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큰 웃음 선물하는 김순덕 여사의 칼럼. 마침 정말 오랜만에 따끈따끈한 칼럼을 읽었다. 발행한지 2시간도 안되는 정말 훈훈한 칼럼이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김순덕 여사. 

[김순덕 칼럼]“그분들은 다 누렸습니다” 동아일보, 2012년 7월 9일 (클릭 당근 비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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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의 마지막 문단이다. 용감무쌍한 우리의 김 여사께서, 정말 호탕하게도, 헌법상 보장된 거주이전의 자유(헌법14조)에 대한 훼손을 장려하고 있다. 대통령이 되면 친인척에게 해외로 꺼지라고 명령할 수 있는건가? 그런 대통령 권한이 새롭게 생긴건가? 나만 몰랐나? 김순덕이 보기엔 대통령 되면 친인척 쯤 해외로 꺼지셈, 이렇게 명령할 권한이 자동으로 생기나 보다. 나는 대통령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는 말은, 오늘, 김 여사에게, 처음 듣는다.

'조중동'의 끝을 잡고 있는 대한민국의 위대한 언론회사 논설위원께서, 아무리 의견을 전하는 칼럼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멋대로 써도 되는건지 난 정말 모르겠다. 대한민국 저널리즘이 흑흑 운다.

김순덕 식이라면, 누구든 대통령되면 김순덕이 자칫 (한국 저널리즘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으니 해외로 내보냈으면 좋겠다. 대사가 아닌 사인으로 내보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써도 되나? ㅡ.ㅡ;

참고.
헌법 제14조에 정한 거주·이전의 자유의 의미와 그 구체적 내용
거주·이전의 자유란 국민이 자기가 원하는 곳에 주소나 거소를 설정하고 그것을 이전할 자유를 말하며 그 자유에는 국내에서의 거주·이전의 자유 이외에 해외여행 및 해외이주의 자유가 포함되고, 해외여행 및 해외이주의 자유는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여행하거나 이주할 수 있는 자유로서 구체적으로 우리나라를 떠날 수 있는 출국의 자유와 외국 체류를 중단하고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올 수 있는 입국의 자유를 포함한다. (2008. 1.24. 선고 2007두10846 판결 【여권발급거부취소】 중에서)



* SNS 시대의 블로깅 0: 연재를 시작하며 에서 이어지는 글.

6. 국어사전(신어)은 내러티브(narrative)를 "인과 관계로 엮인 실제적·허구적인 이야기"로 정의한다. 블로깅의 쇠락과 트위터의 팽창이 갖는 의미론을 함축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어들, 가령 목소리, 개성, 재현(의 위기 혹은 딜레마), 인과관계, 완결성은 모두 '내러티브'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이제 세상을 둘러싼 의미들, 의미들로 둘러쌓인 세계는 트위터라는 실시간 이동형 단문 메시지 서비스를 통해 즉각적으로 재현된다. 하지만 그렇게 재현된 표현들은 대개 순간적인 찰나와 표피, 토막으로서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 토막 이야기들은 "원인과 결과"를 생략한 즉각적이고, 감상적인 반응으로서의 경향성을 갖는다.

7. 블로깅을, 아거의 관점을 빌어,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가진 내러티브 쌓아가기'라고 정의할 때, 트위터는 진짜 사람의 목소리를 가진 내러티브라는 블로깅의 고전적인 의미구조를 해체시킨다. 트위터는 '진짜 사람'이 쓰는 짧은 글들이지만, 거기에서 '목소리'를 구별하기 어렵고, '내러티브'를 발견하기란 더 쉽지 않다. 내 주관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해보자. 내가 트위터에서 팔로잉(구독)하는 사람은 모두 300여 명 정도다. 이들 가운데 글쓴이를 가리고(블라인드), 각각 10개의 트윗들을 묶어서 그 글이 누가 쓴 글인지 가려내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300여명 중에서 채 3,40명도 가려내기가 어려울거다. 가령 주낙현, 아거, 써머즈, , 강정수, 캡콜드, 이고잉, 메탈돼지, 이승환, 임예인, 이정환, 뗏목지기, 최상국, 정혜승, 촉촉핸드, 김우재, 한사, 신비, 조아신, 독초(doccho), 이대팔, so_picky, 주성치, 최우형 등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트위터들을 나는 아마도 그들의 트윗들만으로는 구별해내지 못할 것임에 분명해 보인다. 이들을 구별해낼 수 있는, 혹은 있을 것이라고 믿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의 블로깅을 오랫동안 지켜봤기 때문이지, 트위터를 통해서 이들이 만들어내는 '인간의 목소리(개성)'에 익숙해졌기 때문은 아니다.

8. 블로깅이 정보를 매개로 사람의 관계를 만들어갔다면, 트위터는 사람의 관계를 매개로 정보의 유통 시스템과 메커니즈을 만들어가는데, 문제는 트위터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의 관계은 지극히 한정적이라는 점이다. 블로그는 상호 관심있는 정보, 그게 문학이든, 철학이든, 시사든, 아니면 방송연예든, 신변잡기든 간에, 그 정보를 통해 조금씩 그 글쓴이와 점진적으로 교류하는 모델이다. 트위터는 오히려 반대다. 이미 있었던 관계에 기반해 정보를 매개하는데, 문제는 그 수는 대단히 한정적일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어느 시점 이후로 확장되는 관계는 '형식적이고, 표피적인 관계'의 한계를 뛰어넘기 어렵다. 이는 트위터의 기술적인 문제라기 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본래적인 관계가 갖는 그 제한성에 기반한다. 즉, 아무리 수 천, 수 만과 팔로잉, 팔로워 관계(소위 '맞팔')을 맺더라도, 그 관계는 숫자일 뿐이지, 어떤 의미도 아니다. 특히 실존성을 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차원에서 그 무의미성은 더 명료해진다.

9. 아거가 가짜 블로그("회사의 제품이나 서비스 혹은 브랜드를 판촉할 목적으로 회사의 마케팅 부서에서 만든 블로그(들)", '비즈니스워크'에 의한 정의)를 이야기하면서 언급하는 블로깅의 화자와 내러티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좀 길지만 인용해보자.

가짜 블로그들을 보면 이야기체의 글(narrative)의 구성 요건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습니다. 결정적인 한가지만 빼고요... 이들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링컨 프라이 블로그는 "오늘 나는 링컨 모양을 한 프렌치 프라이를 맥도널드에서 봤다"라고 전합니다. 시간과 공간이 들어있고 이야기의 화자가 있지요. 캐릭터 블로그인 캡틴 마틴 블로그는 "나는 요즘 리얼리티 TV쇼같은 유치한 것을 보지 않는다. 그 시간에 밖에 나가 taco salad만들기 같은 의미있는 일을 즐긴다"라고 기록합니다. 모두 이야기를 전하지만 결정적으로 빠진게 있습니다. 바로 화자가 진짜냐 가짜냐 여부(authenticity)입니다.

이 곳 GatorLog에 글을 올리는 "아거"는 캐릭터(악어를 소재로 한 캐릭터)지만, 아거가 쓰는 블로그는 캐릭터 블로그나 flog가 아닙니다. 필명이지만 온라인을 통해 상호작용을 하는 대부분의 독자들은 아거라는 사람이 로봇도 아니고 회사의 마케팅 부서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고, 바쁘면 자기 멋대로 휴가도 내고, 개천절 무렵에 온다고 했다가 갑자기 자신이 기록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휴가 도중에 불쑥 찾아오는 진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블로그의 진짜 화자란 바로 자신이 경험한 혹은 경험하고 있는 (주관적, 개인적) 역사를 사회적인 이야기거리로 바꿔놓는 사람입니다. 이런 점에서 탈리반 치하에서 자신이 경험한 일을 전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블로거는 미국에 앉아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삶에 대한 칼럼을 쓰는 뉴욕타임스 기자보다 더 authentic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진짜 여부는 신뢰도와 관련이 있지만 반드시 신뢰도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 아거, 가짜 블로그(Flog) 무엇이 문제인가?, 2005년 4월 24일

10. 트위터의 팽창과 블로그의 쇠락으로 세계는 진짜 인간의 목소리를 가진 이야기(내러티브)를 잃어가고 있다. 반면, 많은 이들이 트위터라는 '낮은 문턱'을 통해 어쨌든 자신의 목소리를 웹과 모바일에 쏟아내고 있다. 바야흐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소통 가능성은 직접적으로 팽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럴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환상을 얻었을 뿐이다. 블로깅이 제한된 정보에 대한 공통 관심를 매개로 인간의 관계를 점진적으로, 아주 천천히 실제적으로 확장했다면, 그렇게 비가시적인 '사람의 형상(목소리)'를 구체화했다면, 트위터는 그 반대로 구체적이고, 생동하는 실존의 인간을 전면에 내새우는 것처럼 일반 대중에게 착시를 불러일으키지만, 대부분 서로에게 무의미한 정보(하지만 그 무의미성이야말로 의미성이다. 이건 아도르노가 이야기한 '서정시의 정치성'의 맥락으로 해석해야 한다)를 매개로 인간 관계를 확장한다는 환상을 구축()한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여전히 '목소리 없는' 숫자들에 불과한, 뿌연 안개 속에 갇힌 희미한 존재로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우리들의 연애가 대개 비참하거나 쓸쓸한,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 비참함과 쓸쓸함이 다시 따뜻한 추억으로 결실을 맺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그 순결한 욕망에도 불구하고 그 쾌락원칙은 대개의 경우 현실원칙과는 조화할 수 없는 그 모순, '나쁜 제비뽑기'라는 평범한 보통 존재의 굴레 안에 존재한다. 하지만 이 비참한 세계에서 우리는 어쨌든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뮤즈랑(muzrang.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롭게 추가된 뮤즈랑의 플레이리스트)은 내 노래방 18번을 불러오고, 내 서툰 연애를 불러오며, 거기에 담긴 어떤 간절함을, 비참함과 소망의 가녀린 편린들, 그 편린들이 만발한 벚꽃처럼 나부끼던 내 청춘의 거리를, 그 노래방에서 노래하던 그 아이를, 그 눈동자를, 눈물을, 결국 불러온다. 이건 정말 너무 비참하게 상투적이고, 비정하리만큼 속물적이며, 그래서 감상적인 기억의 리스트다.

종종 인용하는 화이트헤드, "사물 본성의 핵심에는 청춘의 꿈과 비극의 결실이 있다." 아, 이건 정말 진실이구나... 

뮤즈랑: http://www.muzrang.com/
내 노래방 18번: http://www.muzrang.com/P00484




지란지교(知蘭知交)

2012/07/04 02:54
우리는 흔히 우정이 돌맹이 같이 단단한 것이길 바라는데, 실은 대개 그 우정이라고 불리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서로에게 난초 같이 연약하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언제 그랬냐 싶게 사그러들고, 시들어버리는 그런게 아닌가 싶다. 언젠가 유안진이라는 에세이스트가 '지란지교를 꿈꾸며'라는 책을 쓴 게 기억난다. (맞나?) (찾아보니 맞다.) 물론 난 이런 제목부터 건전한 에세이에 별다른 취미가 없어서 안 읽었는데, 찾아보니 지란지교(芝蘭之交)라는 게 "지초(芝草)와 난초(蘭草) 같은 향기(香氣)로운 사귐"을 뜻하는 사자성어다. (이게 뭔가?) 갑자기 배반감이 일어나는데, 나는 지란지교의 '지'가 앎의 '知'인 줄로 지금까지 생각해왔다. (난초를 헤아리듯 사귐을 배워라 뭐 이런 뜻으로 알고 있었다능.) 뭐 이런 각설하고, 나는 이런 말랑말랑한 이야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하지만 또 나란 인간이 워낙에 나이브하고, 감상적이라서, 떨치고 싶어도 이런 속류 감상주의에서 빠져나오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데, 우정이란 게 돌봄이 없으면 정말 무용하다는 생각을 요즘들어 종종 한다. 그렇게 어느새 무심한 듯 떠나간 친구들이 참 많고, 지금도 알게 모르게 멀어지는 친구들이 있는 것 같다. 어떤 고귀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건 참으로 중요한데, 역시나 그 마음을 보여준다는 건 더 중요하다.

그냥 갑자기 화장실에서 일보고 멍하니 앉아있다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짧게 남긴다.


[아침논단] '멘붕' '듣보잡' 쓰며 피폐해지는 우리 정신세계 (조선일보, 문정희) 2012년 7월 2일 : 클릭 비추.

이게 무슨 개소리인지 모르겠다. 언어 그 자체가 토대이기도 해서 물론 그 사회를 사는 사람들의 정신 영역에 자연스럽게 침투하고, 영향을 미친다. '멘붕'이니 '듣보잡'이니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투명한 언어들이다. 한편, '멘붕'과 '듣보잡'을 동일한 평면에서 등가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멘붕은 재밌는 조어라고 생각하고, 듣보잡은 공격적이고, 차별적인 조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듣보잡이란 말을 사라져야할 단어로 규정하긴 어렵다.

어떤 트윗은 이 칼럼을 고급문화과 대중문화를 인위적으로, 위계적으로 구별한다고, 즉, 꼰대스런 고급문화 애호가 갖는 (역설적인) 천박함을 공격하는데, 이 칼럼을 공격하는 관점으론 적당한 분석과 해석 표준은 아니라 보고, 오히려 오래된 시론을 빌리자면, '반시론: 시여, 침을 뱉어라'(김수영)나 '풍자냐 자살이냐'(김지하)의 관점이 좋을 듯 싶다. 마르쿠제의 어투를 빌자면, 브레히트의 계몽적인 희곡에 담긴 언어들보다는 '듣보잡'이나 '멘붕'이라는 (민중)언어가 훨씬 더 한국사회를 해석하는데 적실한 언어들이다. 물론 이런 (민중) 언어 (특히 유행어)라는게 무슨 인식론적인 성찰을 담은 말은 아니다.

그건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지식인(이 자주 쓰는) 언어가 무슨 우월하게 성찰의 깊이를 더하고,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말도 아니다. 진실이 왜곡된 시대는 왜곡된 언어를 생산하고, 그 언어를 통해 지탱된다. 권력과 지식은 서로 딴 몸인 적 없으며, 지식은 대개 그 권력의 하녀로서 기능해왔다. 그 모순이 가장 심한 영역은 대중, 민중의 영역이 아니라 소위 말하는 (그 지식인) 기득권 영역이라는 말이다. 시대 모순이 심화된 사회에서 지식인의 언어는 그 모순을 가장 계급적으로 반영하는 세속주의적이고, 권력주의적인 경향을 띠는 바, 문정희의 이 나이브하고, 감상적인 '착한 말 쓰자'는 언명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이건 무식하게 도식적이고, 폭력적으로 계몽적이라서, 실상 현실의 모순을 흔드는 진실의 언어로서, 지식인이 추구해야 하는 말, 그 언어의 반대편에 속한다.

'멘붕'이나 '듣보잡'이라는 말이 내포하는 사회적 진실은 '브레히트, 릴케 읽자' 따위의 낭만적 기만으로 깨뜨려지지 않는 진실이며 질서다. 그건 그 말의 맥락을 입체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즉, 그 말을 낳은 사회를 더 넓은 존재와 성찰의 언어로 감싸안음으로써, 즉, 그 말을 낳은 그 사회의 모순을 치유함으로써 해결될 수 밖에 없다. '착한 말 쓰자, 좋은 말 쓰자'는 소박한 계몽주의를 탓할 생각은 없다. 다만 시인이라는 자가 한국에서 가장 거대한 모순의 언어를 직조하는 조선일보에서 이런 후진 칼럼을 쓴다는 것 자체에 이 시대의 불행과 이 시대를 흐르는 언어의 슬픔이 존재한다. 그건 자못 시적인 모순, 절망으로서의 현실을 그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시인 스스로 실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웃긴데 웃을 수 없는 코미디. 문정희 시인의 글은 코미디지만, 그가 조선일보에 쓴 글과 그 행위는 비극적이다. 그러니까 이 모든 상황이 참으로 슬픈 코미디인 거다.

* 발아점:
임예인의 트윗을 리트윗한 종이채크와 또 다른 종이채크의 리트윗

* 트윗에 생각나는대로 올린 단상들 묶어서 사소하게 추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