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의 수수께끼 칼럼은 열 받아서 쓴 글이다. 최 씨의 글은 가장 저열한 저널리즘을 상징한다. (이건 평가다. 평가. 즉, 의견이다. 여기에 사실 적시는 없다. 만에 하나라도 나 고소하지 마라. ㅎㅎ. 농담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솔직히 최 씨가 무슨 말을 하건 별 관심이 없다. 그럼 최 씨의 칼럼에서 부당한 공격대상이 되는 조국(교수)를 좋아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둘 모두에게 별 다른 관심이 없다. 물론 최 씨와 조국을 비교하면, 이건 뭐 비교 자체가 부당하리라. 조국은 때론 이해하기 어려운 트위터에서의 경솔한 언행에도 불구하고(나는 심지어 그를 팔로잉하지도 않지만, 그런 소식들이 간혹 들려온다) 여전히 의미 있는 지식인이다. 최 씨 칼럼에서 이런 취급을 받아선 안 된다(조국이 너무 잘생겨서 괜히 살짝 재수 없는 건가? 스스로 생각해보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최 씨 칼럼을 읽으면서 떠올린 사람은 ‘고종석’이다. 최 씨 글이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저질의 칼럼이라면, 고종석은 저널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지적이고, 감수성 넘치는 칼럼이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선 그렇다.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줄 수 없는 게 있다. 그건 '권위'다. 달리 표현하면 '존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최 씨의 칼럼을 혹시라도 읽고 눈과 마음을 버린 독자들에게 고종석의 칼럼을 추천한다. 둘 다, 이른바 나이든 자가 젊은이에게 전해주는 체험적 교훈이라고 볼 수 있는 칼럼인데, 그 격이 이토록 다를 수 있단 사실에 나조차도 놀랍다. 당신이 ‘어른’이라면, 또 ‘아버지’라면, 고종석 칼럼은 거듭 거듭 읽어 마땅하다. 그 고종석의 칼럼, ‘성년의 문턱에 선 아들에게’.

추. 위 고종석 칼럼은 아거 님의 딜리셔스를 살펴보다가 오랜만에 읽은 고종석 글인데, 그 글을 읽으면서 감동했던게 엇그제 같은데, 참 세월 빠르다. 아거 님께서 요즘 너무 블로그를 쉬시는 것 같다. 주 신부님과 이야기한지도 오래고… 두 분이 항상, 문득 문득 떠오른다. 형 같기도 하고, 선생님 같기도 한 느낌이다. 몇 살 더 먹어서가 아니다. 벗으로서 존경하기 때문이다. 두 분에게 뭔가 드리고 싶은데, 드릴 게 없다. 그게 때론 속상하다.



‘설렌 인터뷰2: 연대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 (진보신당 김순자 편)’은 슬로우뉴스 2호 특집 ‘온라인, SNS, 그리고 4.11총선’ 열일곱 번째 글이다. 이 인터뷰는 훌륭한 인터뷰는 아니다. 하지만 아름다운 인터뷰다. 편집팀의 기획취지를 살리지 못했다는 점에선 못내 아쉬운 인터뷰이기도 하다. 특히 편집회의에서 기획한 건 두 가지였다. 우린 ‘정당인 김순자’가 아니라 ‘어머니 김순자’ ‘아줌마 김순자’ ‘인간 김순자’를 드러내고 싶었다. 물론 아주 높은 기대였고, 당연히 실패했다. 또 하나는 한나라당과 반공, 멸공 단체에서 활동했던 김순자의 ‘전향’(?)을 긴장감 있는 대담으로 이끌어내고 싶었다. 그것도 실패했다. 그럼에도 나는 초고를 읽고 너무 감동했다. 지하철에서 처음 초고를 읽었는데, 나는 너무 감동받아서 순간 ‘아름답다’고 혼자 되뇌었다. 그리고 인터뷰어 설렌에게 아주 감격적인 문자를 보냈다. 이게 함께 편집회의하면서 고생한 인터뷰어에 대한 동료애인지, 아니면 인터뷰 자체의 아름다움인진 잘 모르겠다. 이 인터뷰는 솔직히 내용이 훌륭한 인터뷰는 아니다. 누구나 예상가능한, 평균적으론 좋지만, 다소 뻔한 인터뷰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 인터뷰는 정말 영화적이다. 아주 잘 짜여진 한 편의 단편극 같다. 특히 김영섭 씨의 등장은 그야말로 이 인터뷰의 탁월함인데, 그 김영섭 씨의 어투조차도, 이게 인터뷰의 계산된 디자인이라는 전제로 보면, 아주 세밀하게 짜여져 있다. 마지막 질문은 너무 드라마틱해서, 나는 KT새노조 이해관 인터뷰에 그 문구를 꼭 그대로 쓰고 싶었다. 하지만 동료 편집인(슬로우뉴스는 16명 모두가 편집인이자 필자다)인 써머즈의 냉정하기 짝이 없는 지적 때문에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김순자를 인터뷰한 설렌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은 이렇다. “가장 두려운 것은 무엇인가?” 이 식상하기 짝이 없는 질문이 이토록 깊은 울림을 주는 글을 나는 아직까지 접해 본 적 없다.



블로거와 노래방

2012/05/05 04:34
1. 내 친애하는 블로거 벗들, 참 노래방 싫어한다. 8년 동안 우정을 나눴다. 온라인이 생활이고, 오프라인 회의와 번개가 소풍인 그런 나날들. 그런데도 소풍에서 노래 한번 부르지 못했다니!! 누가 블로거들은 노래방을 싫어한다는 가설을 실험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내가 노래방 가자고 하면, "됐거든요!" 대개 이런 반응이다. 올해엔 꼭 한번 블로거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고 싶다. 

2. 나는 나이를 밝히는 걸 아주 싫어한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한 서른 넘어서부터 그랬던 것 같다.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누구나 흔히 이야기하는 그런 이유, 쪽팔려서 그런다. 나이값 못하니까. 그건 대단한 원칙도 아니고, 무슨 고귀한 가치를 위해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무슨 신비로운 드라마가 숨겨져 있지도 않다. 그냥 쪽팔려서다. 그 쪽팔림에 대한 자기 방어 심리가 때론 소중한 벗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니 나도 마음이 아프다. 물론 좀 서운하기도 하다. 세상이 참 마음 같지 않다.

3. 슬로우뉴스에 하루 12시간은 쓰는 것 같다. 정말 시간이 미친듯이 빨리 흘러간다. 야동 본지도 오래다(!). 최근에 허프 분석을 번역 요약한 글을 읽었는데, 그 글에 '포르노를 포워딩하는 건 전혀 쿨해보이지 않아.' 뭐 이런 소리가 나온다. 상관없는 맥락이지만, 난 포르노를 좋아하는 쿨한 사람이 되고 싶다. 각설하고, 정말 좋은 글이 많아서 뿌듯하다. 최고나 최대의 저널리즘을 꿈꾸지는 않지만, 누군가에겐 너무도 소중한, 꼭 필요한 저널리즘은 욕심내고 있다. 그런데 늘 이야기하는 것처럼 웹에 자리한 모든 의미의 거푸집 가운데 그 뿌리, 정말 정말 중요한 실뿌리들은 블로그에 존재한다. 앞으론 슬로우뉴스 때문에 블로그를 소홀히 하는 일이 없어야겠다. 물론 나는 앞으론 여기, 민노씨.네라는 작은 내 온라인 실존의 집에 '긴 글'을 쓰지는 않을 것 같지만... 드디어(이제야?) 하루 평균 방문객이 천 이하로 떨어지기도 하는데, 긴 글 때문에 고생했던 모든 독자들, 벗들에게 감사드린다.

5. 때론 아이처럼 펑펑 울고 싶다.



어떤 오버랩: 한명숙의 "사최"

2012/04/21 00:40

민주통합당의 오타

민주통합당(이하 ‘민주당’) 페이스북 펜페이지에 있는 한명숙 대표 사퇴 동영상. 그런데 제목이 이상하다. 사최? 한눈에 봐도 오타다. 자판 ‘ㅌ’ 대신 ‘ㅊ’를 누른거겠지. 누군가 ‘오타는 당대에 발견되지 않는다’고 쉽게 발견되지 않는 오타의 오묘한 세계를 재치 있게 이야기한 바 있다. 한명숙 사최는 그런 ‘오묘한’ 세계에 있지도 않다. 그냥 성의가 없다. 그 뿐이다. 그게 민주당 소속의 페이스북 관리자인지, 아니면 민주당에서 외부에 용역을 맡긴 업체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사소하다면 사소한 오타 하나에 지난 4.11 총선에서 민주통합당이 실망스러운 모습, 특히 꼼꼼하지 못한 대충 대충의 느낌이 그야말로 오버랩 된다. 민주당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느낌은 ‘대충 대충’과 ‘도로 민주당’이란 이미지다. 체계도 없고, 시스템도 없으며, 따라서 미래를 전망하는 정치 프로그램도 당연히 없다. 그냥 대충 대충 항상 도로 그 자리의 느낌이랄까? 그런데도 국민들은 새누리와 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선택지 사이를 그야말로 무던하게 시이소오 타기 할 뿐이다. 참 그야말로 지겹게도 무던하다. 지난 총선 민주당의 패배 원인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 궁금한 독자들은 한사(coldera)의 역작, ‘기마병 정치의 종말: 19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보여준 민주통합당의 한계(슬로우뉴스)를 읽는 것도 좋겠다. 몇 가지 부분에선 이견이 있으나 빼어난 통찰들이다.



종종 즐겨 인용하는 황지우의 지적.
범죄자의 진실, 범죄자가 거짓을 숨기기 위해 드러내는 진실. 이 기억에 의해 조금씩 변형되어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는 시의 단편을 떠올리면 조선일보가 연상된다. 조선일보가 진실을 기만하고, 거짓을 유포하며, 탐욕을 추구하는 방식은 때론 아주 훌륭할 만큼 객관적인 형태로 드러나서, 그건 마치 거짓을 숨기기 위해 드러내는 언어의 연금술과도 같다.

그리고 슬로우뉴스에 캡콜드가 올린 이 글을 거듭 읽으면서, 나는 양치기 소년에게도 진심은 있을까, 떠올린다. 그건 마치 조선일보의 이란성 쌍둥이 같은 모습이다. 거듭되는 실망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양치기 소년에게 진심이 있다고 믿고 싶다. 그래, 니 맘 안다... 그래, 그래. 하지만 그 진심이 거짓과 기만으로 직조된, 그래서 도저히 구원할 수 없는 진실이라면, 그리고 그 진심이 스스로에게 너무 커서 거짓과 진실도 구별할 수 없는 장님의 맹신이 되었다면, 그 때, 그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양치기 소년에게 거짓말의 용기(!)를 불어넣는 건 외로움일까, 아니면 그저 그 자체의 욕망일까.