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노무현, 그리고 네루다의 시(詩)

2012/05/20 02:17
망각은 없다 (소나타)


나더러 어디 있었냐고 묻는다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돼서……”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돌들로 어두워진 땅이라든가
살아 흐르느라고 스스로를 망가뜨린 강에 대해 말할밖에;
나는 다만 새들이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알고,
우리 뒤에 멀리 있는 바다에 대해, 또는 울고 있는 내 누이에 대해서만 알고 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많은 서로 다른 장소들이, 어찌하여 어떤 날이
다른 날에 융합하는 것일까? 어찌하여 검은 밤이
입 속에 모이는 것일까? 어째서 이 모든 사람들은 죽었나?
나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가진 것들 얘기부터 할 수밖에 없다.
참 쓰라림도 많은 부엌 세간,
흔히 썩어 버린 동물들,
그리고 내 무거운 영혼 얘기부터,
만나고 엇갈린 게 기억이 아니다,
망각 속에 잠든 노란 비둘기도;
허나 그건 눈물 젖은 얼굴들,
목에 댄 손가락들,
나뭇잎에서 떨어지는 그런 것:
어떤 날의 어두움은 이미 지나가고,
우리들 자신의 음울한 피로 살진 어떤 날의 어두움도 지나가고,
보라 제비꽃들, 제비들,
우리가 그다지도 사랑하고
시간과 달가움이 어슬렁거리는
마음 쓴 연하장에서 긴 꼬리를 볼 수 있었던 것들.
허나 이빨보다 더 깊이 들어가지는 말고,
침묵을 싸고 자라는 껍질을 잠식하지도 말자,
왜냐하면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죽은 사람이 참 많고
붉은 태양이 흔히 갈라놓는 바다 제방이 참 많고,
배들이 치는 머리들이 참 많으며,
키스하며 몸을 감는 손들이 참 많고,
내가 잊고 싶은 게 참 많으니까.


-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번역 정현종,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1989)


1. 
알지 못하더라도, 아는 것. 
느낄 수 없더라도, 느껴지는 것.
아프지 않더라도, 아픈 것.
모순은 오월 꽃동산처럼 삶 속에 만발한다.
그 모순을 숙주 삼아 자라는 삶 속에서 시는 그 삶을 껴안는다.

시는 모순 위에 서 있는 마법이 아니며,

그저 그 모순 자체다.
그 모순들이 내지르는 절규이고, 숨죽인 흐느낌이며,
그리하여 그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말’로서 시는 존재한다.
그것이 모순이라면,
그리고 모순인데, 그것이 내 뼈처럼, 살처럼 굳어져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왜 울고 있는지,
왜 웃고 있는지,
왜 소망하는지,
그 소망은 어떤 상처 속에서 키워졌는지...
대답할 수 없더라도
나는 안다.
그것들이 있다는 걸.
그리고 시는 그저 그 있는 것을 언어라는 공간 위에 놓아둔다.
그럼으로써 거기에 들어가 함께 위로하고, 달래고, 보듬을 수 있는 성채를 만든다.

2.
다시 오월이 찾아왔다. 다시 아무런 아픔 없이 5.18을 통과한다. 다시 노무현의 노란 풍선이 하늘을 가득 채운다. 그 기억과 풍경이 네루다를 다시 불러온다. 네루다의 ‘망각이 없다’는 이 아름답고, 처연한, 가슴 터지도록 쓸쓸하지만, 따뜻한 시를 다시 불러온다.
 
3.
나는 "잊고 싶은 게 참 많"지만, 세상은 잔인하게도 '망각이 없는' 세계다. 이것은 이중적이다. 내가 기억하지 않더라도 세계는 그 상처들을 그 자체로 보존한다. 그러니 그 쓸쓸함, 그 고통을 우리는 있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 뒤에야 화해가 온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잊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기고, 그 기억을 망각으로 떠나 보낼  수 있다.


거꾸로 글 읽기: 긴 글 읽기 팁?

2012/05/14 03:53

1. 나는 늘 주장(?)했다시피 유사한 질량의 진실, 의견, 감상이라면 그것들을 표현하기 위한 글의 물리적 부피는 작으면 작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글은 세상을 반영하고, 세상은 짧은 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맥락과 이면들을 지니고 있다. 세계의 어떤 진실, 그 진실이 아무리 작고, 볼품없는 진실이라도 말이다, 그 진실을 담고 있는 글이 단 열 줄이라면, 그건 글쓴이의 재능이다. 탁월한 ‘시(詩)’는 물리적인 부피의 진실, 그 표현 한계를 뛰어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린 시를 예술이라고 부른다.

2. 각설하고, 작은 블로그 판이지만, 나는 그 동안 독자들로부터 벗들로부터 긴 글을 쓰는 악명 높은(?) 블로거였다. 나라고 짧은 글 쓰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나라고 내 시간 아까운지 몰랐을까, 나라고 굳이 왜 짧게 쓸 수 있다면 그렇게 안 했을까, 내가 바보도 아니고(!). 물론 나는 바보다(?). 그런 항변하고 싶은 마음 생기곤 하지만, 뭐 긴 글이 싫은 건 SNS의 득세를 떠나 무슨 시대 정신 같기도 하다. (농담,농담유골.) 나도 긴 글이 좋은 경우는 별로 없다. 종이 단행본으로 책 내지 않을 바에야 PC와 모바일로 읽히는 글이 너무 긴 건 확실히 단점이다.

3. 요즘은 좀 길다 싶은 글은 마지막 문단부터 읽는다. 기사는 그 정도가 덜한데, 블로그 글들은 확실히 미괄식 서술이 많아서다. 마지막 문단부터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 읽어도 맥락을 파악하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을 뿐더러, 마지막 문단이 두리뭉실, 설날 덕담 류로 끝나거나, 모호한 수사들의 집합으로 끝나면, 그 글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 내 나름의 노하우랄까. 글 읽기 팁이랄까.

4. 별 관련은 없을지 모를 연상.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학평론가 김현은 언젠가 박경리의 토지를, 우연한 실수로, 거꾸로 읽은 적이 있다고 하더라. 전부를 그렇게 읽은 건 물론 아니고, 이를테면 5권 다음에 6권을 읽어야 하는데 7권을 읽은 그런 식. 그런데 더 재밌는 건 그렇게 중간을 건너 뛰고 읽은 걸 스스로 깨달은 뒤에도 계속 그렇게 읽었다는 거다. 이왕 읽은 김에 그렇게 계속 읽었다고 하더라.

5. 이 글은 제목만 읽어도 무방한 극단적 두괄식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나머지는 덤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 ‘덤’ 처럼 느껴지는, 혹은 시간낭비로 느껴지는 그 곁가지들 속에 더 많은 진실들이 숨겨져 있기도 하다. 때론 웅변의 내용이 아니라 웅변가의 한숨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한다. 물론 이건 내 글이 길었다는, 그 긴 글의 과거에 대한 변명이거나 항변 심리는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다. 나는 앞으로는 긴 글을 블로그에 (자주) 쓸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블로깅이 가장 좋은 점은 언제라도 자기 맘대로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일 테다. 한 줄도 쓸 수 있고, 만 줄도 쓸 수 있다. 말도 안되는 소설을 쓸 수도 있고, 습작 시를 쓸 수도, 또는 그냥 대다수에겐 그저 시시한 일기일 뿐일 그런 이야기를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처럼 진지하게 쓸 수도 있다. 그 맘대로도 물론 맘대로는 아니다…. 그 맘대로엔 정말 많은 조건들, 제약들, 여러 개의 나와 보이는, 혹은 보이지 않는 독자들이 숨겨져 있다.

추.
블로거 벗 ‘세어필’“민노씨 블로그 절필한거냐”는 끔찍한 논평을 남겼는데, 나는 물론 블로그를 절필할 생각이 전혀 없다. 최근 썼던 슬로우뉴스 기사들에 대한 메타비평(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짧은 소개글)에 대한 세어필의 반응은 한편으론 서운하지만 또 한편으론 참으로 고맙다. 언젠가 긴 글 쓸 때, 너무 지겹다고 투덜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아, 물론 글이 길다고 반드시 지겨운 건 아니고, 글이 짧다고 지겹지 않은 건 아니지만…



1. 김기창 인터뷰는 <망 중립성 이용자 포럼> 준비를 위한 모임에서 우연히 이뤄졌다. 그게 벌써 4월 19일이다. 그러니 인터뷰 정리가 늦어도 너무 늦은 셈이다. (문득 천리길이 생각나면서… 죄스런 마음이 엄습..;; 올해는 넘기지 말아얄텐데.) 김기창을 만나기 며칠 전에는, 정말 이렇게 만날 거라는 전 전혀 모르고, 그 오픈웹에서 이른바 댓글 토론도 했다. 각설하고, 최근 나꼼수를 통해 널리 알려진 오레건 대학의 라우터 모니터링에 관한 이야기를 이미 지난 4월 중순에 김기창으로부터 들었다. 그걸 슬로우뉴스에 기사화하지 못한 이유는 그야말로 내가 무식해서다. 1시간 반 남짓의 녹음을 여러 번 들었지만(예닐곱 번은 들은 것 같다), 그 부분은 정말 내 기술적 수준에선 잘 이해가 안됐다. 내가 독자의 가독 표준은 아니지만, 쉽게 이해하는 문제도 정확히 풀어낼 용기가 없는데, 아리까리하게 이해하는 문제를 전할 수는 없었다. 녹취록을 좀 더 일찍 정리해서 기술적 이해가 높은 다른 슬로우뉴스 편집팀들에게 교차 확인을 할 걸 하는 후회가 엄습했다. 아깝기도 하고.. 슬로우뉴스 차원에선 이런 소극적인 게으름을 앞으론 반복하지 말아야겠다는 게 김기창 인터뷰가 주는 가장 교훈이다.

2. 인터뷰에 대해. 우선 김기창은 열정적인 인터뷰이다. 그가 오픈웹을 이끌어 온 그 열정적인 발자취가 인터뷰 내내 그대로 느껴졌다. 캠브리지대학에서 우수논문으로 박사 받은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에게 느껴지는 건 무슨 꼰대 근성이나 권위 의식이 아니고, 그저 열정이었다. 청바지와 ‘우분트(Ubuntu)’가 새겨진 티셔츠는 그런 김기창에게 참 잘 어울렸다. 우리는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정확히는 인터뷰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점심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김기창을 따라가 이런 저런 질문을 던졌다.) 그는 “지식인”이라는 말,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전문가의 권위 의식을 혐오하고, “발가벗고, 콘텐츠로 승부하자”고 이야기했다. 전폭적으로 공감한다. 전문가는 꼭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전문가가 모든 걸 해결해주진 않는다. 그 발가벗은 정신, 투명한 이성와 열정이 김기창의 힘인 것 같다. 그 자체로도 아주 큰 자극을 준다. 시간이 허락하면 꼭 한번 읽어보길 바란다. 인터뷰: 오픈웹 김기창, 한국 정치와 FTA 논쟁을 말하다.



자존심 지키기

2012/05/09 04:44

제라드가 쓴 ‘기술의 발달과 퍼블리시티권’은 흥미롭기 짝이 없는 글이다. 나는 이 글이 흥미로운 내용에 비해 너무 심심한 제목 때문에 덜 읽힐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라드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용인 즉, ‘기술의 발달과 퍼블리시티권: 양준혁이 사라졌다!’로 제목을 수정하자는 것이었다. 제라드에게 답 문자가 왔다. 결론은 곤란하다는 것. 양준혁 사례는 글 서두에 짧은 예시로 등장할 뿐이라서 수용하기 어렵다는 취지였다. 그 답문자가 서운하기는 커녕 고마웠다. 슬로우뉴스는 찌라시즘의 미끼 제목을 경계하자고 그토록 다짐했던 터였다. 개인적으론 ‘양준혁이 사라졌다!’ 정도를 부제로 채용하는 게 뭐 그리 미끼질일까 싶냐만은, 제라드가 보기엔 달랐나보다. ㅎㅎ. 그 초심이 고맙고, 또 든든했다. 그나저나 내가 꽤 좋아하는 노래, 누구나 들어보면 아, 그 노래할 만큼 유명한 노래, No Doubt의 ‘Don’t Speak’ 오랜만에 한번 들어봐야겠다. 왜 갑자기(?) 이 노래가 땡겼는지는 제라드의 글을 읽어보면 안다(이것도 미끼질인가? ㅎㅎ).



최보식의 수수께끼 칼럼은 열 받아서 쓴 글이다. 최 씨의 글은 가장 저열한 저널리즘을 상징한다. (이건 평가다. 평가. 즉, 의견이다. 여기에 사실 적시는 없다. 만에 하나라도 나 고소하지 마라. ㅎㅎ. 농담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솔직히 최 씨가 무슨 말을 하건 별 관심이 없다. 그럼 최 씨의 칼럼에서 부당한 공격대상이 되는 조국(교수)를 좋아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둘 모두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다. 물론 최 씨와 조국을 비교하면, 이건 뭐 비교 자체가 부당하리라. 조국은 때론 이해하기 어려운 트위터에서의 경솔한 언행에도 불구하고(나는 심지어 그를 팔로잉하지도 않지만, 그런 소식들이 간혹 들려온다) 여전히 의미 있는 지식인이다. 최 씨 칼럼에서 이런 취급을 받아선 안 된다(조국이 너무 잘생겨서 괜히 살짝 재수 없는 건가? 스스로 생각해보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최 씨 칼럼을 읽으면서 떠올린 사람은 ‘고종석’이다. 최 씨 글이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저질의 칼럼이라면, 고종석은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지적이고, 감수성 넘치는 칼럼이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선 그렇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게 있다. 그건 '권위'다. 달리 표현하면 '존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최 씨의 칼럼을 혹시라도 읽고 눈과 마음을 버린 독자들에게 고종석의 칼럼을 추천한다. 둘 다, 이른바 나이든 자가 젊은이에게 전해주는 체험적 교훈이라고 볼 수 있는 칼럼인데, 그 격이 이토록 다를 수 있단 사실에 나조차도 놀랍다. 당신이 ‘어른’이라면, 또 ‘아버지’라면, 고종석 칼럼은 거듭 거듭 읽어 마땅하다. 그 고종석의 칼럼, ‘성년의 문턱에 선 아들에게’.

추. 위 고종석 칼럼은 아거 님의 딜리셔스를 살펴보다가 오랜만에 읽은 고종석 글인데, 그 글을 읽으면서 감동했던게 엇그제 같은데, 참 세월 빠르다. 아거 님께서 요즘 너무 블로그를 쉬시는 것 같다. 주 신부님과 이야기한지도 오래고… 두 분이 항상, 문득 문득 떠오른다. 형 같기도 하고, 선생님 같기도 한 느낌이다. 몇 살 더 먹어서가 아니다. 벗으로서 존경하기 때문이다. 두 분에게 뭔가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게 없다. 그게 때론 속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