다.
이영훈의 노래들, 유재하의 노래들...
이성복의 시와 기형도의 시, 황지우와 정현종의 시...
특히나 이영훈의 노래는 그 시대의 온갖 풍경들, 그 풍경들 속에 숨겨져있던 그 내밀한 소망의 떨림들, 아이들의 첫사랑과 짝사랑이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을 어떤 골목, 어떤 가로등 아래의 불빛들, 그 어둠을 담고 있을 것만 같다.

지식채널e에서 인용했던 최민우의 진술처럼...
"화염병과 최루탄 사이에서 이성복과 기형도를 읽었던"
그 많은 이 땅의 청년들은 이영훈의 노래에서 최루탄으로 지우지 못할 어떤 소년, 소녀들을 떠올렸을테다.
나는 아직 그 시대에 도달하지 않은,
그래서 그 기억들을 극히 일부만 체험한, 혹은 간접적으로 체험했던 후배세대에 불과하지만...
아주 조금은 그들의 마음이 어땠을지를 알 것 같다.

지나간 시대,
그 가슴 가득했던 혁명의 시대에
가장 통속적이고, 또 그래서 가장 가슴을 울렸던 노래들...
희미하지만 또 동시에 죽는 날까지 생생할 그 기억들의 한 배경으로 흐르고, 또 떠다닐 노래들...
그 노래의 창조자에게,
그리고 그 노래들이 최루탄 향기와 흘러다녔던 시대를 통과했던 선배들에게,
내 추억과 기억들에..
이 글을 바친다.




추.

내가 지금 듣고 있는 이 노래를 함께 듣고 싶은데...
'밤이 머무는 곳에'를 도무지 합법적으로 여기에 올릴 방법을 모르겠다.
여기에 합법적으로 올릴 수만 있다면 이 노래 한곡에 천원 정도는 지불할 용의가 있다.
지금 마음으론 만원도 아깝지는 않을 것 같다.


방법 아시는 분 설명 부탁.

일단 불법으로, 하루 정도만, 노래 올린다. ㅡ.ㅡ;
어차피 네이버 쪽 음원(물론 불법이겠지.. 네이버 '블로그'의 가장 현실적인 활용례의 하나이자 트래픽 모델이 이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건 네이버'블로거'에 대한 논평이 절대로 아니다)이라 저절로 깨지겠지만.

노래 듣기



추2.
비밀글로 친애하는 새드개그맨님께서 합법적으로 노래를 올릴 수 있는 사이트에서 '밤이 머무는 곳에'를 구입, 저에게 선물해주셨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올립니다.



그런데...
노래가 시작단추를 눌러도 나오질 않네요. ㅠ.ㅜ;;

우찌된 일인지...
일시적인 건지..
제 컴에서만 그런지...

덧. 새드개그맨님께서 댓글을 통해 설명해주시길
ㄱ. ie에서만 들을 수 있고(저는 주로 FF 사용합니다. ㅡ.ㅜ;)
ㄴ. 거기에 '액티브엑스'를 깔아야 한다고 하네요.
합법적으로 이런 설치형 블로그에 음악을 올릴 수 있게 해준 점에서 '뮤즈-링크천사'는 참 의미있고, 또 고마운 마음까지 생겼는데요. 위 ㄱ. ㄴ. 이라는 폐쇄적이고, 찬성할 수 없는 조건 때문에... 아쉬움이 생기네요.
저는 여전히 '액티스엑스'를 깔지 않아서 그런지, ie로 브라우저를 변경해도 음악이 들리지 않는군요. ㅠ.ㅜ;
무척 아쉽네요, 뮤즈-링크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