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6일) 저녁에 쓰여진 나경원 씨 남편 김모 판사 기소청탁 의혹 사건 관련기사들을 보면요. "수사당국자"(X)가 아니라 "수사당국 관계자"(O)의 이야기를 듣고, "~라고 전했다. ~라고 알려졌다"는 기사문장을 쓰는 경우가 꽤 많던데요. 이게 당사자에게 직접 전해들은 게 아니라, 한다리 건너서 들은, 그것도 "당국자"도 아닌, "관계자"에게 들은 '전문'에 불과하잖아요.

* 참고.'전문증거' (傳聞證據) : 증인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를 법원에서 진술하는 증거. 신뢰도가 매우 희박해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증거능력을 갖지 못함.

1. 이 경우 "당국자"와 "당국 관계자"의 신뢰도 차이는 저널리즘에서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기사 신뢰도에 있어 중요한 표준인지 궁금합니다.

2. 더불어 이런 전문에 근거한 기사에서 "박은정 검사 “나경원 남편에 기소청탁 전화 받았다”"라는 제목을 뽑아도 되는 것인지 궁금하네요(아래 해당기사). 더불어 어떤 관련기사는 주어 없이(ㅡ.ㅡ;) "검찰이 기소하면 법원서 알아서 할 것"이라고만 제목을 뽑았던데, 이건 김판사가 그렇게 직접 이야기를 했다는 것인지, 아니면 박검사가 이야기한 걸 인용한 것인지, "관계자"에게 전해들은 이야기(전문)을 재인용한 것인지 헷갈리잖요. 물론 관계자 이야기를 다시 전한 것이지만요.

- 해당 기사. 뉴시스 기사(한겨레 송고). (2012.3.6.15:28)
제목 : 박은정 검사 “나경원 남편에 기소청탁 전화 받았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22199.html

- 관련 기사. 한겨레 기사. (2012.3.6.19:02)
제목 : "검찰이 기소하면 법원서 알아서 할 것"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22220.html

3. 저 개인적으론 위 두 가지 유형의 기사 모두 아주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한편 생각해보면, 사건 당사자는 함구하고, 책임있는 당국자는 직접 인터뷰를 할 수 없는(참고인 진술에 대한 조사당국자의 정보유출은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아시는 분 알려주시길...) 상황에서 저널들은 어떻게든 소식을 전해야 하긴 하고... 해당 기자들 상황도 갑갑하다 싶긴 합니다. 다만 이런 사안에까지 알권리를 적극적으로 내밀긴 좀 뭐시기 한 느낌이 들고, 어쨌든 시시각각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핫이슈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저로선 이런 보도행태는 참 문제라고 보입니다.


추. 나경원 남편 기소청탁 의혹사건 일지 (동아일보)
http://photo.donga.com/view.php?idxno=20120301017&category=0011&page=1

어떤 사안에 등장인물이 많(아지)고, 또 그 사건이 긴 시간적 간격을 두고 벌어지면, 맥락을 살펴보기 위해 찾아보게 되는게 '사건 일지'인데요. 기소청탁 의혹사건과 관련해서는 동아일보에서 이미지 파일로 제작한 사건 일지만 검색되는 것 같네요. 개인적으로 훌륭한 일지라고 생각합니다.

저로선 나경원-네티즌 아무개-나경원 남편 김판사-주진우-박검사-김어준...으로 이어지는(참 등장인물도 많기도 하다) 일련의 사건 흐름을 며칠 전 만해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는데, 이 일지를 보니 대강의 맥락을 알겠네요. 나꼼수 펜들이야 뭐 다 아시고 계셨던 맥락이겠다 싶기도 하지만... 저는 나꼼수는 안들은지 오래라서..

* 관련 추천 블로그
아거, 강정수, 캡콜드 ("나꼼수 사법청탁 폭로, 취재원 보호 측면" 강추)님은 그야말로 저널리즘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 분들과 더불어 가장 정치하고, 또 감수성 넘치는 저널리즘 비평을 하시는 '들풀' 께선 이 사안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실지 몹시 궁금하네요. 혹 관련글이 있을까 가봤는데, 이글루스 시스템 점검중...;;;


* '들풀' 님 판단(2012.3.8. 오전 1:50 보충)

지금 이쪽에서는 시리아의 바바 아머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비극과 관련한 뉴스가 시시각각 전해지고 있습니다. 반대파가 밀집한 이 지역을 정부군이 끔찍하게 공격하는 바람에 많은 희생이 발생했으며, 상황이 아주 급박한지라 정규 취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온갖 소문이 횡행하고 있고요. 이에 대해 예컨대 NPR 뉴스에서는 이런 식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일부 주민은 정부군이 죄없는 주민 다수를 처형의 방식으로 학살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we could not confirm)." 이렇게 넘어갑니다. 확인되지 않은 사실은 사실로서 보도하지 않습니다. 보도에 넣으려면 아직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누가 그런 주장을 했는지를 명시합니다. 모호하게 '전해졌다' '알려졌다' 따위 표현을 써서 사실인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꼴을 만들지 않죠. 전해졌으면 누가 전했는지, 알려졌으면 누가 알렸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언론으로서 당연한 일이지요. 전쟁 상황이 아니라면 NPR 기자들은 이러한 증언을 확인하러 나섰을 것입니다. 역시 언론이 제 할일을 제대로 하는 존재라면 당연한 일이지요.

말씀하신 해당 사항 보도 행태는 무책임하고 편의주의적인 보도 관행의 극단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 뉴스는 주어가 다 빠져 있습니다. 찾아보면 기자 자신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영미 저널리즘에서는 이러한 보도 행태에 대해 "'관계자'란 술집에서 만난 친구고, '전문가'란 마누라이며, '여론'이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의미한다"라는 식으로 조롱합니다.

1번에서 말씀하신 수사당국자와 수사당국 관계자란, 이를테면 담당 검사와 검찰 공보 담당 부서 직원의 차이입니다. 한국의 정부 기관발 보도에서 '관계자' 이름을 달고 나오는 인간들은 거의 대부분 홍보를 담당하는 공보 담당관들입니다. 영미 기사들을 보면 이러한 PR 담당자 이름을 정확하게 밝히며 인용합니다. 그게 그들의 역할이고, 개인 자격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부서의 입장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한국 언론은 많은 정보를 공보담당관에게 들으면서도 그들이 기사에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충 두루뭉술 넘어가서, 나중에 보면 말한 놈도 없고 들은 놈도 없고 나중에 문제가 되고 거짓말임이 드러나도 따지는 놈도 없고 책임지는 놈도 없고 살다 보면 잊혀지고 대충대충 그냥 그렇게 삽니다. 어쨌든 당국자와 당국 관계자는 모두 무책임한 인용 표현이라는 점에서 도토리 키재기라고 하겠습니다. (꼭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경우가 드물게나마 있긴 있습니다.)

2 번에서 말씀하신 제목들은, 제가 얼마 전에 썼던 따옴표의 지극히 상식적인 의미가 한국에서는 아직도 전혀 제대로 인식되고 있지 않음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뉴시스 제목을 보면 박검사가 그렇게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게임 끝이죠. 지금 같은 설왕설래 개판이 벌어질 이유가 없습니다. 저렇게 따옴표 쓸 수 있을 정도로 직접 말했다면 말이죠. 한겨레 것은 주어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거기에 더해(혹은 그래서) 기자가 직접 들은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나친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신뢰받는 언론이 되려면 기본 원칙과 상식부터 다시 챙겨야 하는 상황이라고 하겠습니다.

'관계자 저널리즘'에 대해서는 써둔 게 있는데, 언제 기회를 봐서 먼지 털고 꺼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아참, 나꼼수의 취재원 보호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가장 먼저 든 생각이 그것이었고(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언론 종사자가 이름을 깠다는 것은 그만큼 충격적인 사건이고 윤리강령에도 위배됨), 취재원을 밝히지 않으려고 감옥행을 선택한 뉴욕 타임스의 주디 밀러 사례까지 함께 생각해 보았는데, 일단 나꼼수 '관계자'(주진우인가요?)가 박검사를 직접 취재한 것은 아닌 것으로 판단하여, 주-박의 관계가 취재원 보호 케이스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들풀)





 * 한 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오랫동안 블로그계에서 교류해왔던 한 블로거께서 저에게 조언을 구하셨습니다. 다음(DAUM)에서 벌어진 블로거 간 분쟁에 관한 사안인데 비밀 방명록을 통해 조언을 구하셨지요. 그래서 저 역시 비밀글로 의견을 전해야 원칙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안이 갖는 공적 논의 가치를 고려해 분쟁 당사자 및 문의하신 분의 온라인 정체성이 드러날 수 있는 표현과 사적 내용은 모두 배제하고, 새로운 익명(가명)으로 표시한 상태에서 제 짧은 생각이나마 공유하고자 합니다. 이 점 문의해주신 블로거께 양해를 구합니다. 이하 간단히 제 생각을 써볼까 싶습니다.

<개요 : 극단적 요약>


당사자 '을녀'의 주장 (가명. 여성) : 블로거 갑돌이 7개월 동안 나를 스토킹하고, 괴롭혔다. 경찰에 조사를 의뢰했고, 경찰은 조사를 끝내고, 사건을 검찰에 송치한 상황이다.  

당사자 '갑돌'의 주장 (가명. 남성) : 블로거 을녀가 먼저 나에게 접근했다. 내가 '다음 뷰'에서 잘 나가는 블로거인 걸 알고, 글을 대필해달라고 요구해 나는 60여개의 글을 대필해줬다. 지금 을녀의 행동은 너무 뻔뻔하다. 맞고소하겠다.

문의자 '이웃사촌'의 입장 (가명) : "......" 이런 사건이 있다. '다음(Daum)'은 이 분쟁을 제대로 다루고 있지 못하다. 민노씨는 어떻게 생각하나? 궁금하다.

* 알림 : 위 '갑돌' '을녀'의 주장이 담긴 글 링크는 의도적으로 생략. 사실확인이 어렵고, 극단적 주장만 있어서..;;


0. 이웃사촌 님의 입장에 대해

* 참고 : 이웃사촌 님은 '을녀' 편에 서서 '갑돌'의 행위를 비판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갑돌' 입장에서 '을녀'의 행위를 비판하는 입장에 선 분이었다고 하더라도 제 판단이 달라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 입장은 양쪽에 공히 모두 적용되는 입장입니다.

저는 '이웃사촌'님의 행동을 순수한 동료애와 정의감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옆에서 상황을 지켜본 입장"이 아니라서 이웃사촌 님과는 정서적 공감의 위치가 다르고, 이것을 차치하더라도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정확히 알지 못하며, 블로그상 공개된 자료만으론 아직은 양 쪽 어느 한편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다른 편을 비판할 만한 판단재료를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갑돌과 을녀의 주장이 갖는 무게(형사사건에 해당할 만한 행위 주장)를 고려하면이 사안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사건은 본질적으로 '개인 간의 사적인 행위'에 기반하고 있기에, 즉 어떤 공적 인물, 공적 행위에 대한 판단이 아니기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봅니다. 사적인 행위에 기반해서 그런데 그 행위로 인해 어느 한 쪽은 인격적인 치명상을 입을 수 밖에 없기에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고, 그 당사자에게 뿐만 아니라, 언제든 이런 유사한 사건에 휘말릴 수 있는 우리 자신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인격이 걸린 문제인 것이죠.


1. 다음(DAUM)은 경찰도 검사도 법관도 아닙니다.

이웃사촌 님께선 "고소, 수사의 절차상 경찰에서는 직접 다음뷰에게 자료 요청"했을 것으로 말씀하셨죠. 맞습니다, '다음'에게 이 분쟁과 관련한 정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다만 '다음'에선 이 사건과 관련해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다음은 경찰도 아니고, 검사는 더욱 아니며, 법관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이 현단계에서 행동에 나설 수 있는 일은 (거의 혹은 전혀) 없다고 봅니다. 다음이라는 서비스는 약관에 명시된 회원들의 '일정한 행위들'(가령 게시물을 통해 표현된 명백한 범죄적 행위들)에 대해서만 일정한 약관상 절차/벌칙 조항에 의해 규제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극단적으로 가정해보죠. 다음이 '갑돌'과 '을녀' 주장의 진실 여부 판단에 결정적인 '비밀댓글'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다고 이 '비밀댓글'을 일반에 공개할 수 있을까요? 혹은 '비밀댓글'을 통해 갑돌과 을녀 당사자의 분쟁을 내부에서 조정할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약관을 파악하고 있진 못하지만, 전혀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래서도 안됩니다. 다음은 '심판자'가 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그저 중립적인 관리자에 불과합니다. 다음에게 심판자 역할을 해달라고 나서는 일은 아주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부분은 뒤에 좀더 상술하겠습니다.

약관에 '분쟁 조정'에 관한 규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형식적 절차 규정이지, 다음이 그 내용을 판단해서 양 당사자의 합의를 이끌어낼 만한 실질적인 내용에 관한 중재 권한을 규정한 조항은 아닐 것입니다.


2. 포털의 임시조치(블라인드) 제도에 대해  

이른바 '임시조치'(블라인드. 명예훼손 등 사유로 권리피해 주장자가 신청하면 30일 동안 게시물을 가리는 것)는 광의로 생각하면 분쟁조정에 관한 한 장치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분쟁에서도 '갑돌' 측에서 '을녀'의 게시물을 이 임시조치 제도를 이용해 여러 번 블라인드 처리했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아직 법적인 판단을 받기 전, 제3자가 상식적으로 판단하기에 명백한 증거/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 자신의 인격을 명백히 침해하는 글을 올린다면, 결과적으로 그 글의 주장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 권리 피해 주장자는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 입장을 항변할 권리를 갖고, 그것이 현존하는 임시조치 제도의 긍정적인 취지입니다.

물론 현실에서 '임시조치' 제도는 아주 악용되고 있습니다. 힘 있는 기업과 정부, 소위 공인과 유명인, 권력자들이 자신을 비판하는 의견들을 폐기시켜버리는 제도로 악용되는 측면이 있죠. 심지어 일부 '맛집'에서까지 자기 가게에 대한 비평(혹평)을 지워버리기 위한 수단으로도 이 제도를 악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 제도에서 게시자(삭제된 게시물 게시자)의 반론권은 '권리 침해 주장자'에 비해 현저히 낮은 것도 사실입니다.

(+ 인주찾기 4. 새드개그맨, <누가 명예를 말하는가?> (녹취록) : 이 글을 통해 임시조치에 대한 문제점과 개선안들을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3. 동료애와 정의감의 발현은 훌륭한 일입니다. 그것은 당사자가 공개한 자료에 바탕한 자유로운 토론이어야 합니다.

이 사안에서 법적인 판단은 경찰/검찰/법원에 맡겨야 합니다. 제가 보건대 갑돌도 을녀도 자신의 법적 권리를 충분히 알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당한 일에 대해선 누구보다 훌륭하게 항변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렇다고 주변에 계신 블로거들이 아무것도 해선 안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양 당사자가 공개한 자료들을 통한 사회적, 도덕적 판단과 평가는 얼마든지 자유입니다. 연판장을 돌리는 일도 자유이고, 이웃사촌 님처럼 관심을 호소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법적인 판단'을 대체하는 일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감정적인 정서적 선입견을 조장하는 '여론재판'을 유도하는 것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이 모든 자율적 사회적, 도덕적 판단은 인터넷이라는 자유로운 사상시장의 토론 메커니즘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 토론에서 어느 쪽의 입장을 지지하고, 또 비판하던 간에 그 주장의 질량과 부피는 거기에 합당한 근거와 자료들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갑돌 vs. 을녀' 사건에서 모두 강한 주장만 있지 스스로 '물증'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제시한 바 없고, 또 있더라도 그 '진실 여부'에 대한 판단을 할만한 명쾌하지 못합니다. 적어도 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양측에서 공개한 명백한 판단 재료가 과연 무엇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알고 계시면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4. 다시 강조하지만, 다음은 심판관이 아닙니다.

제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이런 점입니다. 블로거들이 어떤 사적인 일이 갖는 공적 성격에 관심을 갖는 건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관심이야말로 사회적 상상력, 정치적 상상력의 맹아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블로그 커뮤니티의 자율적인 토론 매커니즘을 통해 이뤄져야지, 어떤 시스템의 관리자에게 의뢰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스템 관리의 공적 측면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은 권장되어야 하지만, 그 관리자에게 아직 밝혀지지도 않은 '사적 생활에 기반한' 사건의 '심판관'이 되어달라고 요청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음이 내부 자료를 스스로 판단해서 어떤 회원(다음서비스와 계약한 블로거)를 손쉽게 단죄할 수 있다고 해보죠. 이건 일개 사기업에게 마치 사법적 권한을 부여하는 것과 같은 실질적인 효과를 부여합니다. 이것은 그 특정한 서비스 공간(이를테면 다음뷰를 매개로 형성되는 커뮤니티)가 생활공간 자체인 어떤 블로거에겐 일종의 사형 선고와도 같은 것입니다. 좀 과장하면, 흡사 다음(DAUM)에게 다음을 공간으로 활동하는 모든 블로거들의 '빅브라더'가 되어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죠. 아주 위험할 수도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웃사촌 님 취지가 그런 취지는 아니라고 넉넉히 신뢰하고, 또 제 우려가 과한 것이겠지만요.

다시 강조하지만 블로거 사회의 자율적인 토론과 자유로운 공방을 통한 진실 추구는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마땅합니다.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일반적으론 합리적인 의심과 논리를 갖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갑돌 vs. 을녀' 사건처럼 사적으로 민감한 사실관계에 기반한 사건은 그 일반적인 토론 요건보다 좀더 엄격해야 한다고 봅니다. '공개된 명백한 사실' 혹은 양측에서 자발적으로 '공개한 자료'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러니 제가 판단하기에 '갑돌 vs. 을녀' 사건에서 다음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 편에서 서서 이 사건을 바라보든, 법적인 판단과 사회적, 도덕적 비난가능성은 엄밀하게 분리해서 판단해야 하고, 또 이 사건을 너무 손쉬운 이분법으로 판단해선 안된다고 봅니다.

끝으로, 이웃사촌 님의 동료애와 정의감에 대해선 다시한번 넉넉한 신뢰와 더불어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 추. 다음 뷰 편집과 이 사건을 연계 시기키는 시각에 대해 ... (사족)
제 블로그(민노씨.네)는 독립형(설치형)입니다. 다음 블로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요. 더불어 '다음 뷰'에도 거의 송고하지 않습니다(최근 1,2년 동안은 아예 송고한 적도 없죠). 제 예전 글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다음뷰의 정책을 아주 강도 높게 비판해왔었죠...  물론 이제는 애정이 식어서 포기했습니다. 그 만큼(?) 다음 블로그와 다음 뷰 모두에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다음을 편들만한 글을 쓸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면 모를까...

다음 뷰의 '편집(노출) 정책'을 이 사건과 연계하는 관점은, 뭐랄까, 과도한 의심인 것 같습니다. 설혹 다음 뷰 관리자가 어떤 의도를 갖고 갑돌의 글을 높게 노출시키고, 을녀의 좋은 글들이 많은 지지를 받고 있음에도 낮게 노출시킨다 하더라도, 그 글이 '이 사건과 관련이 없는' 각자가 써온 글들(갑돌의 야구글, 을녀의 음악글)이라면 이것은 일개 사기업의 정책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을지언정, 이 사건과 연계되어 비판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판단합니다.



아름다운 익명 : 들풀의 <페이스북 유감>을 읽고

2012/02/24 19:48
* 발아점
들풀 님께서 겪은 '페이스북 실명 강요 정책'에 관한 글을 읽고, 그 글에 담긴 댓글을 추고해 올립니다.

저 개인으로 보면 들풀 님 글의 발아점 역할을 할 수 있어서 아주 아주 기쁘고, 반가운 글인데요.  
내용을 읽어보니, 이건 정말, 짜증이 솟구치네요.
정말 욕보셨습니다.

'페북의 실명 정책'에 관해선 제3회 인주찾기 컨퍼런스 펄님 발제가 떠오르네요.

펄 : 페이스북 평균인 (동영상 링크. @소리웹)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인주찾기 세 번째 컨퍼런스, <SNS 시대의 블로그> 중 펄의 발제 <페이스북 평균인> 발표 모습 (동영상 캡처)

발제 중에 보면 "실명이 아닌 건 어떻게 알고?"라고 황당해하는 펄님 발언이 있는데, 정말 실명이 아닌 건 어떻게 아는건지... 실명제 사이트도 아닌데 말이죠. 한국인 작명법을 분석(?)해서 어떤 필터링 기제를 만든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참 삽질한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게 실효성도 없는 것이 '가명'을 '실명'처럼 넣으면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는건데 말이죠. 확인할 방법도 없고. 그럼에도 IT 문화/기술과 친하지 않은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반)자발적 실명화'를 의식/무의식으로 강요받고 있는 형국이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펄의 <페이스북 평균인> 발제 자료 중에서

아무튼 정보의 폐쇄성(웹 전체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비밀그룹 안에서도 그 그룹글이 검색도 안되는.... 아카이빙은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형국이죠)과 실명 강요 정책은 정말 '페이스북 월드'가 초래하는 가장 부정적인 속성인 것 같습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선 웹은 거꾸로 가는 것 같고, 웹의 아버지 팀 버너스-리가 페이스북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선 아주 이해가 되네요.

들풀 님처럼 '아름다운 익명'(실존적 가명 혹은 필명)들이 점점 사라지는 듯 하여 몹시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저는 들풀 님이 몇 살인지, 어떤 이름인지지, 어느 학교 출신인지, 결혼은 하셨는지, 직업은 뭔지, 연봉은 얼만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세속적인 호기심이 아주 없다면 거짓말일테죠. 제가 이렇게 생각한다고 오프라인에서의 이른바 '커리어'가 의미 없단 이야긴 아닙니다. 너무 중요하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 커리어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죠. 더불어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의 성취 표지들을 강조하는, 때론 유치하다 싶을만큼 그걸 자랑하는 모습들도 충분히 그 나름으로 이해가 되고, 그것 자체가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인터넷은 새로운 탄생의 땅이었습니다. 블로그에서 우린 새로 태어난 것 같아죠. 우리는 마치 요나가 된 것처럼, 새로운 이상을 꿈꾸는 혁명가처럼, 자기만의 작고 소박한 이야기들을, 때론 세상을 향한 의기로운 외침을 '익명이라는 자유로운 대지' 위에서 나눴습니다.(+ 파워블로거 - 서) 그런데 이제 점점 더 그 익명의 대지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서비스는 웹 위에 서 있지만, 실명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꿈꿨던 인터넷이 페이스북 월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대단히 훌륭한 기술적 완성도와 대중성, 그리고 편의를 주는 서비스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페이스북 제국이 강요하는 실명 강요의 문화에 맞서 들풀 님과 같은 '아름다운 익명'이 우리 주변에 좀더 많이, 좀더 오랫동안 남아 있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어린 왕자에 유명한 이야기가 있잖아요? '그 애 목소리는 어떻지? 그 애가 좋아하는 놀이는 무엇이지?'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어른들은. 대신 '나이가 몇이냐? 형제는 몇이냐?' 이런 식의 것들을 물어본다는 거죠. 그리고 '예쁜 집이 있어요.'라고 하면 알아들을 수 없고, 1만 프랑짜리 집이 있다, 이렇게 해야 '아, 좋은 집이구나'하고 생각을 한다는 그 유명한 어린왕자의 말이 있는데요. 이것은 사람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신상정보라는 것은 진짜 그 사람을 아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는 걸 표현한 그런게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실명제란, 오프라인에서의 페르소나가 진짜다라고 인정하는 거라고 저는 생각이 들고요. 또 다른 내면의 자기자신 또는 온라인에서 보여준 자기 자신은 가짜다라고 낙인 찍는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떤, 그 통합된 자아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 그러면 결국 실명제라는 것은 결국 이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내면의 자아가 욕망을 추구하는 것, 이 자체를 막아버리는 그런 가면 금지법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뭐 어떤 여러가지 법적인 문제나 이런 것들도 있지만, 이것은 어떤 내면의 문제에서 사람이, 내 자신의 의지, 내 자아를 찾는 그런 행동 자체를 방해하는 거다, 라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 펄, 인터넷 주인찾기 시즌1. 실명제 컨퍼런스, <온라인 실존/오프라인 실존> 중에서

* 추.
현재 제도로서의 '제한적 본인확인제'(이른바 인터넷 실명제)는 시대의 흐름에 의해 점점 더 개선될 여지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시판 실명제 뿐만 아니라 선거법상 선거기간 실명제까지도 개정 논의가 한참이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도로서 강요되는 실명의 억압을 통과하고 나면 자발적 실명의 문화가 익명의 문화를 억누르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

오픈캡처 자체 팝업이라서 캡처할수도 없어서 아이폰으로 찍어서 다시 올리는 뻘짓을..;;;


* 발아점 (댓글로 쓰려다 입력이 안되고, 글이 좀 길어져서..)
인터넷에 대한 단상: 모든 것이 평평해져버린 시대 (Derick, 2012/02/02) 

덧붙임
(친구 늘샘이와의 대화와 민노씨네 블로그에서 본 이고잉님 인터뷰가 동기가 되어 쓴 글.)
(혹시 이 분야에 관련해서 읽을 만한 책이 있으면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

정말 반가운 글입니다. : )

1.


책으로 보면,
클레이 서키의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원제 : Here comes everybody)는 널리 알려진 책이고,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토마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나 <렉서스와 올리브 나무>를 저는 읽지 않았고, 앞으로도 읽을 확률이 높진 않지만... 한번 쯤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죠.

저는 오히려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라는 관점으로 인터넷의 가능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관점을 추천하고 싶고요(+ 게이터로그의 아거님께서 예전에 블로그에 쓰신 <세계는 평평하지 않다>는 에세이를 정말 추천하고 싶은데.. 잘 찾아지지 않네요. ㅜ.ㅜ; ) 그런 차원에서 딱히 웹과 관련은 없지만, 기존의 통념을 회의하고, 지식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주체적 자아의 인식론적 지도 그리기의 한 전범이 되기에 충분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를 아주 강하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 + 자기 바라보기 )

웹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팀 버너스-리'의 <월드 와이드 웹>(원제 : Weaving the Web)(한국경제신문)은 정말 웹에 대한 버너스-리의 기여를 생각해도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인데,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도 2년을 수소문해서 구한 책...;;;

바라하시의 <링크>(2002)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복잡계 네트워크 이론에 대한 무난한 대중교양서로서 정평이 있는 책인 듯 합니다. 저도 꼭 한번 읽어봐야지 하고 있는 책 중 하나입니다. 제 블로거 벗인 링크 님께선 "이 책도 안읽었어요?"라고 하시더군요. ㅎㅎ.

2.


그런데 책도 책이지만 저로선 블로그를 좀더 추천하고 싶습니다. 웹에는 이미 많은 블로그들이 치열하게 인터넷과 웹, 그리고 블로그를 고민한 흔적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나라 블로그 선구자라고 할만한 아거 님의 '게이터로그'는 정말 빼놓을 수 없겠죠. ( + 게이터로그 )

현재는 워드프레스를 쓰시는데, 예전 무버블타입 시절 글들은 인터넷과 블로그를 고민하는 많은 블로거들에겐 그야말로 보물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예전의 레이아웃은 아니고, 개별글을 찾아보기 약간 힘들긴 합니다. 각 카테고리별로 시간있으면 통독하셔도 아주 좋겠네요. 

끝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블로그 포스트 가운데 하나인 아거님의 <그때나 지금이나>중 일부를 옮겨봅니다. 꼭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때나 지금이나>에 내부 링크들로 연결된 글들도 꼭 읽어보시길...(확인했는데, 링크가 살아 있네요. : )

그때나 지금이나 소중한 기억들이 쉽게 지워버리는 게 안타깝습니다. 



아거, 그때나 지금이나 (July 18, 2005)

: 위 링크를 클릭하면 열리는 페이지 가장 아래에 있는 글입니다 (스크롤을 좀 하셔야..)

(....) 나는 블로그 공간이 두려워져서 떠나려는 시도를 했다.


그렇지만 떠날 수 없었다. 블로그는 결국 자극이고, 관계고, 약속이다. 그러나 역시 다시 기억의 문제로 돌아온다. 블로그는 기억이다. 아픈 사랑의 기억이고, 내 젊은 날의 초상이며,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는 기억이며, 충격적인 일을 당했을때 생생한 장면묘사를 담아내는 섬광기억이고, 때로 내 스키마대로 해석하고 재구성하는 왜곡된 증인의 기억이다. 블로그속에서 나는 몽상가이며 문상객이고, 성난 군중의 한 명이며, 엉뚱한 제안자이고, 관찰자이며, 매뉴얼 작성자이면서 트렌드세터(trend-setter)이다.(....)

어느 순간이 넘어가면서부터 GatorLog를 기록하는 목적은 하나가 되었다. 될 수 있으면 내 인생에, 내 career에 도움이 되는 기억만을 담아내자는 것이다. 에피소딕과 시멘틱 기억 사이에서 하나를 꼽으라면 시멘틱 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가끔씩 에피소딕 기억을 남긴다. 그게 블로그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다음 세 가지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고민을 하기에 나는 오늘도 역시 블로그에 이런 기록을 남기게 된다.

“세계와 접촉기간이 짧은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을 알고 있는가?”(플라톤의 문제)
“많은 양의 정보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왜 그렇게 아는 것이 없는가?”(오웰의 문제)
“수많은 인간의 신비와 인식론의 경계 밖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데카르트의 문제)
- [위선의 성채를 깨부수다](한겨레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